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개인적인 사례일 뿐이니 일반화하지 말 것!>
개인적으론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지병이 있는데, 두통과 복통이 그것이었다.
그 가운데 두통은 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나를 괴롭히던 통증이었는데, 머리가 아프면 어떤 방법으로도 완화가 되질 않고 그저 끙끙 잃아야만 했다.
그나마 운에 좋게 걸린 우연이겠지만, 타이레놀이라는 진통제가 효과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이후 한동안은 '나에게 잘 맞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두통이 있을 때 마다 복용했었다.
하지만 효과가 없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면서 이것도 아니구나 싶어 포기를 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난 이것이 외가쪽의 가족력인 고혈압에 의한 증상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지속적인 고혈압약의 복용이 싫어서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고 싶었다.
아마도 스트레스의 완화, 커피의 음용으로 카페인에 의한 혈관의 확장이 조금은 도움이 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뜬금 없이 가끔은 두통이 찾아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는데, 명백한 인과관계가 보이는 것이 바로 "낮잠"이었다.
특히나 휴일에 주일동안의 누적된 피로를 풀기 위해 낮잠을 열심히 자고나면 어김없이 깨질 듯한 두통이 나를 괴롭히는데, 종종 나는 스스로를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까지 한탄했다.
그런데 최근에 이게 꼭 낮잠이 아니어도 비슷한 두통이 반복되는 걸 경험했는데, 그건 항히스타민제의 복용이었다.
알러지로 인해 여기저기 가려움증이 나타나곤해서 병원에서 처방받은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하곤 하는데, 이 항히스타민제의 주된 부작용이 "졸림"이다.
그러니까 이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졸려서 때 아닌 잠을 자고 일어나면 꽤 자주 두통이 이어졌다.
난 최근까지 이 두통 또한 약의 부작용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약의 부작용으로 평소와는 조금 다른 시간대에 잠을 자고 일어나니 또 두통이 밀려왔다.
관자놀이부터 귀뒤쪽 목으로까지 이어지는 통증.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내렸다.
전날 카페인의 섭취가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어서. 커피를 한모금 마시자마자 두통이 약간은 완화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조금은 안심을 했다.
잠시 후, 주문을 했던 김치가 배달되었다.
얼른 김치통에 옮겨 담고 냉장고에 들여놔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바닥에 신문지 깔고, 김치통 몇개 꺼내서 열어두고, 배달된 김치를 꺼내어 옮겨 담는데.... 갑자기 두통이 심해졌다.
다행히 그 느낌이 생생했는데, 김치를 옮기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고개는 아래쪽의 김치통을 향하자, 머리쪽으로 피가 쏠리면서 지끈지끈...
그제서야 뭔가 이해되는 내 고혈압의 원인과 두통의 원인, 그리고 그것이 낮잠(때아닌 잠)과 가지는 인과관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추측컨데 내 피는 꽤 찐득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내 고혈압의 원인으로 보인다.
아마도 심장에서 멀리 떨어진, 그래서 유속이 많이 느려지는 머리쪽에서는 그런 피의 성분과 느린 속도가 혈관에 침천물을 만들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혈관이 좁아져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찐득한 피를 펌프질해서 순환 시키려면 압력이 꽤 높아야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 머리쪽의 혈관에 불리한 요인 중 하나는 중력이다.
가뜩이나 찐득한 피인데다, 중력을 거슬러 심장에서 머리쪽으로 피를 올려야 하니, 심장이 꽤 무리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학창시절에 어른들이 곧잘 인용하던 4당5락이니하는 말을 매우 싫어했다.
난 잠을 자는 것을 매우 좋아했고, 충분히 잠을 자지 않으면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 공부도 잘 안되고 시험도 성적이 안나온다고 생각했다.
물론 학창시절에 이런 얘기를 하면 그냥 공부하기 싫은 아이의 핑계로만 들었던 어른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잠을 잔다는 건, 심장의 부담을 덜면서 두뇌에 피를 공급할 수 있는 아주 효율적인 메커니즘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나의 문제는 너무 오랜 시간 잠을 자면 머리쪽에 몰린 피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두통을 유발한다는 것(아마도....)
따라서 잠을 자서 머리쪽으로 일정한 정도의 피를 보내고, 다시 깨어나서 활동하면서 서서히 피를 아래쪽으로 보내고, 머리의 피가 부족해지면 다시 잠을 자고...
마치 모래시계를 세워 두었다가, 모래가 다 내려가면 다시 거꾸로 뒤집어 세우듯이, 잠자기와 깨어나기를 일정한 시간으로 반복해야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문제가 되었던 낮잠 혹은 때아닌 잠은 바로 이런 주기를 어기기 때문에 머리쪽에 지나치게 많은 피가 몰려서 두통을 유발했던 듯 하다.
그러면, 과연 방법은 없는 것일까?
사실 잠은, 두뇌로 피를 보내는 것 외에도 너무도 많은 효과가 있다.
신체의 내외부적인 손상이나 염증등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이 잠자는 동안에 일어나는 것은 많은 예의 하나다.
그러니 단지 두뇌에 이미 피가 많이 가 있어도 잠을 자려면...두통 없이 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베개를 높게 베거나 상체를 완전히 눞히지 않은 상태로의 잠자기가 그 방법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높은 베개나 상체를 조금이라도 세우는 자세는 어깨나 목의 통증, 뒤척임의 방해로 이어지긴 할테지만 말이다.
뭐 궁극적으로는 피의 끈적함을 조금이나마 묽게 해 주는 것이 좋겠지만...
P.S. 이 일- 약의 부작용으로 졸림, 때 아닌 잠, 두통, 커피, 김치통 옮겨 담기 -이 바로 오늘 일어난 일이며, 이 글을 쓰는 현재 시각은 기상한지 10시간이 지난 시간이며, 단지 일어나 있었다는 것 만으로 두통이 거의 사라졌다. (물론 커피도 마셨지만...)
P.S. 이 논리대로라면, 졸리진 않지만 머리가 멍해지거나 두뇌회전이 잘 안된다 싶을 때는 거꾸로 매달리거나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2018년 12월 29일 토요일
2018년 12월 28일 금요일
오해 - 잘못된 생각의 틀
아주 오래전 부터 가지고 있는, 아주 대략적이지만 큰 생각의 틀이 있는데...
그게 꽤 잘못된 틀이었다는 깨달음(?)을 마주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아주 큰 생각의 틀이라서, 틀이 잘못됨으로써 내 지식이나 경험들이 거기에 맞춰 왜곡되었을지 모르니 아주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지만, 정작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거의 없으니 현실적으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1. 과거는 위대하고 찬란하지만, 현재는 볼품없고 하찮다는 오해
이런 생각의 틀이 만들어진 이유는,
예수님이나 부처님, 공자, 소크라테스와 같이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모두가 아주 오래 전의 인물들인데, 그 이후에는 거기에 버금가는 인물들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어쩐지 인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퇴화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비슷한 예로, 고대의 마야 문명, 잉카 문명, 이집트 문명의 유적들은 종종 몇대 불가사의라 불려질 정도로 거대하고, 위대하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재현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식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정작 그 문명의 발원지에 사는 그 후예들은 너무나 초라하고 심지어는 비참하기까지 하다.
과연 이들이 그 위대한 문명을 만든 이들의 후예가 맞단 말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
이제 우리의 역사로 돌아와보면, 장수왕 광개토대왕의 국가 영토는 얼마나 광대했던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얼마나 위대했던가, 하지만 그런 위인들 이후에 한국사에는 그만큼 빛날 인물이 나왔던가?
위의 몇가지 예시들만으로도 인류는 퇴화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물론, 확실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고민해본 결과 위의 예들에 대한 반론은 가능했다.
문제는 지금까지 이런 것에 반론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면서, 위대한 과거 위대한 선조 위대한 전설 vs. 초라한 현실 미개한 현세대 보잘것 없는 우리들...이런 생각의 틀로 인해 생긴 부작용들이다.
어쩌면 요즘에 문제가 되고 있는, 매우 자조적인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이런 생각들의 단적인 부작용 사례가 아닐까 싶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자신감의 결여, 위대한 과거에 비해 내가 하는 것들이 아주 초라해 보이는 왜곡된 대비, 그래서 어지간한 결과들은 모두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더 나아가서는 뭘 해도 별것 아닌데 왜 하느냐는 허무주의 팽배....
지배계급은 인간들의 맹목적인 복종을 위해서 허튼 말을 퍼트리고 작은 일을 부풀렸지만, 결국에 피지배층은 열렬한 복종보다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것이 아닌지...
정치 지도자와 민족주의자들은 우리의 조상과 민족의 위대함을 자랑스럽게 여기길 바라며 조상들의 업적을 과대포장했지만 그로인해 그 후손들을 오히려 더 초라하고 작게 만들어버린 건 아닌지...
2. 인간성, 예의, 상식이 당연하다는 오해
아직도 사람 사이의 폭력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막말이나 갑질을 했다는 뉴스에 많은 이들이 분개하고 있다.
동물에 대한 학대나 유기 동물도 늘어나고 있으며, 따돌림과 집단 폭력 학대도 있다.
이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나, 대부분의 정상인(?)들은 이를 매우 개탄해마지 않고 하루 빨리 모든 사람들이 정상인(?)의 규범에 맞추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정상인들은, 적절한 예의범절을 갖추어야 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하지 말아야 할 말 혹은 행동에 대한 상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예의, 규범과 상식이 인간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단지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서 필요한 적정한 수준의 행동양식을 정해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예의범절이나 행동규범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그러지 못하다는 반증일 뿐, 누구나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간혹,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서로에게 인사치레를 하고 칭찬을 늘어놓는 것이 위선적으로 보이거나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차피 그렇게 만난 사람들은 그 자리가 마지막일 가능성이 매우 크기에 궂이 상대방에게 팩트 폭력을 가해서는 누구에게도 득될 것도 없는 것이다.
호호호, 너무 잘 하시네요, 와우 대단하시네요, 어머머 너무 잘 생겼다 세상에 너무 부럽네요.... 입에 발린 말들이 무성해서 그게 위선적이라고 구역질이 난다고 할 지언정, 서로 비난하고 쌍욕하고 얼굴 붉히면서 주먹다짐 하는 것보다는 훨씬 훨씬 아름답고 즐거운 상황 아니겠는가.
선천적으로 아부 못하고 입에 발린 말을 하면 입에 가시가 돋을 거 같다면 그냥 침묵하고 미소지으면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인(?)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게 꽤 잘못된 틀이었다는 깨달음(?)을 마주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아주 큰 생각의 틀이라서, 틀이 잘못됨으로써 내 지식이나 경험들이 거기에 맞춰 왜곡되었을지 모르니 아주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지만, 정작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거의 없으니 현실적으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1. 과거는 위대하고 찬란하지만, 현재는 볼품없고 하찮다는 오해
이런 생각의 틀이 만들어진 이유는,
예수님이나 부처님, 공자, 소크라테스와 같이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모두가 아주 오래 전의 인물들인데, 그 이후에는 거기에 버금가는 인물들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어쩐지 인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퇴화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비슷한 예로, 고대의 마야 문명, 잉카 문명, 이집트 문명의 유적들은 종종 몇대 불가사의라 불려질 정도로 거대하고, 위대하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재현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식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정작 그 문명의 발원지에 사는 그 후예들은 너무나 초라하고 심지어는 비참하기까지 하다.
과연 이들이 그 위대한 문명을 만든 이들의 후예가 맞단 말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
이제 우리의 역사로 돌아와보면, 장수왕 광개토대왕의 국가 영토는 얼마나 광대했던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얼마나 위대했던가, 하지만 그런 위인들 이후에 한국사에는 그만큼 빛날 인물이 나왔던가?
위의 몇가지 예시들만으로도 인류는 퇴화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물론, 확실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고민해본 결과 위의 예들에 대한 반론은 가능했다.
문제는 지금까지 이런 것에 반론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면서, 위대한 과거 위대한 선조 위대한 전설 vs. 초라한 현실 미개한 현세대 보잘것 없는 우리들...이런 생각의 틀로 인해 생긴 부작용들이다.
어쩌면 요즘에 문제가 되고 있는, 매우 자조적인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이런 생각들의 단적인 부작용 사례가 아닐까 싶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자신감의 결여, 위대한 과거에 비해 내가 하는 것들이 아주 초라해 보이는 왜곡된 대비, 그래서 어지간한 결과들은 모두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더 나아가서는 뭘 해도 별것 아닌데 왜 하느냐는 허무주의 팽배....
지배계급은 인간들의 맹목적인 복종을 위해서 허튼 말을 퍼트리고 작은 일을 부풀렸지만, 결국에 피지배층은 열렬한 복종보다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것이 아닌지...
정치 지도자와 민족주의자들은 우리의 조상과 민족의 위대함을 자랑스럽게 여기길 바라며 조상들의 업적을 과대포장했지만 그로인해 그 후손들을 오히려 더 초라하고 작게 만들어버린 건 아닌지...
2. 인간성, 예의, 상식이 당연하다는 오해
아직도 사람 사이의 폭력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막말이나 갑질을 했다는 뉴스에 많은 이들이 분개하고 있다.
동물에 대한 학대나 유기 동물도 늘어나고 있으며, 따돌림과 집단 폭력 학대도 있다.
이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나, 대부분의 정상인(?)들은 이를 매우 개탄해마지 않고 하루 빨리 모든 사람들이 정상인(?)의 규범에 맞추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정상인들은, 적절한 예의범절을 갖추어야 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하지 말아야 할 말 혹은 행동에 대한 상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예의, 규범과 상식이 인간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단지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서 필요한 적정한 수준의 행동양식을 정해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예의범절이나 행동규범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그러지 못하다는 반증일 뿐, 누구나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간혹,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서로에게 인사치레를 하고 칭찬을 늘어놓는 것이 위선적으로 보이거나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차피 그렇게 만난 사람들은 그 자리가 마지막일 가능성이 매우 크기에 궂이 상대방에게 팩트 폭력을 가해서는 누구에게도 득될 것도 없는 것이다.
호호호, 너무 잘 하시네요, 와우 대단하시네요, 어머머 너무 잘 생겼다 세상에 너무 부럽네요.... 입에 발린 말들이 무성해서 그게 위선적이라고 구역질이 난다고 할 지언정, 서로 비난하고 쌍욕하고 얼굴 붉히면서 주먹다짐 하는 것보다는 훨씬 훨씬 아름답고 즐거운 상황 아니겠는가.
선천적으로 아부 못하고 입에 발린 말을 하면 입에 가시가 돋을 거 같다면 그냥 침묵하고 미소지으면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인(?)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2018년 12월 3일 월요일
어느덧 12월...
아, 벌써 올해의 마지막 12월이란 말인가?
라는 식으로 얘기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올해도 별 탈 없이 한해를 마무리 할 수 있겠네.
사실 지난 몇년간은 비슷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그럴거라 생각하는데,
내가 하는 일은 그저 걱정하고, 혹시나 해서 조금이라도 준비하려고 하고, 아니면 계획이라도 세워보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귀찮아서, 단지 걱정하고, 걱정하고, 걱정하다가 끝난다.
언젠가의 경험으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의 곤란함과 스트레스는 정말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다.
그런데, 그 방법을 알고 있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일은 쉽게 해결이 되며, 나에게는 아무런 스트레스도, 정신적인 데미지도 없게 된다.
대체, 그건 뭘 의미하는걸까?
우리가 종종 겪는 황당함, 허둥지둥, 극도의 스트레스, 주저 앉아 울고 싶은 그런 상황들이, 어찌 보면 그럴만한 일도 못 되는 것 아닐까.
대부분 현실에서 부딪히게 되는 일들은 대부분 누군가는 이미 겪은 일이며,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아주 쉽사리 건널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걱정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고 한다.
그 말이 조금은 예언처럼 들리기도 하고, 누군가 나의 걱정을 들여다 보고 있는 듯이 느끼게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무수히 많다.
그 모든 일들에 내가 관심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일은 내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며, 그 일이 벌어지기만 하면 내가 놓칠 리 없는 조건에 놓인 것이다.
문제는 단지 시간일 뿐이었던 것이고, 결국에 그 일이 일어나면 우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결국은 일어나고야 말았어."
하지만, 내가 관심을 두지 않는 순간부터, 그 일은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내 인생에서 떨어져 나간다.
만약 무언가가 나를 걱정하게 만들고, 그게 나의 발목에 매달린 족쇄와 같다면,...
그래서 그 족쇄를 풀어버리고 싶다면, 관심을 두지 않으면 된다.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면, 앞서 얘기한 것처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미리 방법을 전수받고, 가능한 예방책을 세워둔다면,
설령 족쇄를 풀지는 못할지라고, 훨씬 더 가벼워지지는 않겠는가?
라는 식으로 얘기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올해도 별 탈 없이 한해를 마무리 할 수 있겠네.
사실 지난 몇년간은 비슷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그럴거라 생각하는데,
내가 하는 일은 그저 걱정하고, 혹시나 해서 조금이라도 준비하려고 하고, 아니면 계획이라도 세워보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귀찮아서, 단지 걱정하고, 걱정하고, 걱정하다가 끝난다.
언젠가의 경험으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의 곤란함과 스트레스는 정말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다.
그런데, 그 방법을 알고 있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일은 쉽게 해결이 되며, 나에게는 아무런 스트레스도, 정신적인 데미지도 없게 된다.
대체, 그건 뭘 의미하는걸까?
우리가 종종 겪는 황당함, 허둥지둥, 극도의 스트레스, 주저 앉아 울고 싶은 그런 상황들이, 어찌 보면 그럴만한 일도 못 되는 것 아닐까.
대부분 현실에서 부딪히게 되는 일들은 대부분 누군가는 이미 겪은 일이며,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아주 쉽사리 건널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걱정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고 한다.
그 말이 조금은 예언처럼 들리기도 하고, 누군가 나의 걱정을 들여다 보고 있는 듯이 느끼게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무수히 많다.
그 모든 일들에 내가 관심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일은 내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며, 그 일이 벌어지기만 하면 내가 놓칠 리 없는 조건에 놓인 것이다.
문제는 단지 시간일 뿐이었던 것이고, 결국에 그 일이 일어나면 우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결국은 일어나고야 말았어."
하지만, 내가 관심을 두지 않는 순간부터, 그 일은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내 인생에서 떨어져 나간다.
만약 무언가가 나를 걱정하게 만들고, 그게 나의 발목에 매달린 족쇄와 같다면,...
그래서 그 족쇄를 풀어버리고 싶다면, 관심을 두지 않으면 된다.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면, 앞서 얘기한 것처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미리 방법을 전수받고, 가능한 예방책을 세워둔다면,
설령 족쇄를 풀지는 못할지라고, 훨씬 더 가벼워지지는 않겠는가?
2018년 11월 28일 수요일
나는 사람이 싫다.
사람들과 지내는 것이 쉽지 않다.
함께 지내면 언제나 신경쓰이고 조심스럽다.
나만 그렇지 않고 상대방도 그러려니 싶지만, 그러면 왜 함께 지내야 하지?
쌍방이 불편하니 따로 사는게 좋지 않은가?
왜 그럴까?
문제가 없다면, 질문도 없었겠지만, 혼자 살기에 걸리는 문제는 아주 많다.
꼭 한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사이뿐이 아니라, 같은 직장, 같은 동네라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명절이라 만나고, 제사라 만나고, 생일이라 만나는 사람들.
누구의 아들 딸이, 누구의 아버지 어머니가, 누구의 남편 아내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백일이나 돐이고 환갑이고 아프고 돌아가시고...
다 싫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상호부조의 미덕(?)을 위해 거래하듯 만나는 것도 싫고,
알아도 서먹서먹해서 싫고,
너무 잘 아는데, 아는 사람이 그런다고 오해하고 미워해서 싫다.
세상에 좋은 사람도 많다.
하지만, 부처님 예수님도 싫어하는 게 있으며, 노여워할 일이 있는 법이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란 법도 없으니, 하물며 일반 사람들에게랴.
나도 싫다.
그들이 거리낌 없이 하는 행동이나 생각들이 싫다.
그걸 몰라서 저리들 하는지, 아는데도 하는지, 아니까 일부러 하는지,
아무튼 싫다.
아주 힘들게 용기를 내서
무언가 해 보려 하면, 사람들이 항상 걸린다.
그래서 궁금했다.
난 왜 그리도 사람들을 싫어할까?
아마도... 난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런 듯 싶다.
함께 지내면 언제나 신경쓰이고 조심스럽다.
나만 그렇지 않고 상대방도 그러려니 싶지만, 그러면 왜 함께 지내야 하지?
쌍방이 불편하니 따로 사는게 좋지 않은가?
왜 그럴까?
문제가 없다면, 질문도 없었겠지만, 혼자 살기에 걸리는 문제는 아주 많다.
꼭 한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사이뿐이 아니라, 같은 직장, 같은 동네라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명절이라 만나고, 제사라 만나고, 생일이라 만나는 사람들.
누구의 아들 딸이, 누구의 아버지 어머니가, 누구의 남편 아내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백일이나 돐이고 환갑이고 아프고 돌아가시고...
다 싫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상호부조의 미덕(?)을 위해 거래하듯 만나는 것도 싫고,
알아도 서먹서먹해서 싫고,
너무 잘 아는데, 아는 사람이 그런다고 오해하고 미워해서 싫다.
세상에 좋은 사람도 많다.
하지만, 부처님 예수님도 싫어하는 게 있으며, 노여워할 일이 있는 법이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란 법도 없으니, 하물며 일반 사람들에게랴.
나도 싫다.
그들이 거리낌 없이 하는 행동이나 생각들이 싫다.
그걸 몰라서 저리들 하는지, 아는데도 하는지, 아니까 일부러 하는지,
아무튼 싫다.
아주 힘들게 용기를 내서
무언가 해 보려 하면, 사람들이 항상 걸린다.
그래서 궁금했다.
난 왜 그리도 사람들을 싫어할까?
아마도... 난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런 듯 싶다.
감정에 대처하는 남녀의 차이
딱히 논리적으로 풀 수는 없지만,
남자와 여자가 감정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 듯 하다.
대체적으로 남자들은, 일어나는 감정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그 다음의 행동으로 바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으며, 여자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마치 음미하듯(?) 찬찬히 살펴보느라 마땅히 해야한다고 여겨지는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거나 늦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여자들이 감수성이 풍부하고 자신의 감정을 잘 묘사하거나 설명하고, 그 감정이 좋으면 만끽하거나 취하지만, 좋지 않을 때에는 감정을 치유하는 방법에 더 익숙한 것이 모두 앞서와 같은 이유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경향의 단점은 객관적인 주변의 사물이나 타인에 대한 마땅한 행동이 미흡하거나 늦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남성은, 자신의 감정에 서툴다. 자신의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혹은 감정에 휩싸여 일어나는 거의 본능적인 반응(화냄, 소리침, 폭력 등)을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이런 성향의 장점은, 어떤 상황에서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능력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점은 거의 선천적인 것이 아닐까 싶게, 남녀간의 차이가 뚜렷해 보인다.
(물론 여자같은 남자, 남자같은 여자도 있으니 개인별 차이는 크지만, 남자 전체의 평균과 여자 전체의 평균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비교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이런 차이점도 호르몬에 의한 영향은 아닐까 싶다.
남자와 여자가 감정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 듯 하다.
대체적으로 남자들은, 일어나는 감정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그 다음의 행동으로 바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으며, 여자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마치 음미하듯(?) 찬찬히 살펴보느라 마땅히 해야한다고 여겨지는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거나 늦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여자들이 감수성이 풍부하고 자신의 감정을 잘 묘사하거나 설명하고, 그 감정이 좋으면 만끽하거나 취하지만, 좋지 않을 때에는 감정을 치유하는 방법에 더 익숙한 것이 모두 앞서와 같은 이유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경향의 단점은 객관적인 주변의 사물이나 타인에 대한 마땅한 행동이 미흡하거나 늦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남성은, 자신의 감정에 서툴다. 자신의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혹은 감정에 휩싸여 일어나는 거의 본능적인 반응(화냄, 소리침, 폭력 등)을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이런 성향의 장점은, 어떤 상황에서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능력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점은 거의 선천적인 것이 아닐까 싶게, 남녀간의 차이가 뚜렷해 보인다.
(물론 여자같은 남자, 남자같은 여자도 있으니 개인별 차이는 크지만, 남자 전체의 평균과 여자 전체의 평균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비교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이런 차이점도 호르몬에 의한 영향은 아닐까 싶다.
2018년 10월 18일 목요일
도박?
몇년 전에 있었던 일인데, 친구들과 간만에 모임을 가졌다.
얘기가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주식의 파생상품, 선물과 옵션에 대한 얘기로까지 이어졌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나름대로 공부도 해 봤고 경험도 있어 썰을 풀어 놓았는데,
그 도중에 친구 하나가 이런 질문을 했다.
"그거 도박이냐?"
?
?
당시엔 위험하지만 도박은 아니라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당시에도 이후에도 좀 혼란스러웠다.
과연 도박이란 뭘까?
도박의 정의는 뭘까?
잠깐 도박에 대한 국어사전적 정의를 찾아 보니,
도박(賭博) 요행수를 바라고 불가능한 일이나 위험한 일에 손을 댐. (=노름)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표준국어대사전)
賭는 내기 도, 조개 패 변에 사람 자, 재물과 사람, 혹은 사람이 가진 재물에 대한 무엇.
博은 넓을 박, 넓다 깊다 크다 많다 등의 의미.
따지고 들자면 모호하기 짝이 없기는 하다.
불가능이나 위험하다는 기준이 모호하니까.
옵션, 선물, 주식, 외환, 상품, 부동산 등등 모든 것이 거래되고 있으며, 나름대로의 위험 정도는 비교가 가능하지만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과연 어느 정도가 위험한 것일까?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처럼 과연 주식은 위험할까?
물론 너무도 다양한 조합으로 투자할 수 있으니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인 인식에 부합하도록 이렇게 생각해 보자.
A라는 회사의 주식을 사고 파는 일이 위험할까, A라는 회사와 거의 비슷한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이 위험할까?
애초에 투자할 수 있는 금액의 규모도 다르겠지만, 이미 상장된 회사는 불안한 요소들을 모두 이겨냈고 어려움을 극복해낸, 그래서 꽤 안정권에 들어선 기업체이다.
만약 이 기업체와 같은 초기 자본금이 있다 하더라도 사업체를 신규로 설립해서 안정된 기업으로 가꿔나가기란 매우 위험한 일이며 확률도 희박하다.
따지고 보면 인생도 또한 도박이라고 할 만큼 위험하지 않을까?
어린 아이가 공부를 잘 할지 예체능에 재능이 있을지를 발굴해서 집중적으로 투자해서 육성하는 것도 자칫 위험한 일이다.
그게 과연 재능에 부합하는지, 재능은 있어도 꾸준히 이끌어 나갈 정도로 좋아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직업의 선택은 또 어떠하며,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은 또 어떠한가.
살 집을 어디에 마련할지 자식을 얼마나 낳을지 다시 그 자식들을 어떻게 기를지...
곰곰이 생객해 봐도, 이런 인생의 곳곳에 드리워진 불확실성과 위험의 정도가 주식이나 파생상품의 위험성보다 월등히 적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도박의 정의, 위험한 정도의 판단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도박은 단지 "단어"에 불과했던 것이다.
중요한 점은, 무언가를 도박이라고 혹은 도박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인 것이다.
그걸 도박이라도 혹은 도박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정의한 후에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하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애초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자신이 목표하는 바 혹은 바라는 바를 명확히 하고, 이에 부합하는지 아닌지 여부를 판단할 기준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리라.
그러면 그것이 자신의 기준에서는 도박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들은 복잡해지고 말들이 무성하다보니,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말"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는 복잡한 세상의 일들을 조금은 단순화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본능적인 움직임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본질을 더 흐려버리곤 해서 올바른 판단을 그르치는 일이 많아졌다.
세상을 사는 일은 단지 입을 놀려 말을 하는 것도, 손가락을 놀려 글을 쓰는 것 이상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말할 필요도 없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얘기가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주식의 파생상품, 선물과 옵션에 대한 얘기로까지 이어졌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나름대로 공부도 해 봤고 경험도 있어 썰을 풀어 놓았는데,
그 도중에 친구 하나가 이런 질문을 했다.
"그거 도박이냐?"
?
?
당시엔 위험하지만 도박은 아니라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당시에도 이후에도 좀 혼란스러웠다.
과연 도박이란 뭘까?
도박의 정의는 뭘까?
잠깐 도박에 대한 국어사전적 정의를 찾아 보니,
도박(賭博) 요행수를 바라고 불가능한 일이나 위험한 일에 손을 댐. (=노름)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표준국어대사전)
賭는 내기 도, 조개 패 변에 사람 자, 재물과 사람, 혹은 사람이 가진 재물에 대한 무엇.
博은 넓을 박, 넓다 깊다 크다 많다 등의 의미.
따지고 들자면 모호하기 짝이 없기는 하다.
불가능이나 위험하다는 기준이 모호하니까.
옵션, 선물, 주식, 외환, 상품, 부동산 등등 모든 것이 거래되고 있으며, 나름대로의 위험 정도는 비교가 가능하지만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과연 어느 정도가 위험한 것일까?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처럼 과연 주식은 위험할까?
물론 너무도 다양한 조합으로 투자할 수 있으니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인 인식에 부합하도록 이렇게 생각해 보자.
A라는 회사의 주식을 사고 파는 일이 위험할까, A라는 회사와 거의 비슷한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이 위험할까?
애초에 투자할 수 있는 금액의 규모도 다르겠지만, 이미 상장된 회사는 불안한 요소들을 모두 이겨냈고 어려움을 극복해낸, 그래서 꽤 안정권에 들어선 기업체이다.
만약 이 기업체와 같은 초기 자본금이 있다 하더라도 사업체를 신규로 설립해서 안정된 기업으로 가꿔나가기란 매우 위험한 일이며 확률도 희박하다.
따지고 보면 인생도 또한 도박이라고 할 만큼 위험하지 않을까?
어린 아이가 공부를 잘 할지 예체능에 재능이 있을지를 발굴해서 집중적으로 투자해서 육성하는 것도 자칫 위험한 일이다.
그게 과연 재능에 부합하는지, 재능은 있어도 꾸준히 이끌어 나갈 정도로 좋아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직업의 선택은 또 어떠하며,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은 또 어떠한가.
살 집을 어디에 마련할지 자식을 얼마나 낳을지 다시 그 자식들을 어떻게 기를지...
곰곰이 생객해 봐도, 이런 인생의 곳곳에 드리워진 불확실성과 위험의 정도가 주식이나 파생상품의 위험성보다 월등히 적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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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도박의 정의, 위험한 정도의 판단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도박은 단지 "단어"에 불과했던 것이다.
중요한 점은, 무언가를 도박이라고 혹은 도박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인 것이다.
그걸 도박이라도 혹은 도박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정의한 후에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하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애초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자신이 목표하는 바 혹은 바라는 바를 명확히 하고, 이에 부합하는지 아닌지 여부를 판단할 기준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리라.
그러면 그것이 자신의 기준에서는 도박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들은 복잡해지고 말들이 무성하다보니,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말"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는 복잡한 세상의 일들을 조금은 단순화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본능적인 움직임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본질을 더 흐려버리곤 해서 올바른 판단을 그르치는 일이 많아졌다.
세상을 사는 일은 단지 입을 놀려 말을 하는 것도, 손가락을 놀려 글을 쓰는 것 이상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말할 필요도 없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2018년 10월 2일 화요일
늙을 수록 두렵다.
혼란한 하루다.
1.
오전에 형수님이 제사를 예약했노라 알려 주셨다.
집안의 제사와 관련된 계좌를 통해 제사 비용의 절반을 이체해 드렸다.
그런데 계좌 이체를 하기 직전에 "등록되지 않은 단말기를 이용하여 이체를 시도했던... 보안카드..." 이런 섬찟한 안내 문구가 떴다.
일단은 이체를 한 후에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확인 후에 알려 주겠다며 일단 통화 종료.
1시간이 지나서 전화가 왔다.
여러 대화가 오갔지만, 정확한 원인 파악은 불가능.
약간 짜증이 났다. 공연히 사람을 혼란하게 만들 안내를 하고도, 그런 안내를 하게 된 경위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조심해야겠다며 통화 종료.
2.
추석 전에 주식 시장에 변화가 감지되었다.
한번 크게 떨어뜨리고 일정한 구간을 오르락 내리락 하기를 약 3개월.
드디어 그 구간을 벗어나는 모습이었다.
추석을 지난 후에는 그걸 확인해 주는 모습도 보여주었으니 과감히 진입.
그 주의 후반부터 조정이 보였지만, 아직까지는 긍정적이라 생각했던 시장이 크게 무너졌다.
그것도 그저 일시적인 장중의 모습이 아니라, 장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눌러버리는 압도적인 힘.
대체 지난 주 초반까지의 강한 힘은 대체 어디로 간걸까?
아니 그 상승의 힘이 단지 눈속임이었단 말인가?
아쉽지만 손절...
병가지상사인 일이지만, 이럴 때의 절망감은 대체 뭘까?
3.
누이로부터 톡이 왔다.
조카의 생일이라 축하금 먼저 보냈단다.
문자로라도 축하해 주란다.
한동안 톡에 답장도 하지 않았다.
조카라는 녀석들... 대체 뭘까?
내 생일도 기억 못하는 녀석들.... 내 생일에 축하한다고 문자라도 보냈던 게 대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심지어는 내가 보낸 생일 축하 메시지에 답장도 안하던 녀석들... 언젠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으로 봐선 삼촌의 전화번호도 몰라서, 누가 보낸건지 몰라서 반말로 답장하던 조카들...
내가 왜 이런 조카들에게 생일 축하금을 보내야 하는 걸까?
이젠 조카들도 다 컸으니 그만 보내겠다고 왜 말하지 못하는 걸까?
혹시라도 조카들에게 뭔가를 바라는 걸까?
그들이 나와 혈육이라는 증거의 끈을 돈으로 유지하고 있는 걸까?
하긴, 설, 추석 명절과 집안 큰 어른인 부모님 (녀석들에겐 조부모님)의 생신, 이런 것들에 같이 모이거나 하는 일을 제외하면 대체 뭘 공유하고 있는 걸까?
나만 불편한게 그 녀석들도 불편한거 아닐까?
내가 금전적인 여유만 있다면 이런 일로 이따위 고민은 하지 않았을거라는, 지금 이런 고민이 결국은 금전적인 쪼들림에 기인한거 아니겠냐는 스스로의 자책으로 고민을 마무리하고 송금했다.
하지만 이 고민이 계속 이어질 거라는 암울한 사실은 변함이 없다.
4.
아버지로부터 톡이 왔다.
이번엔 동영상이다. 신의 한수라는 꽤나 치우친 보수주의자의 인터넷 방송 영상이었다.
아버지는 보수주의자다.
정치적인 편향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는 것 또한 지나치게 단순화한 구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단은 크게 보아 그렇다는 뜻이다.
예전에도 아버지와 한번 크게 틀어진 일이 있었다.
당시에도 아버진 진보 성향의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메일을 우리 형제들에게 계속 보내셨다.
함부로 지우기도 그렇고, 보내 주신 글들이 내가 보기에는 많이 불편해서 많이 고민을 했다.
결국은 어느 날인가 이런 류의 메일은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메일을 드렸다.
하지만 아버진 기계 같았다.
기계적으로 받아 보신 메일 가운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메일을 기계적으로 우리 형제들에게 보내고 계셨다.
그러면서도 정작 내 메일은 읽지도 않으신 모양이었다.(이건 나중에야 알았지만...)
결국은 침묵으로 분노를 대신 표출했고, 중재자인 누이를 사이에 두고 메일 전송은 중지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카톡에 가입하자, 아버진 다시 같은 부류의 정치적인 글들을 보내기 시작하셨다. 달라진 점이라면, 가족 단톡방이 아니라, 나에게만 보내셨다는 것.
지난 번의 메일 사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정치적인 성향이 다르다는 것을 잊어버리신걸까?
꽤나 속으로 부글거렸다.
이런 아버지의 행동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내가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해야 하는 걸까?
굉장히 비겁하거나 공격적인 대응도 상상했더랬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마지막 선은 희미하지만 남아 있었나보다.
결국 오늘 받은 톡의 동영상의 인트로에 신의 한수가 나오는 것을 보고 답장을 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것 같아 매우 불편하니 그만 보내 달라고...
아버지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에게도 알려주고 싶어서 그랬다는 변명과 함께 나의 부탁을 수락했다.
그런데...내가 정말 끔찍하게 생각하는 일은...
아버지에게 이 부탁을 하는 톡을 보내는 내내 손가락이 덜덜덜 떨렸다는 것이다.
그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난 여전히 아버지의 제어를 받고 있었고, 내가 보내려는 톡은 이 제어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하는 정도의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구시대적인 유교의 사상으로는 불효에 해당하는 일이고 반란이며 패륜이라는 무의식이 작용한걸까?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유교의 노예인걸까? 아마 맞겠지...)
5.
지난 추석에 겪은 생생한 한 장면...(이미 수 많은 명절에 되풀이 되었지만)
잘 차려진 추석 상에는 전과 잡채 갈비가 올라와 있다.
어버진 양념된 갈비를 손으로 잡으시는걸 아주 꺼려하신다.
게다가 갈비에 붙어 있는 기름이나 질긴 힘줄을 싫어 하신다.
결국은 누군가가 갈빗대에서 살을 발라낸 후에, 곳곳에 붙어 있는 기름과 힘줄을 제거 하야만 한다. 그게 사실은 거의 불가능하니 각자 알아서 해야겠지만...
아버진 손을 대기 싫으시니 식당에서 보는 집게와 가위를 달라고 하시고, 그나마도 잘 못하셔서 갈비와의 씨름이 벌어지고... 옆에서 보던 어머니는 답답해 답답해를 연발하시다가 얼추 발라서 아버지께 드리고는 적당히 좀 드시라 타박한다.
그 광경은 나 또한 매우 답답하고 불편하고 불쾌하기까지 한 장면인데... 그게 몇년을 반복하고 있다.
대체 왜 반복하면서 그런 음식을 그런 식으로 내는지, 음식을 효율적으로 자신의 기호에 맞게 요령껏 섭취하지 못하는지, 옆에서 답답하다면서도 계속 붙어서 잔소리를 하는지, 왜 그런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없는지...
어쩌면 이 와중에 일어난 어머니의 답답함과 짜증에 동조해서 나도 아버지를 비난하거나 어머니의 한마디를 거들거나 했을지도 모르고, 혹은 그 가운데서 마찰을 완화하기 위해서 중재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런게 각자의 성격인거고, 그 나름의 한계선(경계선)을 지키면서 일어나고 있어서 큰 충돌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난 이게 그렇게 불편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게 아주 많이 불편하다는 걸...
아마도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다면, 나는 그런 식사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는게 맞다.
그리고... 아마도 아주 어려서부터 그렇게 복작대고 지지고 볶고 하는 식탁에 익숙하게 자랐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정도의 스트레스는 참아내도록 길러졌나보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건 내게 스트레스였고, 참을만 한 수준은 아니었지 싶다.
이제 식사 자리에서 이런 상황이 나는 매우 불편하고 싫다, 그러니 그러지 말고 평화롭게 식사를 하자고 한들 이제와 고쳐질리 만무하다.
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상황이 매우 불편하니 나는 나중에 따로 식사를 하겠다고 피하는 방법 뿐인 것 같다.
6.
늙었나보다.
이렇게 두려운게 많다.
알면 알수록 두렵다.
차라리 모르면 용감할 수 있을텐데...이제는 세상 만사의 돌아가는 행태를 대충 이해하고 있으니, 무언가를 보면 그 뒤에 있을 일들까지 떠 오르면서 두려움들이 쌓인다.
그러니 젊은 시절이 용감한거다.
무식하니 용감한거 맞다.
가끔 공원을 산책하다 애완견을 끌고 나온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내가 개를 좋아해서 많이 봐주고 소리 내거나 친한척을 해주면 금새 반가워하는 개들이 있다.
10중 8,9는 어린 개다. 나이가 많아봐야 5살 이하인...하룻 강아지인 셈이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사람이라면 다 반갑고 그런건 다 어린 강아지들 뿐이다.
그런 개들도 나이가 더 들면 사람들을 경계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거다.
반가워해도 특별히 자기에게 득 될거 없는걸 아는 거다.
늙은 나는 두려움이 많다.
1.
오전에 형수님이 제사를 예약했노라 알려 주셨다.
집안의 제사와 관련된 계좌를 통해 제사 비용의 절반을 이체해 드렸다.
그런데 계좌 이체를 하기 직전에 "등록되지 않은 단말기를 이용하여 이체를 시도했던... 보안카드..." 이런 섬찟한 안내 문구가 떴다.
일단은 이체를 한 후에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확인 후에 알려 주겠다며 일단 통화 종료.
1시간이 지나서 전화가 왔다.
여러 대화가 오갔지만, 정확한 원인 파악은 불가능.
약간 짜증이 났다. 공연히 사람을 혼란하게 만들 안내를 하고도, 그런 안내를 하게 된 경위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조심해야겠다며 통화 종료.
2.
추석 전에 주식 시장에 변화가 감지되었다.
한번 크게 떨어뜨리고 일정한 구간을 오르락 내리락 하기를 약 3개월.
드디어 그 구간을 벗어나는 모습이었다.
추석을 지난 후에는 그걸 확인해 주는 모습도 보여주었으니 과감히 진입.
그 주의 후반부터 조정이 보였지만, 아직까지는 긍정적이라 생각했던 시장이 크게 무너졌다.
그것도 그저 일시적인 장중의 모습이 아니라, 장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눌러버리는 압도적인 힘.
대체 지난 주 초반까지의 강한 힘은 대체 어디로 간걸까?
아니 그 상승의 힘이 단지 눈속임이었단 말인가?
아쉽지만 손절...
병가지상사인 일이지만, 이럴 때의 절망감은 대체 뭘까?
3.
누이로부터 톡이 왔다.
조카의 생일이라 축하금 먼저 보냈단다.
문자로라도 축하해 주란다.
한동안 톡에 답장도 하지 않았다.
조카라는 녀석들... 대체 뭘까?
내 생일도 기억 못하는 녀석들.... 내 생일에 축하한다고 문자라도 보냈던 게 대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심지어는 내가 보낸 생일 축하 메시지에 답장도 안하던 녀석들... 언젠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으로 봐선 삼촌의 전화번호도 몰라서, 누가 보낸건지 몰라서 반말로 답장하던 조카들...
내가 왜 이런 조카들에게 생일 축하금을 보내야 하는 걸까?
이젠 조카들도 다 컸으니 그만 보내겠다고 왜 말하지 못하는 걸까?
혹시라도 조카들에게 뭔가를 바라는 걸까?
그들이 나와 혈육이라는 증거의 끈을 돈으로 유지하고 있는 걸까?
하긴, 설, 추석 명절과 집안 큰 어른인 부모님 (녀석들에겐 조부모님)의 생신, 이런 것들에 같이 모이거나 하는 일을 제외하면 대체 뭘 공유하고 있는 걸까?
나만 불편한게 그 녀석들도 불편한거 아닐까?
내가 금전적인 여유만 있다면 이런 일로 이따위 고민은 하지 않았을거라는, 지금 이런 고민이 결국은 금전적인 쪼들림에 기인한거 아니겠냐는 스스로의 자책으로 고민을 마무리하고 송금했다.
하지만 이 고민이 계속 이어질 거라는 암울한 사실은 변함이 없다.
4.
아버지로부터 톡이 왔다.
이번엔 동영상이다. 신의 한수라는 꽤나 치우친 보수주의자의 인터넷 방송 영상이었다.
아버지는 보수주의자다.
정치적인 편향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는 것 또한 지나치게 단순화한 구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단은 크게 보아 그렇다는 뜻이다.
예전에도 아버지와 한번 크게 틀어진 일이 있었다.
당시에도 아버진 진보 성향의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메일을 우리 형제들에게 계속 보내셨다.
함부로 지우기도 그렇고, 보내 주신 글들이 내가 보기에는 많이 불편해서 많이 고민을 했다.
결국은 어느 날인가 이런 류의 메일은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메일을 드렸다.
하지만 아버진 기계 같았다.
기계적으로 받아 보신 메일 가운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메일을 기계적으로 우리 형제들에게 보내고 계셨다.
그러면서도 정작 내 메일은 읽지도 않으신 모양이었다.(이건 나중에야 알았지만...)
결국은 침묵으로 분노를 대신 표출했고, 중재자인 누이를 사이에 두고 메일 전송은 중지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카톡에 가입하자, 아버진 다시 같은 부류의 정치적인 글들을 보내기 시작하셨다. 달라진 점이라면, 가족 단톡방이 아니라, 나에게만 보내셨다는 것.
지난 번의 메일 사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정치적인 성향이 다르다는 것을 잊어버리신걸까?
꽤나 속으로 부글거렸다.
이런 아버지의 행동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내가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해야 하는 걸까?
굉장히 비겁하거나 공격적인 대응도 상상했더랬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마지막 선은 희미하지만 남아 있었나보다.
결국 오늘 받은 톡의 동영상의 인트로에 신의 한수가 나오는 것을 보고 답장을 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것 같아 매우 불편하니 그만 보내 달라고...
아버지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에게도 알려주고 싶어서 그랬다는 변명과 함께 나의 부탁을 수락했다.
그런데...내가 정말 끔찍하게 생각하는 일은...
아버지에게 이 부탁을 하는 톡을 보내는 내내 손가락이 덜덜덜 떨렸다는 것이다.
그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난 여전히 아버지의 제어를 받고 있었고, 내가 보내려는 톡은 이 제어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하는 정도의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구시대적인 유교의 사상으로는 불효에 해당하는 일이고 반란이며 패륜이라는 무의식이 작용한걸까?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유교의 노예인걸까? 아마 맞겠지...)
5.
지난 추석에 겪은 생생한 한 장면...(이미 수 많은 명절에 되풀이 되었지만)
잘 차려진 추석 상에는 전과 잡채 갈비가 올라와 있다.
어버진 양념된 갈비를 손으로 잡으시는걸 아주 꺼려하신다.
게다가 갈비에 붙어 있는 기름이나 질긴 힘줄을 싫어 하신다.
결국은 누군가가 갈빗대에서 살을 발라낸 후에, 곳곳에 붙어 있는 기름과 힘줄을 제거 하야만 한다. 그게 사실은 거의 불가능하니 각자 알아서 해야겠지만...
아버진 손을 대기 싫으시니 식당에서 보는 집게와 가위를 달라고 하시고, 그나마도 잘 못하셔서 갈비와의 씨름이 벌어지고... 옆에서 보던 어머니는 답답해 답답해를 연발하시다가 얼추 발라서 아버지께 드리고는 적당히 좀 드시라 타박한다.
그 광경은 나 또한 매우 답답하고 불편하고 불쾌하기까지 한 장면인데... 그게 몇년을 반복하고 있다.
대체 왜 반복하면서 그런 음식을 그런 식으로 내는지, 음식을 효율적으로 자신의 기호에 맞게 요령껏 섭취하지 못하는지, 옆에서 답답하다면서도 계속 붙어서 잔소리를 하는지, 왜 그런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없는지...
어쩌면 이 와중에 일어난 어머니의 답답함과 짜증에 동조해서 나도 아버지를 비난하거나 어머니의 한마디를 거들거나 했을지도 모르고, 혹은 그 가운데서 마찰을 완화하기 위해서 중재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런게 각자의 성격인거고, 그 나름의 한계선(경계선)을 지키면서 일어나고 있어서 큰 충돌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난 이게 그렇게 불편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게 아주 많이 불편하다는 걸...
아마도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다면, 나는 그런 식사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는게 맞다.
그리고... 아마도 아주 어려서부터 그렇게 복작대고 지지고 볶고 하는 식탁에 익숙하게 자랐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정도의 스트레스는 참아내도록 길러졌나보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건 내게 스트레스였고, 참을만 한 수준은 아니었지 싶다.
이제 식사 자리에서 이런 상황이 나는 매우 불편하고 싫다, 그러니 그러지 말고 평화롭게 식사를 하자고 한들 이제와 고쳐질리 만무하다.
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상황이 매우 불편하니 나는 나중에 따로 식사를 하겠다고 피하는 방법 뿐인 것 같다.
6.
늙었나보다.
이렇게 두려운게 많다.
알면 알수록 두렵다.
차라리 모르면 용감할 수 있을텐데...이제는 세상 만사의 돌아가는 행태를 대충 이해하고 있으니, 무언가를 보면 그 뒤에 있을 일들까지 떠 오르면서 두려움들이 쌓인다.
그러니 젊은 시절이 용감한거다.
무식하니 용감한거 맞다.
가끔 공원을 산책하다 애완견을 끌고 나온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내가 개를 좋아해서 많이 봐주고 소리 내거나 친한척을 해주면 금새 반가워하는 개들이 있다.
10중 8,9는 어린 개다. 나이가 많아봐야 5살 이하인...하룻 강아지인 셈이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사람이라면 다 반갑고 그런건 다 어린 강아지들 뿐이다.
그런 개들도 나이가 더 들면 사람들을 경계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거다.
반가워해도 특별히 자기에게 득 될거 없는걸 아는 거다.
늙은 나는 두려움이 많다.
2018년 9월 21일 금요일
[도서]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 - 올더스 헉슬리
자세한 도서 정보는 나중에 추가하겠음.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이 책이 궁금해졌다.
책의 제목과 저자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이 들어보았지만, 정작 책을 읽을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주위에서 이 책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으니 읽어봐야겠다는 동기도 없었던 셈.
그런데 왜 갑자기 이 책이 생각난 걸까?
왜 갑자기 읽어 보고 싶어진 걸까?
아직은 초반부까지 읽은 상태인데 꽤 흥미롭다.
미래의 어느 사회.
극히 조절되고 통제되며 계획된 사회.
인간의 태생부터 계급화되고 계급에 맞게 배양되고 길러지는 사회이다.
이러한 면모들은 영화 이퀼리브리엄이나 데몰리션맨에서 봤던 것과 너무 흡사하다.
아마도 이 영화들이 멋진 신세계에서 차용한 아이디어겠지만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SF는 엉뚱한듯 해도 현 세상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가득해서 좋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생각지도 못했던 모순이나 불문에 대해 질문을 하게 만든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이 책이 궁금해졌다.
책의 제목과 저자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이 들어보았지만, 정작 책을 읽을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주위에서 이 책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으니 읽어봐야겠다는 동기도 없었던 셈.
그런데 왜 갑자기 이 책이 생각난 걸까?
왜 갑자기 읽어 보고 싶어진 걸까?
아직은 초반부까지 읽은 상태인데 꽤 흥미롭다.
미래의 어느 사회.
극히 조절되고 통제되며 계획된 사회.
인간의 태생부터 계급화되고 계급에 맞게 배양되고 길러지는 사회이다.
이러한 면모들은 영화 이퀼리브리엄이나 데몰리션맨에서 봤던 것과 너무 흡사하다.
아마도 이 영화들이 멋진 신세계에서 차용한 아이디어겠지만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SF는 엉뚱한듯 해도 현 세상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가득해서 좋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생각지도 못했던 모순이나 불문에 대해 질문을 하게 만든다.
2018년 8월 23일 목요일
행복...한가요?
나는 언제 행복한가?
행복했던 적은 있었나?
무얼 하면, 혹은 어떤 상황이면 행복할 것인가?
만약, 무인도에 혼자 남겨져 외롭고 절망뿐인 상황에 처한다면,
뜻하지 않게 죄를 지어 교도소 독방에 갇히게 되었다면,
사형을 선고 받은 사형수로, 언제 사형 당할지 모르고 하루 하루를 노심초사로 지내는 날이 계속된다면,
그래도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즐거움이라는 것을 찾아야 할 것이고,
주변의 사물이나 사람을 통해서 즐거움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즐거웠던 기억, 행복했던 순간, 혹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고 즐거워지는 그런 생각을 해야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과연 나는 무엇에 행복했던가?
무엇이 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고, 무엇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던걸까?
누구를 떠올리면 즐겁고, 누구를 떠올리면 행복한걸까?
무언가를 생각하기만 해도 기분이 우울해지고,
모든 힘이 빠져 나간 듯 하고,
모든 것이 잿빛에 암울하다면...
피할 수 없어서 죽음까지 떠 올린다면...
그래도 그게 여러가지 명패를 달고 다가와서 의무처럼 내 어깨 위에 올라탄다면...
과연 내가 내 생애에서 행복하기 위해 애쓴 적이 있던가?
나의 행복이 뭔지도 모르면서?
아마 싫은 건 있었겠지.
그리고 그 싫은 걸 피하는게 우선이었겠지.
그래서 내 삶은 행복을 얻기 위한게 아니라 고통을 피하기 위했던 과정 뿐일지도...
행복은 파랑새라고?
바로 옆에 존재했지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라고?
고난 없이는 달콤한 인생도 없다고 했던가?
어쩌면 내가 바라던 그 행복은, 내가 피하기만 했던 그 고통의 너머에만 존재했던 건 아닐까?
행복했던 적은 있었나?
무얼 하면, 혹은 어떤 상황이면 행복할 것인가?
만약, 무인도에 혼자 남겨져 외롭고 절망뿐인 상황에 처한다면,
뜻하지 않게 죄를 지어 교도소 독방에 갇히게 되었다면,
사형을 선고 받은 사형수로, 언제 사형 당할지 모르고 하루 하루를 노심초사로 지내는 날이 계속된다면,
그래도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즐거움이라는 것을 찾아야 할 것이고,
주변의 사물이나 사람을 통해서 즐거움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즐거웠던 기억, 행복했던 순간, 혹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고 즐거워지는 그런 생각을 해야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과연 나는 무엇에 행복했던가?
무엇이 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고, 무엇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던걸까?
누구를 떠올리면 즐겁고, 누구를 떠올리면 행복한걸까?
무언가를 생각하기만 해도 기분이 우울해지고,
모든 힘이 빠져 나간 듯 하고,
모든 것이 잿빛에 암울하다면...
피할 수 없어서 죽음까지 떠 올린다면...
그래도 그게 여러가지 명패를 달고 다가와서 의무처럼 내 어깨 위에 올라탄다면...
과연 내가 내 생애에서 행복하기 위해 애쓴 적이 있던가?
나의 행복이 뭔지도 모르면서?
아마 싫은 건 있었겠지.
그리고 그 싫은 걸 피하는게 우선이었겠지.
그래서 내 삶은 행복을 얻기 위한게 아니라 고통을 피하기 위했던 과정 뿐일지도...
행복은 파랑새라고?
바로 옆에 존재했지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라고?
고난 없이는 달콤한 인생도 없다고 했던가?
어쩌면 내가 바라던 그 행복은, 내가 피하기만 했던 그 고통의 너머에만 존재했던 건 아닐까?
2018년 6월 10일 일요일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경험을 한다면
요즘 유튜브에선 별걸 다 볼 수 있다.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전세계적으로 실시간 방송 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NASA에서방송을 하는 것인데, 우주선에서 혹은 우주 정거장에서, 도킹 과정, 분리 과정 등을 방송하곤 한다.
대부분은 암흑같은 우주를 배경으로 촬영한 영상이 아닌, 지구를 배경으로 촬영한 영상이다.
그걸 잠시 보고 있노라니 여러가지 생각들이 뇌리에 스치고 지나간다.
지구를 떠나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경험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관점을 열어준다는 말.
내가 살고 있던 지구, 내가 살고 있던 나라, 내가 살고 있던 도시, 내가 살고 있던 마을, 내가 살고 있던 집, 내 방,
마치 나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면서 내가 속한 곳들을, 나로부터 떨어진 거리의 비교로 인식하던 방법.
하지만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서 내가 살던 곳을 줌인 하듯 찾아가는 과정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나의 세계를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엔 나 자신에 대한 인식마저 바꾸어 놓을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마주" 보는 것이었다.
카메라를 통해서 나 자신을 찍는 것도 나와 "마주" 보는 방법이다.
이제 카메라를 내 등 뒤에 고정시키고 나를 촬영하면서 그 영상을 컴퓨터나 TV에서 실시간으로 재생한다면...
드론을 공중으로 날려서 드론의 카메라로 나 자신을 촬영하면서 보게 된다면...
인공 위성의 카메라를 통해 지구상에 나의 모습을 촬영하면서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게 된다면...
그게 나처럼 보일까?
그건 거울을 보는 것과 비슷할까?
그게 정말 나인지 증명할 수 있을까?
추가 :
간혹 운동 경기 중에 관중석에 응원하는 사람들을 클로즈업해서 촬영하고 그걸 경기장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 보여 주는 경우들이 있다.
그 찍힌 사람들이 처음으로 스크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전세계적으로 실시간 방송 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NASA에서방송을 하는 것인데, 우주선에서 혹은 우주 정거장에서, 도킹 과정, 분리 과정 등을 방송하곤 한다.
대부분은 암흑같은 우주를 배경으로 촬영한 영상이 아닌, 지구를 배경으로 촬영한 영상이다.
그걸 잠시 보고 있노라니 여러가지 생각들이 뇌리에 스치고 지나간다.
지구를 떠나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경험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관점을 열어준다는 말.
내가 살고 있던 지구, 내가 살고 있던 나라, 내가 살고 있던 도시, 내가 살고 있던 마을, 내가 살고 있던 집, 내 방,
마치 나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면서 내가 속한 곳들을, 나로부터 떨어진 거리의 비교로 인식하던 방법.
하지만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서 내가 살던 곳을 줌인 하듯 찾아가는 과정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나의 세계를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엔 나 자신에 대한 인식마저 바꾸어 놓을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마주" 보는 것이었다.
카메라를 통해서 나 자신을 찍는 것도 나와 "마주" 보는 방법이다.
이제 카메라를 내 등 뒤에 고정시키고 나를 촬영하면서 그 영상을 컴퓨터나 TV에서 실시간으로 재생한다면...
드론을 공중으로 날려서 드론의 카메라로 나 자신을 촬영하면서 보게 된다면...
인공 위성의 카메라를 통해 지구상에 나의 모습을 촬영하면서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게 된다면...
그게 나처럼 보일까?
그건 거울을 보는 것과 비슷할까?
그게 정말 나인지 증명할 수 있을까?
추가 :
간혹 운동 경기 중에 관중석에 응원하는 사람들을 클로즈업해서 촬영하고 그걸 경기장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 보여 주는 경우들이 있다.
그 찍힌 사람들이 처음으로 스크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2018년 6월 2일 토요일
뜻하지 않은 노숙의 경험 (2)
초여름이라 아침은 비교적 일찍 밝았다.
한 두시간 정도를 누워있었더니 다리의 피로가 조금은 나아진듯도 하고 간간이 지나는 행인의 발소리는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곧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 것이며 그들의 눈치를 무시하거나 피하거나 해야할 것이다.
내게는 다행히도 지갑에 여유가 있으니 PC방에 가서 눈치 받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만약 내가 금전적인 곤란까지 겪고 있었다면 사람들의 눈치를 무시하는 것쯤은 용기 내어 볼만한 덕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 개개인이 겪는 작은 짜증보다는 내가 겪는 피곤함과 불편이 훨씬 크다는 자기 합리화를 펴면서...
PC방에서 몇가지 인터넷 검색을 하고 음악과 동영상을 감사하면서 스마트폰을 충전했다.(이곳은 자리에서는 충전이 되지 않아 카운터에 스마트폰을 맡겨야 했다.)
이젠 날이 완전히 밝았고 사람들의 출근 전쟁이 시작될 즈음에 PC방을 나왔다.
어제는 어두워서 소홀했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다시 한번 어제의 동선을 되짚으며 탐색을 했다.
역시 실패.
머리를 깎은 곳이 문을 열기를 기다리며 업소 근처의 벤치에 앉아 출근하는 사람들과 등교하는 학생들, 쉼 없이 지나가는 승용차들과 버스를 보고 있노라니 한편으로는 우월감도 들면서 한편으로는 패배감도 들었다. (사실 패배감은 아니었다. 이런 출근길의 스트레스가 어떠했는지 나는 아직도 생생이 기억하고 있으며, 직장에서의 생활이 결코 금전적인 것 외에는 어떤 이점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 금전이 아쉬운 것이지 직장이 아쉽지는 않다. 그래서 저렇게 부산을 떠는 사람들이 안쓰럽게 보인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모두가 한참 바쁜 출근 시간에 빈둥거리며 벤치에 앉아 있는 내가 좀 별나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을 즐기고 있었으며, 다리가 아파서 벤치에 앉아 있었던 것이며, 머리 깎는 업소의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길거리가 조금 한산해졌을 때, 내 모습이 한심해 보인 것인지 노파 한분이 내 옆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셨다. 한편으론 자신의 신세 한탄이고, 자식 자랑이며, 과거의 전적(?)이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젊은이(나)가 일없이 앉아 있는 게 불쌍해 보여서 한마디 해 주려고 했다는 식의 뜻을 전하셨다.
한시간여 가르침(?)을 듣고 나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자리를 일어 났다.
이미 업소의 문은 열린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업소에 들어가 확인해 보니, 역시나 열쇠 따위는 본 적이 없으시단다.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내 기억에도 이 머리 깍는 곳에서 열쇠를 꺼낸 기억도 없었으며, 그랬을만한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명확하게 좀 더 비극적이었다.
이젠 열쇠 전문가를 찾아가 문을 열어 주길 바래야 했다.
그리고 자동차의 키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했다.
아마도 금전적으로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할 일들 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난 비용과 효과 사이에서 여러번 갈등하며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어제 검색해 두었던 열쇠 가게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하자 선뜻 쉽게 얘기를 하셨다.
- 가서 확인 해 봐야 열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 쉽게 열 수 있으면 2만원, 조금 까다로우면 3만원, 최악의 경우에는 보조키를 제거해 버리고 문을 개방하는 데에만 5만원 전후에 새로운 보조키를 장착하는 것은 별도
- 자동차 키도 복사가 가능한데, 원본이 있으면 5천원에 가능. 원본이 없으면 5만원정도. (자동차 키는 완전히 구형의 일반적인 금속 열쇠였을 때 이러했다.)
아파트에 도착해서 아파트의 보조키를 본 전문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건 쉽거나 까다로운 게 아니라, 보조키를 강제로 제거해야 하는 것이며 시간도 많이 걸린다고... 아마도 비용은 10여만원이 소요될 듯.
어려웠다.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긴 했다. 복도에 나 있는 유리창을 제거하면 가능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견적은 받아보지 못한지라 전문가에게 설명을 하고 나중에 다시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대신 출장 비용으로 1만원을 지급하고 나중에 혹시라도 일을 맡기면 차감받기로 했다.)
이제 아파트의 창문 개방으로 방향을 바꾸어 보기로 하고 대략적인 창문의 크기와 형태를 파악한 후에 유리 가게에 갈 생각이었다.
살펴보니 복도의 창문은 의외로 허술해서 적절한 도구와 힘만 있으면 개방이 가능할 듯도 보였다. 아파트 관리실에 부탁해서 지렛대를 얻어와 강제로 유리창 샷시째 떼어내 보려했지만 실패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손 하나는 겨우 들어갈 만한 공간을 억지로 확보했고, 여기에 손을 넣고 한참을 이러 저리 움직이는 도중에 갑자기 유리창 샷시가 분리가 되었다.
애초의 생각대로는 아니었지만 결국 유리창은 개방 되었고, 몰래 숨겨 두었던 여분의 열쇠로 아파트 입구도 개방할 수 있었다.
이제 열쇠를 잃어버린 것(집, 자동차,스마트키)과 유리창을 떼어낸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아졌다.
이것 저것 정리들을 하고 집안으로 들어와 간단하게 씼고 나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나를 괴롭혔다.
자동차 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찰청의 유실물 통합 포탈(https://lost112.go.kr/index.do)에서 분실한 날짜와 지역, 분실물 종류를 입력하고 검색을 해 보았다.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인지, 내가 잃어버린 열쇠 꾸러미가 바로 거기에 올라와 있었다.
그곳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하자 담당 형사분이 찾아 갈 장소를 안내해 주셨고, 나는 제대로 씻지도 못한 상태에서 바로 찾아가 열쇠 꾸러미를 다시 찾아 올 수 있었다.
전화로 통화했을 때, 올린지 얼마 안되었다고 말씀하셨고, 올라와 있는 내용에는 내가 전날 방문했던 파출소에서 인계 받은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습득하신 분께 고마워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해서, 형사분이 대신 전화해 보았으나 연락이 되지 않아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전일 습득하신 후에 금일 파출소에 신고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니었다면 내가 직접 파출소에 찾아갔을 때에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아니면 경찰청 사이트에서 검색했을 때 찾을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참 기적과 같이 잃어버린 열쇠 꾸러미를 다시 찾았으며, 이 열쇠 꾸러미를 파출소에 맡겨주신 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열쇠가 다시 제 손에 들어오기까지 도움을 주신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게 그대로 돌아왔으면서, 1박 2일동안 뜻하지 않은 경험을 했고, 뜻밖의 만남도 가졌으며, 쉽지 않은 마음 속의 요동과 갈등도 겪게 된 것이 많은 것을 주었다.
지금 내 무릎이 시큰거리고 허리가 아프다는 사실, 장딴지가 몹시 땡겨서 똑바로 걷기가 힘들다는 사실이 없다면 정말 한여름밤의 꿈이라고 생각해도 좋은 길고도 짧은 모험이었다.
한 두시간 정도를 누워있었더니 다리의 피로가 조금은 나아진듯도 하고 간간이 지나는 행인의 발소리는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곧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 것이며 그들의 눈치를 무시하거나 피하거나 해야할 것이다.
내게는 다행히도 지갑에 여유가 있으니 PC방에 가서 눈치 받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만약 내가 금전적인 곤란까지 겪고 있었다면 사람들의 눈치를 무시하는 것쯤은 용기 내어 볼만한 덕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 개개인이 겪는 작은 짜증보다는 내가 겪는 피곤함과 불편이 훨씬 크다는 자기 합리화를 펴면서...
PC방에서 몇가지 인터넷 검색을 하고 음악과 동영상을 감사하면서 스마트폰을 충전했다.(이곳은 자리에서는 충전이 되지 않아 카운터에 스마트폰을 맡겨야 했다.)
이젠 날이 완전히 밝았고 사람들의 출근 전쟁이 시작될 즈음에 PC방을 나왔다.
어제는 어두워서 소홀했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다시 한번 어제의 동선을 되짚으며 탐색을 했다.
역시 실패.
머리를 깎은 곳이 문을 열기를 기다리며 업소 근처의 벤치에 앉아 출근하는 사람들과 등교하는 학생들, 쉼 없이 지나가는 승용차들과 버스를 보고 있노라니 한편으로는 우월감도 들면서 한편으로는 패배감도 들었다. (사실 패배감은 아니었다. 이런 출근길의 스트레스가 어떠했는지 나는 아직도 생생이 기억하고 있으며, 직장에서의 생활이 결코 금전적인 것 외에는 어떤 이점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 금전이 아쉬운 것이지 직장이 아쉽지는 않다. 그래서 저렇게 부산을 떠는 사람들이 안쓰럽게 보인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모두가 한참 바쁜 출근 시간에 빈둥거리며 벤치에 앉아 있는 내가 좀 별나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을 즐기고 있었으며, 다리가 아파서 벤치에 앉아 있었던 것이며, 머리 깎는 업소의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길거리가 조금 한산해졌을 때, 내 모습이 한심해 보인 것인지 노파 한분이 내 옆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셨다. 한편으론 자신의 신세 한탄이고, 자식 자랑이며, 과거의 전적(?)이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젊은이(나)가 일없이 앉아 있는 게 불쌍해 보여서 한마디 해 주려고 했다는 식의 뜻을 전하셨다.
한시간여 가르침(?)을 듣고 나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자리를 일어 났다.
이미 업소의 문은 열린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업소에 들어가 확인해 보니, 역시나 열쇠 따위는 본 적이 없으시단다.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내 기억에도 이 머리 깍는 곳에서 열쇠를 꺼낸 기억도 없었으며, 그랬을만한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명확하게 좀 더 비극적이었다.
이젠 열쇠 전문가를 찾아가 문을 열어 주길 바래야 했다.
그리고 자동차의 키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했다.
아마도 금전적으로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할 일들 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난 비용과 효과 사이에서 여러번 갈등하며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어제 검색해 두었던 열쇠 가게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하자 선뜻 쉽게 얘기를 하셨다.
- 가서 확인 해 봐야 열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 쉽게 열 수 있으면 2만원, 조금 까다로우면 3만원, 최악의 경우에는 보조키를 제거해 버리고 문을 개방하는 데에만 5만원 전후에 새로운 보조키를 장착하는 것은 별도
- 자동차 키도 복사가 가능한데, 원본이 있으면 5천원에 가능. 원본이 없으면 5만원정도. (자동차 키는 완전히 구형의 일반적인 금속 열쇠였을 때 이러했다.)
아파트에 도착해서 아파트의 보조키를 본 전문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건 쉽거나 까다로운 게 아니라, 보조키를 강제로 제거해야 하는 것이며 시간도 많이 걸린다고... 아마도 비용은 10여만원이 소요될 듯.
어려웠다.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긴 했다. 복도에 나 있는 유리창을 제거하면 가능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견적은 받아보지 못한지라 전문가에게 설명을 하고 나중에 다시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대신 출장 비용으로 1만원을 지급하고 나중에 혹시라도 일을 맡기면 차감받기로 했다.)
이제 아파트의 창문 개방으로 방향을 바꾸어 보기로 하고 대략적인 창문의 크기와 형태를 파악한 후에 유리 가게에 갈 생각이었다.
살펴보니 복도의 창문은 의외로 허술해서 적절한 도구와 힘만 있으면 개방이 가능할 듯도 보였다. 아파트 관리실에 부탁해서 지렛대를 얻어와 강제로 유리창 샷시째 떼어내 보려했지만 실패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손 하나는 겨우 들어갈 만한 공간을 억지로 확보했고, 여기에 손을 넣고 한참을 이러 저리 움직이는 도중에 갑자기 유리창 샷시가 분리가 되었다.
애초의 생각대로는 아니었지만 결국 유리창은 개방 되었고, 몰래 숨겨 두었던 여분의 열쇠로 아파트 입구도 개방할 수 있었다.
이제 열쇠를 잃어버린 것(집, 자동차,스마트키)과 유리창을 떼어낸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아졌다.
이것 저것 정리들을 하고 집안으로 들어와 간단하게 씼고 나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나를 괴롭혔다.
자동차 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찰청의 유실물 통합 포탈(https://lost112.go.kr/index.do)에서 분실한 날짜와 지역, 분실물 종류를 입력하고 검색을 해 보았다.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인지, 내가 잃어버린 열쇠 꾸러미가 바로 거기에 올라와 있었다.
그곳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하자 담당 형사분이 찾아 갈 장소를 안내해 주셨고, 나는 제대로 씻지도 못한 상태에서 바로 찾아가 열쇠 꾸러미를 다시 찾아 올 수 있었다.
전화로 통화했을 때, 올린지 얼마 안되었다고 말씀하셨고, 올라와 있는 내용에는 내가 전날 방문했던 파출소에서 인계 받은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습득하신 분께 고마워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해서, 형사분이 대신 전화해 보았으나 연락이 되지 않아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전일 습득하신 후에 금일 파출소에 신고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니었다면 내가 직접 파출소에 찾아갔을 때에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아니면 경찰청 사이트에서 검색했을 때 찾을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참 기적과 같이 잃어버린 열쇠 꾸러미를 다시 찾았으며, 이 열쇠 꾸러미를 파출소에 맡겨주신 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열쇠가 다시 제 손에 들어오기까지 도움을 주신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게 그대로 돌아왔으면서, 1박 2일동안 뜻하지 않은 경험을 했고, 뜻밖의 만남도 가졌으며, 쉽지 않은 마음 속의 요동과 갈등도 겪게 된 것이 많은 것을 주었다.
지금 내 무릎이 시큰거리고 허리가 아프다는 사실, 장딴지가 몹시 땡겨서 똑바로 걷기가 힘들다는 사실이 없다면 정말 한여름밤의 꿈이라고 생각해도 좋은 길고도 짧은 모험이었다.
뜻하지 않은 노숙의 경험 (1)
간만의 외출.
머리도 깎고 마트에서 장도 보고 돌아와 아파트 건물 입구에서야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쇠 꾸러미를 잃어 버렸다는 걸.
아파트 보조키 열쇠, 자동차 키, 아파트 입구의 공동 현관용 스마트 키 세개가 엮여 있는 키였다.
시간은 밤 9시와 10시 중간 쯤.
일단 들고 있는 짐을 적당한 곳에 숨겨 두고 왔던 길을 되짚어 가며 열쇠를 찾아 보았다.
사실 열쇠를 어디에서 잃어버린 건지, 열쇠를 꺼냈던 적이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일부러 꺼낸 적은 없었으며,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되짚어가며 길에 흘렸을 수도 있어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이미 어두워진 길에서 가로등과 지나가는 차의 전조등이 비춰주는 곳을 제외하면 무언가 식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물건을 구입했던 마트 등에도 들러서 내 동선을 기억해보고 되짚어 가며 찾았보았고, 계산원에서 혹시 열쇠를 본 적이 있는지도 물었으며, 혹시라도 찾으면 연락 바란다고 연락처도 남겼다.
그렇게 나의 자취를 모두 살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단 한군데, 머리를 깍은 곳은 문을 닸았는지라 확인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한바퀴를 돌은 후에 아파트로 돌아와서 벤치에 앉아 잠시 쉬면서 생각에 잠겼다.
대체 어디에서 잃어버렸을까?
만약에 못 찾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 오늘밤은 어떻게 지내야 할까?
대체 어디에서 잃어 버렸을까?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단, MP3 플레이어를 주머니에 넣고 빼는 과정에서 열쇠가 있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적이 있으니 이 과정이 제일 의심스럽다. 혹은 확인 못한 머리 깎은 곳.
만약 못 찾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아파트의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가장 쉽고 저렴하고 피해가 적은 방법으로.
자동차 키는 복사를 해야 할텐데, 혹시 그 키가 유일한 키면 복사가 가능할까?
스마트키는 없이 지낼 수는 있는데, 아파트 관리실에 신고를 해야 할까?
당장 오늘밤은 어떻게 지내야 할까?
지금이라도 서울 본가에 갈까? 너무 늦은 시각이고 당장 내일 해야할 일들이 많을테니 이건 무리.
워낙에 야행성이니 내일 오전까지는 잠을 자지 않을 수 있지만, 배도 고플것이고 하루 종일 걸어서 좀 앉아서라도 쉬고 싶다. 그리고... 심심하다.
찜질방이나 PC방을 찾아보고 24시간 운영하는 식당도 찾아보고 해야겠다.
누군가 길거리에서 열쇠꾸러미를 주웠다면 어떻게 할까?
아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그냥 지나치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쉽게 주인을 찾을 수 있는 표식도 없으니 어떻게 처리하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그 사람의 동선에 파출소와 같은 공공 기관이 있다면 신고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아니면? 그냥 우체통에 넣었을 수도?
아, 요즘 젊은 사람이라면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 올려서 반은 도움을 구한다며 어떻게 처리할지 물어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 먼저 PC방에 가서 검색해 보자...(내 스맛폰은 데이터 요금제가 없어서 그냥 폭탄 요금을 써야하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밧데리가 간당간당한 상황이었다. 아까 연락처 적어준 곳에서 연락이 와도 통화중에 꺼져버릴 수도 있는 상황.)
어렵게, 또 먼 길을 이동해서 PC에 들어가 검색을 시작했으나...마땅한 정보 찾기 실패.
남는 시간에 아파트 문 여는 방법 등도 검색해보니 이것도 좋은 방법은 없었다.
이제 PC방을 나와 24시간 운영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길거리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다리가 많이 아프고 피곤하다.
많이 걸어서 무리이기도 했고, 오랫동안 서 있으니 피가 다리로 몰려 있는 상황.
잠은 자지 않더라도 다리를 높게 해야 좋을 것 같다.
마침 근처는 지하철 역사와 백화점이 공존하는 곳이라, 백화점의 1층 통로는 24시간 개방되어 있었다. 이곳에 약간은 푹신한 긴 의자가 있었는데,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동서남북의 네 방향으로 지나가는 통로가 있었다. 즉, 4개의 굽은 벤치가 안쪽으로 바라보게 되어 있는 셈.
새벽3시인 시간에 이곳에 3명의 사람이 있었다.
각각 한 코너씩 차지하고 있어 나도 남은 하나의 코너에 자리를 잡았다.
대각선 맞은 편에는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등을 보이고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내 왼쪽에는 건장해 보이는 40대 전후의 남성이 반바지 운동화 차림으로 비스듬이 눕듯이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내 오른쪽에는 안경을 쓴 짧은 머리의 남학생이, 왼쪽의 남성처럼 앉아 있는데, 한손으로 전화기를 받쳐서 귀에 대고 있었다. 처음엔 저러고 자고 있나 싶었는데 나중엔 나즈막히 말하는 소리가 들렸고, 한참을 더 그러고 있다가 가방을 챙겨서는 자리를 떠났다.
한동안은 앉아 있다가, 학생이 떠난 후에 몸을 눕혔다.
얼마 후에 왼쪽에 있던 남성도 불편했는지 모로 누워 자기 시작했다.
참 피곤하다.
내일, 아니 날이 밝으면 또 어찌해야 할지, 어디서 뭘 해야할지 막막한 심정이기도 했다.
괴연 집에 들어가서 다리를 뻗고 누울 수는 있을지, 노숙하는 사람들은 참 하루 앞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삶을 살고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활이 며칠 계속되다면 나쁜 짓을 하면서도 자기 행위에 대한 정당성이 자연스럽게 생길거라는 생각도 든다.
떠돈다는 것, 쉴 곳이 없다는 것,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는 것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의 큰 차이.
내가 집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은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대로 쉬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며, 24시간 사방팔방이 노출된 곳에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게 되었다.
--------------------- 다음편에 계속
머리도 깎고 마트에서 장도 보고 돌아와 아파트 건물 입구에서야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쇠 꾸러미를 잃어 버렸다는 걸.
아파트 보조키 열쇠, 자동차 키, 아파트 입구의 공동 현관용 스마트 키 세개가 엮여 있는 키였다.
시간은 밤 9시와 10시 중간 쯤.
일단 들고 있는 짐을 적당한 곳에 숨겨 두고 왔던 길을 되짚어 가며 열쇠를 찾아 보았다.
사실 열쇠를 어디에서 잃어버린 건지, 열쇠를 꺼냈던 적이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일부러 꺼낸 적은 없었으며,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되짚어가며 길에 흘렸을 수도 있어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이미 어두워진 길에서 가로등과 지나가는 차의 전조등이 비춰주는 곳을 제외하면 무언가 식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물건을 구입했던 마트 등에도 들러서 내 동선을 기억해보고 되짚어 가며 찾았보았고, 계산원에서 혹시 열쇠를 본 적이 있는지도 물었으며, 혹시라도 찾으면 연락 바란다고 연락처도 남겼다.
그렇게 나의 자취를 모두 살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단 한군데, 머리를 깍은 곳은 문을 닸았는지라 확인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한바퀴를 돌은 후에 아파트로 돌아와서 벤치에 앉아 잠시 쉬면서 생각에 잠겼다.
대체 어디에서 잃어버렸을까?
만약에 못 찾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 오늘밤은 어떻게 지내야 할까?
대체 어디에서 잃어 버렸을까?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단, MP3 플레이어를 주머니에 넣고 빼는 과정에서 열쇠가 있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적이 있으니 이 과정이 제일 의심스럽다. 혹은 확인 못한 머리 깎은 곳.
만약 못 찾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아파트의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가장 쉽고 저렴하고 피해가 적은 방법으로.
자동차 키는 복사를 해야 할텐데, 혹시 그 키가 유일한 키면 복사가 가능할까?
스마트키는 없이 지낼 수는 있는데, 아파트 관리실에 신고를 해야 할까?
당장 오늘밤은 어떻게 지내야 할까?
지금이라도 서울 본가에 갈까? 너무 늦은 시각이고 당장 내일 해야할 일들이 많을테니 이건 무리.
워낙에 야행성이니 내일 오전까지는 잠을 자지 않을 수 있지만, 배도 고플것이고 하루 종일 걸어서 좀 앉아서라도 쉬고 싶다. 그리고... 심심하다.
찜질방이나 PC방을 찾아보고 24시간 운영하는 식당도 찾아보고 해야겠다.
누군가 길거리에서 열쇠꾸러미를 주웠다면 어떻게 할까?
아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그냥 지나치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쉽게 주인을 찾을 수 있는 표식도 없으니 어떻게 처리하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그 사람의 동선에 파출소와 같은 공공 기관이 있다면 신고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아니면? 그냥 우체통에 넣었을 수도?
아, 요즘 젊은 사람이라면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 올려서 반은 도움을 구한다며 어떻게 처리할지 물어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 먼저 PC방에 가서 검색해 보자...(내 스맛폰은 데이터 요금제가 없어서 그냥 폭탄 요금을 써야하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밧데리가 간당간당한 상황이었다. 아까 연락처 적어준 곳에서 연락이 와도 통화중에 꺼져버릴 수도 있는 상황.)
어렵게, 또 먼 길을 이동해서 PC에 들어가 검색을 시작했으나...마땅한 정보 찾기 실패.
남는 시간에 아파트 문 여는 방법 등도 검색해보니 이것도 좋은 방법은 없었다.
이제 PC방을 나와 24시간 운영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길거리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다리가 많이 아프고 피곤하다.
많이 걸어서 무리이기도 했고, 오랫동안 서 있으니 피가 다리로 몰려 있는 상황.
잠은 자지 않더라도 다리를 높게 해야 좋을 것 같다.
마침 근처는 지하철 역사와 백화점이 공존하는 곳이라, 백화점의 1층 통로는 24시간 개방되어 있었다. 이곳에 약간은 푹신한 긴 의자가 있었는데,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동서남북의 네 방향으로 지나가는 통로가 있었다. 즉, 4개의 굽은 벤치가 안쪽으로 바라보게 되어 있는 셈.
새벽3시인 시간에 이곳에 3명의 사람이 있었다.
각각 한 코너씩 차지하고 있어 나도 남은 하나의 코너에 자리를 잡았다.
대각선 맞은 편에는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등을 보이고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내 왼쪽에는 건장해 보이는 40대 전후의 남성이 반바지 운동화 차림으로 비스듬이 눕듯이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내 오른쪽에는 안경을 쓴 짧은 머리의 남학생이, 왼쪽의 남성처럼 앉아 있는데, 한손으로 전화기를 받쳐서 귀에 대고 있었다. 처음엔 저러고 자고 있나 싶었는데 나중엔 나즈막히 말하는 소리가 들렸고, 한참을 더 그러고 있다가 가방을 챙겨서는 자리를 떠났다.
한동안은 앉아 있다가, 학생이 떠난 후에 몸을 눕혔다.
얼마 후에 왼쪽에 있던 남성도 불편했는지 모로 누워 자기 시작했다.
참 피곤하다.
내일, 아니 날이 밝으면 또 어찌해야 할지, 어디서 뭘 해야할지 막막한 심정이기도 했다.
괴연 집에 들어가서 다리를 뻗고 누울 수는 있을지, 노숙하는 사람들은 참 하루 앞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삶을 살고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활이 며칠 계속되다면 나쁜 짓을 하면서도 자기 행위에 대한 정당성이 자연스럽게 생길거라는 생각도 든다.
떠돈다는 것, 쉴 곳이 없다는 것,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는 것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의 큰 차이.
내가 집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은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대로 쉬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며, 24시간 사방팔방이 노출된 곳에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게 되었다.
--------------------- 다음편에 계속
2018년 5월 3일 목요일
밤 비 눈 겨울
나 혼자만의 백수 생활이 길어지면서, 생활 리듬은 누구로부터의 간섭도 없이 나 자신이 홀로 만들게 되었다.
밤은 활동 시간이 되고, 낮은 수면 시간이 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된다.
문득, 혼자만 깨어 있는 것 같은 깊고 깊은 밤에, 창 밖으로 보이는 어두워진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면 꽤 기묘한 느낌이 든다.
모두들 잠들어 있는 시간.
자신의 집이라는 보호 구역이 아니라면,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빠져버린 사람들.
더우기 돌아가면서 수면을 취하는 것도 아니라 대부분이 비슷한 시간에 단체로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것은...
한때는 교회나 절 같은 곳에 가는 것이 매우 꺼려지곤 했는데, 당시의 느낌은 딱 짜여진 형식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건 단지 그들의 행위의 형식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마치 하나처럼 틀에 맞추어진 것 같고, 그들의 생각 또한 틀에 맞추어져 있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신론자인 내가 보기에는, 흔히 정글의 원주민들이 벌이는 알 수 없는 의식과 다를바 없는 그런 두려움이었다.
사람들이 일시에 잠이라는 지극히 고요하고 정적인 무방비 상태에 빠져 드는 건, 흡사 이런 알 수 없는 의식과도 비슷해 보여, 한편으로는 두려움 마저 느끼게 된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어렸을 때 부터 내가 좋아하는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하루 중의 밤, 비나 눈이 오는 날, 사계절 중의 겨울이 그랬다.
어쩌면 이런 시기들의 공통점은, 다른 이들이 비교적 덜 활동적인 시기라는데 있는 것 같다.
애초에 나는 매우 게으르고 나태한 인간이었으나, 자라면서 배우기는 언제나 근면하고 성실해야 한다고 배웠으며, 나태와 게으름은 악(惡)이라고 까지 배웠다.
결국 나의 본성과 도덕관념은 항상 충돌했기에, 언제나 마음이 불편하거나 몸이 불편한 그런 상태가 계속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밤, 비나 눈이 오는 날, 겨울은 이런 갈등이 매우 누그러지는 시기이다.
비교적 관대하게 휴식이나 게으름이 허용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밤은 활동 시간이 되고, 낮은 수면 시간이 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된다.
문득, 혼자만 깨어 있는 것 같은 깊고 깊은 밤에, 창 밖으로 보이는 어두워진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면 꽤 기묘한 느낌이 든다.
모두들 잠들어 있는 시간.
자신의 집이라는 보호 구역이 아니라면,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빠져버린 사람들.
더우기 돌아가면서 수면을 취하는 것도 아니라 대부분이 비슷한 시간에 단체로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것은...
한때는 교회나 절 같은 곳에 가는 것이 매우 꺼려지곤 했는데, 당시의 느낌은 딱 짜여진 형식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건 단지 그들의 행위의 형식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마치 하나처럼 틀에 맞추어진 것 같고, 그들의 생각 또한 틀에 맞추어져 있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신론자인 내가 보기에는, 흔히 정글의 원주민들이 벌이는 알 수 없는 의식과 다를바 없는 그런 두려움이었다.
사람들이 일시에 잠이라는 지극히 고요하고 정적인 무방비 상태에 빠져 드는 건, 흡사 이런 알 수 없는 의식과도 비슷해 보여, 한편으로는 두려움 마저 느끼게 된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어렸을 때 부터 내가 좋아하는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하루 중의 밤, 비나 눈이 오는 날, 사계절 중의 겨울이 그랬다.
어쩌면 이런 시기들의 공통점은, 다른 이들이 비교적 덜 활동적인 시기라는데 있는 것 같다.
애초에 나는 매우 게으르고 나태한 인간이었으나, 자라면서 배우기는 언제나 근면하고 성실해야 한다고 배웠으며, 나태와 게으름은 악(惡)이라고 까지 배웠다.
결국 나의 본성과 도덕관념은 항상 충돌했기에, 언제나 마음이 불편하거나 몸이 불편한 그런 상태가 계속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밤, 비나 눈이 오는 날, 겨울은 이런 갈등이 매우 누그러지는 시기이다.
비교적 관대하게 휴식이나 게으름이 허용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2018년 4월 19일 목요일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봄 꽃들이 만개하고 이제는 하나 둘씩 스러져 갈 즈음에야 바깥 산책을 나섰다.
밤 9시가 좀 안되는 시각이라 어두우니 꽃구경은 포기했다.
그래도 간간이 라일락 냄새가 진동하면, 화들짝 고개를 들고 좌우로 돌아가며 킁킁거려본다.
가로등이 비추는 곳은 꽃나무가 어슴프레 자태를 드러낸다.
간혹 달빛까지 비추는 곳에선 하얀 꽃잎들이 빛을 더하기도 한다.
문득 옛 시조 한구절이 떠 올랐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이화(梨花)에 월백(月白)이라니...문득 시인의 천재성을 이제야 알아내고 감탄했다.
그냥 범인이 썼다면 월하(月下)에 이백(梨白)이라고 썼을 것을...
배꽃이 달빛을 희게 만들었다니....
참 멋드러진 도치(倒置)가 아닌가.
습관적으로 읖조리기만 했는데, 이제야 참멋을 알아 반갑구나.
밤 9시가 좀 안되는 시각이라 어두우니 꽃구경은 포기했다.
그래도 간간이 라일락 냄새가 진동하면, 화들짝 고개를 들고 좌우로 돌아가며 킁킁거려본다.
가로등이 비추는 곳은 꽃나무가 어슴프레 자태를 드러낸다.
간혹 달빛까지 비추는 곳에선 하얀 꽃잎들이 빛을 더하기도 한다.
문득 옛 시조 한구절이 떠 올랐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이화(梨花)에 월백(月白)이라니...문득 시인의 천재성을 이제야 알아내고 감탄했다.
그냥 범인이 썼다면 월하(月下)에 이백(梨白)이라고 썼을 것을...
배꽃이 달빛을 희게 만들었다니....
참 멋드러진 도치(倒置)가 아닌가.
습관적으로 읖조리기만 했는데, 이제야 참멋을 알아 반갑구나.
2018년 4월 17일 화요일
2018, 과연 정치는 새로워졌는가.
초유의 대통령 탄핵과 이어지는 정권 교체.
새롭게 당선된 대통령은 과거의 여당과 야당을 바꾸어 놓았으며,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였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과거에 대한 단죄들은, 정치 보복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바르지 못한 것들이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는 없는 것들이 많았다.
물론 사람들의 입장과 견해에 따라서는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것에까지 무리하게 법을 적용한다는 볼멘 소리도 나오는 것이 사실이나, 이것이 새로운 엄격함의 잣대가 될 것이며, 향후에도 같은 잣대가 된다면 문제는 없지 않을까 싶은 것이 관전자의 생각이다.
그러던 중, 여당의원이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여론 조작단 사건이 터졌다.
일명 드루킹이라는 이름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던 정치 언론가(?)였던 모양인데, 온라인상의 게시물이나 댓들에 추천/비추천 수를 조작하여 여론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인물이 여당의원에게 특정 인사를 추천하여, 청와대가 검증까지 해 보았다니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그런데,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여당과 청와대의 반응은 미지근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냉담하다.
앞서 얘기한 "엄격한" 잣대가 경우에 따라서는 엄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그 "엄격함"은 색이 바래지고 "정치 보복"이 힘을 얻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 사건 이전에 좀 의아하게 생각했던 사건들이 몇몇 이었다.
1. 박찬주 대장의 공관병 갑질 사건.
- 과거 공관병에 대한 갑질로 여론의 질타를 받게 되었지만, 어디 대장이라는 중직을 맡은 사람의 직을 빼앗을 만한 일이던가.
- 결국 공관병 갑질 사건은 여론 몰이에만 사용되었고, 뇌물 사건으로 고소되었지만, 고작 720만원. 그나마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사건도 뇌물이 아닌 친분이 있던 사람과의 금전 거래였다는 소문도 있다.
- 짐작이지만, 아마도 누군가 새로운 대장을 임명하려고 찍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2. POSCO 권오준 회장, KT 황창규 회장
- POSCO와 KT 모두 과거 박근혜,최순실의 국정 농단에 연루되어 홍역을 치루었다.
- 어찌보면 피해자였던 두 기업은 전 정권의 협력자로 몰리면서 비난을 받았다.
- 하지만 민간 기업인 삼성, 롯데, SK 등은 총수들이 구속되거나 피의자로 검찰의 조사를 받는 등 직격탄을 맞은 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 결국, 2018년 4월 18일 오늘, 권오준 회장은 회장직을 사퇴했고, 황창규 회장은 뇌물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
- KT와 POSCO의 회장은 정권이 바뀌면 함께 바뀌는 게 관행처럼 되어 왔으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3. 한미연구소 지원 중단
- 북한에 대해 적대적이던 입장을 고수하던 38 North 웹사이트의 운영 주체라고 한다.
- 이 연구소의 설립과 배경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부의 지원을 받는 단체라는 것과 그들이 38 North를 운영했다는 것은 이번에 알게 되었다.
- 최근의 대북 기조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이를 추진하는 정부의 정책과는 반대되는 입장인 것은 알겠지만, 국내 정치에 대한 관여를 하지 않는다면 지원을 중단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 이런 사안은 과거 정부가 문화 예술인에 대한 블랙 리스트를 작성하고 지원을 배제했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혹시나?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가 되어버린 기분.
달라지지 않았다.
죄우가 바뀌었고, 진보와 보수가 바뀌었을 뿐이다.
결국 우리들이 바랬던 것이 이것이란 말인가?
언제나 바뀌는 정권과 그에 따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요동치는 나라?
시간이 지날 수록 견고해지는 원칙이나 중심은 없고, 좌우가 급변하니 중심축 마저 흔들려보리는 나라.
언제나 부르짖을 건 하나 뿐이다.
정치가 바뀌길 기대하기 보다는, 국민이 바뀌어야 한다.
국민들이 바뀌길 기대하기 전에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새롭게 당선된 대통령은 과거의 여당과 야당을 바꾸어 놓았으며,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였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과거에 대한 단죄들은, 정치 보복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바르지 못한 것들이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는 없는 것들이 많았다.
물론 사람들의 입장과 견해에 따라서는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것에까지 무리하게 법을 적용한다는 볼멘 소리도 나오는 것이 사실이나, 이것이 새로운 엄격함의 잣대가 될 것이며, 향후에도 같은 잣대가 된다면 문제는 없지 않을까 싶은 것이 관전자의 생각이다.
그러던 중, 여당의원이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여론 조작단 사건이 터졌다.
일명 드루킹이라는 이름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던 정치 언론가(?)였던 모양인데, 온라인상의 게시물이나 댓들에 추천/비추천 수를 조작하여 여론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인물이 여당의원에게 특정 인사를 추천하여, 청와대가 검증까지 해 보았다니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그런데,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여당과 청와대의 반응은 미지근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냉담하다.
앞서 얘기한 "엄격한" 잣대가 경우에 따라서는 엄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그 "엄격함"은 색이 바래지고 "정치 보복"이 힘을 얻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 사건 이전에 좀 의아하게 생각했던 사건들이 몇몇 이었다.
1. 박찬주 대장의 공관병 갑질 사건.
- 과거 공관병에 대한 갑질로 여론의 질타를 받게 되었지만, 어디 대장이라는 중직을 맡은 사람의 직을 빼앗을 만한 일이던가.
- 결국 공관병 갑질 사건은 여론 몰이에만 사용되었고, 뇌물 사건으로 고소되었지만, 고작 720만원. 그나마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사건도 뇌물이 아닌 친분이 있던 사람과의 금전 거래였다는 소문도 있다.
- 짐작이지만, 아마도 누군가 새로운 대장을 임명하려고 찍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2. POSCO 권오준 회장, KT 황창규 회장
- POSCO와 KT 모두 과거 박근혜,최순실의 국정 농단에 연루되어 홍역을 치루었다.
- 어찌보면 피해자였던 두 기업은 전 정권의 협력자로 몰리면서 비난을 받았다.
- 하지만 민간 기업인 삼성, 롯데, SK 등은 총수들이 구속되거나 피의자로 검찰의 조사를 받는 등 직격탄을 맞은 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 결국, 2018년 4월 18일 오늘, 권오준 회장은 회장직을 사퇴했고, 황창규 회장은 뇌물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
- KT와 POSCO의 회장은 정권이 바뀌면 함께 바뀌는 게 관행처럼 되어 왔으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3. 한미연구소 지원 중단
- 북한에 대해 적대적이던 입장을 고수하던 38 North 웹사이트의 운영 주체라고 한다.
- 이 연구소의 설립과 배경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부의 지원을 받는 단체라는 것과 그들이 38 North를 운영했다는 것은 이번에 알게 되었다.
- 최근의 대북 기조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이를 추진하는 정부의 정책과는 반대되는 입장인 것은 알겠지만, 국내 정치에 대한 관여를 하지 않는다면 지원을 중단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 이런 사안은 과거 정부가 문화 예술인에 대한 블랙 리스트를 작성하고 지원을 배제했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혹시나?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가 되어버린 기분.
달라지지 않았다.
죄우가 바뀌었고, 진보와 보수가 바뀌었을 뿐이다.
결국 우리들이 바랬던 것이 이것이란 말인가?
언제나 바뀌는 정권과 그에 따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요동치는 나라?
시간이 지날 수록 견고해지는 원칙이나 중심은 없고, 좌우가 급변하니 중심축 마저 흔들려보리는 나라.
언제나 부르짖을 건 하나 뿐이다.
정치가 바뀌길 기대하기 보다는, 국민이 바뀌어야 한다.
국민들이 바뀌길 기대하기 전에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2018년 3월 13일 화요일
머리 깎기와 소원 빌기
내 머리카락이 유별나다는 건 꽤나 어렸을 때 부터 알게 된 듯 하다.
변두리 동네의 허름한 이발소가 전부였던 시절, 자격증이 있었는지 모를 이발사 아저씨는 내 가 아는 유일한 이발사였다.
아버지와 일요일에 함께 가곤 했으니, 나에게 무슨 선택의 자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깎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니니...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외모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내 머리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건 머리를 깎고 난 직후에 더 심했다.
머리카락은 직모에 굵기까지 해서, 짧게 자르면 사방으로 뻗치기 일쑤였고, 그걸 잠재우려고 손에 물을 묻혀서 얼마나 눌러 댔던지...
머리카락이 이렇게 억새풀처럼 뻣뻣하다보니, 머리를 깎는 것이 고통이었고, 점점 머리 깎기를 멀리하고, 그러다보니 길어진 머리를 보고는 주위 어른들은 한마디씩 하면서 꼰대질을 하기도 했다. (남의 사정은 모르고 하는 말들... 어쩌다 기회가 되어 설명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곤 다시 꼰대질ㅠㅠ)
악순환이었다.
스프레이, 무스, 젤 따위도 많이 써 봤고, 나이가 더 들면서 머리카락도 성질 좀 죽었는지 예전만큼은 아닌데다, 나도 이젠 다른 사람 신경을 덜 쓰니 좀 많이 나아졌다.
그런데, 사실 내 머리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건 불과 몇년 전의 일이었다.
머리를 깎는 것에 트라우마가 남아 있지만, 이젠 조금 여유를 가지고 나와 내 머리, 그리고 머리를 깎는 분들을 관찰해 보니 거기에 혼재 되어 있던 것들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머리 깎는 분들은 아주 빠른 시간(10분 ~ 15분)에 한 사람의 머리를 깎고 다음 손님을 받기도 한다. 아주 눈썰미가 있거나 자주 본 사람이 아니라면 손님을 기억하고, 그 손님의 성향을 기억하고, 머리 깎는 습관을 기억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새로운 곳에서 머리를 깎게 된다면 완전한 첫 대면이니...
세상에 자신의 머리에 대해 자기 자신만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자신의 눈에서 가장 먼 곳은 다름 아닌 뒤통수다.
내가 내 정수리 부근의 머리를 보기가 얼마나 힘든지, 내 뒤통수를 제대로 보는게 과연 가능이나 할런지...
결국은 수많은 머리 깎기를 통해서, 바쁜 와중에에도 아주 간혹 내 머리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분이 있다면, 그 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기억하는 것이 제일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결국 나는 내 머리가, 직모이고 뻣뻣하고, 가르마가 왼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같은 길이로 잘랐을 경우에 왼쪽 머리가 잘 뜨며, 머리 숯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젠, 아주 당당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분에게 머리를 깎게 되면, 최대한 설명을 한다.
귀가 드러나도록 짧게 깍지만, 왼쪽이 잘 뜨니 조심해야 하고, 머리 숯이 많으니 속머리도 좀 솎아 주어야 한다고.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연말 연시를 맞이하면서 소원을 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때의 소원을 어떻게 빌었던가?
키 크게 해주세요,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 부자 되게 해 주세요,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등등.
만약에, 정말로 신이 존재해서 이런 소원을 듣고 들어 준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소원은 정말 들어 주기가 난감한 소원이 아닐까?
키를 얼마나 크게 해 줘야 하는지, 얼마나 빨리 커야 하는지, 얼굴만 길게 해도 되는지...
공부는 잘 해도 시험은 못봐도 되는 건지, 시험은 몇등을 해야 잘 하는 건지, 어떤 과목을 잘 해야 하는 건지...
마음 부자는 어떤지, 땅부자인지, 빚부자는 아닌지, 부자의 기준은 또 뭔지...
내가 정말 신이라면 이런 소원들이 얼마나 난감할지 알게 될 것이며,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이런 식의 소원을 비는 사람들은 정말로 절실하지도 않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어쩌면 소원도 점점 구체화 되어야만,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야 전지 전능한 신이라도 내가 딱 원하는 바를 이루어 줄 수 있을 것이며,
설령 신이 없다 하더라도, 나의 소원을 구체화 하는 과정이 그 소원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좋은 방법일 테니 말이다.
변두리 동네의 허름한 이발소가 전부였던 시절, 자격증이 있었는지 모를 이발사 아저씨는 내 가 아는 유일한 이발사였다.
아버지와 일요일에 함께 가곤 했으니, 나에게 무슨 선택의 자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깎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니니...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외모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내 머리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건 머리를 깎고 난 직후에 더 심했다.
머리카락은 직모에 굵기까지 해서, 짧게 자르면 사방으로 뻗치기 일쑤였고, 그걸 잠재우려고 손에 물을 묻혀서 얼마나 눌러 댔던지...
머리카락이 이렇게 억새풀처럼 뻣뻣하다보니, 머리를 깎는 것이 고통이었고, 점점 머리 깎기를 멀리하고, 그러다보니 길어진 머리를 보고는 주위 어른들은 한마디씩 하면서 꼰대질을 하기도 했다. (남의 사정은 모르고 하는 말들... 어쩌다 기회가 되어 설명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곤 다시 꼰대질ㅠㅠ)
악순환이었다.
스프레이, 무스, 젤 따위도 많이 써 봤고, 나이가 더 들면서 머리카락도 성질 좀 죽었는지 예전만큼은 아닌데다, 나도 이젠 다른 사람 신경을 덜 쓰니 좀 많이 나아졌다.
그런데, 사실 내 머리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건 불과 몇년 전의 일이었다.
머리를 깎는 것에 트라우마가 남아 있지만, 이젠 조금 여유를 가지고 나와 내 머리, 그리고 머리를 깎는 분들을 관찰해 보니 거기에 혼재 되어 있던 것들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머리 깎는 분들은 아주 빠른 시간(10분 ~ 15분)에 한 사람의 머리를 깎고 다음 손님을 받기도 한다. 아주 눈썰미가 있거나 자주 본 사람이 아니라면 손님을 기억하고, 그 손님의 성향을 기억하고, 머리 깎는 습관을 기억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새로운 곳에서 머리를 깎게 된다면 완전한 첫 대면이니...
세상에 자신의 머리에 대해 자기 자신만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자신의 눈에서 가장 먼 곳은 다름 아닌 뒤통수다.
내가 내 정수리 부근의 머리를 보기가 얼마나 힘든지, 내 뒤통수를 제대로 보는게 과연 가능이나 할런지...
결국은 수많은 머리 깎기를 통해서, 바쁜 와중에에도 아주 간혹 내 머리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분이 있다면, 그 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기억하는 것이 제일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결국 나는 내 머리가, 직모이고 뻣뻣하고, 가르마가 왼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같은 길이로 잘랐을 경우에 왼쪽 머리가 잘 뜨며, 머리 숯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젠, 아주 당당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분에게 머리를 깎게 되면, 최대한 설명을 한다.
귀가 드러나도록 짧게 깍지만, 왼쪽이 잘 뜨니 조심해야 하고, 머리 숯이 많으니 속머리도 좀 솎아 주어야 한다고.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연말 연시를 맞이하면서 소원을 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때의 소원을 어떻게 빌었던가?
키 크게 해주세요,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 부자 되게 해 주세요,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등등.
만약에, 정말로 신이 존재해서 이런 소원을 듣고 들어 준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소원은 정말 들어 주기가 난감한 소원이 아닐까?
키를 얼마나 크게 해 줘야 하는지, 얼마나 빨리 커야 하는지, 얼굴만 길게 해도 되는지...
공부는 잘 해도 시험은 못봐도 되는 건지, 시험은 몇등을 해야 잘 하는 건지, 어떤 과목을 잘 해야 하는 건지...
마음 부자는 어떤지, 땅부자인지, 빚부자는 아닌지, 부자의 기준은 또 뭔지...
내가 정말 신이라면 이런 소원들이 얼마나 난감할지 알게 될 것이며,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이런 식의 소원을 비는 사람들은 정말로 절실하지도 않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어쩌면 소원도 점점 구체화 되어야만,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야 전지 전능한 신이라도 내가 딱 원하는 바를 이루어 줄 수 있을 것이며,
설령 신이 없다 하더라도, 나의 소원을 구체화 하는 과정이 그 소원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좋은 방법일 테니 말이다.
2018년 3월 11일 일요일
사랑과 광기(狂氣), 섹스와 폭력(暴力)
매트릭스 3편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알지 못할 이유로 지하철에 갇히게 된 네오.
네오를 구하기 위해 메로빈지언을 찾아가는 모피어스와 트리니티.
모피어스 등은 네오를 구해 줄 것을 부탁하지만, 메로빈지언은 그 댓가로 오라클의 눈을 요구한다.
결국 이 거래는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트리니티의 끝장 전술에 이르게 된다.
이 장면에서 메로빈지언은 혼자서 중얼 거린다.
"사랑과 광기는 놀랍도록 닮았다."고
사랑에 관한 세상의 찬사는 너무나 흔하다.
물론 숭고하고 보편적이며 조건이 없는 사랑이 최고의 미덕으로 꼽히지만,
그만큼 어려운 것이며 드물다.
단지, 아주 좁은 범위의 사랑,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남녀의 사랑, 인기 연예인에 대한 팬의 사랑, 반려 동물에 대한 주인의 사랑... 등에서 우리는 그 "숭고한 사랑"의 일면이나마 살짝 느끼는지 모르겠다.
이성의 사랑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매우 본능적인 것이고 이기적이다.
호르몬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놀음이다.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장치이기에, 모든 인간들에게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고, 매우 강력하기까지 하다.
섹스는, 이성간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행위이고, 사랑의 많은 속성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순간적으로는 더 강력한 면이 있어 보인다.
본능적이고, 보편적이고, 강력하고, 이기적이기도 하다.
이런 행위는, 그러나 개별 존재들로 보면, 어느 정도의 차이점을 보이기도 하는데, 다분히 사회 문화적 영향과 결합된 면, 개인적인 컴플렉스와 연관된 면들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행위가 매우 충동적이며 순간적이기에 폭력적인 성향을 다분히 띠고 있게 된다.
요즘에 들불처럼 번지는 미투 운동은, 오랜 역사적 사회적 불평등 하에서 벌어진 일방적인 성폭력에 대한 반발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운동이 남성과 여성, 강자와 약자, 갑과 을 사이의 기울어진 시소를 맞추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불평등에서 기인한 폭력적인 성행위와, 성행위 자체가 가진 폭력성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는 매우 어렵고도 민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섹스가 폭력적이지 않은 경우는, 쌍방이 원하는 바와 그 정도가 일치하고, 실제 행위에서도 쌍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를 지켜야만 하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가지고 있다 생각한다.
만약에 어느 한쪽이 조금만 선을 넘게 되면, 그 순간부터 한쪽은 가해자가 되고 반대쪽은 피해자가 되고, 그 현장은 폭력의 현장이 될 수 있다.
이런 섹스의 폭력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언제든지 "미투"당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문제는, 이런 폭력성을 알고 있다면, 누구도 선뜻 섹스를 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이다.
종족의 보존을 위해서 폭력에 눈 감을 것인가, 폭력이 없는 유토피아를 선택하고 종족이 사라지게 할 것인가.
※ 쓰고 보니 한강씨의 <채식주의자>가 다시 생각난다.
인간의 육식과 그 육식의 이면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폭력성.
생존을 위해 폭력에 눈감고 육식을 할 것인가, 폭력이 없는 유토피아를 위해 육식을 끊고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알지 못할 이유로 지하철에 갇히게 된 네오.
네오를 구하기 위해 메로빈지언을 찾아가는 모피어스와 트리니티.
모피어스 등은 네오를 구해 줄 것을 부탁하지만, 메로빈지언은 그 댓가로 오라클의 눈을 요구한다.
결국 이 거래는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트리니티의 끝장 전술에 이르게 된다.
이 장면에서 메로빈지언은 혼자서 중얼 거린다.
"사랑과 광기는 놀랍도록 닮았다."고
사랑에 관한 세상의 찬사는 너무나 흔하다.
물론 숭고하고 보편적이며 조건이 없는 사랑이 최고의 미덕으로 꼽히지만,
그만큼 어려운 것이며 드물다.
단지, 아주 좁은 범위의 사랑,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남녀의 사랑, 인기 연예인에 대한 팬의 사랑, 반려 동물에 대한 주인의 사랑... 등에서 우리는 그 "숭고한 사랑"의 일면이나마 살짝 느끼는지 모르겠다.
이성의 사랑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매우 본능적인 것이고 이기적이다.
호르몬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놀음이다.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장치이기에, 모든 인간들에게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고, 매우 강력하기까지 하다.
섹스는, 이성간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행위이고, 사랑의 많은 속성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순간적으로는 더 강력한 면이 있어 보인다.
본능적이고, 보편적이고, 강력하고, 이기적이기도 하다.
이런 행위는, 그러나 개별 존재들로 보면, 어느 정도의 차이점을 보이기도 하는데, 다분히 사회 문화적 영향과 결합된 면, 개인적인 컴플렉스와 연관된 면들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행위가 매우 충동적이며 순간적이기에 폭력적인 성향을 다분히 띠고 있게 된다.
요즘에 들불처럼 번지는 미투 운동은, 오랜 역사적 사회적 불평등 하에서 벌어진 일방적인 성폭력에 대한 반발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운동이 남성과 여성, 강자와 약자, 갑과 을 사이의 기울어진 시소를 맞추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불평등에서 기인한 폭력적인 성행위와, 성행위 자체가 가진 폭력성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는 매우 어렵고도 민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섹스가 폭력적이지 않은 경우는, 쌍방이 원하는 바와 그 정도가 일치하고, 실제 행위에서도 쌍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를 지켜야만 하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가지고 있다 생각한다.
만약에 어느 한쪽이 조금만 선을 넘게 되면, 그 순간부터 한쪽은 가해자가 되고 반대쪽은 피해자가 되고, 그 현장은 폭력의 현장이 될 수 있다.
이런 섹스의 폭력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언제든지 "미투"당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문제는, 이런 폭력성을 알고 있다면, 누구도 선뜻 섹스를 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이다.
종족의 보존을 위해서 폭력에 눈 감을 것인가, 폭력이 없는 유토피아를 선택하고 종족이 사라지게 할 것인가.
※ 쓰고 보니 한강씨의 <채식주의자>가 다시 생각난다.
인간의 육식과 그 육식의 이면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폭력성.
생존을 위해 폭력에 눈감고 육식을 할 것인가, 폭력이 없는 유토피아를 위해 육식을 끊고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2018년 2월 25일 일요일
성인(聖人)은 있는가
혼란스러운 세상이다. 혼란스러운 시절이다.
세상의 발전 속도가 빠르다고는 하지만, 그냥 빠른게 아니라 가속도가 붙어서 점점 빨라지는 듯 하다.
지식의 발전은 인공지능이라는 꿈 같았던 기술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미래를 예측하기가 어려워질 정도이다.
열역학 제 2법칙처럼 인간들의 개개인의 자유도에 대한 욕망도 증가하면서 국가를 비롯한 다양한 집단들의 분열은 단지 시간의 문제가 되어 버린 듯 하다.
이런 급격한 변화들은 전반적인 사회의 변화 속도에도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만연해 있던 관습들은 구태(舊態)와 악습(惡習)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아마도 과거에는 최소한 한세대인 30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진행되지 않았을까 싶은 정도의 가치관 변화, 그래서 구태와 악습의 주체를 처벌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서 죄를 묻기 어려운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한 평생을 살면서 몇번씩은 잠재적 범죄자가 된 마음으로 살아야 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이제는 누구든 자신이 일상적인 생활의 한 부분으로 행했던 것들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런 걱정들을 안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Me too) 운동의 원인은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가장 큰 변화는 성적 피해를 입은 여성(혹은 남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이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 그에 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권리가 이전보다 평등해 졌으며, 소위 갑질에 대한 비판으로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도 지켜야할 최소한의 인권에 대한 인식 변화도 영향을 끼졌다 생각한다.
모든 미투 운동의 사례를 자세히 보지는 않았기에, 개별 사건들에 대한 피해자들의 폭로와 가해자들의 사죄를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은근히 나 또한 죄인은 아니더라도 비난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이런 속도의 변화라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나도 죄인이 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건 아닐지...
이 와중에도 사람들의 행태는 다분히 내로남불인 경우가 많고, 자기 모순적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간혹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청렴과 도덕을 요구하는 듯이 잠재적 가해자(아직 사실 관계가 드러나지 않은 경우도 많기에 이렇게 썼음)에게 비난을 쏟아 붓고 있지만, 그 정도의 철저한 도덕성을 지닌 사람이 익명성의 뒤에 숨어서 타인에게 인격적 살인에 가까운 모욕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내가 자주 접하는 인터넷의 공간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런 불편한 마음의 끝에 들었던 생각은 이러했다.
"아마도 부처님과 예수님이 현 시대에 나셨다 하더라도, 이 악플에 쫓겨서 세상을 등 지셨겠구나."
하기야 부처님도 예수님도 당 시대에는 일부 지역 내에서만 유명하셨을테고, 추종자들 만큼이나 많은 비판론자들이 있었으리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니, 지금과 별반 다르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지금도 과거의 성인만큼이나 뛰어나고 훌륭한 인물이 어딘가에는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과연 우리는 성인이 나타나면 그가 성인인지 알아 볼 수는 있겠는가?
아니, 어쩌면 부처님 예수님 같은 성인은 단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기로 결정(?)했기에 성인의 지위에 오른 것은 아닐까?
세상의 발전 속도가 빠르다고는 하지만, 그냥 빠른게 아니라 가속도가 붙어서 점점 빨라지는 듯 하다.
지식의 발전은 인공지능이라는 꿈 같았던 기술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미래를 예측하기가 어려워질 정도이다.
열역학 제 2법칙처럼 인간들의 개개인의 자유도에 대한 욕망도 증가하면서 국가를 비롯한 다양한 집단들의 분열은 단지 시간의 문제가 되어 버린 듯 하다.
이런 급격한 변화들은 전반적인 사회의 변화 속도에도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만연해 있던 관습들은 구태(舊態)와 악습(惡習)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아마도 과거에는 최소한 한세대인 30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진행되지 않았을까 싶은 정도의 가치관 변화, 그래서 구태와 악습의 주체를 처벌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서 죄를 묻기 어려운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한 평생을 살면서 몇번씩은 잠재적 범죄자가 된 마음으로 살아야 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이제는 누구든 자신이 일상적인 생활의 한 부분으로 행했던 것들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런 걱정들을 안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Me too) 운동의 원인은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가장 큰 변화는 성적 피해를 입은 여성(혹은 남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이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 그에 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권리가 이전보다 평등해 졌으며, 소위 갑질에 대한 비판으로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도 지켜야할 최소한의 인권에 대한 인식 변화도 영향을 끼졌다 생각한다.
모든 미투 운동의 사례를 자세히 보지는 않았기에, 개별 사건들에 대한 피해자들의 폭로와 가해자들의 사죄를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은근히 나 또한 죄인은 아니더라도 비난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이런 속도의 변화라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나도 죄인이 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건 아닐지...
이 와중에도 사람들의 행태는 다분히 내로남불인 경우가 많고, 자기 모순적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간혹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청렴과 도덕을 요구하는 듯이 잠재적 가해자(아직 사실 관계가 드러나지 않은 경우도 많기에 이렇게 썼음)에게 비난을 쏟아 붓고 있지만, 그 정도의 철저한 도덕성을 지닌 사람이 익명성의 뒤에 숨어서 타인에게 인격적 살인에 가까운 모욕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내가 자주 접하는 인터넷의 공간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런 불편한 마음의 끝에 들었던 생각은 이러했다.
"아마도 부처님과 예수님이 현 시대에 나셨다 하더라도, 이 악플에 쫓겨서 세상을 등 지셨겠구나."
하기야 부처님도 예수님도 당 시대에는 일부 지역 내에서만 유명하셨을테고, 추종자들 만큼이나 많은 비판론자들이 있었으리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니, 지금과 별반 다르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지금도 과거의 성인만큼이나 뛰어나고 훌륭한 인물이 어딘가에는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과연 우리는 성인이 나타나면 그가 성인인지 알아 볼 수는 있겠는가?
아니, 어쩌면 부처님 예수님 같은 성인은 단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기로 결정(?)했기에 성인의 지위에 오른 것은 아닐까?
2018년 2월 11일 일요일
시기와 질투
시기와 질투는 비슷해 보이는 데, 과연 무엇이 다를까?
우연히 읽은 인터넷의 정보에 이런 것이 있었다.
시기는 envy, 질투는 jealousy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기와 질투에 대해서 구분을 하고 있었는데,
시기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느끼는 슬픔'
질투는 '누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느끼는 슬픔'
이라고 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시기는 '상대방'에 대해 느끼는 슬픈 감정이고, 질투는 '나'에 대해 느끼는 슬픈 감정이라는 것이다.
번역에 관해서는 조금 다른 의견들도 있다.
envy가 <시기>, jealousy는 <샘>으로 번역하고, 우리말의 질투는 시기와 샘을 다 아우르는 단어라는 것이다.
혹자는, 자주 사용되는 상황으로 구분한 경우도 있다.
질투는 주로 애정 - 특히 남녀간의 애정에 쓰이는 단어이고 시기는 그 이외의 상황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나 자신을 객관화 하게 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 가는데,
그것이 조금식 연습이 되자 내가 느끼는 감정이 과연 무엇이고, 왜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 굼금해 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러 경로를 통해 보거나 듣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대체적으로 어떤 사람에 대한 잠깐의 소개(?)만을 접한 상황에서도 극적인 호불호(好不好)를 결정 짓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면 별 문제는 없겠지만, 이상스러울만큼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고,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한 어떤 형식의 조우(遭遇)에도 기분이 좋지 않게 되는 것을 느꼈다.
과연 이런 감정은 왜 생기는 것일까를 고민하다보니, 그것이 잠재적인 시기와 질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는 사뭇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이지만, 그가 자신의 영역에서 이룬 성과를 바탕으로 누구나 원하는 보편적인 가치(돈,명예,권력,권위)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보편적인' 시기나 질투를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 것이다.
너무 억지스러운 가정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저 나를 질투심/시기심이/시샘이 많은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면 더 쉬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는 내가 종종 느끼게 되는 그 불쾌한 기분, 불안한 기분으로 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아직은 명확하게 내 감정의 근원을 파악하지 못하였지만, 이 포스팅은 그 여정의 한 부분이며 언젠가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기와 질투에 관한 또 한가지 의문은, 아주 원초적인 감정일 듯한 이 시기와 질투가, 불교의 7정(七情) - 喜 怒 哀 樂 愛 惡 辱 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우연히 읽은 인터넷의 정보에 이런 것이 있었다.
시기는 envy, 질투는 jealousy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기와 질투에 대해서 구분을 하고 있었는데,
시기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느끼는 슬픔'
질투는 '누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느끼는 슬픔'
이라고 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시기는 '상대방'에 대해 느끼는 슬픈 감정이고, 질투는 '나'에 대해 느끼는 슬픈 감정이라는 것이다.
번역에 관해서는 조금 다른 의견들도 있다.
envy가 <시기>, jealousy는 <샘>으로 번역하고, 우리말의 질투는 시기와 샘을 다 아우르는 단어라는 것이다.
혹자는, 자주 사용되는 상황으로 구분한 경우도 있다.
질투는 주로 애정 - 특히 남녀간의 애정에 쓰이는 단어이고 시기는 그 이외의 상황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나 자신을 객관화 하게 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 가는데,
그것이 조금식 연습이 되자 내가 느끼는 감정이 과연 무엇이고, 왜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 굼금해 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러 경로를 통해 보거나 듣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대체적으로 어떤 사람에 대한 잠깐의 소개(?)만을 접한 상황에서도 극적인 호불호(好不好)를 결정 짓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면 별 문제는 없겠지만, 이상스러울만큼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고,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한 어떤 형식의 조우(遭遇)에도 기분이 좋지 않게 되는 것을 느꼈다.
과연 이런 감정은 왜 생기는 것일까를 고민하다보니, 그것이 잠재적인 시기와 질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는 사뭇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이지만, 그가 자신의 영역에서 이룬 성과를 바탕으로 누구나 원하는 보편적인 가치(돈,명예,권력,권위)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보편적인' 시기나 질투를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 것이다.
너무 억지스러운 가정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저 나를 질투심/시기심이/시샘이 많은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면 더 쉬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는 내가 종종 느끼게 되는 그 불쾌한 기분, 불안한 기분으로 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아직은 명확하게 내 감정의 근원을 파악하지 못하였지만, 이 포스팅은 그 여정의 한 부분이며 언젠가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기와 질투에 관한 또 한가지 의문은, 아주 원초적인 감정일 듯한 이 시기와 질투가, 불교의 7정(七情) - 喜 怒 哀 樂 愛 惡 辱 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2018년 2월 6일 화요일
마피아 게임
직접 해 보진 않았지만, 마피아 게임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하는 게임인데, 모종의 방법으로 마피아를 선정하고, 누가 마피아 인지는 마피아 자신만이 아는 상태.
게임이 진행되면서 마피아는 일반 시민을 제거하고, 모든 시민들이 제거 당하기 전에 마피아를 찾아 내야만 하는 게임이라고 한다.
링크 - 마피아 게임 (위키피디아)
링크 - 마피아 게임 (나무위키)
아마도 이를 컴퓨터 게임으로 만든 것도 여러가지가 있을 듯 한데, 최근에 온라인으로 여러 사람이 참여해 즐기는 게임으로 Deceit라는 게임도 있다.
게임 참가자 중 누군가는 흡혈귀이고 어둠을 틈타 사람들을 해치운다.
일반인은 흡혈귀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의심스러운 사람을 총으로 죽이거나 폐쇄된 공간에서 탈출해야 하는 게임.
뜬금없이 이런 게임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최근의 정치적인 문제들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들으며 느낀 것이, 마치 이 게임의 상황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ICBM 개발과 실험.
미국의 THAAD 한반도 배치
THAAD 배치에 따른 중국의 반발과 그에 따른 각종 보복성 조치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대북 제재에 대한 전세계적 공조 가운데 미국과 중국의 미묘한 이견
평창 동계 올림픽 개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한 조급한 조치들
이 조치들과 대북 제재의 충돌, 급격한 화해 모드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
내부의 정치적 상황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측근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 되자, 이제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각종 비리 캐기가 시작되었다.
MB의 재임 당시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많은 것들이 묻혀버렸고, 그게 살아있는 권력의 힘 때문이라 생각했을 수 있었던 것들. 너무 사소한 부분까지 들추는게 아니냐는 지적과 사소한 것으로부터 큰 비리의 실마리를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옹호론이 상존하고 있다.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가상화폐 혹은 암호화폐의 과열된 거래와 부작용에 대해 정부에서는 오락가락 정책을 발표해서 스스로의 신뢰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최순실 등에 의한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한 재판은 아직까지 진행 중인 가운데,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2심 재판에서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져서 이재용 부회장은 오랜 옥중 생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여검사가 상급자로 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문제는 흐지부지되고 오히려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았다는 폭로가 나오자, 한편으로는 법조계에서마저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논란과 전세계에 불고 있는 "미투"의 바람이 대한민국에도 불게 되었다.
이런 저런 논란거리가 많은 요즈음이다.
진보와 보수로 나뉘던 국론은, 다시 대북 강경론자와 유화론자로, 구세대와 신세대로 사분오열되고 있다보니, 이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저 의견은 달리하는 경우가 너무나 당연시될 정도이다. 어쩌면 이런 다양한 문제에 놓인 지금이, 우리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풍토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와중에 벌어지는 현상이 글의 처음에 소개한 마피아 게임과도 같은 비슷한 면이 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여론몰이를 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비방을 일삼는 것이다. 단지 이런 정도면 다양한 소리 가운데 하나라 생각하겠지만, 온라인이라는 특성을 이용해서 마치 자신의 세(勢)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거짓을 하고 있어 보인다.
여러가지 방법을 이용해서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인원이 온라인에서 가명의 여러 사람 행세를 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반복해서 노출시키고, 자신의 의견에 대해서는 호응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조작하며,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이 많은 것처럼 조작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은 이런 조작된 의견과 조작된 호응도를 보면서 어떤 것이 진실된 것이고 어떤 것이 거짓된 것인지 구별해 내야만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하는 게임인데, 모종의 방법으로 마피아를 선정하고, 누가 마피아 인지는 마피아 자신만이 아는 상태.
게임이 진행되면서 마피아는 일반 시민을 제거하고, 모든 시민들이 제거 당하기 전에 마피아를 찾아 내야만 하는 게임이라고 한다.
링크 - 마피아 게임 (위키피디아)
링크 - 마피아 게임 (나무위키)
아마도 이를 컴퓨터 게임으로 만든 것도 여러가지가 있을 듯 한데, 최근에 온라인으로 여러 사람이 참여해 즐기는 게임으로 Deceit라는 게임도 있다.
게임 참가자 중 누군가는 흡혈귀이고 어둠을 틈타 사람들을 해치운다.
일반인은 흡혈귀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의심스러운 사람을 총으로 죽이거나 폐쇄된 공간에서 탈출해야 하는 게임.
뜬금없이 이런 게임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최근의 정치적인 문제들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들으며 느낀 것이, 마치 이 게임의 상황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ICBM 개발과 실험.
미국의 THAAD 한반도 배치
THAAD 배치에 따른 중국의 반발과 그에 따른 각종 보복성 조치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대북 제재에 대한 전세계적 공조 가운데 미국과 중국의 미묘한 이견
평창 동계 올림픽 개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한 조급한 조치들
이 조치들과 대북 제재의 충돌, 급격한 화해 모드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
내부의 정치적 상황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측근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 되자, 이제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각종 비리 캐기가 시작되었다.
MB의 재임 당시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많은 것들이 묻혀버렸고, 그게 살아있는 권력의 힘 때문이라 생각했을 수 있었던 것들. 너무 사소한 부분까지 들추는게 아니냐는 지적과 사소한 것으로부터 큰 비리의 실마리를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옹호론이 상존하고 있다.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가상화폐 혹은 암호화폐의 과열된 거래와 부작용에 대해 정부에서는 오락가락 정책을 발표해서 스스로의 신뢰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최순실 등에 의한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한 재판은 아직까지 진행 중인 가운데,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2심 재판에서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져서 이재용 부회장은 오랜 옥중 생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여검사가 상급자로 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문제는 흐지부지되고 오히려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았다는 폭로가 나오자, 한편으로는 법조계에서마저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논란과 전세계에 불고 있는 "미투"의 바람이 대한민국에도 불게 되었다.
이런 저런 논란거리가 많은 요즈음이다.
진보와 보수로 나뉘던 국론은, 다시 대북 강경론자와 유화론자로, 구세대와 신세대로 사분오열되고 있다보니, 이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저 의견은 달리하는 경우가 너무나 당연시될 정도이다. 어쩌면 이런 다양한 문제에 놓인 지금이, 우리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풍토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와중에 벌어지는 현상이 글의 처음에 소개한 마피아 게임과도 같은 비슷한 면이 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여론몰이를 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비방을 일삼는 것이다. 단지 이런 정도면 다양한 소리 가운데 하나라 생각하겠지만, 온라인이라는 특성을 이용해서 마치 자신의 세(勢)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거짓을 하고 있어 보인다.
여러가지 방법을 이용해서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인원이 온라인에서 가명의 여러 사람 행세를 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반복해서 노출시키고, 자신의 의견에 대해서는 호응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조작하며,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이 많은 것처럼 조작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은 이런 조작된 의견과 조작된 호응도를 보면서 어떤 것이 진실된 것이고 어떤 것이 거짓된 것인지 구별해 내야만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2018년 1월 23일 화요일
가위 눌릴 때의 느낌
종종 가위에 눌리던 때가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온 직후였는데, 잠자리가 바뀌고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라 예민한 상태여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당시에 주변 사람들에게 가위 눌리는 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해도, 그걸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는데 아주 좋은 표현을 얻게 된 것 같다.
통상, 나의 경우, 잠을 잘 때 똑바로 누워서 잠을 자곤 하는데, 가위가 눌리는 시점은 막 잠이 들려는 순간이다.
몸이 약간 붕 뜨는 느낌이 들고, 바닥에 밀착되지 않은 느낌이라 어느쪽으로 미끄러져 움직일지 몰라 불안감이 든다.
이런 느낌이 싫어서 깨어나려고 애를 쓰면 깰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
이렇게 움직이려 하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게 자신을 더 두렵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상태에서 심한 경우에는 몸이 순간적으로 미끄러지듯이 움직인다고 생각하게 된다.
대체로 매우 빠른 속도이고, 한쪽으로만 움직인다기 보다는 방향도 급격히 바뀌면서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려면, 대야에 물을 받아 두고 그 위에 스티로폼, 나무, 종이 따위의 조각을 띄워 놓았다고 생각해 보면 된다.
이제 대야를 들고 왼쪽 오른쪽 혹은 앞 뒤로 기울이면, 그리고 방향을 바꿔가며 기울이면 물위 떠 있는 조각은 아무 저항도 없이 이리 저리 움직이게 될 것이다.
가위에 눌렸을 때의 느낌은, 마치 대야의 물 위에 떠 있는 조각이 된 것과 같은 느낌이다.
누가 대야를 흔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물 위에서 이리 저리 움직이게 된다. 멀미가 날 것 같은 그런 상황이다.
가위 눌림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가위에 눌렸다가 경험한 황당한 사건 몇가지를 적어 보겠다.
잠이 얼핏 들었다 생각했는데, 머리맡의 창문에서 엄청난 천둥과 번개, 폭우가 쏟아지는 징후를 느꼈다. 천둥 소리, 번개의 번쩍임, 빗소리 등등. 필시 요란한 폭우가 있구나. 다시 잠이 들었다가 얼마가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새벽에 눈이 떠졌고, 빗소리 기억이 나서 밖을 봤지만 밖은 아주 조용하고 맑았다. 비라고는 온 흔적도 없었다.
어느 날 가위에 눌렸는지 괴롭 던 중이었나 보다. 깨어나려 애쓰다 포기하다 보니 그냥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잠이 깬거였는지 눈이 떠지고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천장의 한 모서리에 웬 여자가 매달려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최근에 겪은 가위 눌림인데, 좀 색달랐다.
작년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허리가 많이 아파서, 예전처럼 똑바로 누우면 오래 자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옆으로 누워 자는 경우가 많았다. 옆으로 누워자면 가위에 눌리는 경우가 없었던 것 같아서 이상하다는 것인데...
왼쪽으로 누워서 몸을 약간 웅크리고 잤다.
겨울이라 이불을 잔뜩 끌어 당겼기에 얼굴의 반은 이불에 덮인 상황.
잠이 들었는데, 너무도 선명하게 무언가가 내 광대뼈 부근을 꾹꾹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이어서 오른쪽 갈비뼈 부근을 무언가가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가위 눌림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새로운 느낌이라 많이 황당했다.
아, 이와 비슷한 시기에 겪은 또 하나는..이 경우와 비슷한 자세로 자고 있었는데, 꽤 거슬리게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윗집이나 아랫집에서 누군가 예의도 없이 새벽에 발망치질을 하나보다 했는데 기다려봐도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 나서 일어나려고 웅크린 몸을 펴는 순간 쿵쿵거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가만 보니 최근에 심장이 유난스럽게 두근거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잠자는 중임에도 심장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웅크리고 있었으니 이 소리가 더 잘들려 그랬나보다 싶기는 하지만 그 때 들었던 소리는 심장소리라 하기엔 너무나 크게 들렸었는데, 이것도 가위 눌림으로 인한 환청이었는지 싶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온 직후였는데, 잠자리가 바뀌고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라 예민한 상태여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당시에 주변 사람들에게 가위 눌리는 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해도, 그걸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는데 아주 좋은 표현을 얻게 된 것 같다.
통상, 나의 경우, 잠을 잘 때 똑바로 누워서 잠을 자곤 하는데, 가위가 눌리는 시점은 막 잠이 들려는 순간이다.
몸이 약간 붕 뜨는 느낌이 들고, 바닥에 밀착되지 않은 느낌이라 어느쪽으로 미끄러져 움직일지 몰라 불안감이 든다.
이런 느낌이 싫어서 깨어나려고 애를 쓰면 깰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
이렇게 움직이려 하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게 자신을 더 두렵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상태에서 심한 경우에는 몸이 순간적으로 미끄러지듯이 움직인다고 생각하게 된다.
대체로 매우 빠른 속도이고, 한쪽으로만 움직인다기 보다는 방향도 급격히 바뀌면서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려면, 대야에 물을 받아 두고 그 위에 스티로폼, 나무, 종이 따위의 조각을 띄워 놓았다고 생각해 보면 된다.
이제 대야를 들고 왼쪽 오른쪽 혹은 앞 뒤로 기울이면, 그리고 방향을 바꿔가며 기울이면 물위 떠 있는 조각은 아무 저항도 없이 이리 저리 움직이게 될 것이다.
가위에 눌렸을 때의 느낌은, 마치 대야의 물 위에 떠 있는 조각이 된 것과 같은 느낌이다.
누가 대야를 흔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물 위에서 이리 저리 움직이게 된다. 멀미가 날 것 같은 그런 상황이다.
가위 눌림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가위에 눌렸다가 경험한 황당한 사건 몇가지를 적어 보겠다.
잠이 얼핏 들었다 생각했는데, 머리맡의 창문에서 엄청난 천둥과 번개, 폭우가 쏟아지는 징후를 느꼈다. 천둥 소리, 번개의 번쩍임, 빗소리 등등. 필시 요란한 폭우가 있구나. 다시 잠이 들었다가 얼마가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새벽에 눈이 떠졌고, 빗소리 기억이 나서 밖을 봤지만 밖은 아주 조용하고 맑았다. 비라고는 온 흔적도 없었다.
어느 날 가위에 눌렸는지 괴롭 던 중이었나 보다. 깨어나려 애쓰다 포기하다 보니 그냥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잠이 깬거였는지 눈이 떠지고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천장의 한 모서리에 웬 여자가 매달려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최근에 겪은 가위 눌림인데, 좀 색달랐다.
작년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허리가 많이 아파서, 예전처럼 똑바로 누우면 오래 자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옆으로 누워 자는 경우가 많았다. 옆으로 누워자면 가위에 눌리는 경우가 없었던 것 같아서 이상하다는 것인데...
왼쪽으로 누워서 몸을 약간 웅크리고 잤다.
겨울이라 이불을 잔뜩 끌어 당겼기에 얼굴의 반은 이불에 덮인 상황.
잠이 들었는데, 너무도 선명하게 무언가가 내 광대뼈 부근을 꾹꾹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이어서 오른쪽 갈비뼈 부근을 무언가가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가위 눌림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새로운 느낌이라 많이 황당했다.
아, 이와 비슷한 시기에 겪은 또 하나는..이 경우와 비슷한 자세로 자고 있었는데, 꽤 거슬리게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윗집이나 아랫집에서 누군가 예의도 없이 새벽에 발망치질을 하나보다 했는데 기다려봐도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 나서 일어나려고 웅크린 몸을 펴는 순간 쿵쿵거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가만 보니 최근에 심장이 유난스럽게 두근거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잠자는 중임에도 심장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웅크리고 있었으니 이 소리가 더 잘들려 그랬나보다 싶기는 하지만 그 때 들었던 소리는 심장소리라 하기엔 너무나 크게 들렸었는데, 이것도 가위 눌림으로 인한 환청이었는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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