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뇌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어딘가에 독후감이나 요약을 기록했을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어딘지 저 책의 저자가 직면한 상황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저자는 뇌출혈이 일어난 당시와 그 후의 일들을 나름대로 세세히 묘사했다.
그리고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맞아하게 되는 특이한 경험들을 매우 매력적으로 묘사했는데, 자기와 타인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저하되면서 타인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체험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지력이 상실되면서 새롭게 보이는 주변의 세상들이 있었던 듯 했다.
물론 말을 하거나 글을 읽거나 자신의 몸을 생각대로 움직이는 능력도 같이 저하되면서 겪게되는 어려움도 함께 묘사했었다.
그게 사실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저자는 마지막에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수술을 하게 되면 예전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게 되면 새롭게 겪었던 경험을 다시는 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딜레마였던 것 같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좀 어이없는 고민이지만, 겪어 보지 않고서야...
꽤 오랜시간 동안에 걸쳐, 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매우 크다고 느꼈다.
큰 변화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났기에, 변화를 깨달은 건 시간이 많이 지난 후였다.
그 변화란 것은,
- 거의 모든 일에 대한 욕구가 현저하게 감소했다는 것.
- 매사가 귀찮아져서 어지간하면 자꾸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끝내게 된다.
- 과거의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는데, 지금까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일들도 많다.
- 그리고 그 일들에 대한 원인과 후회가 더 크고 명확하게 보인다.
- 두려움이 많아졌다.
- 그 두려움은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많았다.
- 그리고 그런 두려움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데 많은 장애가 된다.
- 이런 두려움은 타인을 나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더 켜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나에 대해서 더 객관적이 되었다. 자존심은 줄어들고 고집도 약해지고 화도 덜 낸다.
- 애초에 인생이나 삶에 대해 애착이 크지 않았었기에, 이런 변화가 더해져서 아주 쉽게 놓아버릴 수 있는 준비가 된 거 같다.
그래도 산 입이라 풀칠은 해야 하니 걱정이 생기긴 한다.
과연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다고 굶어서 죽을 수 있을까.
죽지도 못하고 아프기만 하면 어쩔까.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모든 걸 잊어버려서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허리나 다리가 아파서 도저히 움직일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할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보면 결국은 기운을 내서 일어나야 한다는 건데, 그러고 싶은 욕구마저 바닥이 난 상태.
곰곰 생각하고 몇가지 알아보고 하니, 지금 먹고 있는 약으로 인한 부작용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려움증 때문에 항히스타민제를 주기적으로 복용하는데, 그 약의 부작용 가운데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은, 소화장애, 발기부전, 권태감, 피로, 시력감소...
아주 작은 약, 작은 효과, 작은 부작용, 하지만 오랜 시간 복용으로 누적된 부작용은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사실, 약에 의한 부작용으로만 현재의 나를 설명할 수는 없다.
어쩌면 약에 의한 부작용은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많은 부분들이 일치하고 있어 의심을 해 볼만한 가치가 있으며,
이 약을 끊는 것 만으로도 애초의 상태로 회복이 가능하다면 정말 해 볼만하지 않겠는가.
제목에서 언급한 긍정의 뇌 이야기가 어쩌다 다른쪽으로 빠진 것 같은데, 그건 아니다.
막상 약을 끊고 면역력을 키우기 위한 다른 방법을 고민하려다보니 쓸데 없는 고민이 하나 생겼다.
지금의 상태가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일부는 내가 전에 경험허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 줬다. 타인에 대한 이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조금은 여유롭고 인내심을 갖는 것, 세상에 대한 감사한 마음.
내가 예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면 이런 것을 잃어버리진 않을까?
그랬었지 하는 기억이야 남아 있을테지만, 다시는 똑같은 자리에서 바라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이런 쓰잘데 없는 고민 때문에 순한 맛의 긍정의 뇌라는 제목을 지었던 것이다.
P.S.
긍정의 뇌 저자는 망설임이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책을 써서 내가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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