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0일 금요일

친구들의 두려움 혹은 열등감

고교때 친구들 가운데 K는 겁이 없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자기 주장이 강하고 - 너무 강해서 고집불통이긴 하지만 - 자신의 주장을 굽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딱히 그의 주장이 옳다기 보다는, 그가 너무 자기 확신에 차 있기에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고교때 우리 학교의 특화 종목은 핸드볼이었는데, 간혹 반대항 시합을 할 때면 K는 자주 골키퍼를 하곤 했다.

핸드볼은 그냥 체육 시간에 잠깐 배우는 정도의 종목이니 대표 선수가 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골키퍼라면 여러모로 더 부담스러운 포지션이 아니겠는가?

이런 이력들을 가만 생각해보니, K라는 친구가 참으로 겁이 없는 친구구나 생각이 들었다.


사회인이 되어서도 비교적 자주 모임을 갖는 편인데, K의 행동이 조금 묘하다는 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모임의 장소를 슬며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바꾸곤 하는데, 그게 특별히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자신이 원해서 바꾸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부인한다는 것이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아직도 이해 불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알게 된 열등감의 한 모습.

언젠가 모임의 장소가 중간에 변경되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K가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나서 네가 변경했냐고 묻자 발뺌...)
K가 변경된 모임의 장소와 시간을 알려 왔다.

문득 낮익은 장소라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방송에 소개 된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방송에 나온 집이로구나 하며 답 문자를 보냈더니 날라온 답장.

"난 전부터 알고 있었어."

헐....보통은 '전에 가봤었는데 뭐가 좋더라'거나 '방송 보고 가보고 싶었다'거나....가 통상인데....저 답 문자를 보고 있자니 K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이 번쩍 하고 느껴졌다.



고교때 친구들이 모두 공부에 열심이었던 부류인지라, 딱히 튀거나 하지는 않지만,

J는 여러 모로 활동적이고 부지런하고 외향적인 친구였다.

그래도 딱히 겁이 없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었고, 그저 우리 부류처럼 몇가지 유아적 상처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어떤 두려움이나 열등감도 있겠지 생각했다.
(사실 내밀한 자신의 열등감은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알아도 입밖에 꺼내기가 매우 어려우니 친한 친구 사이라도 털어 놓기는 쉽지 않지 않은가?)

그런데 최근에 이 두려움이나 열등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니, 의외로 J라는 친구가 두려움이나 열등감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멀쩡한 직업을 가지고서도 벌써 노후에 대한 걱정, 자식들에 대한 걱정, 건강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데, 오히려 이 친구는 그런 걱정이 거의 없어 보였다.

이게 무슨 두려움이나 열등감과 관계가 있겠냐 싶기도 할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그에 따른 적극적인 대비는 당연한 것이고 그걸 안하는 게 문제가 아니냐 싶을텐데....
자세히 얘기를 하다보니 두려움을 갖는 친구들은 통상적인 수준의 불안에서 몇 단계씩을 더 나아가고 있었다.
즉, 나이가 들어서 직장을 은퇴하고, 건강이 약해져서 질병에 걸리고, 자식들이 장성해서 독립을 시키고하는 당연한 미래의 상황에, 불안이 더 많은 불안을 낳듯이, 더 다양한 상황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J라는 친구는 어찌 보면 방만할 정도로 현재만을 보고 있는 듯 했고, 굴지의 대기업 간부를 하고 있으면서도,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와 권력에 대한 집착도 없다고 했다.

은퇴를 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니 보통의 사람으로는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용기를 지닌 듯 보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현실적인 부분에서는 오히려 두려워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가정엔 부인과 딸들 뿐이라서 그런지, 그 식구들의 최대 관심사는 외모여서 그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유별나게도 외모에 대한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이게 어느 정도의 수위를 넘어가자,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친구의 몸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거나, 외모에 대한 일장 연설을 늘어 놓은 일을 자주 보게 되었다.


또 다른 한가지는 무어라 딱 말하기 곤란한 면인데, 보통의 사람이라면 흔하게 보이는 것으로 넘길 수 있는데, 이 친구의 성격으로는 좀 의외였던 것이었다.

직장에서 부하 직원의 행동에 대해 좀 많이 답답했던 일이 있었는지, 그 사건에 대해 우리들에게 설명을 하고는 그 직원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누구나 사회 생활 혹은 집단 생활을 하다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에 대해서 상대방의 면전에서 혹은 뒷담화로 그 불만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얘기를 듣고 보니 친구 J는 그 동안 유달리 타인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는 경우가 적었기에 의외였고, 어쩌면 내가 잘 모르던 친구의 두려움 한가지를 알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 J의 경우에는 두려움의 뿌리가 깊지는 않고 성인이 된 후에 심어진 두려움, 혹은 단기적으로 관심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나타난 부분일 가능성이 있으니 심각하진 않겠지만, 의외의 분야에서 친구의 두려움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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