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30일 토요일

행복 사랑 자유

아름다운 말들이다. 아름다운 단어들이다.
생각만 해도 푹신하고 안락한 기분이 드는 단어들 아닌가?

그리고... 치명적인 독과 같은 단어들이기도 하다.

과연 저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
아마도 어떤 말로도 완벽하게 기술할 수는 없을테고,
누군가 그것을 시도해서 표현하고 나면 즉각적으로 그 표현의 허술함과 부족함에 허탈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저 단어들을 어떻게 배웠으며, 어떻게 익혔고,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고, 온갖 미사여구로 잔뜩 부풀려진 기대감이 가득하다 못해 터질지경이며, 어느새 인생의 목표가 되어 모든 것을 바칠 대상이 되며, 그것을 위해 현재의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이것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조금 오랜 시간을 그것을 위해 노력하다 보면, 한번쯤은 그걸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는 순간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였는 실망을 하고, 낙심하지만 또 다시 '진짜'를 찾아 떠나게 되곤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몇번을 반복하다보면 우리는 곧 의심을 하게 된다.

'정말 존재하는 걸까?'
'행복이란, 사랑이란, 자유란 것이?'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만약 내가 어떤 상황을 맞았을 때, 그것이 행복인지, 사랑인지, 자유인지 판단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행복이, 사랑이,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게 아닐까?



그리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면, 외부적인 조건이나 대상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사실 외부적인 대상, 즉 물질적인 것들은 대부분 소멸하거나 변하기 마련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닌 우리의 인식 자체가 변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사랑했던 사람이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그 대상의 변화보다는 나 자신의 인식의 변화에 기인하는 바가 더 지대하다.

행복이라 생각했던 상태가 유지될 수 없는 것 또한 상태나 조건의 변화보다는 자신의 인식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것들을 위해 우리가 바쳐야할 노력과 정열의 방향은 외부적인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인식을 바꾸는 것임은 명백하다.


결국 꿈속에서 파랑새를 찾아 떠났던 틸틸(치르치르)과 미틸(미치르)은 파랑새를 찾는 것에 실패하고 꿈에서 깨어서야, 항상 기르던 그 새가 파랑새였음을 깨닳았던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새가 파랑새였음을 깨닳아 안도하고 만족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 '파랑새'라는 것에 덧씌워져 있던 부풀리고 왜곡되어 있던 기대감의 상실을 슬퍼할 수도 있으며,
결국은 세상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허무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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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사실은 저 단어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공허함 그 자체라는 것에 있다.

이 단어들은 비어있기에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정의로 그 공허함을 채워 놓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고 사랑이라 믿으며 자유라 믿는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이 채워 놓은 그 정의들은 사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결핍과 욕망, 두려움에 대한 투영의 결과이다. 혹은 누구로부터 주입당한 타인의 정의인 경우도 있다.

아마도 스스로가 정의한 행복과 사랑과 자유를 이루었을 때, 잠시나마 만족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욕망이나 결핍을 채우고 두려움을 해소할 테니까.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그것이 '진짜'가 아닌 '가짜'임을 알게 될 것이다.

비어있는 것을 위한 헛된 노력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 단어들이 우리 인생에서 '독약'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독약'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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