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일 토요일

뜻하지 않은 노숙의 경험 (2)

초여름이라 아침은 비교적 일찍 밝았다.
한 두시간 정도를 누워있었더니 다리의 피로가 조금은 나아진듯도 하고 간간이 지나는 행인의 발소리는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곧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 것이며 그들의 눈치를 무시하거나 피하거나 해야할 것이다.
내게는 다행히도 지갑에 여유가 있으니 PC방에 가서 눈치 받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만약 내가 금전적인 곤란까지 겪고 있었다면 사람들의 눈치를 무시하는 것쯤은 용기 내어 볼만한 덕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 개개인이 겪는 작은 짜증보다는 내가 겪는 피곤함과 불편이 훨씬 크다는 자기 합리화를 펴면서...

PC방에서 몇가지 인터넷 검색을 하고 음악과 동영상을 감사하면서 스마트폰을 충전했다.(이곳은 자리에서는 충전이 되지 않아 카운터에 스마트폰을 맡겨야 했다.)

이젠 날이 완전히 밝았고 사람들의 출근 전쟁이 시작될 즈음에 PC방을 나왔다.
어제는 어두워서 소홀했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다시 한번 어제의 동선을 되짚으며 탐색을 했다.
역시 실패.
머리를 깎은 곳이 문을 열기를 기다리며 업소 근처의 벤치에 앉아 출근하는 사람들과 등교하는 학생들, 쉼 없이 지나가는 승용차들과 버스를 보고 있노라니 한편으로는 우월감도 들면서 한편으로는 패배감도 들었다. (사실 패배감은 아니었다. 이런 출근길의 스트레스가 어떠했는지 나는 아직도 생생이 기억하고 있으며, 직장에서의 생활이 결코 금전적인 것 외에는 어떤 이점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 금전이 아쉬운 것이지 직장이 아쉽지는 않다. 그래서 저렇게 부산을 떠는 사람들이 안쓰럽게 보인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모두가 한참 바쁜 출근 시간에 빈둥거리며 벤치에 앉아 있는 내가 좀 별나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을 즐기고 있었으며, 다리가 아파서 벤치에 앉아 있었던 것이며, 머리 깎는 업소의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길거리가 조금 한산해졌을 때, 내 모습이 한심해 보인 것인지 노파 한분이 내 옆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셨다. 한편으론 자신의 신세 한탄이고, 자식 자랑이며, 과거의 전적(?)이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젊은이(나)가 일없이 앉아 있는 게 불쌍해 보여서 한마디 해 주려고 했다는 식의 뜻을 전하셨다.
한시간여 가르침(?)을 듣고 나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자리를 일어 났다.
이미 업소의 문은 열린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업소에 들어가 확인해 보니, 역시나 열쇠 따위는 본 적이 없으시단다.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내 기억에도 이 머리 깍는 곳에서 열쇠를 꺼낸 기억도 없었으며, 그랬을만한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명확하게 좀 더 비극적이었다.

이젠 열쇠 전문가를 찾아가 문을 열어 주길 바래야 했다.
그리고 자동차의 키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했다.
아마도 금전적으로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할 일들 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난 비용과 효과 사이에서 여러번 갈등하며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어제 검색해 두었던 열쇠 가게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하자 선뜻 쉽게 얘기를 하셨다.
- 가서 확인 해 봐야 열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 쉽게 열 수 있으면 2만원, 조금 까다로우면 3만원, 최악의 경우에는 보조키를 제거해 버리고 문을 개방하는 데에만 5만원 전후에 새로운 보조키를 장착하는 것은 별도
- 자동차 키도 복사가 가능한데, 원본이 있으면 5천원에 가능. 원본이 없으면 5만원정도. (자동차 키는 완전히 구형의 일반적인 금속 열쇠였을 때 이러했다.)

아파트에 도착해서 아파트의 보조키를 본 전문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건 쉽거나 까다로운 게 아니라, 보조키를 강제로 제거해야 하는 것이며 시간도 많이 걸린다고... 아마도 비용은 10여만원이 소요될 듯.

어려웠다.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긴 했다. 복도에 나 있는 유리창을 제거하면 가능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견적은 받아보지 못한지라 전문가에게 설명을 하고 나중에 다시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대신 출장 비용으로 1만원을 지급하고 나중에 혹시라도 일을 맡기면 차감받기로 했다.)


이제 아파트의 창문 개방으로 방향을 바꾸어 보기로 하고 대략적인 창문의 크기와 형태를 파악한 후에 유리 가게에 갈 생각이었다.

살펴보니 복도의 창문은 의외로 허술해서 적절한 도구와 힘만 있으면 개방이 가능할 듯도 보였다. 아파트 관리실에 부탁해서 지렛대를 얻어와 강제로 유리창 샷시째 떼어내 보려했지만 실패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손 하나는 겨우 들어갈 만한 공간을 억지로 확보했고, 여기에 손을 넣고 한참을 이러 저리 움직이는 도중에 갑자기 유리창 샷시가 분리가 되었다.

애초의 생각대로는 아니었지만 결국 유리창은 개방 되었고, 몰래 숨겨 두었던 여분의 열쇠로 아파트 입구도 개방할 수 있었다.


이제 열쇠를 잃어버린 것(집, 자동차,스마트키)과 유리창을 떼어낸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아졌다.

이것 저것 정리들을 하고 집안으로 들어와 간단하게 씼고 나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나를 괴롭혔다.
자동차 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찰청의 유실물 통합 포탈(https://lost112.go.kr/index.do)에서 분실한 날짜와 지역, 분실물 종류를 입력하고 검색을 해 보았다.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인지, 내가 잃어버린 열쇠 꾸러미가 바로 거기에 올라와 있었다.
그곳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하자 담당 형사분이 찾아 갈 장소를 안내해 주셨고, 나는 제대로 씻지도 못한 상태에서 바로 찾아가 열쇠 꾸러미를 다시 찾아 올 수 있었다.

전화로 통화했을 때, 올린지 얼마 안되었다고 말씀하셨고, 올라와 있는 내용에는 내가 전날 방문했던 파출소에서 인계 받은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습득하신 분께 고마워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해서, 형사분이 대신 전화해 보았으나 연락이 되지 않아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전일 습득하신 후에 금일 파출소에 신고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니었다면 내가 직접 파출소에 찾아갔을 때에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아니면 경찰청 사이트에서 검색했을 때 찾을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참 기적과 같이 잃어버린 열쇠 꾸러미를 다시 찾았으며, 이 열쇠 꾸러미를 파출소에 맡겨주신 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열쇠가 다시 제 손에 들어오기까지 도움을 주신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게 그대로 돌아왔으면서, 1박 2일동안 뜻하지 않은 경험을 했고, 뜻밖의 만남도 가졌으며, 쉽지 않은 마음 속의 요동과 갈등도 겪게 된 것이 많은 것을 주었다.


지금 내 무릎이 시큰거리고 허리가 아프다는 사실, 장딴지가 몹시 땡겨서 똑바로 걷기가 힘들다는 사실이 없다면 정말 한여름밤의 꿈이라고 생각해도 좋은 길고도 짧은 모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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