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5일 일요일

영화 - 넷플릭스 - 유튜브

언젠가부터 영화를 덜 보게 되었다.

내 삶에서 TV를 빼 버려서 더 가속화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젠 영화 한편을 진득하니 감상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금전의 문제도 아니고, 음향 화질의 문제도 아니었다.

처음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이의 문제도 아닌 듯 하였다.

그냥... 영화 한편을 보려고 생각하면, 참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대단한 준비를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참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물질적인 준비 보다는 심리적인 준비)


대체 왜 이리 된 것일까?


그러니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다는 건, 너무나 번거롭고 많은 댓가를 치뤄야만 하는 일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영화를 본 후에 내가 얻을 것에 대해 더 많은 기대를 하고,

그래서 또 다시 더 큰 실망을 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 듯 하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처음 한동안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서 빠르게 지나가는 화면이나 대사들을 따라가지 못하니 자꾸 앞에 놓친 장면들이 맘에 걸려서, 뒤의 내용을 감상하지 못하나 보다.

눈이 어두워져서 시각적인 자극이 둔감해져서 그런가보다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건 아주 일부일 뿐이 아니었나 싶었다.


과연 영화가 우리에게 주었던 것이 무엇이었던 것일까?

그리고 우린 영화에서 무얼 기대했던 것일까?

정말 볼거리 즐길거리 없던 시절에 영화가 채워주었던, 사람들 마음 속의 무언가...

그걸 영화가 채워주었다 싶은데, 그 실체는 모르겠다.

식욕이나 성욕 수면욕과 같은 어떤 욕망이 있었고, 그게 영화로 채워졌나 보다 생각할 뿐이다.


아마도 그 욕망은, 멀리로는 연극이나 오페라로 채워졌을 지도 모르고, 더 멀리로는 책이나 이야기로 채워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곰곰 생각해 보면, 아직도 연극 오페라 책 따위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위상이나 지위는 오래전과는 사뭇 다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영화는, 사람들 마음 속의 그 욕망을 채워주는 역할을 해 왔고, 영화로 채워진 그 욕망들은, 연극 오페라 책에 대한 갈망을 그 만큼 감소시키지 않았을까?


이제 영화는 그 욕망의 해소 지위를 가정용 VOD와 유튜브에 넘겨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넷플릭스와 같은 컨텐츠 사업자는 영화라는 컨텐츠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극장을 집으로 옮겨놓는 역할을 했지만, 이건 장소만 잠시 바꿔주는 역할을 할 뿐, 그리 오래가지는 못하고 극장과 비슷한 운명을 따라가지 않을까 싶다.

이제 영상 컨텐츠는 장소/시간/주제의 제약이 없는 유튜브로의 전환을 맞이한 듯이 보인다.


그 욕망이라는 것이 무제한의 욕구를 가진 것은 아니라서, 일정 정도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그 이상은 시들해지는 듯 하다.

그래서 이제 유튜브로 그 욕망을 채운 이후에는, 영화에 대한 욕구가 크게 감소하기 때문에 영화 보기가 점점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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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최근 영화에 대해 시들해진 나의 마음에 대한 분석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의 변화는 다른 쪽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지 않나 싶다.

어쩌면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동향과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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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욕에 대한 욕망의 해소를 위해 포르노 동영상이 담당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면서,

그 외의 성욕 해소를 위한 행위의 비중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성매매, 성폭행과 같은 네거티브한 사회적 요소의 감소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결혼(출산) 적령기 남녀의 연애나 결혼과 같은 포지티브한 사회적 요소 또한 감소하는 것은 우려할만한 일이 아닐까?

물론 이에 대한 대규모 통계적 조사가 존재하는 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이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아니 사실인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서도,

충분히 고려해보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적용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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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언급했지만, 영화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연극 오페라 책은 여전히 존재한다.

유튜브와 같은 짧고 간결하고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매체가 나와도 영화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포르노 산업이 커진다 해도 여전히 성매매와 성폭력은 남아 있을 것이며,

결혼과 출산이라는 행위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

2020년 8월 22일 토요일

2020년 8월 의사 집단 파업

COVID19로 인해 발생한 판데믹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일부에서는 이 바이러스의 대유행이 내년(2021년) 말까지 계속되리라는 예측까지 나오고 있다.

(이 예측이 빌 게이츠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00819/102560796/1 )


이로 인해서 정부에서는 의료 인력의 확충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현재 의대 정원의 10%를 향후 10년에 걸쳐 증원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 발표와 함께 의사회는 즉각적인 반발을 하였고, 강경한 정부의 의지에 대응하여 결국 집단 파업(휴진)을 1차례 실행하였고, 앞으로도 자신들의 의지가 관철될 때까지 추가적인 집단 파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 현재 의대에 재학중인 전공의들까지 파업에 가세하여 그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일반인인 나로써야 이런 갈등과 대치에 대해서 뭐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당연히 당사자인 정부와 의사회가 서로의 입장을 조율하여 원만하게 사태가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한가지 우려스러운 점, 아니 두가지 우려스러운 점은 꼭 짚고 넘어가야만 하겠다.

  1. 아직까지 일부의 몇몇 사례를 제외한다면, 대한민국에서의 일반적인 의료 체계는 꽤 안정적인 듯 하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의료진에 대한 신뢰도 상당히 높지 않나 싶다.
    하지만 이번의 갈등과 강대강 대치로 인해서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들이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알려지고 있으며, 이걸 알게된 국민들은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들에 대해서 두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건 이후에 국민들이 한 사람의 환자로 의사를 대면하게 될 때에 일정한 정도의 두려움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됨을 의미한다.

  2. 두번째는 더 심각한 문제인데, 의사회가 내보인 그들의 깊숙한 속마음의 본질 때문이다.
    늘어나는 의대 정원이 결국은 자신의 경쟁자가 되어 개별 의사들의 소득을 끌어내릴 것이라는 본심은, 결국 졸업을 앞둔 전공의들에게 보여주는 발톱과 같은 것이며, 이웃에 개원한 동료 의사에게 내보인 이빨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문제의 본질은, 정부에서는 최소한의 안정적인 공공 의료진을 확보하고자 하지만, 의사들은 개인 사업자로써 생존 경쟁에 노출되어 있기에 자본주의적인 욕망의 추구는 당연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현상이다. 공공으로써의 의무와 개인의 자유와 욕망의 추구라는, 함께 하기 어려운 두가지 측면을 하나의 의사에게, 그것도 다수의 의사에게 기대하기에는 어려울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조심스럽게 예측을 해 보자면, 향후에 의과 대학은 이분화가 되지 않을까 한다.
공공 의료기관에서 공무원처럼 정부의 월급의 받고 정부의 공공 의료를 담당하는 의료 공무원과 개별적으로 영리추구를 하며 의료 행위를 하는 민간 의료원으로.
공공 의료는 건강 보험료의 적용을 받으며 운영되고, 민간 의료는 건강 보험료의 적용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식으로.

2020년 7월 23일 목요일

시간에 관하여....시간은 존재하는 것인가? [2]

최근에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유튜브를 자주 보고 있다.
유튜브의 컨텐츠들이 금전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수단이 되어서인지, 재미있고 흥미를 유발하는 컨테츠가 많아지고 있어 자연스레 유튜브를 보는 시간은 늘어가고 있다.

어떻게 이 채널이 나에게 추천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여튼 처음 이 채널의 이 영상을 보고, "허...참... 신기하다"는 작은 감탄을 했던 것 같다.

아 그랬구나, 내가 이랬구나, 그걸 참 잘 설명하네, 나이도 많지 않고 젊어 보이는데 참 기특하네 했던 기억.
삶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문제들, 개인적으로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에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그리고 이 영상을 기회로 나탐(나 탐구 생활)의 채널을 구독하고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채널에서는 초창기에 주로 다루던 주제가 "유체이탈"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주 젊은 시절에 들어 본 적은 있지만, 그냥 하는 상상의 얘기려니 했던 정도의 주제인데, 이 똘똘하고 젊은 사람이 유체이탈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스레 이 채널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하고, 애써 유체이탈은 무시하고 다른 일상적인 부분과 관련된 칸텐츠만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 주제가 묘하게 겹치는 컨텐츠(윤회 전생)가 있다보니 결국은 유체이탈 부분까지 조금씩 보게 되었다.

문제는, 이 채널에서 유체이탈이 아닌 일상적인 콘텐츠에서도 사용하는 "단어"가 나를 거슬리게 만들었는데, 그건 바로 "현실 창조"라는 것이었다.
내가 받아 들이기로는, 내가 마음을 먹으면 같은 현상(대상)이라도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생각하는 데, 왜 그걸 "현실 창조"라는 이상한 단어를 사용하는 걸까하는 껄끄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앞서 내가 읽었던 책들 중에 잠깐 빠트린 것이 있는데,
[신과 나눈 이야기]에도 이와 비슷한 부분이 나온다.

즉, 무언가 간절하게 바라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심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이루어져 있다....는 약간은 황당하기까지 한 말이다.
내 기억으로는 '너희가 진실로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을 옮길 수도 있다'는 성경적인 문구와 함께 나왔던 것인데, 인간의 마음 혹은 생각이 바로 창조의 힘이 되어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시크릿]이라는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는 바로 이 부분에 대해서만 책으로 출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 신이 말한 이 내용은 어딘지 나탐의 "현실 창조"라는 것과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다시 나탐의 채널로 돌아와 보자.
채널의 다른 영상을 보던 중에, 여기에서도 또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뉘앙스의 말을 들었다.
그게 어떤 영상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아마 이게 아닐까 한다.

이 영상에서 또 다시 시간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무시하기 보다는 고민을 했다.
정말, 대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뭘 의미하는 걸까?



여기에 영화에서도 비슷한 예를 추가할 수 있을 듯 하다.
컨택트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컨택트는 외계인 영화가 아니고, 언어나 소통의 영화도 아니다.
이 영화는 시간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음 편에....)

시간에 관하여....시간은 존재하는 것인가? [1]

최근에 유튜브의 동영상을 보다가 굉장히 충격적인 동영상을 하나 접하게 되었다.

이 채널은 주로 물리학의 이론에 대해 쉽게 설명해 주는 컨텐츠를 다루는 곳으로,
평소에 관심이 있던 양자역학과 초끈이론에 관한 영상을 먼저 접했다.

그러다가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동영상으로 위의 영상이 올라왔는데, 제목부터가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 동영상을 통해서 한가지 나만의 가설(?)이라고 해야 할 지, 나만의 추론이나 직관에 의한 상상이라고 해야 할 지, 아무튼 이 가설은 그 동안 내가 풀지 못하고 있던 많은 장벽을 일시에 무너뜨려 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아직은 이 영상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지 않으므로, 섣불리 요약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상을 통해 내가 얻은 가설 또한 아직은 더 많이 보충하고 수정해야 할 것이므로 다음으로 미룰 것이다.


이제 부터는 내가 개인적으로 시간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된 경위와 거기서 발생했던 의문점들을 기록해 보고자 한다.

아마도 2010년 즈음 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마이클 뉴턴이라는 사람이 쓴 [영혼의 여행]을 읽었다. 불교나 흰두교에서 주장하는 윤회와 같은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기술한 책인데, 나름대로 윤회에 관한 여러 의문점들을 잘 설명하고 있었고(그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확인이 불가능 하지만), 그 주장들 사이의 모순도 없어 보이고, 우리가 익히 알던(들어왔던) 여러가지 사실(?)들과도 잘 연결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것이 믿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종종 그렇게 잘 받아들여지는 경우였을지 모른다.(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의 어떤 부분에선가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언급을 봤었다.
당시에 이 부분은 정말 혼란스러웠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럼 내가 기억하는 과거는 무엇이고, 앞으로 올 미래는 무엇이란 말이지?
아마도 이 부분 때문에 나는 이 책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었고 약간은 의심해 보기 시작했을 지도 모르겠다.

이 책 이후에 읽었던 책들은, 옴넥 오넥의 [나는 금성에서 왔다]라는 책이 있었고, 닐 도널드 월시의 [신과 나눈 이야기]가 있었다.
이 두개의 책에서도 역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시간의 개념에 대해 꽤 비판적인 입장을 표했던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나는 금성에서 왔다라는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지구인들이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거기에 시분초 나 년월일 같은 단위를 마음대로 붙여서 사용한다는 것을 마치 굉장히 미개한 것처럼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2012년이 가까워 오자 지구 대종말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이 당시에 읽었던 책은 김재수의 [2012 지구 대전환], 김인자의 [하늘이 전해준 빛세상 이야기], 김재훈의 [5차원 우주과학의 비밀] 등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아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지금까지 따라왔던 이 영적인 존재에 대한 탐구의 여정에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이후에도 스티븐 그리어의 [은폐된 진실, 금지된 지식:UFO와 그림자 정부, 그리고 지구의 운명]도 읽었지만, 이후 부터는 이런 잡히지도 않는 헛된 것을 쫓는 것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피하기까지 했던 듯 하다.

여기까지 오면서 이 책들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다른 책에 대한 정보도 공유하던 누이에게 더 이상 이런 책들에는 관심이 없다며 짜증 비슷하게 냈을 정도였으니까...

이후 한동안은 명상이나 종교철학, 일반철학, 물리학 따위로 관심을 돌렸다.


앞서서 읽었던 책 가운데, [영혼의 여행] [나는 금성에서 왔다]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 정말 이해도 안되고, 오히려 책과 저자에 대한 신뢰도만 떨어뜨린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혹은 이와 일맥 상통하는) 부분은 머리속의 고민에서도 점점 잊혀져 갔던 것 같다.

(다음 편에 계속)

2020년 7월 2일 목요일

뒷산을 오르며...2

예전에 열심히 다닐 땐, 하루 걸러 한번씩 오르기도 했던 산이지만,
이젠 일주일에 한번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

허벅지에 만들어진 근육이 좀 말랑말랑 해지는 듯 해서 다녀온지 4일만에 또 올랐다.
이번에 평일 이른 아침. 6시 30분쯤.


  • 지난 번에 오를 때도 봤지만, 여기 저기에 매미 나방이 많이 보인다.
    큰 나무에 몇마리가 모여서 딱 붙어 있고, 그 몇마리 틈새로는 갈색의 알이 보인다.
    그땐 몰랐고, 집에 와서 검색해보니 그게 매미 나방과 알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해충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 특히 등산로 중간에 사람들의 손을 많이 타는 서어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워낙에 나무가 매끈하기도 하지만, 사람들 손을 많이 타서 일부는 반질거리기까지 한다.(경사로에 있어 사람들이 그 나무를 이용해서 미끄러지지 않게 지탱하곤 한다.)
    그 나무에도 매미 나방이 여러마리 붙어 있어서, 이번엔 떼어 줘야지 생각했다.
  • 깔딱고개를 오르고 나서 좀 쉬려고 벤치가 있는 곳에 앉았다.
    마침 먼저 오르신 어르신 한 분이 운동을 하고 계신다.
    Y자 모양으로 갈라져 뻗은 나무에 양손을 지지하고 몸을 당겼다 밀었다 하시는 중.
    그런데 그 나무가 경사로에 위치하고 있어서 어르신의 반대편은 뿌리가 반쯤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작지 않은 나무니 당장은 문제가 없어도, 저런 일이 반복되면 나무가 쓰러지겠다 싶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 어머니께서 연세가 드시고 난 후에, 복지관이나 주민센터 등에서 주관하는 여가/취미 과정에 참석을 많이 하시는 데,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이다보니 정부나 지자체의 복지 지원을 받는 분들도 많이 오시는 곳이었다.
    어머니께서 그곳 식당에서 식사를 하실 때면, 가끔 눈에 보이는 '진상'들이 있는데,
    양에 넘치는 음식을 가져와서 다 먹지 못하고 버리는 가 하면,
    엄청나게 많은 양을 받아와서 일부를 따로 싸서 가져가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런 분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무료로 식사를 하시는 분들임에도 그런다고.
    뭐 싸가지고 저녁에 또 드시려나보다 했지만, 어머니 보시기엔 옳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에 불편하셨던 모양이다.
  • 자주는 아니지만, 어머니는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에 유난히 불편해 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좀 쉽게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할 수 있던 사람에게, 오랫만에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상대방의 반응이 조금은 시큰둥함을 느낀 적이 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당시에 내가 했던 얘기는 누군가에 대한 험담이었음을 알고 속으로 꽤 부끄러워 했던 기억이 있다.
  • 그리고 오늘 이 산에서, 난 또 그런 나의 성향으로 누군가에게 오지랖을 떨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사람에게 이런 행동은 이렇게 좋지 않습니다 말을 한들, 그걸 바로 수긍하며 들어 줄 사람도 적을 뿐더러, 내가 항시 그 자리에서 모든 사람을 감시하며 참견하지 않는 이상은 그 나무를 지켜 낼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무는 사람들이 두 손으로 지탱하기 좋은 모습을 가지고, 그런 경사에 있었다는 이유로, 종종 사람들의 몸무게를 지탱하며 버티다가, 이내 뿌리를 노출되고 약해져서 쓰러지거나 말라 죽기 쉬운 운명으로 태어난 듯이 보인다.
    아마 내가 오지랖을 부렸어도 그 나무의 운명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겠다 싶었다.
  • 계속해서 산을 오르다보니 매미 나방이 더 많이 보였다.
    처음에 가졌던 생각처럼 이 매미 나방을을 죽이고 알을 최대한 없애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실제로 이 나방은 날고 있는 모습은 보지 못했고, 나무에 착 붙어 있는데, 크기는 엄지손가락 하나 정도이고, 몇마리가 겹치다시피 뭉쳐 있다.
    사실 저걸 어떻게 죽이나, 나무로 건드리면 갑자기 날아가지 않을까, 낮은 곳은 발로 밟을까, 독이 있다는데 무슨 해를 입지 않을까, 갖가지 생각으로 망설여지기도 했다.
  • 하지만 그 보다는, 그 나무의 운명과 같이, 내가 어떤 생명의 운명을 바꿀 수도 없고, 그럴 권리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비록 인간에게는 해충이라고 하지만, 어떤 생명에게는 익충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다람쥐의 먹이가 될지도 모르고, 새의 먹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덧붙여, 내가 보이는 몇몇 매미 나방을 죽인다 해도 이 산의 매미 나방 숫자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도 못할 뿐이고, 자연은 스스로 균형을 찾아갈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비록 자기 합리화일 뿐일 수도 있지만)

2020년 6월 24일 수요일

뒷산을 오르며

날씨가 더워지니 집안에 지내기가 답답하다.
주말 오후에 뒷산에 올랐다.

제법 힘이 드는 산행이고, 주말이라 그런지 등산객도 많았고, 가족들이 함께 오르는 경우도 많았다.



  1. 깔딱 고개를 힘겹게 헉헉거리며 오르는데, 뒤에서 따라오는 젊은이가 있다.
    얼굴에 여드름 자국이 많은 중고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다.
    산에는 저런 젊은이는 잘 오지 않는다. 약간 숨은 차지만 거뜬하다는 표정.
    오르다 말고 뒤를 내려다 보더니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경사로 계단에 앉았다.
    (지자체에서 방부목과 삼베로 엮은 가마니 같은 것으로 경사로의 계단을 만들었다)
    학생에게 거기 앉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만약 경사로 위에서 사람이든 물건이든 굴러 떨어지면 다칠 위험이 있다고...
  2. 산 정상에 올라서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아까의 그 남학생과 아버지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올라 왔다.
    정상의 표시석을 보고 아버지는 학생에게 여기 서보라며 사진 찍을 자세를 취하지만,
    남학생은 쭈뼛거리고 손사래를 친다.
    아버지가 함께 찍자고 표시석 옆에 서서 셀카 자세를 취하자 그제서야 마지 못해서 옆에 선다.
    제가 찍어 드릴까요? 말을 건네자 흔쾌히 스맛폰을 건네 주신다.
    사진을 찍어 드리고 학생에게 한마디 또 건넨다.
    아버지가 찍자고 하면 찍는 거야. 이것도 얼마 안남았어.
    나중에 생각하니 공연히 꼰대짓 한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사실 그 학생에게서 나의 모습을 본 거였고, 그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이었던 거였다.
  3. 이제 슬슬 하산을 하고 있는데, 저기 아래쪽에 두명의 아이들과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아이들은 5살 8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들, 아버지는 3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지나가며 보니 뭔가 문제가 있었나 보다.
    큰 아들은 뭔가 삐쳐 있어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있었고, 작은 아들은 아버지 옆에서 약간 눈치를 보는 듯한 상황. 아버지도 뭔가에 화가 난건지 근엄한 표정.
  4. 큰 아들은 아버지와 거리를 두며 먼저 내려 갔다가, 아버지가 시야에서 사리지면 좀 기다리고, 다시 거리가 좁혀지면 먼저 내려가고를 반복했다.
    이 큰 아들과 몇번 눈이 마주 쳤는데, 얼굴을 보니 만만해 보이는 성격이 아닐 듯 했다. 앙 다문 입의 고집도 고집이지만, 눈매의 날카로움은 불같은 성격을 암시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버지를 봤는데, 이 아버지도 역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아 보였다. 어쩐지 아들과 닮은 듯 하면서도 조금은 달라 보였다.
    아마도 아들들이 어머니를 더 닮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러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성격이 꽤나 자주 충돌하겠다 싶었다.
  5. 그 아버지와 아들의 불편한 사이는 보는 나로 하여금 꽤 불편함을 일으켰다.
    그냥 싸워서 분위기 안좋네, 얼른 화해하지 이런 정도의 불편함이 아니라,
    굉장히 우울한 집안 분위기, 그리고 그것이 이번 한번의 문제가 아니라 반복되었을 거라는 예감, 온 집안에 감도는 긴장감, 그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야하는 가족들...
  6. 산을 다 내려와서 보니, 공원의 공터에서 한무리의 소년들이 공차기를 하며 뛰어 놀고 있다. 한쪽에서는 물총 놀이를 하는 계집아이들도 있었고, 그래서인지 급수대 아래쪽에 물이 홍건히 고여 있었다.
    한 남자 아이가 급수대에서 물병에 물을 담고 있었는데, 그게 물을 담는건지, 물 장난을 치는 건지는 모르겠다. 나도 옆에서 물을 받아 마셨다.
    마침 공차기를 하던 무리의 공이 급수대 쪽으로 굴러왔고, 고여있는 물에 빠지고 말았다.
    일부가 당황하는 듯 하더니, 그 중의 하나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거기서 물장난 하지 말라고!
    뭐 물장난이 물을 좀 보탰을 지언정, 물장난 때문에 물이 고인건 아닌거 같고, 물이 고여 있으니 언젠가 공이 물에 빠지는게 당연해 보이는데도 물을 받던 소년에게 화를 낸 것이다... 사실 소년이 물장난을 안해도 물은 빠지지 않고 고여 있었다.
    옆에서 이걸 보다가, 왜 화를 내냐고 웃으며 말했지만,
    그렇게 화를 내는 소년이 참 어이가 없었다.
    아까 산에서 보았던 부자의 모습이 또 다시 떠올라 조금은 더 우울해졌다.

2020년 6월 5일 금요일

[영화] 기생충

너무나 유명해진 영화
드디어 봤다.

헐리우드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오스카 상 수상에 불만을 표한 이유도 알만 했다.

아시아 특별 전형이라거나 지역 균형 수상이라는 표현도 가능은 할 수 있겠구나 싶다.


영화는, 일단 재미는 있다.

마치 영화 스팅이나 오션스 일레븐처럼 잘 짜여진 사기극을 벌여가는 일가족의 능수능란함.

그리고 이들의 사기극이 탄로나지 않을까 계속 마음 졸이며 영화를 보게 된다.


영화의 시작부터 이런 긴장감을 유지시키며, 사기꾼 가족을 불안하게 만든 건 "냄새".


중반 이후에 영화의 반전이 시작되고 이후에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막장으로 치닫는 몰락.

그 몰락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는 안타까운 몸부림들.


신분 상승과 몰락

희망의 차오름과 절망의 차오름

짜릿한 오름과 아찔한 추락

감정의 오름과 내림이 현란한 영화다.


냄새, 햇빛, 물
중요한 요소들


많은 평론가들의 해설과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그렇게 들으니 참 오묘하기도 하며, 잘 짜여졌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주 세심하게 관찰해서 나온 분석적 결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렇게 관심을 받으면 더 놀랄만한 작품들도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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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었던 어느 평론가의 분석은,
가난하지만 웃고 있는 기택의 가족 vs 부유하지만 웃는 표정이 적은 박사장의 가족
개개인이 특출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가난한 가족 vs 별 능력 없는 박사장의 가족
법을 어기고 사기를 밥 먹듯 치는 가난한 가족 vs 법을 지키는 부유한 가족
이렇게 기존의 선악, 빈부, 서민과 특권층의 프레임의 특징을 꼬아버려서 참신함과 불편함을 유발하게 만들었다는 분석이 꽤 재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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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니 종종 평론가들의 분석과 평가에 동의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있는데, 그건 그들이 너무 영화에 눈이 멀어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일반 관중은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본것만을 생각하고 느낀 것만을 얘기하는데, 평론가나 영화 관계자들은 그것 이전의 과정, 즉 제작의 단계부터 공감을 하는 듯 하다.
대체 이런 얘기를 어떻게 생각했으며, 이런 얘기를 이렇게 풀어나가는 것이나, 이 상황을 이렇게 보여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 냈을까를 감탄하는 듯 하다.
음악으로 치자면, 일반인은 음악을 듣고 오 마음에 든다, 좋다, 혹은 별론데, 그냥 그렇군 이런 생각에서 머물지만, 같은 음악인 입장에서는 이런 멜로디 진행은 무엇과 비슷하니 평범하고 박자만 약간 변형을 준 것이네, 혹은 이런 멜로디 조합을 대체 어떻게 생각해 낸 것이냐, 이런 음의 조합이 이런 느낌을 주는 걸 어떻게 알고 만들었을까 이런 식으로 평하는 차이가 아닐까 싶다.

뭐가 좋은지는 모르겠다.
이런 걸 보고 아는 만큼 보이네, 일반인 눈에는 안보이는 거야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대중문화란 대중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닐런지.
만약 그들이 말하는 그 경지에 이르렀을 때, 단순히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희열의 요소가 있다면 그 경지가 대중에게도 필요한 수준이라는 것을 인정하겠지만...

[영화] 컨택트 (원제 Arrival) 2016

원제가 Arrival인데, 컨택트라는 제목으로 개봉.

1997년에 개봉했던 조디 포스터 주연의 명작의 제목은 콘택트.

한글자만 바꾸어서... (콘 → 컨)


유명한 감독의 명작이라며 칭찬이 자자하지만, 당시에도 보지 않았다.

대충 귀동냥으로 들어 보니, 언어가 달라서 사물에 대한 인식과 표현도 다른 외계인과의 소통, 특히나 외계인의 언어가 시간에 대한 인식 체계가 달라서, 그들이 과거와 미래를 함께 본다는...식의 설명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최근에 또, 이런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은 인간의 환상일 뿐이다,...

대체 시간의 흐름이 없다는 이런 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몰랐고,
지금까지는 그냥 그들끼리만의 ~인 척 하는 방식이라고도 치부해 버렸다.

그런데 자꾸만 들어서인지, 아니면 내가 시간에 대해서 너무 무지해서 그런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화가 그 실마리를 제공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리고 봤다.


누군가를 비난한다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아마 그러고 나면, 누군가를 비난했던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고, 없어보이고, 못나고, 덜 떨어진 인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얘기했던 이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않겠다.

어쩌면 내가 잘 못 이해한 것일 수 있을테고,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사실은 그 이유 때문에 이 포스팅을 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어떻게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기억하기 위해서...


내가 본 바로는, 이 영황의 이야기는 우주인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소통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언어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며, 시간에 대한 이야기도... 아마 아닐 것이다.

이 영화는 인생에 관한 이야기 이고, 인생에서의 선택에 관한 영화이며, 인생에서의 선택이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인지, 그래서 우리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진정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결말을 보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그 끝이 어떨지 알고 있다해도, 우리는 중요한 선택을 바꿀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어찌보면, 이미 결정된 것과 다르지 않은 행로를 밟아 나가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루이스는 자신이 딸을 낳을 것이고, 어떻게 기를 것이며, 딸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미리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그 선택을 바꾸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보았던 그 미래를 향해 따라 간다. (아니 가게 될 것이다?)

외계인이라는 존재와 그 존재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미래를 볼 수 있는 루이스가 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설정을  함으로써,
루이스가 미래를 본다는 것에 대한 타당성을 부여한 것일 뿐이다.

만약에 그냥 루이스는 미래를 볼 수 있거든. 그래서 말야... 이렇게 시작하면 스토리는 그냥 막 지어낸 뇌내 망상 수준에 머무를 뿐이다.
그래서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어렵고 드문 일이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위해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서 인식이 가능한 언어와 그걸 사용하는 외계인이라는 도구(!)를 가져 온 것 뿐이었다.

사실 영화 상에서는 그들의 언어 체계를 매우 분석적으로 다루는 듯이 보이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의 언어를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혹은 핵심적인 이론이나 실마리는 없다.
그냥 열심히 하나씩 분석하다 보니 알아 듣게 되었음. 이게 전부다.
칠판에 영어 쓰고 실물을 보여주거나 행위로 보여주는 식으로, 외계인에게 영어를 가르쳤는데, 결과는 영어를 쓰는 외계인을 보는 게 아니라, 외계인을 쓰는 인간이 되었더라는...
그러니 그들의 언어가 대체 어떻길래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서 인식이 가능한지 설명을 바라는 건.... 상상만으로라도 좀 힌트를 줬으면 싶었지만 역시나 없었다.

시간에 대한 목마름으로 이 영화를 본 내게는 이만 저만 실망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누군가 스크립트를 써 준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평론을 베껴서 나눠 가지기라도 했는지, 어째서 영화 평론가들의 평은 하나같이 외계인, 소통, 언어, 시간만을 다루고 있는 것인지...


예전에 이 영화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내 선택의 결과가 어찌 될지 안다면, 과연 내 선택을 바꿀 수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아무 거리낌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생각을 했던 이유는, 무언가 굉장히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였는데, 머리로는 확신이 들지도 않고 이쪽도 저쪽도 일장 일단이 있어 망설이고는 있지만,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느낌, 혹은 당겨지는 듯한 느낌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선택한 결과가 결코 좋다고 할 수도 없었는데, 어쩐지 거부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었다.
아직 미혼인데도 독립해서 나가 살겠다고 했던 선택이나, 대기업 직장을 그만 둔 일이나, 공동으로 창업했던 회사를 떠나게 되었던 일이나,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것들...
아무리 평행 우주와 다중 우주를 들먹이고, 다른 선택을 한 나와 세계의 또 다른 미래가 어딘가에 존재할 거라는 주장을 믿는다 해도, 몇몇 중요한 선택에서 다른 선택을 한 나를 상상하는 건 아주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결과가 이리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같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경우들이 있고, 그건 내가 벗어날 수 없는 나의 한계일 수도 있으며 또한 나의 변하지 않는 아이덴티티일지도 모른다고....

이 영화가 이런 생각을 그럴 듯한 상황으로 꾸며서 그럴듯 하게 설명한거라고 보인다.

아마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테드 창의 원작을 읽어 봐야하겠지만 말이다.

2020년 5월 30일 토요일

행복 사랑 자유

아름다운 말들이다. 아름다운 단어들이다.
생각만 해도 푹신하고 안락한 기분이 드는 단어들 아닌가?

그리고... 치명적인 독과 같은 단어들이기도 하다.

과연 저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
아마도 어떤 말로도 완벽하게 기술할 수는 없을테고,
누군가 그것을 시도해서 표현하고 나면 즉각적으로 그 표현의 허술함과 부족함에 허탈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저 단어들을 어떻게 배웠으며, 어떻게 익혔고,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고, 온갖 미사여구로 잔뜩 부풀려진 기대감이 가득하다 못해 터질지경이며, 어느새 인생의 목표가 되어 모든 것을 바칠 대상이 되며, 그것을 위해 현재의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이것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조금 오랜 시간을 그것을 위해 노력하다 보면, 한번쯤은 그걸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는 순간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였는 실망을 하고, 낙심하지만 또 다시 '진짜'를 찾아 떠나게 되곤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몇번을 반복하다보면 우리는 곧 의심을 하게 된다.

'정말 존재하는 걸까?'
'행복이란, 사랑이란, 자유란 것이?'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만약 내가 어떤 상황을 맞았을 때, 그것이 행복인지, 사랑인지, 자유인지 판단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행복이, 사랑이,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게 아닐까?



그리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면, 외부적인 조건이나 대상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사실 외부적인 대상, 즉 물질적인 것들은 대부분 소멸하거나 변하기 마련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닌 우리의 인식 자체가 변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사랑했던 사람이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그 대상의 변화보다는 나 자신의 인식의 변화에 기인하는 바가 더 지대하다.

행복이라 생각했던 상태가 유지될 수 없는 것 또한 상태나 조건의 변화보다는 자신의 인식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것들을 위해 우리가 바쳐야할 노력과 정열의 방향은 외부적인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인식을 바꾸는 것임은 명백하다.


결국 꿈속에서 파랑새를 찾아 떠났던 틸틸(치르치르)과 미틸(미치르)은 파랑새를 찾는 것에 실패하고 꿈에서 깨어서야, 항상 기르던 그 새가 파랑새였음을 깨닳았던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새가 파랑새였음을 깨닳아 안도하고 만족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 '파랑새'라는 것에 덧씌워져 있던 부풀리고 왜곡되어 있던 기대감의 상실을 슬퍼할 수도 있으며,
결국은 세상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허무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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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사실은 저 단어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공허함 그 자체라는 것에 있다.

이 단어들은 비어있기에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정의로 그 공허함을 채워 놓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고 사랑이라 믿으며 자유라 믿는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이 채워 놓은 그 정의들은 사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결핍과 욕망, 두려움에 대한 투영의 결과이다. 혹은 누구로부터 주입당한 타인의 정의인 경우도 있다.

아마도 스스로가 정의한 행복과 사랑과 자유를 이루었을 때, 잠시나마 만족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욕망이나 결핍을 채우고 두려움을 해소할 테니까.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그것이 '진짜'가 아닌 '가짜'임을 알게 될 것이다.

비어있는 것을 위한 헛된 노력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 단어들이 우리 인생에서 '독약'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독약'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2020년 5월 5일 화요일

꼰대와 문화

나도 오래된 사람이긴 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 중/고등 학생이었던 시절에는 "꼰대"라는 단어가 그리 흔하지는 않았다.
아니, 실제로 그걸 쓰는 부류가 있기는 했는데, 주로 동급생 가운데 양아치나 엽전(요즘의 일진을 당시엔 엽전이라고 흔히들 불렀다)쯤 되는, 소위 "불량 학생"들이 사용하는 그들만의 은어였다.
당시에 교실에서 그런 학생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간혹 이 단어를 듣곤 했는데, 당시에는 문맥으로 그 단어의 뜻이 "아버지"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네이버 국어 사전에는 늙은이 혹은 선생님을 이르는 은어라고 나와 있다.)

왜 아버지를 꼰대라고 부르는지는 지금도 알 지 못한다.

한참이 지나, 대학교를 가고 또래의 친구들이 군대를 다녀와서 군대 얘기를 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는 군대에서 그들끼리 사용하는 새로운 용어들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 가운데 우연히 들었던 용어는 "꼬질대다"라는 용어였는데, 대략적인 의미는 "시시때때로 간섭하거나 딴지를 걸어 사람을 괴롭히다"는 뜻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이다.)

꼰대와 꼬질대다는 같은 어원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표준어도 아니고 하나는 은어이니 어원이 뭐가 중요하겠는가만, 어떤 계층에서 널리 쓰였다면 그 단어가 이리저리 변형되어 활용되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만약 같은 어원을 가졌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도 될 만하지 않을까.

아버지나 선생님은 늘상 나에게 훈계하고 지적하고 고치려고 드니 말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게 반복되면 괴롭기 짝이 없는 것이고,
급기야는 저 사람만 봐도 기분이 좋지 않아지고,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고,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지고.... 한마디로 가시방석과 같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당시에는 그래도 이런 훈계를 마땅한 것으로 여겨 받아들이는 학생들이 많았나 보다.
유독 행실이 좋지 않은 학생들만, 자꾸만 반복되는 꾸짖음과 훈계에 지쳐,
꼰대라는 단어로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승화시켰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꼰대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심지어는 선생님이나 아버지, 혹은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 뿐이 아니라, 나이가 비슷한 또래에게도 "젊은 꼰대 = 영꼰"이라 부르며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단지 단어가 흔해진 것도 아니고, 꼰대라는 단어에 담긴 스트레스, 짜증의 정도가 약해진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현재에도 "꼰대"라는 단어는 많은 짜증을 내포하고 있고, 일정 부분의 증오심도 담고 있다.


이런 현상을, 주로 꼰대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젊은 층에서는, 사소한 일에도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여러가지 생활 관습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타인에 대한 간섭을 무례한 것으로 생각하는 관습,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습 등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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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얘기가 길어졌다.
그래서 대체 "꼰대와 문화가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

문화...넓게는 생활의 관습, 도덕, 예의, 생활 패턴... 이라는 것은 그 사회에서 무난하게 생활하기 위해서 지켜야할 것, 혹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광범위한 규칙(혹은 약속)을 말한다.
이런 문화는 문헌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며, 대부분은 부모 가족 형제 친척 친구 이웃 선생님 등 자주 접하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가르치고 배우면서 전해진다.
그리고 그런 문화 중 강한 금기에 해당되는 것은, 그 만큼 강하게 전수가 되는데, 가장 흔한 방법은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것이다.

흔한 예로, 금기가 되는 것을 모르고 범한 아동에게는 평생을 잊 못할 엄한 처벌이 내려지기도 하고, 그 모습을 다른 아동에게도 보여 줌으로써 강력한 경고로 삼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그 처벌을 받은 아동 혹은 그런 처벌의 광경을 목격하거나 들었던 아동은, 후에 성인이 되어서도 두려움을 지울 수 없게 되고, 비슷한 금기를 다시 목격하게 되었을 때 즉각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금기를 어긴 사람에게는 강한 분노를 표하거나 비난을 하게 된다.
다시 이런 비난을 받은 사람은 강한 두려움을 가지고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게 된다.

모든 문화가 이런 식으로 전수되지는 않지만, 강력한 금기일 수록 비슷한 방식으로 전수가 된다.
어쩌면 외부에서 전혀 다른 문화 체계를 가진 사람이 보기에는, 얼핏 무엇에 세뇌된 집단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문화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결국 이런 넓은 의미의 문화의 전수 과정이, 이제는 꽤 폭넓게 "꼰대짓"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시대에 걸맞지 않는 구태와 낡은 인습에 대한 자연스러운 거부 반응으로도 볼 수 있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전승받은 문화를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예전만큼 쉽지 않고 용기를 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그 폭은 줄어 들었으며, 줄어든 만큼 왜곡될 가능성은 높아지고 단절될 가능성도 높아진 것 만큼은 사실이다.

2020년 4월 18일 토요일

분석하고 따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습성

나에게 이런 습성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는데,
어쩌다 보니, 우연히 내가 이런 습성을 가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직적의 포스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최근의 사회적인 현상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져서,
그런 스트레스의 해소를 위해 원인을 따져가 보니,
문득 내가 이런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구나 싶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주 우스운 일은, 저런 습성이 매우 이성적인 단계를 거쳐야만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더라는 것이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서, 그것의 옳고 그름 혹은 죄측 우측, 혹은 1번 2번 하는 선택은 거의 직관적으로 일어나서 아무론 이성적 판단이나 추론이 개입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의 이성적 판단이나 추론들은, 직관적 선택이 일어난 후에, 그 선택을 정당화 하거나 강화시키기 위한 부가적인 작업으로 일어날 뿐이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건 내가 내린 선택에 대해서 다른 반대 의견을 너무 두려워하기 때문에 나의 선택에 대한 최소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반복된 작업으로 생긴 습성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런 습성은 결국 다른 의견이나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강하게,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배척을 하는 반응을 강화시켰고, 내가 무언가 실패나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현격하게 제한시켜 버렸다.


또 한가지의 좋지 않은 점은,
각종 전시회나 공연 등에서 그걸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에 아주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느끼기 이전에 나는 먼저 분석하고 판단하고 좋은 것 나쁜 것 가르며 채점을 먼저 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내린 가치나 점수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느껴야 할 것들은 느끼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덕분에 나는 그런 전시회나 공연 등의 감상문이나 후기를 적는 것이 매우 어렵고 불편했으며, 급기야는 전시회나 공연 자체를 회피하게 되었다.


아직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참 모호한데,
내 무의식에 존재하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직관적 판단이 앞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인지,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가 내린 선택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분석하고 판단하려는 습성이 있는 것인지,
감정적인 것은 나쁘다는 무조건적인 배척이 있는 것인지,
혹은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엮어져서 나타나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2020년 4월 14일 화요일

심어진 인식

최근의 코로나-19 바이러스에 21대 총선거가 겹치면서 네티즌들의 정치적인 언급이 부쩍 늘어난 상태다.
직접적인 정치적 의견은 이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일까,
코로나-19를 이용해서 은근슬쩍 정치적인 분열을 강요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각종 포털과 뉴스 기사 유튜브에서는 코로나-19를 주제로 다루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그것이 대중에게 도움이 되는 자식이나 사실 경험이기 보다는,
누군가를 비웃고 조롱하거나, 누군가를 칭송하고 찬양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였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 세상에는,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과 그걸 방해하려는 사람들만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단톡방에서는 지인들마저도 이런 흐름에 합류해서 정부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낸다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워야 할 일이지만, 워낙에 오래된 친구들이다 보니 그런 정도는 괜찮다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친 대화에 감히 반론을 제기하기도 어렵고, 그래봐야 뭐하겠나 싶어서 가만히 보기만 할 뿐이었다.

처음엔 꽤나 짜증이 났는데, 이걸 보고 참아내는데 도움이 될 만한 몇가지 생각이 있었다.

  1. 내가 반론을 제기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얘기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그걸 수용하고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이건 오랜 시간 함께 지내 본 경험이기도 하고, 나도 그랬었구나 하는 반성을 했기에 가능했다.
  2. 상대방이 그리 분노하고 화내는 것을 나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 만약 지금 다른 대통령이 행정부 수반이라고 생각하면 나도 같은식으로 분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내는 그 감정은 이해하지만,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3. 그들을 향해 다시 분노를 쏟아내면, 나 또한 마찬가지가 같은 수준이 되기 때문이다.
  4. 내가 상대에게 분노하는 이유가, 사실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라는 생각 때문이다.
    : 이건 다분히 개인적인 경우인데, 똑같은 반대 의견을 내놓는 사람이라 해도, 누군가가 더 미워보이거나 하는 것이다. 즉,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인데, 그건.. 어쩌면... 그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5. 우리들이 무언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들이 대단한 이성적 판단이나 충분한 경험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저항할 수 없는 시기에 심어졌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중에 마지막에 대해서 우연히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씨름 경기가 전국적으로 흥행을 했었다.
체급을 금강, 한라, 백두 등으로 나누었고, 추석같은 명절에 맞추어서 온가족이 함께 봤던 기억이 난다.
백두급이 가장 큰 체급이었고, 천하장사 타이틀은 그야말로 강자 중의 강자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당시에 이준희라는 장사가 있었는데, 나의 모친은 이준희 선수에 대해서 칭찬을 많이 하셨다.
이런 전국 씨름대회 이전부터 명성이 자자했던 모양인데, 모친이 그리 말씀하시니 나는 당연히 이준희가 최고야 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쩐지 전국 씨름대회를 하면 천하장사는 항상 이만기였다.
대체 어찌된걸까? 이준희는 항상 결승에서 이만기에게 무릎을 꿇었고, 나중에는 결승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나는 항상 이준희가 올라오는 경기만을 기대했고, 한동안은 역시 이준희야 하는 만족을 했지만, 언제나 마지막엔 실망했고, 나중엔 만족보다 실망이 많아져갔다.
그러면 지고 난 후에는 항상 분노에 차서 무언가 이유를 갖다 대곤 했다.
상대방이 샅바 싸움으로 비열하게 이겼네, 저렇게 이긴 건 천하장사도 아니야 하면서...

어린 내가 무엇을 알겠는가.
누구의 실력이나 체력이나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얼마나 잘 알겠는가.
그저 모친의 말만 들었고, 그건 진리라 생각했으며, 그것과 빗나간 현실에서는 무언가 음모론과 같은 이유를 생각하거나 했다.
어쩌면 모친도 그런 음모론적 이야기를 해서 내가 배운 걸 수도 있으며, 뉴스 따위에서 승패의 분석을 하면 그 가운데에서 내 입맛에 맞는 원인만 쏙쏙 빼서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모친에게 왜 이준희가 천하장사가 안되는지 묻지 않았던 것은 아직도 의문이다.


정치적인 견해와 편향성 또한 이와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위 TK라 불리는 지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사랑이 유다르니 그런 어른들의 얘기를 항상 듣고 자라난 어린이들은 이것이 진리이고 거스를 수 없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말을 듣게 되면 자동 반사처럼 분노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리라.
광주와 호남도 다르지는 않겠다.
특히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반정부 의식은 그 지역민들에게 트라우마 처럼 남아서 대대로 이어지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면, 대부분은 집안의 정치적 편향성이 대체로 일치하는 것이 일반적일 수도 있지만, 나는 왜.... 나는 왜 부모님과 정치적 의견을 달리 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국민은 지역에 구애없이 반일과 혐일이 기본 장착되어 있는데, 이것을 위의 사례와 비슷하게 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한가지 경직된 사고(반일)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박정희와 5.18로부터 야기된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한다.

2020년 4월 9일 목요일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인류의 나이테

전례 없는 흉폭한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와 갖가지 사회적 기 현상들이 매일 속출하고 있다.
누군가는 위험의 한가운데서 용기를 외치고 있으며, 누군가는 멀찌감치 떨어져 그들을 비웃는다.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내는 사람들,
인내와 내핍을 경험하는 사람들,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들,
누군가의 탓을 하고 원인자를 향해 분노를 내뱉는 사람들,
천태만상의 인간 군상들이 벌이는 이 사회상은 참말로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조금은 태풍이 잦아들었다 싶고 보니, 이것이 몇해전부터 회자되었던 블랙스완이었던 것이었다.
물론 블랙스완이라는 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알 수 없기에, 그걸 대비하고 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랬다면 그것은 이미 블랙스완이 아닐 것이었다.

이번의 사태는 또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거라 믿어 의심하지는 않지만,
최근의 신종플루, 조류독감, MERS, SARS와는 다르게 인류의 역사에 큰 나이테를 하나 남길만한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멀리, 이제는 많이 희미해졌고, 사회초년생들은 말로만 들어봤을 IMF사태...외환위기는 대한민국의 유래없는 위기와 충격이었다.
이미 20여년이 지나서 완치되었다 생각할 지는 몰라도, 그건 살아남은 사람들의, 피해가 적었던 사람들의 생각일지 모른다.
아직도 아픈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들 가운데, 외환 위기로 인해 몰락한 가정의 상처를 끄집어 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전세계를 강타한 신용위기, 미국의 리만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난 이 사건도 전 인류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아마도 아직도 이 여파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과 기업들이 존재할 것이며, 그 상처를 진하게 품고 있고 있는 이들은 더 많으리라 생각한다.


나무의 나이테는 성장통의 증거이지만, 인류의 나이테도 그런 것일까?
이 나이테의 이전과 이후에는 무엇이 달라질까?
인류는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이며, 새로이 인류를 지배하는 새로운 불문률은 무엇이 될까?

공포에 맞서는 사람들,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들,
공포를 외면하고 애써 태연한 척 하는 사람들,
이들 모두가 공포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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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쓴 사람은
레바논 태생의 미국 경제학자.
2007년에 자신의 저서 "블랙스완"에서 처음 이 용어를 썼다고 한다.
이번의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해서 그 자신은 "이것은 블랙스완이 아니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블랙스완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아주 낮은 가능성의 일이 발생해서 막대한 영향을 일으키는 것.
반면에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이미 예견되었던 사태인 만큼 블랙스완이 아닌 화이트스완이라고...
https://mothership.sg/2020/04/covid-19-black-swan/
https://youtu.be/Tb2pXXUSz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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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4일 토요일

타인을 깨닫게 하는 일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려고 시도하곤 한다.
거칠게 표현해서 강요라는 단어를 썼지만, 어쩌면 객관적인 제 3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단어가 제일 적절하다 싶어 사용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정말 옳다고 생각한다.
아주 강력하게, 의심의 여지 없이 말이다.
그렇기에 스스럼 없이 그것을 타인에게 전파하고, 설득하며,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사실 하나는,
강요하는 사람이 확신에 차 있을 수록,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만큼 더 의심스러워 한다는 점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예를 하나 들어 볼까?

타인을 웃게 하기 위해서, 내가 알고 있는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는 경우.
아주 재미있다고 얼굴에 웃음을 잔뜩 머금어 기대감을 잔뜩 갖게 만들고,
얘기하는 내내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얘기해 주고 나면
상대방의 반응은 대부분 기대에 미치지 못하곤 한다.
마치 빵 터져야 할 풍선의 바람이, 내가 웃을 때 마다 조금씩 빠져 나가서 풍선의 마지막 상태가 심각하게 쪼그라져 들어버린 것 같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 행위는,
타인이 행한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에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이 또한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므로 어느 정도 주관적이거나 사람마다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질타하고 꾸짖는 것으로 타인의 행동을 교정할 수 있을까?
꾸짖음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 꾸짖는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그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언제든 다시 반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대부분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가장 큰 교정 방법은, 그 행동의 피해자가 되어 보는 것이다.
본인 피해자가 되었을 때 별다른 불편함이나 고통이 없다면, 가까운 사람이 피해자가 되어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면서 간접 경험을 하는 것이다.


앞서 처음에 제기했던, 타인을 깨닫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타인으로 하여금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들을 문답법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함으로써 의문을 유발했던 것이다.


너의 지식을 타인에게 주입하려 하지 말고,
너의 도덕심을 타인에게 강요하려 하지 말고,
너의 설레발로 타인의 기대감을 부풀리지 말아라.

2020년 2월 24일 월요일

점점 강력해지는 적들

중국의 우한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코로나 바이러스, 올해 음력 설을 앞두고 발생하기 시작한 이 바이러스는 [우한 바이러스]로 불리다가, WHO에서 공식 명칭으로 COVID-19 로 지정하였고, [코로나 바이러스 19]로 불리고 있다.

아직까지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확진자와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바로 몇해 전에 발생했던 MERS나 SARS에 비해서 더 치명적이라는 점만은 확실해 보인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음에도 어이없게 전파된 지역 감염자에 의해 방역망은 허물어졌고, 이 감염자는 수퍼 전파자가 되어 대구 지역 일대를 초토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의 노력이 헛되이 무너졌음은 물론이고, 호미로 막던 걸 가래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며, 이제는 사실 상, 전 국민이 발병 의심자가 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우려마저 생기고 있는 실정이다.


가만히 이 상황을 보고 있노라니, 일본의 애니메이션인 에반게리온이 떠 올랐다.
"사도(使徒)"라는 정체불명의 파괴자가 지속적으로 출현하여 지구와 인류를 위협하는 것인데, 에반게리온이라 부르는 거대 로봇과 파일럿이 매번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 사도를 제압하곤 한다.
하나의 사도를 제압하고 나면, 로봇이나 파일럿이 크게 부상 당하고 파괴되는 일은 일상적인 일이고, 얼마 지난지 않아 또 다른 사도가 출현하는데, 앞선 사도보다 더 강력하고 뛰어나기에 상황은 점점 암울해져 간다....

마치 우리가 겪고 있는 바이러스의 공포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 공포...
가까스로 치료제 개발...
또 다른 더 강력한 바이러스 출현.... 기존의 치료제는 무쓸모...
....

하기사, 많은 어린이 만화들도 다 그랬다.
드래곤볼이야말로 점점 더 강해지는 적들과 주인공들, 그리고 그 규모까지 어마어마해져서, 급기야는 선을 넘었다고 욕먹기까지 하는 상황이고,
몇해전에 영화화 되었다는 퍼시픽림도 비슷한 상황들의 전개...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면,
질병이나 바이러스 뿐 아니라, 자연 재해마저도 더 막강해져 간다는 느낌이다.
왜 태풍이나 지진의 규모나 강도가 더 세지고 있는건지, 한여름 폭염의 최고 온도나 연속 열대야 일수는 무시무시하게 늘어가고, 올해 초까지 호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화재까지...


인간들이 자연을 더 많이 깊이 이해하고, 자연 현상에 대한 대처 능력이 한단계 레벨 업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자연의 횡포는 두단계 레벨 업 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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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재미있는 상상을 해 보자.

바이러스가 인체에 들어와서 자신을 복제하면서 증식하는 것을,
우리 인간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인간이 생각하는 지구라는 것은 기껏해야 바이러스가 보는 인간 정도의 하나의 생명체.
바이러스는 숙주 안에서 계속 복제하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데,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숙주가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게 되고, 결국 바이러스 자신까지도 죽을 수 있지만, 과연 바이러스가 그걸 염려해서 자기 복제를 자제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지구의 환경을 염려해서 환경 보호를 해야 한다는 일부 사람들이 있지만, 과연 인간들이 그들의 탐욕을 버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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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19일 수요일

화 날 때 하는 습관적인 행동

화가 날 때 하는 행동이 무엇이 있는가?

소리지르기, 잠자기, 술 마시기, 폭식, 욕하기, 이불킥

내가 주로 했던 행동은 욕하기?

화를 내게 했던 대상에 대해서, 혹은 부끄러운 나 자신에 대해서, 입 속으로 혹은 입 밖으로 욕을 했다.


그런데, 욕을 한다고 해서 화가 풀리거나 부끄러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화를 풀거나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욕을 했던 게 아니었다.

그냥, 그건 습관이었다.

화가 나거나 부끄러울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사적인 행동 같은거였다.

욕을 하고 나서는, 화나는 일, 부끄러운 일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일을 하는 거였다.


사실은, 아주 단기적인 해법이지만,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것이, 화를 풀거나 부끄러움을 잊는 직접적인 해결법이었다.
욕은 단지 화가 나거나 부끄럽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연 반응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일에 집중을 하는 것은 아주 단기적인 해결 방법이라, 다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시 화 나는 일 부끄러운 일이 생각나게 된다.
그리고는 다시 욕하기와 이어지는 다른 생각, 다른 일로 이어진다.


어쩐 일인지, 나 혼자지만, 욕을 하는게 너무 반복되다 보니 나 자신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방법을 바꿔 보기로 했다.

감사하기로 했다.
나를 화나게 했던 대상에 대해서, 내가 부끄러워졌던 일(상황)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해서 말했다.
그게 진심은 아닐 것 이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게도, 마음은 아주 편해졌다.
반복을 하면 할 수록, 나 자신이 낮춰지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부끄러움은 당연한 것이 되고, 그러면서 마음이 진정이 되는 듯 했다.

아직은 시작 단계라 잘 모르겠다.
아마도 더 반복하면, 정말로 상대에게 감사한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2020년 1월 13일 월요일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어록(?)처럼 따라 다니는 이 문장은,
내가 알기로는 한때 전세계적으로 열풍이었던 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바로 『시크릿』이라는 책이었는데,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한치의 의심도 없으면, 그 즉시 이루어 진다는 내용이었다.
조금 황당한 주장인데, 책의 내용이라는 것도 문장보다 쓸데 없는 삽화가 더 많고, 몇가지 사례와 함께 비슷한 류의 주장이 담겨 있는 이전의 여러 출판물의 발췌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을 읽을 즈음에 읽었던 책으로 『신과 나눈 이야기』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주제는 비슷하지만, 책의 구성은 주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쓴 것이었다.
내가 알기론 이 책도 꽤 많은 인기를 얻어서 영화화까지 된 것으로 안다.


이성주의자, 무신론자에게는 이런 류의 주장은 그저 콧방귀만 뀌게 만들 한심한 주장이긴 하지만, 그냥 무시해 버리기엔 내 안의 무언가가 저항하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나야 원래는 신비주의자에 가까워 온갖 음모론과 UFO, 오파츠(OOPARTS) 따위에 흥미를 가졌었지만, 그런것들이 나와는 거의 상관이 없더라는 경험, 그런 것들에 심취할 수록 현실의 궤도에서 이탈하여 오히려 뒤쳐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더해져, 지극히 논리적이고 명확한 증거가 아니면 믿지 않기로 "의지"를 다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어쩌면 예전의 감성적인 경향 때문에 이런 무속신앙과도 같은 근거 없는 주장에 끌리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름의 변명을 하자면...

일부 집단 혹은 일정 정도 이상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믿음이 있다면, 그것이 정말 황당무계하고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될 지경이라해도 문득 이런 두려움이 든다.
저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기에 앞서서 언급한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돕는다'는 식의 구전(?)을 떠 올릴 수 밖에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실제 사례를 제시할 수는 없다.
그건 아마도 사람들의 믿음 자체를 데이터로 수집하기도 어렵고, 그것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 알 수도 없으며, 그걸 기록으로 남긴 예가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례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취재를 통해 주변인이나 인근의 이웃들을 통해 듣게 되는 귀동냥, 귓속말, 소문 따위의 불분명한 형태이며, 그나마도 일이 일어나고 난 후라 사람들의 기억이 유리한 쪽으로 편향되거나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많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건 어떨까?
과거 오랜 시간 동안 귀신(유령)의 존재에 대한 전래, 이야기, 믿음 같은 것들이 꽤 흔했는데, 최근에는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는 사람도 점점 적어지고 있으며, 강하게 부정하는 의견들도 늘어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그 이유를 단순히 과거의 사람들은 무지하고 겁이 많아서 믿었고, 현대인들은 많이 배우고 세상에 두려움이 줄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혹시,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를 믿었던 시대에는 정말로 귀신이 존재했던 것이고, 현재에 귀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면서 실제로 귀신의 존재가 줄거나 흐릿해졌다고 볼 수는 없을까?

또 이런 예는 어떨까?
최근의 부동산 시세들은 무서우리만치 급등하고 있는데, 꽤나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의 거품과 거품 붕괴에 따른 폭락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런 폭락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닐까?

곰곰 생각해 보면, 폭락을 원하는 사람들의 바람이 그리 간절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폭락을 바라는 사람들보다 폭등이나 보합을 바라는 사람이 더 많거나 더 간절할 수도 있고, 폭락을 바라는 마음 속의 혼돈(이건 남들 다 잘되는데 나만 안되니 그냥 모두 다 망했으면 하는 마음과 그래도 최소한 그 여파가 나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았으면 하는 식의 상반된 마음이 공종하는 혼돈을 말한다.)이 그 간절함을 약화시켜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어떤 간절함이란 범위가 좁고 구체적일 수록 더 강해지고, 범위가 넓고 두루뭉술해질 수록 더 약해지는 듯 하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뭔가를 원하고 갈구하지만 그런 것들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건 몇가지 방해 요소들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좁은 범위의 구체적인 바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간절함이 약해져서.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누군가가 있거나, 내가 원하는 것의 반대를 원하는 누군가가 있어서 충돌하는 경우.
자연의 힘과 같은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원하는 경우.
등이 있을 수 있다.

이 가운데 무엇이 가장 강력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간절하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과 정성으로, 저항하는 것들을 최대한 제거하거나 완화시킨 후에, 우주가 도와주기를 바래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까지 쓰고 보니 결국은 돌고돌아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한가지 더 첨언을 하고 싶은게 있는데, 그게 소위 말하는 사람들의 저주라는 것이다.

역사가 오래되고 비슷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뿌리내린 듯 살아온 사람이 많은 나라들은 관습이나 풍습이라 불리는 생활 방식/금기 등이 존재한다.
예의라고 하는 것들은 조금 더 체계화된 이런 생활방식을 이르는 그럴듯한 용어라 생각하는데, 이것의 핵심은, 여러 사람들이 모여살다보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기 위한 가이드 정도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리고,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고 미움을 받게되면, 앞서서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더 증가하게 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원한이 깊은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힘이 허용하는 한에서 간절하게 상대를 해꼬지 하고 싶어할 것이다.
옆에서 누군가가 도와줘도 바라는 바를 이루기 어려운 마당에, 누군가가 방해하고 딴지를 건다면...

착하게 살고, 이웃에게 친절하고,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이런게 쓸데 없는 듯 보이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 보일지 몰라도, 적어도 중요한 시기에 내 발목을 잡을 사람을 줄여주는 것이고, 그게 어른들의 공연한 잔소리가 아닌 "예의"라는 이름의 생활의 지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