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전에 포스팅한 <채식주의자>는 무언가 자꾸 씹히는 느낌이다.
제대로 소화되지 않고 입안에 남아서 씹히는...
나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게 나의 모순을 건드려서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곱씹어서 그 모순을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식주의자>는 그렇게 불편한게 아니었다.
<채식주의자>의 불편함은, 어째서 유력한 상의 수상작품이 내게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을 주는가 하는 불편함이었다.
과연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문득 떠 오른 하나의 가정은, 보편성의 부족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소설은 구체적인 주인공과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 또는 일상을 다루고 있다.
이런 구체적이고 나와는 별개로 인식되는 주인공은, 그래서 독자의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게 만들수 있으며, 충분히 독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주인공이 독자와 일체시되는 상황에서는 독자 스스로가 매우 방어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이 주인공은 개별적인 인물에서 보편적인 인물로의 투사가 되어야 한다.
이 과정이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독자 스스로 투사시키게 되며, 작가는 보편적으로 투사될 수 있는 상징이나 개연성을 제공해 주곤 한다.
이러한 보편적 인물로의 투사가 중요한 이유는,
작품에서 다룬 사건이나 교훈 또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작품에서 다룬 이야기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의 이야기, 내 주변과도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 우연히라도 맞닥뜨리게 될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라면?
그건 그냥 신기한 이야기로 끝날 뿐이다.
육식이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지만, 거식증으로까지 이어진 영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육식과 폭력에 저항하여 스스로 나무가 되어 흙과 물로만 살 수 있을거라 믿는 영혜의 생각에 어떤 보편성이 있는 것일까?
인혜 또한 영혜와 같이 사회 관습적인 폭력을 인식했다고 해도, 영혜의 극단적인 생각이 과연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생각이 달리고 달려서 너무 지나치게 달려가버린 그 생각을 내가 따라 잡으려 해야 한단 말인가?
아마도 이렇게 말하겠지.
가기 싫으면 안가도 된다고.
왜 싫은데 궂이 따라가려 하는냐고.
그건.....상을 줬기 때문이야.
유력한 상을 줬다는 건, 그게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거니까.
그리고 그게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는 거니까.
그래서 본 거라고....
어쩌면 내가 오해했는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작품은 보편성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가 보다.
가끔은 오만한 작가와 작품을 만나게 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긴 설명이 필요한 그런 작품을
하지만 친절하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이해한 사람만이 느끼고 누리라는 듯이...
그럴거라면 왜 남들에게 보여주고 읽히려고 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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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생각해 보니,
작가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순에 대해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끔찍한 폭력을 수반하는 육식과 육식을 하지 않고는 살아나가기 곤란한 본질적인 모순 말이다.
물론 채식만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게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지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채식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채식주의자인 사람은 거의 보질 못했기에...
어찌할 수 없는 이 딜레마는 어쩌면 본성과 이성의 충돌이 아닐까?
결국 이성을 따르는 영혜는 인간이라는 생명의 본성을 포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이 폭력적일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
영혜의 이런 절망적인 몸부림을 보는 인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들을 나열하면서 생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지만, 인혜야말로 본성과 이성이 충돌하는 모순을 가장 치열하게 온몸으로 부딪히는 보통 인간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여기에도 몇가지 문제는 남게 된다.
육식으로 대변되는 폭력을 사회 전반적인 구조와 관습으로까지 확대시킨 것은, 그 폭력이 본성적이라는 사실을 희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혹은, 이 문제는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미화되었을 뿐이라는 간단한 결론으로 해결되지 않겠나 하는 점이다.
우리 쿨하게 인정하자. 인간도 동물의 하나다. 무언가 먹어야 하고 번식하고 생존해야 하는 거다. 스스로가 진화된 존재라는 착각에 빠져서 다른 생물과의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단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뿐이지, 인간은 여전히 동물이다 라고...
덧붙여 마지막에 언급했던 오만한 작품에 대해서도 조금은 반성해 본다.
누군가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내적 투쟁을 거쳐서 어렵게 내린 결론을, 단지 책 한권 읽는 노력으로, 혹은 전시회장을 찾는 것으로, 그렇게 쉽게 얻으려 하는 것 또한 날강도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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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분석적이긴 하지만,
이 소설이 주었던 몇가지 의문점을 마저 해소한 듯 하다.
첫번째 의문은,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
영혜가 병원 앞 정원 벤치에 가슴을 드러내고 새를 손에 쥔 채 입에 피를 뭍히고 앉아 있다.
새나 가슴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과연 치열하게 육식을 거부하던 영혜가 왜 새를 날로 뜯어 먹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풀지 못했다.
나름대로 분석해 보건데, 이 부분은 영혜의 상태가 매우 불안함을 보여주어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에서 보여주는 영혜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함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영혜가 육식의 본능과 채식의 이성 사에에서 마지막 갈등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성으로써의 채식에 실패하고 본능의 육식으로 돌아간 듯이 보이는 이 장면은 <본능>과 <이성>의 갈등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인데, 앞으로 이어질 <몽고반점>은 지나칠 정도로 감각정인 상황과 행동들로 <본능>에만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며, <나무 불꽃>은 모든 본능을 철저히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로 생명마저 극복하려는 <이성>의 극한을 보여준다.
작가는 인간이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과연 그 둘이 충돌했을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과연 정답은 있을 것인가?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지 않겠는가?
이런 딜레마를 다룸으로써 인간의 모순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두번째 의문은, 2번째 중편인 <몽고반점>의 생뚱맞음이었다.
채식주의자가 다루고 있는 인간의 모순과는 동떨어진 지극히 감각적이고 탐미적인 이야기가 왜 여기에 들어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의문점은 첫번째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 해소된다.
가장 본능적인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본능적인 모습 또한 충분히 타당하며 의미있을 보여주는 것.
양팔 저울의 한쪽을 채우기 위함이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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