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4일 화요일

마르셀 프루스트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명작입니다.
하지만 어렵다는 평판이 주를 이루었고 내용을 전해주는 이도 거의 없었으며 선뜻 권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참이 지나고 문득 이 책의 제목이 떠올랐고,
인근의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을 보았을 때 흠칫 했더랬습니다.
일반적인 두께의 책 11권으로 이루어진 장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7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4편은 2권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제 1권은 <스완네 집 쪽으로1>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대출해 온 이 책은 지독히 지루하고 섬세합니다.
집중해서 1페이지를 읽기도 어렵고, 잠자리에서 읽으면 초강력 수면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나마 몇 페이지를 읽고 본 이 책의 특징은,
사물이나 인물, 사건이나 행동이 아닌 의식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룹니다.
그것도 지극히 섬세한 묘사가 이어지고, 찬찬히 읽으면 그 묘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의식의 묘사는 무의식마저도 묘사하는 것은 아닐까 할 정도입니다.
무의식이 묘사가 가능하다면 더 이상 무의식이 아니겠지만요.
한줄기 희망과 같은 바람이 있다면,
이 책이 깊은 심연과 같은 무의식의 바다 깊은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잠들어 있는 각성의 뱀을 깨워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잠든 인간은 시간의 실을, 세월과 삼라만상의 질서를 자기 몸 둘레에 동그라미처럼 감는다. 깨어나자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찾아, 거기서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지점과,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때를 삽시간에 읽어 내는데, 종종 그것들의 열(列)은 서로 얽히고 끊어지고 한다. 잠 못 이루는 밤의 새벽녘, 평소에 잠자는 자세와 다른 자세를 취하고 독서하다가 잠들었을 때, 단지 팔의 위치가 올라가 있는 것만으로, 태양의 걸음을 멈추게 하거나 뒷걸음질 치게 할 수 있으므로, 눈뜬 순간에는, 이미 일어날 시간인 줄 모르고서 지금 막 잠든 줄로 여길 때도 있을 것이다. 보다 바르지 못한 어긋난 자세, 예컨대 저녁 식사 후 팔걸이 의자에 앉아 옅은 잠이 들기라도 하면 무질서한 세계에 빠져 대혼란은 극에 달하고, 마법 의자에 앉아 시간과 공간 속을 전속력으로 달려, 눈꺼풀을 뜬 순간, 어쩐지 딴 나라에서 몇 개월 전에 취침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단지 침대에 눕고, 거기에다 잠이 푹 들어 정신의 긴장이 완전히 풀리는 것만으로 족했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정신은 나의 몸이 잠들고 있는 곳을 종잡지 못한다. 그리고 오밤중에 눈뜰 때,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첫 순간 내가 누군지조차 아리송할 때가 있다. 나는 동물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은, 극히 단순한 원시적인 생존감을 갖고 있을 뿐, 나의 사상은 혈거인(穴居人)의 그것보다 빈곤하다. 그러나 이러한때, 추억--지금 내가 있는 곳에 대한 추억이 아니고 지난날 내가 산 적이 있는 곳, 또는 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두세 곳의 추억--이 하늘의 구원처럼 이 몸에 하강하여, 혼자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이 몸을 건져준다. 나는 삽시간에 문명의 몇 세기를 뛰어 넘는다. 그리고 첫째로 석유등잔, 다음에는 깃이 접힌 셔츠 따위들이 어렴풋이 눈에 비치는 영상에 의해서, 자아의 본래 모습이 점차로 꾸며져 나간다.
우리 둘레에 있는 사물의 부동성은, 모르면 몰라도 그 사물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고, 그 사물 자체라는 우리의 확신, 다시 말해, 그 사물에 대한 우리 사고의 부동성에 말미암은 것이다. (후략)

하나의 문장이 길고, 한편으로는 운문의 느낌마저 납니다.
보봐르가 칭찬해 마지 않는 이 작품은 어쩌면 이런 문장 하나 하나가 주는 <각성>의 기쁨에 그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도서관에서 대출 받아 시간에 쫓겨가며 읽을 책은 아니고,
아직은 내게 허락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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