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 3편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알지 못할 이유로 지하철에 갇히게 된 네오.
네오를 구하기 위해 메로빈지언을 찾아가는 모피어스와 트리니티.
모피어스 등은 네오를 구해 줄 것을 부탁하지만, 메로빈지언은 그 댓가로 오라클의 눈을 요구한다.
결국 이 거래는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트리니티의 끝장 전술에 이르게 된다.
이 장면에서 메로빈지언은 혼자서 중얼 거린다.
"사랑과 광기는 놀랍도록 닮았다."고
사랑에 관한 세상의 찬사는 너무나 흔하다.
물론 숭고하고 보편적이며 조건이 없는 사랑이 최고의 미덕으로 꼽히지만,
그만큼 어려운 것이며 드물다.
단지, 아주 좁은 범위의 사랑,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남녀의 사랑, 인기 연예인에 대한 팬의 사랑, 반려 동물에 대한 주인의 사랑... 등에서 우리는 그 "숭고한 사랑"의 일면이나마 살짝 느끼는지 모르겠다.
이성의 사랑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매우 본능적인 것이고 이기적이다.
호르몬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놀음이다.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장치이기에, 모든 인간들에게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고, 매우 강력하기까지 하다.
섹스는, 이성간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행위이고, 사랑의 많은 속성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순간적으로는 더 강력한 면이 있어 보인다.
본능적이고, 보편적이고, 강력하고, 이기적이기도 하다.
이런 행위는, 그러나 개별 존재들로 보면, 어느 정도의 차이점을 보이기도 하는데, 다분히 사회 문화적 영향과 결합된 면, 개인적인 컴플렉스와 연관된 면들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행위가 매우 충동적이며 순간적이기에 폭력적인 성향을 다분히 띠고 있게 된다.
요즘에 들불처럼 번지는 미투 운동은, 오랜 역사적 사회적 불평등 하에서 벌어진 일방적인 성폭력에 대한 반발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운동이 남성과 여성, 강자와 약자, 갑과 을 사이의 기울어진 시소를 맞추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불평등에서 기인한 폭력적인 성행위와, 성행위 자체가 가진 폭력성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는 매우 어렵고도 민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섹스가 폭력적이지 않은 경우는, 쌍방이 원하는 바와 그 정도가 일치하고, 실제 행위에서도 쌍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를 지켜야만 하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가지고 있다 생각한다.
만약에 어느 한쪽이 조금만 선을 넘게 되면, 그 순간부터 한쪽은 가해자가 되고 반대쪽은 피해자가 되고, 그 현장은 폭력의 현장이 될 수 있다.
이런 섹스의 폭력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언제든지 "미투"당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문제는, 이런 폭력성을 알고 있다면, 누구도 선뜻 섹스를 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이다.
종족의 보존을 위해서 폭력에 눈 감을 것인가, 폭력이 없는 유토피아를 선택하고 종족이 사라지게 할 것인가.
※ 쓰고 보니 한강씨의 <채식주의자>가 다시 생각난다.
인간의 육식과 그 육식의 이면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폭력성.
생존을 위해 폭력에 눈감고 육식을 할 것인가, 폭력이 없는 유토피아를 위해 육식을 끊고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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