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7일 월요일

용서와 속죄

중국에 살던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뉴스를 들었다.

작년까지도 꽤나 시끄러웠던 위안부 할머니들과 일본과의 공방들...

진정한 사과와 합당한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어물쩡 유감 표명으로 국면을 넘어가려는 일본 정부 사이에서, 정작 우리의 정부는 가면을 바꾸어 써가면서 편리하게 입장을 바꾸곤 하였다.

이 끝나지 않는 싸움에는, 정치적으로 이용 가치가 높은 이슈를 계속 가져가고 싶은 우리 정부의 더러운 욕심이 있지 않나 생각될 뿐이다.

아마도 작년까지 시끄러었던 위안부 이슈는, 무언가 국민의 시선을 돌리고 싶어하는 정부의 작전(?)이었던 듯.
올해는 갑자기 모든 일이 다 해결된 듯이 너무나도 조용할 따름인데, 정말 본질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설마...
언제든지 다시 써먹을 수 있도록 잠시 휴식기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리라.


진실 여부를 알 수는 없으니, 이런 정치 논리는 이 정도로 마무리를 하고,
제목인 용서와 속죄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자.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를 용서하고자 한다.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래서 피해 당사자들이 고령으로 한분 두분 세상을 떠나시고 있으니,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본이 제대로된 사과를 하면 그 사과를 제대로 받아 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제대로 된 속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별로 급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은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과연 저 분들이 살아 생전에 만족할만한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여기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은 "만족할만한"이 대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며, 그게 과연 객관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어째서 피해자가 용서를 구걸하는 모양새인가 말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용서와 속죄에 대한 질문과 답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딸을 잃은 엄마와 가해자인 살인범.
살인범은 검거되어 교도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지만, 죽은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
슬픔과 절망, 분노를 종교에 기대어 참아 보지만 쉽지 않다.
고민 끝에 살인범을 용서하기 마음 먹고 교도소에 찾아갔지만,
살인범은 그녀에게 사죄를 하지는 않고, 종교에 귀의해 신으로부터 속죄를 받았다고 말한다.
허망하게 돌아오던 그녀는 혼절해 쓰러지고,
깨어나서 울부짖는다.
그가 내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내가 용서해 주지도 않았는데, 신이 무슨 권리로 그에게 용서를 주었느냐고...

과연 엄마는 살인범을 용서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녀의 용서에는 조건이 붙었다. 그가 충분히 사죄를 한다면...이라는.
나의 용서가 내가 아닌 상대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엄마의 용서는 불안한 것이었고, 설령 이번에는 용서했다 하더라도, 다음에는 용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반면에 살인범의 속죄는 너무도 완벽했다.
피해자가 용서해 준다면...이라는 조건도 없다.
자신이 스스로 모든 죄를 깨닫고 어떤 벌이라도 마땅히 받겠다고, 한줌의 거짓도 없이 진심으로 뉘우쳤다면 그 순간 그는 완전히 속죄를 한 것이리라.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용서 또한 이러해야 할 것이다.
가해자가 어떤 행동을 보이던, 어떤 마음을 가지던, 그것에 상관 없이 내가 받은 피해와 고통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리하여 복수심, 분노, 증오 어떤 마음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비로소 용서가 완벽해 지는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시간이 촉박한 것은 사실이다.
그 분들이 진정한 용서를 하기 위한 시간이 촉박하다는 뜻이다.
진정한 용서는 일본 정부나 우리나라 정부의 조치, 행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끔찍했던 일들에 대해 어떤 증오나 분노도 갖지 않도록 저들의 모든 행위를 잊어버리는 것, 아니 잊지는 않더라도 담담하게 스쳐지나갈 수 있는 평정을 찾는 것이다.

모쪼록 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분노에 휩싸여서가 아니라 평안하게 가실 수 있기를 바라기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순간적이지만, 증오심이나 분노심은 아주 오랬동안 우리 자신을 더 많이 괴롭힌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