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6일 월요일

사랑 실연 아픔 그리고 이 감정들의 기억

많은 성인 남성들이 혼자 영화관에 가서 봤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확인된 바 없는) 영화인 <건축학개론>




영화라면 특수효과가 난무하는 SF나 큰 화면으로 어울리는 스케일이 큰 종류를 좋아하기에,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 꽤 많은 입소문과 홍보로 호기심이 발동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장벽 같은게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명절의 연휴였을까, 그냥 주말이었을까, TV에서 방영해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무리 남자가 나이가 들면 여성 호르몬의 분비로 많이 감성적이 된다고는 하지만, 보는 내내 왜 그리 많이 울었는지...
참 힘들게 봤다. 극장에 가서 보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싶을 만큼 쿨쩍이면서....



아마도 사회 초년생이었던 즈음이었을 것이다.

TV 드라마는 지금도 거의 안보지만, 당시에 <남자대탐험>이라는 TV 드라마가 방영되었고, 이건 참 열심히 봤던 기억이 있다.



순수한 사랑, 현실의 장벽, 다른 선택, 헤어짐, 아픔...

어찌보면 흔할게 볼 수 있는 소재를 이용한 청춘물의 드라마였는데, 재미있게도 봤고, 인기도 많았던 기억이다.


어느날 오래된 차 안에서, 예전에 사 두었던 이 드라마의 OST 테잎을 발견해서 참 반가와했는데, 유튜브에도 이 음악이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이 동영상에 달린 댓글 가운데, 이 드라마에 관해 요약해 놓은 것이 있었다.



참....이 댓글을 보고 있자니, 옛날 봤던 이 드라마의 줄거리들이 새록 새록 기억나고, 특히 영웅이가 여관방에서 직업 여성을 불러놓고 첫사랑의 이름을 부르는 대목에서는....아마도 대부분의 남자들이 공감할, 정말 쓰라린 기억이 아닐까 싶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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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주저리 주저리 장황하게 넋두리를 했지만, 위의 두 작품은 전형적인 성장 드라마이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을 볼 때, 격하게 공감이 되는 건 그 만큼 유사한 경험을 했다는 의미이고, 또한 이런 작품이 흥행에 성공한다는 건 꽤 많은 수가 유사한 경험을 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는 중년을 넘기는 나이가 되고 보니, 젊은 날과 같은 사랑의 감정이 생기기도 어렵겠지만, 저 시절과 같은 두근거림이 한때의 감정일 뿐, 영원할 수 없음도 알고 있게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 나이가 되고, 저 작품들을 보면, 사랑의 감정에 대해 공감은 해도, 순간의 감정이란걸 알고 있어서인지 미소를 지으며 넘길 수 있는데....
실연의 아픔, 상실의 아픔은 왜 저 때보다 지금이 더 심한 것인지 모르겠다.

내 일이 아님에도, 그 상처와 좌절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프고 너무 힘들다.
왜일까?

사랑의 기억보다 슬픔의 기억이 더 오래 지속되고, 더 명확하게 각인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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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에 건축학개론에 대한 글을, 비슷한 감정으로 포스팅했었다.
http://re-unify.blogspot.kr/2014/12/blog-post_29.html

2015년 11월 6일 금요일

부끄러움은 본능인가 학습인가

부끄러움 이라는 감정은 수치스러움과 수줍음으로 나뉠 수 있다고 한다.

수치스럼움과 수줍음이 같은 뿌리의 감정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얼핏 드는 생각에, 수줍음은 다분히 선천적인 개인 성향인 경우가 많지 않나 싶다.

내가 궁금히 여기는 부분은 수줍음이 아닌 수치스러움에 대한 것이니, 질문을 다시 바꾸어 보면,

수치스러움은 본능적인가 학습된 것인가?


현재의 나를 알기 위한 과거로의 여행에서 발견하게 된 모습에서, 유년 시절 나의 수치스러움이 두드려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난과 부유함에서 오는 수치스러움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아직까지도 빈부에 대한 인식이나 감정은 차분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다.

아마도 나의 가난함이 학교의 친구들에게 드러나게 되는 상황이 닥치면, 난 몹시 불안해하고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어떤 날은 도시락 반찬이 부끄러워서 점심을 굶은 적도 있었으며, 집에 놀러 오려는 친구를 떼어내려고 갖은 설득을 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리도 가난을 부끄럽게 여겼던 것일까?

과연 가난하다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가난하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감정은 대체 어떻게 갖게 된 것일까?

친구들과 비교를 하면서 무언가 다르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가난이라는 것을 어찌 알게 되었는지,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정말로 궁금하다.

2015년 9월 13일 일요일

선(善)과 악(惡)은 존재하는가

최근의 유럽은 시리아 난민들의 대거 유입으로 꽤 시끄러운 상황이다.

시리아 국내의 정치 불안과 새로운 이슬람 국가를 표방하는 테러집단인 IS의 활동으로 시리아 국민들이 살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유럽으로 무작정 이주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 난민들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고 일부 유럽 국가들은 반 이슬람 정서의 팽배로 난민 수용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와중에 배가 침몰해 난민들이 물에 빠져 죽는 상황이 발생하고, 3살짜리 쿠르디라는 아주 어린 아이의 시체가 해변에 밀려온 사진이 사람들을 슬픔에 빠지게 했다.


참 어려운 문제다.
무조건 난민을 수용하는 것도 딱히 좋다고만 할 수도 없으며, 난민을 거부하는 국가나 국민들도 나름의 충분한 이유는 있으니 어느 한쪽을 비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면, 난민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인 IS와 시리아에 대한 국제 사회의 적절한 대응은 불가능한 것인가?
IS는 이미 여러차례 국제 테러를 자행했으니 토벌을 위한 명분에는 문제가 없지만, 현실적인 방법의 문제나 전쟁의 득실에 관한 문제들이 장벽이 되는 듯 하다.

하지만, 시리아의 내전과 정치적인 불안 등이 더 풀기 어려운 문제로 보인다.

아마도 시리아의 국민들 스스로는 문제의 해결에 대한 방법들을 생각하고 있을테지만,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통합된 방법은 없지 않겠나 싶다.
총론에서는 찬성하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다시 갈라지고 싸울 수 밖에 없는 그런...
(이건 전적으로 시리아 문외한이 상상해본 통상적인 예상일 뿐이다.)

그러니 제 3자일 수 밖에 없는 타국가에서 도움을 주려 해도,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아닐까?


이 사태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힘있는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등이 군사력 자랑만 하지 말고, IS도 몰아내고, 시리아의 내전도 종식시켜 주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과연 그게 시리아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결국 힘있는 강국이나 UN등이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건, 선(善)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음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객관적으로 기준이 되는 선이 존재한다면, 그래서 그게 보편 타당한 선이 된다면, 그건 절대 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흔히들, 각 종교의 신은 선의 상징이며 선의 화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이 된다.
그래서 그 반대편에는 악마들이 대립하여 존재하곤 한다.

자연은 신의 피조물이며, 인간도 신의 피조물이다.
그러면 자연은 선해야 하고, 인간도 선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태양과 물이 모든 생명을 길러내지만, 죽음의 사막도 만들고, 홍수로 모든 것을 쓸어가기도 한다.
태풍과 지진, 화산과 혹한은 자연의 재해다.
자연의 현상은 선과 악이 없다.
단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로운 것은 선이요, 해로운 것은 악이다.
선한 것은 신의 축복이요, 악한 것은 악마의 장난이라 구분한 것은 오직 인간의 이해에 따른 것일 뿐이다.

인간이 없으면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없으며,
내가 없으면 모두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선과 악은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절대선과 절대악 또한 없다.
성선설과 성악설도 없는 것이다.
선과 악으로 구분된 신과 악마도 없는 것이다.


인간들이 모여사는 사회에서는 사회의 존립을 위해 후대에게 가르치는 필수적인 덕목이 선(善)이었지만, 원래 존재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들의 기준이 다른 선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모순 덩어리인 셈이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에 대한 가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종의 준폭력 행위인 셈이다.
선을 행하는 것이 대단히 도덕적이고 양심적이고 올바른 인간이라는 생각, 덕을 쌓아 내세를 밝게 한다는 종교적인 믿음 등이 매우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자기 모순속에서, 마치 체한 듯이 한쪽은 계속 답답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사회의 존립을 위해 법, 도덕, 양심, 예(禮) 등을 가르치는데, 이 덕목들과 선(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니, 선과 관련은 있으되, 개개인의 선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사람사이에 다른 기준의 선이 서로 충돌할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은 모두가 다르다는 것,
그들이 가진 선악의 기준도 다른다는 것,
누군가 타인에게 선을 행하고 싶다면, 내 기준의 선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고,
타인의 선의 기준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2015년 8월 16일 일요일

어리석은 지식의 챗바퀴

나는 엔지니어다.
아니 엔지니어였다.
아니 엔지니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엔지니어답지 못했던 점이 불쑥 불쑥 기억나서,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욕을 하고, 혼자서 얼굴을 붉히곤 한다.

엔지니어답다는 건 무엇일까?
아마도 여러가지 특성을 모아야 엔지니어답다는 묘사가 어울리겠지만, 당장의 생각으로 떠오르는 덕목은 완벽함에의 추구이고, 철저함에의 전력이다.

나는 완벽하지 못했고- 사실 누근들 완벽하겠는가만- 완벽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당당할 수 없었다.


그래 이젠 지난 일이다.
엔지니어가 대단한 사회적 지위나 명망이 아니니 스스로의 자부심만 뺀다면 있으나 마나 했던 신기루와 다름 없다.



하지만, 이런 습성이 남아서인지, 종종, 여러가지 문제를 대할 때마다 완벽한 해법을 찾아 보곤 한다.

그건 공학적인 문제가 아닌, 기계나 전기의 문제가 아닌, 인간 사회 정치 경제 등의 현실생활의 문제에까지도 그렇다.

특히 정치나 사회의 문제들을 보면, 비슷한 문제, 비슷한 사건, 비슷한 논란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언제나 같은 식으로 반복 (문제 발생/제기 - 해법의 출현 - 반론의 출현 - 해법과 반론에 대한 다양한 여론/언론의 찬성과 반대 - 해법/반론/첨언의 무한 반복 - 어물쩡 마무리)되는 것에 염증을 넘어 분노까지 느끼게 된다.

대체 왜 이런 어리석은 현상은 나아지지 않고 반복되는걸까?

소위 사회의 지도층이나 정치인 언론인들이라는, 오피니언 리더들, 사회적 영향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어찌 이다지도 어리석은걸까?


능력이 있는 정치권의 인사라고 해도, 그들이 제대로 해결하는 문제는 100중에 10이 안되는 것 같다.

역대 대통령들을 봐도 비슷해 보인다.

10%면 아주 우수해 보이고, 2~3%면 보통이라 할 것이며, 그 이하는 대부분 해결해 놓은 문제보다 저질러 놓은 문제들이 더 많아 보인다.

1년에 10%씩 나아진다면 정말 좋은 시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국민학교 시절엔 똑똑한 아이들이 어떤지 몰랐다. 크게 튀지도 않았으니까..

중학교 시절엔 아주 간혹 별나게 똑똑한 아이들이 있었던 거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 보니, 노력으로 쫓아갈 수 없는 차이라는게 존재한다는 걸 느꼈던 거 같다.

그만치 뛰어난 학생들이 최고의 대학에 가서, 또 그만큼의 뛰어난 능력으로 노력하고, 다시 사회에 나와서 저만치 보이지도 않게 앞서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뛰어난 능력과 뛰어난 열정으로 노력한 사람들과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지금 이 사회의 영향력을 쥐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뛰어난 인재들이, 내가 봐도 허탈할 정도의 어리석은 해법만 제시하는 것일까?

너무 뛰어나서 내가 그 뜻을 제대로 짐작하지도 못하는 것일까?

연작(燕雀)이 안지(安知) 홍곡지지재(鴻鵠之志哉)리요



언젠가 문득 떠 오른 뿌연 생각 하나,

매일 아침에 일나서 밥먹고 일하고 쉬고 밥먹고 싸고 놀고 자고....인 듯이 보이지만,

이런 일들도 순간 순간에 문제가 일어나고 있고, 곳곳에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 보면,

직장인 점심 시간만 되면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라는 문제로 고민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게 일주일에 5번, 일년 365일 가운데 260일을 이 고민을 한다면?

나라면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것이다.

이 문제 하나만이라도 나의 일생에서 완벽히 해결이 된다면 세상이 훨씬 살기에 편해질거 같으니까.....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는 순간 내 인생의 여백은 더 넓어질까?

그렇게 하나씩 문제들이 해결되고 나면.....

문제가 아닌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결국 모든 문제의 해결은 모든 것의 존재가 사라짐과 같은 건 아닐까?

어쩌면, 모든 것이 문제이고, 순간 순간이 문제인 것은, 내가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며, 내가 존재하기에 문제로 인식된 것이 아닐까?



문제라는 건 대상이 원인인 듯 보이지만, 실은 문제 인식의 주체가 원인이다.

따라서 문제의 완벽한 해결은 인식의 주체를 제거해야 한다.

인간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문제를 인식한다는 것, 문제와 함께 어우러진다는 것이며,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스스로 문제라고 인식했던 생각(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해결한 인간은 죽음에 이른 인간 뿐이다.



나는 지식이 우리를 '꽤' 자유롭게 해 줄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문제에 대한 옳은 해법을 찾는 것은 바로 지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해결되는 문제보다 더 많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식은 단지 챗바퀴에 불과했는지 모르겠다.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제자리였던 챗바퀴,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속도를 높일수록 다시 그만큼의 속도로 내게 쏟아지는 문제들의 챗바퀴.

결국에 문제의 원인이 나 자신이었음을 알아내야만 비로소 내려올 수 있는 챗바퀴...

2015년 8월 13일 목요일

요지경인 마음의 흔들림

모처럼만에 남매간의 식사 모임을 인사동에서 가졌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만남을 가진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직은 퇴근 시간이 되기 전, 서둘러 을지로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엔 자리가 많았는데, 군데 군데 보이는 승객 가운데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백발인 머리에 크지 않은 눈의, 대략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버스의 뒷쪽에 앉아있는 그 사람은 내가 알던 사람과 매우 흡사해 보여서 잠시나마 그를 쳐다보았고, 그 사람도 나를 쳐다보았고,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나는 짧은 시간 고민하다가 앞쪽 좌석에 앉았다.


예전 직장에서, 나의 직속 상관은 아니지만, 직책으로는 나보다 위였던 손모씨와 매우 닮았던 그 사람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정말 그 손모씨인걸까? 그냥 닮은 사람인걸까?

가서 아는체를 해야하는 걸까? 그냥 모른체 할까?

그 손모씨가 맞다면, 그 사람의 성격으로는 모른체 지나갈리가 없지만, 예전과 달리 염색도 하지 않은 듯이 백발인 점, 평일 업무시간에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점을 미루어 보면, 나처럼 쇠락하여 많이 위축되어 그럴지도 모른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버스의 행선지는 내가 알던 그의 집과는 다른 방향이다.
역시 그냥 닮은 사람일까?
아니라면, 혹시 최근에 벤쳐 타운으로 조성된 곳에 새로운 직장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이 손모씨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결코 좋은 기억을 떠 올리기 함든 사이였다.
아마도 전 직장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테지만,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회사의 발전에 기여한 점이 거의 없었으며, 겉보기엔 사람들 만나며 웃고 즐기는 게 주된 일인 것으로 보였으니, 한마디로 거머리와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새로운 직장을 가지고 있다면, 나에게도 좋은 자리를 제공해 줄지 모른다는 희망이 스멀스멀 생기고 있었다.
치욕적이지만, 지금의 내 신세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도 아니거니와, 사실 손모씨도 자신이 우리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는 것을 은근히 인정한 적이 있었기에 나름의 명문은 있다고까지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정말 그 손모씨라면,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자신이 일하는 직장에 정말 내가 필요하다면 그가 먼저 적극적으로 내게 다가올테지만, 지금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그렇다면 나는 공연히 아쉬운 얘기만 하는 꼴이 될것이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리속에 들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위와 아래로 요동을 치며 기대와 좌절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었다.


드디어, 벤처타운에 진입한 버스가 몇개의 정류소에 정차했지만, 그는 하차하지 않았다.

왜? 어째서? 혹시 그 사이에 이사라도 한 것일까?

버스는 벤처타운을 벗어나 아파트 촌을 돌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는 내리지 않았다.

아니....어쩌면 그가 나를 따라 내리려고 작정한 것이 아닐까?
오히려 그가 나에게 무언가 곤란한 부탁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집으로 가자고 하면 어쩌지?
근처에 얘기할만한 장소가 어디 있을까?


내가 하차할 정류소가 3개 정도 남았을 즈음에 그는 내렸다.

하차하면서 나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는 것은 아닐까 했던 우려와 달리 그냥 내렸다.

그리고, 출발하는 버스의 창문을 통해서 얼핏 그의 모습을 보았다.

좀 많이 달랐다. 그냥 얼핏 보기에 손모씨는 닮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1시간 가량의 주행시간동안 내 머리속에서 요동쳤던 갖가지 생각들은 대체 뭐였던 것인지 허탈하기 그지 없었다.

아니,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하며 단독 쇼를 펼쳤던 내 자신이 한심했다.

이게 내 인생이었다.

용감하게, 순수하게, 담백하게, 그냥 행동했다면 나의 1시간은 쾌적한 여행일 수 있었겠지만, 마음의 흔들림이 나를 그냥 두지 않았고, 나는 거기에 놀아났던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제자가 스승님에게 물었다.
스승님, 지금 흔들리는 것은 나뭇가지입니까, 바람입니까?
스승님이 답하길, 흔들리는 것은 나뭇가지도 바람도 아니며, 오직 너의 마음뿐이다.
(달콤한 인생, Dialogue #3)


마음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은 원래 흔들리는 것이라는 걸 인정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차분히 관조하며, 고요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법륜스님, 즉문즉설)


마음을 고요히 해야 하는 이유

잡히지 않을 듯 아주 미약한 마음의 움직임이 있다.

너무 미약해서 곧잘 무시된곤 하고, 너무 미약해서 기억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엔, 다른 것들로 인하여 마음이 시끄럽고 혼잡하여 이 움직임을 알아채지도 못한다.

하지만 틀림없이 존재하는 움직임이다.

이 미약한 움직임은 곧 무성하게 자라날 큰 나무의 씨앗일런지도 모른다.

아직은 작고 약하기에 소중하게 보살펴야만 자라날 것이요, 마음속에 몰아치는 폭풍우에 그대로 방치하면 그대로 사라져버릴 그런 씨앗.


초발심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라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겠다고, 혹은 무엇을 하고 싶다는 최초의 마음을 말한다.

이런 마음이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 방법은 없으나, 초발심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첫발걸음이며, 필수조건이다.

초발심 없이 무언가 이루어진다면, 그건 이루어짐을 인식할수도 없으며, 내것도 아니다.

초발심 없이 이룰 수 있는 내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초발심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우리는 종종 마음을 고요히 하고, 마음속의 작은 움직임을 돌보아야하는 것이다.

2015년 7월 6일 월요일

뻔뻔함에 분노한 날, 이 분노의 원인은 무엇일까?

어젯밤에 작은 누이와 통화 내용...

큰 누이와 둘째 누이가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일본 여행을 다녀 오기로 했다고 한다.
문제는 큰 누이의 집에서 기르는 슈나우저가 혼자 있게되어 작은 누이에게 좀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
매형이 있으니 매형이 돌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매형이 개똥을 못치운다고 돌보지 못하겠다고 했단다.
그렇다고 개 호텔에 맡기자니 비용도 비용이지만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고...

전화 통화를 마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말도 안되고 염치고 없고 뻔뻔스럽다는 생각에 화가 난다.
1년에 2번은 명절에 시골 간다고 개를 본가에 맡기는 바람에, 본가에 있는 부모님과 나, 누이와 원래 기르던 강아지들까지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한다.
장거리에 막히는 귀향 귀성길 생각하면 개를 맡겨 두는게 이해가 가지만, 참 매년 명절이 깝깝하다.

그런데 이번엔 더더욱 화가 나는게, 매형이 개똥을 못 치워서 맡긴다니....
매형이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누군 똥을 치울 줄 알아서 치운단 말인가?
적어도 가족간에 합의로 개를 키운다면, 가족 모두가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란 말인가?
.............


바로 그날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사촌 누이 한분이 근방에 살고 계시는데, 몇년 전에 내가 살고 있는 집에 전입 신고를 해 두셨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부동산을 매각하면서 양도세를 좀 줄이시려 한 거 같았다.
누이가 처음 주민등록 전입 신고를 부탁했을 때, 사촌 지간이고, 일년에 제사로 2번 이상은 꼬박 꼬박 뵙게 되는 사이이고, 근방에 사시기 때문에 거절하기가 곤란했다.
암튼 그렇게 주민등록만 전입 신고를 한 채로 몇년이 지나면서, 가끔 우편물이 오면 문자로 알려 드리고, 누이도 가끔 고맙다며 커피나 견과류 따위를 선물로 주시곤 했다.
그리고 며칠 전, 국민연금 공단에서 우편물이 왔는데, 기초연금 수령 안내문인 듯 했다.
누이에게 알려 드리고 나서, 다음 날인가 누이가 전화를 하셨다.
기초연금 수령을 위해서는 내가 집을 무상으로 임대하고 있다는 확인서에 서명을 해야 하니 좀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나기로 한 것인데.....일단 전화로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몰염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떳떳하지 못한 일에 조카더러 동조하라고 부탁을 한다는 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부터 의문스러웠다.
내가 누이에게 그 만큼 도덕적이지 못한 이미지로 비춰진 것인지, 아니면 누이에게는 그런 정도의 위반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

얻게 될 이익과 잃게 될 손실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찜찜한 일에 내가 적극적으로 확인서에 서명까지 하면서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거절했을 경우에 누이와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도 걱정이 되었지만, 용기를 내서 누이에게 거절을 했다.

다행히 누이는 선뜻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었다.
공짜로 얻어먹은 도넛과 커피, 마카다미아 한통을 받은게 머쓱하긴 했지만 끝내고 돌아오면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날 어머님께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드렸고, 어머니는 잘 했다 하셨고, 작은 누이와 통화때에는 누이도 분개한 듯 했다.
그리고 이어진 통화의 내용이 큰누이네 개에 관한 얘기였다.

어딘지 비슷한 면을 가진 두개의 사건,
그리고 그것에 분개하는 작은 누이와 나....

큰누이가 본가에 개를 맡겨서 작은 누이와 강아지들이 스트레스를 받을 것에 대해서 분개하는 나,
나에게 정당하지 못한 일을 부탁해서 곤란하게 만든 사촌 누이에 대해 분개하는 작은 누이.

직접적인 피해의 당사자가 아니면서 왜 우리는 분개했던 것일까?


나는 심지어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를 막 고민해 보기도 했었다.
큰누이나 매형에게 전화를 걸어서 따지려고까지 생각할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가해보니, 큰누이가 할 말이 상상되었다...."네가 왜 그러니?"

그래....난 당사자가 아니었다.
그저 작은 누이와 강아지들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했지만, 작은 누이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면 내가 정의의 사도인가?
그래서 모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분개하는가?
아니다....최소한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아니다. 내가 저지르는 불의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합리화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내가 화가 난 상황이, TV에서 정치인들의 뻔뻠스러움이나 어처구니 없는 언행을 보았을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분노의 원인이나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들은 비슷한 분노였던 것 같다.

그리고 부끄러워졌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왜 이 정도밖에 안되는걸까, 정치인들을 비난하고, 우매한 국민들을 한심하게 생각했었지만, 그건 내가 그 정도밖에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타인의 눈 속에 티는 귀신처럼 찾아내면서 내 눈속에 있는 댓돌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내가 바뀌지 않는데, 과연 누가 바뀌기를 바란단 말인가?
서로 비난하고 욕하고 헐 뜯는 속에선 아무 것도 나아질 수가 없었다.
그저 서로의 탓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바뀌면 주변의 몇몇은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비로소 세상이 나아지는 시작이 될 것이다.

2015년 6월 21일 일요일

교통 체증으로 본 주식의 속성

앞선 포스팅과 마찬가지로 교통 체증에 걸려서 차안에서 여러 생각을 하던 중에, 주식과 운전의 유사한 점을 발견했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두고, 나중에 다시 정리를 해 봐야하겠다.


1) 차선 바꾸기 = 종목 교체

운전을 하다 보면, 내가 주행 중인 차선과 옆의 차선을 비교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막힘이 없는 도로라면 내 차의 성능이나 기분에 따라 속도를 조절해가며 운전을 하니 비교할 일이 별로 없지만, 주행 속도가 일정 정도 이하로 느려지게 되면 다른 차선의 주행 속도와 비교를 하고, 차선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주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수익률이 일정 정도 이하로 만족스럽지 못하면 다른 종목을 살펴보다가 교체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 차선을 바꾸고 보니 원래 차선이 빨라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종목을 바꾸고 나니 원래 종목이 더 잘 오르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2) 차량이 많아지면 느려지게 마련 = 경제 성장이 둔화되면 주식 수익률도 떨어지기 마련

1)의 경우처럼 교통이 정체되면 차선을 이리 저리 바꿔보지만, 차량이 많아져서 발생하는 정체의 경우에는 별 뽀족한 방법이 없다.
열심히 차선을 바꿔바야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은 별반 차이가 없으며, 공연히 신경만 많이 써서 피곤해지고, 사고 낼 가능성 높아지고, 기름 많이 소비하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애초에 마음만이라도 느긋하게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주식도 이와 마찬가지로, 경제가 불황이면 기대 수익률을 낮게 잡고 리스크 관리에 주력하는게 더 좋은 투자 방법이다. 공연히 테마주 소형주 따라다니면 변동성이 커져서 리스크에 노출되고, 섣부른 종목 교체로 수수료만 날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3) 큰 차를 따라가면 조금은 낫더라 = 외국인이나 기관의 투자를 따라하면 낫더라

버스나 트럭 등 차고가 높은 차량은 작은 승용차보다 더 먼곳을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사고가 난 차선이나, 진출입로 등의 상황을 봐 가며 조금은 더 유리한 운전을 할 수 있다.
이건 실제로도 경험한 바인데, 정체 중인 상황에서 내 옆에 있던 버스가 나중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앞서가는 것을 봤던 경험이 있다.
주식 시장에서도 개인들의 정보력은 떨어지기 때문에 외국인이나 개인들이 투자하는 종목을 따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단, 목적지가 다른 경우도 있으니 이건 주의해야 할 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에서 언급한 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교통이 정체가 되면 그나마 빨리 가는 방법은 있지만, 평상시보다는 느릴 것이며, 경제 성장이 둔화되면 남들보다 조금 더 수익을 얻을 수는 있을 지언정 기대 수익률은 낮춰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통 체증에 걸린 날

분당에서 강북의 본가를 갈 때엔 항상 분당-수서간 고속화 도로를 이용한다.

신호등 없이 시원하게 이어진 길은,
분당 - 수서 - 청담 대교 - 강북 강변로 - 동부 간선로 - 내부 순환로까지 이어지기에
분당 시내의 구간과 내부 순환로 이후의 구간을 제외하고는 기분 좋은 운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운전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기에 차량이 많이 몰리는 시간 대라면 교통 체증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되고 만다.

우회 도로를 이용해 보지만, 우회 도로들 또한 차량의 증가로 인해 늦어지긴 마찬가지고, 거기에 신호등 대기의 짜증스러움까지 참아내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이용하는 루트가 되었다.


최근에 토요일 오후에 이 구간을 이용하면서 겪은 몇가지 의문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사실은 예전부터 궁금하게 생각한 것인데 항상 그 때뿐이라 의문은 계속 반복만 될 뿐이었다.)


첫번째 의문은 교통 체증의 원인에 대한 것이다.

분당-수서간 고속화도로는 복정역 즈음에서 합류하는 구간이 있고, 수서 부근에서 합류하는 구간이 있다.
통상 정체시에는 복정역 합류 구간 이전부터 정체가 시작되고, 복정역 합류구간 후에도 정체가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수서 합류 구간을 통과하면 놀랄만큼 차량의 주행 속도가 빨라진다.

이렇게 갑자기 차량들의 주행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보면, 이전의 정체가 더욱 더 의문스럽다.
대체 정체되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이 정도까지는 정체되지 않아도 될 상황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대한 해답은 모른다.
이 모든 구간에 CCTV를 설치하고 정체 시간대의 차량 흐름을 종합적으로 관찰 해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단지, 하나 유추해 볼 수 있는 가설은, 차량의 증가에 못지 않게, 차선을 변경하는 시도가 교통 체증의 중요한 원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수서 구간에서 합류한 차량들은 곧 이어 올림픽 대로 공항방면, 올림픽 대로 강서 방면, 청담대교 방면에 따른 분기점이 나타나기에 여기에 맞춰 차선을 바꾸려는 시도 또한 많아지기 때문이다.

만약 이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이루어진다면, 이어서 좋은 대책도 이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런 시도도 없는 듯 해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두번째 의문은 도로 교통법과 관련된 끼어들기 위반의 범위에 관한 것이다.

분당에서 청담대교까지 오게된면, 청담대교의 북단은 3갈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강변북로 한남/마포방면, 건대방면, 강변북로 잠실방면이 그것이다.
통상적으로 강변북로 마포방면이 통행 차량이 제일 많고 다음이 건대방면, 강변북로 잠실방면이 차량이 제일 적다.

3차선의 청담대교는 북단 즈음에 오면 각 차선별로 진행방향이 정해지는데, 이들의 통과 차량수가 차이가 크다보니, 정체시간대에는 얌체 운전자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결국은 차선변경 금지 구간선인 실선을 길게 그어서 얌체짓의 정도를 줄이기는 했지만 정체가 심해서 청담대교 이전부터 정체가 시작된 경우에는 있으나 마나한 경우가 많다.

더 심한 곳은 내부 순환로의 월곡동 진출로다.
이 역시 진출로 이전 500m가 넘는 지점까지 차선변경 금지구간으로 설정했으나, 심한 경우에는 2km가 넘게 정체되기 일쑤고, 2km되는 지점에는 합류구간이 있어서, 양심을 지키고 싶어도 못지키는 경우가 발생할 지경이다.

설명이 길었지만, 요지는 이거다.
끼어들기 위반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실선으로 그어진 곳에서 차선을 변경하지 못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끼어드는 것이 과연 도로교통법상의 위반 사항인가 말이다.
얌체짓이고 괘씸할 수는 있지만 법적인 처벌이 불가능하지는 않을까 싶었다.

예전에 많이 검색을 해 본 결과로는 끼어들기 위반은 도로교통법상의 추월 위반의 한가지로 본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
속도가 얼마 이하로 주행중인 차량의 앞으로는 끼어들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이 속도가 교통 체증이 심한 시내에서는 언제나 적용할 수 있는 속도이다보니 실제로 적용하기엔 무리가 많지 않나 싶었다.

다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대대적으로 끼어들기 위반을 단속한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법률 조항이 명시된 경우는 찾질 못했다.

경찰청에서 홍보까지 하고 있으니 직접 문의라도 해 봐야 하겠다.

2015년 5월 5일 화요일

선(善), 선행(善行), being a good boy(girl)

앞선 포스팅에서 행복과 선과의 관계(?)...라기보다는 행복과 선에 대한 개인적인 인식의 문제점에 대해 다루었다.

한편으로는 고민의 일부가 풀려서 시원하기도 했지만, 풀어야 할 고민이 더 많아졌다는 문제가 생겨버렸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 사실은 강박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이 아주 뿌리 깊게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고, '착하다, 선하다, 선행'의 의미에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적어도 나에겐)

하지만, 이러한 내포적 의미의 착함, 선행은 그 단어 자체가 모순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선(善)의 가치 판단은 사람/시간/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 행위의 수혜자만이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善)의 행위자의 판단과 수혜자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기에, 행위의 의도와 결과가 달라지곤 한다.

칸트가 말한 대로,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선의지 뿐"인 셈이다.
(칸트의 선의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 칸트의 선의지는 지고 지순한 절대적인 가치임)


간혹 선행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봉사 활동을 하는 경우들도, 정작 봉사를 받는 사람들에겐 필요하지 않은 일들이어서, 봉사 활동을 한 이들의 자기 만족을 위한 게 아니었나 싶은 경우들도 허다해 보인다. (선거철 정치인들의 봉사활동 쇼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차라리,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솔직한 심정으로 행한다면,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다.


이럴진데, 타인에 대한 선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외면하기 보다는, 모두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이기적인 선"을 자신에게 베푸는 것이야 말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 물론 이기적인 선이 타인에게 끼칠 영향을 고려해야 겠지만, 적어도 스스로의 생각에 '내가 피해를 감수한다'가 아니라 '쌍방에게 공평하다'는 판단의 수준이라면 적당하지 않겠는가?

행복과 선(善)은 일치하는가?

선(善)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세상을 보면 행복해 보이는 악인이 너무도 많으며, 불행해 보이는 선인이 도 너무나 많다.

어째서 세상은 내 믿음과 이리도 다른 것일까?

과연 행복과 선은 관련이 있기나 한 것일까?



따지고 보면, 선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믿음은 어린 시절의 동화책이나 어른, 스승들의 은근한 가르침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동화책에 자주 등장하는 얘기들은, 좀 모자르고 어수룩해도 마음이 착해서 선행을 하는 사람은 결국에 복을 받게 된다는 식의 권선징악적인 얘기들이 많았다.
아마도 어른들과 스승들의 이야기도 딱히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린 시절의 동화책과 어른들은 선과 행복을 함께 엮었을까?
그럴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숨겨진 의도가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당시에도 세상에선 선한 것과 행복이 여간해서 함께 어울리지 못했기에 그걸 바라는 열망에서 그랬던 것일까?



얼마전, 아버지께선 내게 한편의 동영상을 권하셨다.

모대학 교수의 인문학 강의 일부분 이었는데, 그 일부의 소제목은 '행복한 사람을 곁에 두라'는 정도였던 것 같다.
동영상을 보면서 언젠가 회사 화장실에서 보았던 격언이 기억났다.
불행한 사람을 멀리하고, 행복한 사람을 가까이 하라. 불행은 전염병과 같아서 주위에 불행한 사람이 있으면 너마저 불행의 구덩이로 끌어들일 것이다.....라는 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행복한 사람 근처에 있으면 자신도 행복해진다는 것이나, 불행한 사람 근처에 있으면 자신도 불행해 진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어떤 학자가 조사했다는 통계였다.

일정한 수 이상의 집단을 조사하고, 그 구성원의 행복 여부와 그들이 맺고 있는 인간 관계를 그려보니, 행복한 사람간의 관계와 불행한 사람간의 관계가 두드러지게 구별된다는 것이었다.

이쯤 듣고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과연 행복은 무엇이길래 설문조사 한 문항으로 행복/불행을 단정할 만큼 명백하게 나뉠 수 있었을까?
과연 그들이 답한 행복/불행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생각하는 행복/불행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들과 과연 일치할 것인가?


너무도 추상적인 혹은 자의적이며 주관적인 "행복"을 수량화된 통계로 이끌어냈다는 것에 대해, 그 동영상에 대한 신뢰도는 한낱 장터의 약장수소리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추락해버렸다.



이 포스팅의 제목이었던, "행복은 선과 일치하는가?"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행복'이 과연 무엇이길래, 또한 '선'이 무엇이길래 그것의 연관성을 찾고있었던 걸까?

'행복'이 물질적인 풍요를 의미한다고 정의한다면,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방법이 될 것이다.

'행복'이 마음의 평화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욕심을 버리고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행복'이 주위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라면,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고, 자주 왕래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행복'의 의미는 언제나 달라질 수 있으며, 그 부여된 의미에 따라 '행복'해 지는 방법도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행복'해 지기 위한 모든 방법들이 바로 '선(善)'한 행동이 아닐까?

즉,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이라면 그건 언제나 (나에게는) '선'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단지, 내게 '선'한 행위가 타인에게 '악'한 행위인 경우가 있을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조절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애초에 이 의문을 가지고 있던 내 머리속에는 모순이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며 자의적인 것이다.
따라서 타인의 기준이 어떤지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나만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기저에 나를 배제하고 타인을 위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선'한 행위라고 생각하고 행했던 행위들에 대해서는 최종적으로 타인의 승인을 얻어야만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고, 결국 '선'의 기준은 주관적일 수 없는 한계를 지녔던 것이다.

'행복'의 기준은 내가 정하지만, '선'의 기준은 타인이 정하는데, 어떻게 행복과 선이 일치할 수 있겠는가?

이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선'에 대한 의미를 바꾸어서 <나를 배제하고 타인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나를 먼저 위하는 것>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언제나 행복과 선은 당연히 일치하게 된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는 그것이 바로 선한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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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찾아보니 비슷한 주제로 고민한 사람들이 있던데, 시간이 날 때 제대로 읽어 봐야겠다.
http://peterlevine.ws/?p=9815
참고로 검색한 키워드는 happiness and goodness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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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4일 월요일

인간은 모순의 존재?

가까이 지내는 친구 C와 L이 만난 자리에서의 이야기다.

특히 C와는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아서인지 많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곤 한다.
종교나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 관심이 일치하는 바도 그렇고 방향이 비슷하기도 해서 자연스레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살짝 취기가 올라서, C가 약간 수다스러워지며 꺼낸 주제가, 40대 중반을 지나며 맛있는 음식에 대한 탐닉이 우려스럽다는 것이었다.

이제 중고등학생인 자녀들은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것에 반해서 자신이 너무 말초적인 감각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었나 하고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주제로 대화가 오간 뒤에 C가 다시 꺼내든 주제는, 자신에게 미적인 감각이 부족하여 자신의 스타일을 가꾸는 것에 참 어색하고 서투르다는 것이었다.
단적으로, 자신이 입는 옷들은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지금은 와이프가 골라주는 것을 그대로 입는다는 것이었으며, 유심히 살펴보면 멋을 부리지 않은 듯 하지만, 참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듣던 나는, C에게 질문을 했다.
앞서 음식에 대한 탐닉의 절제를 얘기했던 것과, 이제 외모에 대한 추구를 얘기하는 것이 서로 양립하는 것 아니냐고.

사실은 그 두개의 주제를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C의 의견이 일견 모순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달리보면 전혀 다른 주제가 될 수도 있으므로 양립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쉽게는 음식에 대한 얘기와 의복에 대한 얘기로 전혀 다를 수 있다.
혹은 음식에 탐닉하는 것은 기본적인 욕구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외모에 대한 것은 타인에게 비춰지는 것을 의식한, 좀 더 고차원적인(?) 욕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전혀 다른 주제에 대한 얘기로 받아 들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넓게 보면, 의.식.주라는 기본적인 생존과 관련된 주제로도 묶을 수 있으며, 물질과 정신으로 나눌 때 물질에 속하는 영역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기도 한다.
(내가 C와 나누던 관심의 분야가 주로 세속적인 것을 가벼이 보고, 탈속을 추구했기에 그러했다.)

사실 C가 음식에 대한 탐닉을 경계해야 겠다고 할 때에만 해도, 그가 감각적인 것을 경계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해야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뒤이어 외모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날개를 달고 인간계를 떠나서 올라가던 그가, 바로 추락해서 저잣거리를 배회하는 듯한 모습에 실망감을 느꼈던 것 같다.

결국은 그가 영적인 것, 성(聖)적인 것을 추구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는 기본적인 욕구가 만족되자 명예욕, 권력욕과 같은 사회적 욕구를 추구했던 것인가 하는 생각에 씁쓸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울해 진 건, 나의 질문에 대한 C의 반응이었다.
그는 나의 질문이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관념적인 것이라는 진단을 했던 것이다.
이전에도 몇번 이런 답을 들은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한번은 대체 그 관념적이란 게 무엇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그의 대답도 명확하진 않았다. 모호하게도 그는 직접 겪어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얘기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음식의 탐닉에 대한 경계"에 대해 내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의 추구"에 대해 내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 두가지 주제가 가지고 있는 상반된 면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두가지 주제는 모두 그의 경험과 생각에서 나온 것이리라.


이번에도 나는 그에게 대체 생각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더불어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L을 객관적인 관찰자이며 증인으로 삼아서...

잠시 고민하던 C는 영화 <밀양>에서 주제로 다루고 있는 "용서"를 예로 들어 설명하려고 했다. 용서라는 단어를 아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

하지만, 이 영화의 예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나의 질문에 대한 관념적인 것이라는 진단을 내리기 보다는, 자신의 주장들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한다.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인 욕구라는 식욕, 성욕, 수면욕 조차도, 그 욕구를 해소하는 방법은 사회적으로 용인된 방법을 통해서 채워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또한 사회적인 욕망은 타인에 의해서 심어진 경우가 많다고 본다.
부모나 친척, 이웃과 또래의 친구들로부터....

인간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높은 곳과 큰 소리는 동물이 가지는 기본적인 두려움이라고 한다.

그 외에 사회적인 규범이라는 명목하에, 개개인을 사회의 틀에 맞추기 위해 가해지는 두려움도 있다.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은 온전히 자신의 경험에만 의존하여 차곡 차곡 쌓인게 아니다.

주위의 관계로부터 주입된 것들이 아무런 체계나 근거도 없이 무작위로 혼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욕망과 욕망 사이에 모순이 존재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두려움과 두려움 사이의 모순도 그러하다.

욕망과 두려움 또한 마찬가지로 모순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모순을 발견하기란 너무나 어렵다.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겨우 볼 수 있으며, 그나마도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의 모순이 비춰지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바로 외면하곤 한다.


2015년 3월 13일 금요일

인간 관계는 불평등하며 폭력적이다

이해관계에 있는 쌍방의 관계는 그 결정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불평등한 관계를 맺는 것이 통상적이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없는 인간 관계에서도 이런 식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으며, 심지어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관계마저도 존재한다.

부모와 자식 관계, 형제 자매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 선배와 후배의 관계, 친척과의 관계, 또래 친구와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나 선배와 후배의 관계가 불평등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관계의 목적을 위해 쌍방이 합의한 범위에서만 인정해야 하는 것이지, 관계의 목적을 벗어난 영역에서의 불평등은 옳지 않다고 본다.

부모 자식의 관계나 형제 자매의 관계, 친척과의 관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맺어진 관계이기에 체념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유교적인 장유유서 전통으로 인해 장자가 유자에게 군림하는 경우를 종종 보지만, 이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함의 소치일 뿐이다.

친구의 관계는 다른 관계에 비해 자의적으로 맺어지는 관계인데, 오히려 이런 친구의 경우에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 점진적이기에, 관계의 불평등이나 폭력성을 인식하기에는 좋다고 생각한다.

한무리의 또래 집단을 보면, 그 가운데에서도 군림하는 사람이 있고, 순종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불평등이 관계는 상호간의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성립이 되며, 자연스럽게도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집단에 남아서 그 (불평등의)관계를 유지하게 되며, 일부는 집단을 이탈하게 된다.


이해 관계에는 너무도 당연한 불평등 관계가 맺어지고, 친목의 관계에서 마저도 우열, 상하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사람이 2명 이상 모이는 모든 집단의 관계는 불평등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 이러한 불평등이 좋다 나쁘다는 혹은 옳다 그르다는 판단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 이건 판단의 이전에 인식에 관한 문제이다.

2015년 1월 27일 화요일

혼자 있기를 즐기는 사람

병적인 히키코모리나 은둔형 외톨이를 비롯해 단순히 성격상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하는 이들의 공통적인 진짜 이유는,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흔히들 말하길, 사람을 피하는 이유로,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나 타인의 시선에 대한 스트레스를 들고는 한다. 더구나 이런 이유가 전문가라는 사람이나 대인 기피증상을 가진 사람들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다보니 반론의 여지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상기의 이유는 다소 피상적이거나 표면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한다.
타인에 대한 두려움의 경우에는 심리적 트라우마가 존재할 수 있으니 예외라고 하더라도, 나머지 경우에는 그 기저에 자신의 존재감을 지키고자 하는 생존본능과 유사한 방어기제가 있지 않나 싶다.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 있으면, 타인들 만큼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떨어지는 것을 실감하게되고, 이는 육체적인 생존본능과 유사한 위기감을 유발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사람들이 많아 모인 곳에서는 자신의 존재가 위험해진다는 학습을 하게 되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리게 되는 것 같다.

2015년 1월 25일 일요일

꿈속의 생각, 평상시의 생각

잠은 참말로 신비한 현상이 아닌가 싶다.

과연 무엇때문에 잠이란게 생명에게 필요한지, 그리고 잠을 자는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아직도 많은 것이 수수께끼이고 많은 가설들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잠을 자는 동안의, 혹은 잠에서 깨는 순간에 대한 기억에 남는 묘사는 <긍정의 뇌>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뇌는 쉬지 않고 끊임 없이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그 가운데 깨고 난 후에도 기억에 남는 것을 꿈이라 부를 뿐이지만, 꿈이라고도 불리지 못하는 수많은 생각들이 계속 되고 있지 않나 싶다.


평상시에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생각을 한다고 알고 있다.

과연 그럴까?

공부를 하고 문제를 풀고 판단을 하기 위해 집중을 하고 있을 때에는 확실히 의도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가만히 있을 때에도 끊임없이 생각이 떠오른다.

이럴 경우에는 보거나 듣거나 냄새를 맡고 혹은 여러가지 느낌으로 자극을 받아서 생각의 방향이 좌우되기는 한다고 본다.

하지만 생각의 방향만 바꿀 뿐, 생각을 하겠다는 의지로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이걸 시험해 보려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 곳에서 춥거나 덥거나 불편함 등을 최소화한 곳에서 깨어 있어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명상에서 추구하는 바이다.

즉, 생각의 끊김인데.....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이고, 즉, 생각이 의지대로 조절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럼 이제 다시 잠의 세상으로 들어가 보자.

마치 아무런 의도가 없는 평상시와 똑같이 뇌는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있다.

평상시와 다른 점이라면 외부의 자극이 최소화 된다는 것... 즉 생각의 방향을 조절하는 요인은 최소화 된다는 것이다.

외부의 자극이  최소화 되었기에 생각의 주제나 소재가 대폭 줄었기에 아주 얌전하고 고요한 생각만 일어날 듯 보이지만, 간혹 꿈으로 표출되는 일면들만 보아도 정 반대가 아닌가 싶은 파격적인 면들이 보인다.

생각만의 세상은 외부세계의 자극이 최소화한 만큼, 외부세계의 제한도 최소화되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날뛰고 있는 건 아닐런지...


그렇다면, 우리의 뇌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나의 부분이 아니라, 잠에서 깨어난 후에는 그나마 어르고 달래서 얌전해지지만, 잠에 들면 괴퍅하고 이해가 불가한 양면의 괴물이 아닌가 싶다.

2015년 1월 7일 수요일

화성남 금성녀

오래전에 읽었던 책인데,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 책 이후로 종종 개그 소재로 사용되는 같은 말의 다른 뜻에 대한 유머들이 넘쳐나기도 한다.

암튼 참 많이 다른 것 같은 남자와 여자니까...


젊은 시절에 우연히 접한 <곰스크로 가는 기차>(Die reise nach Gomsk)라는 짤막한 독일 소설의 번역본을 인터넷에서 접한 적이 있다.

어떤 개인이 번역해서 인터넷에 올렸던 것인데, 나중에는 TV에서 극화하기도 했다.


젊은 신혼 부부가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싫고 여행을 한다.

남자의 어려서부터 꿈이었던 곳 곰스크.

얼마 안되는 재산을 모두 털어서 그곳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

남자가 좋아서 결혼을 한 여자.

남자의 소원이라기에 주저 없이 함께 떠나기는 했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곳이라니 불안하고 거리낌이 생긴다.


긴 여행 중에 잠시 기차는 멈추어 서고, 휴식을 취한다.

아내는 답답한 기차에서 나와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어한다.

부부는 기차를 내려 작은 까페에서 차를 마신다.

이 작은 마을이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아내, 언제나 기차가 출발할까 조바심이 난 남편....

결국 운명의 장난처럼 기차를 놓치고 마을에 머물게 된 부부는 그곳에서 잠시만 잠시만 하다 결국 눌러 살게 된다.


세월이 훌쩍 지나 노인이 된 부부, 이 생활에 만족하는 아내와 달리 남편은 아직도 자신의 서재에서 가끔식 기차표 하나를 꺼내보며 한숨을 짓는다.

가지 못한 곳, 곰스크로 가는 기차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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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나가 공감할 만한 마음속의 깊은 열망에 대해 비유적으로 묘사한 책이라, 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며 <곰스크 = 이상향> 정도의 대입을 하곤 한다.

꿈과 좌절,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꿈...


얼핏 이 소설을 보면서 여자는 인생의 동반자 이지만 동시에 현실적 한계를 드러내는 존재로 묘사된다.

주인공이 남자이기에 그렇기도 했지만, 여자는 걸림돌이나 장애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여자 또한 비유이기에 이것이 여자의 속성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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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금 이 소설을 또 올려 보면, 남자와 여자의 속성이 그럴듯하게 녹아들어 있으며, 그것이 상대적으로 다른 속성을 보여 줄 뿐이지 어느 쪽이 좋고 어느 쪽이 나쁘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남자는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꿈을 쫓아 곰스크로 가려하지만, 그곳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곰스크가 작은 마을보다 더 좋으리라는 보장은 있겠는가? 결국 남자는 곰스크라는 각인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목적지를 향해 무조건 달려가는 것 아닌가?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확실한 현재를 선택한 여자의 선택이 오히려 더 안전하고 좋은 선택이었으며, 현실적인 불편함이 없이 살 수 있게 된 이상, 그 마을을 곰스크로 생각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던 것 아닐까?

쓸데 없는 고집과 아집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버리고 감각적인 판단을 따르는 남성적인 속성들, 큰 미래의 행복 보다는 작은 현재의 행복에 만족하는 여자의 속성.
이러한 모습은 어느 정도 남녀의 속성과 부합하는 면이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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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자의 속성은 목표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추진하는 것이 아닐까?
때문에 회사라는 조직, 군대라는 조직, 스프츠 경기 등은 모두 크고 작은 목표가 있고,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쏟는 것이 원칙처럼 내재되어 있다.
종종 이러한 목표 지향적인 분위기는, 수단이 부적절하다 해도 인정될 수 있으며, 목표가 최고의 선(善)이기 때문에, 이보다 낮다고 평가되는 개인의 사생활, 개인의 행복, 개인의 개성과 같은 것들이 무시되어도 된다고 판단하게 된다.

반대로 여자는 목표에 대한 달성의 욕구가 상대적으로 약해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개인의 행복이나 사생활이 침해되면 이것을 현실적(이성적)으로 고려해보게 된다. 조직에서 퇴출이 되더라도 자신의 행복을 지키는 게 좋을지, 이 정도의 행복은 양보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게 나은지....

남자들이 대의, 명분, 의리에 대해 떠들지만, 여자들에겐 자신의 행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러한 단어들은 그냥 스레기에 불과하다.
한편, 남자들이 비록 의리, 대의 같은 것에 목숨을 걸고 모든 걸 바쳐서 희생을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가 모두에 공평하게 돌아가지도 않는다. 결국 대다수는 빠르거나 늦거나 팽(烹)을 당하게 되며 이는 자신이 부르짖던 의리와는 전혀 다른 배신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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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남 금성녀에서 이러한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 대해서 나온 것으로 기억되지는 않지만, 남자의 목표 지향적인 속성과 여자의 상태 지향적인 속성은 많은 것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의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나온 남편과 아내의 모습도 이런 속성을 보여준다.

현재의 사회적인 현상들에서도 이런 속성때문에 남녀의 차이가 자주 도마에 오르곤 한다.
(여자들이 조직에서 자기 희생하는 모습이 적다고 주장하는 남성들의 불만....)

또한 노년의 남녀 가운데 남자들이 더욱 방황을 하거나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 것도, 어떤 목표를 세울 수 없기에 그런 것이 아닌 듯 하다.
특정한 목표가 없이 일상적인 날들을 지내다 보면, 자신의 목표가 죽음 뿐이라는 사실때문에 견디기 힘들게 되는 것은 아닐지....
여자들은 일상적인 생활들에 익숙하며, 그것이 행복하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죽는 날까지 행복하기만을....

층간 소음

층간 소음으로 인한 고통이 점점 내 생활을 비집고 들어온다.

과연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옳은 방법일까?


층간 소음을 겪고 얼마간은 그냥 참았다.

주위의 경우를 듣고 보니, 대다수가 끝이 좋지 않아서 내가 떠나든가 저쪽이 떠나든가 하는 극단적인 경우가 많아보였기 때문이다.


우연하게도 적절한 기회가 찾아왔다.

위층에서 물이 새서 내 집의 욕실 천장이 젖어버린 것.

수리를 하느라 몇번 얘기를 하게 되었고, 수리가 끝날 무렵에 조심스럽게 얘기를 했다.

간혹 이러 저러한 거슬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상대방은 그럴리가 없을텐데 하면서 그래도 조심하겠다고 했다.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소리가 더 커진 듯한 느낌? 복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참고 참던 어느 토요일 오후, 소리가 계속 나길래, 결국은 윗층에 올라가서 자꾸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하소연을 했다.

들어오란다. 거절했지만 들어 오란다.

그리고 혼자 살고 있고, 거실에 의자에도 소리 안나게 천으로 덧대어 놨다며, 무슨 소리가 나느냐고 하는 것이다.

둔탁하지만 묵직하게 부딪히는 듯한 소리고 그래서 울리는 소리라 설명하고 보니, 베란다에 벽돌로 괴어 놓은 화분들이 보인다. 마침 거길 청소하고 계셨었는지 청소도구와 물기가 보였다. 그래서 저런 것들이 바닥에 부딪히는 듯한 소리라고 설명을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해명은 못하더니 결국은 이 정도로 걸을 수는 있지 않냐면서 보통의 발걸음으로 걷는 시늉을 해 보인다.

그 때 느꼈다. 아니 그 때에는 더 이상 얘기를 해 봐야 안되겠다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내가 너무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반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내려오면서 스스로 다짐했다.

다시는 소음 때문에 윗층의 초인종을 누르지 않겠다고.

애초에 올라갈 때에는 내가 피해자였지만, 얘기를 하는 중에 오히려 윗층이 피해자가 되는 묘한 상황에 되었다.


소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고, 그 부분을 주의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첫번째 소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 조차 너무나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래층에서 들은 소리는 이러 저러하게 들렸지만, 윗층에서 낸 어떤 소리가 그렇게 들렸는지는 밝혀 내기가 너무나 어렵다.

쿵쿵하는 발걸음 소리나 의자나 탁자등을 끄는 소리는 비교적 구체적이다. 그럼에도 이런 소리조차 제대로 밝히기 어려운 이유는 듣는 사람이 느끼는 크기와 낸 사람이 생각하는 크기의 괴리가 너무나도 커서 설마 이런 정도의 소리로....하는 괴리감에 있다.

하물며 어떻게 나는 소리인지 모르는 경우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거기에 더해서, 고의적으로 괴롭히기 위해 낸 소음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는 그냥 습관적인 행동, 무의식적인 행동의 결과로써 나는 소음이기에, 바로 옆에서 즉시 지적을 하지 않는 한은 특별히 기억날 행동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소음이 들리고 난 후에 윗층을 올라가서 소음이 났음을 알려도 윗층에서는 황당한 일이 되버리곤 하는 것이다.


설령 소리를 낸 사람이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인지했을 때에도, 쉽사리 인정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내가 윗층에 올라갔을 때에도, 처음에는 집안을 공개하며 당당하게 말하던 사람이, 베란다의 벽돌과 화문을 가르키며 지목을 하자, 이런 정도는 하고 살아야지..하는 식으로 매우 방어적으로 변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의 소음의 원인을 밝히는 것은 물 건너간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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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층간 소음을 겪으면서 상당히 의문으로 남는 것이 있다.
나는 얼마나 조용한 윗층 사람이었을까?
사실 층간 소음으로 피해를 겪고나서야 모든 것에 조심하게 되었다.
발끝으로 걷거나 미끄러지듯 걷기, 문 살짝 닫기, 의자는 들어서 옮기기, 침대에 누울 때 살살 눕기, 청소기 돌릴 때 벽에 쿵쿵 부딪히지 않기, 싱크대 수돗물도 콸콸 틀지 않기, 밤이나 새벽엔 더욱 조심 조심....

층간 소음으로 괴로워 하고 나서 바뀐 첫번째 변화는 위와 같은 행동의 변화였고,
두번째는 아랫층에 방문해서 혹시 시끄럽지 않은지 물어보고 싶어졌다는 것,
(실제로 물어보진 못했다...)
마지막 세번째 변화는 다음 단락의 얘기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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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소리를 잘 들어 보니 꽤 다양한 소리들이 들렸다.

쿵쿵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 깜짝 놀랄 정도로 꽝하는 소리, 골프공이 굴러가는 듯한 소리....

그리고 들리는 소리의 위치도 조금씩은 다른 듯 했다.

윗층 사람은 아침 일찍 출근하고 오후 2~3시에 퇴근하는 독신 할머니, 옆집은 오전에 느즈막히 출근하고 밤이나 새벽에 귀가하는 남성인데 낮에는 어머니쯤 되어 보이는 분이 와서 집안일을 해 주는 듯하고, 대각선 윗층은 부부와 중학생 정도의 두 자녀가 있는 가정.

발소리나 의자 끄는 소리는 대각선 윗집인 듯 하고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는 옆집이나 윗집인 듯 하고...이제는 소리의 원인이 어느 집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소리가 나도 어디에 가서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한 때는 그렇게 원인 모를 소리가 나면 나도 소리를 냈다.
TV의 볼륨을 한껏 키우거나, 베란다와 거실 사이의 미닫지 문을 쾅 닫거나 해서..

소리의 원인이 어딘지 모르니 나의 소리를 듣고서 조금 반성했으면 했다.
나처럼 소음으로 고통을 겪어보면 그들도 스스로 조심하게 될거라 생각했다.

사실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소음을 내는 사람에게 그 소음을 직접 듣게 해 주는 것.
그래서 스스로 깨닫고 조심하게 하는 것.

그런데 혹시,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최근에 소음이 증가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누이로부터 하나의 사례를 듣고나서는...

누이가 아는 어떤 분은 나이가 드신 할머니인데, 귀가 어두우신데다가 하루 종일 TV를 켜놓고 사신다고 한다. 그런데 귀가 어두우셔서 TV의 볼륨을 최고로 키워놓아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난다는 것. 게다가 어디 한동안 집을 비울 경우가 아니면 TV를 끄지도 않아서 큰 소리가 계속 난다는 것이다.

그분의 윗층에 사는 가족이 또한 엄청난 소음 유발자인데, 이 할머니는 귀가 어두워서 그 소음을 듣지를 못하시고, 윗집도 자신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알고 있어서 별 말이 없이 지낸다고 한다. 단지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견디는지 신기하다고....


몇달 전부터 윗층에서 켜 놓은 TV 소리가 벽을타고 울리기 시작했다.
이건 좌우벽이 아니라 안방과 거실 사이의 벽을 타고 진동이 전해지는 것이라 틀림없이 윗층의 소리였다.

그리고 누이가 들려 준 사례가 떠 올랐다.

어쩌면 윗층의 할머니도 나이가 들어서 귀가 어두워지신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면 내가 소음을 내서 스스로 깨닫게 하려던 노력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의미가 된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방법을 생각했다.

이것이 세번째 변화였다.


이 생각들은 다음 편에....

2015년 1월 4일 일요일

정치 성향에 대한 여론 조사의 결과

새해가 되면서 TV 방송에서는 갖가지 여론 조사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언제나 나오는 항목이라면, 행복의 여부, 행복의 조건, 새해 소망 따위가 있다.

그 가운데 어떤 여론 조사의 결과에서 자신의 정치 성향이 어떤지 묻는 항목이 있었으며,

여기에 대한 응답은 자신이 보수라고 응답한 사람은 43%, 진보라고 답한 사람은 29%였다고 한다.


언제나 이런 여론 조사는 표본 집단, 질문의 정확한 내용과 순서 등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니 굳이 믿을 게 못된다고 생각한다.

저 수치 또한 어느 방송사였는지, 그리고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조차 장담을 할 수 없는데, 중요한 것은 저 수치가 아니다.


어떤 개인이 자신의 정치 성향을 판단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서 기준 이상과 이하로 나누 듯이 명쾌한 것일까?

아닌 것 같다.


한 개인이 자신의 주변 사람들과 정치적인 주제로 대화를 하거나, 혹은 정치와 관련된 주변 사람들의 말, 행동 양식을 관찰해 보고 그것을 자기의 경우와 비교해 본 후에, 내가 저 사람보다 보수적이다 혹은 진보적이다라는 판단을 하게 되는 듯 하다.

결국 자신이 접하게 되는 주변의 사람들과 이런 방식의 비교를 해 보고, 자신의 주변에는 자신 보다 보수적인 사람이 많다면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판단할 것이며, 반대의 경우에는 보수적이러고 판단 할 것이다.

즉, 스스로를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주변에 자신보다 진보적인 사람이 많다는 뜻이며, 자신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변에 자신보다 보수적인 사람이 많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조금 더 쉽고 흔한 예를 들자면, 대략 젊은 사람들은 자신을 진보적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많으며, 나이 든 사람들은 자신을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한 개인을 두고 보아도 마찬가자인 경우가 허다하다.
(동일인이 젊었을 때와 나이가 들었을 때에도 같은 식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 이유는 젊었을 때에는 주위에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많으며, 나이가 들면 주위에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

나이든 사람은 대부분 기득권이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었기에 보수적이라는 말로 이것을 설명하면, 최근에 와서는 더욱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지고 있기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대신, 젊은이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데에 비교적 어려움이 적지만, 나이가 들수록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적응하기도 어렵게 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적용한다면, 어째서 젊은이는 진보적인 경향이, 나이 든 사람은 보수의 경향이 강한지를 설명하는 데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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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나서도 찜찜한 글...

처음엔 보수나 진보가 상대적인 개념이고, 각 개인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서 스스로를 다르게 평가한다는 취지의 글을 쓰려고 했는데, 마지막의 예는 오히려 이런 논지를 흐려 버리고 말았다.

실상은, 나이 든 사람이 보수적이 되는 것은 자신보다 젊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며, 젊은 사람이 진보적이 되는 것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결국은 젊을수록 진보적이고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이 된다는 흔하디 흔한 논조의 글이 되어버렸다.

허허...결국 주의 사람들이 어떤지를 따져보지 않더라도, 한 개인의 성향은 그냥 젊었을 때는 진보적이었다가 나이가 들면 보수적이 된다는 얘기다.
단지, 그걸 설명하기 위해 사회적 지위니 경제적 안정이니 하는 소수에 국한된 설명을 할 필요는 없고, 그냥 나이가 들면 의욕도 사라지고 도전정신도 줄어들고....머 그러니까 구태여 설명도 필요 없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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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일 금요일

우매한 선택과 나쁘지 않은 결과

살아가다 보면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는 끊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 혼자만의 문제의 경우엔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홀로 지게 된다.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의 공동 문제엔 공동의 선택을 끌어내야 하고 공동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직장에선 팀의 문제, 부서의 문제, 회사의 문제에 대해 그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선택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회의를 하기도 한다.


당면한 문제에 대한 각자의 입장은 모두가 다를 것이며, 그 결정이 매우 중요한 사람도 있고 덜 중요한 사람도 있다. 매우 중요한 사람은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중장을 관철하려 하며, 덜 중요한 사람이 종종 양보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가 선택을 하게 되는 대통령 선거도 있고, 지역구의 국회의원을 뽑는 국회의원 선거도 있다. 이 경우엔 강한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이 되어 있다.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전직 대통령이나 국회의장, 국회의원, 국민적 지지를 얻게 되는 어쩌다 스타들, 그래선 안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중립 원칙을 어기는 매스미디어의 보이지 않는 세력 등등....


선거에 대해서야 누구나 이러니 저러니 할 얘기야 많겠지만, 그 결과가 과연 좋았는지 나빴는지에 대해서는 섣불리 판단하기가 어렵다. 아무래도 개인의 지식과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보니 매스미디어의 농간 혹은 그들의 배후에 있는 모종의 의도를 가진 세력들에 의해 평가가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금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경우에 공동의 선택을 할 때에, 주관적으로는 최선이 아닌 듯 보이는 선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심지어는 참 어이없어 보이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어쩐지 결과가 썩 나쁘지 않은 경우도 종종 보게 되는 것은 희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굳이 설명하라면, 처음의 선택으로 예상되는 결과가 나쁠 확률이 높다 하더라도, 선택에 참여한 사람들이 나쁜 결과를 예상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다.
모두 좋은 결과를 예상하고 선택을 했으며, 비록 그 선택이 바라는 결과에 최적화된 것은 아닐지언정 다수가 선택한 것이기에 나쁘지는 않은 결과를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닐런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대립으로 치열했던 냉전의 시대, 보수와 진보가 서로 잡아먹을 듯이 반목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 하지만 이념이 어찌되었던 정치성향이 어찌 되었던 모두가 바라는 목적점은 인류가 안전하고 평화롭게 생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목적지에 도달한 날, 과거의 이념전쟁과 정치성향의 반목으로 다투던 일들을 우리는 무어라 평가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