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9일 화요일

인류는 진화할 수 있을까

찰스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의 의미와는 다른 진화가 가능할까?

전쟁을 종식하고 영구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인종간 차별, 성(性) 차별, 국가와 민족간의 차별, 종교에 따른 차별, 능력과 장애에 따른 차별을 없애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있으며,
우리와 저들, 나와 너의 벽을 무너뜨리고 모두가 자기인 듯, 모두가 타인인 듯 살 수 있으며,
자연과 생명, 그 모두를 품은 지구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소박한것에 만족하며 일원으로써의 소임에 충실하게 살 수 있을까?

찰스 다윈의 진화론의 핵심은 "다양성의 확대를 통한 환경에의 적응"이라는, 다분히 생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의 확대를 위해서, 인간은 최대한 나와는 다른 상대를 찾아 짝짓기를 시도하려는 성향이 있으며, 또 최대한 다양한 상대와 짝짓기를 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놀랍게도 이 욕구는 대부분의 인간 사회의 제도에서 금기시 되고 있다!!)

이렇듯, 자연에서 진행되고 있는 찰스 다윈적 진화와 인간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을 향한 진화는 아주 다른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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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에 들어서면서 (혹은 6월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아베 총리는 한국에 대한 수출품목 규제를 선언했다.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생산되고 있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핵심으로 사용되는 필수품이라 타격이 적지 않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으며, 정부는 애써 침착한 듯이 행동하고 있지만, 각종 뉴스에서는 충격적, 당황, 긴장, 비난의 표정들이 보이고 있다.
소식을 접한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감정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고,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은 "보복"들을 꾸미고 있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셈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예견되었다는 식의 보도를 하고 있는데, 지난 수년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인공섬의 강제 징용 노동 문제 -영화 군함도로 제작- 등으로 국내에서 일본에 대한 반감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던 중,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갑자기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꺼내더니,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치유 재단을 설립하여 일본에서 기금을 납부하기로 했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들 중 다수가 자신들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한일 정부가 임의로 처리한 것이라며 반발했다.
이 기사를 들었을 당시에도 나는 매우 분노했는데, 몇년동안 정의와 진실을 앞세워서 일본을 비난하던 정부가 하루 아침에 돌변해서 일본과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아도 한참을 속았구나, 정부가 국민들을 꼭두각시처럼 뒤에서 조종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뜬금없고 국민 정서와는 동떨어진 정책이, 오히려 일본과의 관계를 더 돌이키기 어려운 수렁으로 빠뜨렸고 어쩌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도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 (국민들의 신뢰를 져버린 하나의 실정이었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에 들아와서는 온갖 적폐를 청산한다는 작업들이 진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일본 강제 징용 노동자들에 대한 배상 여부를 가르는 재판이 박근혜 정부 당시에 대법원에서 진행되었는데, 여기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통해 부당하게 재판에 개입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까지 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사법부의 개혁을 정당화시키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이 사태로 말미암아 결국은 강제 징용 노동자에 대한 배상이 정당하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졌고, 해당 기업들이 자진 배상하지 않아 국내에 출자한 법인의 자산을 강제로 매각까지 종용하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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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얼마나 비이성적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은 바로 이 시점이다.
과연 일본이 왜 분노의 극약 처방을 했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거기에 감정적인 대응을 하는 것이 이후에 얼마나 부끄러워할 행동인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30년 넘도록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땅 노래 가사를 외우고 있으니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말하는 게 과연 얼마나 정당한가?

누군가 너를 좃같이 대하거든, 좃같이 대할 이유를 만들어 줘라.
짐승에겐 몽둥이가 약이다.
이런 말이 분노한 대중에게는 속시원한 속풀이는 될 수 있지만, 그게 진짜 행동으로 표출되는 순간에 우리는 그런 좃같은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인간을 짐승처럼 패는 무뢰배 같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지킬 건 지키고 배워서 아는 건 행동으로 옮기고, 설령 마지막 순간이라고 해도 밑바닥 본능은 드러내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위에 개인적으로 일본인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조금은 이해가 쉬울텐데, 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까?
아베가 좃같이 행동한다고 해서, 그 친분있는 사람이 좃같이 변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아베가 좃같이 행동한다고해서, 수십년 친분이 있던 사람을 아베로 여기고 분노를 표출하는 그 사람이 진정 좃같은 사람 아니겠는가.

아마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어떤 식으로 해결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상처는 깊이 남을테고, 그 트라우마도 오래 갈테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헤쳐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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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단에서 우리가 비 이성적이라고 했던 건 사실 나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다.
왜냐하면 나도 분노했으니까.
하지만 몰랐다.
왜 아베가 그런 좃같은 짓을 저질렀는지.
그들의 입장에선 뭐가 억울하고 답답했는지.

그리고 솔직히 헷갈렸다.
매번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 맺었던 한일 청구권 협정이 어쩌구 하는데, 그에 대해서는 무슨 어두운 기억 마냥 누구하나 제대로 설명해 주지도 않고 있는지.
느낌으로는 대충,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게 지난 2차 대전 당시의 침탈에 대한 배상으로 얼마를 받고 모든 문제에 대해 퉁치기로 했나보다...정도였다.

그런데 자꾸 위안부 문제 꺼내면서 여기 저기에 소녀상 세우고, 거기에 강제 징용 노동 배상하라고 하면서 민간 기업의 자산까지 압류하려고 하니까 욱 했던 거 아닌가...
그럼 왜 판결은 그랗게 난 걸까?

강제 징용 노동의 문제 자체가 한일 청구권 협정 당시에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문제라, 당시의 협정에는 포함되지 않았기에 새로이 판결을 내린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이라는 게 대체 어느 정도까지의 범위를 가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논란이 많을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에상이 가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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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대립과 분열
국가와 민족간의 분쟁과 반목
비 이성적인 감정의 분출과 소모

맨 처음에 언급했던, 인간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과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조금이라도 달라진 점이 있을까?
어쩌면...있을지도 모르겠다.

찰스 다윈적 진화는 다양성의 확대이고, 이 다양성은 서로 다른 개체간의 짝짓기에 의해 발현되며, DNA를 통해 세대간에 전파가 됨으로써 유지된다.
찰스 다윈적 진화는 시간이 지날 수록 인류를 더 다양하게 만들 것이므로 개체들간의 이질감은 더 커질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분열이다. 엔트로피의 상승이고 자유도의 폭발이다.
대립과 분열, 나누고 떨어지고 구분한다.
지금의 세계도 그렇다. 소비에트 연방이 분화되었고, 다민족 국가에서의 독립 요구는 더 커진다.

하지만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를 위한 인간의 진화는 오히려 그 반대다.
찰스 다윈적 진화를 거스르는 방향이다.
시간이 지날 수록 더 어려워지는 일이다.
더욱더 이를 힘들게 많드는 결정적인 요인은, 세대간 전파가 안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꿈꾸는 세계는 개별 인간들이 꿈꾸는 세계의 총합이고, 개별 인간들이 꿈꾸는 세계는 각자의 노력과 고민 숙고의 결과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 새로 태어난 개체는 처음부터 이 과정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다람쥐 챗바퀴 돌 듯, 모든 개체들이 동일한 노력을 하지만, 나아지는 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나마 이 노력을 조금은 쉽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건 "교육"이다.
아마도 수십세대 이상은 "무엇"을 교육하는 가에 대해 고민할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다.
교육의 효율성, 그래서 세대를 거쳐감에 따라 더 효율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방법.
첫번째 세대간의 교육이 1의 효율을 가졌다면, 두번째 세대간의 교육에는 1.1의 효율이 나타날 수 있는 방법이 나와야 한다.
이제는 교육의 효율이 발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나타나야 하고, 이건 교육 방법의 메타, 혹은 교육 방법론 자체를 발전시킬 프레임에 대한 고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그 때에는 인간이 꿈꾸는 방식의 진화가 언제쯤 실현될 지 예측이라도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아마도 우리는 지금 "무엇"을 교육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수준이지만, 그 "무엇" 조차도 아주 근시안적으로 선택되었다는 걸 감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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