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만에 남매간의 식사 모임을 인사동에서 가졌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만남을 가진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직은 퇴근 시간이 되기 전, 서둘러 을지로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엔 자리가 많았는데, 군데 군데 보이는 승객 가운데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백발인 머리에 크지 않은 눈의, 대략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버스의 뒷쪽에 앉아있는 그 사람은 내가 알던 사람과 매우 흡사해 보여서 잠시나마 그를 쳐다보았고, 그 사람도 나를 쳐다보았고,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나는 짧은 시간 고민하다가 앞쪽 좌석에 앉았다.
예전 직장에서, 나의 직속 상관은 아니지만, 직책으로는 나보다 위였던 손모씨와 매우 닮았던 그 사람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정말 그 손모씨인걸까? 그냥 닮은 사람인걸까?
가서 아는체를 해야하는 걸까? 그냥 모른체 할까?
그 손모씨가 맞다면, 그 사람의 성격으로는 모른체 지나갈리가 없지만, 예전과 달리 염색도 하지 않은 듯이 백발인 점, 평일 업무시간에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점을 미루어 보면, 나처럼 쇠락하여 많이 위축되어 그럴지도 모른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버스의 행선지는 내가 알던 그의 집과는 다른 방향이다.
역시 그냥 닮은 사람일까?
아니라면, 혹시 최근에 벤쳐 타운으로 조성된 곳에 새로운 직장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이 손모씨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결코 좋은 기억을 떠 올리기 함든 사이였다.
아마도 전 직장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테지만,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회사의 발전에 기여한 점이 거의 없었으며, 겉보기엔 사람들 만나며 웃고 즐기는 게 주된 일인 것으로 보였으니, 한마디로 거머리와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새로운 직장을 가지고 있다면, 나에게도 좋은 자리를 제공해 줄지 모른다는 희망이 스멀스멀 생기고 있었다.
치욕적이지만, 지금의 내 신세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도 아니거니와, 사실 손모씨도 자신이 우리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는 것을 은근히 인정한 적이 있었기에 나름의 명문은 있다고까지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정말 그 손모씨라면,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자신이 일하는 직장에 정말 내가 필요하다면 그가 먼저 적극적으로 내게 다가올테지만, 지금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그렇다면 나는 공연히 아쉬운 얘기만 하는 꼴이 될것이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리속에 들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위와 아래로 요동을 치며 기대와 좌절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었다.
드디어, 벤처타운에 진입한 버스가 몇개의 정류소에 정차했지만, 그는 하차하지 않았다.
왜? 어째서? 혹시 그 사이에 이사라도 한 것일까?
버스는 벤처타운을 벗어나 아파트 촌을 돌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는 내리지 않았다.
아니....어쩌면 그가 나를 따라 내리려고 작정한 것이 아닐까?
오히려 그가 나에게 무언가 곤란한 부탁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집으로 가자고 하면 어쩌지?
근처에 얘기할만한 장소가 어디 있을까?
내가 하차할 정류소가 3개 정도 남았을 즈음에 그는 내렸다.
하차하면서 나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는 것은 아닐까 했던 우려와 달리 그냥 내렸다.
그리고, 출발하는 버스의 창문을 통해서 얼핏 그의 모습을 보았다.
좀 많이 달랐다. 그냥 얼핏 보기에 손모씨는 닮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1시간 가량의 주행시간동안 내 머리속에서 요동쳤던 갖가지 생각들은 대체 뭐였던 것인지 허탈하기 그지 없었다.
아니,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하며 단독 쇼를 펼쳤던 내 자신이 한심했다.
이게 내 인생이었다.
용감하게, 순수하게, 담백하게, 그냥 행동했다면 나의 1시간은 쾌적한 여행일 수 있었겠지만, 마음의 흔들림이 나를 그냥 두지 않았고, 나는 거기에 놀아났던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제자가 스승님에게 물었다.
스승님, 지금 흔들리는 것은 나뭇가지입니까, 바람입니까?
스승님이 답하길, 흔들리는 것은 나뭇가지도 바람도 아니며, 오직 너의 마음뿐이다.
(달콤한 인생, Dialogue #3)
마음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은 원래 흔들리는 것이라는 걸 인정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차분히 관조하며, 고요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법륜스님, 즉문즉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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