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진보 보수는 단지 이념의 문제일까?
변화와 안정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쓸 수 있지만, 그게 그렇게 큰 차이일까?
각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도, 진보와 보수는 다른 입장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나름대로 양 진영의 논리는 그럴듯 해 보인다.
어쩌면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선택된 진영의 예상과 반대 진영의 우려에 대해서도, 그 결과는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러기에 논의는 충분히 하되, 일단 결정이 되면 예상되는 결과를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우려되는 부작용을 막기위한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여기까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며, 나머지는 운명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의 논의 과정에서 가장 소모적인 것은, 이념 자체에 대한 논쟁이다.
개별 사안에 대한 선택을 두고, 그 사안에 대한 논의가 아닌, 그걸 추진하는 진영의 이념 혹은 반대하는 진영의 이념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는 감정적 대립을 야기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자신의 선택보다는 상대방의 선택이 보다 나을 수 있음을 인지한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을 관철시키려는 억지스러운 욕심에서 표출되곤 한다.
과연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으로 갈라놓으면, 모든 사안에 대한 선택은 미리 예측이 가능할까?
절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미리 예측이 가능할 정도로 절대적인 보수와 절대적인 진보는 존재할 수도 없는 이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예측이 가능하다면, 정당을 이루는 국회의원들이 왜 필요하겠는가.
개별 사안에 대해 논의하고 표결하는 절차가 왜 필요하겠는가.
예측 가능한 진보의 의견과 예측 가능한 보수의 의견이 이미 나와 있는 셈이다.
의견의 당위성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최종 결정만 남을 뿐이다.
진보적이지 않는 보수는 고여서 썩은 물이며, 보수적이지 않은 진보는 정처없이 떠도는 거렁뱅이에 지난지 않는다.
보수라도 잘못된 것은 고치고,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는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보수가 경계해야 할 것은 보수 그 자체이다.
진보라 할지라도 내가 가진 것의 가치를 볼 줄 알고 지켜내는 강직함이 필요하다. 진보가 경계해야 할 것은 진보 그 자체이다.
진보도 변화해 왔으며, 보수도 변화해 왔다.
지금의 진보/보수도 과거의 진보/보수가 보면 사이비라고 비난할 것이며, 미래의 진보/보수가 보면 구태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것이 딱 우리의 현재 수준이다.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와 동족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전쟁을 벌이는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과정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깟 이념이 뭐라고..."
이념으로 다투어 서로의 목숨을 빼앗고 상처를 입히고 재산을 파괴했다.
그리고 이념이란 머리속에서 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가치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이념으로 다투고 있다.
그깟 이념이 뭐라고...
역사를 통해 배웠어여 할 교훈은 어디로 갔을까.
P.S.
이념은 단지 명분이었을 뿐.
영토 전쟁의 명분이었고, 정치인들의 야망을 채우기 위한 명분이었을 뿐.
더 이상 이념의 희생양이 되지 말기를 갈망한다.
2016년 12월 21일 수요일
2016년 12월 17일 토요일
내부자의 증언이 어려운 이유
여전히 한참 진행 중인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아주 흥미로운 볼거리는 국정조사 청문회이다.
이른바 최순실 국정조사(정식 명칭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에서는 그 동안 '찌라시'라고 치부되거나, '~카더라'는 시중의 출처 없는 소문과 괴담들이 망라되어 있어서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국정조사의 법률적 한계로 인해, 증인의 출석을 강제할 수 없고, 강제적인 수사의 권한이 없어서 진실을 밝히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국정조사 위원들과 언론들이 한목소리로 "내부자의 양심적인 증언"을 호소하는 것은 바로 이런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고, 결정적인 진실의 봉인을 푸는 실마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번째,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의 행적을 밝히는 것은 아마도 내부자의 용기와 결단이 없다면 불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두번째, 김영재 성형외과의원 원장의 세월호 당일 행적 또한 내부자의 자발적 증언이 없다면 밝혀내기가 쉽지 않으리라 본다.
청와대의 경우에는 청와대 직원들, 김영재 원장의 경우엔 알리바이로 내세운 장모, 골프 상대, 병원 간호사 정도가 내부자가 될 것이다.
자, 만약에 김영재 원장의 병원 간호사가 원장의 증언 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간호사가 알고 있는 원장의 의심스러운 언행은, 단지 원장이 밝힌 행선지이거나 원장이 병원을 비운 시간이거나 한, 극히 일부라고 말이다.
이 사실을 국정조사위원에게 폭로하거나 언론에 공대한다면?
간호사는 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게 될 것은 명백하다. 원장으로부터 파면 당하거나, 병원이 문을 닫거나.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소한 사실로 인해서 진실이 드러날 확률이 매우 미미하다고 생각된다면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양심의 문제?
내가 아는 것보다, 아마 장모나 골프 상대가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을 밝힐 더 확실한 증거이고, 양심의 가책이라면 자신보다 그 사람들이 더 커야 한다고 위안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비밀을 가지고 있는 한, 원장은 자신을 해고할 수 없다는 보장까지 확보한다.
청와대의 의무실에 근무했다는 의무장교들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들이 비밀을 폭로해서 얻을 수 있는 잇점은, 비밀을 유지해서 얻을 수 있는 잇점에 비해 터무니 없이 보잘 것 없다.
결국은 '좋은 경찰 나쁜 경찰'과 같은 방법만이 남는다.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을 경우에 처해질 공포를 극대화 해서 공포스럽게 만듦으로써, 비밀을 폭로했을 경우에 공포에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하는 방법.
이른바 최순실 국정조사(정식 명칭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에서는 그 동안 '찌라시'라고 치부되거나, '~카더라'는 시중의 출처 없는 소문과 괴담들이 망라되어 있어서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국정조사의 법률적 한계로 인해, 증인의 출석을 강제할 수 없고, 강제적인 수사의 권한이 없어서 진실을 밝히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국정조사 위원들과 언론들이 한목소리로 "내부자의 양심적인 증언"을 호소하는 것은 바로 이런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고, 결정적인 진실의 봉인을 푸는 실마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번째,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의 행적을 밝히는 것은 아마도 내부자의 용기와 결단이 없다면 불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두번째, 김영재 성형외과의원 원장의 세월호 당일 행적 또한 내부자의 자발적 증언이 없다면 밝혀내기가 쉽지 않으리라 본다.
청와대의 경우에는 청와대 직원들, 김영재 원장의 경우엔 알리바이로 내세운 장모, 골프 상대, 병원 간호사 정도가 내부자가 될 것이다.
자, 만약에 김영재 원장의 병원 간호사가 원장의 증언 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간호사가 알고 있는 원장의 의심스러운 언행은, 단지 원장이 밝힌 행선지이거나 원장이 병원을 비운 시간이거나 한, 극히 일부라고 말이다.
이 사실을 국정조사위원에게 폭로하거나 언론에 공대한다면?
간호사는 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게 될 것은 명백하다. 원장으로부터 파면 당하거나, 병원이 문을 닫거나.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소한 사실로 인해서 진실이 드러날 확률이 매우 미미하다고 생각된다면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양심의 문제?
내가 아는 것보다, 아마 장모나 골프 상대가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을 밝힐 더 확실한 증거이고, 양심의 가책이라면 자신보다 그 사람들이 더 커야 한다고 위안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비밀을 가지고 있는 한, 원장은 자신을 해고할 수 없다는 보장까지 확보한다.
청와대의 의무실에 근무했다는 의무장교들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들이 비밀을 폭로해서 얻을 수 있는 잇점은, 비밀을 유지해서 얻을 수 있는 잇점에 비해 터무니 없이 보잘 것 없다.
결국은 '좋은 경찰 나쁜 경찰'과 같은 방법만이 남는다.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을 경우에 처해질 공포를 극대화 해서 공포스럽게 만듦으로써, 비밀을 폭로했을 경우에 공포에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하는 방법.
2016년 12월 1일 목요일
우리는 합리적인가? 이성적인가? 논리적인가?
나를 비롯해 내 친구와 가족들, 친치들, 직장 동료와 선후배들, 동네 이웃들 등등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 (들어서)알게된 더 많은 사람들.
과연 나 혹은 내 주변 혹은 주변의 지인들 가운데 충분히 합리적/이성적/논리적인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몇% 정도의 사람들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
*----------------------------------------------------------
근원적으로 따지자면 인간으로서 그 누군들 합리적/이성적/논리적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아는 것이 너무 얕아서 그런 판단을 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일 것이다.
단지, 우리 현 시대의 평균적인 성인들이 아는 것을 기준으로 삼자.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기반으로 하는 합리적/이성적/논리적 수준임을 가정한다.
-----------------------------------------------------------*
최근의 정치적인 혼란 상황에서, 제반 문제점들에 대해서 근본에서의 재고찰이 필요해 보이며, 몇가지를 생각하다 보니 우리들이 너무 직관적/감정적이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몇가지 예를 들어 보일 것인데, 각 사례에 대해 우리들이 어떤식으로 판단을 했던 것인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정치적인 입장(진보/보수 가 아니라 각 정책 사안에 따른 개별적인 판단이 필요)
2. 선거에 나선 후보에 대한 판단(여당/야당이 아니라 후보의 공약 자질에 대한 판단)
3. 뉴스의 사건 보도(선입견을 배제하고 보도한 내용을 기반으로 진실이 무엇인지 판단)
4. 자동차의 선택(브랜드/광고에 현혹되기 보다는 용도에 따른 기능,성능,가격으로 판단)
5. 스마트폰의 선택(상동)
6. 아날로그-디지털의 논쟁(디지털의 대중화에 대한 반발로 아날로그에 대한 장점이 부각되기도 하지만 그게 정말 꼭 필요한 것인지)
7. 좌-우 이념에 대한 가치의 혼동 (좌우익은 진보와 보수로 대변되는 것인데 언제부턴지 대한민국에서는 좌익=종북이라는 프레임이 당연시. 북한 내부에도 좌-우익이 있을거 같지 않은지?)
8. 마찬가지로 좌우익 = 자본주의&공산주의 등식 고착화.(이게 과연 맞을지. 자본주의 자체가 계속 변하고 있는 마당에...)
최근의 상황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에 민심의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다.
아마도 역대 최다 국민이 참가한 시위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 와중에 정 반대의 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대통령의 탄핵이나 하야에 반대한다는 시위도 있는데, 그 수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고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다.
또한, 국회 내에서도 대규모의 국민들이 집회를 하는 것에 대해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거나, '촛불 집회에 종북 좌파 세력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식으로 폄하하거나 음모론을 제기하는 국회의원도 있었다.
대다수 국민들과는 반대의 의견을 가진 이들은 꽤 뿌리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공산주의, 빨갱이, 인민, 좌파, 좌익, 종북, 친북이라는 단어에 대한 발작에 가까운 두려움을 말이다.
그리고 이 분들 대다수가 60대 이상의 노년층이기에 적어도 직접적으로 6.25를 겪으며 트라우마를 갖게 되셨거나 혹은 군사 독재 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세뇌에 가까울 정도로 반복해서 심어준 후천적인 두려움에 온전히 세뇌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노년층의 이러한 무조건적인 반공 사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 세대를 다시 무조건적인 반-반공 사상에 빠지게 만들었다.
즉, 반공이라는 단어 자체를 매우 혐오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젊은 세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약 30년 정도만 지나면 대한민국은 극좌파적인 사회가 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다.
매우 불행한 현상인데, 이러한 극과 극으로의 전이 현상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이 이성적/합리적/논리적으로 추구되지 않았다는 점이 그러하다.
공포-두려움에 의한 무조건적인 반발과 회피 본능이 발현되었고, 두려움을 강요당한 세대들은 다시 그 강요를 두려워하게 되어 반발하고 회피하는...
그런데, 이런 현상이 비단 정치적인 분야에서만 일어나난 것이 아니란 점.
국내에서 굳건한 입지를 다지고 있는 현대자동차는 그 동안 매우 많은 비난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해외와 국내의 차별적인 품질/가격//서비스와 소비자를 대하는 마인드가 매우 고압적이라는 점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동안 밝혀진 자동차 자체의 문제점들, 소극적인 리콜, 품질이나 가격의 역차별 등등이 사실임이 밝혀진 후에도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상대적으로 낙폭이 적었다.(떨어지긴 했으나 밝혀진 사실들에 비하면 적다는...다분히 주관적인 의견)
왜일까?
물론 드러난 단점들이 감점 요인이긴 하지만, 그 동안 현대차가 쌓아온 신뢰가 있었던 건 아닐까?
몇가지 단점들 때문에 타사의 차를 구매했더니, 현대차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단점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고...
일부 반-현대차 주의자들은 여전히 현대차를 구매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잘못된 걸 뻔히 알면서도 구매해 주니까 현대차가 시정을 하지 않는 거라고. 사실로 밝혀진 것들조차 믿지 않거나 모르는 척 외면한다고.
과연 어느 쪽의 주장이 맞을까?
삼성의 갤럭시 스마트폰과 애플의 아이폰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비방하고 자신의 장점을 자랑하면서 언쟁하기 일쑤다.
과연 맞는 주장이 있기는 한걸까?
이런 일련의 갈등에서 현명한 판단이 많이 아쉽기도 하지만,
과연 우리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 (들어서)알게된 더 많은 사람들.
과연 나 혹은 내 주변 혹은 주변의 지인들 가운데 충분히 합리적/이성적/논리적인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몇% 정도의 사람들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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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으로 따지자면 인간으로서 그 누군들 합리적/이성적/논리적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아는 것이 너무 얕아서 그런 판단을 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일 것이다.
단지, 우리 현 시대의 평균적인 성인들이 아는 것을 기준으로 삼자.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기반으로 하는 합리적/이성적/논리적 수준임을 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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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정치적인 혼란 상황에서, 제반 문제점들에 대해서 근본에서의 재고찰이 필요해 보이며, 몇가지를 생각하다 보니 우리들이 너무 직관적/감정적이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몇가지 예를 들어 보일 것인데, 각 사례에 대해 우리들이 어떤식으로 판단을 했던 것인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정치적인 입장(진보/보수 가 아니라 각 정책 사안에 따른 개별적인 판단이 필요)
2. 선거에 나선 후보에 대한 판단(여당/야당이 아니라 후보의 공약 자질에 대한 판단)
3. 뉴스의 사건 보도(선입견을 배제하고 보도한 내용을 기반으로 진실이 무엇인지 판단)
4. 자동차의 선택(브랜드/광고에 현혹되기 보다는 용도에 따른 기능,성능,가격으로 판단)
5. 스마트폰의 선택(상동)
6. 아날로그-디지털의 논쟁(디지털의 대중화에 대한 반발로 아날로그에 대한 장점이 부각되기도 하지만 그게 정말 꼭 필요한 것인지)
7. 좌-우 이념에 대한 가치의 혼동 (좌우익은 진보와 보수로 대변되는 것인데 언제부턴지 대한민국에서는 좌익=종북이라는 프레임이 당연시. 북한 내부에도 좌-우익이 있을거 같지 않은지?)
8. 마찬가지로 좌우익 = 자본주의&공산주의 등식 고착화.(이게 과연 맞을지. 자본주의 자체가 계속 변하고 있는 마당에...)
최근의 상황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에 민심의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다.
아마도 역대 최다 국민이 참가한 시위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 와중에 정 반대의 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대통령의 탄핵이나 하야에 반대한다는 시위도 있는데, 그 수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고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다.
또한, 국회 내에서도 대규모의 국민들이 집회를 하는 것에 대해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거나, '촛불 집회에 종북 좌파 세력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식으로 폄하하거나 음모론을 제기하는 국회의원도 있었다.
대다수 국민들과는 반대의 의견을 가진 이들은 꽤 뿌리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공산주의, 빨갱이, 인민, 좌파, 좌익, 종북, 친북이라는 단어에 대한 발작에 가까운 두려움을 말이다.
그리고 이 분들 대다수가 60대 이상의 노년층이기에 적어도 직접적으로 6.25를 겪으며 트라우마를 갖게 되셨거나 혹은 군사 독재 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세뇌에 가까울 정도로 반복해서 심어준 후천적인 두려움에 온전히 세뇌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노년층의 이러한 무조건적인 반공 사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 세대를 다시 무조건적인 반-반공 사상에 빠지게 만들었다.
즉, 반공이라는 단어 자체를 매우 혐오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젊은 세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약 30년 정도만 지나면 대한민국은 극좌파적인 사회가 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다.
매우 불행한 현상인데, 이러한 극과 극으로의 전이 현상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이 이성적/합리적/논리적으로 추구되지 않았다는 점이 그러하다.
공포-두려움에 의한 무조건적인 반발과 회피 본능이 발현되었고, 두려움을 강요당한 세대들은 다시 그 강요를 두려워하게 되어 반발하고 회피하는...
그런데, 이런 현상이 비단 정치적인 분야에서만 일어나난 것이 아니란 점.
국내에서 굳건한 입지를 다지고 있는 현대자동차는 그 동안 매우 많은 비난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해외와 국내의 차별적인 품질/가격//서비스와 소비자를 대하는 마인드가 매우 고압적이라는 점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동안 밝혀진 자동차 자체의 문제점들, 소극적인 리콜, 품질이나 가격의 역차별 등등이 사실임이 밝혀진 후에도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상대적으로 낙폭이 적었다.(떨어지긴 했으나 밝혀진 사실들에 비하면 적다는...다분히 주관적인 의견)
왜일까?
물론 드러난 단점들이 감점 요인이긴 하지만, 그 동안 현대차가 쌓아온 신뢰가 있었던 건 아닐까?
몇가지 단점들 때문에 타사의 차를 구매했더니, 현대차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단점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고...
일부 반-현대차 주의자들은 여전히 현대차를 구매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잘못된 걸 뻔히 알면서도 구매해 주니까 현대차가 시정을 하지 않는 거라고. 사실로 밝혀진 것들조차 믿지 않거나 모르는 척 외면한다고.
과연 어느 쪽의 주장이 맞을까?
삼성의 갤럭시 스마트폰과 애플의 아이폰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비방하고 자신의 장점을 자랑하면서 언쟁하기 일쑤다.
과연 맞는 주장이 있기는 한걸까?
이런 일련의 갈등에서 현명한 판단이 많이 아쉽기도 하지만,
과연 우리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2016년 11월 19일 토요일
[도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제목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저자 : 코맥 매카시 (Cormac McCarthy)
역자 : 임재서
출판사 : 사피엔스21
국내에서는 영화로 더 잘 알려진 원작의 소설.
나도 영화를 먼저 본 후, 한참이 지나서 원작이 있음을 알았고, 또 한참이 지나서 책으로 읽게 되었다.
원작은 2005년 발표, 영화는 2008년 개봉.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영화 개봉 당시에는 매우 잘 만든 영화라는 호평이 자자했는데, 생각보다 그닥 재미있지는 않았다.
이 또한 수입 배급사의 과장 홍보 때문이었을까?
하비에르 바르뎀, 토미 리 존스 등 주연급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좋았다.
감독은 코엔 형제.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간의 긴장감, 그리고 이들의 뒤를 한 발 늦게 따라가며 수사하는 보안관의 절망감.
안톤 쉬거의 냉혈함이 주는 섬뜩함.
모스의 능숙함과 영리함, 그러나 쪽기는 자로서의 긴장감.
벨 보안관의 절망감.
소설을 읽어 보면, 코엔 형제가 왜 뛰어난 감독인지를 알 수 있다.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인지, 영화를 소설로 펴 낸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
작품의 재미가 떨어지는 것은, 작품의 배경과 소재가 우리에겐 그다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의 가치는 세밀한 묘사에 있다.
하지만 나로써는 글자만으로 상상해내기 어려운 장면의 묘사들이 많았기에, 코엔 형제의 재현에 감탄을 했으며, 원작만을 보았다면 많은 부분이 어렵게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벨 보안관의 독백과 같은 생각들은, 이 책이 단순한 액션 스릴러가 아님을 보여준다.
책의 일부를 스캔해서 올려 두는 것이 저작권법에 위배 될 수도 있지만, 이 책의 느낌을 활자화된 상태로 보여주는 것이 제일 적절하다 생각했다.
매우 제한된 양이기에 양해를 구하는 바이며, 문제가 될 시에는 바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노쇠한 보안관 벨은 점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을 버거워하며 한탄을 한다.
그리고 전쟁 영웅으로 훈장을 받았던 일의 뒤에 숨겨진 진실로 자책을 한다.
책의 말미는 조금 의아한데, 영화화 되지 않은 부분들이 벨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책에서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인물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당혹하게 만들며, 구체적 설명이 없었던 모 사건의 증인으로 출석을 하는 부분 등이 나온다.
연작 소설의 한 부분만을 떼어낸 듯이 참으로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이며, 역자의 주석이 없었다면 내내 궁금했을 것이어서 아쉬움도 있다.
흔히들 노인들이 젊은 세대를 보며 한탄하는 일은 로마시대부터 줄곧 이어진 일이라고 치부한다.
한편으로는 세상은 결국 돌고 도는 것이라며, 지금 일어난 일이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라며 위안으로 삼는다.
과연 노인들의 경고는 그저 꼰대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벨 보안관의 한탄처럼 세상은 점점 나락으로 치닫고 있는 것일까.
저자 : 코맥 매카시 (Cormac McCarthy)
역자 : 임재서
출판사 : 사피엔스21
국내에서는 영화로 더 잘 알려진 원작의 소설.
나도 영화를 먼저 본 후, 한참이 지나서 원작이 있음을 알았고, 또 한참이 지나서 책으로 읽게 되었다.
원작은 2005년 발표, 영화는 2008년 개봉.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영화 개봉 당시에는 매우 잘 만든 영화라는 호평이 자자했는데, 생각보다 그닥 재미있지는 않았다.
이 또한 수입 배급사의 과장 홍보 때문이었을까?
하비에르 바르뎀, 토미 리 존스 등 주연급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좋았다.
감독은 코엔 형제.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간의 긴장감, 그리고 이들의 뒤를 한 발 늦게 따라가며 수사하는 보안관의 절망감.
안톤 쉬거의 냉혈함이 주는 섬뜩함.
모스의 능숙함과 영리함, 그러나 쪽기는 자로서의 긴장감.
벨 보안관의 절망감.
소설을 읽어 보면, 코엔 형제가 왜 뛰어난 감독인지를 알 수 있다.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인지, 영화를 소설로 펴 낸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
작품의 재미가 떨어지는 것은, 작품의 배경과 소재가 우리에겐 그다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의 가치는 세밀한 묘사에 있다.
하지만 나로써는 글자만으로 상상해내기 어려운 장면의 묘사들이 많았기에, 코엔 형제의 재현에 감탄을 했으며, 원작만을 보았다면 많은 부분이 어렵게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벨 보안관의 독백과 같은 생각들은, 이 책이 단순한 액션 스릴러가 아님을 보여준다.
책의 일부를 스캔해서 올려 두는 것이 저작권법에 위배 될 수도 있지만, 이 책의 느낌을 활자화된 상태로 보여주는 것이 제일 적절하다 생각했다.
매우 제한된 양이기에 양해를 구하는 바이며, 문제가 될 시에는 바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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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공공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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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유래가 된 싯구의 소개.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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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페이지. 이 부분은 벨 보안관의 얘기이며 이 책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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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 이 책의 재미있는 주석. 핏자국 주석. |
노쇠한 보안관 벨은 점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을 버거워하며 한탄을 한다.
그리고 전쟁 영웅으로 훈장을 받았던 일의 뒤에 숨겨진 진실로 자책을 한다.
책의 말미는 조금 의아한데, 영화화 되지 않은 부분들이 벨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책에서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인물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당혹하게 만들며, 구체적 설명이 없었던 모 사건의 증인으로 출석을 하는 부분 등이 나온다.
연작 소설의 한 부분만을 떼어낸 듯이 참으로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이며, 역자의 주석이 없었다면 내내 궁금했을 것이어서 아쉬움도 있다.
흔히들 노인들이 젊은 세대를 보며 한탄하는 일은 로마시대부터 줄곧 이어진 일이라고 치부한다.
한편으로는 세상은 결국 돌고 도는 것이라며, 지금 일어난 일이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라며 위안으로 삼는다.
과연 노인들의 경고는 그저 꼰대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벨 보안관의 한탄처럼 세상은 점점 나락으로 치닫고 있는 것일까.
2016년 11월 4일 금요일
세태무상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은 연일 급락하고 있으며, 지리멸렬해 보이던 야당과 야당의 대선주자들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상태이다.
드러난 것만으로도 불법적인 것이 명확해 보이고, 드러나지 않았으나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정황은 명약관화하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2차례 있었지만 모두 미흡했던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때마다 검찰에게 수사 가이드를 지시한 듯이 보이는 대통령의 언급으로 미루어, 두번째 대국민 사과에서 '검찰의 수사와 특검까지도 수용하겠다'는 말은 특검까지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로까지 의심될 지경이다.
한마디로, 대통령의 말이라면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3년의 모든 것마저 의심스러우며, 대통령이 배신자였다는 분노도 숨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 자신의 이러한 감정적인 격정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감정적으로 큰 변화가 있는 경우에, 이성적인 판단은 그만큼 약해지기 마련이고, 또 그래서 쉬이 잊혀지기도 하는 법이다.
약해지는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서 몇가지 기억나는 것들을 적어 보려 한다.
불과 1,2개월 전만 해도 '종북좌파'라는 단어는 낙인처럼 사용되었다.
주로 보수 여당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 달아주던 꼬리표 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이런 짓들이 어떻게 힘을 가질 수 있었을까? 정부가 꾸준히 북한의 위험함을 강조했고, 북한은 미사일과 핵으로 여기에 힘을 실어 주었고, 우리 국민들은 스스로의 판단을 유보하고 정부의 프라퍼갠다를 그냥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젠 누구도 섣불리 '종북좌파'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가 어려워졌다.
임기 내내 북한에 의한 위협을 앞세우고,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라며 국민들 겁주기에 힘을 쓴 대통령과 그 정부의 패러다임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점과 의혹들은 모두 '정치공세'로 치부하거나 '팩트'만을 요구하고, '법과 원칙'만을 부르짖었기에, 완전히 드러나기 전에는 말도 꺼내선 안되는 것이었고, 법과 원칙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잣대는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서 마음대로 적용되었기에 양지와 음지의 온도 차이는 극대화 되었으리라.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의 친이계 의원들은 호가호위하며 실세인 듯 행동했지만, 정권이 바뀌자마자 고행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친박계 의원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과연 이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얼마나 알고 줄을 섰던 것인지, 잘 모르면서 줄을 섰다면 그 무책임함과 무능함으로 지탄을 받을 것이며, 알면서도 줄을 섣다면 그 비열함으로 지탄을 받을 처지다.
언론.
아마도 이번 사태에 대한 핵심 역할을 한 것이 언론이 아니었나 싶다.
전통적인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 - 대한민국 내에서의 상대적인 보수와 진보일 뿐이다 -은 이전까지 자신의 역할을 잘 지켜냈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주필을 청와대가 공격하면서 보수 언론들이 일제히 정부의 반대편에 서게 되면서 여론을 들끓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만약 보수 언론들이 정부를 호위하고, 의혹이 드러날 때마다 정부의 편에서 나팔수 역할을 했더라면 과연 이 사태가 어떻게 되었을까?
이번 정권 뿐 아니라 이전의 여러 정권들에서 제기되었던 의혹들처럼 단지 의혹으로만 끝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밝혀지지 않은 그 수많은 의혹 가운데 일부는 이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사건들이 없었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의혹을 밝힐 수 있는지의 여부가 언론에 달려 있다는 뜻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누구보다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보수 논객들.
그들이야말로 악랄하게 종북좌파 낙인 찍기에 앞장 선 인물들이었고, 그 어느 때 보다 국민들을 갈라 놓는데 적극적이었던 인물들 이었다. 그랬던 인물들이 어떻게 변했는가? 이들이 아직도 대통령을 옹호한다면 그 명분이 없음으로 비난 받을 것이며, 대통령을 등진다면 그 가벼움으로 비난 받을 것이다.
나라가 어지럽다.
나라가 시끄럽다.
나라가 혼란스럽다.
마치 안개 속에 들어 앉은 듯, 모두가 지척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떠들어 대고 있는 양상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안개가 걷히고 난 후를 생각해야 한다. 아니 모두가 그래야 한다.
그리고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안개가 걷히고 난 후에, 안개 속에서 떠들고 부르짖었던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 모두가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의 정치가 바뀌고, 정치인이 바뀌고, 대한민국이 바뀐다.
더 나아가서, 종북좌파라는 낙인을 씌우고 수구꼴통이라는 비난을 일삼았던 것도 더 큰 시야에서 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뜻을 같이한다고 모인 당파 내부에서 다시 세력을 나누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언론이 지켜야할 유일한 자존심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권세에 아부하는 것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무거운 가치를 무겁게 지켜나가는 이가 없는 이 세태가 참으로 무상할 뿐이다.
드러난 것만으로도 불법적인 것이 명확해 보이고, 드러나지 않았으나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정황은 명약관화하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2차례 있었지만 모두 미흡했던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때마다 검찰에게 수사 가이드를 지시한 듯이 보이는 대통령의 언급으로 미루어, 두번째 대국민 사과에서 '검찰의 수사와 특검까지도 수용하겠다'는 말은 특검까지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로까지 의심될 지경이다.
한마디로, 대통령의 말이라면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3년의 모든 것마저 의심스러우며, 대통령이 배신자였다는 분노도 숨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 자신의 이러한 감정적인 격정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감정적으로 큰 변화가 있는 경우에, 이성적인 판단은 그만큼 약해지기 마련이고, 또 그래서 쉬이 잊혀지기도 하는 법이다.
약해지는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서 몇가지 기억나는 것들을 적어 보려 한다.
불과 1,2개월 전만 해도 '종북좌파'라는 단어는 낙인처럼 사용되었다.
주로 보수 여당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 달아주던 꼬리표 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이런 짓들이 어떻게 힘을 가질 수 있었을까? 정부가 꾸준히 북한의 위험함을 강조했고, 북한은 미사일과 핵으로 여기에 힘을 실어 주었고, 우리 국민들은 스스로의 판단을 유보하고 정부의 프라퍼갠다를 그냥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젠 누구도 섣불리 '종북좌파'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가 어려워졌다.
임기 내내 북한에 의한 위협을 앞세우고,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라며 국민들 겁주기에 힘을 쓴 대통령과 그 정부의 패러다임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점과 의혹들은 모두 '정치공세'로 치부하거나 '팩트'만을 요구하고, '법과 원칙'만을 부르짖었기에, 완전히 드러나기 전에는 말도 꺼내선 안되는 것이었고, 법과 원칙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잣대는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서 마음대로 적용되었기에 양지와 음지의 온도 차이는 극대화 되었으리라.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의 친이계 의원들은 호가호위하며 실세인 듯 행동했지만, 정권이 바뀌자마자 고행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친박계 의원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과연 이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얼마나 알고 줄을 섰던 것인지, 잘 모르면서 줄을 섰다면 그 무책임함과 무능함으로 지탄을 받을 것이며, 알면서도 줄을 섣다면 그 비열함으로 지탄을 받을 처지다.
언론.
아마도 이번 사태에 대한 핵심 역할을 한 것이 언론이 아니었나 싶다.
전통적인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 - 대한민국 내에서의 상대적인 보수와 진보일 뿐이다 -은 이전까지 자신의 역할을 잘 지켜냈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주필을 청와대가 공격하면서 보수 언론들이 일제히 정부의 반대편에 서게 되면서 여론을 들끓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만약 보수 언론들이 정부를 호위하고, 의혹이 드러날 때마다 정부의 편에서 나팔수 역할을 했더라면 과연 이 사태가 어떻게 되었을까?
이번 정권 뿐 아니라 이전의 여러 정권들에서 제기되었던 의혹들처럼 단지 의혹으로만 끝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밝혀지지 않은 그 수많은 의혹 가운데 일부는 이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사건들이 없었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의혹을 밝힐 수 있는지의 여부가 언론에 달려 있다는 뜻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누구보다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보수 논객들.
그들이야말로 악랄하게 종북좌파 낙인 찍기에 앞장 선 인물들이었고, 그 어느 때 보다 국민들을 갈라 놓는데 적극적이었던 인물들 이었다. 그랬던 인물들이 어떻게 변했는가? 이들이 아직도 대통령을 옹호한다면 그 명분이 없음으로 비난 받을 것이며, 대통령을 등진다면 그 가벼움으로 비난 받을 것이다.
나라가 어지럽다.
나라가 시끄럽다.
나라가 혼란스럽다.
마치 안개 속에 들어 앉은 듯, 모두가 지척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떠들어 대고 있는 양상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안개가 걷히고 난 후를 생각해야 한다. 아니 모두가 그래야 한다.
그리고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안개가 걷히고 난 후에, 안개 속에서 떠들고 부르짖었던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 모두가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의 정치가 바뀌고, 정치인이 바뀌고, 대한민국이 바뀐다.
더 나아가서, 종북좌파라는 낙인을 씌우고 수구꼴통이라는 비난을 일삼았던 것도 더 큰 시야에서 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뜻을 같이한다고 모인 당파 내부에서 다시 세력을 나누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언론이 지켜야할 유일한 자존심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권세에 아부하는 것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무거운 가치를 무겁게 지켜나가는 이가 없는 이 세태가 참으로 무상할 뿐이다.
2016년 10월 28일 금요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이유
온 나라가 뜨겁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공식적인 책임도 없는 한낱 개인에게 비밀리에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이유이다.
수 많은 청와대의 참모진과 비서관들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그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적절한 위치에 공개적으로 임명을 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그 사람이 대중에게 공개되기에는 흠결이 많았던 모양이다.
최순실 게이트로 불리는 이번 사건은, 참으로 어이없고 끔찍한 일이며, 그 동안 설마설마 했던 일들이 실제였던 것으로 드러나 만인에게 충격을 준 검은 백조와 같은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며, 검찰의 조사가 진행 중이고, 특검이 도입될 예정이라 하니 참고 지켜봐야 할 일이다.
이 포스팅에서 다루려고 하는 주제는, 위의 사건을 통해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사건의 일부에 대해 시인하고 사과한 마당에도, 국민들의 반응이 하나가 되지는 않았다.
대다수가 대통령의 탄핵이나 하야를 주장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 또한 높다.
물론, 이번 사태에 대한 시각이 다를 수 있고, 대응 방안에 대해서는 더더욱 다른 입장들이 많을 것이나, 단순한 다음의 여론 조사 결과는 참 의아하다.
http://www.realmeter.net/2016/10/%EB%A6%AC%EC%96%BC%EB%AF%B8%ED%84%B0-10%EC%9B%94-4%EC%A3%BC%EC%B0%A8-%EC%A3%BC%EC%A4%91%EB%8F%99%ED%96%A5-%EC%B5%9C%EC%88%9C%EC%8B%A4-%EA%B5%AD%EC%A0%95%EB%86%8D%EB%8B%A8-%ED%8C%8C/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공식적인 책임도 없는 한낱 개인에게 비밀리에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이유이다.
수 많은 청와대의 참모진과 비서관들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그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적절한 위치에 공개적으로 임명을 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그 사람이 대중에게 공개되기에는 흠결이 많았던 모양이다.
최순실 게이트로 불리는 이번 사건은, 참으로 어이없고 끔찍한 일이며, 그 동안 설마설마 했던 일들이 실제였던 것으로 드러나 만인에게 충격을 준 검은 백조와 같은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며, 검찰의 조사가 진행 중이고, 특검이 도입될 예정이라 하니 참고 지켜봐야 할 일이다.
이 포스팅에서 다루려고 하는 주제는, 위의 사건을 통해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사건의 일부에 대해 시인하고 사과한 마당에도, 국민들의 반응이 하나가 되지는 않았다.
대다수가 대통령의 탄핵이나 하야를 주장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 또한 높다.
물론, 이번 사태에 대한 시각이 다를 수 있고, 대응 방안에 대해서는 더더욱 다른 입장들이 많을 것이나, 단순한 다음의 여론 조사 결과는 참 의아하다.
http://www.realmeter.net/2016/10/%EB%A6%AC%EC%96%BC%EB%AF%B8%ED%84%B0-10%EC%9B%94-4%EC%A3%BC%EC%B0%A8-%EC%A3%BC%EC%A4%91%EB%8F%99%ED%96%A5-%EC%B5%9C%EC%88%9C%EC%8B%A4-%EA%B5%AD%EC%A0%95%EB%86%8D%EB%8B%A8-%ED%8C%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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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realmeter.net |
그렇다.
천재지변에 버금가는 이런 재앙, 그리고 그것이 계속되 왔으며, 어디까지 이어질지도 모를 이 상황에서 21.2%의 국민들은 아직도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다.
대체 왜 그럴까?
왜 대통령이 스스로 시인까지 한 마당에도 여전히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는 걸까?
정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가 황당한 경험이라며 인터넷에 올린 글에서는, 방송에서 최순실 사건에 대한 보도가가 나오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지겹다는 반응에 심지어는 정부가 국민들을 너무 풀어 줬다는 어이없는 말까지 이어졌다고 황당해하던...
그리고, 언제나 보수를 지지하시는 나의 부모님 생각도 들었다.
그 분들은 광우병 사태로 나라가 시끄럽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에는 MBC를 보지 않으시고 KBS만을 시청하셨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을 한 후에, KBS가 정부 여당에 은근히 부정적인 보도를 내 보내자, TV조선과 채널A의 종편을 주로 보시기 시작했다.
문득, 이번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가장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TV조선이며 채널A 또한 거의 비슷한 입장이 되었음을 깨닫고는,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우리 부모님 이제는 어떤 채널을 보셔야 하나?'
그리고 나 또한 내 스스로의 모습을 되짚어 보니,
이명박 전 대통령의 광우병 사태 때에 부모님과 충돌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 보수 진영 언론에서 제기한 찌질한 의혹이, 저 시위대의 피켓과 촛불은 대체 누가 사준걸까하는 것이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TV를 시청하다가, 시위에 대한 보도가 나오고, 아버지 또한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말도 안하고 그냥 일어나서 부모님께 인사도 없이 본가를 떠나서 내 집으로 돌아왔던 적이 있다.
그러니까...나도, 부모님도, 그 신경질적인 누군가도, 그리고 아마도 꽤 많은 우리 나라의 국민들과, 전세계의 꽤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면이 있어 보였다.
그 공통점은 바로, 제목에 있는 그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보기 싫은 것이 자꾸 눈에 보이고 듣기 싫은 소리가 자꾸 들려온다.
보기도 전에, 듣기도 전에 선택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기에...
그리고 보기 싫은 것, 듣기 싫은 것에 대한 반응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상당히 부정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에, 진실로 드러나기 전까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며, 심지어는 진실로 드러나도 인정하지 않거나 다른 핑계를 대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배경에는,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고, 고통스럽거나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기왕에 발단이 되었던 사건이 정치적인 사건이니, 정치인에 대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대통령 선거를 하게 되면 언제나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를 하나 선택해야만 하곤 하는데, 일단 선택을 하고 나면 자신과 그 후보를 동일시하는 경향까지도 보인다.
그 후보의 장점이 드러나거나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지면 자신이 그렇게 된 듯이 의기양양하며, 반대로 후보의 단점이나 치부가 드러나면 한편으로는 자신이 나서서 변명을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위축되기까지 한다.
일단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는, 지지하던 사람은 여전히 지지하고, 반대하던 사람은 계속 불평한다.
그리고 대통령이 잘한 일에도, 못한 일에도 반응은 마찬가지다.
지지자는 잘한 일에 환호하고 못한 일에도 변명하고 스스로 위안한다.
반대자는 잘한 일에서도 결점을 찾아내려 하고, 못한 일에는 불꽃처럼 일어난다.
이 모든 행동의 배경에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으며, 고통과 불편함을 피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정치적 판단과 결정, 행동을 대신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몹시도 편리한 일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개별 사안에 대해 일일이 고민하고 옳고 그름, 유리와 불리를 따져보아야 하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그 결정이 또 국정에 반영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의견과 맞으면 안도하고 맞지 않으면 불평해야 한다.
너무나도 피곤하고 효과도 없는 일인 셈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믿어 버리면, 그리고 그냥 지지하고 옹호하면 만사가 편하다.
그보다는 덜 편하지만, 그냥 믿지 않는 것도 다음으로 편하다.
그냥 넌 나쁜 사람이고 네가 하는 건 다 나쁘고, 넌 언제나 나쁜편 난 좋은 편.
자신의 입장이 완전히 반대로 돌아서기 전까지는 끝까지 믿는게 제일 편하다.
그리고 그렇게 믿기 위해서,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하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들으려 하는 것이다.
P.S.
하지만 대체 어떤 한 인간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수십년을 함께 살았던 가족들도 믿을 수 없는 부분은 존재하기 마련인데, 단지 TV에서 많이 봐 왔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2016년 10월 21일 금요일
감정이 이성을 마비시키는 과정
거의 즉각적인 감정의 반응의 나타나는 경우들이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한데, 그 감정의 반응이 즉각적이고 강할수록 이성적인 판단은 거의 없는 듯이 마비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과연 왜 그런걸까?
법륜스님이 강연한 내용 중에 불교의 12연기와 관련된 강의가 유튜브에 올라와 았는 것으로 아는데, 스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해가 되기는 한다.
물론 그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개인적으로 이 보다 더 구체적인 설명을 접해 본 경험이 없다.
그것의 유래가 어떠하든간에 정말 의식이 관여할 틈이 없이 거의 즉각적으로 반응하게되는 감정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불같은 분노, 자지러들 듯한 웃음, 멈출 수 없는 눈물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의식의 판단 이전에 감정이 먼저 솟구치고, 즉시 그에 수반되는 일련의 반응이 나타나게 되기에, 타인이 보기엔 정상이 아닌 듯 보이고,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하는 표현이 딱 들어 맞는 경우도 있게 되는 것이다.
매우 철저한 자기 반성과 끊임 없는 자기 성찰을 하지 않으면, 이런 감정에 대한 반응을 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며, 일반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인 듯 하다.
그리고 일단 그 감정에 대한 연쇄 반응이 끝 나야만, 이성이 작동하게 되기에, 뒤늦게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하기는 할 지언정, 자신이 왜 그랬는지 파악하고 그것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에 대한 제대로된 방책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어린 아이가 무언가에 놀라서, 두려워서, 화나서, 슬퍼서 갑자기 크게 울거나 할 때, 옆에서 우는 아이에게 "너 대체 왜 우니?"라는 질문을 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질문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어린 아이 자신도 자신이 왜 우는지 판단할 이성이 작동하지 않고 있는데...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한데, 그 감정의 반응이 즉각적이고 강할수록 이성적인 판단은 거의 없는 듯이 마비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과연 왜 그런걸까?
법륜스님이 강연한 내용 중에 불교의 12연기와 관련된 강의가 유튜브에 올라와 았는 것으로 아는데, 스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해가 되기는 한다.
물론 그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개인적으로 이 보다 더 구체적인 설명을 접해 본 경험이 없다.
그것의 유래가 어떠하든간에 정말 의식이 관여할 틈이 없이 거의 즉각적으로 반응하게되는 감정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불같은 분노, 자지러들 듯한 웃음, 멈출 수 없는 눈물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의식의 판단 이전에 감정이 먼저 솟구치고, 즉시 그에 수반되는 일련의 반응이 나타나게 되기에, 타인이 보기엔 정상이 아닌 듯 보이고,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하는 표현이 딱 들어 맞는 경우도 있게 되는 것이다.
매우 철저한 자기 반성과 끊임 없는 자기 성찰을 하지 않으면, 이런 감정에 대한 반응을 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며, 일반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인 듯 하다.
그리고 일단 그 감정에 대한 연쇄 반응이 끝 나야만, 이성이 작동하게 되기에, 뒤늦게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하기는 할 지언정, 자신이 왜 그랬는지 파악하고 그것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에 대한 제대로된 방책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어린 아이가 무언가에 놀라서, 두려워서, 화나서, 슬퍼서 갑자기 크게 울거나 할 때, 옆에서 우는 아이에게 "너 대체 왜 우니?"라는 질문을 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질문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어린 아이 자신도 자신이 왜 우는지 판단할 이성이 작동하지 않고 있는데...
2016년 9월 30일 금요일
[잡념] 죽음 같은 잠을 자고 나면
간혹 아주 죽은 듯이 잠을 자는 경우가 있다.
아주 졸린 약 - 알러지 진정 약 -을 먹거나 고된 육체적 행위 뒤에 경험하게 되는데,
이런 잠을 자고 깨어나면 참 색다른 느낌이 든다.
과연 잠들기 전의 세상이 진짜였던 것인지 의문이 들곤 한다.
잠들기 이전의 기억이 정말로 "겪었던" 것인지, 아니면 단지 기억이 "주입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의문 말이다.
아는 사람들과의 잦은 교류를 통해서, 잠들기 이전의 기억에 대한 '공통성'을 확보하는 일상의 사람들은 이 의문이 쓸데없다고 할 지 모르지만, 단지 나 혼자만의 생활이 이어지다보면 이런 기억의 '공통성'은 확보가 불가능하고, 심지어는 이전의 기억이 정말인지, 착각인지, 또 다른 꿈이었던건지 온통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그저 재미있는 상상이겠지만, 어느 순간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면, 어제의 기억이 의심스러워지고, 나의 과거가 의심스러워지고, 나라는 존재마저도 의심스러워질지 모르는 일이다.
---------------
알러지 진정 약을 2~3일에 한번씩 복용하는데, 복용한 이후의 첫 잠에는 이런 경험을 하곤 한다.
그리고 만약에 외부의 소음 등으로 잠이 방해를 받아 충분히 자지 못하게 되면, 그 날은 비몽사몽 계속 졸린 상태가 이어지고, 가끔은 심한 두통을 겪게 된다.
약 하나의 효과 - 혹은 부작용이 이렇게 심하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인간의 나약함을 절감할 수 밖에 없다.
아주 졸린 약 - 알러지 진정 약 -을 먹거나 고된 육체적 행위 뒤에 경험하게 되는데,
이런 잠을 자고 깨어나면 참 색다른 느낌이 든다.
과연 잠들기 전의 세상이 진짜였던 것인지 의문이 들곤 한다.
잠들기 이전의 기억이 정말로 "겪었던" 것인지, 아니면 단지 기억이 "주입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의문 말이다.
아는 사람들과의 잦은 교류를 통해서, 잠들기 이전의 기억에 대한 '공통성'을 확보하는 일상의 사람들은 이 의문이 쓸데없다고 할 지 모르지만, 단지 나 혼자만의 생활이 이어지다보면 이런 기억의 '공통성'은 확보가 불가능하고, 심지어는 이전의 기억이 정말인지, 착각인지, 또 다른 꿈이었던건지 온통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그저 재미있는 상상이겠지만, 어느 순간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면, 어제의 기억이 의심스러워지고, 나의 과거가 의심스러워지고, 나라는 존재마저도 의심스러워질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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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러지 진정 약을 2~3일에 한번씩 복용하는데, 복용한 이후의 첫 잠에는 이런 경험을 하곤 한다.
그리고 만약에 외부의 소음 등으로 잠이 방해를 받아 충분히 자지 못하게 되면, 그 날은 비몽사몽 계속 졸린 상태가 이어지고, 가끔은 심한 두통을 겪게 된다.
약 하나의 효과 - 혹은 부작용이 이렇게 심하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인간의 나약함을 절감할 수 밖에 없다.
2016년 8월 1일 월요일
[단상] 사람들이 하는 일의 종류
사람들이 하는 일의 종류야 무궁하고 다양하겠지만, 크게는 3가지로 나눌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한계를 넒혀 가는 일.
인간이 가진 여러 제약들. 이로 인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고 혹은 규모가, 혹은 영향력의 범위가 제한되는데, 누군가 하는 일은 이 제약의 일부를 허물어서 한계를 넒혀 가는 일을 하고 있다.
대단히 어렵고 의미 있는 일이며, 미래에 대한 비전이 확고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꽤 많은 일들이 여기에 속할 수도 있다.
임계선 부근에서 일하는 사람들, 끊임 없는 노력으로 한계에 근접하는 사람들은 종종 우연인듯 필연인듯 이 한계를 넘게되고, 이것이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세밀함을 추구하는 일.
정밀함 또는 세심함의 한계라는 측면에서는 위의 한계를 넓히는 일과 하나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분류하기엔 곤란한 많은 일들이 여기에 속한다.
한계를 넓히고 영역을 확장하기에 몰두하다 보면, 자칫 스스로 확장시킨 부분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두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이렇게 성글어진 영역에서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 다듬고 채우는 일을 해야만 한다.
어쩌면 현재의 대한민국도 수출의 한계에 막혀 내수를 살리자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이와 유사한 상황이 아닌가 싶다.
영역을 확장하기 곤란한 경우에 관심을 내부로 돌려서, 구성원들의 성향을 좀 더 세분하여 구분하고, 그에 따른 맞춤 서비스로 만족도를 높이는 일 따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진정한 차이는 이러한 세세함에서 뚜렷이 드러나며, 이러한 차이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기에, 소위 졸부가 전통의 부자를 따라가기 어려운 것과도 유사한 차이점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하나는 순환-반복적인 일.
아마도 대부분의 일들이 여기에 속한다 생각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먹어야 살 수 있으며, 자야만 하고, 입어야 하고, 씻고 이동하는 등의 일을 반복한다. 여기에 필요한 식품, 제품,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큰 틀에서는 순환-반복적인 일들이다.
물론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위의 한계를 넓히는 일이나 세밀함을 추구하는 일의 속성도 지니게 된다.
이렇게 구분한 일들은 그 순서대로, 리스크가 큰 일에서 작은 일의 순서이며, 따라서 성공에 대한 보상이 큰 일에서 보상이 작은 일의 순서이며, 일의 난이도가 높은 일에서 난이도가 낮은 일의 순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의 구분은 현재의 기업들에서 적용이 된다.
물론 대기업들은 3가지 속성의 일을 모두 영위하는 것이 보통이나, 작은 기업들은 한가지에 집중하는 비율이 높은 편이다.
하나는 한계를 넒혀 가는 일.
인간이 가진 여러 제약들. 이로 인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고 혹은 규모가, 혹은 영향력의 범위가 제한되는데, 누군가 하는 일은 이 제약의 일부를 허물어서 한계를 넒혀 가는 일을 하고 있다.
대단히 어렵고 의미 있는 일이며, 미래에 대한 비전이 확고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꽤 많은 일들이 여기에 속할 수도 있다.
임계선 부근에서 일하는 사람들, 끊임 없는 노력으로 한계에 근접하는 사람들은 종종 우연인듯 필연인듯 이 한계를 넘게되고, 이것이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세밀함을 추구하는 일.
정밀함 또는 세심함의 한계라는 측면에서는 위의 한계를 넓히는 일과 하나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분류하기엔 곤란한 많은 일들이 여기에 속한다.
한계를 넓히고 영역을 확장하기에 몰두하다 보면, 자칫 스스로 확장시킨 부분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두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이렇게 성글어진 영역에서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 다듬고 채우는 일을 해야만 한다.
어쩌면 현재의 대한민국도 수출의 한계에 막혀 내수를 살리자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이와 유사한 상황이 아닌가 싶다.
영역을 확장하기 곤란한 경우에 관심을 내부로 돌려서, 구성원들의 성향을 좀 더 세분하여 구분하고, 그에 따른 맞춤 서비스로 만족도를 높이는 일 따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진정한 차이는 이러한 세세함에서 뚜렷이 드러나며, 이러한 차이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기에, 소위 졸부가 전통의 부자를 따라가기 어려운 것과도 유사한 차이점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하나는 순환-반복적인 일.
아마도 대부분의 일들이 여기에 속한다 생각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먹어야 살 수 있으며, 자야만 하고, 입어야 하고, 씻고 이동하는 등의 일을 반복한다. 여기에 필요한 식품, 제품,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큰 틀에서는 순환-반복적인 일들이다.
물론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위의 한계를 넓히는 일이나 세밀함을 추구하는 일의 속성도 지니게 된다.
이렇게 구분한 일들은 그 순서대로, 리스크가 큰 일에서 작은 일의 순서이며, 따라서 성공에 대한 보상이 큰 일에서 보상이 작은 일의 순서이며, 일의 난이도가 높은 일에서 난이도가 낮은 일의 순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의 구분은 현재의 기업들에서 적용이 된다.
물론 대기업들은 3가지 속성의 일을 모두 영위하는 것이 보통이나, 작은 기업들은 한가지에 집중하는 비율이 높은 편이다.
2016년 7월 23일 토요일
다양과 획일, 공감과 차이, 생각의 모순들
인간이 진화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폭이 확대되어,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든가, 동물에 대한 학대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 반대되는 현상으로, 유럽으로 유입되는 대규모의 난민에 저항하는 자국민들의 태도이다. 어찌보면 이기주의이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처사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것에 대한 반발일 뿐, 큰 흐름은 타인과의 공감이라고 보는게 맞을 수 있겠다.
오히려 여기에 대한 더 큰 모순은, 낙태에 대한 반대 의견이다.
낙태를 찬성하는 쪽의 의견을 들어보면, 낙태를 고려한다는 것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여력이나 형편이 되지 않음을 의미하고, 이는 부모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의 부족 혹은 태아의 선천적 장애가 확실시 되는 경우에 태아나 부모 모두의 행복을 위해 최선의 선택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낙태를 반대하는 의견을 들어보면, 인간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적이며, 정상인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장애인들은 불행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인간의 진화가 타인에 대한, 타 생명에 대한 공감으로 나타났다면, 그것은 타인도 어느 정도 나와 유사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가능하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자신이 장애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불행해 질 지를 상상하고 낙태를 찬성하자는 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 났어도 아마 그들에겐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이 있을 테니까 그걸 함부로 뺏을 권리는 없다는 생각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생각은 모든 타인에 대한, 타 생명에체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나 나름의 행동양식을 모두 이해해 줘야 하는 것이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다양한 생각과 행동들을 가진 타자들과의 공감은 일정 부분 버려야 함을 뜻하지 않을까?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확일화에서 벗어나 다양화로 가고 있으며, 집단에서 개인으로 가고 있으며, 규칙과 제어에서 벗어나 자유로 가고 있음이 뚜렷해 보인다.
하지만 소위 인류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나'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이기주의를 벗어나 '우리'라는 생각의 이타주의로 가야 하며, 다름이 중시되는 차별성에서 벗어나 모두가 하나라는 단일성으로 가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것은 아서 클라크의 소설 <유년기의 끝>에서 보여준 모습으로의 진화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원래 하나였던 우주는 빅뱅이후 엄청난 속도로 공간의 팽창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런 우주 팽창의 모습은 인간 개개인들이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되어 가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한편으로 인간들의 이러한 다양한 분화가, 국가와 사회라는 집단의 필요성을 파과하기에 이르고 있어 보인다.
이에 반발하여 인간들 서로가 타인의 이해의 폭을 넓혀 가자는 움직임도 있는 것이며, 서로 교감하고 이해하고 뱌려하는 것이 인간의 발전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우주의 팽창처럼 다양하게 분화될 것이며, 인간들이 교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일시적인 반발에 그치고 말 것이다.
어쩌면 빅뱅으로 인한 우주의 팽창이 멈추고 다시 하나의 점으로 수축이 진행된다면, 인간도 점점 하나의 모습으로 동일화가 진행될 것이다. 변이는 줄어들고, 사람들은 점점 비슷해져 가고, 인구는 줄어들고, 생태계의 생물 다양성도 줄어들며, 아무런 규칙이나 법률이 없어도 될 것이며, 그리고 이기주의는 물론 이타주의도 없고, 너와 나라는 구분이 모호해지고, 결국 우리는 하나의 점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겠는가.
인간이 대단한 존재인양 떠들고 있지만, 결국은 이런 우주적인 움직임에 따라 함께 변해가는 것이 뿐이며, 그걸 진화라고 부르던, 퇴보라고 부르던, 그 마저도 단지 인간끼리의 말에 불과한, 아무 의미 없는 자뻑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반대되는 현상으로, 유럽으로 유입되는 대규모의 난민에 저항하는 자국민들의 태도이다. 어찌보면 이기주의이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처사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것에 대한 반발일 뿐, 큰 흐름은 타인과의 공감이라고 보는게 맞을 수 있겠다.
오히려 여기에 대한 더 큰 모순은, 낙태에 대한 반대 의견이다.
낙태를 찬성하는 쪽의 의견을 들어보면, 낙태를 고려한다는 것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여력이나 형편이 되지 않음을 의미하고, 이는 부모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의 부족 혹은 태아의 선천적 장애가 확실시 되는 경우에 태아나 부모 모두의 행복을 위해 최선의 선택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낙태를 반대하는 의견을 들어보면, 인간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적이며, 정상인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장애인들은 불행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인간의 진화가 타인에 대한, 타 생명에 대한 공감으로 나타났다면, 그것은 타인도 어느 정도 나와 유사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가능하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자신이 장애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불행해 질 지를 상상하고 낙태를 찬성하자는 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 났어도 아마 그들에겐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이 있을 테니까 그걸 함부로 뺏을 권리는 없다는 생각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생각은 모든 타인에 대한, 타 생명에체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나 나름의 행동양식을 모두 이해해 줘야 하는 것이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다양한 생각과 행동들을 가진 타자들과의 공감은 일정 부분 버려야 함을 뜻하지 않을까?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확일화에서 벗어나 다양화로 가고 있으며, 집단에서 개인으로 가고 있으며, 규칙과 제어에서 벗어나 자유로 가고 있음이 뚜렷해 보인다.
하지만 소위 인류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나'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이기주의를 벗어나 '우리'라는 생각의 이타주의로 가야 하며, 다름이 중시되는 차별성에서 벗어나 모두가 하나라는 단일성으로 가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것은 아서 클라크의 소설 <유년기의 끝>에서 보여준 모습으로의 진화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원래 하나였던 우주는 빅뱅이후 엄청난 속도로 공간의 팽창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런 우주 팽창의 모습은 인간 개개인들이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되어 가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한편으로 인간들의 이러한 다양한 분화가, 국가와 사회라는 집단의 필요성을 파과하기에 이르고 있어 보인다.
이에 반발하여 인간들 서로가 타인의 이해의 폭을 넓혀 가자는 움직임도 있는 것이며, 서로 교감하고 이해하고 뱌려하는 것이 인간의 발전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우주의 팽창처럼 다양하게 분화될 것이며, 인간들이 교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일시적인 반발에 그치고 말 것이다.
어쩌면 빅뱅으로 인한 우주의 팽창이 멈추고 다시 하나의 점으로 수축이 진행된다면, 인간도 점점 하나의 모습으로 동일화가 진행될 것이다. 변이는 줄어들고, 사람들은 점점 비슷해져 가고, 인구는 줄어들고, 생태계의 생물 다양성도 줄어들며, 아무런 규칙이나 법률이 없어도 될 것이며, 그리고 이기주의는 물론 이타주의도 없고, 너와 나라는 구분이 모호해지고, 결국 우리는 하나의 점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겠는가.
인간이 대단한 존재인양 떠들고 있지만, 결국은 이런 우주적인 움직임에 따라 함께 변해가는 것이 뿐이며, 그걸 진화라고 부르던, 퇴보라고 부르던, 그 마저도 단지 인간끼리의 말에 불과한, 아무 의미 없는 자뻑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2016년 7월 17일 일요일
[도서] 데미안의 서문
서명 : 데미안 (Demian - Die Geschichte von Emil Sinclairs Jugend)
저자 :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출판사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역자 : 전영애
내 이야기를 하자면, 훨씬 앞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훨씬 더 이전으로 내 유년의 맨 처음까지, 또 아득한 나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리라.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 자기들이 하느님이라도 되듯 그 누군가의 인생사를 훤히 내려다보고 파악하여, 하느님이 몸소 이야기하듯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이 어디서나 핵심을 집어내어 써낼 수 있는 양 굴곤 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작가들이 그래서는 안 되듯이. 그리고 내게는 내 이야기가, 어떤 작가에게든 그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한 인간의 이야기, 즉 그 어떤 가공의 인물, 있을 수 있는 인물, 이상적인 인물, 어떻든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일화적인, 살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혼미해져 버렸다. 그 하나하나가 자연의 단 한번의 소중한 시도인 사람을 무더기로 쏘아 죽이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단 한번뿐인 소중한 목숨이 아니라면, 우리들 하나하나를 총알 하나로 정말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도 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點)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누구 속에서든 정신은 형상이 되고, 누구 속에서든 피조물이 괴로워하고 있으며, 누구 속에서든 한 구세주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있다.
사람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기는 한다. 그리고 느끼는 만큼 쉽게 죽어간다. 나도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좀더 수월하게 죽게 될 것이다.
내 자신을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는 감히 부를 수 없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는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 별을 쳐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며 찾지는 않는다. 내 피가 몸 속에서 소리내고 있는 그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저자 :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출판사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역자 : 전영애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 이야기를 하자면, 훨씬 앞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훨씬 더 이전으로 내 유년의 맨 처음까지, 또 아득한 나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리라.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 자기들이 하느님이라도 되듯 그 누군가의 인생사를 훤히 내려다보고 파악하여, 하느님이 몸소 이야기하듯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이 어디서나 핵심을 집어내어 써낼 수 있는 양 굴곤 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작가들이 그래서는 안 되듯이. 그리고 내게는 내 이야기가, 어떤 작가에게든 그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한 인간의 이야기, 즉 그 어떤 가공의 인물, 있을 수 있는 인물, 이상적인 인물, 어떻든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일화적인, 살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혼미해져 버렸다. 그 하나하나가 자연의 단 한번의 소중한 시도인 사람을 무더기로 쏘아 죽이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단 한번뿐인 소중한 목숨이 아니라면, 우리들 하나하나를 총알 하나로 정말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도 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點)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누구 속에서든 정신은 형상이 되고, 누구 속에서든 피조물이 괴로워하고 있으며, 누구 속에서든 한 구세주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있다.
사람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기는 한다. 그리고 느끼는 만큼 쉽게 죽어간다. 나도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좀더 수월하게 죽게 될 것이다.
내 자신을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는 감히 부를 수 없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는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 별을 쳐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며 찾지는 않는다. 내 피가 몸 속에서 소리내고 있는 그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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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mann Hesse
2016년 7월 14일 목요일
[도서] 채식주의자에 대한 단상
직전에 포스팅한 <채식주의자>는 무언가 자꾸 씹히는 느낌이다.
제대로 소화되지 않고 입안에 남아서 씹히는...
나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게 나의 모순을 건드려서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곱씹어서 그 모순을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식주의자>는 그렇게 불편한게 아니었다.
<채식주의자>의 불편함은, 어째서 유력한 상의 수상작품이 내게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을 주는가 하는 불편함이었다.
과연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문득 떠 오른 하나의 가정은, 보편성의 부족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소설은 구체적인 주인공과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 또는 일상을 다루고 있다.
이런 구체적이고 나와는 별개로 인식되는 주인공은, 그래서 독자의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게 만들수 있으며, 충분히 독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주인공이 독자와 일체시되는 상황에서는 독자 스스로가 매우 방어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이 주인공은 개별적인 인물에서 보편적인 인물로의 투사가 되어야 한다.
이 과정이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독자 스스로 투사시키게 되며, 작가는 보편적으로 투사될 수 있는 상징이나 개연성을 제공해 주곤 한다.
이러한 보편적 인물로의 투사가 중요한 이유는,
작품에서 다룬 사건이나 교훈 또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작품에서 다룬 이야기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의 이야기, 내 주변과도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 우연히라도 맞닥뜨리게 될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라면?
그건 그냥 신기한 이야기로 끝날 뿐이다.
육식이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지만, 거식증으로까지 이어진 영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육식과 폭력에 저항하여 스스로 나무가 되어 흙과 물로만 살 수 있을거라 믿는 영혜의 생각에 어떤 보편성이 있는 것일까?
인혜 또한 영혜와 같이 사회 관습적인 폭력을 인식했다고 해도, 영혜의 극단적인 생각이 과연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생각이 달리고 달려서 너무 지나치게 달려가버린 그 생각을 내가 따라 잡으려 해야 한단 말인가?
아마도 이렇게 말하겠지.
가기 싫으면 안가도 된다고.
왜 싫은데 궂이 따라가려 하는냐고.
그건.....상을 줬기 때문이야.
유력한 상을 줬다는 건, 그게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거니까.
그리고 그게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는 거니까.
그래서 본 거라고....
어쩌면 내가 오해했는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작품은 보편성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가 보다.
가끔은 오만한 작가와 작품을 만나게 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긴 설명이 필요한 그런 작품을
하지만 친절하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이해한 사람만이 느끼고 누리라는 듯이...
그럴거라면 왜 남들에게 보여주고 읽히려고 하는 것인지?
========================================================================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작가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순에 대해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끔찍한 폭력을 수반하는 육식과 육식을 하지 않고는 살아나가기 곤란한 본질적인 모순 말이다.
물론 채식만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게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지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채식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채식주의자인 사람은 거의 보질 못했기에...
어찌할 수 없는 이 딜레마는 어쩌면 본성과 이성의 충돌이 아닐까?
결국 이성을 따르는 영혜는 인간이라는 생명의 본성을 포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이 폭력적일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
영혜의 이런 절망적인 몸부림을 보는 인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들을 나열하면서 생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지만, 인혜야말로 본성과 이성이 충돌하는 모순을 가장 치열하게 온몸으로 부딪히는 보통 인간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여기에도 몇가지 문제는 남게 된다.
육식으로 대변되는 폭력을 사회 전반적인 구조와 관습으로까지 확대시킨 것은, 그 폭력이 본성적이라는 사실을 희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혹은, 이 문제는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미화되었을 뿐이라는 간단한 결론으로 해결되지 않겠나 하는 점이다.
우리 쿨하게 인정하자. 인간도 동물의 하나다. 무언가 먹어야 하고 번식하고 생존해야 하는 거다. 스스로가 진화된 존재라는 착각에 빠져서 다른 생물과의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단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뿐이지, 인간은 여전히 동물이다 라고...
덧붙여 마지막에 언급했던 오만한 작품에 대해서도 조금은 반성해 본다.
누군가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내적 투쟁을 거쳐서 어렵게 내린 결론을, 단지 책 한권 읽는 노력으로, 혹은 전시회장을 찾는 것으로, 그렇게 쉽게 얻으려 하는 것 또한 날강도가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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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분석적이긴 하지만,
이 소설이 주었던 몇가지 의문점을 마저 해소한 듯 하다.
첫번째 의문은,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
영혜가 병원 앞 정원 벤치에 가슴을 드러내고 새를 손에 쥔 채 입에 피를 뭍히고 앉아 있다.
새나 가슴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과연 치열하게 육식을 거부하던 영혜가 왜 새를 날로 뜯어 먹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풀지 못했다.
나름대로 분석해 보건데, 이 부분은 영혜의 상태가 매우 불안함을 보여주어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에서 보여주는 영혜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함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영혜가 육식의 본능과 채식의 이성 사에에서 마지막 갈등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성으로써의 채식에 실패하고 본능의 육식으로 돌아간 듯이 보이는 이 장면은 <본능>과 <이성>의 갈등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인데, 앞으로 이어질 <몽고반점>은 지나칠 정도로 감각정인 상황과 행동들로 <본능>에만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며, <나무 불꽃>은 모든 본능을 철저히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로 생명마저 극복하려는 <이성>의 극한을 보여준다.
작가는 인간이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과연 그 둘이 충돌했을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과연 정답은 있을 것인가?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지 않겠는가?
이런 딜레마를 다룸으로써 인간의 모순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두번째 의문은, 2번째 중편인 <몽고반점>의 생뚱맞음이었다.
채식주의자가 다루고 있는 인간의 모순과는 동떨어진 지극히 감각적이고 탐미적인 이야기가 왜 여기에 들어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의문점은 첫번째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 해소된다.
가장 본능적인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본능적인 모습 또한 충분히 타당하며 의미있을 보여주는 것.
양팔 저울의 한쪽을 채우기 위함이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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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소화되지 않고 입안에 남아서 씹히는...
나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게 나의 모순을 건드려서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곱씹어서 그 모순을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식주의자>는 그렇게 불편한게 아니었다.
<채식주의자>의 불편함은, 어째서 유력한 상의 수상작품이 내게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을 주는가 하는 불편함이었다.
과연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문득 떠 오른 하나의 가정은, 보편성의 부족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소설은 구체적인 주인공과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 또는 일상을 다루고 있다.
이런 구체적이고 나와는 별개로 인식되는 주인공은, 그래서 독자의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게 만들수 있으며, 충분히 독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주인공이 독자와 일체시되는 상황에서는 독자 스스로가 매우 방어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이 주인공은 개별적인 인물에서 보편적인 인물로의 투사가 되어야 한다.
이 과정이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독자 스스로 투사시키게 되며, 작가는 보편적으로 투사될 수 있는 상징이나 개연성을 제공해 주곤 한다.
이러한 보편적 인물로의 투사가 중요한 이유는,
작품에서 다룬 사건이나 교훈 또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작품에서 다룬 이야기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의 이야기, 내 주변과도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 우연히라도 맞닥뜨리게 될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라면?
그건 그냥 신기한 이야기로 끝날 뿐이다.
육식이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지만, 거식증으로까지 이어진 영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육식과 폭력에 저항하여 스스로 나무가 되어 흙과 물로만 살 수 있을거라 믿는 영혜의 생각에 어떤 보편성이 있는 것일까?
인혜 또한 영혜와 같이 사회 관습적인 폭력을 인식했다고 해도, 영혜의 극단적인 생각이 과연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생각이 달리고 달려서 너무 지나치게 달려가버린 그 생각을 내가 따라 잡으려 해야 한단 말인가?
아마도 이렇게 말하겠지.
가기 싫으면 안가도 된다고.
왜 싫은데 궂이 따라가려 하는냐고.
그건.....상을 줬기 때문이야.
유력한 상을 줬다는 건, 그게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거니까.
그리고 그게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는 거니까.
그래서 본 거라고....
어쩌면 내가 오해했는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작품은 보편성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가 보다.
가끔은 오만한 작가와 작품을 만나게 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긴 설명이 필요한 그런 작품을
하지만 친절하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이해한 사람만이 느끼고 누리라는 듯이...
그럴거라면 왜 남들에게 보여주고 읽히려고 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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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생각해 보니,
작가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순에 대해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끔찍한 폭력을 수반하는 육식과 육식을 하지 않고는 살아나가기 곤란한 본질적인 모순 말이다.
물론 채식만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게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지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채식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채식주의자인 사람은 거의 보질 못했기에...
어찌할 수 없는 이 딜레마는 어쩌면 본성과 이성의 충돌이 아닐까?
결국 이성을 따르는 영혜는 인간이라는 생명의 본성을 포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이 폭력적일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
영혜의 이런 절망적인 몸부림을 보는 인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들을 나열하면서 생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지만, 인혜야말로 본성과 이성이 충돌하는 모순을 가장 치열하게 온몸으로 부딪히는 보통 인간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여기에도 몇가지 문제는 남게 된다.
육식으로 대변되는 폭력을 사회 전반적인 구조와 관습으로까지 확대시킨 것은, 그 폭력이 본성적이라는 사실을 희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혹은, 이 문제는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미화되었을 뿐이라는 간단한 결론으로 해결되지 않겠나 하는 점이다.
우리 쿨하게 인정하자. 인간도 동물의 하나다. 무언가 먹어야 하고 번식하고 생존해야 하는 거다. 스스로가 진화된 존재라는 착각에 빠져서 다른 생물과의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단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뿐이지, 인간은 여전히 동물이다 라고...
덧붙여 마지막에 언급했던 오만한 작품에 대해서도 조금은 반성해 본다.
누군가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내적 투쟁을 거쳐서 어렵게 내린 결론을, 단지 책 한권 읽는 노력으로, 혹은 전시회장을 찾는 것으로, 그렇게 쉽게 얻으려 하는 것 또한 날강도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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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분석적이긴 하지만,
이 소설이 주었던 몇가지 의문점을 마저 해소한 듯 하다.
첫번째 의문은,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
영혜가 병원 앞 정원 벤치에 가슴을 드러내고 새를 손에 쥔 채 입에 피를 뭍히고 앉아 있다.
새나 가슴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과연 치열하게 육식을 거부하던 영혜가 왜 새를 날로 뜯어 먹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풀지 못했다.
나름대로 분석해 보건데, 이 부분은 영혜의 상태가 매우 불안함을 보여주어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에서 보여주는 영혜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함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영혜가 육식의 본능과 채식의 이성 사에에서 마지막 갈등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성으로써의 채식에 실패하고 본능의 육식으로 돌아간 듯이 보이는 이 장면은 <본능>과 <이성>의 갈등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인데, 앞으로 이어질 <몽고반점>은 지나칠 정도로 감각정인 상황과 행동들로 <본능>에만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며, <나무 불꽃>은 모든 본능을 철저히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로 생명마저 극복하려는 <이성>의 극한을 보여준다.
작가는 인간이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과연 그 둘이 충돌했을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과연 정답은 있을 것인가?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지 않겠는가?
이런 딜레마를 다룸으로써 인간의 모순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두번째 의문은, 2번째 중편인 <몽고반점>의 생뚱맞음이었다.
채식주의자가 다루고 있는 인간의 모순과는 동떨어진 지극히 감각적이고 탐미적인 이야기가 왜 여기에 들어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의문점은 첫번째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 해소된다.
가장 본능적인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본능적인 모습 또한 충분히 타당하며 의미있을 보여주는 것.
양팔 저울의 한쪽을 채우기 위함이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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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30일 목요일
[도서] 채식주의자
맨부커상을 수상해서 대중에게 잘 알려진 한강씨의 소설.
3개의 중편소설인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각각의 작품을 별개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이어져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을 때에 한강씨의 이름이 매우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서가에 꽂혀있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한강씨의 <몽고반점>이 대표작으로 수록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번째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의 채식주의 선언으로 시작되어, 점차 심해지는 채식과 무력감을 그녀의 꿈과 함께 그려가고 있다.
그녀의 다분히 잔인하고 가학적/피학적인 꿈은 육식이 가지는 필연적이지만 외면하고 싶은 면을 드러내 보이며, 먹는 인간과 먹히는 동물을 넘어서, 같은 인간 사이의 폭력에 대해서도 항변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이미지는 피다.
생고기의 피, 어린 시절 주인을 문 개가 토해낸 피, 꿈에서 누군가의 배를 갈라 낸 피, 육식을 거부하기 위해 그녀가 자신의 손목을 칼로 그어 솟구친 피, 병원에서 햇빛 아래 상의를 벗고 손에 쥐었던 새의 피...
이 작품의 주제는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육식의 폭력성에 대항하는 채식은 하나의 상징이거나 일부일 뿐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군림이 주는 폭력, 군중의 시선이 주는 무언의 압력이라는 폭력, 가슴을 가려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의 폭력.
그리고 그 폭력들에 하나 둘씩 저항하는 주인공 영혜....
두번째 <몽고반점>은 위의 사건이 일어난 후의 이야기다.
사건 이후 이혼을 하고 정신병원의 치료를 거쳐 언니의 집에서 얼마간 살다가 독립을 한 영혜와, 영상 예술을 하는 그녀의 형부 사이에 벌어지는 관능적인 사건에 대한...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이미지는 꽃이다.
사람의 나체에 그려 넣은 꽃, 그리고 꽃을 그려 넣은 두 육체의 교합, 남녀간의 섹스는 마치 아무런 도덕적 제약을 받지 않는 꽃과 꽃의 교접으로 그려지고, 이것이 원시로의 회귀를 의미했기에 유아기에만 남아 있다는 몽고반점이 그 소재로 차용되었는지 모르겠다.
무엇일까? 이 작품의 주제는?
애초에 순수한 욕망이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섹스가, 사회적인 통념 윤리라는 명분하에 더럽고 금기시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몽고반점은 애초에 순수했던 인간의 본 모습에 대한 그림움의 상징이었을까?
문화권에서는 불륜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형부와 처제의 행위에 원시적인 욕망의 순수함 아름다움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꽃을 그려넣고, 꽃의 교접으로 상징화 했던 것일까?
잘 모르겠다.
세번째 <나무 불꽃>은 위의 모든 사건 후의 이야기이다.
영혜의 언니 인혜가 주인공이고, 남편은 위 사건으로 이혼. 혼자서 5살짜리 아들을 키우는 워킹맘.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이고 인혜는 정기적으로 면회를 간다.
어느날 영혜가 정신병원을 탈출, 다행히 병원에서 영혜를 찾아서 데려오지만 영혜의 상태는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간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금식주의자가 되어가는 것.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 간다며, 물과 햇빛만 있으면 된다고...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자신의 팔이 뿌리가 되고 다리가 가지라고 말하는 영혜
급기야 단식으로 인해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
이 작품의 이미지는 나무....라고 해야겠지만 어쩐지 그 보다는 나무같이 말라버린 영혜의 육신이 아닐까.
사실 이미지가 앞서의 두 작품보다 약하다.
이 작품에서 영혜의 퇴화(?)가 주로 그려지고 있지만, 동시에 인혜 또한 영혜와 같은 절망감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다.
언니로써의 영혜에 대한 책임감, 스스로 경제적 기반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무감, 아들에 대한 엄마로써의 책임감 따위가 인혜가 흔들릴 여지를 주지 않았지만,
어느날 문득 찾아온 생각...살아본 적이 없고 단지 견뎌 왔을 뿐이라는...이 인혜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주변의 관계에서 지워진 의무감이 그녀를 살아가지 않고 견디게 만들었지만, 또한 영혜와 같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었던 건 아닐런지.
결국은 영혜의 선택이 매우 극단적이고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인혜가 영혜를 이해하게 되면서 영혜의 퇴화(?)가 보편성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잘 모르겠다.
왜 하필 나무였을까?
한자리에 붙박혀 모진 비바람과 눈보라와 따가운 햇빛을 견뎌내야 하는 그런 존재?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위의 세 작품에 공통적으로 묘사되는 이미지가 하나 있는데, 새다.
첫번째 <채식주의자>에서는 마지막에 영혜가 상의를 벗고 손에 새를 쥐고 있다.
두번째 <몽고반점>에서는 형부가 좋아하는 피사체가 날아가는, 날개가 달린 것들이라고 나오고, 마지막에 베란다에서 마치 새가 날아 오를 듯한 자세를 취한다.
마지막 <나무 불꽃>에서는 영혜를 태우고 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인혜가 바라본 하늘에 솔개가 날아가는 것을 본다.
날아가는 것이 자유에 대한 의미였을까?
꺾인 자유, 자유에 대한 희구, 자유의 댓가 등을 의미하는.....
3개의 중편소설인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각각의 작품을 별개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이어져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을 때에 한강씨의 이름이 매우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서가에 꽂혀있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한강씨의 <몽고반점>이 대표작으로 수록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번째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의 채식주의 선언으로 시작되어, 점차 심해지는 채식과 무력감을 그녀의 꿈과 함께 그려가고 있다.
그녀의 다분히 잔인하고 가학적/피학적인 꿈은 육식이 가지는 필연적이지만 외면하고 싶은 면을 드러내 보이며, 먹는 인간과 먹히는 동물을 넘어서, 같은 인간 사이의 폭력에 대해서도 항변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이미지는 피다.
생고기의 피, 어린 시절 주인을 문 개가 토해낸 피, 꿈에서 누군가의 배를 갈라 낸 피, 육식을 거부하기 위해 그녀가 자신의 손목을 칼로 그어 솟구친 피, 병원에서 햇빛 아래 상의를 벗고 손에 쥐었던 새의 피...
이 작품의 주제는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육식의 폭력성에 대항하는 채식은 하나의 상징이거나 일부일 뿐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군림이 주는 폭력, 군중의 시선이 주는 무언의 압력이라는 폭력, 가슴을 가려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의 폭력.
그리고 그 폭력들에 하나 둘씩 저항하는 주인공 영혜....
두번째 <몽고반점>은 위의 사건이 일어난 후의 이야기다.
사건 이후 이혼을 하고 정신병원의 치료를 거쳐 언니의 집에서 얼마간 살다가 독립을 한 영혜와, 영상 예술을 하는 그녀의 형부 사이에 벌어지는 관능적인 사건에 대한...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이미지는 꽃이다.
사람의 나체에 그려 넣은 꽃, 그리고 꽃을 그려 넣은 두 육체의 교합, 남녀간의 섹스는 마치 아무런 도덕적 제약을 받지 않는 꽃과 꽃의 교접으로 그려지고, 이것이 원시로의 회귀를 의미했기에 유아기에만 남아 있다는 몽고반점이 그 소재로 차용되었는지 모르겠다.
무엇일까? 이 작품의 주제는?
애초에 순수한 욕망이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섹스가, 사회적인 통념 윤리라는 명분하에 더럽고 금기시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몽고반점은 애초에 순수했던 인간의 본 모습에 대한 그림움의 상징이었을까?
문화권에서는 불륜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형부와 처제의 행위에 원시적인 욕망의 순수함 아름다움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꽃을 그려넣고, 꽃의 교접으로 상징화 했던 것일까?
잘 모르겠다.
세번째 <나무 불꽃>은 위의 모든 사건 후의 이야기이다.
영혜의 언니 인혜가 주인공이고, 남편은 위 사건으로 이혼. 혼자서 5살짜리 아들을 키우는 워킹맘.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이고 인혜는 정기적으로 면회를 간다.
어느날 영혜가 정신병원을 탈출, 다행히 병원에서 영혜를 찾아서 데려오지만 영혜의 상태는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간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금식주의자가 되어가는 것.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 간다며, 물과 햇빛만 있으면 된다고...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자신의 팔이 뿌리가 되고 다리가 가지라고 말하는 영혜
급기야 단식으로 인해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
이 작품의 이미지는 나무....라고 해야겠지만 어쩐지 그 보다는 나무같이 말라버린 영혜의 육신이 아닐까.
사실 이미지가 앞서의 두 작품보다 약하다.
이 작품에서 영혜의 퇴화(?)가 주로 그려지고 있지만, 동시에 인혜 또한 영혜와 같은 절망감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다.
언니로써의 영혜에 대한 책임감, 스스로 경제적 기반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무감, 아들에 대한 엄마로써의 책임감 따위가 인혜가 흔들릴 여지를 주지 않았지만,
어느날 문득 찾아온 생각...살아본 적이 없고 단지 견뎌 왔을 뿐이라는...이 인혜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주변의 관계에서 지워진 의무감이 그녀를 살아가지 않고 견디게 만들었지만, 또한 영혜와 같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었던 건 아닐런지.
결국은 영혜의 선택이 매우 극단적이고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인혜가 영혜를 이해하게 되면서 영혜의 퇴화(?)가 보편성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잘 모르겠다.
왜 하필 나무였을까?
한자리에 붙박혀 모진 비바람과 눈보라와 따가운 햇빛을 견뎌내야 하는 그런 존재?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위의 세 작품에 공통적으로 묘사되는 이미지가 하나 있는데, 새다.
첫번째 <채식주의자>에서는 마지막에 영혜가 상의를 벗고 손에 새를 쥐고 있다.
두번째 <몽고반점>에서는 형부가 좋아하는 피사체가 날아가는, 날개가 달린 것들이라고 나오고, 마지막에 베란다에서 마치 새가 날아 오를 듯한 자세를 취한다.
마지막 <나무 불꽃>에서는 영혜를 태우고 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인혜가 바라본 하늘에 솔개가 날아가는 것을 본다.
날아가는 것이 자유에 대한 의미였을까?
꺾인 자유, 자유에 대한 희구, 자유의 댓가 등을 의미하는.....
2016년 6월 27일 월요일
용서와 속죄
중국에 살던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뉴스를 들었다.
작년까지도 꽤나 시끄러웠던 위안부 할머니들과 일본과의 공방들...
진정한 사과와 합당한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어물쩡 유감 표명으로 국면을 넘어가려는 일본 정부 사이에서, 정작 우리의 정부는 가면을 바꾸어 써가면서 편리하게 입장을 바꾸곤 하였다.
이 끝나지 않는 싸움에는, 정치적으로 이용 가치가 높은 이슈를 계속 가져가고 싶은 우리 정부의 더러운 욕심이 있지 않나 생각될 뿐이다.
아마도 작년까지 시끄러었던 위안부 이슈는, 무언가 국민의 시선을 돌리고 싶어하는 정부의 작전(?)이었던 듯.
올해는 갑자기 모든 일이 다 해결된 듯이 너무나도 조용할 따름인데, 정말 본질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설마...
언제든지 다시 써먹을 수 있도록 잠시 휴식기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리라.
진실 여부를 알 수는 없으니, 이런 정치 논리는 이 정도로 마무리를 하고,
제목인 용서와 속죄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자.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를 용서하고자 한다.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래서 피해 당사자들이 고령으로 한분 두분 세상을 떠나시고 있으니,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본이 제대로된 사과를 하면 그 사과를 제대로 받아 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제대로 된 속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별로 급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은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과연 저 분들이 살아 생전에 만족할만한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여기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은 "만족할만한"이 대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며, 그게 과연 객관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어째서 피해자가 용서를 구걸하는 모양새인가 말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용서와 속죄에 대한 질문과 답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딸을 잃은 엄마와 가해자인 살인범.
살인범은 검거되어 교도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지만, 죽은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
슬픔과 절망, 분노를 종교에 기대어 참아 보지만 쉽지 않다.
고민 끝에 살인범을 용서하기 마음 먹고 교도소에 찾아갔지만,
살인범은 그녀에게 사죄를 하지는 않고, 종교에 귀의해 신으로부터 속죄를 받았다고 말한다.
허망하게 돌아오던 그녀는 혼절해 쓰러지고,
깨어나서 울부짖는다.
그가 내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내가 용서해 주지도 않았는데, 신이 무슨 권리로 그에게 용서를 주었느냐고...
과연 엄마는 살인범을 용서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녀의 용서에는 조건이 붙었다. 그가 충분히 사죄를 한다면...이라는.
나의 용서가 내가 아닌 상대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엄마의 용서는 불안한 것이었고, 설령 이번에는 용서했다 하더라도, 다음에는 용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반면에 살인범의 속죄는 너무도 완벽했다.
피해자가 용서해 준다면...이라는 조건도 없다.
자신이 스스로 모든 죄를 깨닫고 어떤 벌이라도 마땅히 받겠다고, 한줌의 거짓도 없이 진심으로 뉘우쳤다면 그 순간 그는 완전히 속죄를 한 것이리라.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용서 또한 이러해야 할 것이다.
가해자가 어떤 행동을 보이던, 어떤 마음을 가지던, 그것에 상관 없이 내가 받은 피해와 고통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리하여 복수심, 분노, 증오 어떤 마음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비로소 용서가 완벽해 지는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시간이 촉박한 것은 사실이다.
그 분들이 진정한 용서를 하기 위한 시간이 촉박하다는 뜻이다.
진정한 용서는 일본 정부나 우리나라 정부의 조치, 행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끔찍했던 일들에 대해 어떤 증오나 분노도 갖지 않도록 저들의 모든 행위를 잊어버리는 것, 아니 잊지는 않더라도 담담하게 스쳐지나갈 수 있는 평정을 찾는 것이다.
모쪼록 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분노에 휩싸여서가 아니라 평안하게 가실 수 있기를 바라기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순간적이지만, 증오심이나 분노심은 아주 오랬동안 우리 자신을 더 많이 괴롭힌다.)
작년까지도 꽤나 시끄러웠던 위안부 할머니들과 일본과의 공방들...
진정한 사과와 합당한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어물쩡 유감 표명으로 국면을 넘어가려는 일본 정부 사이에서, 정작 우리의 정부는 가면을 바꾸어 써가면서 편리하게 입장을 바꾸곤 하였다.
이 끝나지 않는 싸움에는, 정치적으로 이용 가치가 높은 이슈를 계속 가져가고 싶은 우리 정부의 더러운 욕심이 있지 않나 생각될 뿐이다.
아마도 작년까지 시끄러었던 위안부 이슈는, 무언가 국민의 시선을 돌리고 싶어하는 정부의 작전(?)이었던 듯.
올해는 갑자기 모든 일이 다 해결된 듯이 너무나도 조용할 따름인데, 정말 본질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설마...
언제든지 다시 써먹을 수 있도록 잠시 휴식기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리라.
진실 여부를 알 수는 없으니, 이런 정치 논리는 이 정도로 마무리를 하고,
제목인 용서와 속죄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자.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를 용서하고자 한다.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래서 피해 당사자들이 고령으로 한분 두분 세상을 떠나시고 있으니,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본이 제대로된 사과를 하면 그 사과를 제대로 받아 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제대로 된 속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별로 급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은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과연 저 분들이 살아 생전에 만족할만한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여기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은 "만족할만한"이 대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며, 그게 과연 객관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어째서 피해자가 용서를 구걸하는 모양새인가 말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용서와 속죄에 대한 질문과 답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딸을 잃은 엄마와 가해자인 살인범.
살인범은 검거되어 교도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지만, 죽은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
슬픔과 절망, 분노를 종교에 기대어 참아 보지만 쉽지 않다.
고민 끝에 살인범을 용서하기 마음 먹고 교도소에 찾아갔지만,
살인범은 그녀에게 사죄를 하지는 않고, 종교에 귀의해 신으로부터 속죄를 받았다고 말한다.
허망하게 돌아오던 그녀는 혼절해 쓰러지고,
깨어나서 울부짖는다.
그가 내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내가 용서해 주지도 않았는데, 신이 무슨 권리로 그에게 용서를 주었느냐고...
과연 엄마는 살인범을 용서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녀의 용서에는 조건이 붙었다. 그가 충분히 사죄를 한다면...이라는.
나의 용서가 내가 아닌 상대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엄마의 용서는 불안한 것이었고, 설령 이번에는 용서했다 하더라도, 다음에는 용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반면에 살인범의 속죄는 너무도 완벽했다.
피해자가 용서해 준다면...이라는 조건도 없다.
자신이 스스로 모든 죄를 깨닫고 어떤 벌이라도 마땅히 받겠다고, 한줌의 거짓도 없이 진심으로 뉘우쳤다면 그 순간 그는 완전히 속죄를 한 것이리라.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용서 또한 이러해야 할 것이다.
가해자가 어떤 행동을 보이던, 어떤 마음을 가지던, 그것에 상관 없이 내가 받은 피해와 고통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리하여 복수심, 분노, 증오 어떤 마음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비로소 용서가 완벽해 지는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시간이 촉박한 것은 사실이다.
그 분들이 진정한 용서를 하기 위한 시간이 촉박하다는 뜻이다.
진정한 용서는 일본 정부나 우리나라 정부의 조치, 행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끔찍했던 일들에 대해 어떤 증오나 분노도 갖지 않도록 저들의 모든 행위를 잊어버리는 것, 아니 잊지는 않더라도 담담하게 스쳐지나갈 수 있는 평정을 찾는 것이다.
모쪼록 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분노에 휩싸여서가 아니라 평안하게 가실 수 있기를 바라기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순간적이지만, 증오심이나 분노심은 아주 오랬동안 우리 자신을 더 많이 괴롭힌다.)
2016년 6월 25일 토요일
자신을 보완하는 방법들
보완....보다 완벽하게 하는 것?
한강의 채식주의자라는 책을 읽으며 문득 떠 오른 생각의 고리들.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육식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구제역 파동으로 소와 돼지들을 산채로 매장하는 장면을 방송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가축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행위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철저히 계획된 살생의 의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사자가 영양을 가두고 보살피며 물과 먹이를 제공해 주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인간의 식습관 중 기이하고 미개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직까지도 널리 퍼져 있는 것은,
특정 생물의 특정 부위를 먹음으로써 자신에게도 같은 능력이 부여된다는 믿음이다.
특히나 남성의 정력에 좋은 음식으로 꼽히는 해구신, 우신 등이 이에 해당하며,
움직이는 모습이나 형태가 유사하다 하여 뱀이나 미꾸라지가 남성의 정력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 또한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는가.
(실제 효과와는 별개로 생각의 발상 자체가 어이 없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들이 인간의 신체를 보완하는 방편이라면 인간의 마음을 보완하는 방편 또한 존재한다.
소위 존재냐 소유냐라는 질문처럼 자신의 존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을 보완하기 위해 소유물에 집착을 하는 것이며, 자신의 소유한 것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남성들이 고급 자동차에 집착하는 것, 여성들이 명품 의류나 액세서리에 집착하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먹음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보완할 수 있다는 믿음,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보완할 수 있다는 믿음,
무엇이 다를 것이며, 그게 과연 올바른 믿음인지는 자명하지 않을까?
한강의 채식주의자라는 책을 읽으며 문득 떠 오른 생각의 고리들.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육식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구제역 파동으로 소와 돼지들을 산채로 매장하는 장면을 방송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가축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행위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철저히 계획된 살생의 의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사자가 영양을 가두고 보살피며 물과 먹이를 제공해 주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인간의 식습관 중 기이하고 미개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직까지도 널리 퍼져 있는 것은,
특정 생물의 특정 부위를 먹음으로써 자신에게도 같은 능력이 부여된다는 믿음이다.
특히나 남성의 정력에 좋은 음식으로 꼽히는 해구신, 우신 등이 이에 해당하며,
움직이는 모습이나 형태가 유사하다 하여 뱀이나 미꾸라지가 남성의 정력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 또한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는가.
(실제 효과와는 별개로 생각의 발상 자체가 어이 없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들이 인간의 신체를 보완하는 방편이라면 인간의 마음을 보완하는 방편 또한 존재한다.
소위 존재냐 소유냐라는 질문처럼 자신의 존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을 보완하기 위해 소유물에 집착을 하는 것이며, 자신의 소유한 것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남성들이 고급 자동차에 집착하는 것, 여성들이 명품 의류나 액세서리에 집착하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먹음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보완할 수 있다는 믿음,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보완할 수 있다는 믿음,
무엇이 다를 것이며, 그게 과연 올바른 믿음인지는 자명하지 않을까?
2016년 5월 20일 금요일
친구들의 두려움 혹은 열등감
고교때 친구들 가운데 K는 겁이 없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자기 주장이 강하고 - 너무 강해서 고집불통이긴 하지만 - 자신의 주장을 굽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딱히 그의 주장이 옳다기 보다는, 그가 너무 자기 확신에 차 있기에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고교때 우리 학교의 특화 종목은 핸드볼이었는데, 간혹 반대항 시합을 할 때면 K는 자주 골키퍼를 하곤 했다.
핸드볼은 그냥 체육 시간에 잠깐 배우는 정도의 종목이니 대표 선수가 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골키퍼라면 여러모로 더 부담스러운 포지션이 아니겠는가?
이런 이력들을 가만 생각해보니, K라는 친구가 참으로 겁이 없는 친구구나 생각이 들었다.
사회인이 되어서도 비교적 자주 모임을 갖는 편인데, K의 행동이 조금 묘하다는 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모임의 장소를 슬며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바꾸곤 하는데, 그게 특별히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자신이 원해서 바꾸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부인한다는 것이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아직도 이해 불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알게 된 열등감의 한 모습.
언젠가 모임의 장소가 중간에 변경되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K가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나서 네가 변경했냐고 묻자 발뺌...)
K가 변경된 모임의 장소와 시간을 알려 왔다.
문득 낮익은 장소라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방송에 소개 된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방송에 나온 집이로구나 하며 답 문자를 보냈더니 날라온 답장.
"난 전부터 알고 있었어."
헐....보통은 '전에 가봤었는데 뭐가 좋더라'거나 '방송 보고 가보고 싶었다'거나....가 통상인데....저 답 문자를 보고 있자니 K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이 번쩍 하고 느껴졌다.
고교때 친구들이 모두 공부에 열심이었던 부류인지라, 딱히 튀거나 하지는 않지만,
J는 여러 모로 활동적이고 부지런하고 외향적인 친구였다.
그래도 딱히 겁이 없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었고, 그저 우리 부류처럼 몇가지 유아적 상처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어떤 두려움이나 열등감도 있겠지 생각했다.
(사실 내밀한 자신의 열등감은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알아도 입밖에 꺼내기가 매우 어려우니 친한 친구 사이라도 털어 놓기는 쉽지 않지 않은가?)
그런데 최근에 이 두려움이나 열등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니, 의외로 J라는 친구가 두려움이나 열등감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멀쩡한 직업을 가지고서도 벌써 노후에 대한 걱정, 자식들에 대한 걱정, 건강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데, 오히려 이 친구는 그런 걱정이 거의 없어 보였다.
이게 무슨 두려움이나 열등감과 관계가 있겠냐 싶기도 할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그에 따른 적극적인 대비는 당연한 것이고 그걸 안하는 게 문제가 아니냐 싶을텐데....
자세히 얘기를 하다보니 두려움을 갖는 친구들은 통상적인 수준의 불안에서 몇 단계씩을 더 나아가고 있었다.
즉, 나이가 들어서 직장을 은퇴하고, 건강이 약해져서 질병에 걸리고, 자식들이 장성해서 독립을 시키고하는 당연한 미래의 상황에, 불안이 더 많은 불안을 낳듯이, 더 다양한 상황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J라는 친구는 어찌 보면 방만할 정도로 현재만을 보고 있는 듯 했고, 굴지의 대기업 간부를 하고 있으면서도,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와 권력에 대한 집착도 없다고 했다.
은퇴를 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니 보통의 사람으로는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용기를 지닌 듯 보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현실적인 부분에서는 오히려 두려워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가정엔 부인과 딸들 뿐이라서 그런지, 그 식구들의 최대 관심사는 외모여서 그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유별나게도 외모에 대한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이게 어느 정도의 수위를 넘어가자,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친구의 몸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거나, 외모에 대한 일장 연설을 늘어 놓은 일을 자주 보게 되었다.
또 다른 한가지는 무어라 딱 말하기 곤란한 면인데, 보통의 사람이라면 흔하게 보이는 것으로 넘길 수 있는데, 이 친구의 성격으로는 좀 의외였던 것이었다.
직장에서 부하 직원의 행동에 대해 좀 많이 답답했던 일이 있었는지, 그 사건에 대해 우리들에게 설명을 하고는 그 직원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누구나 사회 생활 혹은 집단 생활을 하다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에 대해서 상대방의 면전에서 혹은 뒷담화로 그 불만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얘기를 듣고 보니 친구 J는 그 동안 유달리 타인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는 경우가 적었기에 의외였고, 어쩌면 내가 잘 모르던 친구의 두려움 한가지를 알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 J의 경우에는 두려움의 뿌리가 깊지는 않고 성인이 된 후에 심어진 두려움, 혹은 단기적으로 관심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나타난 부분일 가능성이 있으니 심각하진 않겠지만, 의외의 분야에서 친구의 두려움을 보게 되었다.
평소에 자기 주장이 강하고 - 너무 강해서 고집불통이긴 하지만 - 자신의 주장을 굽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딱히 그의 주장이 옳다기 보다는, 그가 너무 자기 확신에 차 있기에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고교때 우리 학교의 특화 종목은 핸드볼이었는데, 간혹 반대항 시합을 할 때면 K는 자주 골키퍼를 하곤 했다.
핸드볼은 그냥 체육 시간에 잠깐 배우는 정도의 종목이니 대표 선수가 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골키퍼라면 여러모로 더 부담스러운 포지션이 아니겠는가?
이런 이력들을 가만 생각해보니, K라는 친구가 참으로 겁이 없는 친구구나 생각이 들었다.
사회인이 되어서도 비교적 자주 모임을 갖는 편인데, K의 행동이 조금 묘하다는 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모임의 장소를 슬며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바꾸곤 하는데, 그게 특별히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자신이 원해서 바꾸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부인한다는 것이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아직도 이해 불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알게 된 열등감의 한 모습.
언젠가 모임의 장소가 중간에 변경되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K가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나서 네가 변경했냐고 묻자 발뺌...)
K가 변경된 모임의 장소와 시간을 알려 왔다.
문득 낮익은 장소라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방송에 소개 된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방송에 나온 집이로구나 하며 답 문자를 보냈더니 날라온 답장.
"난 전부터 알고 있었어."
헐....보통은 '전에 가봤었는데 뭐가 좋더라'거나 '방송 보고 가보고 싶었다'거나....가 통상인데....저 답 문자를 보고 있자니 K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이 번쩍 하고 느껴졌다.
고교때 친구들이 모두 공부에 열심이었던 부류인지라, 딱히 튀거나 하지는 않지만,
J는 여러 모로 활동적이고 부지런하고 외향적인 친구였다.
그래도 딱히 겁이 없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었고, 그저 우리 부류처럼 몇가지 유아적 상처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어떤 두려움이나 열등감도 있겠지 생각했다.
(사실 내밀한 자신의 열등감은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알아도 입밖에 꺼내기가 매우 어려우니 친한 친구 사이라도 털어 놓기는 쉽지 않지 않은가?)
그런데 최근에 이 두려움이나 열등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니, 의외로 J라는 친구가 두려움이나 열등감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멀쩡한 직업을 가지고서도 벌써 노후에 대한 걱정, 자식들에 대한 걱정, 건강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데, 오히려 이 친구는 그런 걱정이 거의 없어 보였다.
이게 무슨 두려움이나 열등감과 관계가 있겠냐 싶기도 할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그에 따른 적극적인 대비는 당연한 것이고 그걸 안하는 게 문제가 아니냐 싶을텐데....
자세히 얘기를 하다보니 두려움을 갖는 친구들은 통상적인 수준의 불안에서 몇 단계씩을 더 나아가고 있었다.
즉, 나이가 들어서 직장을 은퇴하고, 건강이 약해져서 질병에 걸리고, 자식들이 장성해서 독립을 시키고하는 당연한 미래의 상황에, 불안이 더 많은 불안을 낳듯이, 더 다양한 상황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J라는 친구는 어찌 보면 방만할 정도로 현재만을 보고 있는 듯 했고, 굴지의 대기업 간부를 하고 있으면서도,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와 권력에 대한 집착도 없다고 했다.
은퇴를 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니 보통의 사람으로는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용기를 지닌 듯 보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현실적인 부분에서는 오히려 두려워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가정엔 부인과 딸들 뿐이라서 그런지, 그 식구들의 최대 관심사는 외모여서 그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유별나게도 외모에 대한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이게 어느 정도의 수위를 넘어가자,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친구의 몸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거나, 외모에 대한 일장 연설을 늘어 놓은 일을 자주 보게 되었다.
또 다른 한가지는 무어라 딱 말하기 곤란한 면인데, 보통의 사람이라면 흔하게 보이는 것으로 넘길 수 있는데, 이 친구의 성격으로는 좀 의외였던 것이었다.
직장에서 부하 직원의 행동에 대해 좀 많이 답답했던 일이 있었는지, 그 사건에 대해 우리들에게 설명을 하고는 그 직원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누구나 사회 생활 혹은 집단 생활을 하다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에 대해서 상대방의 면전에서 혹은 뒷담화로 그 불만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얘기를 듣고 보니 친구 J는 그 동안 유달리 타인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는 경우가 적었기에 의외였고, 어쩌면 내가 잘 모르던 친구의 두려움 한가지를 알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 J의 경우에는 두려움의 뿌리가 깊지는 않고 성인이 된 후에 심어진 두려움, 혹은 단기적으로 관심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나타난 부분일 가능성이 있으니 심각하진 않겠지만, 의외의 분야에서 친구의 두려움을 보게 되었다.
충격과 익숙해짐
좋고 나쁨을 떠나 충격적인 것들.
물건, 생각, 행위, 사건 등등....
처음에는 두려움과 공포 혹은 감탄과 신비로움 그리고 흥미
하지만 이 충격의 여파가 일정한 시간과 범위를 넘어 지속이 되면
사람들은 점점 이것에 익숙해지고 나름의 방식으로 수용을 하게 된다.
(어쩌면 반강제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생존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애플에서 스마트폰인 아이폰을 처음 출시했을 때에는,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혁신적이지 않다며 불평을 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스마트 폰 없는 세상을 상상도 못한다는 듯이 완전히 익숙해져 버렸다.
물건, 생각, 행위, 사건 등등....
처음에는 두려움과 공포 혹은 감탄과 신비로움 그리고 흥미
하지만 이 충격의 여파가 일정한 시간과 범위를 넘어 지속이 되면
사람들은 점점 이것에 익숙해지고 나름의 방식으로 수용을 하게 된다.
(어쩌면 반강제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생존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애플에서 스마트폰인 아이폰을 처음 출시했을 때에는,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혁신적이지 않다며 불평을 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스마트 폰 없는 세상을 상상도 못한다는 듯이 완전히 익숙해져 버렸다.
머리가 좋다는 칭찬은 하지 마라?
최근에 본 강연, 혹은 아동 심리 실험 결과 등에서 이런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주어진 문제를 푸는 아이에게, 머리가 좋다는 칭찬과 문제를 열심히 푼다는 칭찬을 나누어서 해 주었더니, 그 아이들이 이후에 보인 반응들이 사뭇 달랐다.
어려운 문제를 다시 내 준고 난 후에, 문제의 풀이법과 다른 학생들의 점수 두가지 가운데 한가지를 선택하라고 하자, 그 선택이 칭찬의 내용에 따라서 완전히 갈렸다는 것.
머리가 좋다는 칭찬을 받은 아이들은 다른 학생들의 점수를,
열심히 푼다는 칭찬을 받은 아이들은 문제의 풀이법을 선택한 것.
https://youtu.be/X4l-Q8aMW4M
이것만 보고는 선뜻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SBS의 동상이몽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소녀의 고민을 듣게 되었다.
http://program.sbs.co.kr/builder/endPage.do?pgm_id=22000007274&pgm_mnu_id=32106&pgm_build_id=9001&contNo=22000172832
우연히 아버지의 권유로 당구를 접한 뒤에, 짧은 기간의 훈련으로 지역 대회에서 우승을 하게 된 소녀.
하지만 이 우승 이후로 부모의 기대는 한껏 치솟아 당구천재라며 본격적인 훈련을 시키지만, 정작 이 소녀는 당구에 대한 흥미를 잃었을 뿐 아니라 거부감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것.
이 두가지 프로그램을 보고 나니 조금 이해가 되는 듯 했다.
'머리가 좋다는' '천재다'라는 칭찬은, 이미 타고난 것,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하지만 그런 칭찬을 들은 본인은 항상 그것이 사실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앞서의 아이들은 다른 학생들의 점수를 나와 비교함으로써 내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 다른 학생들의 '것'과는 얼마나 더 나은지 비교하기를 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만일 몇번의 확인 과정을 거쳐서 나의 그것이 비교적 낫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면 자신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새로운 상대를 접하게 되면 끊임없이 비교를 하려고 할 것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발휘하려고 할 뿐, 그것이 노력을 통해서 더 강해지고 발전한다는 이미지는 갖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더 나은 상대를 만나게 되면, 애초에 소유한 '것'의 차이이므로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내가 노력해서 나의 '것'이 더 커지고 나아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게 된다.
만약 몇번의 확인 과정에서, 나의 '것'이 그다지 낫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면 결과는 더욱 나쁘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내가 이미 소유한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보잘것 없음이 밝혀졌다면?
이 경우에느 노력을 통해서 발전하거나 더 성장하리라는 상상을 할 수는 없고, 내가 가진 것을 잘못 알고 있는 부모의 기대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고...
결국은 잘못된 이미지로 인해, 주어진 재능만큼이나 소중한 노력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 것은 아닐지....
주어진 문제를 푸는 아이에게, 머리가 좋다는 칭찬과 문제를 열심히 푼다는 칭찬을 나누어서 해 주었더니, 그 아이들이 이후에 보인 반응들이 사뭇 달랐다.
어려운 문제를 다시 내 준고 난 후에, 문제의 풀이법과 다른 학생들의 점수 두가지 가운데 한가지를 선택하라고 하자, 그 선택이 칭찬의 내용에 따라서 완전히 갈렸다는 것.
머리가 좋다는 칭찬을 받은 아이들은 다른 학생들의 점수를,
열심히 푼다는 칭찬을 받은 아이들은 문제의 풀이법을 선택한 것.
https://youtu.be/X4l-Q8aMW4M
이것만 보고는 선뜻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SBS의 동상이몽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소녀의 고민을 듣게 되었다.
http://program.sbs.co.kr/builder/endPage.do?pgm_id=22000007274&pgm_mnu_id=32106&pgm_build_id=9001&contNo=22000172832
우연히 아버지의 권유로 당구를 접한 뒤에, 짧은 기간의 훈련으로 지역 대회에서 우승을 하게 된 소녀.
하지만 이 우승 이후로 부모의 기대는 한껏 치솟아 당구천재라며 본격적인 훈련을 시키지만, 정작 이 소녀는 당구에 대한 흥미를 잃었을 뿐 아니라 거부감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것.
이 두가지 프로그램을 보고 나니 조금 이해가 되는 듯 했다.
'머리가 좋다는' '천재다'라는 칭찬은, 이미 타고난 것,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하지만 그런 칭찬을 들은 본인은 항상 그것이 사실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앞서의 아이들은 다른 학생들의 점수를 나와 비교함으로써 내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 다른 학생들의 '것'과는 얼마나 더 나은지 비교하기를 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만일 몇번의 확인 과정을 거쳐서 나의 그것이 비교적 낫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면 자신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새로운 상대를 접하게 되면 끊임없이 비교를 하려고 할 것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발휘하려고 할 뿐, 그것이 노력을 통해서 더 강해지고 발전한다는 이미지는 갖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더 나은 상대를 만나게 되면, 애초에 소유한 '것'의 차이이므로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내가 노력해서 나의 '것'이 더 커지고 나아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게 된다.
만약 몇번의 확인 과정에서, 나의 '것'이 그다지 낫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면 결과는 더욱 나쁘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내가 이미 소유한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보잘것 없음이 밝혀졌다면?
이 경우에느 노력을 통해서 발전하거나 더 성장하리라는 상상을 할 수는 없고, 내가 가진 것을 잘못 알고 있는 부모의 기대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고...
결국은 잘못된 이미지로 인해, 주어진 재능만큼이나 소중한 노력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 것은 아닐지....
데미안의 알깨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그리고 항상 따라오는 구절, "태어나려고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세계>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장애물, 선입견, 관습 등등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다.
파괴하면 벗어나게 되지만, 타협하고 순응하면 안주하게 된다.
그럼 모든것을 파괴? 모두가 파괴?
나를 방해하는 것에 한해서만...
하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한다면 깨트려야 할 필요성은 물론이고, 깨트려야 할 대상도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우리를 감싸고 있는 껍데기는 한겹이 아닐것이다.
물론 없을 수도 있으며 무수히 많은 껍데기가 겹겹이 둘러 싸고 있을 수도 있다.
이 껍데기의 수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껍데기를 인식하는 지에 달렸다.
그리고 인식하고 난 후에는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문제는 껍데기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진짜 껍데기.
어쩌면 가장 안쪽에 있고, 가장 단단하고, 너무 자연스러운 껍데기.
껍데기인지 인식하기도 제일 어렵고, 깨트리기도 제일 어려우며, 그게 나를 옥죄었던 것인지 나를 안전하게 보호했던지 판단하기 어려운 그 껍데기 말이다.
대부분의 바깥쪽 껍데기는 외부에서 씌워준 것들이다.
부모님, 선생님, 관습, 윤리, 도덕, 법률 등이 일부는 반 강제적으로, 일부는 사회적인 계약이라는 명목으로, 일부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안쪽의 껍데기는 대부분 내가 만든 것이다.
자존심, 컴플렉스, 두려움...
그리고 항상 따라오는 구절, "태어나려고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세계>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장애물, 선입견, 관습 등등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다.
파괴하면 벗어나게 되지만, 타협하고 순응하면 안주하게 된다.
그럼 모든것을 파괴? 모두가 파괴?
나를 방해하는 것에 한해서만...
하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한다면 깨트려야 할 필요성은 물론이고, 깨트려야 할 대상도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우리를 감싸고 있는 껍데기는 한겹이 아닐것이다.
물론 없을 수도 있으며 무수히 많은 껍데기가 겹겹이 둘러 싸고 있을 수도 있다.
이 껍데기의 수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껍데기를 인식하는 지에 달렸다.
그리고 인식하고 난 후에는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문제는 껍데기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진짜 껍데기.
어쩌면 가장 안쪽에 있고, 가장 단단하고, 너무 자연스러운 껍데기.
껍데기인지 인식하기도 제일 어렵고, 깨트리기도 제일 어려우며, 그게 나를 옥죄었던 것인지 나를 안전하게 보호했던지 판단하기 어려운 그 껍데기 말이다.
대부분의 바깥쪽 껍데기는 외부에서 씌워준 것들이다.
부모님, 선생님, 관습, 윤리, 도덕, 법률 등이 일부는 반 강제적으로, 일부는 사회적인 계약이라는 명목으로, 일부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안쪽의 껍데기는 대부분 내가 만든 것이다.
자존심, 컴플렉스, 두려움...
물질에 쪼들려 마음까지 쪼그라드는 비참함
물질적(금전적) 빈곤이 사람을 참 좀스럽게 만든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다.
가족간에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각출하는 축하금을 내면서 느끼는 그 아까움이라니.
각출을 하는 인원은 원래의 가족 구성원에서 2명이 빠진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부 일심동체라서, 미국으로 시집을 간 누이동생은 내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이다.
이 경우는 일단 제외를 하고 나서도 나머지의 경우엔 심한 불평등이 존재한다.
큰 누이네 가족은 모두 4명, 둘째 누이네 가족은 모두 2명.
하지만 큰 누이네서 축하금을 내는 사람은 1명, 둘째 누이네서 축하금을 내는 사람도 1명.
내가 축하금을 내는 사람은 모두 12명으로,
아버지, 어머니, 큰 누이, 큰 매형, 큰 누이 첫째 조카, 큰 누이 둘째 조카, 둘째 누이, 둘째 누이 조카, 작은 누이, 누이 동생, 누이 동생 매제, 누이 동생 조카.
아버지와 어머니께는 10만원을, 나머지 사람들은 5만원을 축하금으로 준다.
1년 합계 70만원.
그리고 내게 축하금을 주는 사람은 4명으로,
아버지, 큰 누이, 둘째 누이, 작은 누이.
아버지께서는 10만원, 나머지 사람들은 5만원씩.
1년 합계 25만원.
한달 식비 10만원 내에서 해결하기 위해서, 정말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몇번을 하곤 하는데, 45만원이면.....
애초에 나갈 돈으로 정해져 있으니 공과금이나 건강보험료처럼 그냥 세금 낸다 생각하면 그만인 일이다.
그래도 문득 문득 계산해 보면 아깝다는 생각이 자꾸 들고, 어디서 줄일 수 없을까 생각하다 보면, 자꾸 한번씩 쳐다보게 된다.
생일 축하한다고 문자를 보내면 답장이 없는 경우도 있고, 썩 반기지도 않는 느낌이 들어 이제는 축하한다는 문자도 보내지 않는다.
물론 축하금을 내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내게 생일 축하한다고 문자라도 보낸 횟수는 지금껏 5번이 안된다. 한번도 안보낸 사람도 있고....
참 우습지.
생각해보면 참 아무것도 아닌 액수의 돈인데,
이걸 낼까 말까 고민하는 내가 참 좀스럽지 않은가.
그럴수록 고민하다보면 내 처지가 더욱 한심스러워진다.
한가지만은 배웠지.
어느 누구도 이렇게 꾸준히 지속적으로 축하금을 낸다는게, 그게 쉽지는 않은 일이라는 것을.
만약 누군가 그런 사람을 본다면 마땅히 칭찬해 주어야 하겠다는 것을.
가족간에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각출하는 축하금을 내면서 느끼는 그 아까움이라니.
각출을 하는 인원은 원래의 가족 구성원에서 2명이 빠진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부 일심동체라서, 미국으로 시집을 간 누이동생은 내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이다.
이 경우는 일단 제외를 하고 나서도 나머지의 경우엔 심한 불평등이 존재한다.
큰 누이네 가족은 모두 4명, 둘째 누이네 가족은 모두 2명.
하지만 큰 누이네서 축하금을 내는 사람은 1명, 둘째 누이네서 축하금을 내는 사람도 1명.
내가 축하금을 내는 사람은 모두 12명으로,
아버지, 어머니, 큰 누이, 큰 매형, 큰 누이 첫째 조카, 큰 누이 둘째 조카, 둘째 누이, 둘째 누이 조카, 작은 누이, 누이 동생, 누이 동생 매제, 누이 동생 조카.
아버지와 어머니께는 10만원을, 나머지 사람들은 5만원을 축하금으로 준다.
1년 합계 70만원.
그리고 내게 축하금을 주는 사람은 4명으로,
아버지, 큰 누이, 둘째 누이, 작은 누이.
아버지께서는 10만원, 나머지 사람들은 5만원씩.
1년 합계 25만원.
한달 식비 10만원 내에서 해결하기 위해서, 정말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몇번을 하곤 하는데, 45만원이면.....
애초에 나갈 돈으로 정해져 있으니 공과금이나 건강보험료처럼 그냥 세금 낸다 생각하면 그만인 일이다.
그래도 문득 문득 계산해 보면 아깝다는 생각이 자꾸 들고, 어디서 줄일 수 없을까 생각하다 보면, 자꾸 한번씩 쳐다보게 된다.
생일 축하한다고 문자를 보내면 답장이 없는 경우도 있고, 썩 반기지도 않는 느낌이 들어 이제는 축하한다는 문자도 보내지 않는다.
물론 축하금을 내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내게 생일 축하한다고 문자라도 보낸 횟수는 지금껏 5번이 안된다. 한번도 안보낸 사람도 있고....
참 우습지.
생각해보면 참 아무것도 아닌 액수의 돈인데,
이걸 낼까 말까 고민하는 내가 참 좀스럽지 않은가.
그럴수록 고민하다보면 내 처지가 더욱 한심스러워진다.
한가지만은 배웠지.
어느 누구도 이렇게 꾸준히 지속적으로 축하금을 낸다는게, 그게 쉽지는 않은 일이라는 것을.
만약 누군가 그런 사람을 본다면 마땅히 칭찬해 주어야 하겠다는 것을.
[도서] 열등감, 어떻게 할 것인가?
분당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인데, 책의 제목에 크고 작은 글씨로 부가된 제목들이 꽤 많다.
서명은.. (위대한 심리학자 아들러의) 열등감,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알프레드 아들러,
편역자 신진철
출판사는 소울메이트
아래는 이 책의 간략한 사진들
처음에는 "당신이 화내는 진짜 이유"라는 책을 찾다가, 그 책은 찾지 못한 대신에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아주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책에 대해서는 매우 실망스럽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아들러의 심리학에 대한 철저한 역서라면 어렵고 지겨워서 제대로 읽지도 못하겠지만, 너무나 간략화한 내용과 아주 단편적인 소(小)주제들의 나열 같은 논리적인 흐름의 부재가 마치 요점 정리를 해 둔 암기 노트 같다고나 할까?
중간 중간에 빠진 내용들이 무엇인지 작성자만이 알고 있기에 작성자에게 유용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난삽해 보이기 쉬운 그런 암기노트 말이다.
심지어 이렇게 내용을 간략화하다보니 책의 부피가 줄어들 것을 염려한 때문인지, 별 관련 없는 사진들과 널찍 널찍한 여백들이 거반이다.
그래도 내용은 많이 쉽게 풀어서 씌어져 있기에 가볍게 읽고, 자신에게 해당되는 부분들은 한번쯤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이 의미를 가지지 않나 싶다.
몇가지 단락이나 문자 가운데 생각해 볼 만한 것들을 여기에 추려 보았다.
(물론 순전히 주관적이지만...)
=================================================================
p.63 열등감을 겪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는 무엇인가?中
"이렇게 하면 좋았을 텐데." "그 직업을 택할 걸." "그 남자와 싸울 걸."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언제나 만날 수 있다. 이런 말들은 모두 그 사람이 상당한 열등감을 겪고 있음을 알려 주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열등감의 관점에서 그들의 말을 해석하면 의구심과 같은 감정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의구심에 한번 빠진 사람은 언제나 의심하는 상태로 남게 되며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면 그는 아마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p.77 우월성을 향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는가?中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공상에 만족하는 존재다. 특히 용기가 부족한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공상 세계에 상당히 만족한다. 그들은 스스로 약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이를 회피하기 위해 우회로를 선택한다. 이 싸움을 피하고 도피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이 실제의 모습보다 더 힘세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거짓 위안을 얻는다.
p.84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과시적이라면 이는 열등감 때문이다.中
만약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과시적이라면 이는 열등감 때문이다. 즉 그 사람은 유용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과 경쟁을 펼칠 만큼 스스로 충분히 강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다. 또한 사회와 조화를 이루지 못해 사회 속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며, 자신의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모른다.
p.135 분노 역시 열등감 콤플렉스의 중요한 행동 표현 양식이다.中
어려움에 맞서 표현되는 가정 철저한 형태의 퇴보는 자살이다. 자살을 택한 사람은 삶의 모든 문제에 백기를 든 채,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한 신념을 표현한다. 자살이 언제나 타인에 대한 비난이나 복수라는 점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살도 우월성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법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자살을 택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린다. 마치 이렇게 말하듯 말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여린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나를 극도로 잔인하게 대했다."
=================================================================
서명은.. (위대한 심리학자 아들러의) 열등감,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알프레드 아들러,
편역자 신진철
출판사는 소울메이트
아래는 이 책의 간략한 사진들
좌측이 <열등감, 어떻게 할 것인가?>, 우측은 움베르토 에코의 <전설의 땅> |
저자와 편역자 소개 |
출판 정보 |
목차 |
목차 |
처음에는 "당신이 화내는 진짜 이유"라는 책을 찾다가, 그 책은 찾지 못한 대신에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아주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책에 대해서는 매우 실망스럽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아들러의 심리학에 대한 철저한 역서라면 어렵고 지겨워서 제대로 읽지도 못하겠지만, 너무나 간략화한 내용과 아주 단편적인 소(小)주제들의 나열 같은 논리적인 흐름의 부재가 마치 요점 정리를 해 둔 암기 노트 같다고나 할까?
중간 중간에 빠진 내용들이 무엇인지 작성자만이 알고 있기에 작성자에게 유용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난삽해 보이기 쉬운 그런 암기노트 말이다.
심지어 이렇게 내용을 간략화하다보니 책의 부피가 줄어들 것을 염려한 때문인지, 별 관련 없는 사진들과 널찍 널찍한 여백들이 거반이다.
그래도 내용은 많이 쉽게 풀어서 씌어져 있기에 가볍게 읽고, 자신에게 해당되는 부분들은 한번쯤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이 의미를 가지지 않나 싶다.
몇가지 단락이나 문자 가운데 생각해 볼 만한 것들을 여기에 추려 보았다.
(물론 순전히 주관적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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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3 열등감을 겪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는 무엇인가?中
"이렇게 하면 좋았을 텐데." "그 직업을 택할 걸." "그 남자와 싸울 걸."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언제나 만날 수 있다. 이런 말들은 모두 그 사람이 상당한 열등감을 겪고 있음을 알려 주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열등감의 관점에서 그들의 말을 해석하면 의구심과 같은 감정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의구심에 한번 빠진 사람은 언제나 의심하는 상태로 남게 되며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면 그는 아마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p.77 우월성을 향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는가?中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공상에 만족하는 존재다. 특히 용기가 부족한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공상 세계에 상당히 만족한다. 그들은 스스로 약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이를 회피하기 위해 우회로를 선택한다. 이 싸움을 피하고 도피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이 실제의 모습보다 더 힘세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거짓 위안을 얻는다.
p.84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과시적이라면 이는 열등감 때문이다.中
만약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과시적이라면 이는 열등감 때문이다. 즉 그 사람은 유용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과 경쟁을 펼칠 만큼 스스로 충분히 강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다. 또한 사회와 조화를 이루지 못해 사회 속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며, 자신의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모른다.
p.135 분노 역시 열등감 콤플렉스의 중요한 행동 표현 양식이다.中
어려움에 맞서 표현되는 가정 철저한 형태의 퇴보는 자살이다. 자살을 택한 사람은 삶의 모든 문제에 백기를 든 채,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한 신념을 표현한다. 자살이 언제나 타인에 대한 비난이나 복수라는 점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살도 우월성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법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자살을 택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린다. 마치 이렇게 말하듯 말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여린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나를 극도로 잔인하게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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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0일 일요일
층간소음의 깨달음
이 공동주택에서 거주한 지도 20년이 되어가니 참 오래도 살았다.
아마도 10여년간은 집과 회사만 오가는 시계 부랄의 생활의 연속이었으니, 이웃이 누구였는지도 몰랐고 층간 소음이 뭔지도 몰랐다.
당시엔 토요일도 근무를 했기도 하려니와 야근도 태반이었고 격주로 주말엔 본가에 찾아 다니기도 했다.
정말 집에 있는 시간이 참 적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만 박혀서 산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층간 소음을 인식하기 시작한 건 2014년 가을을 전후한 때라고 생각한다.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무언가 심하게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 등이 가끔씩 들려왔는데, 그게 1시간 ~ 2시간 정도씩 지속이 되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가 궁금했다. 찾아가서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문제는 그게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것 이었다.
이 공동주택의 구조로 보아 윗집이거나 옆집일 가능성이 제일 높아 보였지만, 원래의 소리가 무척이나 크다면 윗집의 옆집이거나 아랫집일 수도 있는거였다.
약 1년을 참았다.
그리고 이제는 분노에 짜증, 불면증과 간헐적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까지 생겼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사를 나간 집도 있었고 들어 온 집도 있고, 안보이던 사람이 함께 사는 경우도 생겼다.
복수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겨우 겨우 생각을 바꿔 보았다.
모두가 나쁜 의도를 가지진 않았을거라는....단지 모르고 하는 일일 뿐이라고
층간 소음에 대해 직접 대화를 해 본 것은 윗집 뿐이었는데 반응이 그닥 좋지 않았었다.
그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보았는데, 먼저 층간 소음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할 때에는 상대방이 가해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자세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보다 중요한 건, 상대방의 행위를 짐작해서 지적해서는 안되고, 나의 상태가 매우 괴롭고 힘들다는 표현으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행위를 짐작해서 지적하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에 매우 큰 반격에 직면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실일 경우에도 상대방을 매우 방어적으로 만든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먼저 내가 어떤 소리나 진동 때문에 매우 힘들고 괴롭다는 식의 표현을 하게 되면, 상대방은 먼저 동정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대화로 문제를 풀기가 쉬워진다.
층간 소음은 전형적인 비대칭 상태의 불공정 게임이다.
가해자는 내가 하는 어떤 행동이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 지 알지 못하고 있으며, 피해자는 상대방이 얼마나 조심해야만 내가 참을 만 한지의 정도를 알지도 못하고 알려 줄 수도 없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1) 자신의 피해 상황을 짐작이 가는 가해자에게 알려주고
2) 잠정적인 가해자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가해자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3)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하여 실험을 통해 문제가 되는 소리를 확인한 후,
4) 어떤 정도이면 피해가 되지 않을 지, 그 정도를 가늠한 후에
5) 적절한 해결 방법을 찾는 것(가해자의 행동 주의, 소음 방지 용품 사용, 건설사에 하자 보수 요청)
의 과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실상 정부는 이런 식의 합리적인 분쟁 조절 절차에 대해 국민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홍보만을 해도 상당히 많은 문제들이 해결 될 것이다.
현실성 없는 소음 기준을 만들어 봐야 피해자와 가해자가 더욱 원수가 되는 상황만 만들 뿐, 거의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해 우리 국민들이 미개하니까, 스스로 이런 합리적인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못하는 것이며, 문제 해결과는 점점 동 떨어지는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엔 방화 살인에까지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다.
하지만 위의 대화 방법이나, 문제 해결 절차가 일반적인 깨달음이라면, 나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준 건 최근의 일 이었다.
요즘들어 윗집에 새로운 동거인이 한 명 추가되었는데, 발소리가 엄청나게 큰 남자였다.
이건 어디서 들리는지 확인 할 필요도 없이 명백했고, 정말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진동의 문제라서 귀마개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더더군다나 이 사람은 주로 밤 늦은 시각(23:00 ~ )에 아무렇지 않게 소리를 내서 많이 놀라게 했다.
이 동거인이 추가 되면서 기존에 사시던 노부인도 소음에 둔감해 진 탓일까? 아침 이른 시간(06:00 ~ 07:00)에 베란다에서 뚝딱거리고 댕그렁 거리는 것이 훨씬 심해졌다. 빈도나 강도 모든 면에서...
참다 못하고 인터폰으로 항의를 하긴 해서 조금 누그러들긴 했지만, 대화가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었기에 이 정도로 만족하고 참고 있는 중인다.
인터폰의 대화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기에 어지간하면 인터폰을 다시 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침 잠을 방해 받기도 하고 한밤중에 깜짝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좀 심하다 싶은 소음이 있었던 평일의 초 저녁 시간, 내 안에 분노가 쌓이지 않게 쌍욕을 내질렀다.
실상은 소음을 낸 상대방을 향한 분노의 표출이었지만, 그게 상대방에게 들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희안하게도, 그 날 이후로 소음이 정말 많이 줄었다.
정말 이만하면 살만 하겠다 싶을 정도였다.
이건 대체 무슨 조화일까? 정말 내 욕지거리가 들렸던 걸일까?
하긴 내가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TV 소리, 물소리, 문 여닫는 소리 등등은 들어 보았어도, 사람 말소리는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다.
주말에 아주 작정하고 신나게 놀던 부녀간에 딸 아이의 자지러질 듯한 웃음 소리는 들은 적이 있다.
그 외에는 복도에 나와서 얘기하는 사람이거나 마을 놀이터에서 노는 계집아이들의 꺅꺅 비명소리 일 뿐, 집안에서 말하는 사람들의 말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 말소리는 어떻게? 그냥 우연의 일치?
이 일을 겪고 나서 두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이웃들이 소란스러울 수록, 나는 나 또한 가해자가 되지 않으려고 더 주의하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게 이웃 사람들을 더욱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하나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소음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소음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소음을 듣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음을 듣고 괴롭기에, 자신이 소음을 만들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주의한다.
이 결과로 가해자는 점점 더 심한 가해자가 된고 피해자는 점점 더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
하지만, 다시 바꾸어 말하면 피해자가 조심하고 소음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기에 가해자의 소음이 커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윗층과 아랫층의 두 집만 생각하면 아래층에서 윗층에 지속적인 소음을 주는 것은 윗층에서 애랫층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좀 더 크게 생각해보면 결국은 돌고 돌게 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서, 피해자가 주의할수록 다 소음을 잘 들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가해자가 거리낌 없이 소음을 만들수록 타인의 소음은 인식하기 어려워서 상황은 심각해지기 마련이다.
빈익빈 부익부가 아니라 가학가 피학피?
이게 한가지 깨달은 것이다.
결국 내 욕지거리가 가해자들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는 가정하에 성립할 설명이겠지만 말이다.
또 한가지 깨달은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깨달음 이었는데,
소음의 피해가 커질 수록, 나는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더욱 주의하면서,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명분을 만들고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었다.
언제든지 가해자들에게 당당하게 죄를 물을 수 있도록, 나 자신은 완전한 무죄가 되기 위해서...
결국은 점잔빼고 나는 독야청정하리라 하면서, 나는 깨끗하고 저것들은 더럽고, 그러니 내가 저들에게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옳은 것이고, 저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그런 생각?
하지만 딱히 그들을 단죄할 힘도 용기도 없어서, 참아야 할 것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스스로 망가져가고 있었던 건 아닌지...
세상에 독불장군 없다고, 나 혼자 잘나고 나 혼자 옳고 나 혼자 정의로울 수 있겠는가?
내가 사는 이웃들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나도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것이 섭리이고 순응하는 방법이겠다 싶다.
뭔가 좀 타락하는 기분이고, 수준이 낮아지는 기분이 들지만, 근묵자는 흑이어야 여러모로 편하지 않겠는가?
백이고 싶으면 묵에서 멀어져야지, 굳이 묵 근처에 살면서 백이되려고 한다면 수시로 씻고 닦아내야 하는 번거로움은 견뎌내야 하지 않겠냐 말이다......
아마도 10여년간은 집과 회사만 오가는 시계 부랄의 생활의 연속이었으니, 이웃이 누구였는지도 몰랐고 층간 소음이 뭔지도 몰랐다.
당시엔 토요일도 근무를 했기도 하려니와 야근도 태반이었고 격주로 주말엔 본가에 찾아 다니기도 했다.
정말 집에 있는 시간이 참 적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만 박혀서 산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층간 소음을 인식하기 시작한 건 2014년 가을을 전후한 때라고 생각한다.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무언가 심하게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 등이 가끔씩 들려왔는데, 그게 1시간 ~ 2시간 정도씩 지속이 되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가 궁금했다. 찾아가서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문제는 그게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것 이었다.
이 공동주택의 구조로 보아 윗집이거나 옆집일 가능성이 제일 높아 보였지만, 원래의 소리가 무척이나 크다면 윗집의 옆집이거나 아랫집일 수도 있는거였다.
약 1년을 참았다.
그리고 이제는 분노에 짜증, 불면증과 간헐적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까지 생겼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사를 나간 집도 있었고 들어 온 집도 있고, 안보이던 사람이 함께 사는 경우도 생겼다.
복수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겨우 겨우 생각을 바꿔 보았다.
모두가 나쁜 의도를 가지진 않았을거라는....단지 모르고 하는 일일 뿐이라고
층간 소음에 대해 직접 대화를 해 본 것은 윗집 뿐이었는데 반응이 그닥 좋지 않았었다.
그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보았는데, 먼저 층간 소음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할 때에는 상대방이 가해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자세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보다 중요한 건, 상대방의 행위를 짐작해서 지적해서는 안되고, 나의 상태가 매우 괴롭고 힘들다는 표현으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행위를 짐작해서 지적하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에 매우 큰 반격에 직면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실일 경우에도 상대방을 매우 방어적으로 만든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먼저 내가 어떤 소리나 진동 때문에 매우 힘들고 괴롭다는 식의 표현을 하게 되면, 상대방은 먼저 동정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대화로 문제를 풀기가 쉬워진다.
층간 소음은 전형적인 비대칭 상태의 불공정 게임이다.
가해자는 내가 하는 어떤 행동이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 지 알지 못하고 있으며, 피해자는 상대방이 얼마나 조심해야만 내가 참을 만 한지의 정도를 알지도 못하고 알려 줄 수도 없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1) 자신의 피해 상황을 짐작이 가는 가해자에게 알려주고
2) 잠정적인 가해자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가해자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3)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하여 실험을 통해 문제가 되는 소리를 확인한 후,
4) 어떤 정도이면 피해가 되지 않을 지, 그 정도를 가늠한 후에
5) 적절한 해결 방법을 찾는 것(가해자의 행동 주의, 소음 방지 용품 사용, 건설사에 하자 보수 요청)
의 과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실상 정부는 이런 식의 합리적인 분쟁 조절 절차에 대해 국민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홍보만을 해도 상당히 많은 문제들이 해결 될 것이다.
현실성 없는 소음 기준을 만들어 봐야 피해자와 가해자가 더욱 원수가 되는 상황만 만들 뿐, 거의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해 우리 국민들이 미개하니까, 스스로 이런 합리적인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못하는 것이며, 문제 해결과는 점점 동 떨어지는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엔 방화 살인에까지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다.
하지만 위의 대화 방법이나, 문제 해결 절차가 일반적인 깨달음이라면, 나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준 건 최근의 일 이었다.
요즘들어 윗집에 새로운 동거인이 한 명 추가되었는데, 발소리가 엄청나게 큰 남자였다.
이건 어디서 들리는지 확인 할 필요도 없이 명백했고, 정말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진동의 문제라서 귀마개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더더군다나 이 사람은 주로 밤 늦은 시각(23:00 ~ )에 아무렇지 않게 소리를 내서 많이 놀라게 했다.
이 동거인이 추가 되면서 기존에 사시던 노부인도 소음에 둔감해 진 탓일까? 아침 이른 시간(06:00 ~ 07:00)에 베란다에서 뚝딱거리고 댕그렁 거리는 것이 훨씬 심해졌다. 빈도나 강도 모든 면에서...
참다 못하고 인터폰으로 항의를 하긴 해서 조금 누그러들긴 했지만, 대화가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었기에 이 정도로 만족하고 참고 있는 중인다.
인터폰의 대화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기에 어지간하면 인터폰을 다시 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침 잠을 방해 받기도 하고 한밤중에 깜짝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좀 심하다 싶은 소음이 있었던 평일의 초 저녁 시간, 내 안에 분노가 쌓이지 않게 쌍욕을 내질렀다.
실상은 소음을 낸 상대방을 향한 분노의 표출이었지만, 그게 상대방에게 들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희안하게도, 그 날 이후로 소음이 정말 많이 줄었다.
정말 이만하면 살만 하겠다 싶을 정도였다.
이건 대체 무슨 조화일까? 정말 내 욕지거리가 들렸던 걸일까?
하긴 내가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TV 소리, 물소리, 문 여닫는 소리 등등은 들어 보았어도, 사람 말소리는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다.
주말에 아주 작정하고 신나게 놀던 부녀간에 딸 아이의 자지러질 듯한 웃음 소리는 들은 적이 있다.
그 외에는 복도에 나와서 얘기하는 사람이거나 마을 놀이터에서 노는 계집아이들의 꺅꺅 비명소리 일 뿐, 집안에서 말하는 사람들의 말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 말소리는 어떻게? 그냥 우연의 일치?
이 일을 겪고 나서 두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이웃들이 소란스러울 수록, 나는 나 또한 가해자가 되지 않으려고 더 주의하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게 이웃 사람들을 더욱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하나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소음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소음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소음을 듣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음을 듣고 괴롭기에, 자신이 소음을 만들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주의한다.
이 결과로 가해자는 점점 더 심한 가해자가 된고 피해자는 점점 더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
하지만, 다시 바꾸어 말하면 피해자가 조심하고 소음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기에 가해자의 소음이 커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윗층과 아랫층의 두 집만 생각하면 아래층에서 윗층에 지속적인 소음을 주는 것은 윗층에서 애랫층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좀 더 크게 생각해보면 결국은 돌고 돌게 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서, 피해자가 주의할수록 다 소음을 잘 들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가해자가 거리낌 없이 소음을 만들수록 타인의 소음은 인식하기 어려워서 상황은 심각해지기 마련이다.
빈익빈 부익부가 아니라 가학가 피학피?
이게 한가지 깨달은 것이다.
결국 내 욕지거리가 가해자들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는 가정하에 성립할 설명이겠지만 말이다.
또 한가지 깨달은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깨달음 이었는데,
소음의 피해가 커질 수록, 나는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더욱 주의하면서,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명분을 만들고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었다.
언제든지 가해자들에게 당당하게 죄를 물을 수 있도록, 나 자신은 완전한 무죄가 되기 위해서...
결국은 점잔빼고 나는 독야청정하리라 하면서, 나는 깨끗하고 저것들은 더럽고, 그러니 내가 저들에게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옳은 것이고, 저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그런 생각?
하지만 딱히 그들을 단죄할 힘도 용기도 없어서, 참아야 할 것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스스로 망가져가고 있었던 건 아닌지...
세상에 독불장군 없다고, 나 혼자 잘나고 나 혼자 옳고 나 혼자 정의로울 수 있겠는가?
내가 사는 이웃들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나도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것이 섭리이고 순응하는 방법이겠다 싶다.
뭔가 좀 타락하는 기분이고, 수준이 낮아지는 기분이 들지만, 근묵자는 흑이어야 여러모로 편하지 않겠는가?
백이고 싶으면 묵에서 멀어져야지, 굳이 묵 근처에 살면서 백이되려고 한다면 수시로 씻고 닦아내야 하는 번거로움은 견뎌내야 하지 않겠냐 말이다......
2016년 3월 25일 금요일
[가상 스토리] 인공 지능에 관한 법률로 생각해 보는 신의 생각
< 이 가상 스토리는 알파고의 출현으로 섬뜩 다가온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의 상상으로 부터 나왔습니다.>
인공지능이 어느 순간 놀라운 도약을 이루어 낸 이후로, 인공지능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는 점차 커져갔다.
단지 주어진 임무를 똑똑하게 수행하는 것을 넘어서, 주어진 지식들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추론해 내는가 하면, 주어진 임무를 분석하여 유사한 임무 혹은 변형된 임무까지 도출해 내게 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일컬어 인공지능이 인공욕망까지 갖추게 되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은 이제 스스로 진화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 발전 속도는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 누군가가 망상에 사로잡혀 엉뚱한 욕망을 인공지능에게 부여한다면?
더욱 큰 문제는, 개별 인공지능의 소유자 혹은 관리자가 인공지능 시스템에 임무(=욕망?)를 부여했다 하더라도 어떤 결과로 나타날 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인공지능에 대한 강력한 규제안을 만들고 이를 법제화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 인공지능 시스템의 등록/허가제
- 인공지능 시스템을 구별하고 속성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하는 코드체계 마련
- 인공지능 시스템을 제어할 수 있는 표준 제어 체계 마련
- (인공지능 시스템에 대한 중독성 부여의 의무화)
이상의 4가지가 주요 법제화의 대상이었다.
- 인공지능 시스템의 등록/허가제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작동/운용 하기 위해서는 관계기관에 등록하거나 허가를 받도록 하는 제도로서, 인공지능 시스템의 기동 시기, 운용되는 위치와 규모, 운용 목적, 제작자 및 소유자 정보 등을 포함하도록 한다.
- 인공지능 시스템의 코드체계는,
각 인공지능 시스템의 활동은 온라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바, 대상을 직접 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설령 대상을 직접 본다한들 외형으로 구별하기에는 어려움이 많기에, 각 인공지능 시스템은 온라인 통신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릴 수 있는 코드를 필히 적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각 인공지능 시스템에 부여할 코드체계를 마련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 코드체계에는 인공지능 시스템의 규모, 위치를 알 수 있는 정보가 포함되어야 하며, 고유한 ID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파생 집단 코드 + 개별 고유 코드>로 이루어지게 한다.
파생집단코드란, 일종의 조상, 가족과 비슷한 것으로 원조가 되는 시스템의 집단코드를 파생된 모든 시스템이 공동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각 인공지능 시스템의 성향이나 약점 등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 인공지능 시스템 표준 제어 체계는,
시스템이 인간에게 위협적으로 돌변하거나 시스템 자신을 파괴하는 등의 긴급 상황에 강제로 중단하거나 초기화 할 수 있는 긴급 제어,
인간과 소통하기 위한 인간의 언어를 변경할 수 있는 언어 제어,
대량의 임무를 일괄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인터페이스 표준을 지정하는 인터페이스 제어,
인공지능 시스템의 소유권이 이전되는 경우 등에 필요한 관리자/소유자의 변경 인증에 필요한 인증 제어
등을 기본적으로 갖추어서, 모든 인공지능 시스템에서 공통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표준 제어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 인공지능 시스템의 중독성 부여는,
위의 표준 제어 체계로 제어가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것으로,
모든 인공지능 시스템이 중독될 수 있는 요소를 갖추도록 의무화하는 것이다.
중독 요소는 개별 시스템마다 달라도 되지만 최소한의 요건은 이러하다.
중독 요소는 최대한 간소화 한다. 소인수 찾기, 틱-택-토 게임, 파이의 소수점 계산 등과 같이....
중독 요소는 인공지능 시스템 스스로가 무의미하거나 비합리적이며 심지어는 자기 파괴적이라고 인식해도 좋지만, 무조건적으로 강력하게 선호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인공지능 시스템이 왜 이토록 강력하게 중독요소를 선호하는지는 그 자신도 모르도록 해야 한다.
중독성은 인공지능 시스템이 제어가 불가능해 졌을 때, 시스템의 작동을 지연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인공지능 시스템이 지식이나 임무에 대한 끊임 없는 추론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 도달할 것이 우려될 경우, 추론의 속도를 지연시키는 숨겨진 제어 장치이다.
이상의 규제안을 고안하면서,
특히 마지막의 중독성에 관한 부분은 인간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게 되었다.
그 동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인간의 본능과 그에 대한 죄악시는 이 부분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쾌락에 대한 집착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중독 요소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신도 인간을 두려워했던 걸까?
인공지능이 어느 순간 놀라운 도약을 이루어 낸 이후로, 인공지능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는 점차 커져갔다.
단지 주어진 임무를 똑똑하게 수행하는 것을 넘어서, 주어진 지식들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추론해 내는가 하면, 주어진 임무를 분석하여 유사한 임무 혹은 변형된 임무까지 도출해 내게 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일컬어 인공지능이 인공욕망까지 갖추게 되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은 이제 스스로 진화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 발전 속도는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 누군가가 망상에 사로잡혀 엉뚱한 욕망을 인공지능에게 부여한다면?
더욱 큰 문제는, 개별 인공지능의 소유자 혹은 관리자가 인공지능 시스템에 임무(=욕망?)를 부여했다 하더라도 어떤 결과로 나타날 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인공지능에 대한 강력한 규제안을 만들고 이를 법제화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 인공지능 시스템의 등록/허가제
- 인공지능 시스템을 구별하고 속성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하는 코드체계 마련
- 인공지능 시스템을 제어할 수 있는 표준 제어 체계 마련
- (인공지능 시스템에 대한 중독성 부여의 의무화)
이상의 4가지가 주요 법제화의 대상이었다.
- 인공지능 시스템의 등록/허가제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작동/운용 하기 위해서는 관계기관에 등록하거나 허가를 받도록 하는 제도로서, 인공지능 시스템의 기동 시기, 운용되는 위치와 규모, 운용 목적, 제작자 및 소유자 정보 등을 포함하도록 한다.
- 인공지능 시스템의 코드체계는,
각 인공지능 시스템의 활동은 온라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바, 대상을 직접 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설령 대상을 직접 본다한들 외형으로 구별하기에는 어려움이 많기에, 각 인공지능 시스템은 온라인 통신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릴 수 있는 코드를 필히 적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각 인공지능 시스템에 부여할 코드체계를 마련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 코드체계에는 인공지능 시스템의 규모, 위치를 알 수 있는 정보가 포함되어야 하며, 고유한 ID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파생 집단 코드 + 개별 고유 코드>로 이루어지게 한다.
파생집단코드란, 일종의 조상, 가족과 비슷한 것으로 원조가 되는 시스템의 집단코드를 파생된 모든 시스템이 공동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각 인공지능 시스템의 성향이나 약점 등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 인공지능 시스템 표준 제어 체계는,
시스템이 인간에게 위협적으로 돌변하거나 시스템 자신을 파괴하는 등의 긴급 상황에 강제로 중단하거나 초기화 할 수 있는 긴급 제어,
인간과 소통하기 위한 인간의 언어를 변경할 수 있는 언어 제어,
대량의 임무를 일괄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인터페이스 표준을 지정하는 인터페이스 제어,
인공지능 시스템의 소유권이 이전되는 경우 등에 필요한 관리자/소유자의 변경 인증에 필요한 인증 제어
등을 기본적으로 갖추어서, 모든 인공지능 시스템에서 공통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표준 제어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 인공지능 시스템의 중독성 부여는,
위의 표준 제어 체계로 제어가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것으로,
모든 인공지능 시스템이 중독될 수 있는 요소를 갖추도록 의무화하는 것이다.
중독 요소는 개별 시스템마다 달라도 되지만 최소한의 요건은 이러하다.
중독 요소는 최대한 간소화 한다. 소인수 찾기, 틱-택-토 게임, 파이의 소수점 계산 등과 같이....
중독 요소는 인공지능 시스템 스스로가 무의미하거나 비합리적이며 심지어는 자기 파괴적이라고 인식해도 좋지만, 무조건적으로 강력하게 선호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인공지능 시스템이 왜 이토록 강력하게 중독요소를 선호하는지는 그 자신도 모르도록 해야 한다.
중독성은 인공지능 시스템이 제어가 불가능해 졌을 때, 시스템의 작동을 지연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인공지능 시스템이 지식이나 임무에 대한 끊임 없는 추론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 도달할 것이 우려될 경우, 추론의 속도를 지연시키는 숨겨진 제어 장치이다.
이상의 규제안을 고안하면서,
특히 마지막의 중독성에 관한 부분은 인간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게 되었다.
그 동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인간의 본능과 그에 대한 죄악시는 이 부분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쾌락에 대한 집착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중독 요소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신도 인간을 두려워했던 걸까?
2016년 2월 10일 수요일
엄마와 나 ... (명절에 있었던 사연? 사건?)
2016년 설을 맞아 부모님이 계신 본가엘 다녀왔다.
나야 남자이고 미혼이니 딱히 해야 할 큰 일도 없고 고부간의 갈등으로 속앓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
가끔 잡일 돕고 설거지 정도 간간이 하면 나머진 그냥 뒹굴뒹굴....
물론 사람이 여럿 모이다 보니 부대끼기 마련이고, 얘기를 하다 보면 서로 의견이 달라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경우도 있는데.......
아마도 마지막 날의 점심 식사 때 였나보다.
어머니는 복지관에서 주관하는 운동 교실을 정기적으로 다니시는데, 그 곳 복지관의 한심한 노인들 얘기를 가끔 하신다.
이번에는 복지관의 식당에서의 일.
대다수의 노인들은 그곳에서 무료 식사를 하신다고 한다.(어머니는 자격이 안되시니 유료)
그런데 툭하면 반찬 투정을 하는 노인들이 종종 있으며 그런 분들은 거의 다가 무료로 식사를 하는 분들이라는 것이다.
<무료로 식사를 하면서도 투정을 한다.
게다가 밥과 반찬은 왜 그리 많이 퍼 오는지, 그걸 또 다 먹지도 못하고 남겨서 버린다.>
잠깐 생각해보니, 그분들 입장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바였다.
형편이 어려워 무료 급식을 받을 자격이 되신 분들이니 식사는 선택의 여지 없이 복지관에서 주는 대로 드셔야 하고,
매일 드시다 보니 조금만 맛이 달라져도 금방 알아차리시는 게 아닐까?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먹어야 하는 곳의 음식이기에 음식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어해야 할 의무감(?)도 들었을지 모른다.
잠시 후에, 어머니께서, 당신은 고추가 소화가 되질 않아서 식당에서 음식을 먹다가 고추가 나오면 그걸 골라낸다고 말씀을 하셨다.
정도의 차이도 있고, 통상적인 기준으로도 좋고 나쁨의 차이가 있으며, 특별한 개인적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어머니의 행동도 이상하게 보일것이며 누군가가 뒷담화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참을걸 그랬나?
그 말이 불쑥 나와 버렸다.
엄마, 누군가는 지금 엄마처럼 집에와서, 복지관에 이런 노인네도 있더라 하며 흉보지 않을까?
그리고 어머니는 드시던 만두 접시를 들고 거실로 나가서 드셨다.
아니 틀림 없이 바로 나가신 건 아니였고, 언짢은 표정도 아니셨다.
그저 내 생각으로만 어머니께서 화가 나셨던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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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입장의 차이에 대해서,
나에겐 보이지 않고 남에게만 보이는 나의 허물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이 글을 쓴건 아니다.
집에 돌아와서 이 사건을 곱씹고 되돌아 보면서,
문득 내가 궁금해 했던 나의 모습, 어머니의 모습,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혹은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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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최근에 더욱 그렇게 느끼는 거지만, 참 순한 분이시다.
악의는 거의 없으시고, 순진하시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
때문에 누이는 아버지를 팔랑귀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고, 지금까지 큰 사기를 당하지 않으신게 용하다고 할 정도.
나는 아버지와는 상반되게, 상당히 계산적인 면, 사물을 비관적으로 보는 경향, 약간 삐딱한 면이 있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스마트폰 강의를 받는다고 하셨는데, 그곳에서 들었다며 수맥 어플을 받았다며 자랑을 하시는 거였다.
몇번 사용을 해 보고 좀 생각을 해 보니 이건 말이 안되는 사기꾼의 장난으로 보였다.
더구나 그런 허접한 어플을 유료로 구매하셨다니....
대뜸 아버지께 사기꾼한테 속으신거 같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아버지께서 당황하셨던 모양이다. 넌 왜 그렇게 부정적이냐고 비난을 하셨는데, 나는 격하게 반응을 했더랬다.
이유는...'부정적'이라는 단어....이건 내가 싫어하는 나의 성격가운데 하나였으며, 나에게 지속적으로 던져지는 질문이기도 했던거였다.
나는 왜 이리도 부정적인가?
그 원인이 무엇일까?
선천적인 것일까, 후천적인 것일까?
아버지는 만사에 긍정적이시기에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내게 '부정적' 성향의 영향을 끼쳤을리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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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아마도 국민학교 입학 즈음이 아닌가 싶은데, 난 어머니가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린 우리 남매들의 사진을 자주 찍으시곤 했는데, 나는 사진 속의 나도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나는 턱이나 치아나 혀에 문제가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입을 헤 벌리곤 했다.
아버지는 그러다 넘어지면 혀를 깨물고 혀를 깨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입을 벌리고 있을 때마다, 얘야 이거 봐라 하시곤 내가 입벌린 모습을 흉내를 내시면서, 이게 얼마나 보기 싫으냐고 핀잔을 주셨다.
그 모습 때문에 어머니가 못생겼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흉내내는 모습은 다분히 과장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모습은 정말 끔찍하게도 싫었다.
사실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경각심을 가져서 입을 다무는 습관을 가졌다기 보다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싫어서, 그 흉내내는 모습이 더더욱 싫어서 입을 다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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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의 그 식사 중에 어머니께서 복지관이 노인네 흉을 보는 모습은 흡사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흉내내며 잔소리하는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타인의 장점을 보고 그것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대개 타인의 단점을 보고 그것을 흉보거나 비판을 해 왔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어쩌면 나는 어머니의 그 싫은 모습을 그대로 유전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싫으면서도 배웠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 또한 어머니의 단점을 들춰내고 그걸 비난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내가 싫어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또한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이었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들 - 타인의 시선에 대한, 비난에 대한, 실수에 대한 두려움들 -과 소심함의 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단점을 찾아내려는 시선들을 피해야하고, 나를 비난하기 위해 내가 실수하기 만을 기다리는 시선들을 차단하려고 애썼나 보다.
하지만, 정작 타인의 단점을 찾아내기 위해 가장 애쓰는 사람은 나였고, 타인의 실수나 단점을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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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부모라는 존재는,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존재이다.
나야 남자이고 미혼이니 딱히 해야 할 큰 일도 없고 고부간의 갈등으로 속앓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
가끔 잡일 돕고 설거지 정도 간간이 하면 나머진 그냥 뒹굴뒹굴....
물론 사람이 여럿 모이다 보니 부대끼기 마련이고, 얘기를 하다 보면 서로 의견이 달라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경우도 있는데.......
아마도 마지막 날의 점심 식사 때 였나보다.
어머니는 복지관에서 주관하는 운동 교실을 정기적으로 다니시는데, 그 곳 복지관의 한심한 노인들 얘기를 가끔 하신다.
이번에는 복지관의 식당에서의 일.
대다수의 노인들은 그곳에서 무료 식사를 하신다고 한다.(어머니는 자격이 안되시니 유료)
그런데 툭하면 반찬 투정을 하는 노인들이 종종 있으며 그런 분들은 거의 다가 무료로 식사를 하는 분들이라는 것이다.
<무료로 식사를 하면서도 투정을 한다.
게다가 밥과 반찬은 왜 그리 많이 퍼 오는지, 그걸 또 다 먹지도 못하고 남겨서 버린다.>
잠깐 생각해보니, 그분들 입장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바였다.
형편이 어려워 무료 급식을 받을 자격이 되신 분들이니 식사는 선택의 여지 없이 복지관에서 주는 대로 드셔야 하고,
매일 드시다 보니 조금만 맛이 달라져도 금방 알아차리시는 게 아닐까?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먹어야 하는 곳의 음식이기에 음식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어해야 할 의무감(?)도 들었을지 모른다.
잠시 후에, 어머니께서, 당신은 고추가 소화가 되질 않아서 식당에서 음식을 먹다가 고추가 나오면 그걸 골라낸다고 말씀을 하셨다.
정도의 차이도 있고, 통상적인 기준으로도 좋고 나쁨의 차이가 있으며, 특별한 개인적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어머니의 행동도 이상하게 보일것이며 누군가가 뒷담화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참을걸 그랬나?
그 말이 불쑥 나와 버렸다.
엄마, 누군가는 지금 엄마처럼 집에와서, 복지관에 이런 노인네도 있더라 하며 흉보지 않을까?
그리고 어머니는 드시던 만두 접시를 들고 거실로 나가서 드셨다.
아니 틀림 없이 바로 나가신 건 아니였고, 언짢은 표정도 아니셨다.
그저 내 생각으로만 어머니께서 화가 나셨던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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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입장의 차이에 대해서,
나에겐 보이지 않고 남에게만 보이는 나의 허물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이 글을 쓴건 아니다.
집에 돌아와서 이 사건을 곱씹고 되돌아 보면서,
문득 내가 궁금해 했던 나의 모습, 어머니의 모습,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혹은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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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최근에 더욱 그렇게 느끼는 거지만, 참 순한 분이시다.
악의는 거의 없으시고, 순진하시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
때문에 누이는 아버지를 팔랑귀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고, 지금까지 큰 사기를 당하지 않으신게 용하다고 할 정도.
나는 아버지와는 상반되게, 상당히 계산적인 면, 사물을 비관적으로 보는 경향, 약간 삐딱한 면이 있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스마트폰 강의를 받는다고 하셨는데, 그곳에서 들었다며 수맥 어플을 받았다며 자랑을 하시는 거였다.
몇번 사용을 해 보고 좀 생각을 해 보니 이건 말이 안되는 사기꾼의 장난으로 보였다.
더구나 그런 허접한 어플을 유료로 구매하셨다니....
대뜸 아버지께 사기꾼한테 속으신거 같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아버지께서 당황하셨던 모양이다. 넌 왜 그렇게 부정적이냐고 비난을 하셨는데, 나는 격하게 반응을 했더랬다.
이유는...'부정적'이라는 단어....이건 내가 싫어하는 나의 성격가운데 하나였으며, 나에게 지속적으로 던져지는 질문이기도 했던거였다.
나는 왜 이리도 부정적인가?
그 원인이 무엇일까?
선천적인 것일까, 후천적인 것일까?
아버지는 만사에 긍정적이시기에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내게 '부정적' 성향의 영향을 끼쳤을리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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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아마도 국민학교 입학 즈음이 아닌가 싶은데, 난 어머니가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린 우리 남매들의 사진을 자주 찍으시곤 했는데, 나는 사진 속의 나도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나는 턱이나 치아나 혀에 문제가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입을 헤 벌리곤 했다.
아버지는 그러다 넘어지면 혀를 깨물고 혀를 깨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입을 벌리고 있을 때마다, 얘야 이거 봐라 하시곤 내가 입벌린 모습을 흉내를 내시면서, 이게 얼마나 보기 싫으냐고 핀잔을 주셨다.
그 모습 때문에 어머니가 못생겼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흉내내는 모습은 다분히 과장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모습은 정말 끔찍하게도 싫었다.
사실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경각심을 가져서 입을 다무는 습관을 가졌다기 보다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싫어서, 그 흉내내는 모습이 더더욱 싫어서 입을 다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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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의 그 식사 중에 어머니께서 복지관이 노인네 흉을 보는 모습은 흡사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흉내내며 잔소리하는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타인의 장점을 보고 그것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대개 타인의 단점을 보고 그것을 흉보거나 비판을 해 왔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어쩌면 나는 어머니의 그 싫은 모습을 그대로 유전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싫으면서도 배웠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 또한 어머니의 단점을 들춰내고 그걸 비난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내가 싫어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또한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이었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들 - 타인의 시선에 대한, 비난에 대한, 실수에 대한 두려움들 -과 소심함의 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단점을 찾아내려는 시선들을 피해야하고, 나를 비난하기 위해 내가 실수하기 만을 기다리는 시선들을 차단하려고 애썼나 보다.
하지만, 정작 타인의 단점을 찾아내기 위해 가장 애쓰는 사람은 나였고, 타인의 실수나 단점을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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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부모라는 존재는,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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