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공동주택에서 거주한 지도 20년이 되어가니 참 오래도 살았다.
아마도 10여년간은 집과 회사만 오가는 시계 부랄의 생활의 연속이었으니, 이웃이 누구였는지도 몰랐고 층간 소음이 뭔지도 몰랐다.
당시엔 토요일도 근무를 했기도 하려니와 야근도 태반이었고 격주로 주말엔 본가에 찾아 다니기도 했다.
정말 집에 있는 시간이 참 적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만 박혀서 산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층간 소음을 인식하기 시작한 건 2014년 가을을 전후한 때라고 생각한다.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무언가 심하게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 등이 가끔씩 들려왔는데, 그게 1시간 ~ 2시간 정도씩 지속이 되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가 궁금했다. 찾아가서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문제는 그게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것 이었다.
이 공동주택의 구조로 보아 윗집이거나 옆집일 가능성이 제일 높아 보였지만, 원래의 소리가 무척이나 크다면 윗집의 옆집이거나 아랫집일 수도 있는거였다.
약 1년을 참았다.
그리고 이제는 분노에 짜증, 불면증과 간헐적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까지 생겼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사를 나간 집도 있었고 들어 온 집도 있고, 안보이던 사람이 함께 사는 경우도 생겼다.
복수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겨우 겨우 생각을 바꿔 보았다.
모두가 나쁜 의도를 가지진 않았을거라는....단지 모르고 하는 일일 뿐이라고
층간 소음에 대해 직접 대화를 해 본 것은 윗집 뿐이었는데 반응이 그닥 좋지 않았었다.
그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보았는데, 먼저 층간 소음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할 때에는 상대방이 가해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자세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보다 중요한 건, 상대방의 행위를 짐작해서 지적해서는 안되고, 나의 상태가 매우 괴롭고 힘들다는 표현으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행위를 짐작해서 지적하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에 매우 큰 반격에 직면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실일 경우에도 상대방을 매우 방어적으로 만든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먼저 내가 어떤 소리나 진동 때문에 매우 힘들고 괴롭다는 식의 표현을 하게 되면, 상대방은 먼저 동정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대화로 문제를 풀기가 쉬워진다.
층간 소음은 전형적인 비대칭 상태의 불공정 게임이다.
가해자는 내가 하는 어떤 행동이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 지 알지 못하고 있으며, 피해자는 상대방이 얼마나 조심해야만 내가 참을 만 한지의 정도를 알지도 못하고 알려 줄 수도 없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1) 자신의 피해 상황을 짐작이 가는 가해자에게 알려주고
2) 잠정적인 가해자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가해자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3)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하여 실험을 통해 문제가 되는 소리를 확인한 후,
4) 어떤 정도이면 피해가 되지 않을 지, 그 정도를 가늠한 후에
5) 적절한 해결 방법을 찾는 것(가해자의 행동 주의, 소음 방지 용품 사용, 건설사에 하자 보수 요청)
의 과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실상 정부는 이런 식의 합리적인 분쟁 조절 절차에 대해 국민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홍보만을 해도 상당히 많은 문제들이 해결 될 것이다.
현실성 없는 소음 기준을 만들어 봐야 피해자와 가해자가 더욱 원수가 되는 상황만 만들 뿐, 거의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해 우리 국민들이 미개하니까, 스스로 이런 합리적인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못하는 것이며, 문제 해결과는 점점 동 떨어지는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엔 방화 살인에까지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다.
하지만 위의 대화 방법이나, 문제 해결 절차가 일반적인 깨달음이라면, 나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준 건 최근의 일 이었다.
요즘들어 윗집에 새로운 동거인이 한 명 추가되었는데, 발소리가 엄청나게 큰 남자였다.
이건 어디서 들리는지 확인 할 필요도 없이 명백했고, 정말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진동의 문제라서 귀마개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더더군다나 이 사람은 주로 밤 늦은 시각(23:00 ~ )에 아무렇지 않게 소리를 내서 많이 놀라게 했다.
이 동거인이 추가 되면서 기존에 사시던 노부인도 소음에 둔감해 진 탓일까? 아침 이른 시간(06:00 ~ 07:00)에 베란다에서 뚝딱거리고 댕그렁 거리는 것이 훨씬 심해졌다. 빈도나 강도 모든 면에서...
참다 못하고 인터폰으로 항의를 하긴 해서 조금 누그러들긴 했지만, 대화가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었기에 이 정도로 만족하고 참고 있는 중인다.
인터폰의 대화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기에 어지간하면 인터폰을 다시 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침 잠을 방해 받기도 하고 한밤중에 깜짝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좀 심하다 싶은 소음이 있었던 평일의 초 저녁 시간, 내 안에 분노가 쌓이지 않게 쌍욕을 내질렀다.
실상은 소음을 낸 상대방을 향한 분노의 표출이었지만, 그게 상대방에게 들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희안하게도, 그 날 이후로 소음이 정말 많이 줄었다.
정말 이만하면 살만 하겠다 싶을 정도였다.
이건 대체 무슨 조화일까? 정말 내 욕지거리가 들렸던 걸일까?
하긴 내가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TV 소리, 물소리, 문 여닫는 소리 등등은 들어 보았어도, 사람 말소리는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다.
주말에 아주 작정하고 신나게 놀던 부녀간에 딸 아이의 자지러질 듯한 웃음 소리는 들은 적이 있다.
그 외에는 복도에 나와서 얘기하는 사람이거나 마을 놀이터에서 노는 계집아이들의 꺅꺅 비명소리 일 뿐, 집안에서 말하는 사람들의 말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 말소리는 어떻게? 그냥 우연의 일치?
이 일을 겪고 나서 두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이웃들이 소란스러울 수록, 나는 나 또한 가해자가 되지 않으려고 더 주의하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게 이웃 사람들을 더욱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하나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소음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소음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소음을 듣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음을 듣고 괴롭기에, 자신이 소음을 만들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주의한다.
이 결과로 가해자는 점점 더 심한 가해자가 된고 피해자는 점점 더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
하지만, 다시 바꾸어 말하면 피해자가 조심하고 소음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기에 가해자의 소음이 커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윗층과 아랫층의 두 집만 생각하면 아래층에서 윗층에 지속적인 소음을 주는 것은 윗층에서 애랫층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좀 더 크게 생각해보면 결국은 돌고 돌게 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서, 피해자가 주의할수록 다 소음을 잘 들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가해자가 거리낌 없이 소음을 만들수록 타인의 소음은 인식하기 어려워서 상황은 심각해지기 마련이다.
빈익빈 부익부가 아니라 가학가 피학피?
이게 한가지 깨달은 것이다.
결국 내 욕지거리가 가해자들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는 가정하에 성립할 설명이겠지만 말이다.
또 한가지 깨달은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깨달음 이었는데,
소음의 피해가 커질 수록, 나는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더욱 주의하면서,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명분을 만들고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었다.
언제든지 가해자들에게 당당하게 죄를 물을 수 있도록, 나 자신은 완전한 무죄가 되기 위해서...
결국은 점잔빼고 나는 독야청정하리라 하면서, 나는 깨끗하고 저것들은 더럽고, 그러니 내가 저들에게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옳은 것이고, 저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그런 생각?
하지만 딱히 그들을 단죄할 힘도 용기도 없어서, 참아야 할 것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스스로 망가져가고 있었던 건 아닌지...
세상에 독불장군 없다고, 나 혼자 잘나고 나 혼자 옳고 나 혼자 정의로울 수 있겠는가?
내가 사는 이웃들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나도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것이 섭리이고 순응하는 방법이겠다 싶다.
뭔가 좀 타락하는 기분이고, 수준이 낮아지는 기분이 들지만, 근묵자는 흑이어야 여러모로 편하지 않겠는가?
백이고 싶으면 묵에서 멀어져야지, 굳이 묵 근처에 살면서 백이되려고 한다면 수시로 씻고 닦아내야 하는 번거로움은 견뎌내야 하지 않겠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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