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2일 일요일

아주 큰 것은 보이지 않는다.

곧잘 자신의 꿈과 희망을 늘어 놓던 젊은 날에는,

정작 큰 꿈은 보이지 않기 마련이다. 작은 꿈들만 보일 뿐...


시간이 한참 지나고,

작은 꿈들이 사라지고,

걸어온 길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

그제서야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보이게 된다.


그러고 나면 비로서

그 때, 왜 그런 선택을 했었는지,

왜 그것이 그리도 싫었는지,

어째서 무작정 그걸 좇았는지,

이해가 된다.


좀 더 빨리 큰 꿈을 보았더라면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큰 꿈을 보기 위해선,

거기에서 멀리 떨어져 봐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지금 내가 알았다는

이것조차

더 큰 것의 일부 일 수 있다는 생각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본다.

2013년 9월 30일 월요일

바꾸기 전에 살펴보아야

한 개인 또는 민족, 나아가 인류가 발전을 위해 잘못된 것을 고쳐나갈 때에는
반드시 왜 그것이 잘못되었던 것인지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

잘못된 옛것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며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되었음에도 만들어지고 유지된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만,
변증법의 무한 반복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2013년 9월 22일 일요일

현실과 꿈 속의 나

"나"라는 인식,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분별을 만들고 분별이 고통을 만든다....고 한다.


문득, 꿈에 대한 많은 이들의 인식, 혹은 어렴풋한 나 자신의 느낌으로 보건데,

현실과 꿈은 서로를 비추는 반영이기도 하면서 간혹 영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현상이다.

계시적인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해석이 아직은 정설처럼 받아들여 지고 있다.

따라서 현실의 반영도 당연한 현상이며 현실과는 정 반대되는 꿈도 당연한 현상이 된다.

이런 결과는 종종 무의식의 반영으로 해석되기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한편으로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도 따져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지 아니한가?

무의식은 제쳐두고라도, 의식이라도 뚜렷하게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정신적인 활동 가운데 의식을 제외한 것이 무의식이요, 무의식을 제외한 것이 의식이라 설명하는 것이 부족하나마 정확한 설명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그 범위를 정의할 수 없다면 이 또한 결국은 같은 모호함일 뿐이다.


이야기가 또 옆으로 새었으니 다시 본 주제로 돌아와보자.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고, 무의식 또한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과연 무의식이 무엇인지, 무의식을 포함하고 있는 기저의 마음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꿈과 현실에서의 차이를 비교하면 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나"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꿈 속에서 "나"를 인식 하고 있는지, 꿈 속에서의 "나"는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그 인식을 감시하고 관찰하는 것은 "무엇"인지 쫓아가면 되지 않을까?

2013년 9월 20일 금요일

인간의 자기 인식

영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요원이 모피어스를 심문하는 중,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인식하는 것 같아."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
아키텍트가 네오에게 매트릭스에 관해 설명하던 중,
"인간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는 걸 선호하더군. 그게 무의식적인 선택이라도 말이야"

곰스크로 가는 기차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대한 감상이,
문득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곰스크>는 꿈이고 이상이며 마음에 간직한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것이었다.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당시엔 남성과 여성의 인생관에 대한 작품이라 생각했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는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선뜻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인간의 딜레마에 대한 작품이라 생각을 했다.


혹자는 <곰스크>를 상징적인 대명사로 사용하며,
서로의 "곰스크"를 묻고, 점점 잊혀져가는 자신의 "곰스크"에 우울해하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그가 <곰스크>에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해 보았다.
과연 곰스크는 그가 기대한 대로, 혹은 그 이상 이었을까? 아니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까?
아니, 기대 이상이라 한들, 그는 곰스크에 만족하고 거기에 정착했을까?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스크>는 도달할 수 없는 [저기]에 존재하는 무엇이었다. [여기]가 아니란 말이다.
여자는 [여기]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곳이라고 남자를 설득하고 붙잡았지만,
남자는 [여기]는 불충분한 곳이며 [저기]만이 충분할거라 생각한다.

그 남자는 끊임없이 행복을 쫓지만 행복해 질 수 없는 불행한 존재였으며,
그 여자는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도 그 순간의 행복을 찾아 누리는 존재였던 것이다.

우리가 배운건 현실이 아니라 꿈 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많은 걸 가르쳐 주었지.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학교에 다니면서 선생님들에게서 많은 걸 배웠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난 기쁨과 혼란을 함께 겪었어.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의 막연함과 답답함이 그 실체를 겪으면서 해소되었기에 기뻤고,
한편으로는 배움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로 인해 혼란스러웠지.

하지만 혼란스러움을 기쁨으로 메우기도 하고,
이 혼란스럼움 또한 배움이 커지면 다른 기쁨이 될 것으로 믿었지.


이젠, 더 이상 혼란스럽지도 않고 더 이상 기뻐하지도 않아.
그리고 사회에 발을 내디딘 그 초년생의 혼란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어.

우리가 자라면서 배운 많은 이론과 학문과 가름침들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가르쳐 준 게 아니라,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꿈을 가르쳐 준거였어.


모두가 꿈은 아니었지만,
꿈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 있는 것들은 우리가 배운 것과 많이 흡사했고,
꿈과 다르게 되어 가는 것들은 우릴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거지.


그래서,
정의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승리한자가 정의가 되는 것이고,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은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되는 거고,
노력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한 사람의 노력만이 인정받는 거고,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진 꿈만이 전해지는 것이고....

2013년 8월 2일 금요일

비교, 차이, 인식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로 상대계(相對界)라는 말이 있다.
인간들이 현재 살고 있는 세계는 상대계라서, 모든 것이 상대적인, 비교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큰 것을 보고야 작은 것을 알 수 있고, 많은 것을 보아야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는 상대적인 속성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이해하는 방법은 비교하고 다른 점, 차이점을 통해서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만약 다르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면 그걸 인간이 인식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한 걸까?
모른다.
차이가 없는 것은 인식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다면 존재하는지 조차 알 수 없다.

한참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던 청소년기에 내가 갈구하던 것 가운데 하나는 [진리]였다.
그냥 진리가 아니라,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진리] 말이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곤 하는데, 그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참 많이 답답해지곤 했다.
나 자신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공리(公理)'였던 것이, 그들에게는 결코 공리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결국 내 자신의 논리는 중간에 존재하는 공리들이 무너지면서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런 아픔들을 겪다보면 당연하게도 절대적인 진리를 원하게 된다.

모든 것이 비교 함으로써 차이를 드러내야만 인식이 되는 상대계에서 절대적인 진리를 원한다고?
애초에 불가능한 꿈이었다.
상대계를 벗어나 절대계(絶對界)로 들어가기 까지는....

한국은행에서 신권교환하기

올해 아버지께서 여든번째, 팔순 생신을 맞게 되십니다.

가족끼리지만 근사한 식당에서 식사도 하고 선물 대신에 생신축하금을 드리자고 형제간에 의견을 모았습니다.
처음엔 각자 5만원권을 새것으로 10장씩 준비해서 모아 드리자고 했는데,
5명의 형제가 각자 빳빳한 신권을 구하는 것도 인력 낭비요,
그렇게 모으면 제각각이라 신권의 맛도 나지 않을 것 같아 제가 대표로 5만원권 50장을 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한 것이 목요일 저녁...생신 축하는 일요일...
여유는 금요일 하루 뿐이었고 이건 의외로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1)
금요일 오전에 동네에 자주 거래하던 우리은행을 찾아 갔습니다.
250만원을 5만원짜리 신권으로 교환해 달라하자 선선히 처리를 해주던 텔러분을 보면서,
전일 밤에 공연히 이런저런 고민을 했구나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5만원권이 처음 발행 시에 문제가 있어 이를 보완하여 다시 나온 것이 있었고, 이를 구권과 신권으로 구별하여 불렀던 것입니다.
결국 제가 원하는 빳빳한 새 돈을 구하려면, [미사용 신권] 혹은 [일련번호가 이어진 신권] 등으로 좀 더 구체적인 언급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로 용어의 오해를 풀고 다시 살펴보니, 그나마 새것에 속하는 것들을 모아봐야 30~40장이 전부였고 일련번호 따위는 맞을 턱이 없었습니다.
텔러분께서 근방의 같은 은행 지점에 연락해 보았으나 주변 은행도 마찬가지로 미사용 신권을 구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옆 건물에 KB은행이 있으니 그곳에 한 번 가보시라는 조언을 따라 KB은행으로 가 보았습니다.

2)
KB 은행도 사정은 마찬가지 였습니다.
신권은 손님들이 맡긴 돈 가운데 새 것의 뭉치가 있으면 그것들을 모아 놓은 것인데, 이것도 40장이 전부였고, 일련번호 따위는....
전날 밤에 고민한대로 여기서제일 가까운 한국은행 강남본부를 가아겠다 생각하고, 텔러 분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한국은행에 가면 일반인에게 신권 교환을 해 주느냐고.....그런데 잘 모르시더군요.
암튼 강남으로 출발.

3)
한국은행 강남본부는 역삼역에 인접해 있는데, 주차장이 있으나 요일제를 신청한 차량만이 주차가 가능하다더군요. 그래서 인근의 유료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다시 찾아갔습니다.
정문을 들어서자 거대하고 시커먼 자동 유리문이 가로 막고 서 있습니다.
내부를 보여 주지 않으려는 듯 한 위압감, 드나드는 사람은 거의 없고, 주차장도 지하에 있어선지 강남 한복판에 있는 이 땅의 절반은 그냥 화강암으로 심플하게 깔아놓은 차도와 휴식공간 그리고 매우 절제된 조경수...
정말 사람 없습니다. 감히 접근하기 무서울 정도...
그런데 자동문에 열리지 않습니다. 문의 옆에 마그네틱 센서가 있고, 출입증을 갖다대야 열린다고 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다시 입구로 돌아가 거기에 서 계시던 경비원게 여쭤보니, 신분증을 맞기면 출입증을 준다고 합니다.
출입증 받아서 자동문 통과하고 알려주신 대로 1층으로 이동하니(제가 들어온 곳은 3층), 거기에 다시 경비원 분이 계시고 신권 교환하러 왔다고 하자 바로 안내 해주시더군요.
아..이제 다 된거다...의기양양하게 들어가서 보니 일반인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직원분들도 식사하러 가셨는지 자리가 많이 비어있더군요.
일단 신청서의 5만원권 란에 \2,500,000을 적고 하단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었습니다.
창구에 제출하니 1인 교환 한도가 있답니다. 뜨어~~억
5만원권은 100만원, 1만원권 100만원, 5천원권 50만원 이런 식으로...
결국 제가 교환 가능한 것은 5만원권 20장이 다라는 말씀.
직원분에게 사정해 보았지만 완강하시더군요.
그곳은 강남 한복판...은행들도 모여 있고, 기업들도 모여있고, 사람들도 많으니 신권을 구비한 은행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저는, 일련번호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한국은행을 그냥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저는 3층에서 신분증과 출입증을 교환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왔는데, 신권교환소가 있는 1층에 바로 출입문이 또 있었고 그곳으로 출입하는 일반인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좀 있다가 다시...

4)
한국은행을 나와 테헤란로를 지나면서 보니 신한은행, KB은행, 우리은행이 모여 있는 곳이 있어 이곳에 들러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들 은행들도 큰 건물에 입주해 있을 뿐, 사정은 동네에 있던 은행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은행, KB은행, 신한은행을 모두 들러보고 빈손으로 나오며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5)
빳빳한 신권은 오히려 명절에나 구하기가 쉽지, 그렇지 않은 시기엔 일반은행에서 신권을 구하는 것은 복권을 사는 것처럼 운에 따른 일이다.
한편으론 돈이란 것이 얼마나 그럴 듯해 보이지 않고 얼마나 천박해 보였으면, 빳빳한 신권이라는 것으로 포장을 해야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겠냐...

6)
다시 한국은행 강남본부로 갔습니다.
일반은행에서 미사용 신권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섰으며,
아버지의 팔순이라는 사정을 해 보거나, 다른 형제의 명의를 함께 사용하면 어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이도 저도 안되면 한도금액이라도 교환을 하고, 경기도에 있는 한국은행에도 가서 또 교환을 하자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까 보았던 1층의 출입문은 어떤가를 보니, 역삼역의 출구 바로 앞에 있는 것이 그 출입문이었고, 이곳은 경비원 두명이 있으며 신권 교환인은 바로 교환소로 안내를 해 주기에 신분증, 출입증 다위의 절차가 없었습니다.

교환소에 다시 가 보니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신 분들로 자리는 많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교환신청서에 형제 3명의 이름으로 각각 5만원권 100만원, 100만원, 50만원을 적어서 창구에 가서 부탁을 했습니다.
...단호하시더군요.

역시나 제 능력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5만원권 20장, 1만원권 50장을 교환하고 나왔습니다.

7)
신권 교환의 액수에 제한을 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와 같이 아버지의 팔순 생신 축하금이거나, 자식의 결혼식 축의금이거나, 등등 많은 사연도 있을 수 있고, 심지어 이걸 악용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단호하게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제한액수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이 그저 담당자의 임의판단에 맡긴 듯한 처사는 잘못된 것 입니다.
제한액수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있다고요?
5만원권 100만원? 이 제한이 하루 동안의 제한인가요? 한 번 방문시의 제한인가요?
1분만에 다시 방문해서 교환을 하는 것과 1시간 후 다시 방문하는 것, 5시간 후 다시 방문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요?
교환신청서에 제출하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는 확인하지 않습니다.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신분을 명확하게 밝힐 방법도 없습니다.
그러니 중복 방문을 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 구분할 명확한 증거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고 다시 신청하는 건 어떤가요?
혹은, 옷을 바꿘 입거나 안경 모자 등을 이용해 담당자의 눈만 속일 수 있다면 어떤가요?
이 모든 것이 신권 교환을 담당하는 분의 임의 판단에 맡겨진 것입니다.
이런 헛점을 이용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며, 헛점을 이용했을 때 제재할 방법도 없을 것입니다.
제한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 이상을 필요로 하는 수요(욕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 욕구를 제한하기 위해서는, 욕구를 압도하는 강함이 필요합니다.
저 허접하고 빈틈이 많은, 그저 임시규칙과 같은 것으로 욕구를 압도할 수 있나요?

평생 처음으로 한국은행에 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또 올 일이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저에게도 단호한 규정의 적용이 타당한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기계를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이 좋겠더군요.
오늘 그 담당자 분을 보면서, 규정을 지키는 것이 본인에게는 제일 편한 일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구요, 규정대로니 업무상 과실도 없을 거구요, 공연한 자기 딜레마에 빠지지도 않을 거구요....

8)
한국은행 경기본점으로 향했습니다.
수원의 장안문 근처에 있는데, 지도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출발한지라...
대충 아는 곳 까지 와서 근처의 파출소에 들어가 길을 물었습니다.
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순경아저씨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쉽게 찾아갔습니다.
한국은행 경기본점은 입구가 하나뿐이고, 요일제 차량이 아니어도 주차가 가능합니다.
입구에 들어서려 하자 차단기를 올리며 경비원이 다가와 무슨 일로 왔는지 묻습니다.
신권교환하러 왔다고 하자, 주차하고 와서 출입증 받아서 들어가라고 합니다.
출입증 받아서 들어가자 건물 안에 경비원께서 또 안내해주시고...
나머지 5만원권 20장 신권으로 교환했습니다.


9)
암튼 한국은행에서 신권 교환하기의 결론입니다.
- 한국은행강남본점
  : 역삼역 1번 출구 앞에 있는 출입구로 들어가는 것이 젤 좋다.
    신권교환의 제한이 있다. 5만원권 100만원, 1만원권 100만원, 5천원권 50만원...
    (5만원권* 20장 + 1만원권* 100장 + 5천원권 * 100장 = 250만원과 같이 교환도 가능하다.)
    교환해야 할 금액이 더 많으면 동반자를 데리고 가라.
    여의치 않으면 아침 일찍 한번 가고 오후 늦게 또 한번 가라. (9:00 ~ 16:00)
    만약 차가 있다면 옆에 우리은행에서 볼 일을 하나 만들어서 무료 주차를 해도 좋다.
- 한국은행경기본점
  : 주차 용이함.
    교환 권면수 제한은 위와 동일.

2013년 7월 31일 수요일

과학의 혁명

향후에-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과학계에 가장 큰 발견(?)으로 남을 업적은 정신(精神)과 에너지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발견이 위대한 이유는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를 밝혔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발견이 없었다면 물질과 에너지는 그저 별개의 것으로 여겨지고, 물질의 세계와 에너지의 세계가 공존은 하고 있지만 근본이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일견, 아인슈타인의 발견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육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밝힌 셈이기도 하다.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기 이전에 에너지로 존재했으며, 육체를 벗어나면 모종의 에너지로 바뀐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물질 - 에너지> 만으로는 설명 되지 않는 것들이 아직도 많지 않은가?
인간을 예로 들어 보아도, 육화된 인간은 에너지가 물질화 된 것이라고 설명하기엔 부족한 것 들이 있다.

너무나도 다양하게 나타나는 인간들의 행동양식,
본능이라 생각되는 원초적인 행동에서도 이런 다양성은 너무나도 자주 목격되고 있다.
단순한 다양성 또한 하나의 생명 개체군(群)이 생존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라고는 할 수도 있지만, 정작 이런 다양성의 개별 주체들은, 단지 다양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이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보여준다.
이 개별 주체들은 나름의 확고한 의지나 신념을 가지고 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합리화 하기 위한 자기 최면 내지는 인식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 지언정, 이러한 의지나 신념에 매우 강한 힘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종종 신념과 의지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본능에도 역행하는 힘든 과정을 겪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의지, 신념, 정신과 같은 것은 또 다른 에너지의 형태가 아닌가 싶다.

물론 아직까지는 이런 정신의 힘을 에너지와 구별하고 있다.
간혹 초능력이나 기적이라는 형태로 정신이 에너지화 되는 사례들이 보고되어 누적되고는 있지만 아직 정신의 에너지와 일반적인 에너지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구별되고 있다.

하지만 물질과 에너지가 별개의 것에서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 듯,
언젠가는 에너지와 정신 또한 일정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밝혀 질 것이다.

아마도 올바른 관계가 밝혀지고 나면,

             정신
           /      \
         물질 ― 에너지

와 같은 형태의 관계를 이룰 것이다.


이 관계를 잘 들여다 보면,
정신이 에너지로 바뀔 수 있으며, 정신이 물질로 바뀔 수도 있다.(초능력,마술과 같은...)
또한 에너지가 정신으로 바뀔 수 있고, 물질이 정신으로 바뀔 수도 있다.(???)

누군가 깊은 통찰력을 지닌 천재가 나타나
하루 빨리 이 관계를 밝혀 주길 기원한다.

2013년 7월 22일 월요일

우주는 마음이다

인간은 욕망이 모이고 모여서, 쌓이고 쌓여서 태어나게 된 욕망의 육화(肉化)이다.


빅뱅 이전에 모든 것이 하나인 순간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동요도 없고 치우침도 없었다.

마치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동심원을 그리며 물결이 퍼져 나가듯,

빅뱅과 함께 퍼져 나가기 시작한 우주는,

물결의 파고 처럼 치우침을 만들었고,

치우침의 정점은 에너지가 모이며 생명을 만들었다.

생명의 탄생은 에너지의 집중으로 만들어지며, 이 원초적 에너지의 근원은 치우침이며, 치우침은 욕망으로부터 만들어졌다.

인간 개개인은 각자 저마다의 욕망이 모여서 만들어낸 결집(結集)이다.


욕망의 소멸은 치우침의 소멸이며, 치우침의 소멸은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대한민국은 어떤 업을 가지고 있는 걸까?

흔히들 깨달은 이들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한다.
이러한 인과론(因果論)도 다분히 철학적 혹은 종교적 영역이니 당연시 할 수는 없지만,
이 포스팅에서는 인과론을 인정하고 시작해 보겠다.

학창시절의 역사 특히 국사(國史) 수업을 통해서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외세로부터 침략을 당하기만 하고 타 민족을 침략한 적은 거의 없다고 배워왔다.
이에 대해서는 민족성이 온순하기 때문이라는 자화자찬식의 이유도 있으며, 제대로 태평성세를 구가한 기간이 많지도 않으니 그럴 여유가 있었겠냐는 자조섞인 이유도 있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많은 이민족의 침략으로 희생을 당한 백성은 얼마나 많으며, 갖은 수탈과 치욕을 견뎌야 했던 것은 얼마이겠는가?


그러면 과연 무슨 원인을 지었기에 한민족은 이리도 많은 침략과 핍박을 받았던 것이며,
그 많은 침략과 핍박을 받은 결과는 무엇이란 말인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구한말의 일제침략으로 우리 민족을 끊임 없이 갈구던 일본은,
한민족을 침략하고 짓밟은 원인으로 세계적인 경제대국이 되어 동아시아, 아니 아시아에서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받아 가혹한 세월을 보낸 한민족은,
결국은 열강에 의해 남북으로 찢어지고 이간질로 서로를 적대시하며,
비록 경제규모가 세계 10위에 근접하는 국가가 되었음에도 열강의 눈치를 봐야 하는 반꼭두각시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우스갯소리처럼,
한여름 노래부르며 놀던 베짱이는 가수로 발탁되어 호의호식하며, 등골빠지게 일한 개미는 관절염으로 고생고생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깨달은 이들은 말한다.
그럼에도 정작 그들은 빈번히 침략 당하는 결과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모르며,
침략 받고 고통 받은 것의 결과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면서 좋은 원인을 지으라 한다.
좋은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설령 아는 척 해도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
좋은 원인을 짓기 위해 선행을 하고 남을 돕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도, 어떤 결과가 올지 모르며 또한 언제 올지 모른다.
아마도 100번쯤 다시 태어났을 때에야, 그저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되면, 그것 보아라 그때의 원인이 이런 결과로 나타났다고 공치사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인과론을 부르짖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매우 부정적이다.

하지만 한번 쯤, 우리 한민족은 왜 이리 고달픈 역사를 타고 난 것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물어보고 싶다.

옳고 그름은 없는가?

신과 나눈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많은 충격을 받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이라는 가치판단에 대한 것이다.

흔하게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보고 사람들은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판단하려고 한다.
하지만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는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주관적인 가치 판단일 뿐이며 사건이나 상황은 그저 일어난 것, 혹은 유지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고, 건물이 붕괴되고, 지진이 일어나고, 태풍이 몰아치고, 홍수가 나도 그저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유/불리에 처하게 되기도 하고, 그에 따라 옳으냐 그르냐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가급적이면 내가 접하게 되는 모든 사건과 상황을 이처럼 치우침 없이 바라 보고자 노력은 하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난 이상, 나와 남을 분리시키는 것은 본능과도 같으니, 치우침이 없다함은 다시 나와 남의 구분을 없애고 모두가 하나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결국은 궁극적인 치우침의 소멸은, 인간이라는 존재와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각설하고,
과연 모든 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까?
가령 두개의 서로 다른 단음(單音)을 듣고 어느쪽이 높고 어느 쪽이 낮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
높이가 다른 두개의 나무를 두고 어느 쪽이 크고 어느 쪽이 작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
두개의 색깔을 보고 어느 쪽이 밝고 어느 쪽이 어둡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

위의 사례만 보아도, 두개를 비교하여 상대적인 고저/대소/명암을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상대적인 비교는 옳고 그름을 논할 필요가 없다.
단지 비교 대상 없이 하나만을 두고 절대적인 고저/대소/명암을 가리는 것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간혹, 치우침 없이 본질을 보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옳고 그름이 분명한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치우침이 없는 가치판단도 가능할까 라는 의심이 들고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앞으로 만나게 될 사건과 상황들에서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면 다시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2013년 6월 23일 일요일

진화의 끝

저는 불과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물론 진화론에 대한 지식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것과 그 밖에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배우거나 본 것이 전부였고, 찰스 다윈의 저서라는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을 읽어 본 적도 없습니다.

아마 특별한 계기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죽을 때 까지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근 5년 사이에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던 두 분의 대중 과학자는 잠시나마 진화론에 대해 고민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한 분은 리처드 도킨스 박사, 또 한 분은 최재천 교수님입니다.
두 분 모두 찰스 다윈의 열렬한 추종자 입니다.

도킨스 박사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라는 책을 통해서 국내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중요시하며 무신론자 이기에 종교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도킨스 박사의 무신론이 진화론을 추종하면서 내리게 된 판단인지, 진화론과는 별개의 어떤 이유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기독교 진영에서는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도킨스 박사는 이래 저래 기독교 진영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최재천 교수님은 최근에 EBS에서 진화론에 대한 특강을 꽤 오랫동안 하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더 오래 전에도 방송에서 곤충에 대한 강의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나 최근에나 강의를 참 재미있게 하셔서 재미있게 봤습니다.

아마도 이 두 분이 제게 잠시나마 진화론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어 주신 것으로 생각하는데, 오히려 저의 고민은 '정말 진화론은 진리인가?' 였습니다.
기독교의 비중이 높은 서양에서는 아직도 진화론이 일반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어 본 기억이 있고, 반대론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룬 방송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이 찬성론자들의 이야기만 들어 봤기에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과연 진화론에 적합한 생명체인가?"
"과연 진화의 끝은 있는 것일까? 끝이 있다면 그건 어떤 모습일까?"

제가 알고 있는 일반 상식 순준의 진화론에 의하면,
현재의 인간도 진화의 한 형태이겠지요. 그리고 지금도 진화를 하고 있을 겁니다.
수 많은 인간들이 서로 다른 수 많은 변이를 겪고, 다시 이것이 세대로 유전이 되고, 자연에 의해 선택이 되거나 버려지고 하면서....

하지만 인간은 찰스 다윈이 관찰했던 작은 생물들과는 큰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이라는 막강한 힘을 이용해서, 자연의 선택을 받지 않고, 자연이 인간을 선택하도록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종과의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이용해서, 다른 종들이 자연의 선택을 받는 것이 아닌 인간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 입니다.

인간의 생존에 해가 되는 생물은 도태가 되어야 하고, 인간의 생존에 득이 되는 생물은 자연의 선택과 상관없이 길러지고 사육됩니다.

즉, 자연 선택설이 인간 선택설로 서서히 전이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진화의 한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면,
진화의 끝이란 결국 강력한 하나의 종(種)의 나타나 다른 종(種) 위에 군림하고, 그 종(種)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겠지만, 결국은 현재의 인간들 처럼 자연이 교란상태 빠져 그 스스로도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려스러울 따름입니다.

어쩌면 이는 필연적인 진화의 마지막 모습일 것이며,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매우 강력한 종(種)이 나타났을 때, 이를 제어하거나 억누를 수 있는 반대의 힘이 나타나는 새로운 메커니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013년 5월 25일 토요일

마음과 현실, 천국과 지옥

죄를 지으면 벌을 받으리라는 계율은 단지 특정 종교에 국한된 것은 아닌듯 합니다.
게다가 종교를 떠나서도 이러한 규율은 이미 법으로 제정되어 있으며,
성문법 이전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면 죄를 규정하고 그에 합당한 벌을 만들어  자치적으로도 행하곤 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규정하고 인간이 벌하는 이러한 제도가 강력하게 정착될 수록, 진정한 속죄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가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도화된 처벌 시스템은 한 개인의 속죄를 도와주는 방향이 아니라,
공공대중에게 범죄와 비범죄의 경계를 학습시키고 처벌에 의한 공포심을 학습시켜 잠재적인 범죄를 예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학습이 필요한 이유는 다양한 환경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규칙으로 묶어야 하기에 발생한 것이며, 여기에서 자연적인 범죄(sin)와 사회적인 범죄(crime)가 일치되지 못하고 괴리되는 문제점을 여기하기도 합니다.


원래 글을 쓰려던 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빠져 버렸군요.
애니웨이,

종종 전지적인 신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저질렀을 때,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을 것이라고 믿곤 합니다.
제도화된 기성 종교뿐 아니라 그저 신적인 존재를 믿는 사람들의 경우엔 대부분 이러한 믿음을 갖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합당한 벌은 사후에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받는다고 믿기도 하며, 내세(來世)에 죄값을 치를 운명을 지고 다시 태어난다고 믿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제도화된 종교에 반기를 드는 뉴에이지 부류들 가운데에서는 색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닐 도널드 월시(Neale Donald Walsch)의 신과 나눈 이야기를 읽어 보면 기성종교의 왜곡된 해석을 새롭게 재해석 하기도 하는데, 그는 천국과 지옥이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현재의 상태를 천국으로 만들기도 하고 지옥으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불교의 일체유심조와도 같은 이야기이겠습니다만...


이것이 죄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제도화된 법률로는 처벌하기가 매우 어렵고, 양심에는 꺼려지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인 제도와 규율이 강력해질수록, 양심에 꺼려지는지 여부를 행동의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제도적인 법률에 위배되는지를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강해지는 듯 합니다.

그리고 한참을, 아주 한참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제는 본말이 전도되어 법률에 위배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도 않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화가 날 노릇이고, 가해자가 법의 취약점을 악용했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점차 법률을 강화하자는 소리들이 들려오게 되고, 법이 양심까지 판단하려 들겠지만, 그럴수록 양심은 점점 쪼그라들어서 아얘 없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살다보니, 어느 날 문득, 내가 아주 몹쓸 인간으로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한 경우로는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제 3자에게 그 사람의 험담을 하는 경우였습니다.
이건 아주 흔한 경우인데, 그래서 아주 쉽게 자신을 객관화 시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누군가의 뒷담화를 늘어 놓는 것으로 보고, 누군가는 나를 저런 대화의 소재로 삼을 수 있으리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한두번 들고, 그런 후에는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선 험담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깜빡하고 누군가의 험담을 하고, 그런 험담을 한 나를 스스로 경멸하고 부끄러워하고...

몇번을 반복해서 알게 되니, 이제는 남의 뒷담화를 하는 순간에 내 마음속이 어떤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엔 내가 아프거나 괴롭진 않았으나 조금만 지나고 보면 거기엔 어둠만이 있고 악마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의 내 마음은 지옥이었습니다.

지금은 조금만 보이고, 그 순간에는 기분이 불쾌한 정도입니다만,
조금 더 지나고, 더 잘 보게된다면 아마 매우 고통스럽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내 마음이 천국과 지옥을 만든다는 것을,
그것도 마음을 먹는 바로 그 즉시 만든다는 것을 알게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3년 5월 18일 토요일

말의 의도와 내용, 그리고 실체

오래간만에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비교적 격이 없는 친구들이기에 편하게 얘기하고 신세한탄이나 치부가 될 만한 것도 가끔씩은 꺼내놓기도 하곤 합니다.

이번에도 만나서여러가지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최근에 내가 고민하고 있는 가족사와 관계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누이동생과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아, 어릴 때에는 자주 싸웠고, 커서도 다투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시집가서 아이를 낳은 후에도 편하지만은 않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어찌어찌하다 이야기가 그리로 흐르게 되고, 누이동생에 대한 비난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나의 편을 들어주면서 동조를 해 주었는데....

집에 돌아와 한숨 자고 다음날 일어나 생각해보니 기분이 영 찜찜하기가 이를데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지만, 누이동생이 없는 자리에서 그녀의 험담을 한 것(뒤담화)도 그렇지만, 내가 한 얘기의 편파성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에 더 그랬었나 봅니다.

과연 그 얘기를 들은 친구들은, 내 누이동생을 어떤 모습의 인격체로 상상했을까요?
그리고 그런 상상이 과연 누이동생의 실체와 얼마나 가까울까요?


어떤 관계든, 나쁜 관계의 쌍방은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책임은 양쪽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겁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비난하는 한쪽은 자신의 책임이 있는 부분은 쏙 빼고 상대방의 책임이 있는 부분만을 부각시켜 이야기를 함으로써, 제 3자가 듣고 판단하기에는 일방적으로 한쪽은 선하고 한쪽은 악하기만 한 것으로 생각될 겁니다.
그리고 이건 그 실체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 될겁니다.

결국 누군가의 의견을 들을 때, 그 사람의 의도가 어떠한가가 실체와의 상관 정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지해야만 할 것입니다.
좌편향 의도를 가진 사람이 말하는 의견들은 실체의 왼쪽 부분에 해당하는 것들이므로, 왼쪽의 부분 모습을 상상하는 부분 자료로만 이용해야 할 것이며, 실체의 오른쪽도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나 의도를 일부러 숨기는 사람은 지탄받아 마땅한 사람이며, 이를 제외한 경우에는 상대방의 의도와 의견을 모두 존종하되 그 의견의 부분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들 개인의 인격과, 그리고 그들이 구성원이 된 사회가 더 성숙하다면,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청자의 오해를 막기 위해 균형 있게 사실을 전할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하지만, 거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청자의 입장에서 부분을 전체로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2013년 4월 27일 토요일

두려움의 사회

인간은 욕망이라는 기관차가 이끄는, 두려움이라는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열차와도 같습니다.

나는 가난이 두렵습니다.
나는 고통이 두렵습니다.
나는 부자유와 구속이 두렵습니다.
억압과 부당함이 두렵고, 불평등과 부정의가 두렵습니다.
창피한 것이 두렵고 나를 믿는 사람을 실망 시킬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느낄 법한 저런 두려움 외에 나를 아주 당혹하게 만든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건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주로 여자들이나 사회 경험이 아주 적은 신출내기들에게서 종종 겪게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나에게 일임된 부하직원 혹은 견습사원, 아르바이트생이라면 나의 명령대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고, 나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회사의 신임을 얻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볼때면 오히려 내가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것이 특효약입니다.
...
정말인가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요?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해 본 사람들은 두려움에 대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특히 남자들이 그렇고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 그렇습니다.
남자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선배와 후배라는 서열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어겼을 때에 대한 두려움을 익힙니다.
교사와 학생의 사이에서도 여학생의 경우보다 남학생의 경우에 서열에 대한 문제는 더 엄격히 적용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이 훈련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 대다수가 이런 훈련을 받아서 익숙해진 환경이기에
시회는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서열은 엄격하게 지켜져야 하며 이를 유지시키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두려움이 심어집니다.
그런 곳에 서열은 아랑곳하지 않는 여자들은 아주 맹랑하기 이를데 없는 천방지축으로 보여질 것이며, 군대를 다녀오지 않고 선후배간의 엄격한 서열을 경험하지 못한 신출내기들은 어리버리로 찍히기 일쑤입니다.

아마도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장유유서를 중시하는 유교의 관습과 남북한 분단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을 교육하고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대한민국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연장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외국인,
바지에 손을 넣은 채로 대통령과 악수하는 빌게이츠...

그 분노의 뒤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그들이 우리처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언젠가는 이런 두려움을 모두 없애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먼저 두려움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다면 이걸 제거하는 것도 좀 더 쉽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장애인에 대한 복지 정책

흔히들 신은 공평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엄청난 자연 재해로 수많은 인명과 동물들이 죽는 것을 보게 되거나
끔찍한 기형이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진정으로 신은 공평한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혹자는 이런 것을 두고 신의 공평함을 확신하기도 합니다.
소위 윤회의 굴레인 삶을 반복하면서 지은 업에 대한 보가 나타난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장애는 신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일시적인 불평등이고,
오랜 기간을 두고 보면 공평함을 구현하는 신의 장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각국의 정부들이 시행하는 갖가지 장애인에 대한 복지정책은 뭘까요?

신이 만든 일시적인 불평등을 인간이 교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신의 공평함을 무력화하려는 인간의 반란 쯤 되는 걸까요?

혹은 인간이 신의 뜻과 가까와져,
스스로 공평을 정의를 구현하고 용서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일까요?

이론과 실제

며칠 전, 구독하는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읽으면서 뭔가 야릇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글의 내용인 즉, 글쓴이 자신이 종사하는 컴퓨터 보안의 업무에 적합한 사람은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인지에 대한 것이었으며, 글의 의도는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미리 필요한 조건들을 제시해 줌으로써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목적도 순수하고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 작성한 글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감이 든 건...


그건 마치 그 글이, <자신과 어울리는 배우자를 고르기 위한 조건들>처럼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그 외에도 이와 유사한 부류의 글들이 많습니다.
<성공하기 위한 n가지 조건>과 같은 것들로 제목은 다양하지만
[ X하기 위한 조건 Y ]를 나열하는 식의 글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류의 글들이 제시하는 조건 Y는 X를 성취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 아닙니다.
어쩌면 충분 조건인 글이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글은 외면받곤 합니다.
(충분 조건은 그 범위가 너무나도 넓어서 조건을 충족시키기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것들은 그나마 필요조건이라 하더라도 너무 지엽적이거나 극히 일부분인 경우가 허다하고, 심지어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조건까지도 마구잡이로 끼어 넣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자신의 개인적인 성공사례 하나를 중심으로 글을 쓰기 때문일 것이며, 좀 더 넓혀 봐야 이런 사례 몇가지 정도를 모은 것이기에, 특정한 경우일 뿐 일반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이 인지하는 조건만이 기술되기에, 인지하지 못하는 조건은 무시되며,  간혹 잘못된 조건을 필요조건으로 오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너무 추상적으로 기술했나요?
구체적인 블로그 글 하나를 가지고 세상의 모든 처세/성공/사례/비법에 관한 글을 싸그리 비난하자니 어이 없는 논리의 비약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다시 원래의 글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아마도 글쓴이는 저기에 네모친 4가지 특성에 부합하는 사람이라면 컴퓨터 보안의 업무에도 적합할 거라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모르긴 해도 오랜 시간 업무에 종사하면서 나름대로 저런 특성을 도출해 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저 특성들이 너무나도 어렵고, 자신이 저런 특성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 보입니다.
글쓴이는 현재의 업무를 처음 시작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성격이 저기에 부합한다는 걸 알고 시작했을까요?
아니...처음 사회에 발을 내 딛을 때, 면접관이 저 4가지 특성에 대해 본인의 성격과 부합하는지 질문했다면 한치의 흔들림 없이 또렸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을까요?

아닐겁니다.
어쩌면 글쓴이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기에, 그래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기에, 힘들었던 부분을 골라낸 것일 수도 있겠죠.
혹은, 오랜 세월 업무를 하다보니 자신의 성격이 거기에 맞추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무작정 생겨나는 마음이 아닐까요?
다른 일엔 시큰둥 하다가도 갑지기 호기심이 생기는 무언가가 있다면,
다른 일은 시켜야만 하고, 감시해야만 하지만, 틈날 때마다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일이라면요?
수많은 구인 업체 가운데에서 특별히 지정하는 업종이 있다면, 혹은 무심코 앉은 컴퓨터 앞에서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분야가 있다면?
그것이 나의 적성에 맞는 일이 아닐까요?

저런 조건은 그 다음에 익혀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규율과 같은 것으로써...

그리고 대부분의 일들은 입으로 떠들고 글로 설명을 해도,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입니다.

A4 용지에 빽빽하게 배우자의 조건을 나열해 두었다가도, 그와 정반대 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처럼요.

2013년 4월 11일 목요일

타인과 비교하기 / 비교당하기

대인관계의 피로함 때문에 사람들을 피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떼어버릴 수 없는 관계들도 있습니다. 바로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는 혈연관계입니다.
그리고 이 혈연관계의 연장선상에는 무수히 많은 친척들이 존재합니다.

이 친척들과의 관계는 좋다고 유지하고 싫다고 끊을 수 없으며
불가피하게 대면해야 하거나 끈질기게 소식을 접하고 전해야 하며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친척간이라고 모두 사이가 좋지만은 않으며, 사이가 좋은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이 섞여 있으면서 미묘한 역학 관계를 구성하기도 합니다.

종종 이런 친척들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는 경우들이 있는데, 심리적으로 좋지 않은 경우가 있어서 그 원인을 찾아보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 A가 많은 돈을 벌었다/A가 좋은 직장에 취직을 했다/A가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 ]
→ [ 이러한 A의 소식이 나에게 어떤 해를 끼치지 않음에도 질투/시기를 하게 된다 ]
→ [ A가 비열한 방법을 썼다/실제보다 부풀려졌다고 의심하거나 단점을 찾아 위안한다 ]
→ [ 잠시 나 자신을 기만할 뿐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
→ [ A에 대한 소식이 반복되면 기분이 좋지 않고 화를 내게 되며 심지어 A를 미워한다 ]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심리적 배경에는 "비교"당한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비교당할 거라는 두려움
어떤 가치를 획득한 타인을 질투하고 것은 타인과 자신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타인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상승함으로써 비교우위에 올라었다는 두려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여서 자신이 비교 열세에 처했다는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그 가치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경우, 또는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 무한정의 가치인 경우에는 확실히 비교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 듯 합니다.
라캉의 타자의 시선, 타자 의식, 타자의 욕망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요?


정작 이런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그저 한가지 화제거리일 수도 있으며, 지속적인 관심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식을 듣는 사람은 화자(話者)가 나와 그 사람을 비교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매우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혹시 이것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비교당하며 자라왔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아닐까요?
비교당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질책을 받고 반성과 각성을 강제당하곤 했습니다.
따라서 비교당하는 것 자체를 매우 불쾌하고 나쁜 것으로 느끼며, 회피하거나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아도 크고 작은 흥망성쇠는 반복하며 운이 좋거나 나쁜 일이 번갈아 찾아옵니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은 숨기기 마련이고 성과는 뽐내고 싶어합니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나의 소식은 좋은 것 뿐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속으로 나를 질투하고 시기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누군가는 대놓고 평가절하를 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의심할지도 모르며, 누군가는 무시할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면전에서라도 잘되었다 칭찬해주는 사람이나 함께 기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이런 사람들에 대한 느낌은 어떠할 것이며, 이들을 어떤 사람으로 평가하게 될까요?
과연 누가 소인배이고 대인배인가요?
누가 심성이 맑고 선한 사람이며, 누가 옹졸하고 겁에 질려있는 사람인가요?

2013년 4월 10일 수요일

타인에게 부탁하기 / 타인의 부탁을 들어주기

나이가 들면서 살아온 과정을 곱씹어 보는 일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삶이지만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보는 시야도 얻게 된 거 같습니다.

얼마전엔 집안에 선산과 관련되어, 지분을 누군가에게 일부 양도해 주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법률적인 의무/권리를 떠나서 한 집안 사람으로서 해 주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해타산이 횡행하고 물질이 우선시 되는 상황에서야 다른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모든 법률적인 절차와 비용에 관한 부분은 수혜자인 양수인 측에서 책임을 지는 것을 묵시적으로 동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양수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바로는 비용도 얼마 들지 않으며 간단하게 처리가 될 것이라고 하여 안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구체적인 행위에 들어가자 여러모로 번거로운 상황이 발생을 했습니다.

양수인은 지방에 거주하고 있으며, 양도인들은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는데, 양도인들이 지방에 직접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든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든 평일에 지방에 내려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양도인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어떠한 고려도 해 보지 않고는 법무사가 그랬다며 직접 내려와야 한다는 말만을 되풀이 하는 양수인이 참 야속하고 안타깝기까지 했습니다.

적어도
- 평일 공공기관 근무시간에만 가능하냐 주말에도 가능하냐
- 양도인들이 모두 시간을 맞춰서 동시에 가야하느냐, 따로 와도 되느냐
이 정도는 확인해 보고 연락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요?

① 타인에게 불편을 감수하기를 부탁해야 하는 상황인데, 저라면 무척 조심스러울 거 같습니다. 가능하면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아도 될 방법들을 최대한 찾아 볼 것이며, 그것이 불가할 경우에는 최대한 상대방의 편의를 제공하려고 노략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양수인은 너무나 쉽게 타인에게 불편을 요구하는군요. 이게 너무 화가 납니다.

양수인에게 왜 직접 내려가야 하는지, 내려가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시간 제약이 어떠한지 등등을 물으니 하나도 답을 하진 못하고 법무사가 그리 말해서 전하는 것 뿐이라고만 합니다. 그리고 양수인도 답답한지 법무사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저에게 직접 전화를 해 보라고 하더군요. (번거로움이나 전달과정의 오류를 생각하면 좋긴 하지만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결국 법무사와 통화해서 모두 이야기를 듣고 결국엔 지방에 내려가는 방법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양도인에게 연락해서 설명하고 시간 약속 정하고, 다시 법무사와 시간 약속 정하고, 다시 양수인과도 시간 약속 정하고...다행히 모두가 한번에 OK를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짜증 제대로 날 일이었습니다. (이걸 왜 제가 해야 하는건가요?)


지방에 내려가서 법무사와 모두가 함께 어떻게 진행을 할 것인지에 대해 조금은 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얼마 지난지 않아서 처리에 들어가는 비용이 예상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도 양수인 측이 부담할 비용이 적을 뿐이지 양도인 측이 부담할 비용은 매우 크다는 얘기를 듣고 적쟎이 실망했습니다.
어차피 모든 비용은 양수인이 부담하는 것을 묵시적으로 동의한 바이나, 양수인이 자신의 입장에서만 고려했기에 이렇게 예상과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지방으로 내려온 것이 허사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② 도의적인 의무로써 선산의 지분을 양도한다고는 하나,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양수할 수는 있으나, 최소한의 성의나 감사한 마음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난감한 상황의 내내 양수인은 자신의 불찰에 대한 태도는 전혀 보이질 않더군요. 물론 자신이 부담해야 할 비용이 크게 늘어나서 이걸 걱정하느라 겨를이 없을 수도 있고, 워낙에 법률과 관련된 문제들이 복잡하기에 미리 꼼꼼하게 챙긴다는게 불가능할 수 있으니 크게 마음에 담지는 않아야겠습니다.

긴 이야기를 나누고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진행하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가지 부수적으로 필요한 법률적 절차때문에 법정대리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촌수가 가까운 제가 법정대리인을 맡았으나 한명이 더 필요한 상황에서 제 누이를 법정대리인으로 하자고 부탁하더군요. 약간 깨름칙하지만 마침 누이의 주민번호등이 있었기에 알려 주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누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양수인은 이 사실을 모르겠죠.


시간이 며칠 지난 후에, 양수인으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제 누이의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 하더군요. 주민등록 초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번호는 알려주면서,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면 다른 양도인을 법정 대리인으로 세우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냥 누이에게 부탁하겠다고 합니다.

다른 양도인을 법정대리인으로 세우라 권했던 이유는 이렇습니다.
저와 다른 양도인은 주민등록초본과 인감증명을 법무사에게 제출하고 왔습니다.
양수인과 촌수가 좀 멀긴 하나 그래도 같은 집안의 사람입니다.
양수인이 저에게 주민등록초본을 요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난 번에 내려가서 주었던 것으로 대체가 가능하다 생각했고, 그러면 다른 양도인의 주민등록초본도 있으니 손쉽게 처리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양수인은 무슨 이유에선지 굳이 서울에 사는 누이에게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의 설명도 없이 주민등록 초본을 떼어서 부치라고 부탁했습니다.
(나중에 누이에게 전화로 확인하니 설명따윈 없었습니다.)

③ 누이에게 제가 미리 설명을 해 두긴 했지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양수인은, 먼저 자초지종을 설명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단지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부탁을 하는게 너무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인지, 애초에 이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던 누이에게 아무 거리낌도 없고 아무 전후 설명도 없이 부탁을 한 양수인을 생각하자 너무 화가 났습니다.


이래 저래 걱정도 많이 되고, 화도 나고, 마음이 참 불편했습니다.
그리곤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왜 나는 화가 나고 마음이 불편한 걸까?
양수인은 정말 몰염치에 철면피라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남에게 부탁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일부는 양수인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 자신 안에 있는 모순과 마주하게 됩니다.

[남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대명제에서 파생되어 온 의식은
[남이 싫어하거나 불편할 일을 부탁하는 것 또한 피해를 끼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나 봅니다. 통상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혹은 이렇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매우 선량해서 피해를 끼치지는 못하면서도 상대방의 부탁을 거절하지도 못해서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저 명제에 위배되는 것을 철저히 반대합니다.
따라서 내가 남에게 무리한 부탁을 못하면서 동시에 남이 내게 무리한 부탁을 하면 거절함은 물론이고 화를 내게 되나 봅니다.

어찌 보면 나와 타인을 동등하게 대하므로 좋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정작 실생활에서 부딪히게 되는 상황은, 저 대명제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것]과 [남이 싫어하는 것]이 다르다는 데서 발생하곤 합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겠지요.
모두가 일정한 교육을 받고 같은 시대 같은 문화권 내에 살고 있다면 이러한 대명제들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는 있는데,
그럼에도 문제들이 불거질 수 밖에 없는 것은 개인적인 호불호에 기인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호불호라 해서 취향이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될리 없겠지만, 가령 큰소리에 민감한지 여부, 덥거나 추운 기온의 차이, 등을 생각하면 어떨까요? 또 누군가는 명예를 중시하고 누군가는 실리를 중시한다면요?)

2013년 3월 9일 토요일

부정적인 생각의 결과

얼마전, 서울시에서는 소규모 영세상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형마트의 판매품목을 제한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는 뉴스가 들려 왔다.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303/h2013030820511021950.htm


아무리 중소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이라고는 하나, 좀 너무하다싶었는데, 마침 이 폼목을 선정한 인물이 모대학 교수라고 언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이 교수에 대해 검색을 해 보니, 첫번째 검색 결과에 누군가 블로그에 올린 글이 검색되었다.

좀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검색했던 것이기에,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인 정보를 찾고 있었을지 모르고, 마침 이 블로그의 서두엔 이 교수에 대한 비난의 문장이 있었기에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이건....
블로그의 글을 쓴 이는, 이 교수와 친척지간인 사람으로써 어려서부터 거칠고 불안정한 환경에서 살아온 것으로 보였다.

경제적인 어려움보다는 아버지의 잦은 이혼과 재혼, 계모와 이복 동생과의 갈등으로 참 어려운 청소년기를 겪어왔다고 하였다.
참 쉽지 않고 굴곡 많은 삶이었음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면서 뭔가 상당히 거북함을 느끼게 되었고, 나를 일깨워 주는 반면교사와 같은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글쓴이는 위기/갈등의 곳곳마다 누군가 책임이 있는 사람을 지목하고 그를 비난하고 있었다.
모든 사건은 객관적인 기술보다는 주관적으로 자신이 억울하다 생각되는 부분만을 언급한 것처럼 보였고, 그렇게 보인 이유는 글의 흐름이 논리적이지 못하고 비약적이며,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자신의 억울함은 있어도, 자신의 잘못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어떤 상황 자체가 보편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다는 것은, 자기 합리화를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아버지에게 사업자금을 요구하는 상황)

글쓴이는 모든 잘못 된 일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있었으며,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자기 합리화에만 몰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그의 생각에 의하면 그는 언제나 불행했다.

이것을 부정적인 생각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지, 자기 합리화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흔하지 않은 청소년기의 가정환경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면서 나의 한면을 보게 된 것 같고,
나 또한 스스로를 경계하지 않는다면 같은 결과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끼고 이 글을 반면 교사로 삼게 되었다.


자칫, 위의 글에 대한 링크를 남기거나 내용을 옮겨오는 것이 누군가에게 해로운 정보를 퍼뜨리는 일이 될 수 있기에, 검색이 되지 않도록 내용을 캡쳐하여 그림으로 여기에 등록을 해 두었다.
혹여라도 이글을 읽게 되는 분들은, 옮겨 온 글과 관련하여 해당 당사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 줄 것을 당부드리며, 그 내용을 옮겨 온 것은 나 스스로를 반성하기 위한 것일 뿐임을 다시 밝히는 바이다.


















2013년 2월 13일 수요일

"나"는 의식인가 인식인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식은 유아기를 거치는 과정에 만들어진다고 한다.
아마도 이 때 만들어지는 <의식(意識)>이란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분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에서 시작된 <의식>은 수 많은 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혹은 <나 이외의 모든 것>과의 차이를 <인식(認識)>함으로써 점차 더 확고해져 간다.

충분한(?) 과정을 거친 이러한 <의식>의 결과를 이르러 <의식>이라 해야 하는 것인지 <인식>이라 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두개의 단어 <의식>과 <인식>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 나는,
<의식>은 실체의 유무와 상관 없이 두뇌 혹은 이성의 작용에 의해서 규정된 추상적인 개념을 뜻하며, <인식>은 애초에 실체로써 존재했던 것을 감각과 경험에 의해 파악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구별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원래의 <의식>과 <인식>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내가 알고 있는 바와 다르다 하더라도 나는 위의 의미로써 사용하고 있는 것이니 이해해 주기 바란다.


"나"는 <의식>인가 <인식>인가 하는 의문의 근원을 따라가면,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면,
거울에 보이는 "누가" 있으며,
"누군가"의 신체 일부를 볼 수 있으며,
"누군가"의 신체를 통해 느낌을 얻을 수도 있으며,
이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아는 "누구"를 통해
실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의문의 과정에 나온 답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귀결이 된다.

생각하는 주체로써의 "나"마저 부정한다면,
생각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명제로 인용되곤 한다.

과연 맞는 말인가?
(말이 맞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맞는 것이겠지. 말은 그저 말일 뿐이다. 말과 말의 의미는 또 다른 문제니까.)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보고 느끼고 아는 "누구"를 통해 "나"의 실체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인가? 시작은 어디고 끝은 어디인가?
보는 것의 주체가 "나"인가?
느끼는 것의 주체가 "나"인가?
생각하는 것의 주체가 "나"인가?
"나"와 <보는 것>은 얼마나 일치하는 것이며, 그 사이에 있을지 모를 지연/왜곡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와 <느끼는 것>은 과연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으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나"와 <생각>은?
이 모든게 각각 일치하지 않는다면 "나"는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과는 일치하는가?
혹시 빠뜨린 몇가지를 더 넣으면 일체하게 되기는 할까?

데카르트의 명제는 "생각하는 주체로써의 나"를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로 간주하고 있으나, 여기에 큰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생각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 "나라는 의식의 주체가 생각"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애초에 "나"라는 실체는 없고, "나라는 생각"만이 존재한다면?
"나"라는 생각 = "나"라는 의식이 되고,
결국 "나"라는 의식만이 존재했으며, 이 의식이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이라면?


처음의 의문은 또 다시 이렇게 써야 맞을 것 같다.

"나"는 <의식>인가 <인식>인가 하는 의문의 근원을 따라가면,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다음의 의문으로 귀결된다.
"나"라는 의식이 "나"라는 실체를 만들어낸 것인가,
"나"라는 실체가 "나"라는 인식을 이끌어낸 것인가.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죽음충동


살짝 읽다 만 라캉의 책에 의하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구조적인 비대칭으로 결핍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러한 결핍을 메꾸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반복 강박이며, 욕망의 생성원리라고 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는 상징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고, 상징계에서는 절대로 이 결핍이 채워지지 못하기 때문에, 결핍이 채워지는 실재계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 죽음 충동이라 한다.
죽음에 의해서 실재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현실의 부족함을 메꿀 수 있다는, 엉켜버린 실타래 같은 현실(상징계)은 불만족스럽지만, 실재계에서는 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며, 나의 이상과 일치하게 되리라는 믿음.

한편으로 생각하면 실재계는 이상향이고 곰스크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고, 죽음으로만 충족이 가능한 종착점이다.
실재계가 있어야 꿈이 있으며, 상징계의 욕망이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재계를 상징계에서 이루고자 하는 욕망, 꿈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죽음에 의해서 충족이 가능한 꿈 때문에 현실에서의 욕구가 생성된다?

한가지, 짚어 봐야만 할 문제는, 실재계에 대한 욕망은 개개인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으로 보이는데(내 개인적인 경험 및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불분명하나 잠재적인 일반론으로 받아들 일 수 있음), 죽음에 의해 실재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가?

나 개인의 경우에는, 윤회를 통해서 인간의 영혼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간다는, 다분히 불교적인 환경에서 얻은 믿음(?) 혹은 개인적인 관심이 이끈 여러 서적을 통해 쌓인 믿음(?)에 의해, 약간 다르긴 하나 죽음에 의해 실재계에 도달하려는 욕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나 본능적인 무언가에 의해 일반적으로 이런 믿음(죽음으로 실재계에 도달한다는)을 갖게 된다고는 볼 수 없다 생각한다.

2013년 1월 10일 목요일

황금시대에 대한 과학

지금 글을 쓰는 시점에는 오히려 진부할 수도 있으나,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보면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포스팅 해 둡니다.

http://www.youtube.com/watch?list=FLxzSDe0lqRJwB_zYjsDsWCA&feature=player_detailpage&v=nZU9reH2HqE

http://youtu.be/B1NzP3OvPBo


이 동영상의 번역을 하신 분의 블로그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blog.naver.com/sesami9/20158958857

2013년 1월 9일 수요일

의식과 무의식, 언어

언어를 통해 의식을 하고, 언어를 통해 기억을 하고, 언어로 사고를 한다.
언어는 생각의 도구이자 생각의 기반이며 언어를 넘어서는 생각은 상상할 수도 없다.
아마도 이런 언어의 광대함 혹은 유일함(언어 말고 무엇으로 가능하단 말인가)으로 인해 언어 철학이 당당한 철학의 한 부류가 된 것은 아닐런지.

하지만 이 언어로 인해 거꾸로 인식의 한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런지.
느끼고 기억하고 통찰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오직 언어로 표현 가능한 것만이 인식이 되며,
나머지는 무의식으로 남겨지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모든 느낌들과 현상들 가운데 언어라는 필터를 거쳐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가 만들어지고,
언어를 배우는 순간부터 인간은, 의식화 되지 못한 무의식들을 어디엔가 켜켜이 쌓아 두고만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심지어는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느낌들은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리고,
오직 언어로 표현이 되는 느낌만이 유의미한 듯 받아들여지고 기억된다.

인간의 통찰력의 한계는 인식의 한계이며,
인식의 한계는 언어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깨달음이란 이러한 언어의 장벽 너머를 볼 수 있어야만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