2019년 12월 29일 일요일

타인에 대한 증오를 다스리는 방법

타인에 대한 증오와 분노는,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점점 늘어가는 듯 하다.

정치인과 정치권에 대한 분노들,
층간 소음과 같은 이웃에 대한 분노들,
토론이 논쟁으로 번지고 급기야는 마음까지 상해서 생기는 분노,
인터넷의 익명성 뒤에 숨어서 무차별한 악성 댓글을 남기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

나이가 들면 그러려니 이해도 하고 좀 쉽게쉽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했더니,
아직은 그러질 못한다.
곰곰 생각해보니, 나이만 먹는다고 자연스레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었던 듯 하다.
고민하고 아파하고, 반복되는 어리석음을 벗어나기 위해 지혜로운 해결책을 스스로 만들어야만 조금씩 천천히 나아질 뿐이고, 그나마도 끊임 없이 자신을 다스려야만 가능한게 아닐까?


친구들 가운데, 유난히 나와 툭탁거리고 삐꺽대는 친구가 있다.
정말 둘이서만은 만나고 싶지도 않고, 함께 모이는 친구들 때문에 참고 있을 뿐이고, 그러고도 만나면 마찰이 생기는 경우도 많았다.
오랫동안 생각해보니, 이 친구가 나는 비슷한 면이 많았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친구의 행동이나 생각따위에서 나와 닮은 부분이 보일때면, 내가 종종 흥분하고 공격적으로 대했던게 아닌가 싶다.
어쩌면 그 친구도 내게 그랬을지 모르는 일이고, 혹은 나의 공격적 반응때문에 악감정이 쌓여서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 친구의 행동이나 생각이 나와 닮았다고 생각해서 흥분하는 건 아니다.
단지 그 순간에는, 그 친구의 말이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어 그랬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친구의 그 행동이나 말은 결국 나의 행동이나 말과 어딘지 닮아 있었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어두운 생각, 피하고 싶은 행동 따위는, 내가 싫어하는 나의 반쪽인 하이드씨였던 셈이다.
그리고 내가 아닌 친구에게서 나의 하이드씨를 보게되면 분노했던 것일지도...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내가 그 친구에게서 나의 하이드씨 단면을 보고, 거기에 분노할 수록, 나 자신이 나의 하이드씨를 증오하게 되는 것이었다.
밖에서는 지킬박사의 모습을 하고 점잖은 체 하지만, 떼어낼 수 없는 하이드씨는 언제나 내 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나는 그 반쪽을 더욱 더 증오하게 되었다.
결국은 지킬박사이면서 하이드씨인 나는 나 자신을 더 미워하게 되는 것이었고, 극심한 자기 혐오에 빠지거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완전히 분리시키기 위해 자아를 분열시켜야 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분노와 증오가 나의 어두운 반쪽에 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내 마음속에 세워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경계처럼, 나는 세상을 둘로 갈라 놓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하이드씨를 미워하는 마음처럼 세상의 반을 미워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나의 반을 증오하는 것이고, 그건 결국 자가 자신을 증오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은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다.

문득 분노가 꿈틀댈 때, 이 점을 다시 상기하고, 하이드씨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하면, 타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도 점차 사라지지 않을까?

2019년 12월 18일 수요일

재즈에 대한 자부심? 재즈부심?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이런 글을 쓴다는게 아이러니 하지만,
내가 경험했던, 겪었던 일들과의 유사한 면이 있어서 끄적여 본다.

재즈 음악이 묘한 마력과 같은 면이 있지만, 결코 쉽지 않고(듣고 즐기고 감상하기에도 그렇다는 뜻), 썩 편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으니 한번씩 생각나고, 젖어들고 싶기도 하곤 한다.

순전히 외부인으로써 재즈 뮤지션들을 보면, 타 쟝르에 비해 범접하기 어려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물씬 물씬 받곤 한다.
재즈야말로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연주하고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여러 쟝르를 섭렵하고 끝내 안착하게 되는 궁극의 쟝르라는...식의

그런데도 세상의 음악 중에 재즈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 크지 않다.
전문가들의 영역과 일반 대중의 영역을 나눈다면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어딘지 자기만의 깊은 심연에 빠져 있는 듯이 보인달까?


꽤 오랫동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길을 걸어왔는데, 이 직종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OS(운영체제)에서 kernel(커널)이라는 핵심부, 통신과 관련된 소프트웨어에서는 프로토콜(통신규약)과 관련된 부분 등이 그러하다.
매우 핵심적인 부분이며, 어렵고, 전문적이다.
실제로 그런 부분의 인력은 구하기도 힘들고, 페이도 높은 편이다.(단, 실력이 따라야만 한다)
그런데, 실제 상황을 보면 전체 개발 인력 가운데, 이런 핵심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1% 혹은 그 미만에 그친다.
다수의 인력이 달려들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해봐야 그 성과가 높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혼란이 심해서 역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사실은, 똘똘한 소수만으로 운영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며, 그나마도 이런 것을 담당하는 업체에서만 제한적으로 운영된다고 볼 수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의 마이크로 커널, 리눅스의 커널, 퀄컴의 CDMA/LTE 프로토콜 따위를 누가 개발하겠는가? 저 대기업내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만이 관여한다.
삼성이나 샤오미에서 안드로이드의 LTE 프로토콜을 직접 건드릴 일은 아주 드문 일이다.

이런 직무분야에서 근무하는 사람을 매우 부러워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냉정하게 말하자면, 매우 위태로운 직무분야이기도 하다.
1%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들어둔 보험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보험료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1%의 위험은 곧잘 무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SCV와 같은 일꾼 소리를 듣는 직무 분야도 있다.
UI(User Interface)/UX(User Experience)/HCI(Human Computing Interface) 분야다.
스맛폰에서 보이는 거의 모든 화면은 누군가 구상하고 직접 그려넣은 것이다.
작동 시나리오를 짜고, 조건을 검사해서 어떤 그림을 보여줄 지, 어떤 소리를 내 줄지 따위를 만드는 작업이다.
전체적인 시나리오, 타 직무와의 소통과 연계, 아웃소싱, 상품의 기획 등등과 연관된 복잡한 업무도 있지만, 일단 이런것들을 제외하고도 시간과 노력이 많이 요구되기에 평범한 능력을 가진 다수의 엔지니어를 투입해야 하는 직무다.
개개인이 자신의 빛을 발휘하거나 독보적 역량을 뽑낼 기회는 적지만, 언제나 필요로 하는 곳은 많으며, 해야 할 일도 많다.
소프트웨어 개발직에서의 노가다라 불리는 그런...
하지만, 매우 천대받는 이런 직무 분야는 반대로 안정적이다.
이들은 필요로 하는 곳이 많으며, 많은 사람이 투입될수록 기간이 단축되는 효과가 크기때문에 고용주의 입장에서도 비용 대비 효과가 뚜렷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서로 상반되는 빛과 어둠을 가진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물론 이 와중에 최악은 존재한다.
실력은 없지만 핵심 분야만을 고집하는 엔지니어.
주어진 일도 다 못하면서 자꾸 다른 분야만 넘보는 노가다 엔지니어.

2019년 12월 11일 수요일

진보/좌파에 대한 절망

대한민국에서 좌파라는 호칭은 상당히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
(따지고보면 좌파와 우파는 양팔 저울의 한쪽씩을 담당하는, 균형의 일원임에도 말이다.)

나에게 '당신은 좌파에 속합니까 우파에 속합니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좌파에 무게 중심이 쏠려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음에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고, 공교육을 받으며, 여러 매스미디어를 통해 얻은 나의 관념으로도, 좌파는 부정적인 단어일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정확한 정의나 세세한 구분, 분류 따위는 알지 못하지만, 편의상 좌파 대신 진보라는 단어를 쓰도록 하겠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으로 시작된 진보 진영의 대통력과 현재의 문재인 대통령을 보면서 그 동안 내가 가졌던 희망, 기대가 많이 무너지고 퇴색되었다.

많은 서민들과 노동자들, 약자와 빈곤층, 사회의 맨 바닥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하지만,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 최소한의 생계마저 위협을 받거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
나도 어설프게 그런 부류에 속할지는 모르겠으나, 엄격하게는 아니라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정말 개선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이루어진 것이 있는지, 그래서 나는 모르겠다.

단지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 보면, 진보 대통령들은 많이 부족하고, 미숙하고, 어설프며, 불편했다.
부동산 정책
대북 정책
대미/대일 외교 정책
청년 일자리 및 경제 정책
아마 위의 분야들에 대해서 각각을 일일이 따지지 않아도, 제대로 성과를 낸 것이 없으며, 지금까지는 그렇다 해도 앞으로 희망적인 부분이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공식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반박할 자료들을 얼마든지 내 보이겠지만 말이다.)

일부는 우리의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좌우되기도 하며, 단시간에 성과를 보기 어려워 장기적인 안목으로 진행해야 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그만 변수에도 삐걱대고 허둥대는 정부의 모습을 보면, 과연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인지, 플랜B는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많은 논란이 있는 정책에 대해서도, 강력한 리더쉽으로 정책을 끝까지 수행해서 이뤄낼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끊임 없이 국민들을 설득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만, 너무나 빈약하고 너무 근시안적이라 정부의 정책, 아니 그 이전에 정부의 의지마저 의심스럽다.

또한 진보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에는 유난히도 정치적 분쟁과 논란이 너무나 많고 소란스럽다.
어쩌면 진보라는 단어 자체가 내포하는 의미로, 기존의 것을 허물거나 고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야 하니, 당연히 기성 세력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고, 그 과정에 소란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또한 위의 문단에서처럼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당근과 채찍을 과감하게 사용해야만 이룰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재임하고 있는 현 상황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즌2를 보는 듯 기시감이 많이 든다.
앞서 언급한 정치적 분쟁과 논란, 부동산의 폭등과 규제, 대미 대일 외교의 마찰...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는 그것이 처음이라서 그러려니 했는데, 똑같은 문제점들이 반복되는 현 시점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더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그 모든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았을 인물이었을 텐데...


너무도 무력하게 무너져가는, 아무 손도 못쓰고 있는 진보 진영의 무력감을 나 또한 너무 아프게 지켜보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시절이라면, 대통령을 욕하고 비난하면 끝이었다.
그러면 설령 그게 그들의 책임이나 잘못이 아닐 지언정, 나의 스트레스는 많이 경감되었다.
그걸로도 위로가 되지 않으면 당시의 정부 여당을 욕하고, 보수 언론을 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걸로 안되었다.
그렇게 욕하고 비난한다고 내 스트레스가 줄어들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고 쓰리다.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적어도 진보 대통령들이 내세운 공약들은 정의롭고 바르며, 약자를 보호하고, 억울함이 없이 평등하고,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던가?


.......


진보/좌파는 슬로건이고 구호이며 문장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강력한 메시지를 최대한 짧고 간결한 문장에 담는 데 애썼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매혹되었다.

사실 그 문장들, 그 자체는 매우 정의롭고 또한 아릅답다.
그 안에 파라다이스가 있고 천국이 있고 지상낙원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매료되어 사람들이 모여 든다.

모여든 사람들의 힘으로 권력을 잡고 막상 자신들의 낙원을 만들려고 할 때,
여기 저기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지금 있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갈아 엎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
일부는 남기고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
낙원을 건설하는 데 모두가 동참해야 한다는 주장,
낙원을 건걸하는 데 모두가 동참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
천국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주장,
천국은 저러저러해야 한다는 주장,

하나의 슬로건이었지만 꿈꾸는 파라다이스는 제 각각이었거나,
혹은 대충은 같았어도 세분에서는 달랐다.
대략적인 계획은 있었으나 실제 현실에서 적용할 때 발생하는 문제들이 여기 저기서 튀어나왔다.


보수와 우파는 기득권이며, 기존의 체계이다.
이미 그들의 속성으로 만들어져 있는 사회와 시스템에서는 그들의 계획이 잘 맞아 돌아간다.

하지만 진보와 좌파는 소수파이며, 그들은 기존의 시스템과 잘 맞지 않는, 기존의 체계에서는 비표준품인 것이다.
그들의 작업은 맨 바닥부터 시작해야 할 경우도 있으며, 더디고,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 꼼꼼한 계획과 철저한 검토가 필요하다.

어쩌면 이건 진보의 문제나 좌파의 문제가 이니었던 것이다.
기득권에 대해 변화를 요구하는 모든 새로운 세력들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소수파이면서 개혁을 꿈꾼다면, 인재의 풀이 넉넉하지도 못할 터.
필수적으로 이런 개혁 세력의 리더는 월등한 안목과 재능을 가져야하며,
권력을 쥐었을 때, 개혁을 이끌어낼 인재를 다수파로부터 영입하는 능력(카리스마와 유연함)까지 갖추지 않으면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리더는 역사에 나올 지도자 정도일 테고...



아쉽지만, 이제는 진보와 좌파에 대한 지지를 끝내야 할 듯 하다.
이제는 더 이상, 이름다운 구호와 슬로건에 속지 않을 것이다.

5년 단임제의 대통령이 현실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개혁은 매우 일부에 국한된 개혁일 수 밖에 없다.
조금 더 욕시을 낸다 해도, 일부에 국한된 개혁이 큰 불씨가 될 수 있는 그런 개혁인 경우, 혹은 당장은 효과가 없으나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개혁 정도가 최선이 아닐까 싶다.

이제 더 이상은 허황된 미사여구와 감언이설에 속지 않고, 계산기와 삼각자로 측정해 보고나서 판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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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조만간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을 예정이다.
벌써 여당과 야당의 선거전쟁은 시작되었다.
프레임 씌우기, 흠집내기, 세 부풀리기, 이합집산, 합종연횡....
내가 아무리 계산하고 측정하고 저울질을 꼼꼼이 한다해도, 내 선택은 결국 지역구의 후보 중 하나를 찍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보들은 모두 미명이고 흐리멍텅하고 유야무야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 할 것이다.
그래야 넓은 지지를 받을 것이고, 그래야 당선이 될 테니까.
내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판단하겠다고 생각했어도, 양팔 저울이 한쪽으로 뚜렷하게 기울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다.
진보/좌파가 속이 빈 강정처럼, 듣기 좋은 말로만 치장하고, 정작 이루어 내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보수/우파는 정의와 평등과 도덕과 양심 이런 가치를 아얘 포기해버린 듯이 행동하지 않는가?
눈앞의 이익과 실적만을 중시하여 장기적인 안목과 영구한 가치를 내버린 것 또한 비난 받아 마땅하지 않을 것인가.
능력이 부족해서 될지는 모르겠지만 성실하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하는 학생과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1등(합격)하겠습니다 하는 무서운 학생 중에 과연 어떤 학생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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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2일 금요일

노력과 성과에 관해서

과연 우리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얼마나 되는 걸까?

집에서 커피를 직접 볶아서 마시곤 하는데,
처음엔 도통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방법이야 인터넷에 널리고 널렸으니 적절한 시간과 성의을 가진다면 "문장으로 이루어진 방법"은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커피라는 건, 결국은 맛과 향으로 결정되는 것인데
아직까지 인터넷이 맛과 향을 그대로 전달해 줄 수는 없기에, 이 부분들이 매우 모호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여러가지 조리방법 중에, 색의 변화, 향기의 변화, 질감의 변화, 맛의 변화에 따라 판단이 필요한 것들은 말이나 문자로 전달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실습이 필요한 것이고, 스승이 필요한 것이고, 도제가 필요한 것이고, 무형문화재가 필요한 것이다.

이젠 2년 정도 커피를 볶아보니 대략적인 감은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커피는 내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 볶아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는 맛과 향기의 특성이 존재하더란 것이다.
물론 로스팅을 망쳐버리면 좋은 맛과 향기를 모두 잃을 수도 있기에 나쁘게 바꾸는 것에는 한계가 없는 셈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한계가 나름 명확하다.
그 커피가 원래 가지고 있지 않은 맛과 향기를 나게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더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자 한다면, 더 좋은 커피 생두를 찾아야지, 똑같은 커피 생두에 노력을 더한다고 갑자기 맛이 좋아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또, 그 커피 생두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경우에도, 그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마련이다.
그게 그 커피 생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일 수도 있고, 외부적인 요인이 될 수도 있는데, 노력으로 개선된 장점을 우습게 잡아먹어 버리는 월등한 단점이 부각되는 경우이다.
커피의 경우에는 진한 커피를 위해서 많이 볶으면 향미를 잃고, 향미를 살리기 위해 살짝 볶으면 커피가 가벼워지거나 덜 익은 떫은 맛이 나기 쉽기고 하다.

이처럼 어떤 일의 성과를 내기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노력이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과, 노력해도 성과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모르니 그냥 포기해버리는 차이를 만드는 정도일 지도 모르겠다.

2019년 11월 21일 목요일

공수처(고위 공직자 범죄 수사처)를 두고 벌이는 싸움 (feat. 어벤저스 시빌워)

어제인가, 자유한국당의 황교안 대표가 단식투쟁을 선언했다.
단식 투쟁을 벌이며 정부에 요구하는 사항은 3가지라고 한다.
1. 지소미아 종료시한 전에 연장 요구
2. 공수처법 추진 철폐
3. 선거법 패스트 트랙 상정 철회
https://news.joins.com/article/23637605

1번의 지소미아 연장에 관한 문제는 한미일의 3국간의 외교적인 협상 카드로서 활용하는 것이기에, 그 문제 하나만을 떼어놓고 옳다 그르다 하기엔 어려운 문제다.
당장에 한미 양국의 방위비 협상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는 상황이고, 여기에 어떤 식으로든 지소미아 관련 문제도 함께 논의 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나머지 2번과 3번의 경우에는 국민들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
선거법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관련되어 있고, 공수처법은 고위 공직자들에 국한된 부분이니 국민들과는 더더욱 관련이 없는 사안이 아닌가.

아무튼, 저 단식투쟁에 관해 얘기하려는게 아니고, 공수처법이라는 것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아직은 공수처법에 대해 별 관심도 없어서 이리 되건 저리 되건 내 알바 아니라 생각했는데, 대체 뭐길래 단식까지 하면서 저걸 막고 있는지 참 알쏭달쏭하다.
뭔가 내막이 있는걸까?

마블의 영화들 중, 시빌워라는 작품이 있었다.
이게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인지, 어벤저스 시빌워인지 모르겠다.
사실 난 마블 만화에 별 관심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 시빌워의 영화는 안 봤어도 만화는 봤더랬다.
어벤저스의 히어로들이 양편으로 갈라지는 과정, 그 분열과 팽팽한 정당성 시비, 과연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비슷한 영화, 아니 만화로 왓치맨이 있다.
앨런 무어의 왓치맨.
자경단원들의 고뇌와 딜레마들.
왓치맨은 누가 감시하는가? 라는 조롱의 낙서는 또 다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오지맨디아스와 닥터 맨해튼 중 누가 옳은가, 닥터 맨해튼과 로르샤흐(로어세크) 중 누가 옳은가는 끝나지 않을 논쟁거리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왓치맨의 딜레마를 마블에서 가져다 쓴 것이 시빌워가 아닐까 싶다.)

아직 잘은 모르지만, 이 공수처법이라는 걸 두고 싸우는 여야, 혹은 국회와 정부, 검찰과 국회의 대립이 어딘지 모르게 왓치맨과 시빌워의 대립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수 도 있다.
만약 대의적 명분에서 공수처법이 압도적인 우의를 점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면 이 문제는 영국의 경제학자인 하이에크과 케인즈의 대립과 비슷해 진다.
거시적인 관점과 원칙적인 관점에서는 하이에크가, 실용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대안에서는 케인즈가 우월했다는 식의 대립 말이다.


어떤 식의 대립인지는 좀 더 살펴봐야 할테지만, 양쪽 모두 여론의 힘을 얻어서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기는 어려우므로, 명분으로 정당성을 얻거나, 실제 현실에서의 적용에 대한 효용성 혹은 부작용으로 이해득실을 따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19년 10월 15일 화요일

반려동물에 대한 모순된 감정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키우는 가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할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개를 무척 좋아하는데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소위 반려견으로 인한 문제의 해결사로 방송에 자주 출연을 했던 이x종 소장이라는 분은, 문제 행동의 반려견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주어 행동을 자제하도록 훈련을 하는 방식을 주로 취했었다. 이 과정에서 쇠로 된 목줄을 강하게 다루어서 때때로 잔인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서 강x욱 이라는 분은 반려견의 문제 행동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걸 파악해서 원인을 제거하자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전자의 방법은, 반려견을 훈련시켜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조(?)시키는 것이었고, 후자의 방법은, 견주의 행동 양식이나 환경을 반려견에 적합하도록 바꾸는 것이었다.

후자의 방법은 어찌보면 주객이 전도된 듯이 보일 수도 있으며, 시간이나 비용이 더 많이 들 수 있지만, 여러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 방법이 반려견에게 더 좋은 방법이고, 반려견이 더 행복해지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쯤 되면, 후자를 택한 강x욱이나 그걸 호응하는 반려견주들이 매우 인정이 넘치고, 동물을 사랑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건 혹시나 견주들의 이기적인 목적에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그 이기적 목적이란 것은, 반려견의 행복한 모습, 즐거워하는 모습, 그래서 견주를 따르고 견주를 사랑하도록 하려는 목적이며, 그것도 반려견 스스로의 의지로 그러기를 바라는...


대체 이게 무슨 황당한 말이냐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약간 빗나간 듯이 보일수도 있으나, 적절한 예가 있다.
일본의 영화 가운데 완전한 사육이라는 영화가 있다.
대략의 줄거리는, 어떤 남성이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젊은 여성을 납치해서 자신의 집에 감금하고 때에 맞춰 식사를 주며 함께 사는 것이다.
그 영화를 제대로 다 봤는지 어쨌는지 결론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남성의 마음이 견주들의 마음과 어딘지 많이 닮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좋아하지만, 나만을 위해 항상 곁에 있어주지는 않을 여성을,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놓아 자신을 좋아하도록 만들려는...
아마도 그 남성의 최종 목적은, 그 여성이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해 주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마음이 생길 때까지만 강제로 구속하고 감금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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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애호가들이나 유기견을 구조하고 보살피는 분들의 마음은 다르리라 생각한다.
이런 분들은 동정심, 자비,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민 등이 먼저일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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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일반적인 애견인들 중 다수는, 내 반려견이 나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것, 나와 함께 있어 즐겁고 기뻐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듯 하다.
그런 마음의 기저에는, 자기의 행복을 타인(반려견)을 통해서 채우려는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스스로 기뻐하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을 찾지 못해서, 자신의 외부에서 찾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이것 또한 자신의 행복을 위한 고도의, 그리고 겉보기에는 꽤 점잖아 보이는, 하나의 전략에 지나지 않지 않겠는가?

견주들이 자신도 이런 부류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반려견이 견주를 신뢰하지 못하고,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반항적인 모습을 보일 때 어떤 마음이 생기는지를 확인함으로써 가능하다.
일종의 배신감, 미움, 화, 슬픔 등이 생긴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견주들은 반려견을 은연중에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실 이 얘기의 주인공은 나다. 그리고 대부분 내 경험과 내 마음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그리고 지금 그것들을 반성하는 것은 아니다. 반성한다고 없어지지 않을 걸 안다. 단지, 내 마음이 불편해질 때, 왜 그런지 알면 조금은 마음 다스리기가 쉬워진다. 오랫동안 지내던 반려견이 얼마전에 죽었다. 아마 그 때의 슬픔도 어쩌면 같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즐겁게 해 줄 댕댕이가 없구나 하는 이기적 마음일지도 모른다.)

2019년 8월 20일 화요일

도덕성의 한계인가, 도덕성의 진화인가

최근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오르면서,
국회에서는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서의 조국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논란이 나오고 있다.
사모펀드에 거액을 투자한 것이나 친인척과의 의심스러운 채권 채무 관계도 그렇지만, 딸에 대한 여러 특혜 정황은 더욱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에 여당도 꽤 당혹해 하는 눈치이고, 언론들도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보수 언론들이야 이때다 싶어 공격 수위를 한층 끌어 올리고 있는 중이고,
확인할 수 없는 "민심"이나 "여론"이라는 좋은 칼을 꺼내어 휘두르고 있다.

애초에 신문을 잘 보지는 않지만, 우연히 읽게된 모 신문의 사설은...
https://news.joins.com/article/23557497?cloc=joongang|home|opinion

글쎄,
이 사설로도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 대략 알 수 있는데,
꽤 자극적이고 공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누구 하나의 잘못을 그 세대 혹은 그 지역 혹은 그 성별 등으로 무차별 확대해서 싸잡아 비난하려는 의도가 보여 더 씁쓸하다.
저 사설에서 언급한 "영미권의 베이비 부머인척 하는 그룹"의 사례가 얼마나 일반화된 것인지, 그리고 또 우리와의 공통점을 이을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논설위원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많은 사례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건, 그만큼 자기 확신이 부족하거나 자기의 주장에 자신감이 떨어진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사건들과 그 기사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우울감은 조금은 달랐다.

소위 도덕적으로 청렴하다고 자칭하던 세력들이 정권을 잡았으나, 까고 보니 그들이 비난하던 대상들과 전혀 다를바가 없는 동류였다...는 이 상황.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이 벌인 일련의 정책이라는 것이 적폐 청산이 주된 것이었고, 경제는 조금 뒷걸음질 쳐도 올바른 나라를 세울 것이라 믿고 있었던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누가 누구를 청산할 수 있는지마저 의심스러워 진 것이다.

내가 느낀 우울감은, 결국 인간이 주창하는 도덕과 실천할 수 있는 도덕의 수준은 다르며, 조국 전 민정수석이 보여준 것이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도덕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물론 조국씨의 도덕 수준이 인간의 한계 수준이라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한계가 아닌가 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희망적인 생각도 들었다.

앞서의 사설에서와 유사하게 소위 386세대의 문제로 한정을 짓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
과거에는 생각 자체도 부도덕하고 그걸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발전되어 가면서 많은 부분에서 옳음과 그름에 대한 논의와 비판이 퍼져갔다.
소위 386세대들은 이런 시대적인 변화의 과도기적 상태를 대표하고 있으며, 그래서 의식적인 부분에서는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도덕적이라 생각하지만 실제 행동과 실천은 그 의식을 따르지 못하는 세대일지 모른다.

따라서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더 성숙한 사회가 되고, 시민들의 의식 수준과 행동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시점이 온다면 우리의 도덕성은 진정한 발전을 이루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2019년 8월 18일 일요일

[영화] 스토커(Stalker) 1979,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Stalker, IMDB



어쩌다 이 영화를 만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왜 이 영화를 다운로드 받았던건지, 나중에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받아둔 채로 몇달이 지난 후에 보게 되었다.

이 영화에 대해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궁금해서 IMDB를 찾아 보고, 평점도 나중에야 보게되었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는 감독에 대해서도 찾아보고, 그 명성도 후에야 알게 되었다.
시간이 꽤나 지나서인지, 일부에선 비판적인 시각도 보일 정도...

느낌은 축축한 영화.
온통 그레이의 낮게 깔린 음습함.
뭔지 모를 상징의 범람.
모르는 것 투성이의 혼란함으로 시작해서 차츰 조금씩 뭔지 배경을 어렴풋이 알 즈음에 그냥 끝나버린 영화. 그래서 끝나고도 남는 혼란스러움과 무거움.
양 옆으로 뭔가가 나를 옥죄어 오는 듯한 화면들. 그래서 보는 내내 어떤 답답함.
(영화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이 영화에서 보이는 자주 보이는 장면은, 화면 안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장면들, 문 하나를 지나 그 뒤의 공간, 세 남자가 만나는 바의 장면이 그렇고,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곳에 도착하기 직전의 하얀 방 = 전화기가 울리는 방이 그렇고...)


연극을 보진 않았지만, 어딘지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싶고


원작을 읽어 봐야 영화의 의미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9년 8월 13일 화요일

Before Trump & After Trump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BC, Before Chist), 기원후 (AD, Anno Domini)를 나누어 사용해 왔다.
언제, 누구에 의해 이런 표기를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예수의 존재가 인류에게 (특히 서양에서) 그 의미가 크기 때문에 오랜 기간동안 사용되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세계의 정세를 보고 있노라면, 예전에 극심했다던 냉전시대가 이 정도였을까 싶게 너무도 야만적(?)인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현상을 어느 누구 한사람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너무 무책임하고 지나치게 단순화된 판단이라 생각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미국의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를 이 논의에서 뺄 수는 없을 것이다.

미중간의 무역전쟁, 미국의 이민 제한 정책, 동맹국에 대한 이익 우선 정책 등을 보노라면, 어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질 정도이다.
하지만 이런 막무가내식 이익 탐식의 경향이 단순히 트럼프의 개인적 성향때문이라 생각한다면 그 또한 대단한 착각이 아니겠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트럼의 그런 행보는 다분히 미국 국민의 바람을 반영했다고 봐야 할 것이며, 중국이나 일본의 지도자들이 별로 다르지 않은 자국의 이익 추구 또한 비슷한 경향으로 봐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경향은 아주 서서히 증가해 왔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그 세력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섰을 때에도 인간의로써의 미덕을 지킴으로써 유지되어 왔던 문명화된 세계로서의 질서는, 어느 한 순간에 탄성한계를 넘어선 듯이 폭발해 버린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 기폭제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미국의 대통령으로 상징되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라는 위엄이나 자제력은 찾아보기 어렵고, 자본주의에 완전히 절여져 물질만능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듯이 보이는 지도자.
트럼프의 행동은 그동안 문명화된 인간들이 자기 안에 숨겨왔던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 부끄러움 따위는 없고, 타인의 비난이나 충고따위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방식이 아주 자연스럽게 보인다.

과거의 친구나 의리나 신의도 없다.
물고 물리는 야생의 속성만이 남았다.
강한 놈이 모든 걸 가지며, 약한 자는 나름의 생존 방식을 모색해야만 한다.


이제 세월이 얼마나 지나면 인류가 깨달을 지 모르겠지만,
예수 탄생 2000년이 조금 지난 즈음에 세상은 크나 큰 변화를 맞아하게 되었으며,
이 시기를 기준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듯 하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그 시기를 기준으로 BT와 AT, 즉 Before Trump와 After Trump로 부를지 모르겠다.

2019년 7월 9일 화요일

인류는 진화할 수 있을까

찰스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의 의미와는 다른 진화가 가능할까?

전쟁을 종식하고 영구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인종간 차별, 성(性) 차별, 국가와 민족간의 차별, 종교에 따른 차별, 능력과 장애에 따른 차별을 없애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있으며,
우리와 저들, 나와 너의 벽을 무너뜨리고 모두가 자기인 듯, 모두가 타인인 듯 살 수 있으며,
자연과 생명, 그 모두를 품은 지구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소박한것에 만족하며 일원으로써의 소임에 충실하게 살 수 있을까?

찰스 다윈의 진화론의 핵심은 "다양성의 확대를 통한 환경에의 적응"이라는, 다분히 생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의 확대를 위해서, 인간은 최대한 나와는 다른 상대를 찾아 짝짓기를 시도하려는 성향이 있으며, 또 최대한 다양한 상대와 짝짓기를 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놀랍게도 이 욕구는 대부분의 인간 사회의 제도에서 금기시 되고 있다!!)

이렇듯, 자연에서 진행되고 있는 찰스 다윈적 진화와 인간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을 향한 진화는 아주 다른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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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에 들어서면서 (혹은 6월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아베 총리는 한국에 대한 수출품목 규제를 선언했다.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생산되고 있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핵심으로 사용되는 필수품이라 타격이 적지 않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으며, 정부는 애써 침착한 듯이 행동하고 있지만, 각종 뉴스에서는 충격적, 당황, 긴장, 비난의 표정들이 보이고 있다.
소식을 접한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감정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고,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은 "보복"들을 꾸미고 있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셈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예견되었다는 식의 보도를 하고 있는데, 지난 수년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인공섬의 강제 징용 노동 문제 -영화 군함도로 제작- 등으로 국내에서 일본에 대한 반감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던 중,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갑자기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꺼내더니,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치유 재단을 설립하여 일본에서 기금을 납부하기로 했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들 중 다수가 자신들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한일 정부가 임의로 처리한 것이라며 반발했다.
이 기사를 들었을 당시에도 나는 매우 분노했는데, 몇년동안 정의와 진실을 앞세워서 일본을 비난하던 정부가 하루 아침에 돌변해서 일본과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아도 한참을 속았구나, 정부가 국민들을 꼭두각시처럼 뒤에서 조종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뜬금없고 국민 정서와는 동떨어진 정책이, 오히려 일본과의 관계를 더 돌이키기 어려운 수렁으로 빠뜨렸고 어쩌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도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 (국민들의 신뢰를 져버린 하나의 실정이었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에 들아와서는 온갖 적폐를 청산한다는 작업들이 진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일본 강제 징용 노동자들에 대한 배상 여부를 가르는 재판이 박근혜 정부 당시에 대법원에서 진행되었는데, 여기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통해 부당하게 재판에 개입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까지 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사법부의 개혁을 정당화시키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이 사태로 말미암아 결국은 강제 징용 노동자에 대한 배상이 정당하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졌고, 해당 기업들이 자진 배상하지 않아 국내에 출자한 법인의 자산을 강제로 매각까지 종용하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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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얼마나 비이성적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은 바로 이 시점이다.
과연 일본이 왜 분노의 극약 처방을 했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거기에 감정적인 대응을 하는 것이 이후에 얼마나 부끄러워할 행동인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30년 넘도록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땅 노래 가사를 외우고 있으니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말하는 게 과연 얼마나 정당한가?

누군가 너를 좃같이 대하거든, 좃같이 대할 이유를 만들어 줘라.
짐승에겐 몽둥이가 약이다.
이런 말이 분노한 대중에게는 속시원한 속풀이는 될 수 있지만, 그게 진짜 행동으로 표출되는 순간에 우리는 그런 좃같은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인간을 짐승처럼 패는 무뢰배 같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지킬 건 지키고 배워서 아는 건 행동으로 옮기고, 설령 마지막 순간이라고 해도 밑바닥 본능은 드러내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위에 개인적으로 일본인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조금은 이해가 쉬울텐데, 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까?
아베가 좃같이 행동한다고 해서, 그 친분있는 사람이 좃같이 변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아베가 좃같이 행동한다고해서, 수십년 친분이 있던 사람을 아베로 여기고 분노를 표출하는 그 사람이 진정 좃같은 사람 아니겠는가.

아마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어떤 식으로 해결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상처는 깊이 남을테고, 그 트라우마도 오래 갈테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헤쳐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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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단에서 우리가 비 이성적이라고 했던 건 사실 나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다.
왜냐하면 나도 분노했으니까.
하지만 몰랐다.
왜 아베가 그런 좃같은 짓을 저질렀는지.
그들의 입장에선 뭐가 억울하고 답답했는지.

그리고 솔직히 헷갈렸다.
매번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 맺었던 한일 청구권 협정이 어쩌구 하는데, 그에 대해서는 무슨 어두운 기억 마냥 누구하나 제대로 설명해 주지도 않고 있는지.
느낌으로는 대충,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게 지난 2차 대전 당시의 침탈에 대한 배상으로 얼마를 받고 모든 문제에 대해 퉁치기로 했나보다...정도였다.

그런데 자꾸 위안부 문제 꺼내면서 여기 저기에 소녀상 세우고, 거기에 강제 징용 노동 배상하라고 하면서 민간 기업의 자산까지 압류하려고 하니까 욱 했던 거 아닌가...
그럼 왜 판결은 그랗게 난 걸까?

강제 징용 노동의 문제 자체가 한일 청구권 협정 당시에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문제라, 당시의 협정에는 포함되지 않았기에 새로이 판결을 내린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이라는 게 대체 어느 정도까지의 범위를 가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논란이 많을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에상이 가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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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대립과 분열
국가와 민족간의 분쟁과 반목
비 이성적인 감정의 분출과 소모

맨 처음에 언급했던, 인간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과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조금이라도 달라진 점이 있을까?
어쩌면...있을지도 모르겠다.

찰스 다윈적 진화는 다양성의 확대이고, 이 다양성은 서로 다른 개체간의 짝짓기에 의해 발현되며, DNA를 통해 세대간에 전파가 됨으로써 유지된다.
찰스 다윈적 진화는 시간이 지날 수록 인류를 더 다양하게 만들 것이므로 개체들간의 이질감은 더 커질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분열이다. 엔트로피의 상승이고 자유도의 폭발이다.
대립과 분열, 나누고 떨어지고 구분한다.
지금의 세계도 그렇다. 소비에트 연방이 분화되었고, 다민족 국가에서의 독립 요구는 더 커진다.

하지만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를 위한 인간의 진화는 오히려 그 반대다.
찰스 다윈적 진화를 거스르는 방향이다.
시간이 지날 수록 더 어려워지는 일이다.
더욱더 이를 힘들게 많드는 결정적인 요인은, 세대간 전파가 안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꿈꾸는 세계는 개별 인간들이 꿈꾸는 세계의 총합이고, 개별 인간들이 꿈꾸는 세계는 각자의 노력과 고민 숙고의 결과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 새로 태어난 개체는 처음부터 이 과정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다람쥐 챗바퀴 돌 듯, 모든 개체들이 동일한 노력을 하지만, 나아지는 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나마 이 노력을 조금은 쉽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건 "교육"이다.
아마도 수십세대 이상은 "무엇"을 교육하는 가에 대해 고민할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다.
교육의 효율성, 그래서 세대를 거쳐감에 따라 더 효율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방법.
첫번째 세대간의 교육이 1의 효율을 가졌다면, 두번째 세대간의 교육에는 1.1의 효율이 나타날 수 있는 방법이 나와야 한다.
이제는 교육의 효율이 발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나타나야 하고, 이건 교육 방법의 메타, 혹은 교육 방법론 자체를 발전시킬 프레임에 대한 고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그 때에는 인간이 꿈꾸는 방식의 진화가 언제쯤 실현될 지 예측이라도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아마도 우리는 지금 "무엇"을 교육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수준이지만, 그 "무엇" 조차도 아주 근시안적으로 선택되었다는 걸 감안하다면...)

2019년 6월 28일 금요일

긍정의 뇌 - 순한 맛

긍정의 뇌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어딘가에 독후감이나 요약을 기록했을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어딘지 저 책의 저자가 직면한 상황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저자는 뇌출혈이 일어난 당시와 그 후의 일들을 나름대로 세세히 묘사했다.
그리고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맞아하게 되는 특이한 경험들을 매우 매력적으로 묘사했는데, 자기와 타인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저하되면서 타인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체험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지력이 상실되면서 새롭게 보이는 주변의 세상들이 있었던 듯 했다.
물론 말을 하거나 글을 읽거나 자신의 몸을 생각대로 움직이는 능력도 같이 저하되면서 겪게되는 어려움도 함께 묘사했었다.

그게 사실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저자는 마지막에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수술을 하게 되면 예전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게 되면 새롭게 겪었던 경험을 다시는 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딜레마였던 것 같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좀 어이없는 고민이지만, 겪어 보지 않고서야...


꽤 오랜시간 동안에 걸쳐, 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매우 크다고 느꼈다.
큰 변화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났기에, 변화를 깨달은 건 시간이 많이 지난 후였다.
그 변화란 것은,
- 거의 모든 일에 대한 욕구가 현저하게 감소했다는 것.
- 매사가 귀찮아져서 어지간하면 자꾸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끝내게 된다.
- 과거의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는데, 지금까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일들도 많다.
- 그리고 그 일들에 대한 원인과 후회가 더 크고 명확하게 보인다.
- 두려움이 많아졌다.
- 그 두려움은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많았다.
- 그리고 그런 두려움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데 많은 장애가 된다.
- 이런 두려움은 타인을 나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더 켜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나에 대해서 더 객관적이 되었다. 자존심은 줄어들고 고집도 약해지고 화도 덜 낸다.
- 애초에 인생이나 삶에 대해 애착이 크지 않았었기에, 이런 변화가 더해져서 아주 쉽게 놓아버릴 수 있는 준비가 된 거 같다.


그래도 산 입이라 풀칠은 해야 하니 걱정이 생기긴 한다.
과연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다고 굶어서 죽을 수 있을까.
죽지도 못하고 아프기만 하면 어쩔까.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모든 걸 잊어버려서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허리나 다리가 아파서 도저히 움직일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할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보면 결국은 기운을 내서 일어나야 한다는 건데, 그러고 싶은 욕구마저 바닥이 난 상태.
곰곰 생각하고 몇가지 알아보고 하니, 지금 먹고 있는 약으로 인한 부작용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려움증 때문에 항히스타민제를 주기적으로 복용하는데, 그 약의 부작용 가운데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은, 소화장애, 발기부전, 권태감, 피로, 시력감소...

아주 작은 약, 작은 효과, 작은 부작용, 하지만 오랜 시간 복용으로 누적된 부작용은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사실, 약에 의한 부작용으로만 현재의 나를 설명할 수는 없다.
어쩌면 약에 의한 부작용은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많은 부분들이 일치하고 있어 의심을 해 볼만한 가치가 있으며,
이 약을 끊는 것 만으로도 애초의 상태로 회복이 가능하다면 정말 해 볼만하지 않겠는가.


제목에서 언급한 긍정의 뇌 이야기가 어쩌다 다른쪽으로 빠진 것 같은데, 그건 아니다.
막상 약을 끊고 면역력을 키우기 위한 다른 방법을 고민하려다보니 쓸데 없는 고민이 하나 생겼다.
지금의 상태가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일부는 내가 전에 경험허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 줬다. 타인에 대한 이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조금은 여유롭고 인내심을 갖는 것, 세상에 대한 감사한 마음.

내가 예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면 이런 것을 잃어버리진 않을까?
그랬었지 하는 기억이야 남아 있을테지만, 다시는 똑같은 자리에서 바라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이런 쓰잘데 없는 고민 때문에 순한 맛의 긍정의 뇌라는 제목을 지었던 것이다.


P.S.
긍정의 뇌 저자는 망설임이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책을 써서 내가 읽게 되었다.

2019년 5월 26일 일요일

관계의 위선

널리 퍼져 있는 x톡
특히 그 단체로 이야기하는 소위 단톡방의 오글거리는 위선은 볼 때마다 나를 좌절하게 만든다.

일정한 친분의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긴 하지만, 나와 그 구성원들과의 관계가 모두 같지 않듯이, 그들이 나머지 구성원들과의 관계가 동등하지도 않을텐데, 어떻게 그들이 나누는 대화와 그 반응들은 한결같은지...

누군가의 자랑거리같은 화제가 올라오면 칭찬과 축하, 그리고 언제나 똑같은 이모티콘들.
과연 그게 그들의 진심인건지, 실제로 만나면 모두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말들을 하는 것인지...

한편으로 보자면, 세상 사람이 모두 이와 같다면 미움도 증오도 없는 평화와 사랑과 믿음 뿐인 낙원일테지만, 어째서 내겐 그게 좋게 보아도 형식적인 인사치레이며 나쁘게 보면 본심을 숨긴 위선으로 보이는건지...
단톡방에서는 이렇듯 화목하고 행복하기만 한 듯이 하하호호하고 있지만, 정작 현실에서 만나면 안색이 싹 바뀌는 것은 아닐지...

내가 아무래도 많이 꼬였나 보다.
내가 생각해봐도, 그게 싫으면 마음에 있는대로 마음대로 그대로 얘기하는 게 좋겠는가?
- 따지고 들면 자랑할만도 못한거 아니냐,
- 겉보기만 그렇고 속은 반대 아니냐,
- 내가 듣기론 아니라던데,
- 지금은 몰라도 나중엔 후회한다
같은 악담들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단톡방에서 꼬치꼬치 캐물어서 갑분싸 만드는 것도 좋은 게 아닐테고,
가만이나 있으면 중간이나 갈 일에 공연히 딴지 걸어 미운털 박힐 필요도 없으니,
적당히 분위기에 장단 맞춰주는 것이 제일 좋은 방편이지 싶다.
(읽씹 안읽씹 또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니 뭐든 대답은 해야만 하니까...)

이러고보면, 단톡방의 위선처럼 보이거나 오글거리는 반응들 또한 각자가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반응이 대부분이 아닐까.

2019년 5월 12일 일요일

[의문] 지구의 중력은 불변인가 / 우주의 에너지 총합은 일정한가 / 블랙홀은 폭발할까

< 지구의 중력은 불변인가? >

간혹 우리들이 대단히 착각을 하고 있구나 싶은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크기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마치 인간의 크기가 어떤 크기의 표준인듯이 생각하는 것.
외계의 생명체가 인간과 비슷할 거라는 착각과 크기도 비슷할거라는 착각들.

그런데 왜 인간은 이 정도의 크기를 가지게 된 걸까?
이 크기와 이 정도의 질량은 지구라는 행성에 의해 조절된 결과가 아닐까?
물론 훨씬 더 작은 생명체와 훨씬 더 큰 생명체도 존재하지만...

그러고보면 과거에 살았던 공룡 따위의 생명체들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크기를 가졌던 것이 참 의아하다.
혹시 과거의 지구는 지금보다 중력이 훨씬 작았던 것은 아닐까?



< 우주의 에너지 총합은 일정한가? >

빅뱅 혹은 인플레이션 이론에 의하면 우주의 최초 시작은 폭발과 함께였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관찰의 결과, 우주 곳곳에서 발견되는 우주 배경 복사는 이 에너지의 흔적이라고들 한다.
케플러의 관측으로 우주는 여전히 확장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면, 애초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에너지 = 현재 온 우주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라는 등식이 성립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총합은 일정한 우주의 공간이 늘어나고 있다면 단위 공간당 에너지는 감소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며, 만약 그 에너지의 감소가 전 우주에서 고르게 일어난다면, 단위 공간의 에너지 감소율로 우주의 팽창 속도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에 이런 에너지의 총합의 일정하지 않다면, 우주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과 연결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 블랙홀은 폭발할까? >

위의 의문에서 시작된 것인데, 혹시 그 빅뱅의 시초는 블랙홀의 폭발과 같은 것이 아닐까?
0에 가까운 부피와 무한대에 가까운 밀도, 이벤트 호라이즌, 어쩌면 빅뱅의 전 상태와도 같은 것이며, 폭발하면 그것은 또 우리 우주의 탄생과 같은 사건이 아닐까?

블랙홀이 폭발하면 우리 우주는 어떤 영향을 받을까?
어쩌면 이미 블랙홀은 폭발해서 또 하나의 평행 우주를 만들며 전혀 다른 공간에서 팽창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우주에도 블랙홀이 존재한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만약 그 블랙홀이 또 하나의 우주라면, 그 우주는 우리 우주와 에너지를 교환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은 이 의문의 답변은, 우리 우주가 다른 우주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의 답변이 될 것이며, 위의 질문 <우주의 에너지 총합은 일정한가>에 대한 답변을 추정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지 않을까?

2019년 4월 3일 수요일

삶에 익숙해지면 행복해질까

삶을 살기가 어렵다.
늘상은 아니더라도 가끔 넘어지고, 다치고, 까지고, 아프다.
그러면 슬프고 우울해지고 불행해진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누군가는 남들보다 더 나은 것을 행복으로, 누군가는 거침없는 자유를 행복으로 바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기본적인 행복의 시작은 불행의 제거가 아닐까 싶다.


실수하고, 그래서 미움받고 따돌림 당하고 위축되어 뒤쳐지고,
같은 일도 힘이 들어서 잘 하지 못하거나 하기를 주저하게 되어, 결국 실망하고 포기하고,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잘 하는게 뭔지 몰라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하는 주변인이 되고,

이 모든 것들이 충분히 연습하고 반복해서 익숙해지면 극복이 되는 걸까.
그래서 이윽고 실수가 줄어들고 남들만큼 잘 하게되면 불행은 없어지는 걸까.
그럼 나는 두번의 삶을 살아야 하는걸까.
예습의 삶을 한번 살아야 행복해지는 걸까.


아니면,
실수하고, 그래서 미움받고 따돌림 당해도,
잘하지 못해서 실망스러워도,
인싸가 되지 못해도,
그래도 행복한 방법은 따로 있는 걸까.

2019년 3월 20일 수요일

용기와 뻔뻔함이 동의어?

참 뜬금 없게도 취업의 기회가 왔다.
과연 이게 무슨 경우일지 의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취업을 위한 인터뷰를 볼 의향이 있느냐는 식의 이메일을 받았다.
아마도 일반적인 경력직을 채용하는 절차로 보였고, 나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상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조만간 생계에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어 초조하던 차에 정말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다.
무조건 채용하는 것이 아니니 험난한 면접의 과정이 있겠지만...

그리고 사전 전화 통화 일정을 잡고, 이력서를 보내는 중에 많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제 아무리 글로벌 기업이라고 할지라도, 일하는 사람들은 다 우리나라 사람들.
그들 모두의 마인드마저 글로벌하리라 생각하는 건 무리였다.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면서 모든 사고방식이 글로벌해진다면, 그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해서, 혹은 주말에 가족과 보내면서도 글로벌한 마인드로 생활하겠는가?
결국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이다.
그런 한국인의 선입견, 관습, 사회적인 편견은 피하기 어렵다.

이제 중년의 나이로 입사를 해서, 한참 젊은 이들과 거리낌 없이 생활을 해야 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나의 편견은 나의 문제이고 내가 극복해야 하는 문제겠지만, 그들이 바라 볼 나의 모습에 대한 편견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사실 그런 모든 편견만이 두려운건 아니다.
그게 편견의 문제를 넘어 실제로 현실적인 나의 문제가 되리라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래 그 편견들이 현실로 증명되는 것을...


어쩌면 굉장한 민폐가 아닐까 싶었다.

아직 취업이 결정된 것도 아니고, 인터뷰를 보지도 않았으니, 김치국부터 마시는게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취업이 된 후도 걱정이지만, 취업의 과정에서 일일이 누군가의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아가며 인터뷰를 진행하게 하는 것이 큰 민폐가 아닐까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아니면 누군가 한명이 더 취업할 수 있으며, 누군가 한명이 더 인터뷰를 볼 여지가 있지 않겠는가.


사실 난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능력의 한계를 다 쓸 수 있는 용기,
지금과 같은 나태함이나 여유를 과감하게 버리고 스트레스를 버텨낼 용기,
내 자신의 편견과 세상의 편견에 의연해질 용기,
그리고 나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 볼 용기.

종종 사회 초년생이나 취준생들에게 이런 비슷한 식의 용기를 요구하거나 북돋우기도 하는데, 과연 이게 용기일까?
어쩌면 이건 용기가 아니라 뻔뻔함이 아닐까?
능력도 없으면서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는 뻔뻔함.
할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할 수 있다고 소리치는 뻔뻔함.
그리고 안좋은 결과에 대해서는 최선은 다했다고 말하는 뻔뻔함.


결국 뻔뻔해질 용기였던 걸까?

어쩌면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너무나 완벽하고 무결이었던게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자랑하는 그들의 결과물을 속으로 비웃고 있었으며, 나 자신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했으며, 나 자신의 실수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잘못된 것은 나의 능력도 아니고, 사람들의 시선이나 편견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잘못된 기준점(?)에서 비롯되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야.
아주 잘났다고 하는 인간도 극히 일부의 분야에서, 아주 짧은 시간동안만 그 빛을 발할 뿐이고, 그 분야와 시간을 벗어나고나면 그저 다르게 생기고 다르게 생각하는 한명의 사람일 뿐.

2019년 3월 6일 수요일

나에게서 벗어나면 조금 더 행복해질까

유튜브에서 음악을 한 곡 들었다.

그리고 그 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쓴 댓글을 보았다.

누군가의 댓글.
'A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나의 ??때가 생각난다. 그때의 나는 어쩌구 저쩌구....'

그 댓글을 보면서 나랑 비슷하구나, 혹은 나는 이랬었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참으로 많이, 자주, 모든 타인들의 사건, 사고, 행위, 말, 생각, 느낌을 듣거나 보면서, 거기에 나를 대입시켜 보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지독하게 나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건 아닐까 싶다.

그런 대입으로 나는 종종 나 자신을 연민하고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싶어지기도 하며 긍지를 얻고 자신감을 가지며 뽐내고 싶어지기도 한다.

정작 나 자신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나 자신이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이 말이다.


결국 나는 현실의 내가 싫어서, 나를 증오하는 대신 현실을 증오하고, 타인의 이야기나 매스미디어의 꾸며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위로하기만 한다.

하지만 한발만 밖으로 내디뎌도 현실은 심비오트처럼 내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나는 이내 절규하면서 나만의 공간으로 숨어버린다.

현실과 정신의 분리된 상황은, 정신의 위로만으로 안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끈질긴 현실에 의해 언제나 침범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불안정한 상태이다.


이젠 정신승리만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처절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현실과 완전히 합체하여 끊임없이 받는 상처를 치료하고 아물기를 반복하며 살아가거나, 얄팍한 자기 위로를 넘어서는 깊은 각성이 필요하다.

흔히들 명상하고 수행하고 각성하고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인지 실체는 모르고 있는 듯 하다.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간들의 왜 그것을 원하는지는 어렴풋이 알겠다.
아니, 내가 왜 오랜 세월동안 그것을 원했는지 이제는 조금 알겠다.
난 어리석으며, 사람들과 어울려 삶으로써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몰랐고, 내 마음의 두려움과 슬픔과 괴로움 외로움이 싫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의 두려움과 슬픔 괴로움과 외로움을 조금은 덜어낼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건, 나에게서 나를 조금 덜어내는 것이 아닐까.

2019년 3월 1일 금요일

[상상] 인간의 본질

우연히 유튜브에서 게임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았는데, 제목은 SOMA.
지구가 소행성과의 충돌로 인간들이 모두 전멸한 가운데,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로 보관하던 연구의 성과로 지구에 남은 건, 일부 인간들의 의식과 이를 행동에 옮길 수 있게 만들어진 로봇. 마지막에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 위한 지구 엑소더스...


이 영상을 보면서, 예전에 이현세님의 만화 아마겟돈이 떠 올랐다.
그 만화의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는데(ㅠ.ㅠ), 흥미로운 가설을 전제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던 기억은 난다.
지적 존재가 우주의 여러 행성에 실험적으로 생명을 배양하고 그 생명체들이 행성에서 어떻게 생존해 나가는지 관찰하고 있는데, 지구에서는 공룡과 인간이 그 실험적인 생명체의 대표적인 예라고...


개인적으로는, 일부의 인간들이 강력하게 믿는 "영혼"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인데, 한편으로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들이 있어서 참 곤란해하곤 한다.
물론 "영혼"이 있다는 것을 반박할만한 증거는 더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건 마치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의 논쟁과도 유사해 보인다.)

만약 위에서 소개한 SOMA와 비슷한 예를 들어서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설명하면 어떨까?
가령 진보한 지적 존재가 자신들의 의식을 우주에 퍼뜨려 나가던 중에, 지구에서는 인간이라는 종에게 심어진 것이 현재의 인간들을 만들어 냈다고.

인간이 본래 타고난 본성과 신체적인 제약의 문제로 인해서, 심어진 의식들은 꽤 많이 방해를 받거나 100% 발현할 수 없는데, 간혹 돌연변이처럼 인체의 제약을 풀어낸 인간들이 나타나면서 과학 기술들이 급격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고.

일부의 인간들은 이 의식들의 힘에 이끌려 자신을 각성시키는 수행법을 찾기 위해 고된 수행을 하지만, 이를 해낸 인간은 극소수이며, 오히려 실패하여 비참한 결과를 맞는 경우가 많아 대대적인 의식의 각성은 억제되고 있다.

인간들이 어렴풋이 느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민은, 이처럼 인간의 신체와 의식이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잘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상태와 비슷한 것.

한편, 신체의 주인인 인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의식들은 오히려 연가시와 같은 기생충이며, 인간들의 일평생을 지배하고 노예처럼 부리는 악질적인 존재이다.
이 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유일하게 인간 자신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방법이다.


2019년 2월 23일 토요일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Clouds of Sils Maria)

친구들과 모임. 수많은 얘기들. 음식과 술, 산책...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날씨와 깨끗한 공기, 온화하다.

가장 친한 친구가 선을 넘었다는 생각을 했다.
다분히 공격적이라 느꼈다. 아니, 당시에는 그도 나도 공격하거나 공격받지 않았을지도...
지나고 보니, 내 기준에서는 공격이었다.
난 수비적이었고, 막아내기 바빴으며, 완전히 막아내지도 못했다.
아마도 변명 투성이었을 것이며, 그건 간단히 해결할 수도 있었다.
'오케이, 그럴께' 혹은 '그렇게 해보지'라는 말로...하지만 거짓말을 하긴 싫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러모로 생각해봐도 어처구니 없는 황당한 요구였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의 대사처럼 '인간에게 인간 이상의 것을 바라지 말아라'고 말해 줬어야 하는걸까?

과연 어찌해야 할까?

결국은 이렇게 멀어지고 다시 각자의 삶을 보면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들으며 살것인가?
아니면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그냥 다시 만나면 미소짓고 예전처럼...하지만 속마음은 예전같을 수 없는...?
그의 지적처럼 나는 결국 그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늙은이가 되어가는 것이며, 결코 달라지지도 발전하지도 않을 것인가?

어쩌면 그는 아무렇지도 않을 상황이지만, 내 마음 속에선 어지러이 회오리 돌풍이 풀고 있는 느낌이다.


얼핏...만 2번 본 영화가 생각이 났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그 두번 모두 후반부부터 보게되었던 것 같다.
비노쉬와 스튜어트가 어느 한가로운 시골 주택에서 함께 생활하며 대본 연습을 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논쟁하고...

지금 이 글을 쓰기 전에 이 영황에 대해 잠시 살펴보니 과거와 현재에 맡은 역할의 변화와 그에 따라 운명처럼 맞이하게 되는 미묘한 상황들이,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에 있었나보다. 그리고 제목의 실스마리아는 지명으로, 그것이 상징하는 것 또한 영황의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영황에 있어서는 중요하다 해도,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비노쉬 크리스틴 모레츠간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상황들, 그리고 그것들이 뿜어내는 힘이 사람들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언제 드러날지 지켜보는 초조함. 그리고 비열해 보이지만, 상대방은 모르게 자신만의 복수를 하는 듯한 모습들...
(비노쉬는 모레츠에 대해 굴욕감 같은 걸 가지고 있어 보였고, 그런 상황을 만든 연출가에게도 일정 정도의 반감이 있었던 듯 하다. 후에 연출가가 검토를 부탁한 원고는 일부러 보지도 않으며, 자신의 손상된 자존심을 세워줄지도 모를 무명의 감독이 제안하는 배역에는 대단한 호의를 보인다.)

왜 이 영화가 생각이 났을까?

내 마음속에 움직이고 있는 혼란스러움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데, 이 영화가 그걸 보여 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걸까?
아니면 그 영화에서도 지금 내가 느낀 것같은 그런 혼란스러움이 느껴졌던 걸까?

2019년 2월 19일 화요일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 vs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어른의 두려움 vs 아이의 두려움

전자는 대상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대상 혹은 사건에서 파생될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기도 한다.

뜨겁게 팔팔 끓고 있는 주전자를 보면서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다.
그건 주전자나 물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뜨겁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다.
만약 뜨거운 물이나 주전자에 데었을 때의 사태, 쉽게 가시지 않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크게 데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일 수록, 화상으로 인한 통증에 유난히 민감한 사람일 수록 더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니, 내재화된 혹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신의 약점인 셈이다.
누군가는 추운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니 말이다.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런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이 있을까?
두려움을 이겨낸다는 것은,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만 한다.
'설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야'라는 생각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하나 극복해 내는 힘든 과정일 것이며, 불을 이겨내고 담금질과 연마를 견뎌내어 강철이 되어가는 그런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
각오와 다짐을 하고, 용기를 내어 나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뀌는 힘든 여정을 견뎌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후자의 경우는 두려움의 한계가 없다.
무한대의 두려움이 가능하다.
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용기"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 용기는 그저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을 먹는 순간의 일이며, 그것으로 완성된다. 그 후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제 슬쩍 들춰 본 그 대상의 실체를 접했을 때 겪게되는 인상과 느낌, 경험은 그 자신에게 내재화 될 것이다.
시간차이가 있겠지만, 어쩌면 순간적으로 그 두려움은 바로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 = 어른의 두려움으로 치환되어 가는지도 모르겠다.

2019년 2월 17일 일요일

생각하지 못했던 것, 의도하지 않았던 것, 궁금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창조와 진화

앞선 포스팅에선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에 대한 생각을 찌끄려 봤다.

그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서 의문들이 따라 올라왔다.

과연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
만약 누군가, 혹은 인류가, 아니 어떤 존재가 이런 방법을 고안해 낸다면, 그 존재는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나 연극 영화와 같은 가공의 스토리를 만드는 작가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떠면 작가의 의도는 그 자신의 정체성임과 동시에 그 자신의 한계일 수 있는데, 자신의 의도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일일지 모른다.
데미안의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가는 새와 같이...


우리는 궁금해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을까?
사실 인간은 많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며 발전해 왔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답은 언젠가는 나오는 것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
문제는 질문이었다.
어떤 사람의 미래는, 그가 던지는 질문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니, 과연 인간이 지금껏 가지지 않았던 질문을 할 수 있느냐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은 "창조"라는 단어로 묶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로 예술의 방면에서 종종 이런 창조성의 천재들을 접하게 되지만, 과연 "완벽한 창조"라는 것을 했던 예술가가 있는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 "창조의 방법" 혹은 "창조의 과정"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인식하고 전수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리고 결국은 이 "창조"가 "진화"의 열쇠가 아닐까 싶다.

2019년 2월 7일 목요일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

인공지능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니,
인공지능은 단순한 계산기에 불과하던 컴퓨터로 하여금 컴퓨터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들을 처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들이 인공지능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대상들은, 명확하게 드러난 절차적인 방법이 없는 것들이었다.
패턴인식, 사물인식, 음성인식, 언어처리, 번역/통역 등은 인간 스스로도 자신들이 어떤 방식으로 습득하고 활용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를 알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사실, 절차적인 방법이 명확한 분야는 이미 컴퓨터를 활용하여 처리하도록 되어있거나 가능하다. 단지, 효율의 문제이거나, 너무나 많은 계산과 너무 많은 기억장소를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좀더 효율적인 방법에 대한 고안을 하고 있거나, 시간이 지나 하드웨어가 발전하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들도 있다.

결국 문제는, 절차가 명확하지 않은 문제들을 어떻게 컴퓨터로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
인공지능은 인간조차 모르는 절차를 컴퓨터가 스스로 찾아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어쩌면 인공지능을 통해 컴퓨터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끝은 어디일까?
아마도 인간이 원하는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수준?

예전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A hitchhiker's guide to galaxy)라는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계속 발전을 하는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발전할까 라는 질문의 답은 어쩌면 인간의 한계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호기심의 한계.

이런 생각이 들자,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는 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
만약 인간이 계속 발전하고자 한다면, 인간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를 발견하는 방법을 알아내야만 하는건 아닐까?
자신이 인식하지도 못하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할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2019년 2월 2일 토요일

말의 겉과 속, 허와 실, 의미와 소리

나이가 들면서 확연히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말"이 가지는 가벼움, 비현실성, 덧없음, 비어있음, 공허험,... 따위이다.

물론,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마찬가지로 말로 이루어져 있으니, 위와 같은 속성을 가질 수도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말"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말" 자체가 진실, 노력, 힘, 에너지와 시간 등의 가치들을 표현 할 때에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런 가치들이 없는 말은 그저 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오늘 쓰고자 하는 글의 주제에 대한 여러 사례들은 바로 위의 첫번째 문단과 두번째 문단이 가지는 관계들과 유사하다.
즉, 어떤 한가지 단언, 단정, 선언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많은 모순에 시달리게 될 테지만, 그걸 이렇게 저렇게 뒤집어서도 보고 받침이 되는 배경의 사상이나 지식까지 꼼꼼하게 따져보면 진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몇년 전부터 인터넷에 가끔씩 돌아다니는 글이 있는데, 한마디로 하면 "공부는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재능에 더 많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흔하게 돌아다니는 사진을 보면 더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의 논리는, 재능, 선천적, 타고난 것, 유전자 따위로 결정되는거라면 노력은 왜 하겠는가, 그냥 재능만 발굴하면 되는거냐, 혹은 이것과 반대로 유전적인 소인이 없어 보이는 사람의 노력에 의한 성공 사례 등...

과연 이 논리 (공부는 재능이다)는 맞을까 틀릴까?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생각도 맞고, 틀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주장도 맞아 보인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이 믿고 싶은 편의 주장을 끌어다가 좋은 증거로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저런 연구 결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적용되는 상황은 제한적이다.
-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공부가 필요한 상황.
- 그 목표가 간절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상황.
- 부수적인 환경이 동일한 상황. (공부의 환경, 주변의 도움 혹은 방해 등)

아마도 위의 3가지가 동일한 사람들이라면, 결국 승부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위 논리의 다른 면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났어도 공부할 마음이 없거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공부에서 어떤 성과도 낼 수 없다는 것.



최근에 내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커피이다.
그리고 그 커피에는 불문율처럼 내려오는 말이 있다.
"바리스타는 로스터를, 로스터는 커퍼를 이길 수 없다."
이 말의 뜻은, 커피를 추출하는 바리스타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로스터가 볶은 커피에 좌우될 수 밖에 없으며, 로스터가 아무리 노력한다해도, 좋은 커피를 선택하는 커퍼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들으면 바리스타와 로스터는 힘이 빠질 수 밖에.
또한 커퍼도 사실상 커피를 재배하는 농장주에게 좌우될 수 밖에 없는 셈.

하지만, 이 말도 완전히 옳지는 않음을 경험하게 된다.
제 아무리 기가 막힌 커피라 하더라도, 엉터리 커퍼가 그릇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좋은 점수의 커피라고 해도, 서투른 로스터는 커피를 다 태우거나 덜 익혀 망칠 수 있다.
로스팅까지 완벽하게 된 커피라 해도, 초보 바리스타의 실수로 마실 수 없는 커피가 나올 수도 있다.

결국 완벽한 커피는 농장주, 커퍼, 로스터, 바리스타까지 모두 완벽해야만 하고, 누구 하나만 실수해도 폐급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올랐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들의 한계 안에서는, 좋은 커피가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치, 동일한 노력과 동일한 동기를 가진 학생이라면, 선천적 재능이 성적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2019년 1월 21일 월요일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종종 묻는 흔한 질문이지만, 명확한 대답은 없다.

어린 시절의 많은 책과 미디어를 통해 얻은 어렴풋한 짐작으로는 가슴 한 가운데에 하트 모양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그래서 많은 이들의 대답은 "가슴" 혹은 "심장"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커서 알게된 사실은, 만화 영화등을 통해서 표현된 그 '마음'은, 사실은 심장의 형상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마음인것 처럼 상징화시킨 것이었다는 것.

또 다른 대답은 "머리" 혹은 "두뇌"였는데, 마음이 드러나게 되는 상황이나 그 현상이 주로 감정적인 것이었고, 의학적인 연구 결과에 의해 두뇌는 이성적인 판단과 논리적인 추론 외에도 감정적인 반응에도 관여한다고 알려지면서 이런 대답이 많아진 것 같았다.

사실, 아직까지도 두뇌에 대한 연구는 너무도 느리고 불명확해서 전적으로 믿기 힘든 구석이 있기는 하다. 인간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 순간에 두뇌에서도 특이한 반응이 검출된다는 정도로, 두뇌가 감정을 유발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도 성급한 판단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조금 더 명확한 증거로 제시되는 사례도 있는 걸로 알고 있지만 극히 소수의 사례라서...


이런 대답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 나 스스로가 느낀 바로는, 마음은 "호르몬"에 있는게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호르몬의 변화를 급격히 겪고 있다.
신체적인 변화 뿐 아니라 감정적인 변화도 크게 일어나고 있는데, 그 원인은 "호르몬"이라고들 한다. 특히나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의 비중에 따른 감정의 변화는 가히 드라마틱하다.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연민이나 동정심이 특히 그렇고 두려움과 섬세함도 변화가 있다고 느껴진다.

이런 마음의 변화는 틀림없이 호르몬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변화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며, 대부분이 비슷한 경험을 하기에 더 신뢰성이 있지 않나 싶다.


물론 사람의 마음은 여러가지이고, 시기심이나 질투 혐오와 같은 부정적인 마음, 욕망이라는 강력한 마음도 있다.
아마도 대단히 사회화되고 문명화된 마음들이 어떻게 원시적인 호르몬에 의해서 유발되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권력이나 명예에 대한 욕구들이 대표적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이면에는 원시적인 기본 욕구가 사회적인 가치 체계와 결합해서 파생된 것일 뿐이지 근원적인 욕구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마음이 존재하는 곳은 "호르몬"이라는 답변 또한 여러 답변들 중 하나일 뿐이며, 나 개인의 답변일 뿐이다.
지금은 이게 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쩐지 이게 맞는 답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사람을 가장 강력하게 움직이는 이 마음이 "호르몬"에 좌우 된다는 점은 뭔가 매우 허탈해지는 기분이다.

2019년 1월 13일 일요일

[도서]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얼마 전에도 잠깐 언급했던 도서인데, 이제야 다 읽고 느낌을 남겨보려 한다.

참고로 내가 읽은 책은,
범우사에서 출간한 <멋진 신세계, 다시 가본 멋진 신세계>이며,
이성규, 허정애 번역으로 1989년 초판 발행 후, 2006년에 발행된 3판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제목과는 다르게 미래 사회의 디스토피아(?)적인 면을 다룬 소설이며, 결말마저도 비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기분은 꽤 우울하다.

멋진 신세계라는 표현은 두번 정도 나오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첫번째는 버나드가 새비지 존에게 야만인 보존지역을 벗어나 존의 어머니인 린다가 항상 그리며 말하던 런던의 문명 세계로 함께 가자고 했을 때, 새비지 존이 했던 말이었다.

두번째는 새비지 존이 어머니 린다의 임종을 지키는 중에 마주친 델타 쌍둥이들에게 진저리를 치게된다. 한번은 델타 쌍둥이 꼬마들에게, 또 한번은 일을 마치고 소마라는 약을 배급받기 위해 줄서있는 성인 쌍둥이들에게.
그리고 이 델타 계급의 성인 쌍둥이들(162명?)은 배급받을 소마를 고대하며 신세계를 반복하며 감탄하는 장면이었다.

두 장면에서 말하는 멋진 신세계라는 표현은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책의 구성이 다를 수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18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작품의 핵심은 16장이었다.
소위 세계 회장의 한명인 무스타파 몬드와 새비지 존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며, 여기에 올더스 헉슬리가 생각하는 이 작품의 세계관에 대한 대부분의 생각이 나와 있다.
문명 사회를 이끌고 있으며 그 모든 조작과 통제를 다 알고 있는 무스타파 몬드와 문명의 바깥에서 이를 보는 새비지 존의 논쟁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이들의 논쟁에서 종교에 대한 부분이 다소 과장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당시의 올더스 헉슬리조차도 모태 신앙처럼 전승되는 서양에서의 기독교에 대해서 자유롭기는 어려웠을거라는 추측과 내가 비종교인이라서 갖게 되는 저항감(?)이 더해지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소위 가족제도마저 무너뜨린 파격적인 문명의 지배자(무스타파 몬드)가 종교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이 너무 보수적이라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은 초반의 헨리 포스터와 레니나 크로운이 아주 전형적인 문명의 인물로 나타나고, 이어서 버나드 막스와 헬름홀츠 왓슨은 갈등의 인물로써 나온다.
하지만 곧 이어 등장하는 새비지 존은 더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로 부각되면서 중심 인물이 되고 문명을 대표하는 세계 회장과 균형을 맞추고 있는 정도로 부각이 된다.

하지만, 나만의 느낌(?)이라면, 아니 어쩌면 작가의 의도일지 모르지만, 새비지 존은 단지 문명의 반대를 위한 인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작품이라면, 획일화되고 몰개성화된 문명에 맞서는 새비지 존은 본능적이면서 자유롭고 인간적인어야 했겠지만, 실제로는 그도 또한 야만인 지역에서의 전통에 잘 길들여져있는, 또 다른 문명의 노예로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새비지 존이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들 중에는 현재의 우리가 가지는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과 유사한 면이 많이 보인다.
어쩌면 작가는 새비지 존을 통해서 우리들의 현재 삶에 대한 비판도 함께 하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포드 기원의 문명은 야만인 보존지역과 같았던 세상을 개선한 것이니, 그 개선책에 문제가 있다한들 야만인의 세상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런면에서 새비지 존과 무스타파 몬드의 논쟁은 자연스레 무스타파 몬드에게 기울어진다.


정작 새비지 존은 고통과 불편함, 더러움과 질병을 감수하더라도 인간의 자유와 감정, 신과 자연에 대한 본능을 선택하지만, 과연 그런 선택이 옳은지는 의문이다.

행복이 인간의 최고 선인가?
개개인의 최고 선은 개개인이 각자 선택해야 하는가?

자유를 뺏고 행복을 주는 문명, 고통까지도 짊어져야 하는 야만의 완전한 자유,
과연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해보게 된다.

2019년 1월 7일 월요일

트럼프와 김정은의 딜레마

북한의 핵무기와 ICBM 개발로 극한의 상황까지 갔던 미국과 북한의 대립, 그리고 대한민국의 위기, 일본과 중국의 긴장.

지나고 나서의 얘기이긴 하지만, 만약에라도...라는 생각을 하면 참 끔찍하지 않은가.
그래도 설마 "생각"이란걸 한다면 무력을 사용할 수 있을까도 싶지만, 그러면 1차 2차 세계대전은 왜 발발했으며,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시리아에 이르는 크고 작은 전쟁과 분쟁들을 보면 꼭 불가능하지만도 않은 가설이리라.


그렇게 위기에서 벗어나고, 한동안은 대화의 분위기였는데, 현재는 대화와 타협이 벽에 부딪혀 막혀 있는 상황이다.
사실 그 세기의 대화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를 트럼프와 김정은의 대화를 통해, 또 실무진들의 회의를 통해 어떤 방식의 진행과 검토, 보상과 대책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크게 관심도 없었지만(알아서들 하겠지...) 귀에 쏙 들어오게 설명해 주는 언론도 없었던것 같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벽에 부딪힌 듯이 꽉 막힌 게, 핵 개발의 포기와 그 검증 및 그에 상응하는 댓가에서 의견 차이인지는 궁금했다.

어쩌면 조금은 더 본질적인, 노골적인 부분을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먼저 미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만약 이 모든 현상이 잘 진행이 된다면, 과연 미국이 얻게되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 잃게 되는 건 없을까? 그 이익과 손실을 계산해 보면 무엇이 더 이익일 것인가?

이익이라면, 미국과 미국인의 안전이 그 만큼 잘 보장된다는 것, 북한에 대한 경제적인 투자권의 선순위 확보, 동아시아에서의 반미 세력의 감소로 인해 중국에 대한 견제가 조금은 더 용이해진다는 점.

손실이라면,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인 행동에 대한 당위성이 감소하게 되어 발생할 일련의 어려움들 - 한미연합군의 감축과 그에 따른 대한민국의 분담금 감소, THAAD를 비롯한 무기 및 감시 시스템의 당위성의 감소로 인한 축소 및 철폐,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일본에 대한 무기 수출의 감소.

사실, 미국내 총기 소지에 대한 문제는, 외부인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 미국의 후진성이지만, 역대 정치인들이 전혀 풀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다.
물론 이것은 미국의 역사적인 배경에서 기인한, 그래서 개별 국민들의 정서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지만, 외부인들이 보기에는 정경유착의 나쁜 연결고리 때문이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큰 미국의 군수 산업 무기 산업의 압력은 어떨지 감히 상상도 안된다.

어쩌면 미국 내에서는, 우리가 모르게 정치인들에 대한 군수 산업자들의 로비가 있지 않을까 싶다. 당연히도 상원에 포진한 공화당 의원들과 트럼프의 측근들에게까지도...
아주 단순한 "돈"의 논리이지만, 그것만큼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먹히는 욕구도 드물지 않은가.

과연 무엇이 트럼프 행정부를 움직인는 더 강한 동기가 될 것인가?


북한의 입장에서 보자면,
표면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공산당(과 그 간부들)과 김정은 사이의 긴장은 아직도 진행 중이 아닐까 싶다.
집권 초기에 많은 세력의 숙청을 통해서 자신에게 호의적인 세력의 비중을 높이긴 했지만, 아직도 김정은의 마음 속에는 불안감이 남아 있으리라 본다.
사실상 북한의 엘리트 층의 탈북도 그러한 숙청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는 편이 헙리적이지 않을까.

아직 남아 있는 김정은의 심리적 불안감은, 향후에 진행될 막중한 사안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을 수 밖에 없으며, 무언가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공산당의 눈치를 살필 지도 모른다.

사실상은 적과의 동침일 수도 있는데, 긴 시간이 지나면 이런 불안감은 사라질 수 있겠지만, 그 시간의 기다림을 대체할 수 있다는 희망이 나타난 것이다.

그 동안 북한에게는 적대적이었고 견제했고 긴장했던 대한민국과 미국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만약에 미국과의 협상이 잘 이루어지고, 남한과의 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된다면, 그 세력들의 힘을 빌어서 북한 내부적에서 김정은의 권력을 더욱 굳게하는 데 이용하고자 하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도 외적으로는 북한의 체제 보장, 북한 인민의 안전 보장 등을 내세우겠지만, 내적으로는 자신이 북한에서의 세력을 확실하게 보장받으려는 욕구가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중국의 입장에서도 이 상황을 보면서 기대하는 바, 두려워 하는 바가 있을 것이며 그에 따른 계산과 대책도 마련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북한의 비핵화와 개방, 경제 발전 등의 문제는 주변 관련국과 당사국의 두려움과 바램들 사이의 줄타기를 하면서 묘한 균형이 존재하는 길을 따라가는 외발 자전거와 같지 않겠는가?

2019년 1월 4일 금요일

주식 시장의 선물 옵션 - 시간의 상품

주식 시장의 파생상품으로 알려진 선물과 옵션.
이 상품들은 그 위험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투자를 꺼려하고 있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당장 선물이나 옵션은 최소 거래 금액이 꽤 높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다.
하지만, 선물의 경우에는 ETF로, 옵션의 경우에는 ELW로 대체가 가능하....지만 매수만 할 수 있고 매도는 할 수 없기 때문에 반쪽짜리 대체상품이다.

이 상품들을 소개하거나  투자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작성한 글이 아니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_-);;


한때 옵션 투자를 해 본적이 있는데,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꽤 많은 손실을 보고 옵션 투자를 접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가끔은 꽤 수익을 봤던 적도 있는데, 그 때에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과연 이 수익은 무엇일까?"
내가 이 수익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1) 위험을 감수한 댓가
2) 이만큼이라도 시장을 읽을 수 있도록 공부하고 노력한 결과 (+그에 맞는 상품을 선택한 걸과)
3) 그냥 재수

1)은 아닌것 같았다.
당시에 나는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마다 위험을 감수했다. 진입을 하는 순간부터 빠져나오는 순간까지 온통 위험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수익보다 손실을 봤다.

2)도 어쩌면 맞을지 모르지만 위의 1)과 마찬가지로 그 공부와 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높아지니 수익도 더 높아져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적어도 그 기간동안은 그래 보였다.)

3)만 남았으니 그냥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 것 같았다.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났다.
그리고 최근의 시장은 리먼브러더스의 파산때 처럼 공포스러운 시장이 되어가고 있다.
하락하는 시장에서 마구 떨어지는 평가액을 그냥 바라보기 보다는 파생상품으로 약간의 보상을 받아보려하고 있다.
딱히 더 공부를 하지도 않았으니 지식이나 실력이 더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한번의 경험이 더 쌓여서인지 조금은 차분하게 보이기도 한다.(그게 수익과 연결되지는 않지만....ㅠㅠ)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저 때의 고민했던 답이 보였다.
답은 1) 위험을 감수한 댓가였다.
특히나 옵션은 그랬다.
옵션은 매수자와 매도자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매매가 체결되는 순간부터 위험이 뛰어든 것이고, 거래의 쌍방의 수익은 정확하게 손실과 일치한다.
즉, 한사람이 손실을 봐야 반대편이 수익을 얻는다.
두사람이 서로 반대되는 내기를 걸었고, 이제 그걸 판결해 주는 사람은 시장이다.
시장의 판결에 따라 수익과 손실이 결정난다.
누군가 수익이 났다면, 그만큼 누군가는 손실이 났고, 그걸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기에 양쪽 모두 위험을 감수하고 베팅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양측의 승부는 매우 짧은 시간동안 유효하다.
사실 옵션의 실체는 "시간"을 상품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옵션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가치를 잃어간다.

아마 대부분의 옵션 매수자들은 만기가 1개월 이내인 상품을 매매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한번쯤은 당일 매매를 넘기는 오버나잇을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멘붕에 빠질 것이다.
단지 하룻밤을 지냈을 뿐인데 -30%를 기록하는 경우도 허다하니 말이다.


대부분의 좋은 수익 모델은, 시간이 돈이 벌어주는 모델이다.
시간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른다.
꾸준히 성장하는 기업의 주식은 틀림없이 시간이 돈을 벌어주는 모델이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항상 돈을 벌어주지는 못하지만, 길게 보면 언제가는 벌어주며, 그게 결국은 시간이 벌어주는 셈이다.

더 좋은 것은, 건물주가 되어 꼬박꼬박 월세를 받거나, 온전히 시간으로 이루어진 '옵션'을 판매하는 것이다.
단, 급격한 쏠림으로 인해 흔들리는 심리를 붙잡을 수 있다면...

고정비용과 유동비용 - 원인과 결과의 비대칭

문득 떠 오른 생각.

장사를 하는 사람. 개인 자영업자, 특히 많은 음식료 서비스업의 예를 들면,
고정 비용과 유동 비용에 대한 대략적인 예측이 있어야 실패하지 않을 수 있지 않나 싶다.

자본금으로 투자를 하고, 원자재를 매입하고, 가공하여, 판매하고, 이윤을 남기는 방식으로 영업을 할 텐데, 정신없이 하다보면 과연 이게 남는 장사인지 아닌지를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고, 적절한 시점에 경영에 필요한 판단 실수를 할 수도 있다.

간단하게 먼저 크게 비용을 고정비용과 유동비용으로 분류해보자.
(이게 경영, 회계 이런 학문에 있는 용어인지 여부는 모르겠다. 난 그런 학문은 배운 적 없다, 고등학교 사회나 중학교 상업이 전부였다.)

고정 비용은 매출과 무관하게 지출되는 비용이다.
매장이나 사무실의 임대료, 보험이나 세금 따위.

유동 비용은 매출과 연관된 비용이다.
원자재 매입, 가공비용(전기, 수도, 가스 등등)

그러면 이 사이에서도 벌써 문제에 부딪힌다.
인건비는 어디에 속하는 걸까?
가공에 필요한 설비는 어디에 속하는 걸까?

이 부분은 고정 비용과 유동 비용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 같다.
만약에 매출이 100일 때 필요한 사람과 설비가 1이라고 하면, 매출이 101~200인 경우에 필요한 사람과 설비는 2가 되어야 한다.

매출이 100에서 101로 늘어날 경우에 인건비와 설비는 유동비용이 되지만, 일단 101 이상이 되면 200이 될때 까지는 고정비용이 된다.


이제 좀 더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 매장(사무실)을 늘려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사무실의 임대료는 유동비용이 되는 셈이다.

이런 비용의 증가와 매출의 증가에 대한 모델을 만들어 두지 않는다면, 투자가 적절한지 여부에 대해 자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식의 관계... 매출과 비용의 관계...처럼 딱 비례하지 않는 상관관계는 현실에서 꽤 자주 접하게 된다.

공부하는 시간과 성적과의 관계, 성적과 입학하는 대학과의 관계, 졸업하는 대학과 취직하는 직장과의 관계, 직장과 연봉의 관계, 연봉과 승진과의 관계 등등....

바닥을 다지려는 습관의 고질병

뭔가를 하려고 할 때, 이런 저런 걱정되는 부분들이 많으면 그만큼 더 많은 준비를 하게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준비들이 첫 시작을 더디게 만드는 것도 당연하다.


아버지는 참 철저하신 분이었다.
너무 철저해서 진저리가 날 때도 있었으니까.
난 초등학생(당시엔 국민학생) 시절부터 아버지는 형제들에게 가끔 영수증을 받아오라고 지시하시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뭐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있었는데, 당시에 내 주위의 동급생들이 영수증을 요구하는 걸 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무척이나 당황했고, 그걸 본 주위 사람들이 뭐라할지 걱정스러웠던 적이 많았다.
그런 아버지가 모든 방면에서 그리 철저하셨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아무도 그렇지는 못하리라.

아버지는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폰의 세대는 아니셨다.
하지만 첨단기술과 첨단제품에 많은 호기심을 가지시고 늘 배우려고 애쓰셨다.
덕분에 아버지의 또래보다는 이런 기기들의 사용에 조금은 수월하신 듯 보인다.

하지만, 나이가 있으시다 보니 뭔가 잘 안되고 있다는 생각은, 곁에서 지켜보는 나도 알 수 있었다.
컴퓨터에 대해 무언가를 물어보시고, 다시 똑같은 걸 물어 보시는 일이 잦아졌다.
대부분은 내가 직접 해결해 드리고자 하지만, 멀리 떨어져있을 때에는 전화로 설명을 해야 하는데, 의사 소통이 잘 안되는 걸 자주 느낀다.

사실 아버지께서 스스로도 답답함을 느끼시고 열심히 배운다고 생각했는데, 아시는 건 항상 쓰는 몇가지에 국한되어 있으며, 그 이상의 범위는 거의 모르시는 것 같았다.

때때로, 무슨 동기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무얼 배워야겠다고 말씀하시는 데, 대부분은 강의를 듣고 배우는 것이 다였다.

스마트폰의 경우도 비슷한데, 제품 하나를 사시면 몇백페이지에 이르는 매뉴얼을 다 인쇄하고 제본하신다. 매뉴얼을 다 본 이후에나 사용하실 것처럼...
하지만 당장 전화를 걸고 받으며, 문자를 주고 받는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서 빠르게 배우고, 몇번 시도하고 실수하고 한 후에 그냥 쓰신다. 몇가지 자주 쓰는 기능들을 물어물어 배우시고 쓰시며, 계속 사용하니 잊지 않고 잘 사용하신다.
아마도 그 출력했던 매뉴얼의 10%는 보셨을지 궁금하다.

어느날, 아버지께서는 또 무슨 동기가 있으셨는지, 무언가를 배워야겠다고 하셨다. (아마도 컴퓨터의 스프레드쉬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걸 배우려면 뭘 공부해야 하는지, 어디에서 배우는지 등등을 물어보셨다.
하지만, 짐작컨대, 아버지께서 익숙해지고 계속 사용하실 기능들이 그리 대단하지는 않을리라 생각하며, 그건 인터넷을 쉽게 검색만 해 봐도 배울 수 있는 거라 말씀을 드렸지만 아버진 선뜻 쉽게 발을 내딛지 못하셨다.

그 날, 문득 아버진 너무나 원천을 찾으려 애쓰시는게 아닌가 싶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선뜻 발을 내딛고, 몇걸음 걸어보고, 잘되면 뛰고, 잘 안되면 기어보거나, 혹은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보거나 한다.
그런데 아버진, 첫 발을 내딛기 위해서는 인체의 뼈와 근육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근육을 움직이기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는 무엇이며, 그건 어떻게 섭취해야 하는지를 알아겠다고 생각하시는 듯 보였다.

아마, 그만큼 두려우신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나 또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혹은 방면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런 무지에서 나오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두려움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타고난 천성도 있지 않나 싶었다.


최근에, 오랫동안 사용하던 물건들이 세월이 지나서 고장이 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당장은 그것들을 버리고 새로 사려면 돈이 들기에 꺼려지지만, 오랫동안 사용한 정이 들어서 새걸 사도 선뜻 버리기가 꺼려지고, 잘 쓰던 것이 대체 어디가 어떻게 고장이 난걸까 싶어서 고쳐보려고 노력을 했다.

그런데 너무 막막했다.
전기회로 전자회로 따위를 전공과목으로 배우긴 했어도, 단지 학점을 위해 공부한 이후로는 전혀 다른 일을 해온 터라, 지식이 쌓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그나마 있던 지식마저도 휘발되어 날아간 듯 했다.

어떤 책을 봐야, 내가 원하는걸 할 수 있는지 모르니, 아무 책이나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고는, 이거 아냐 휙~,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뭐라 ~카더라만 믿고 해보고는, 이것도 아냐... 유튜브에서 우연히 찾은 누군가의 실전을 겸한 설명을 보니, 설명도 잘하고 실력도 있는 분이다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당장 내가 써먹을 그런건 아니었고, 하나씩 배우기에 좋다는 정도...
결국 나도 몇번 듣고 잊어버릴 그런것에 집중하고 있는건 아닐까?
내가 당장 필요로 하는 것에, 필요로 하는 지식과 기술을 배워서 바로 문제를 해결하고, 그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정말 실력이 아닌걸까?


기본이 중요하기는 한데, 언제나 기본만 다지고 있다가는 레벨업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가끔은 과감하게 레벨업에 시도해 보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못보던 세상이 보이게 되고, 자신이 부족한 부분이 뭔지 알 수 있다.
기본의 위치에서는 기본이 잘 안보이는 법이니까.


가끔은 기본을 밝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다.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도 기본을 잡지 않으면 그 위로 올라가는 것이 의미가 없다며 고집을 부리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불가능을 고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문제를 해결하는데에 기본이 있어야만 하지는 않다.
문제가 뭐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말이 자꾸 추상적인 관념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은데,
결론만 말하자면, 가끔은 그냥 시도해보는 것도 좋으며, 그것도 아주 많이 좋을 수 있다.
아마 시도해보면 기본이 다르게 보일 수 있고, 기본이든 뭐든 문제의 해법은 따로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일단 한번 해 보자.

2019년 1월 2일 수요일

역지사지 -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신재민 사무관의 폭로

최근에 좀 유별나다 싶게 청와대와 관련된 폭로 사건이 연달아 터지고(?) 있다.

청와대의 특별 감찰관이었던 김태우 수사관이 청와대에서 민간인을 사찰했었다고 폭로한데 이어서, 기획재정부의 사무관으로 재직했던 신재민 전(前) 사무관이 청와대가 적자 국채발행을 원했다, KT&G와 서울신문사의 사장을 교체하려고 했다는 등의 비위(?) 사실을 폭로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서 여당 청와대 기획재정부 등등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이 아주 시끄럽고 당혹한 눈치이다.
야당으로써는 기세를 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테지만, 아직까지 눈에 띄는 적극적인 모습보다는 오히려 신중해 보이는 상황.

오히려 언론과 정치 성향이 강한 커뮤니티들이 더 시끌시끌해 보이기도 한다.


사실 신재민 전 사무관의 주장들을 봤을 때는 뭔가 2%...아니 20%는 부족해 보인다는 생각이었다.
마치 뭔가 대단한 비위를 알고 있다는 듯이 폭로를 했지만, 그 모든 비위가 결국은 불발로 끝났기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것도 아니어서 국민적인 의혹을 이끌어내기엔 좀 모자르고, 설령 확실한 증거를 내 놓는다 한들, 청와대나 정부가 반박할 논리는 충분해 보였다. "결국 청와대나 정부 내부적으로 상호 견제와 보완이 잘 작동한다는 반증아니냐...."는 식으로.

따라서, 한동안의 신재민이라는 사람이 왜 힘들게 고시공부 해서 들어간 기재부의 사무관을 박차고 나와서까지 저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과연 진짜 의도는 뭘까?


아마도 진짜 그의 목적이나 의도는 그 사람만이 알고 있겠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의심하는 나를 보고 있자니 묘한 데자뷰가 느껴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까지 가는 과정, 그리고 그 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 그 탄핵을 지지했던 사람들과 반대했던 사람들이 펼쳤던 자기 논리와 심리 상태.

아마도 갖가지 의혹들이 불거졌고, 수많은 카더라가 범람했다. 탄핵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그 모든 의혹과 소문을 진실처럼 생각했고, 나중에 밝혀진 사실들을 보면서 가짜 뉴스와 소문들은 다 잊어버린 듯 행동했다. 그리고 사실로 밝혀진 것만으로도 탄핵감이라 주장했다.

탄핵에 반대했던 세력들은 헛소문으로 드러난 것들에 분개하면서 이렇게 악랄하게 몰아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고 분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최초 고발자의 역할을 한 고영태의 의도가 무엇인지, 최순실의 태블릿PC가 진짜인지를 밝히라고 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문은 외면하거나 부정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신재민 전 사무관의 폭로, 두가지 사건을 같다고 보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어떤 명백한 행위의 결과가 있었는가 아닌가, 불법한 시도가 있었는가 아닌가, 국민들에게 막대한 위해를 끼쳤는가 아닌가, 법률과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 있는가 아닌가 등등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아직까지는...)

하지만, 두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갈라선 양측의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와 심리 상태는 매우 흡사해 보인다는 것이다.

방어하고 변론하고 옹호하는 측, 공격하고 의심하고 피해를 주려는 측.


어쩌면 신재민 전 사무관의 진짜 의도는 이것이었을까?
- 내가 폭로한 것이 별것 아니라는 사실은 나도 안다.
- 그런데 그렇게 따지만, 사실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으로 이끌었던 최초의 폭로들도 별것 아니지 않았던가
- 우리는 진실의 가치/무게를 평가하기보다는 그냥 미워하는 사람을 공격하고 싶었던 것 아닌가


짧은 시간에 크다면 큰 변화가 이어서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부족한 지혜로는 긴 시간에 걸친 경험을 망각하기 쉽지만, 최근의 경험은 짧은 시간동안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서 상대방의 사정을 바꾸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싶다.


P.S.
사실은 이런 생각을 한 후에 좀 더 우울해졌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객관적인 사실과 의심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어려운 숙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군가를 특별한 이유없이 미워하는 공격적인 성향이 보편적인게 아닐까 하는... 그래서 내가 더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