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진화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폭이 확대되어,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든가, 동물에 대한 학대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 반대되는 현상으로, 유럽으로 유입되는 대규모의 난민에 저항하는 자국민들의 태도이다. 어찌보면 이기주의이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처사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것에 대한 반발일 뿐, 큰 흐름은 타인과의 공감이라고 보는게 맞을 수 있겠다.
오히려 여기에 대한 더 큰 모순은, 낙태에 대한 반대 의견이다.
낙태를 찬성하는 쪽의 의견을 들어보면, 낙태를 고려한다는 것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여력이나 형편이 되지 않음을 의미하고, 이는 부모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의 부족 혹은 태아의 선천적 장애가 확실시 되는 경우에 태아나 부모 모두의 행복을 위해 최선의 선택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낙태를 반대하는 의견을 들어보면, 인간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적이며, 정상인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장애인들은 불행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인간의 진화가 타인에 대한, 타 생명에 대한 공감으로 나타났다면, 그것은 타인도 어느 정도 나와 유사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가능하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자신이 장애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불행해 질 지를 상상하고 낙태를 찬성하자는 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 났어도 아마 그들에겐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이 있을 테니까 그걸 함부로 뺏을 권리는 없다는 생각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생각은 모든 타인에 대한, 타 생명에체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나 나름의 행동양식을 모두 이해해 줘야 하는 것이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다양한 생각과 행동들을 가진 타자들과의 공감은 일정 부분 버려야 함을 뜻하지 않을까?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확일화에서 벗어나 다양화로 가고 있으며, 집단에서 개인으로 가고 있으며, 규칙과 제어에서 벗어나 자유로 가고 있음이 뚜렷해 보인다.
하지만 소위 인류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나'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이기주의를 벗어나 '우리'라는 생각의 이타주의로 가야 하며, 다름이 중시되는 차별성에서 벗어나 모두가 하나라는 단일성으로 가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것은 아서 클라크의 소설 <유년기의 끝>에서 보여준 모습으로의 진화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원래 하나였던 우주는 빅뱅이후 엄청난 속도로 공간의 팽창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런 우주 팽창의 모습은 인간 개개인들이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되어 가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한편으로 인간들의 이러한 다양한 분화가, 국가와 사회라는 집단의 필요성을 파과하기에 이르고 있어 보인다.
이에 반발하여 인간들 서로가 타인의 이해의 폭을 넓혀 가자는 움직임도 있는 것이며, 서로 교감하고 이해하고 뱌려하는 것이 인간의 발전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우주의 팽창처럼 다양하게 분화될 것이며, 인간들이 교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일시적인 반발에 그치고 말 것이다.
어쩌면 빅뱅으로 인한 우주의 팽창이 멈추고 다시 하나의 점으로 수축이 진행된다면, 인간도 점점 하나의 모습으로 동일화가 진행될 것이다. 변이는 줄어들고, 사람들은 점점 비슷해져 가고, 인구는 줄어들고, 생태계의 생물 다양성도 줄어들며, 아무런 규칙이나 법률이 없어도 될 것이며, 그리고 이기주의는 물론 이타주의도 없고, 너와 나라는 구분이 모호해지고, 결국 우리는 하나의 점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겠는가.
인간이 대단한 존재인양 떠들고 있지만, 결국은 이런 우주적인 움직임에 따라 함께 변해가는 것이 뿐이며, 그걸 진화라고 부르던, 퇴보라고 부르던, 그 마저도 단지 인간끼리의 말에 불과한, 아무 의미 없는 자뻑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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