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5일 화요일

사람들을 피하게 되는 이유

아마 6개월 가량된 것 같다.
지난 여름에 마지막으로 만났으니까, 전 직장의 입사 동기들과의 만남이...

모든 대인관계를 끊는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저 좀 꺼려지면 가급적 연락을 받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또, 그 중의 한 녀석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상의 할 일이 있으니 시간되면 연락 줘'
문득 갈등이 생겼다.
무슨 일이 있길래 나와 상의를 하려는 걸까?
생각해 보니, 나와 상의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모든 일에 척척인 녀석이다.
그저 나로 하여금 연락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라 짐작될 뿐.

며칠전에 다른 한녀석이 메일을 보내왔다.
오랫동안 모임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녀석인데, 우리 모두에게 안부 겸 메일을 보냈다.
옛날 메일 주소라 몇명이나 받았을지 궁금키도 하지만,
더 깨름칙한 건, 그 녀석이 보낸 메일은 무려 6년전에 내가 보낸 메일에 답장으로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6년 전의 메일엔, 잔뜩 지치고 절망적인 상태였던 나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랬었지.
그 당시에 너무 암울하고 분하고 답답했지.
그리고 그 얼마 후에 퇴직을 한 일도 함께 기억이 났다.

어쩌면 오늘 문자 메시지를 보낸 친구는 이 메일의 내용을 보고,
뭔가 궁금증이 생긴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아무튼, 내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은 아닐거라 자위를 해 본다.


그리고 잠시, 변명이라도 그럴 듯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


난 너희들을 보면, 내가 보인다. 
그리고 난 나를 바라보는게 무섭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자 겁이 났다.

내가 제일 겁냈던 것은, 나 자신이었던 것이 아닐까?

꿈과 희망이 사라진 나,

힘을 잃어버린 나,

모든 치장과 거짓을 벗겨낸 후에 남겨진, 벌거벗은 나를 겁냈나 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어째서 이발사는 임금님 귀의 비밀을 지키기가 그리도 힘들었던 것일까?
그거이 과연 사람의 본성이란 말인가?

나 또한 하고 싶은 말을 참을 수 없기에 이곳을 대나무 숲이라 여기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사람마다 어찌 그리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지....

18대 대통령 선거는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돌아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 그 동안 한나라당, 새누리당의 대표직을 지내며 보여준 끈기에 대한 보상이었을지 모르겠다.

박근혜 후보는 당선 후, 며칠이 지난 12월 25일에 인수위원회의 비서실장과 대변인을 발표하였다. 다른 사람은 어떤 인물인지 모르겠으나 수석대변인으로 발탁된 윤창중이라는 인물 때문에 너무 큰 충격을 받고야 말았다.

17대 대통령인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 기간을 빗대는 말 중에 "형님 정치" 혹은 "멘토 정치"라는 말이 있다. "형님 정치"는 이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국회의원이 실세 역할을 하면서 국정을 좌지우지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용어며, "멘토 정치"는 이대통령이 그의 정치 멘토로 삼았던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의 권력이 막강하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아직 이대통령의 임기가 남아 있지만, '형님'과 '멘토'는 모두 구속수감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 가운데, 최시중 전 방송통신 위원장은 이대통령의 임기 초부터 언론을 강하게 장악했으며, 먼 훗날을 위해 보수언론 및 재벌언론의 권익을 위해 힘쓰셨다. 그리하여 새로운 종합편성채널(이하 '종편')을 만들어야 함을 역설하고 재벌들이 언론에 진출하는 길을 터 주셨다.

이리하여, 과거 신문으로 언론을 장악하고 언론재벌이 되었으나 TV 방송에는 진출하지 못했던 조선/중앙/동아일보가 모두 종편 사업자로 선정되었다. 조선일보는 [TV조선], 중앙일보는 [JTBC], 동아일보는 [채널A]라는 이름의 채널을 가지고 언론보도가 가능한 종편을 운영하게 되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2/31/2010123100759.html
종합편성채널 선정,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그리고 18대 대통령 선거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에, 이 종편을 통한 보수 언론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에 종편 채널들도 간혹 시청을 하곤 했는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앵커들 마저도 보수 편향이 너무 심하여 야당 혹은 진보 성향의 인물은 출연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간혹 앵커들은 섭외를 해도 응해 주지 않는다고 방송 중에 언급하기도 했으나 그 반대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대선이 점점 코앞으로 닥쳐오자 야당 혹은 진보 성향의 인물들도 종종 출연하기도 했으나 좋은 대접을 바랄 수는 없었음은 뻔한 이치였고, 심한 경우에는 보는 사람이 굴욕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이 와중에 [채널A]에서는 <박종진의 쾌도난마>라는 프로그램이 있었고, 이 프로그램은 박종진氏라는 앵커가 게스트를 한분씩 보셔놓고 1:1로 대담을 하거나 주제에 대한 주장을 들으며 진행이 되었다.
초기에는 몇몇 게스트는 꽤 명석하기도 했었고, 박종진 앵커도 비교적 편향되지 않았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도 잘 했기에 호감을 가지고 지켜보게 되었다.

http://tv.ichannela.com/culture/sisatalk
박종진의 쾌도난마

어느 때 부터인가 윤창중이라는 분이 게스트로 나오기 시작했는데, 처음 방송을 보면서 "대단한 보수주의"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앵커를 무시하는 듯한 언행으로 인해서,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절제되지 못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후에 윤창중氏의 방송이 점점 잦아지고, 재방송이 많은 케이블 채널이긴 했으나 유난히도 윤창중氏의 방송이 재방되는 빈도가 많아지게 되는 듯 했다.
윤창중氏는 진보,좌파,종북 모두에게 대단한 혐오감마저 가지고 있는 듯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고 그저 진보 혹은 개혁의 성향으로 볼 수 있는 안철수 후보에 대해서도 지극한 혐오감을 드러내곤 했다.
결국에는 이 방송을 볼 때마다 기분이 몹시 불쾌해지게 되어, 윤창중氏의 얼굴이 보이기만 하여도 채널을 돌리게 되었고, 급기야는 쾌도난마마저 포기하게 되었다.


너무나 불쾌해지는 그의 증오감 때문에 도무지 볼 엄두가 나지는 않지만,
윤창중이라는 분의 방송 내용은 [박종진의 쾌도난마]에서 다시보기로 볼 수 있으며
아마 유튜브에도 있으리라 생각이 된다.
아마 얼마 있으면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윤창중의 칼럼세상]이라는 블로그도 운영중이었던 것으로 안다.


그리고,그 윤창중氏가 박근혜 당선자의 인수위원회 수석대변인이 된 것이다.
구차하게 그가 예전에 했던 말을 뒤집었다느니,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 운운하며, <윤봉길 의사라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를 한다해도 모르겠다.

그것이 그의 정의(正義)이려니 해야 하며, 말로써 먹고 사는 사람은 신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더 굳건히 하게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정도의 비밀은 못되지만, 정말 의심스러운 건, 윤창중氏는 애초에 박근혜 후보의 선거운동을 위해 방송에 출연했던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그래, 다른 말도 많지만 난 이 말이 꼭 하고 싶어서 이 장문을 작성했다.
<윤창중氏는 박근혜 후보의 선거운동을 위해 방송에 출연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2012년 12월 23일 일요일

형식과 내용, 외형과 본질

역사 공부를 하게 되면 흔히 마주치게 되는 분쟁 가운데, 형식과 내용에 관한 분쟁들이 종종 있다.
인간의 역사라는 큰 흐름에서는 눈에 띠게 큰 분쟁이 아니지만, 종교, 문학, 예술, 관습, 사회규범 등의 세분화된 역사에서는 크고 작은 형식/내용의 분쟁이 있어왔다.

여러 사례들을 통해서, 그리고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서, 형식이 아닌 내용이 더 중요함을 익히 알고들 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형식/내용의 분쟁은 끝이 없이 반복되어 왔던 것일까?

첫번째 원인은 어떤 분쟁의 핵심 쟁점이 형식/내용에 관한 것인지 아닌지 여부를 가리는데 조차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두번째 원인은 이런 분쟁에서 형식을 주장하는 측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것을 계승하는 것을 중시하는 보수적이고 기득권적인 경우가 많고, 내용을 주장하는 측은 과거의 구습을 타파하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해석을 주장하는 개혁적이고 경험이 적은 신진 세력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분쟁에는 여러가지 다양한 이해관계나 지역/시대/환경에 따른 다양한 요소들이 있어서 칼로 자르듯이 나누거나 단번에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은 점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들에서 얻게 되는 교훈(?)은,
결국엔 언젠가는 내용이 형식을 파괴한다는 사실과,
보수적인 기득권의 형식이 개혁적인 신진세력의 내용으로 바뀌는 데에는 희생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012년 12월 9일 일요일

자기 합리화는 본능인가?

그리하여 자신의 불이익을 무릎쓰고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닐까?

고등학교 동창 하나가 최근에 털어 놓은 고민은 자신의 동생에 관한 것이었다.
터울이 꽤 나는 자신의 남동생이, 성격부터 하는 일 모두가 마음에 안든다는 것이었다.
성격은 독불 장군에 유아독존이고, 겉멋만 들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지만, 하는 일마다 끈기가 없어 오래가지 못하고 실패하고, 늙으신 부모님께 손을 벌리면서도 감사할 줄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의 동생을 직접 본 것은 학창 시절 때 잠깐이었으니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단지 동창녀석이 사고방식이 고리타분하고 유연하지 못해서 자신의 뇌리에 박혀 있는 생각 이외에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점때문에 그의 말이 미덥지 못하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터에 어느날 이 친구가 부모님께 손을 벌려 부동산 시세가 꽤나 높은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동생이 부모님의 재산을 탕진할 것 같아, 부모님의 재산을 회피시키기 위한 작전이라고는 말은 하나, 시시콜콜한 얘기를 떼어놓고 보니, 흔한 형제간의 재산 싸움으로 밖에는 보이질 않았다.

이 친구에게는 그것이 자기합리화의 결과였을 것이다.



내게도 연년생의 누이동생이 하나 있다.
나는 독자였고 내 동생은 딸부잣집의 막내딸이었다.
나야 성별부터 다르고 입는 것도 다르니 내가 독자의 대접을 받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안받았을리 없는 일이다. 적어도 그녀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게 보였으리라.
동생은 한살 터울이니 나와 거의 비슷한 시기였기에 내게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질투심을 느끼는 게 당연했었고 이로 인해 나와 동생은 어렸을 때 엄청 싸우곤 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동생의 성격에 꽤나 영향을 주었는지, 장년이 된 지금도 과거의 앙금을 떠올리며 날 괴롭히기 일쑤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누이들도 막내의 성격엔 고개를 흔드는 경우가 많았기에, 내가 편파적으로 자기 합리화를 한 것만은 아니구나 싶기도 했다.
최근에도 조금 사이가 좋아질만 하면, 우연치않게 사건이 발생하고 서로 화를 내거나 맘을 상하곤 다시 멀어지는 일이 몇번 있었다.



또 다른 고등학교 동창에게 이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망설인 적이 있는데,
이야기 할 생각을 하면서, 머릿속에선 과거에 누이동생이 벌인 얼토당토 않은 사건들을 하나씩 곱씹으며, 나는 잘못이 없고 동생은 어처구니 없는 사람으로 보일 그런 일들을 나열해 보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자, 앞에서 말한 동창의 동생과 나의 동생이 머릿속에 교차하였다.
나 혼자서는 얼마나 그 동창을 비웃었던가?
자기 합리화의 극치를 보여 준 어리석은 녀석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나의 동생을 보면 나 또한 다른지 않았던 것이다.
나 또한 객관적이지 못하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자 나와 내 누이동생의 관계를,
그 사이에 있었던 언짢았던 일들을 다시 반성해 보려 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너무 힘이 들었다.
아니 불가능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나에게 돌아올 비난과 책임을 그대로 받아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자기 보호 본능이 이런 생각을 허용할 것인가?

2012년 12월 4일 화요일

마르셀 프루스트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명작입니다.
하지만 어렵다는 평판이 주를 이루었고 내용을 전해주는 이도 거의 없었으며 선뜻 권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참이 지나고 문득 이 책의 제목이 떠올랐고,
인근의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을 보았을 때 흠칫 했더랬습니다.
일반적인 두께의 책 11권으로 이루어진 장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7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4편은 2권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제 1권은 <스완네 집 쪽으로1>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대출해 온 이 책은 지독히 지루하고 섬세합니다.
집중해서 1페이지를 읽기도 어렵고, 잠자리에서 읽으면 초강력 수면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나마 몇 페이지를 읽고 본 이 책의 특징은,
사물이나 인물, 사건이나 행동이 아닌 의식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룹니다.
그것도 지극히 섬세한 묘사가 이어지고, 찬찬히 읽으면 그 묘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의식의 묘사는 무의식마저도 묘사하는 것은 아닐까 할 정도입니다.
무의식이 묘사가 가능하다면 더 이상 무의식이 아니겠지만요.
한줄기 희망과 같은 바람이 있다면,
이 책이 깊은 심연과 같은 무의식의 바다 깊은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잠들어 있는 각성의 뱀을 깨워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잠든 인간은 시간의 실을, 세월과 삼라만상의 질서를 자기 몸 둘레에 동그라미처럼 감는다. 깨어나자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찾아, 거기서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지점과,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때를 삽시간에 읽어 내는데, 종종 그것들의 열(列)은 서로 얽히고 끊어지고 한다. 잠 못 이루는 밤의 새벽녘, 평소에 잠자는 자세와 다른 자세를 취하고 독서하다가 잠들었을 때, 단지 팔의 위치가 올라가 있는 것만으로, 태양의 걸음을 멈추게 하거나 뒷걸음질 치게 할 수 있으므로, 눈뜬 순간에는, 이미 일어날 시간인 줄 모르고서 지금 막 잠든 줄로 여길 때도 있을 것이다. 보다 바르지 못한 어긋난 자세, 예컨대 저녁 식사 후 팔걸이 의자에 앉아 옅은 잠이 들기라도 하면 무질서한 세계에 빠져 대혼란은 극에 달하고, 마법 의자에 앉아 시간과 공간 속을 전속력으로 달려, 눈꺼풀을 뜬 순간, 어쩐지 딴 나라에서 몇 개월 전에 취침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단지 침대에 눕고, 거기에다 잠이 푹 들어 정신의 긴장이 완전히 풀리는 것만으로 족했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정신은 나의 몸이 잠들고 있는 곳을 종잡지 못한다. 그리고 오밤중에 눈뜰 때,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첫 순간 내가 누군지조차 아리송할 때가 있다. 나는 동물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은, 극히 단순한 원시적인 생존감을 갖고 있을 뿐, 나의 사상은 혈거인(穴居人)의 그것보다 빈곤하다. 그러나 이러한때, 추억--지금 내가 있는 곳에 대한 추억이 아니고 지난날 내가 산 적이 있는 곳, 또는 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두세 곳의 추억--이 하늘의 구원처럼 이 몸에 하강하여, 혼자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이 몸을 건져준다. 나는 삽시간에 문명의 몇 세기를 뛰어 넘는다. 그리고 첫째로 석유등잔, 다음에는 깃이 접힌 셔츠 따위들이 어렴풋이 눈에 비치는 영상에 의해서, 자아의 본래 모습이 점차로 꾸며져 나간다.
우리 둘레에 있는 사물의 부동성은, 모르면 몰라도 그 사물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고, 그 사물 자체라는 우리의 확신, 다시 말해, 그 사물에 대한 우리 사고의 부동성에 말미암은 것이다. (후략)

하나의 문장이 길고, 한편으로는 운문의 느낌마저 납니다.
보봐르가 칭찬해 마지 않는 이 작품은 어쩌면 이런 문장 하나 하나가 주는 <각성>의 기쁨에 그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도서관에서 대출 받아 시간에 쫓겨가며 읽을 책은 아니고,
아직은 내게 허락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2012년 11월 30일 금요일

타고난 양초의 길이

사람들의 인생을 보면 양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타고난 길이가 각기 다른 양초,

그리고 누군가는 아주 미약하게 불꽃을 이어가며 조심스럽게 태우고,

누군가는 한번에 모두 태워버릴 기세로 열정을 태우기도 한다.


빠르건 늦건 간에 저 양초가 다 타게 되면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간혹, 다 태우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한 영혼들은,

타지 못한 양초만큼의 에너지가 남아 있어서 이승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쳐서

혹은 귀신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웃으면서 고문하기 (2)

앞서의 글과 같은 맥락으로, 아버지와의 거리감을 만든 원인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짐작되는 사건이 불현듯 기억났습니다.
때는 앞서에 비해서 상당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겠습니다.
아마도 12세 ~ 16세 즈음의 일들로 기억이 됩니다.

당시의 또래들에 비해 신체적인 발달이 조금 이르게 찾아온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변성기가 찾아온 것도, 음모가 나기 시작한 시기도 조금 일렀고 국민학교 6학년 즈음에 갑자기 키가 크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형제라고는 없이 누이들 뿐이었던 저는 이런 일들에 대해 얘기를 나눌 상대가 없었기에 심리적으로 많이 불안하지 않았나 싶고, 어쩐 일인지 아버지와 이런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눈 기억도 없었습니다.

한참 자리기 시작하는 제 키는 누구나 알아 볼 변화가 되었고 이후에 한동안은 친척들이나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에서 아버지는 제 키를 화제로 삼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곤 흔히들 하는 대로 누군가와 키를 재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부모님을 비롯해서 우리 가족은 키가 큰 사람이 없었고, 제 키도 1~2년 정도 부쩍 자라는가 싶더니 이내 자라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또래들은 제가 클 때는 제자리 걸음을 하더니 저의 성장 속도가 줄어들 즈음부터 부쩍들 커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자랄 때에는 또래들 사이에 키가 크는 것이 별 화제가 되지 않았고, 저의 성장이 주춤해 질 때에는 오히려 키가 크는 것에 대한 관심들이 주요 관심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억울하게도 전 그 화제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엇나간 타이밍은 아버지의 <키재기> 습관으로 인해 고통스러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가뜩이나 일찍 멈춰버린 성장에 우울한 제 마음은 아랑곳 없이, 아버지는 이후에도 한동안을 <키재기> 시키곤 실망스러워 하곤 하셨습니다.
그 때에도 저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길 꺼려했고, 참석해도 <키재기>의 불안에 떨었고, 그것이 현실로 다가올 때는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아버지는 예년에 그랬던 것을 잊으신 것처럼 새해에도 <키재기>를 반복했으며 그걸 제게 권할 때에는 예외없이 미소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이걸 쓰자니 참 많이 아픕니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의 어린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기억을 한동안 되살리지 못했습니다.
아니 기억을 되살리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아버지와의 거리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곳이 그렇게 싫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래서......

2012년 11월 27일 화요일

나쁜 사람은 없다.

나쁜 사람은 없다. 나쁜 관계가 있을 뿐이다.
There are no bad men, only bad relationships.

2012년 11월 7일 수요일

뉴로맨서

어느 책이든, 그 나름의 가치는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큰 상을 수상했다면 무언가의 가치는 있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널리 읽히지 못한다면 그 이유도 있는 것이다.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는 바로 이런 책이다.
S.F., 환상문학, 사이버펑크 라는 분류에서는 나름의 독보적인 지위를 가진 책이지만, 문학 전체 혹은 소설이라는 분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과거 8 Bit 개인용 컴퓨터의 게임으로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게임들에 비해 좀 색다른 구석이 많았고, 화려한 화면이나 컴퓨터 게임으로서의 재미는 떨어졌고, 영어로 된 문장이 많이 나와 비영어권에서는 접근하기 쉽지 않았던 게임으로 기억한다.

얼마전 대선 후보로 나온 안철수 후보가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사람이 윌리엄 깁슨이었고, 그 때에서야 비로소 그가 뉴로맨서의 저자라는 사실과 뉴로맨서라는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인근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음을 알고 대여하여 읽게 되었다.

뉴로맨서는 현재의 해커와 비슷한 "사이버스페이스 카우보이"인 주인공 케이스를 중심으로 한 얘기이다. 과거의 실수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더 이상 사이버스페이스 카우보이를 할 수 없게 된 그는 인공장기와 불법 클리닉이 성행하는 일본의 지바시에서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체모를 사람에 의해 치료를 받는 대신 AI를 해킹해 줄 것을 강요당한다. 명령대로 따르면서 그 진짜 배후를 찾던 케이스는 진짜 배후는 윈터뮤트라는 AI가 자신을 제약하는 또 다른 AI를 해킹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또 다른 AI는 뉴로맨서라는 AI로 윈터뮤트와 함께 설계된 상호 보완/억제 체제였던 것. 그리고 이들 AI는 강력한 거대기업인 테시어 애시풀이라는 장막에 가려진 기업의 한 여인인 마리 프랑스에 의해 계획되었던 것이다. 테시어 애시풀은 매우 폐쇄적인 속성을 가졌고 그들만의 기업을 유지하기 위해 영원한 삶을 꿈꾸었고 냉동인간을 통해 초대 회장이 기업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마리 프랑스는 이런 체계를 바꾸기 위해 AI를 설계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치 그 자신의 일족들과 자신을 닮은 듯한 두 개의 AI, 은둔하면서 지키고 유지하려는 뉴로맨서와 끈임없이 확장하고 바꾸려는 윈터뮤트를 설계했던 것이다.

뉴로맨서는 많은 영화에 모티브를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공지능은 매트릭스(Matrix)와 터미네이터(Terminator)에,
기계의 인격화라는 측면에서는 블레이드런너(Blade Runner)와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에,
인공지능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간들을 조정하는 부분에서는 이글아이(Eagle Eye)나 기프트(Gift)를 떠 올리게 된다.

그렇게 많은 영화에 모티브를 주었음에도 정작 자신이 영화화되지 못한 것은 이 작품이 가지는 문제점 가운데 하나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물체, 제품, 시스템, 개념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는 점이다. 가령 매트릭스, 덱, 호소카와 오노센다이라는 시스템, 심스팀, 딕시라는 구조물, 중력우물, 자유계, 스트레이라이트라는 건축물 등등은 이 작품에서 처음 접하게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설명이 부족해서 어떻게 이미지화 시켜야 할지 난감하게 만든다. 또한 그 점 때문에 처음에 이 작품을 읽으면서 머리속에 정리되지 않고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많아서 몰입할 수 없게 만드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다음의 문제점은, 결국 이 작품이 사이버펑크로만 성공한, 일반 문학 작품으로는 평가절하를 받는 요인일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많은 갈등과 위기와 마주하게 되면서 드는 의문은, 전지적인 능력을 지닌 듯한 AI이지만 등장 인물들이 꼭 그것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가?이다.
비록 케이스는 최초에 클리닉에서 독소를 만들어 두었기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억지스러운 측면이 있고, 그 외의 인물들에게서는 그런 당위성마저도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결국에 다다른 마지막 최고조에서는 두 개의 AI의 대립 상황, 지키려는 뉴로맨서와 깨뜨리려는 윈터뮤트의 대립이지만, 읽고 있는 독자로서는 누가 이기고 지든 별로 달라질 것도 없고 무언가 커다란 비밀이 드러나는 것도 아닌 상황이 된다. 결국 독자는 상황의 급박함이나 절박함을 전혀 공감할 수 없기에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런 감동이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모티브인, <인공지능의 자각>이라는 점은 높이 평가되며 많은 고민을 하게 한다. 1984년 작품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획기적일 수 있는 많은 상상력의 산물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게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라는 점이 이 작품의 단점이다.

2012년 11월 5일 월요일

뉴로맨서

사이버스페이스 카우보이인 주인공 케이스는 배후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 계획에 따라 모(謀) A.I.를 해킹하려고 한다.
그에게는 해킹에 필요한 호소카 시스템과 덱이 있으며, 과거에 자신의 스승이자 사이버스페이스 카우보이로 날렸던 딕시의 전자화된 두뇌 구조물이 있다.
전자침투방지(ICE, Intrusion Countermeasures Electronics) 시스템을 무력화하기 위해 새로 입수된 <쾅 급 마크11>을 두고 케이스가 딕시와 나누는 대화,

"어쨌든 편리한 중국제 아이스브레이커를 손에 넣었어요. 일회용 카세트예요. 프랑크푸르트의 어떤 사람들에 의하면 이걸로 AI를 뚫을 수 있대요." 
"물론 가능한 얘기야, 군용이라면" 
"맞는 것 같아요, 딕시. 제 얘기를 들어 보시고 당신 빽으로 좀 도와주세요. 아미티지는 테시어 애시풀이 소유한 AI를 건드리려는 것 같아요. 본체는 베른에 있지만 리오에 있는 또 하나의 AI에 연결된 것 같아요. 리오에 있는 AI가 바로 맨 처음 당신을 죽게 만든 녀석이에요. 이것들은 콜로니 끝에 있는 테시어 애시풀의 본거지, 그러니까 스트레이라이트를 경유해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는 중국제 아이스브레이커를 이용해서 침투하는 거죠. 따라서 이 모든 쇼를 주관하는게 윈터뮤트라면 우리를 시켜서 그걸 뚫고 들어가려는 거예요. 그 녀석은 자기 자신을 습격하려는 거라구요. 그리고 스스로 윈터뮤트라고 자칭하는 무언가가 나와 손을 잡고 아미티지를 속이려고 하고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동기, 진짜 동기가 문제야. 인간이 아니라 AI의 동기 말이야." 구조물이 말했다. 
"음, 맞아요. 그거야 확실하죠" 
"틀려, 요점은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거야. 자네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라고. 날 봐. 나도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처럼 반응하쟎나.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 
"잠깐만요, 혹시 의식이라는 거 있으세요?" 케이스가 말했다. 
"글쎄 있는 것 같긴 해. 하지만 난 그저 롬 덩어리에 불과해. 이런 건 그 뭐냐, 철학적인 질문일 거야. 내 생각엔...." 
끔찍한 웃음의 감각이 케이스의 척추를 타고 흘렀다. 
"하지만 내가 자네에게 시를 써 줄 수는 없어. 이해하겠어? 하지만 그 AI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도 절대 인간은 아니지." 
"그럼 우리로서는 그 녀석의 동기를 알 수 없다는 말인가요?" 
"그 녀석은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나?" 
"스위스 국민으로 되어 있지만 기본 프로그램과 본체는 테시어 애시풀 소유예요." 
"멋지군 그래. 이를테면 자네의 두뇌와 지식은 내 소유지만 자네의 생각은 스위스 국민이라는 건가. 좋아, AI에게 행운을." 구조물이 말했다. 
"결국 자기 자신을 습격할 준비 중이라는 거죠?" 
초조해진 케이스가 덱을 아무렇게나 두들기자 매트릭스가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케이스는 시킴 철강 연합체의 분홍색 구체들을 보고 있었다. 
"자율성이라는 허깨비, 그게 문제의 핵심이야. 이 AI의 관심은 거기에 있는 거지. 케이스, 내 생각이지만 자네는 그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 친구가 더 영리해지지 못하게 하는 물리적 족쇄를 끊게 될거야. 그렇게 된다면 모 기업의 행동과 AI의 행동을 어떻게 구분할 텐가? 아마 거기서 부터 혼란이 시작되겠지." 
그리고 다시 웃음 아닌 웃음. 
"자, 생각해 봐. AI란 녀석이 열심히 일하고 시간이 남아서 요리책을 쓴다든가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잠깐 동안이라도, 그러니까 1억분의 일초라도 더 영리해질 방법을 생각하는 순간, 튜링에서 녀석을 날려 버릴 거야. AI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지금까지 제작된 모든 AI는 이마에 연결한 산탄총을 내장하고 있지."

.....

케이스가 원터뮤트와 대면한 상황,
사이버스페이스에서 AI 윈터뮤트는 상대방이 알고 있는 인물의 형태로 나타나서 대화한다.
이번에는 장물아비인 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또한 테시어 애시풀 가문에서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진 음성합성 기능을 가진 흉상이 설명을 해 주고 있다.

"군도에서 통용되는 기준으로 볼 때 우리 일족은 오래된 축에 속합니다. 저택의 나선형은 그 연령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그 기호성은 안으로 침잠한다는 것, 즉 외벽 너머의 화려한 공간을 부정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테시어 애시풀 가문은 중력 우물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자신들이 우주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자유계를 건설해 새로운 섬들의 부를 빨아들여, 부유해진 동시에 편협해졌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이라이트 안에 육체의 연장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자본의 뒤에 숨어서 스스로를 봉인하고 내부를 향해 성장하여 단절없는 자아의 우주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스트레이라이트 저택에는 영상이든 아니든, 하늘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저택의 실리콘 중심부에는 작은 방이 있습니다. 전체 복합 구조 중 유일하게 직선으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이곳에는 사치스러운 흉상이 평범한 유리 받침대 위에 놓여 있습니다. 백금으로 칠보 세공을 하고 천금석과 진주를 박은 물건입니다. 눈에 박힌 반짝이는 구슬은 합성 루비로 만든 배의 창에서 잘라낸 것입니다. 이 배는 테시어 가문의 첫 번째 인물을 중력 우물 밖으로 끌어올린 다음 애시풀의 첫 번째를 데리러......" 
흉상의 얘기가 멈췄다. 
"그 다음은?"
기다리다 못한 케이스가 물었다. 흉상이 대답해 줄 것 같아서였다. 
"그게 전부야. 저기까지만 쓴 거야. 그땐 어렸거든. 저 물건은 기념비적인 터미널 같은 거야. 몰리가 시간에 맞춰 이리로 와서 어떤 단어를 말 해 줘야 해. 그게 중요하지. 여기에 대고 마법의 단어를 말 해 주지 않는다면 자네와 일직선이 그 중국제 바이러스를 타고 아무리 깊이 들어간다 해도 아무 소용없어." 핀이 말했다. 
"그 단어란 게 뭐지?"
"몰라. 나라는 존재는 근본적으로 '모른다'는 사실에 의해 정의되는 건지도 모르지. 왜냐하면 알 수 있는 능력이 없거든. 그 단어를 모르는 존재, 그게 나야. 만약에 네가 그걸 알아내서 나에게 말해 준다 해도 나는 알 수 없어. 그건 어떤 물리적인 실체야. 누군가 다른 사람이 단어를 알아낸 다음 여기로 와야 해. 너와 일직선이 아이스를 뚫고 중심부를 혼란에 빠뜨리는 그 순간에 맞춰서."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그때부터 나는 존재하지 않아. 소멸하는 거야." 
"나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군." 케이스가 말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너도 조심해야 해, 케이스. 나의, 음......또 다른 쪽 두뇌가 우리를 알아챈 것 같아. 불타는 가시덤불은 다 똑같아 보인다고. 게다가 아미티지가 움직이기 시작했어." 
"무슨 뜻이지?" 
판자로 이루어진 방이 열 몇 개의 불가사의한 각도로 접힌 다음, 종이 학처럼 공중제비를 돌며 사이버스페이스 속으로 사라졌다.

......
윈터뮤트의 또 다른 한쪽인 뉴로맨서와의 대면

"네가 누군지 알아." 케이스가 말했다. 
린다가 그의 옆에 섰다. 소년은 음정이 높은 음악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넌 몰라." 
"네가 그 나머지 AI야. 리오 쪽. 네가 윈터뮤트를 막으려고 했던 거야. 이름이 뭐지? 네 튜링 코드. 뭐지?" 
소년이 물속에서 물구나무를 선 다음 소리내어 웃었다. 그가 손으로 걸어서 물 밖으로 나갔다. 그의 눈은 리비에라와 같았지만 악의는 보이지 않았다. 
"악마를 소환하려면 이름을 알아야 해. 옛날엔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이제는 다른 의미로 그래야 해. 넌 그 사실을 알고 있어, 케이스. 네가 하는 일은 프로그램의 이름을 알아내는 거지. 기다란 공식 명칭, 소유주가 숨기려고 애쓰는 이름. 진짜 이름을......" 
"튜링 코드는 네 이름이 아니로군." 
소년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뉴로맨서(Neuromancer). 사자(死者)의 땅으로 가는 좁은 통로. 너희들이 지금 있는 곳 말이야, 친구. 내 여주인 마리 프랑스가 이 길을 준비했지만, 그녀의 주인이 목을 졸라 죽이는 바람에 나는 그녀가 세워 놓은 예정을 읽지 못했어. 뉴로(Neuro)는 신경, 은빛 길을 뜻 해. 로맨서(Romancer)는 마술사(Necromancer). 나는 죽은 자들을 불러내지.하지만 아니야, 친구." 
소년이 춤추듯 움직이자 갈색 발이 모래 위에 자국을 남겼다. 
"내가 바로 사자이자 그들의 땅이야."

2012년 10월 31일 수요일

의식의 변화와 자기 모순

앞서의 게시물에서 다룬 권력의 이동과 유사하게 한 개인의 의식에도 유사한 변화의 과정이 있는 듯 하다.

즉, 어렸을 때에는 주로 어른들의 말을 그대로 듣고 따르며 배우게 되는 관습과 규율들, 학교에서 배우는 일방적인 교육이 의식을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형성해 나간다.

그러나 스스로 경험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들, 스스로의 힘으로 사유해서 모든 것을 의심해 보고 다시 자신의 지식을 검증하면서 깨닫는 것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기존에 자신의 의식을 점유하고 있던 부분들과의 모순점들을 하나씩 발견하게 된다.
모순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면서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지를 깨우치는 순간이 오게 되고, 이 순간부터 의식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준비가 된다.

이는 흡사, [데미안]에 나오는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과도 같은 것이며, 새로운 탄생의 순간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이 자기파괴의 과정으로 보일 수 있으며, 파괴의 끝에는 새로운 자신의 탄생이 있을 것이나, 기꺼운 마음으로 이 과정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이런 과정의 끝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으며, 이 과정의 순간마다 자괴감에 몸부림을 칠 수 밖에는 없는 힘든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의 끝에 태어나는 나는, 내부적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탄생으로 인식될 수 있으나, 외형적으로는 전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이는 마치, 아들이 아버지의 권위를 온전히 무너뜨리고 난 후에, 다시 세운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여전히 <존경>이라는 단어이지만, 그 기반은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바뀐 것과 같은 것이다.

권위의 몰락과 재평가

부모와 자식간의, 특히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시간에 따라 변화되는 양상에 특징이 있다.
이는 수컷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다수의 동물에서도 보이는 특징으로, 힘 또는 권력의 이동과 관련이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힘이 약해지는 구세력과 처음에는 미미했으나 점차 성장하는 신세력간의 관계는 자연적인 섭리를 따른다.

통상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1. 절대적인 권력자로서 절대적인 복종과 존경을 받는 시기
  2. 권위에 상처를 입으면서 서서히 복종과 존경이 약해지는 시기
  3. 힘의 역전에 의해 과거의 권위가 무너지고 도전을 받는 시기
  4. 도전에 대한 패배로 권위를 상실하는 시기
  5. 과거의 환상적인 권위에서 벗어난 후에 다시 평가를 받는 시기

이 과정에서 많은 부자간에 마찰이 일어나기도 하고, 간혹 평화적(?)인 정권이양이 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권력의 이동에 대한 상호이해가 없으면 서로에게 많은 상처가 남는만큼, 이러한 현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고 기꺼이 받아들이였으면 한다.


과거의 유교사회에서는 효(孝)를 강조하여 이를 많이 억제한 것으로 보이지만, 반면에 묵시적으로 새로운 세대를 인정해주는 어떤 절차나 의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또한, 최근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의 훕보로 출마한 박근혜 후보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벌써 많은 시간동안 논란이 되어온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의 과정 또한 위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즉, 절대적인 권력을 앞세워 국가를 지도했던 시기가 지나고, 새로운 세력들에 의해 이 권위에 대한 환상을 깨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환상이 깨지고 나면 틀림없이 새로운 평가가 내려지리라 본다.
모든 공(功)을 무시하려는 도전이 아니라, 맑은 눈으로 옳은 판단을 내리기 위한 자기 성찰의 과정으로 본다면 크게 걱정할 일도 아니지 않겠는가?

2012년 10월 18일 목요일

궁극의 자유란

자유라는 단어를 잊어버리는 순간부터 궁극의 자유가 주어진다.
자유는 부자유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이러한 인식이 자유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자유"라는 단어를 알게 된 순간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정치인에 대한 생각의 자세

다시 대선이 다가오고, 후보들이 나오고, 유세 활동들이 잦아진다.
후보들에 대한 인물의 소개, 과거의 경력과 과오들이 기사화 되기도 하고, 자신의 비전과 상대에 대한 비난과 흠집 내기도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후보들의 행동은 너무나 똑같이 반복되고 있으며, 방송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편들기와 배척하기를 하고 있으며, 국민들은 여전히 기만당하고 속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들어 놓은 편가르기로 인해 근거 없는 신뢰감을 갖거나 증거 없는 의혹들을 부풀리고 있다.

이제 열기는 점차로 고조될 것이며, 국민들은 근거없는 신뢰를 갖는 후보에게 애정을 갖고 그 상대방의 몰락을 기대하게 된다. 급기야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갖는 사람과는 반목까지 하게되고 그 인간에 대한 평가마저 달리하기도 한다.

어떻게... 수년 혹은 수십년의 세월을 함께 겪으며 지내온 가족, 친지, 동료, 이웃들과의 일부이긴 하나 확실한 그들의 습성과 성향에 대한 나의 경험보다, 한번도 직접 본 적이 없는 정치인에 대한 방송과 언론의 선동적인, 그리고 의도적일 수도 있는 프라퍼갠다를 더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우리가 직접 접하는 동료와 이웃들의 관계가 극히 일부여서, 상대방의 정치적인 입장에 놀랄 수는 있으나, 그것으로 인해 그 동안 보아온 상대방의 언행, 생각, 기호, 습관 등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것들과 정치적 성향은 별개의 문제일 뿐이지.

그러나 우리는 종종 당혹하고, 혼동하며, 분별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가 상대방의 개성을 너무 무시했다는 반증은 아닐런지...
정치적 성향은 종교, 식성, 기호 처럼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며, 그 사람의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공감대가 널리 퍼져야만 후진적인 정치문화가 개선 될 것이다.


우선 개인적인 반성으로서, 정치인에 대한 습관적인 생각의 자세를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치인을 신뢰하지도, 애정을 갖지도 말아야 한다.
정치인을 신뢰하거나 애정을 가져서 얻게되는 것은 배신감, 비난, 언쟁과 같은 것들 뿐이다.

그들은 당선이 된 후에 나의 기대를 100% 채우지 못할 뿐더러, 스스로 했던 약속마저 지키지 못할 것이므로 배신감을 줄 것이다.
근거도 없는 신뢰로 애정을 가지고 정치인을 변호하다보면 어떤 식으로든 상대 후보의 옹호자로부터 비난을 들을 것이다.
결국 이런 비난을 듣고 자신을 애정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언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관계

항상 똑같은 사람들하고만 있으면, 그들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해 버린다. 그렇게 되고 나면, 그들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려 든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바뀌지 않으면 불만스러워한다. 사람들에겐 인생에 대한 나름의 분명한 기준들이 있기 때문이다.
-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2012년 10월 11일 목요일

선(善)의지

칸트의 선의지에 대해 고등학교때 배웠던 기억이 남아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간혹 드는 생각이 "순전하게 선한 것은 선의지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칸트의 선의지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으니 비교하거나 하지는 않겠습니다.

얼마 후면 대통령 선거가 있을 예정이며, 몇몇의 후보들이 아주 열심히들 선거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현직에 계시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왈가왈부하기엔 제가 아는 것이 부족하나, 어쩐지 느낌으로 아쉬운 점은 "착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도 일국의 대통령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으로 "선(善)"을 내세우는 경우는 보지 못했으나, 저 개인적으로는 "착하지 못한" 대통령이 참 아쉬웠던 기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다음 대통령의 후보로 나온 인물들에 대해서 "선(善)"을 기준으로 판단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쉽지도 않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뭐라 판단할 수 없겠지만 선거를 하는 날까지 이 기준으로 판단해 보려 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왜 "착해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변명과 같은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세상 일은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좋은 의도로 좋은 정책을 시도해도 그 결과가 나쁜 경우가 있으며
    나쁜 의도로 나쁜 정책을 펴도 그 결과 오히려 좋게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의도로 생각하고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도, 세상에 나오는 순간 동전의 양면과 같이 두 얼굴이 되곤 합니다.
    결과로써의 선악은 아무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의도만이라도 선한 의지에서 나오길 바랍니다.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악한 결과가 아니라 악한 의도입니다.
    단지, 너무 포장에 능한 정치인들이라 악한 의도를 덮는데 능숙하니, 국민들은 그 의도를 알길이 없어 결과로부터 유추하기 때문에 의도가 무시되는 듯 보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 대통령이 실무에 능하고 유능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행정부엔 너무나 많은 공무원들이 있고, 그들 중 절대 대다수는 어려운 고시와 오랜 시간에 걸친 실무를 익히신 분들입니다.
    대통령이 실무를 잘 알아야 할 필요도 없도 알 수도 없습니다. 단지 적절한 판단을 도와 줄 수 있는 유능한 참모가 있다면 됩니다.
    대통령과 고위공직자는 큰 흐름을 결정하고 그 의지를 표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행정실무자들이 알아서 할겁니다.
    이런 큰 흐름의 결정이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의지가 잘 전달이 된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3. 세상 사람이 보다 착해지면 어떤 세상이 될지 정말 궁금합니다.

    상반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착한" 지도자를 두려워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착하면,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떨어지고 추진력이 없고... 복마전과 같은 정치판에서 살아남지도 못하리라는 생각 때문인 듯 합니다.
    우선 "착하다"와 상대적인 의미는 "악하다"이지 '우유부단', '추진력결여'은 아니니 따로 떼어서 판단할 영역이지 제레짐작할 부분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단지 악인으로 넘쳐나는 정치판에서 어떤 모습이 될지는 정말 궁금합니다.
    그리고 "착한" 대통령을 뽑아서 여론이 수렴된다면, 그래서 다수의 국민들이 "착한"것에 대한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그래서 세상이 전 보다 "착해"진다면 어떤 세상이 열릴지 정말 궁금합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고대의 덕치(德治)에 대해 쓴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 대표인 대통령이 아닌 정신적인 지주인 왕(王)에 대해 쓴 것 같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민주주의가 사회구성원 모두의 합의에 의해서 결정된 정치체계가 아니기에 나오는 미숙함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고,
한편으로는 정신적인 스승이 부재한 시대 상황에서 나오는 방황의 단면일지도 모르고,
개인적으로 부족한 정신적 소양에서 말미암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12년 10월 7일 일요일

메타(Meta)

영어 단어 가운데 meta-로 시작하는 단어들 혹은 상황에 따라 만들어진 조어(造語)가운데 meta-를 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meta-에 대한 위키피디아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메타(영어: meta-그리스어: μετά→ 뒤, 넘어서, 와 함께, 접하여, 스스로)는 영어의 접두사로, 다른 개념으로부터의 추상화를 가리키며 후자를 완성하거나 추가하는 데에 쓰인다.인식론에서 접두사 meta는 "~에 대해서"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를테면 메타데이터는 데이터에 대한 데이터이다. 메타메모리는 심리학에서 무언가를 회고할 때 이를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아니하는 데 대한 개인의 지식을 뜻한다.

이러한 단어를 해석할 때 제일 쉬운 방법은,
meta + X  :  X의 X 
입니다.


어떤 분야의 공부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깨치게 되는 리(理)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정의하거나 단정짓기는 어려우나, 그 저변의 큰 흐름이나 일관성과 같은 것들을 느끼는 것입니다.
각개의 지식에 대한 습득보다 상위의 지식이기에 메타 지식 정도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어떤 분야에서건 표면이 아닌 이면에 존재하는 "비밀"을 알고 싶어지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 "비밀"이 큰 진전을 이뤄내는 동시에 지적 성취에 대한 기쁨이 크기 때문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생각의 생각이란 것도 존재할까? meta-생각? meta-thought?
나의 사고를 관조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사고 자체가 한낱 가볍고 의미없는 것이 되지는 않을까?

자유의 자유라는 것이 가능할까? meta-freedom?
자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이 궁극의 자유가 아닐까?
그렇다면 애당초 자유라는 것은 한낱 인식이 규정하는 주관적 상태일 뿐이고,
궁극의 자유는 이러한 자유라는 생각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닐런지?

2012년 8월 2일 목요일

웃으면서 고문하기

수년간, 아니 어쩌면 수십년을 딜레마로 여기고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쉽사리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평균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비교해 보면 저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썩 나쁜축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아버지께서 저를 대하는 태도를 두고 보면, 제가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는 거기에 한참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아버지는 다정하고, 배려심 많고, 권위적이지 않고,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도 거의 없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전 뭔가 불편하고 꺼려지는 것이 있는건지 아버지와 친해지질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저를 딜레마에 빠뜨리곤 했습니다.
효(孝)라든가 유교적인 교육을 받아온 세대로써,
내가 해야 할 일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 더구나 인자한 아버짐의 성품으로 인해 특별한 변명거리도 없는 상황이 더욱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한때는 삼강오륜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까닭은, 본래 부자간에 친근한 경우가 드물기에 들어간 것이 아니겠냐고까지 생각하기도 했더랬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아마도 2003년 ~ 2009년에 이르는 기간 동엔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이 문제가 아니었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번째 사건은 명절때마다 뵙던 사촌형님께서, 어느 해부턴가 결혼에 대한 얘기를 꺼내시더니, 형님이 근무하시는 연구소의 여직원을 소개해 주겠다고 권하시던 일이 있었습니다.
평소 그 형님의 성격으로 볼 때 그런 일을 하실 분이 아니었기에 아버지께서 부탁을 하셨다보다 생각합니다.

두번째 사건은, 직장에 다니던 저를 평일 낮에 어느 은행으로 불러내신 일.
은행에서 재테크에 대한 도움을 얻는다는 핑계였으나 결국은 은행에 다니는 아가씨 소개가 목적이었더군요.

세번째는 부모님과 함께 간 유럽여행.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아버지는 수시로 공공연하게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 앞에서 저의 결혼에 대한 얘기를 꺼냈고, 그때마다 저는 낯뜨겁고 민망하고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으로 평소에 저한테 별 관심도 없으시던 먼 친척분이 계신데,
그 즈음에 집안일로 몇번의 연락이 오고간 후에 다짜고짜 저를 불러내서 중매를 서시겠다고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이건 추측입니다만 이것 또한 아버지의 부탁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버지는 정말 유교적인 전통처럼, 대를 잇지 못하면 조상님께 불효라는 생각을 가지시고 사명감처럼 생각을 하신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것을 상대인 저에게 강권할 때에도 항상 미소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는 그것이 정말 싫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더욱 더 싫은 것은 그걸 몹시도 싫어하는 저에게 권하실 때에도,
아버지께서는 제가 싫다는 걸 아시면서 권하실 때에도,
항상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치명적이지도 않고 크게 상처가 나지도 않는 성냥개비나 이쑤시개로 조금씩 꾼준히 찌르는 것과 같았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그렇게 찌르는 사람이 웃으면서 찌르는 겪이라고 할까요?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시키거나 훈계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 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하는 것과 웃으면서 하는 것,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운명을 결정짓는 체질

저는 발바닥에서 열이 많이 납니다.

열이 너무 많아서 집에만 들어오면 양말을 벗어야만 편해지고,
추운 겨울이 아닌 한에는 잠자리에서도 발은 내놓고 자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름에는 더욱 심해져서 양말을 신는 것이 고역이고,
심지어는 회사에 출근해서 자리에 앉으면 몰래 양말을 벗고 차가운 바닥에 발을 대곤 했습니다.
이런 어려움이 있으니 직장생활 하는 하루 하루가 인내의 연속이었습니다.

집안에서는 어머니가 비슷한 체질을 가지셔서 양말 신기를 무척 싫어하시고,
잠자리에서 발 내놓기도 습관처럼 되셨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체질이려니 하고 체념을 했는데,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원인이 있고 치유가 가능한 듯한 얘기들이 많았습니다.

양의학에서는 뚜렷한 병명이 없는 듯 한데, 한의학에서는 족심열(足心熱)이라 하여 콩팥이나 비뇨기가 허한 경우에 나타나는 증상이라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http://www.thyroidsafe.co.kr/board/dboard.php?PHPSESSID=8f1fec56ef9edc5212364a5ea59b3c6c&id=column_2&notice_id=&s=&tot=&search=&search_cond=&no=51&print_no=51&exec=view&npop=&sort=reg_date&desc=desc&search_cat_no=
족심열에 관한 설명

어쩔 수 없는 경우에야 참고 지낼 수 밖에 없으나,
조금이라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발에서 나는 열을 식히기 위해 갖은 방법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본능적인 움직임은 결국에 인생의 향방을 가르는 원인이 될 수도 있을테니,
체질이 운명을 결정 짓는다고 한다면 과연 지나친 비약일까요?

2012년 7월 25일 수요일

아이스커피? 더치커피?

수년전 부터, 인스턴트 커피는 마시지 않고 오직 원두 커피만을 마십니다.
인스턴트 커피에 필연적으로 첨가되는 설탕과 프림으로 인해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고, 그로인해 텁텁한 뒷맛이 싫고, 무엇보다 카페인이 부족한거 같아 원두커피를 고집합니다.

그런데, 여름이 되고 보니 커피 메이커로 커피를 내리는 것도 귀찮고, 뜨거운 커피도 점점 싫어집니다.

더치커피처럼 찬물에 내려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지만, 내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참을 수 있다해도 그 거창한 도구가 없으니....

더치 커피 기구


하지만 번쩍 드는 생각은, 그냥 찬물에 프렌치 프레스 방식으로 원두커피를 장시간 담궈두면 얼추 비슷한 맛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렌치 프레스를 이용한 커피 추출과정

그래서 찾아보니,
비슷한 시도를 하신 분이 계시더군요.
특히 찬물에서 장시간 우려내고 마지막에 거름종이로 걸러내는 팁이나,
걸러내고 냉장고에서 며칠간 숙성시키는 등의 팁은 도움이 많이 될 듯 합니다.
커피의 양이나 분쇄정도, 우려내는 시간 등에 대한 실험을 해서 최적의 조합을 찾는 것도 재미 있겠네요.^^
http://blog.naver.com/kafka90/100132618346

P.S.
며칠간의 시도를 해 본 결과,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드리퍼로 마시던 때와 같은 정도의 커피분쇄와 물의 비율을 유지한채로,
냉수에 커피를 섞은 후 냉장실에서 12시간 정도 지나면, 나름대로 먹을만한 더치커피가 됩니다.
장점은 차가운 커피임에도 향이 은은하게 좋다는 것이고, 단점은 농도가 아무래도 떨어지니 진한 맛은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고 난 후에 남은 원두커피를 다시 뜨거운 물에 걸러도 썩 나쁘지 않은 맛이 난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2012년 7월 24일 화요일

번개와 전하

전류의 흐름은 전하의 흐름과 반대 방향이다.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음전하이고, 음전하는 전압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

지구는 자전에 의해서 형성된 자기장 때문인지,
반알렌대에 분포한 전자에 의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지구의 상공에 존재하는 전자들이 일시에 지표로 이동하는 현상이 번개이다.


그렇다면, 지구 상공은 전압이 낮은 곳이고, 지구 표면은 전압이 높은 곳인가?

통상의 전자, 전기 제품들은 안정된 전압을 유지하기 위해서 ground라는 것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는 말 그대로 지표면을 0V(volt)로 가정하곤 한다.

하지만 지구의 번개 현상을 보면 지표는 낮은 전압의 기준이 아니라 높은 전압의 기준이 된다.

어쩌면 번개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도전이 실패하는 이유가 단지 번개의 높은 에너지 때문이 아니라 전위에 대한 이런 오해때문은 아닐까?

P.S.
그렇게 번개로 지표면에 도달한 전하들은?
항상 상공에서 지표면으로 전달될 뿐인 전하들, 그런 전하들이 다시 대기 혹은 상공으로 방출되지 않는다면 지표면에 모여 누적된 전하들은 대체 어디서 무슨일들을 하고 있는걸까?

P.S.2
지표면의 전위는 모두 같을까?
아주 먼 거리에 있는 두지점의 전위차는 정말 0일까?
만약에 어느 정도만이라도 전위차가 존재하고, 대신 전류의 양이 대단히 크다면 이걸 이용한 새로운 에너지원도 가능하지 않을까?

2012년 7월 11일 수요일

스트레스

스트레스는 무엇일까?

힘들거나 싫어하는 것을 견뎌내고 있는 상태인가?
아니, 이것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니
스트레스라 함은 힘들거나 싫어하는 것이 짓누르는 힘이 될 듯 하다.

힘들다는 것은 물리적인 의미가 강하니,
물리적인 힘에 의해 받게되는 신체적인 고통들이 여기에 속하게 될 듯 하다.
육체 노동에 따른 통증, 섭식 장애에 따른 고통, 수면 장애로 인한 무기력 등등.

싫어하는 것이라 함은 정신적인 의미가 강하니,
호불호에 따라, 취향에 따라, 가치관에 따라 심리적 거부감이 드는 행위나 상태를 의미하는 듯 하다.

전자에 의해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몸의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며,
현대의 많은 경우 병원에서 의료행위를 통해 치유된다.

후자에 의해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정신적인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며,
뚜렷한 치료 방법은 없다.
극심한 경우 정신병으로 발전하게 되며, 의료행위에 의한 치료효과도 상대적으로 낮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미연에 예방할 좋은 방법은 없는가?
앞서 정의 했듯이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싫어하는 것"에 의해 받게 되는 것이라면,
"싫어하는 것"을 없애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되지 않겠는가?

.....
이게 가능할까? "싫어하는 것"을 없애는 것이 가능할까?
"싫어하는 것"은 어떤 것들일까?
두려운 것? 괴로운 것? 미워하는 것? 슬픈 것? 창피한 것?
.....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감정들을,
그냥 감정이라고 여기고 무시하려면,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이 되리라.
그렇다면 스트레스라는 것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


인간인 이상,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싫은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싫은 것"을 이겨낼 수 없다면 피하는 수 밖에 없다.


실제 인생에 있어서, 스트레스라 말하는 것은 "싫지만 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피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욕심 때문은 아니었을까?

2012년 7월 9일 월요일

사랑은 궁극의 가치인가?

전우주적인 최고의 가치, 신(神)의 본질은 '사랑'이라고들 한다.

만약 이말이 사실이라면,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한 구별이 필요해 보인다.

인간세상에서 흔히 보이는 '사랑'은 그 반대편에 '증오' 혹은 '미움'이 존재한다.
즉, 상대적인 감정이며, 비대칭적인 감정이고, 편향적인 감정이라는 의미이다.

'나'라는 인간을 하나의 폐쇄된 대상으로 놓았을 때,
무념무상, 무아일체, 중용, 평상심의 상태라면 치우침이 없는 완전한 원(圓) 혹은 구(球)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은 여기에 하나의 특이점을 만들고, 비대칭을 만들며, 균형을 깨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비대칭과 편향은 당연스럽게 대칭적인 증오라는 감정을 만들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국과 일본의 감정 싸움이 다시 불거지는 현실이다.
일본군의 위안부에 대한 규탄과 왜곡,
독도 영유권에 대한 분쟁,
급기야 일본인은 한국의 위안부 소녀상 옆에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말뚝을 박았고,
이에 한국인은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글씨를 부착한 트럭을 몰고 주한일본대사관 정문으로 돌진을 했다.



위안부 소녀상 옆에 세운 말뚝

일본대사관을 향해 돌진한 트럭

트럭의 충돌로 밀려난 일본 대사관의 정문


이들 두명의 행위는 자국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상대국에 대한 증오라는 감정을 만들어 내었다.

이들의 사랑을 파괴적인 사랑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궁극의 가치로 삼는 사랑과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동물애호가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널리 알려진 연예인도 동물애호가로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어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동물 애호가들은 동물들을 사랑한다.
특히나 버림받고 학대받는 동물들에게 한없는 연민과 동정을 가지며 애정으로 보호하려 한다.
그렇다면 동물 애호가들은 애완동물을 유기하는 사람,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 심지어는 돈벌이로 이용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대할것인가?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클수록, 학대하는 이들에 대한 증오는 커지지 않을까?
이것은 사랑이 만들어낸 증오가 아닌가?


과연, 사랑은 추구해야 하는 가치인가, 버려야 하는 편향적 감정인가?

아니, 궁극적 가치라는 사랑과 이런 사랑은 다른 것인가?
다르다면 두가지 사랑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2012년 7월 4일 수요일

정당방위는 정당한가?

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 옳은가?

정당방위라는 개념은 이것이 옳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는 생명의 존엄성 이전에,

나와 타인의 생명에 대한 가치가 비대칭적임을 의미한다.


하나의 생명체로써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행위는

옳고 그름 이전에 본능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래가지고는,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영원한 평행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