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의 어록(?)처럼 따라 다니는 이 문장은,
내가 알기로는 한때 전세계적으로 열풍이었던 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바로 『시크릿』이라는 책이었는데,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한치의 의심도 없으면, 그 즉시 이루어 진다는 내용이었다.
조금 황당한 주장인데, 책의 내용이라는 것도 문장보다 쓸데 없는 삽화가 더 많고, 몇가지 사례와 함께 비슷한 류의 주장이 담겨 있는 이전의 여러 출판물의 발췌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을 읽을 즈음에 읽었던 책으로 『신과 나눈 이야기』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주제는 비슷하지만, 책의 구성은 주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쓴 것이었다.
내가 알기론 이 책도 꽤 많은 인기를 얻어서 영화화까지 된 것으로 안다.
이성주의자, 무신론자에게는 이런 류의 주장은 그저 콧방귀만 뀌게 만들 한심한 주장이긴 하지만, 그냥 무시해 버리기엔 내 안의 무언가가 저항하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나야 원래는 신비주의자에 가까워 온갖 음모론과 UFO, 오파츠(OOPARTS) 따위에 흥미를 가졌었지만, 그런것들이 나와는 거의 상관이 없더라는 경험, 그런 것들에 심취할 수록 현실의 궤도에서 이탈하여 오히려 뒤쳐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더해져, 지극히 논리적이고 명확한 증거가 아니면 믿지 않기로 "의지"를 다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어쩌면 예전의 감성적인 경향 때문에 이런 무속신앙과도 같은 근거 없는 주장에 끌리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름의 변명을 하자면...
일부 집단 혹은 일정 정도 이상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믿음이 있다면, 그것이 정말 황당무계하고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될 지경이라해도 문득 이런 두려움이 든다.
저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기에 앞서서 언급한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돕는다'는 식의 구전(?)을 떠 올릴 수 밖에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실제 사례를 제시할 수는 없다.
그건 아마도 사람들의 믿음 자체를 데이터로 수집하기도 어렵고, 그것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 알 수도 없으며, 그걸 기록으로 남긴 예가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례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취재를 통해 주변인이나 인근의 이웃들을 통해 듣게 되는 귀동냥, 귓속말, 소문 따위의 불분명한 형태이며, 그나마도 일이 일어나고 난 후라 사람들의 기억이 유리한 쪽으로 편향되거나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많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건 어떨까?
과거 오랜 시간 동안 귀신(유령)의 존재에 대한 전래, 이야기, 믿음 같은 것들이 꽤 흔했는데, 최근에는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는 사람도 점점 적어지고 있으며, 강하게 부정하는 의견들도 늘어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그 이유를 단순히 과거의 사람들은 무지하고 겁이 많아서 믿었고, 현대인들은 많이 배우고 세상에 두려움이 줄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혹시,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를 믿었던 시대에는 정말로 귀신이 존재했던 것이고, 현재에 귀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면서 실제로 귀신의 존재가 줄거나 흐릿해졌다고 볼 수는 없을까?
또 이런 예는 어떨까?
최근의 부동산 시세들은 무서우리만치 급등하고 있는데, 꽤나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의 거품과 거품 붕괴에 따른 폭락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런 폭락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닐까?
곰곰 생각해 보면, 폭락을 원하는 사람들의 바람이 그리 간절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폭락을 바라는 사람들보다 폭등이나 보합을 바라는 사람이 더 많거나 더 간절할 수도 있고, 폭락을 바라는 마음 속의 혼돈(이건 남들 다 잘되는데 나만 안되니 그냥 모두 다 망했으면 하는 마음과 그래도 최소한 그 여파가 나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았으면 하는 식의 상반된 마음이 공종하는 혼돈을 말한다.)이 그 간절함을 약화시켜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어떤 간절함이란 범위가 좁고 구체적일 수록 더 강해지고, 범위가 넓고 두루뭉술해질 수록 더 약해지는 듯 하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뭔가를 원하고 갈구하지만 그런 것들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건 몇가지 방해 요소들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좁은 범위의 구체적인 바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간절함이 약해져서.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누군가가 있거나, 내가 원하는 것의 반대를 원하는 누군가가 있어서 충돌하는 경우.
자연의 힘과 같은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원하는 경우.
등이 있을 수 있다.
이 가운데 무엇이 가장 강력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간절하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과 정성으로, 저항하는 것들을 최대한 제거하거나 완화시킨 후에, 우주가 도와주기를 바래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까지 쓰고 보니 결국은 돌고돌아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한가지 더 첨언을 하고 싶은게 있는데, 그게 소위 말하는 사람들의 저주라는 것이다.
역사가 오래되고 비슷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뿌리내린 듯 살아온 사람이 많은 나라들은 관습이나 풍습이라 불리는 생활 방식/금기 등이 존재한다.
예의라고 하는 것들은 조금 더 체계화된 이런 생활방식을 이르는 그럴듯한 용어라 생각하는데, 이것의 핵심은, 여러 사람들이 모여살다보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기 위한 가이드 정도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리고,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고 미움을 받게되면, 앞서서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더 증가하게 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원한이 깊은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힘이 허용하는 한에서 간절하게 상대를 해꼬지 하고 싶어할 것이다.
옆에서 누군가가 도와줘도 바라는 바를 이루기 어려운 마당에, 누군가가 방해하고 딴지를 건다면...
착하게 살고, 이웃에게 친절하고,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이런게 쓸데 없는 듯 보이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 보일지 몰라도, 적어도 중요한 시기에 내 발목을 잡을 사람을 줄여주는 것이고, 그게 어른들의 공연한 잔소리가 아닌 "예의"라는 이름의 생활의 지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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