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3일 일요일

[도서]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얼마 전에도 잠깐 언급했던 도서인데, 이제야 다 읽고 느낌을 남겨보려 한다.

참고로 내가 읽은 책은,
범우사에서 출간한 <멋진 신세계, 다시 가본 멋진 신세계>이며,
이성규, 허정애 번역으로 1989년 초판 발행 후, 2006년에 발행된 3판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제목과는 다르게 미래 사회의 디스토피아(?)적인 면을 다룬 소설이며, 결말마저도 비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기분은 꽤 우울하다.

멋진 신세계라는 표현은 두번 정도 나오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첫번째는 버나드가 새비지 존에게 야만인 보존지역을 벗어나 존의 어머니인 린다가 항상 그리며 말하던 런던의 문명 세계로 함께 가자고 했을 때, 새비지 존이 했던 말이었다.

두번째는 새비지 존이 어머니 린다의 임종을 지키는 중에 마주친 델타 쌍둥이들에게 진저리를 치게된다. 한번은 델타 쌍둥이 꼬마들에게, 또 한번은 일을 마치고 소마라는 약을 배급받기 위해 줄서있는 성인 쌍둥이들에게.
그리고 이 델타 계급의 성인 쌍둥이들(162명?)은 배급받을 소마를 고대하며 신세계를 반복하며 감탄하는 장면이었다.

두 장면에서 말하는 멋진 신세계라는 표현은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책의 구성이 다를 수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18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작품의 핵심은 16장이었다.
소위 세계 회장의 한명인 무스타파 몬드와 새비지 존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며, 여기에 올더스 헉슬리가 생각하는 이 작품의 세계관에 대한 대부분의 생각이 나와 있다.
문명 사회를 이끌고 있으며 그 모든 조작과 통제를 다 알고 있는 무스타파 몬드와 문명의 바깥에서 이를 보는 새비지 존의 논쟁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이들의 논쟁에서 종교에 대한 부분이 다소 과장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당시의 올더스 헉슬리조차도 모태 신앙처럼 전승되는 서양에서의 기독교에 대해서 자유롭기는 어려웠을거라는 추측과 내가 비종교인이라서 갖게 되는 저항감(?)이 더해지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소위 가족제도마저 무너뜨린 파격적인 문명의 지배자(무스타파 몬드)가 종교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이 너무 보수적이라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은 초반의 헨리 포스터와 레니나 크로운이 아주 전형적인 문명의 인물로 나타나고, 이어서 버나드 막스와 헬름홀츠 왓슨은 갈등의 인물로써 나온다.
하지만 곧 이어 등장하는 새비지 존은 더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로 부각되면서 중심 인물이 되고 문명을 대표하는 세계 회장과 균형을 맞추고 있는 정도로 부각이 된다.

하지만, 나만의 느낌(?)이라면, 아니 어쩌면 작가의 의도일지 모르지만, 새비지 존은 단지 문명의 반대를 위한 인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작품이라면, 획일화되고 몰개성화된 문명에 맞서는 새비지 존은 본능적이면서 자유롭고 인간적인어야 했겠지만, 실제로는 그도 또한 야만인 지역에서의 전통에 잘 길들여져있는, 또 다른 문명의 노예로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새비지 존이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들 중에는 현재의 우리가 가지는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과 유사한 면이 많이 보인다.
어쩌면 작가는 새비지 존을 통해서 우리들의 현재 삶에 대한 비판도 함께 하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포드 기원의 문명은 야만인 보존지역과 같았던 세상을 개선한 것이니, 그 개선책에 문제가 있다한들 야만인의 세상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런면에서 새비지 존과 무스타파 몬드의 논쟁은 자연스레 무스타파 몬드에게 기울어진다.


정작 새비지 존은 고통과 불편함, 더러움과 질병을 감수하더라도 인간의 자유와 감정, 신과 자연에 대한 본능을 선택하지만, 과연 그런 선택이 옳은지는 의문이다.

행복이 인간의 최고 선인가?
개개인의 최고 선은 개개인이 각자 선택해야 하는가?

자유를 뺏고 행복을 주는 문명, 고통까지도 짊어져야 하는 야만의 완전한 자유,
과연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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