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울증, 무기력감, 후회, 덧없음, 욕구 감퇴...
백수가 된지도 7년을 넘어 8년째로 가고 있다.
무언가 해야한다는 압박감도 스멀스멀 올라오가는 하지만 하고 싶지가 않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해야할 이유는 있지만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과연 내가 무엇을 한다면, 그것을 아무 문제 없이 제대로 해 낼 수 있기는 한 걸까?라는 불안감....세상에 변수는 너무나 많고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제대로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해 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세상을, 인간을, 아니 그냥 누군가에게라도 도움이 될 것인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겠지....그런데 득을 보는 사람보다 해를 입는 사람이 더 많지는 않을까? 어쩌면 나만 득을 보고 모두는 해를 입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기업, 직장, 작업, 노동,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정당하다고 알려진 모든 이윤 추구 행위는 사실상 법제화되고 부드러워진 강도행위는 아닐것인지....
내 배 불리려고, 등 따숩게 지낼려고 돈벌이에 나선다면 누군가는 내게 강도질을 당할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존재해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대 보아라.
인무원려난성대업(人無遠慮難成大業)
큰 뜻이 아니면 좋은 뜻이 아닐것이고, 오래 가지도 못하며, 이루어도 얻을 것이 없으리라.
꿈을 가져야 한다.
큰 꿈을 가져야 한다.
잠에서 눈을 뜰 때마다 읇조리게 되었다.
I have a dream.....
2014년 12월 30일 화요일
선한 사람은 세상을 선하게 만드는가?
연말이 되니 TV 방송들은 필수 주제처럼 지난 한해를 정리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
지난 한해동안 일어난 큰 일들, 사건들, 인물들...
2014년에 대한민국에서 화제의 인물로 꼽히는 사람 중의 한명은 프란체스코 교황이었다.
교황의 방한에 기인한 것이었겠지만, 프란체스코 교황은 어린이와 고통받는 이들에게 유난히 연민을 가지고 있는 듯 하여 많은 이들에게 마음속의 위안을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황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이며, 전 인류적인 선(善)을 세계 곳곳에 퍼뜨리고 있는 듯 보인다.
과연 교황의 이러한 행동은 전 인류의 선함을 이끌어내어 세상을 조금은 더 선하게 만들것인가?
전 인류의 선함이라니, 너무 광범위해서 판단이 어려운가?
연말이 되면 여기 저기서 선행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익명으로 심지어는 얼굴도 보이지 않고 몰래 기부를 하는 얘기들이 들려오고, 심지어는 이런 숨은 선행이 몇년을 이어져 온다고 까지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그 만큼 선해졌는가?
이것도 너무 넓어서 알기가 쉽지 않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 친척, 동료 등등의 소그룹 가운데 자신을 희생하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소그룹이 어떻게 변했는지 관찰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되겠다.
물론 변화를 줄 만큼의 선한 사람이 있는지와 꾸준하게 그 소그룹의 행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겠지만...
어쩌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게도 우린 아주 긴 시간 동안 영향력을 끼쳐온 선인(善人)도 알고 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좋은 예가 되어 주실 듯 하다.
사랑과 자비를 베풀기를 역서하셨다는 사실은 아주 많은 사람이 알고 있으니...
과연 인간의 세상은 2000년이 넘게 영향을 끼친 선인으로 말미암아 선해졌는가?
과거는 불확실한 기억력때문에, 혹은 인간의 바램 때문에 미화되곤 한다고 하는데,
현재의 인간 세상이 과거보다 선해지지는 않은 것 같다.
척박한 환경과 본능에 호소할 수 밖에 없을 정도의 극한의 상황이 많이 줄어들은 것은 사실이나, 그래서 드러나지 않은 인간의 악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현재에도 언뜻 언뜻 보이는 인간들의 악함이 사실은 빙산의 일각처럼 훨씬 많은 악함들의 우연한 돌출이라고 생각하다면...
과연 인간의 본성마저 변했겠느냐에 대한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게 전적으로 나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니, 개개인의 성향이 따라 다른 판단이 내려지리라.)
어쩌면 그나마 인류 가운데 나타나는 선인들이, 인간의 세상이 악해지는 속도를 이 정도로 유지해 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제목과 같은 의문의 시작은 작용-반작용과도 같은 인간 무리들의 자율적인 균형 맞추기 속성에서 비롯되었다.
인간 무리들이 어떤 지점에 균형을 맞추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무언가를 중심으로 균형을 맞추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전의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진보와 보수의 분열, 누군가 더 극단으로 치우치면 자연스레 반대편도 극단으로 치우치곤 한다.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될 수록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있다. 자본주의가 강해질 수록 사회주의적인 대안들이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천재지변으로 처참한 상황이 벌어지면 그걸 치료하고자하는 동정과 도움의 손길은 더 많아진다. 전쟁이 치열해 질수록 반전의 요구와 평화에 대한 갈망이 강해진다.
악은 선을 낳고, 선은 악을 낳는 것은 아닐까?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으니 한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다.
종종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동정심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 극적으로 불행에서 벗어나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면 어떨까?
분명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바라보는 시각은 동정심에서 질투심으로 바뀌곤 한다.
질투심은 너무하고 그냥 불행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안심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 경우가 더 많겠지...
그럼 반대로 생각해 보자.
누군가 좋은 부모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머리도 좋고 환경도 좋아 탄탄대로의 성공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겸손은 몰라 오만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를 질투하고 폄하한다.
어느 순간 뜻하지 않는 불행이 그를 덮쳐 일순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리고 그 동안 그가 알지 못했던 빈곤과 멸시를 겪게 되었다.
한없이 처진 어깨에 남루한 차림을 하고 속죄의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 다시 동정하게 될 것이다.
지난 한해동안 일어난 큰 일들, 사건들, 인물들...
2014년에 대한민국에서 화제의 인물로 꼽히는 사람 중의 한명은 프란체스코 교황이었다.
교황의 방한에 기인한 것이었겠지만, 프란체스코 교황은 어린이와 고통받는 이들에게 유난히 연민을 가지고 있는 듯 하여 많은 이들에게 마음속의 위안을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황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이며, 전 인류적인 선(善)을 세계 곳곳에 퍼뜨리고 있는 듯 보인다.
과연 교황의 이러한 행동은 전 인류의 선함을 이끌어내어 세상을 조금은 더 선하게 만들것인가?
전 인류의 선함이라니, 너무 광범위해서 판단이 어려운가?
연말이 되면 여기 저기서 선행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익명으로 심지어는 얼굴도 보이지 않고 몰래 기부를 하는 얘기들이 들려오고, 심지어는 이런 숨은 선행이 몇년을 이어져 온다고 까지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그 만큼 선해졌는가?
이것도 너무 넓어서 알기가 쉽지 않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 친척, 동료 등등의 소그룹 가운데 자신을 희생하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소그룹이 어떻게 변했는지 관찰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되겠다.
물론 변화를 줄 만큼의 선한 사람이 있는지와 꾸준하게 그 소그룹의 행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겠지만...
어쩌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게도 우린 아주 긴 시간 동안 영향력을 끼쳐온 선인(善人)도 알고 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좋은 예가 되어 주실 듯 하다.
사랑과 자비를 베풀기를 역서하셨다는 사실은 아주 많은 사람이 알고 있으니...
과연 인간의 세상은 2000년이 넘게 영향을 끼친 선인으로 말미암아 선해졌는가?
과거는 불확실한 기억력때문에, 혹은 인간의 바램 때문에 미화되곤 한다고 하는데,
현재의 인간 세상이 과거보다 선해지지는 않은 것 같다.
척박한 환경과 본능에 호소할 수 밖에 없을 정도의 극한의 상황이 많이 줄어들은 것은 사실이나, 그래서 드러나지 않은 인간의 악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현재에도 언뜻 언뜻 보이는 인간들의 악함이 사실은 빙산의 일각처럼 훨씬 많은 악함들의 우연한 돌출이라고 생각하다면...
과연 인간의 본성마저 변했겠느냐에 대한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게 전적으로 나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니, 개개인의 성향이 따라 다른 판단이 내려지리라.)
어쩌면 그나마 인류 가운데 나타나는 선인들이, 인간의 세상이 악해지는 속도를 이 정도로 유지해 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제목과 같은 의문의 시작은 작용-반작용과도 같은 인간 무리들의 자율적인 균형 맞추기 속성에서 비롯되었다.
인간 무리들이 어떤 지점에 균형을 맞추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무언가를 중심으로 균형을 맞추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전의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진보와 보수의 분열, 누군가 더 극단으로 치우치면 자연스레 반대편도 극단으로 치우치곤 한다.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될 수록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있다. 자본주의가 강해질 수록 사회주의적인 대안들이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천재지변으로 처참한 상황이 벌어지면 그걸 치료하고자하는 동정과 도움의 손길은 더 많아진다. 전쟁이 치열해 질수록 반전의 요구와 평화에 대한 갈망이 강해진다.
악은 선을 낳고, 선은 악을 낳는 것은 아닐까?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으니 한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다.
종종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동정심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 극적으로 불행에서 벗어나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면 어떨까?
분명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바라보는 시각은 동정심에서 질투심으로 바뀌곤 한다.
질투심은 너무하고 그냥 불행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안심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 경우가 더 많겠지...
그럼 반대로 생각해 보자.
누군가 좋은 부모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머리도 좋고 환경도 좋아 탄탄대로의 성공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겸손은 몰라 오만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를 질투하고 폄하한다.
어느 순간 뜻하지 않는 불행이 그를 덮쳐 일순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리고 그 동안 그가 알지 못했던 빈곤과 멸시를 겪게 되었다.
한없이 처진 어깨에 남루한 차림을 하고 속죄의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 다시 동정하게 될 것이다.
2014년 12월 29일 월요일
영화 건축학개론과 드라마 미생
꽤 인기를 끌었다던 건축학 개론을 어찌된 이유인지 아주 느즈막하게 보게 되었다.
겨우 케이블 TV에서 방영해 주는 걸로 보게 되었으니, 끝물에야 보게 된 셈이다.
그런데, 너무 보기가 힘들었다.
보는 내내 어찌나 눈물 콧물을 짜고 보았는지, 심지어는 어느 장면에선가는 일부러 채널을 돌리거나 외면해야 할 정도로...
웹툰으로 인기를 끌었던 미생도, 정작 웹툰으로는 본 적이 없었는데, 우연히 케이블 TV에서 방영해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20회 분량으로 제작된 모양이었는데 한번도 본방이 아닌 재방으로 보았지만, 후반부의 회차들은 여러분 눈물을 짜며 보았다.
이게 오리지널 웹툰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윤태호 작가는 참 어두운 사람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도 했더랬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왜 그리도 이 작품들은 힘이 들 정도로 눈물을 짜며 보게 되었는지...
틀림없이 특정 장면이나 상황들이 내가 겪었던 경험과 일치했으며, 그 때의 좌절과 절망이 되살아났음은 틀림 없다.
하지만 그 때의 내 감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좌절 혹은 절망이 공통적으로 기억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이고 치욕이고 분노였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아직도 이 경험들에 대해서는 다시 떠 올리는 것조차 두려워서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간혹 충격적인 사건을 망각하는 기억의 메커니즘이 자신을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것이라는 것이 이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겨우 케이블 TV에서 방영해 주는 걸로 보게 되었으니, 끝물에야 보게 된 셈이다.
그런데, 너무 보기가 힘들었다.
보는 내내 어찌나 눈물 콧물을 짜고 보았는지, 심지어는 어느 장면에선가는 일부러 채널을 돌리거나 외면해야 할 정도로...
웹툰으로 인기를 끌었던 미생도, 정작 웹툰으로는 본 적이 없었는데, 우연히 케이블 TV에서 방영해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20회 분량으로 제작된 모양이었는데 한번도 본방이 아닌 재방으로 보았지만, 후반부의 회차들은 여러분 눈물을 짜며 보았다.
이게 오리지널 웹툰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윤태호 작가는 참 어두운 사람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도 했더랬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왜 그리도 이 작품들은 힘이 들 정도로 눈물을 짜며 보게 되었는지...
틀림없이 특정 장면이나 상황들이 내가 겪었던 경험과 일치했으며, 그 때의 좌절과 절망이 되살아났음은 틀림 없다.
하지만 그 때의 내 감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좌절 혹은 절망이 공통적으로 기억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이고 치욕이고 분노였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아직도 이 경험들에 대해서는 다시 떠 올리는 것조차 두려워서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간혹 충격적인 사건을 망각하는 기억의 메커니즘이 자신을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것이라는 것이 이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2014년 12월 28일 일요일
직업의 귀천과 직업 선택의 기준
얼마전 친구와 얘기를 하던 중에 나온 화제가 직업에 관한 것이었다.
인생의 1차전을 일찌감치 마감하고 2차전에 차마 돌입하지 못한 상태로 장기 백수상태에 빠져 있는 나의 입장에선 반드시 숙고해 봐야할 주제이기도 하다.
화제가 돌아가게된 계기가 개그맨 박명수의 "젊어서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더울 때 더운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데서 일한다"는 어록(?)에서 시작이 되었다.
친구는 그 말에 대해 꽤나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유인 즉, 직업의 귀천을 너무나도 쉽게 평가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면서 덧 붙이기를, 흔히 부모들이 아이에게 하는 말 가운데, 지하철이나 아파트의 공사장 인부를 보면서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고 하는 말들이 얼마나 잘못된 교육인지를 성토했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오래된 나의 고정관념으로는 선뜻 수용하기도 쉽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주입식으로 교육을 받고 난 후에, 스스로 고민해 보지 않는 이상은 이러한 고정관념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어째서 우리는 육체로 하는 노동, 지저분한 환경에서의 작업, 위험한 환경에서의 일을 천한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책상앞에서 컴퓨터나 서류로 하는 일,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하는 일을 귀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귀천(貴賤)이라는 기준이 거슬린다면, 좋은 직업과 나쁜 직업으로 나누는 것은 어떤가?
직업에 대한 세간의 평가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듯 하다.
내 부모 세대에는 안정적인 직업이 최고였다 들었다. 은행원 교사가 그랬다고들 한다.
우리 세대에서는 고소득자가 최고였던 듯 싶다. 의사 변호사가 그랬다. (수입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정도의 결정요소가 되곤 하지만, 앞선 세대가 겪었던 경제적 불안 요소가 줄어든 후에는 차별화가 소득으로 이어진 듯 하다.)
어쩌면 우리 세대에는 소득과 사회적 지위가 모두 좋은 직업이 선호 되었던 듯 하다.
그리고 21세기의 시작을 전후하는 세대들은 다시 안전성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사와 공무원에 대한 선호가 높아졌지만, 반드시 앞선 세대와 같지는 않아 보인다.
대중화 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직업의 선택에 대한 폭이 넓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직업에 대한 귀천의 차별은 조금은 흐려지지 않나 싶다.
대화의 중간에 내가 제시한 반대 의견은, 직업의 귀천이 문제가 아니라, 직업을 내가 선택하느냐 혹은 선택되어지느냐의 문제라고 했다.
직업을 선택할 때, 그 직업에서 요구되는 조건이 높은지 낮은지에 따라 내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의 선택권이 제한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내가 원하는 직업에 대한 선택권이 나에게 주어지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직업이 없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 가운데에서 골라야 하는가가 되는 것이다.
(골라야 한다니 배부른 소리이겠지만 싫어하는 것들 가운데 고르라니....)
당연히 직업에 대한 만족도는 달라질 것이다.
더욱이 한번 갖게 된 직업들은 몇년 혹은 그보다 오래도록 나의 생활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에 인생에 대한 만족도 또한 달라질 것이다.
물론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갖게 된다해도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100% 보장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처음 시작할 때의 출발 선은 다르지 않겠는가?
직업의 귀천에 대한 아무런 숙고 없는 고정관념은 반드시 벗어나야 할 주제이다.
고정관념을 벗어난 후에야 직업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1차전을 일찌감치 마감하고 2차전에 차마 돌입하지 못한 상태로 장기 백수상태에 빠져 있는 나의 입장에선 반드시 숙고해 봐야할 주제이기도 하다.
화제가 돌아가게된 계기가 개그맨 박명수의 "젊어서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더울 때 더운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데서 일한다"는 어록(?)에서 시작이 되었다.
친구는 그 말에 대해 꽤나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유인 즉, 직업의 귀천을 너무나도 쉽게 평가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면서 덧 붙이기를, 흔히 부모들이 아이에게 하는 말 가운데, 지하철이나 아파트의 공사장 인부를 보면서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고 하는 말들이 얼마나 잘못된 교육인지를 성토했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오래된 나의 고정관념으로는 선뜻 수용하기도 쉽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주입식으로 교육을 받고 난 후에, 스스로 고민해 보지 않는 이상은 이러한 고정관념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어째서 우리는 육체로 하는 노동, 지저분한 환경에서의 작업, 위험한 환경에서의 일을 천한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책상앞에서 컴퓨터나 서류로 하는 일,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하는 일을 귀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귀천(貴賤)이라는 기준이 거슬린다면, 좋은 직업과 나쁜 직업으로 나누는 것은 어떤가?
직업에 대한 세간의 평가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듯 하다.
내 부모 세대에는 안정적인 직업이 최고였다 들었다. 은행원 교사가 그랬다고들 한다.
우리 세대에서는 고소득자가 최고였던 듯 싶다. 의사 변호사가 그랬다. (수입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정도의 결정요소가 되곤 하지만, 앞선 세대가 겪었던 경제적 불안 요소가 줄어든 후에는 차별화가 소득으로 이어진 듯 하다.)
어쩌면 우리 세대에는 소득과 사회적 지위가 모두 좋은 직업이 선호 되었던 듯 하다.
그리고 21세기의 시작을 전후하는 세대들은 다시 안전성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사와 공무원에 대한 선호가 높아졌지만, 반드시 앞선 세대와 같지는 않아 보인다.
대중화 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직업의 선택에 대한 폭이 넓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직업에 대한 귀천의 차별은 조금은 흐려지지 않나 싶다.
대화의 중간에 내가 제시한 반대 의견은, 직업의 귀천이 문제가 아니라, 직업을 내가 선택하느냐 혹은 선택되어지느냐의 문제라고 했다.
직업을 선택할 때, 그 직업에서 요구되는 조건이 높은지 낮은지에 따라 내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의 선택권이 제한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내가 원하는 직업에 대한 선택권이 나에게 주어지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직업이 없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 가운데에서 골라야 하는가가 되는 것이다.
(골라야 한다니 배부른 소리이겠지만 싫어하는 것들 가운데 고르라니....)
당연히 직업에 대한 만족도는 달라질 것이다.
더욱이 한번 갖게 된 직업들은 몇년 혹은 그보다 오래도록 나의 생활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에 인생에 대한 만족도 또한 달라질 것이다.
물론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갖게 된다해도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100% 보장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처음 시작할 때의 출발 선은 다르지 않겠는가?
직업의 귀천에 대한 아무런 숙고 없는 고정관념은 반드시 벗어나야 할 주제이다.
고정관념을 벗어난 후에야 직업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12월 23일 화요일
균형을 맞추기 위한 반대
연말이라고 고교동창들과 모임을 가졌다.
386의 끝트머리를 잡고 있는 세대인 우리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을 정도의 주입식 교육과 무조건적인 반공 교육, 충효를 절대 선(善)으로 떠받들어야 한다는 세뇌(?)교육을 받았었다.
그런 일괄적인 교육의 틀에 박혀서 나왔음에도 어찌 그리 각양각색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희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작은 모임의 정치적인 성향이 현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평균에 부합하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 그 안에서 상대적인 보수와 진보가 존재하며 중도와 극도가 존재한다.
내가 나 자신을 극도의 진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이 모임에서 극도의 보수로 불릴만한 K와 종종 대립각을 세우는 쪽은 나였다.
얼마전 헌법재판소가 내린 통합진보당의 정당 해체 결판은 적지 않게 충격적이었다.
사실 내 자신이 통진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몇백만의 국민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대한민국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결은, 그들의 사상이 적합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그들의 사상을 바꾸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에 존재해서는 안될 존재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쪼록 통진당의 반민주적인 당령과 당론이 대부분의 지지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간과되었기만을 바래야 할 상황이었다.
이 재판의 결과를 보면서, 박근혜가 결국은 해 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구나 기억할,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방송된 TV 토론회에서, 당시 통진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정희 대표와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박근혜 대표간의 날 선 공방.
특히나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이정희 후보의 발언이 모든 것의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발언의 진위,진정성,타당성 따위는 모두 제쳐두고라도 결과만을 보면 박근혜 후보에게 득이되었으며 이정희 후보에게는 독이 되었다. 그 결과는 얼마 되지 않아 선거의 결과로 나타났다.
이정희는 진보에서 그 발언으로 극단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극으로 달려가는 이정희 후보를 본 유권자들 중의 상당수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반대쪽인 보수 쪽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뒤늦게 이정희 후보는 사퇴하면서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로 결집을 시도했지만, 이정희 후보의 극단에 반발하여 뭉친 보수쪽은 더 단단하고 더 무거웠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던가
이정희 후보에게 놀라서 보수쪽으로 달려간 유권자들은 과연 이정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박근혜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었을 것인가?
내 수준이 이것밖에는 안되는지 몰라도 그저 느낌상,심정상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정희 후보가 너무 가는구나...
단순한 느낌만으로 이정희는 아니구나 박근혜가 불쌍하구나로 유권자들이 이동하지 않았을까?
이 개개인들이 내린 판단의 근거는 아주 희박하고 비논리적이니 이걸 대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다.
하지만....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유권자들은 전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움직였던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개개인들을 자세히 보면 별 깊은 생각도 없고 반(半)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듯 할 정도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 방정식의 변수들처럼 균형을 맞추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말이다.
어쩌면 K의 극단적인 보수 성향은 내가 극단적인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할 지라도,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면 그가 혼자 보수쪽으로 치달을 수는 없지 않을까?
내가 극단으로 가면 상대방 또한 극단으로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화합을 위해서는 내가 먼저 양보해야 한다는 말은 내가 중도를 향하면 상대도 중도를 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일까?
결국은 이것이 화합을 이루는 길이지만....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되어 있고, 자유도는 확장되게 되어 있고, 사상은 다양해지게 되어 있지 않은가?
어차피 나는 하나의 점으로서 어디엔가 위치하고 있다.
하나의 점은 필연적으로 어떤 점과는 반대편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점과는 가깝지만 동시에 다른 점과는 멀게 된다.
치우침은 필수 불가결하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모든 점의 중심이 되겠다고 한다면 이 또한 지극한 이기심이며, 오히려 모든 점으로부터 균등하게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혹은 하나의 점이 아닌 모든 점이 되고자 한다면 그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동일해 지는 것이다.
나는 하나의 점이다.
하나의 점은 치우침이다.
나의 치우침만큼 누군가는 반대로 치우친다.
그 치우친 누군가는 나와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치우친 누군가와 일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치우친 누군가가 존재해야만 나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386의 끝트머리를 잡고 있는 세대인 우리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을 정도의 주입식 교육과 무조건적인 반공 교육, 충효를 절대 선(善)으로 떠받들어야 한다는 세뇌(?)교육을 받았었다.
그런 일괄적인 교육의 틀에 박혀서 나왔음에도 어찌 그리 각양각색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희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작은 모임의 정치적인 성향이 현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평균에 부합하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 그 안에서 상대적인 보수와 진보가 존재하며 중도와 극도가 존재한다.
내가 나 자신을 극도의 진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이 모임에서 극도의 보수로 불릴만한 K와 종종 대립각을 세우는 쪽은 나였다.
얼마전 헌법재판소가 내린 통합진보당의 정당 해체 결판은 적지 않게 충격적이었다.
사실 내 자신이 통진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몇백만의 국민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대한민국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결은, 그들의 사상이 적합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그들의 사상을 바꾸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에 존재해서는 안될 존재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쪼록 통진당의 반민주적인 당령과 당론이 대부분의 지지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간과되었기만을 바래야 할 상황이었다.
이 재판의 결과를 보면서, 박근혜가 결국은 해 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구나 기억할,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방송된 TV 토론회에서, 당시 통진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정희 대표와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박근혜 대표간의 날 선 공방.
특히나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이정희 후보의 발언이 모든 것의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발언의 진위,진정성,타당성 따위는 모두 제쳐두고라도 결과만을 보면 박근혜 후보에게 득이되었으며 이정희 후보에게는 독이 되었다. 그 결과는 얼마 되지 않아 선거의 결과로 나타났다.
이정희는 진보에서 그 발언으로 극단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극으로 달려가는 이정희 후보를 본 유권자들 중의 상당수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반대쪽인 보수 쪽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뒤늦게 이정희 후보는 사퇴하면서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로 결집을 시도했지만, 이정희 후보의 극단에 반발하여 뭉친 보수쪽은 더 단단하고 더 무거웠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던가
이정희 후보에게 놀라서 보수쪽으로 달려간 유권자들은 과연 이정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박근혜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었을 것인가?
내 수준이 이것밖에는 안되는지 몰라도 그저 느낌상,심정상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정희 후보가 너무 가는구나...
단순한 느낌만으로 이정희는 아니구나 박근혜가 불쌍하구나로 유권자들이 이동하지 않았을까?
이 개개인들이 내린 판단의 근거는 아주 희박하고 비논리적이니 이걸 대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다.
하지만....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유권자들은 전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움직였던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개개인들을 자세히 보면 별 깊은 생각도 없고 반(半)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듯 할 정도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 방정식의 변수들처럼 균형을 맞추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말이다.
어쩌면 K의 극단적인 보수 성향은 내가 극단적인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할 지라도,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면 그가 혼자 보수쪽으로 치달을 수는 없지 않을까?
내가 극단으로 가면 상대방 또한 극단으로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화합을 위해서는 내가 먼저 양보해야 한다는 말은 내가 중도를 향하면 상대도 중도를 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일까?
결국은 이것이 화합을 이루는 길이지만....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되어 있고, 자유도는 확장되게 되어 있고, 사상은 다양해지게 되어 있지 않은가?
어차피 나는 하나의 점으로서 어디엔가 위치하고 있다.
하나의 점은 필연적으로 어떤 점과는 반대편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점과는 가깝지만 동시에 다른 점과는 멀게 된다.
치우침은 필수 불가결하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모든 점의 중심이 되겠다고 한다면 이 또한 지극한 이기심이며, 오히려 모든 점으로부터 균등하게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혹은 하나의 점이 아닌 모든 점이 되고자 한다면 그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동일해 지는 것이다.
나는 하나의 점이다.
하나의 점은 치우침이다.
나의 치우침만큼 누군가는 반대로 치우친다.
그 치우친 누군가는 나와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치우친 누군가와 일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치우친 누군가가 존재해야만 나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2014년 12월 16일 화요일
영혼은 존재하는가?
영혼은 존재하는 것인가?
많은 종교들이 인간의 영혼에 대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만, 종교에서는 그럴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은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인생이라면 내세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인간이 종교에 기대야 할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즉, 종교는 더 많은 사람이 더 강력하게 종교에 의존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생을 넘어서까지 연장되는 영혼의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혼이 단지 종교의 필요에 의해서만 생겨난 개념이라면, 이 만큼 널리 오랫동안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들의 본능적인 두려움-죽음-에 대한 위안이 되기도 하고 욕구-영생-에 대한 희방이 되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바램을 던져버리고 냉철하게 판단해 볼 때, 정말 영혼은 존재하는 것인가?
많은 종교들이 인간의 영혼에 대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만, 종교에서는 그럴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은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인생이라면 내세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인간이 종교에 기대야 할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즉, 종교는 더 많은 사람이 더 강력하게 종교에 의존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생을 넘어서까지 연장되는 영혼의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혼이 단지 종교의 필요에 의해서만 생겨난 개념이라면, 이 만큼 널리 오랫동안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들의 본능적인 두려움-죽음-에 대한 위안이 되기도 하고 욕구-영생-에 대한 희방이 되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바램을 던져버리고 냉철하게 판단해 볼 때, 정말 영혼은 존재하는 것인가?
- 영혼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 그 영혼이 여러 생에에 걸쳐서도 고유하게 유지된다고 가정하자
- 영혼은 불멸이라 소멸하지도 않는다고 가정하자.
- 그렇다면 영혼은 생성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지구의 인류가 증가하는 것을 설명하기에 곤란해 진다.
- 영혼도 새로 태어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고 가정하자
- 이는 인간의 육체보다 상대적으로 긴 기간일 뿐 마찬가지로 유한하며 시작과 끝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 영혼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는다면 그 영혼을 구분할 필요가 없으며 육체적인 구분보다 더 실체라 할 수 없게 된다.
-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 인간은 육체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다. 비육체적인 정신 활동은 단지 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것이거나 환상일 따름이다.
- 귀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 전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타자의 욕망 타자의 두려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게 되면서 나에게 일어난 큰 변화는, 자신에 대한 시각이 보다 객관화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이 늘어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객관화의 정도야 사람마다 천양지차이겠지만...
그리고 이런 변화는 축복이며 저주와도 같았다.
자신이 객관화 될수록 자신을 평가하는 일도 잦아지며 이 평가는 냉정해진다. 또한 냉정한 시각으로 과거의 자신을 되짚는 일은 분명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인식이 보다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는 느낌, 인식의 범위가 넓어지고 진실에 가까와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기쁨이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거듭하다보면, 내가 가지고 있던 욕망과 두려움이 점차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물론 완전한 근원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껍데기를 하나씩 벗겨내고 안으로 들어가 그 기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욕망과 두려움이 정녕 내가 스스로 원한것이었는지, 내가 겪었던 고통에 기인한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후에 좀 더 근원적인 실체에 접근하면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만, 현재로써는 욕망과 두려움의 상당 부분이 다른 사람에 의해 심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아마도 내게 이런 욕망과 두려움을 심어준 사람은 부모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무저항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욕망과 두려움 혹은 욕망을 유발할 무엇과 두려움을 가지게 될 무엇을 심어준 사람으로는 가장 큰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만한 영향력을 지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능할 것이다.
하나의 인간이 걸어가는 인생 길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이끄는 길, 그리고 두려움으로 막혀진 길의 사이라고 생각한다.
우연처럼 인생을 좌우할 큰 사건들이 인간에게 벌어지지만 그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반응은 각자가 가진 욕망과 두려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인간이 가진 욕망과 두려움은 인생을 좌우할 열쇠인 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욕망과 두려움을 후세에 전달하는 일은, 그 후세들이 갈 인생의 폭을 크게 제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크게 열려 있음에도 욕망과 두려움으로 아주 제한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틀림없이 슬픈 일이다.
인간이 태어나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그것을 열망할 때에 순순하게 그 자신이 될 것이다.
타자의 욕망은 그 원동력이 약하기에 쉽게 좌절될 수 있으며 이루고 난 후에도 자신이 아닌 타자가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스스로가 겪은 아픔과 고통만으로도 두려워서 피하게 되는 선택은 있게 마련인데, 거기에 타자의 두려움까지 더해져서 더욱더 선택이 폭이 좁아진다면, 가보지 못한 길은 너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보니 내가 살아온 길이 나의 길이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서글프다.
모쪼록 후세에게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투영시켜 그들이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이 늘어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객관화의 정도야 사람마다 천양지차이겠지만...
그리고 이런 변화는 축복이며 저주와도 같았다.
자신이 객관화 될수록 자신을 평가하는 일도 잦아지며 이 평가는 냉정해진다. 또한 냉정한 시각으로 과거의 자신을 되짚는 일은 분명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인식이 보다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는 느낌, 인식의 범위가 넓어지고 진실에 가까와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기쁨이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거듭하다보면, 내가 가지고 있던 욕망과 두려움이 점차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물론 완전한 근원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껍데기를 하나씩 벗겨내고 안으로 들어가 그 기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욕망과 두려움이 정녕 내가 스스로 원한것이었는지, 내가 겪었던 고통에 기인한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후에 좀 더 근원적인 실체에 접근하면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만, 현재로써는 욕망과 두려움의 상당 부분이 다른 사람에 의해 심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아마도 내게 이런 욕망과 두려움을 심어준 사람은 부모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무저항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욕망과 두려움 혹은 욕망을 유발할 무엇과 두려움을 가지게 될 무엇을 심어준 사람으로는 가장 큰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만한 영향력을 지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능할 것이다.
하나의 인간이 걸어가는 인생 길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이끄는 길, 그리고 두려움으로 막혀진 길의 사이라고 생각한다.
우연처럼 인생을 좌우할 큰 사건들이 인간에게 벌어지지만 그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반응은 각자가 가진 욕망과 두려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인간이 가진 욕망과 두려움은 인생을 좌우할 열쇠인 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욕망과 두려움을 후세에 전달하는 일은, 그 후세들이 갈 인생의 폭을 크게 제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크게 열려 있음에도 욕망과 두려움으로 아주 제한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틀림없이 슬픈 일이다.
인간이 태어나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그것을 열망할 때에 순순하게 그 자신이 될 것이다.
타자의 욕망은 그 원동력이 약하기에 쉽게 좌절될 수 있으며 이루고 난 후에도 자신이 아닌 타자가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스스로가 겪은 아픔과 고통만으로도 두려워서 피하게 되는 선택은 있게 마련인데, 거기에 타자의 두려움까지 더해져서 더욱더 선택이 폭이 좁아진다면, 가보지 못한 길은 너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보니 내가 살아온 길이 나의 길이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서글프다.
모쪼록 후세에게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투영시켜 그들이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 25일 화요일
죄의 탄생
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죄를 저지를 사람은 애초에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가?
혹은 환경으로 인해 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도록 강제되는 것인가?
환경적으로는 전혀 범죄를 저지를만한 동기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경우도 있으며,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죄를 짖는 것이 불가피해 보이는 상황에도 한심하다 싶을 정도로 순박하거나 청렴함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경우로는, 고교생의 신분으로 <초x이의 모험>이라는 게임을 개발해 재능을 인정받아 국내 대기업 S전자에 입사했으나 자신의 꿈과 동떨어진 업무로 회사에 흥미를 잃고 위조지폐를 만드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있었다.
후자의 경우로는, 반지하 월세에 세들어 살던 세모녀가 수입이 없어 살길이 막막해지자 번개탄을 피워 자살을 한 사건이 었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월세와 공과금을 유서와 함께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극과 극을 보여주는 경우이긴 하지만, 이들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범죄/사건/사고 등을 보면 죄를 저지르기 쉬운 유형의 사람이 있으며, 이들도 정도의 차이가 다양하여, 범죄를 유발하는 환경의 임계점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보는 것이 그나마 타당한 분석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보다 타당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려면,
사람마다 죄를 저지를 분야가 다른 것 같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금전적인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높지만 권력이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어 사람의 상해에 관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거의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설명한 "분야"는 앞선 <소인(素因)-환경> 가운데 <소인(素因)>과 같은 것이다.
종합하자면, 사람에 따라 죄를 저지르기 쉬운 정도의 차이가 있고, 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분야가 다르며, '정도'와 '분야'가 환경적 조건과 맞아 떨어지면 죄로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죄를 저지를 수 있는 분야가 있고, 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자신의 실체 가운데 일정 정도를 아는 방법이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피해야 할 환경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죄를 저지를 사람은 애초에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가?
혹은 환경으로 인해 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도록 강제되는 것인가?
환경적으로는 전혀 범죄를 저지를만한 동기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경우도 있으며,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죄를 짖는 것이 불가피해 보이는 상황에도 한심하다 싶을 정도로 순박하거나 청렴함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경우로는, 고교생의 신분으로 <초x이의 모험>이라는 게임을 개발해 재능을 인정받아 국내 대기업 S전자에 입사했으나 자신의 꿈과 동떨어진 업무로 회사에 흥미를 잃고 위조지폐를 만드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있었다.
후자의 경우로는, 반지하 월세에 세들어 살던 세모녀가 수입이 없어 살길이 막막해지자 번개탄을 피워 자살을 한 사건이 었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월세와 공과금을 유서와 함께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극과 극을 보여주는 경우이긴 하지만, 이들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범죄/사건/사고 등을 보면 죄를 저지르기 쉬운 유형의 사람이 있으며, 이들도 정도의 차이가 다양하여, 범죄를 유발하는 환경의 임계점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보는 것이 그나마 타당한 분석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보다 타당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려면,
사람마다 죄를 저지를 분야가 다른 것 같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금전적인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높지만 권력이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어 사람의 상해에 관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거의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설명한 "분야"는 앞선 <소인(素因)-환경> 가운데 <소인(素因)>과 같은 것이다.
종합하자면, 사람에 따라 죄를 저지르기 쉬운 정도의 차이가 있고, 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분야가 다르며, '정도'와 '분야'가 환경적 조건과 맞아 떨어지면 죄로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죄를 저지를 수 있는 분야가 있고, 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자신의 실체 가운데 일정 정도를 아는 방법이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피해야 할 환경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 노출증
가족들만 모여 있는 집안에서, 이웃들과 마주칠 수 있는 집 앞의 동네,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큰 길거리와 공공 장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적절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야 한다.
적절하다는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바꾸어 말하자면 최소한 가려서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사람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서로간에 노출이 가능한 정도가 묵시적으로 합의되어 있는 듯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친밀도에 의해 가능한 노출의 정도가 결정되곤 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이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의 노출 정도 또한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사실(?)이라 생각한다.
사실(?)에 물음표가 붙은 이유는, 누구도 명시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가르쳐 주거나 선언하는 것을 듣거나 본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겪어 본 바로는 그렇기 때문이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비교적 넓게 노출이 허용되는 감정이긴 하지만, 이 역시 제한되는 관계가 있다.
슬픔과 분노는 훨씬 더 노출이 제한되는 감정임에 틀림없다.
서로간에 묵시적으로 합의된 감정의 노출제한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의 당혹감은 마치...
꽤나 격식을 차리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웃통을 벗어 제치고 바지를 내린다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중요하고 숨기고 싶어할만한 부분을 보여준다면?
마찬가지로 사무적인 관계, 공적인 관계의 사람이 지극히 내밀한 감정을 보여준다면?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우호적이어야 하는 관계를 가져야 하는 관계에서 분노가 표출된다면?
허용된 노출은 쉽게 무마되고 복구된다.
하지만 제한을 넘긴 감정의 노출은 관계의 재설정을 요구한다.
상호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감정 노출의 범위가 넓어지는 효과를 가져오지만,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아얘 관계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
감정 노출의 제한이 비대칭 적일 수 있다.
즉, 특정 쌍방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도 감정 표현의 제한이 방향에 따라 다르게 설정된다는 것.
종종 부모와 자식간에 이런 경우가 많으며, 상하 종속적인 관계에서도 흔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간에 이루어지는 감정의 노출 제한은 다른 경우가 많다.
매우 엄한 선생님과 순종적인 학생과 같은 전통적인 스승-제자의 관계에서,
스승은 제자에게 애착과 분노를 보일 수 있지만 슬픔과 기쁨을 보여주는 것은 제한될 수 있고, 제자는 스승에게 기쁨과 슬픔은 허용되지만 분노는 제한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를 두고 상하관계, 지배-종속의 관계라고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한 것 같다.
하지만 지배-종속관계에서는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이 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듯 하다.
적절하다는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바꾸어 말하자면 최소한 가려서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사람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서로간에 노출이 가능한 정도가 묵시적으로 합의되어 있는 듯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친밀도에 의해 가능한 노출의 정도가 결정되곤 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이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의 노출 정도 또한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사실(?)이라 생각한다.
사실(?)에 물음표가 붙은 이유는, 누구도 명시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가르쳐 주거나 선언하는 것을 듣거나 본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겪어 본 바로는 그렇기 때문이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비교적 넓게 노출이 허용되는 감정이긴 하지만, 이 역시 제한되는 관계가 있다.
슬픔과 분노는 훨씬 더 노출이 제한되는 감정임에 틀림없다.
서로간에 묵시적으로 합의된 감정의 노출제한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의 당혹감은 마치...
꽤나 격식을 차리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웃통을 벗어 제치고 바지를 내린다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중요하고 숨기고 싶어할만한 부분을 보여준다면?
마찬가지로 사무적인 관계, 공적인 관계의 사람이 지극히 내밀한 감정을 보여준다면?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우호적이어야 하는 관계를 가져야 하는 관계에서 분노가 표출된다면?
허용된 노출은 쉽게 무마되고 복구된다.
하지만 제한을 넘긴 감정의 노출은 관계의 재설정을 요구한다.
상호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감정 노출의 범위가 넓어지는 효과를 가져오지만,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아얘 관계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
감정 노출의 제한이 비대칭 적일 수 있다.
즉, 특정 쌍방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도 감정 표현의 제한이 방향에 따라 다르게 설정된다는 것.
종종 부모와 자식간에 이런 경우가 많으며, 상하 종속적인 관계에서도 흔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간에 이루어지는 감정의 노출 제한은 다른 경우가 많다.
매우 엄한 선생님과 순종적인 학생과 같은 전통적인 스승-제자의 관계에서,
스승은 제자에게 애착과 분노를 보일 수 있지만 슬픔과 기쁨을 보여주는 것은 제한될 수 있고, 제자는 스승에게 기쁨과 슬픔은 허용되지만 분노는 제한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를 두고 상하관계, 지배-종속의 관계라고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한 것 같다.
하지만 지배-종속관계에서는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이 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듯 하다.
2014년 11월 3일 월요일
금언(禁言)
R. F. Scott
1. 남을 해롭게 하는 말을 하지 말라.
2. 불평하지 말라.
3. 설명하지 말라.
4. 받아 들여지지 않는 충고를 하지 말라.
이 금언(禁言)은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던 글인데,
기억을 되짚어 보고, 인터넷에서 다시 검색을 해 보니 정말 여러 사람들에 의해 퍼져 있었다.
영국의 탐험가인 Robert Falcon Scott이라는 분이 한 말이라고 들 하는 것도 다 똑같다.
처음에 들었을 때엔 4번의 "받아 들여지지 않는 충고"의 쓸모 없음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다시 생각을 해 보니 3번의 "설명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가 사뭇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것을 혼자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실생활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지 공연히 부연 설명을 해서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 더 교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 말을 한 Scott 선생의 의도는 뭐였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검색을 해 보았다.
한글로 된 검색 결과에서는 모두가 달랑 4가지 말만 써 놓았을 뿐이었다.(내가 못 찾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영어로 검색을 해 보았다.
R. F. Scott's sayings
R. F. Scott's Quotes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Scott 선생께서 이런 말을 했다는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
명언들만 모아 놓은 사이트도 있는데, 거기서 R. F. Scott의 말들을 찾아봐도 이런 금언은 없었다.
http://www.brainyquote.com/quotes/authors/r/robert_falcon_scott.html
이번에는 저 금언을 대략 영역을 해서 검색해 보았다.
1. Do not speak ill of others
2. Do not complain
3. Do not explain
4. Do not advise ...
영역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1번과 4번은 문장이 좀 길어져서 2번과 3번을 먼저 타이핑 하자 검색창에서 바로 자동 완성이 되는 게 아닌가?
실제 검색한 단어는 "do not complain do not explain"이었는데, 참 많은 결과들이 나왔다.
대부분은 누가 한 말인지 언급도 없이 인용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작가가 한 말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디에서는 헨리 포드가 한 말이라고도 했다.
참....실제로 누가 한 말인지는 아무도 모르는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2번과 3번의 금언에 대한 설명은 대략 일치하는 듯 하다.
"불평을 하거나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 것은 벌어진 일에 당당히 맞서지 않고 회피하기 위함이거나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함이니 그런 비겁한 짓 하지 말고 당당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라."는 뜻이라는 것.
인간이라면 자기 보호 본능이 있기에, 자신이 상처받을 상황이 되면 거짓말도 하고 핑계도 대고 이유도 갖다 붙이곤 한다. 이건 유치원정도 다니는 어린 아이들도 그러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인식하지 못하고 반복하는 사이에 나는 현실과 괴리되어 나만의 울타리에 갇혀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자꾸 더 많은 현실의 상황을 회피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누가 한 말인지 모르지만 이 4개의 금언은 인간의 본성을 인식하고, 다시 이것을 극복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 4개의 금언(禁言)은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명령하는 언명(言命)은 아니었을까?
1. 남을 해롭게 하는 말을 하지 말라.
2. 불평하지 말라.
3. 설명하지 말라.
4. 받아 들여지지 않는 충고를 하지 말라.
이 금언(禁言)은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던 글인데,
기억을 되짚어 보고, 인터넷에서 다시 검색을 해 보니 정말 여러 사람들에 의해 퍼져 있었다.
영국의 탐험가인 Robert Falcon Scott이라는 분이 한 말이라고 들 하는 것도 다 똑같다.
처음에 들었을 때엔 4번의 "받아 들여지지 않는 충고"의 쓸모 없음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다시 생각을 해 보니 3번의 "설명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가 사뭇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것을 혼자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실생활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지 공연히 부연 설명을 해서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 더 교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 말을 한 Scott 선생의 의도는 뭐였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검색을 해 보았다.
한글로 된 검색 결과에서는 모두가 달랑 4가지 말만 써 놓았을 뿐이었다.(내가 못 찾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영어로 검색을 해 보았다.
R. F. Scott's sayings
R. F. Scott's Quotes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Scott 선생께서 이런 말을 했다는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
명언들만 모아 놓은 사이트도 있는데, 거기서 R. F. Scott의 말들을 찾아봐도 이런 금언은 없었다.
http://www.brainyquote.com/quotes/authors/r/robert_falcon_scott.html
이번에는 저 금언을 대략 영역을 해서 검색해 보았다.
1. Do not speak ill of others
2. Do not complain
3. Do not explain
4. Do not advise ...
영역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1번과 4번은 문장이 좀 길어져서 2번과 3번을 먼저 타이핑 하자 검색창에서 바로 자동 완성이 되는 게 아닌가?
실제 검색한 단어는 "do not complain do not explain"이었는데, 참 많은 결과들이 나왔다.
대부분은 누가 한 말인지 언급도 없이 인용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작가가 한 말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디에서는 헨리 포드가 한 말이라고도 했다.
참....실제로 누가 한 말인지는 아무도 모르는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2번과 3번의 금언에 대한 설명은 대략 일치하는 듯 하다.
"불평을 하거나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 것은 벌어진 일에 당당히 맞서지 않고 회피하기 위함이거나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함이니 그런 비겁한 짓 하지 말고 당당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라."는 뜻이라는 것.
인간이라면 자기 보호 본능이 있기에, 자신이 상처받을 상황이 되면 거짓말도 하고 핑계도 대고 이유도 갖다 붙이곤 한다. 이건 유치원정도 다니는 어린 아이들도 그러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인식하지 못하고 반복하는 사이에 나는 현실과 괴리되어 나만의 울타리에 갇혀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자꾸 더 많은 현실의 상황을 회피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누가 한 말인지 모르지만 이 4개의 금언은 인간의 본성을 인식하고, 다시 이것을 극복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 4개의 금언(禁言)은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명령하는 언명(言命)은 아니었을까?
2014년 10월 9일 목요일
보편성에서 특수성으로, 전체성에서 개별성으로
과거에는 커다란 하나의 이념으로 사회 전체의 기준을 삼을 수 있었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개개인의 다양성과 사회의 다양성이 증가하면서 사회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이념을 세우기가 매우 곤란해졌다.
따라서 현재의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은 보편성을 고집하지 말고 특수성의 눈으로 봐야하며, 전체성이 아닌 개별성의 눈으로 봐야만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보편성이 사라진 것이라고, 전체성이 없어진 것이라고 봐야 하는가?
이렇게 손바닥을 뒤집듯이 하나로 뭉쳐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단 말인가?
아니다.
예전의 사회라 할지라도 보편성과 특수성은 공존하고 있었으며
단지 예전에 비해 보편성은 줄어들었고 특수성은 늘어났다고 봐야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아프리카의 어떤 초원에 살고 있는 동물이 거의 포유류였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이 초원을 포유류 초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조류와 파충류로까지 늘어났다고 하면, 과거에 부르던 포유류의 초원은 적절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동물의 초원이라고 묶어서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다양성은 늘었으며, 우리 사회를 묶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이념은 과거보다 한차원 더 높아야만 가능해졌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은 보편성을 고집하지 말고 특수성의 눈으로 봐야하며, 전체성이 아닌 개별성의 눈으로 봐야만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보편성이 사라진 것이라고, 전체성이 없어진 것이라고 봐야 하는가?
이렇게 손바닥을 뒤집듯이 하나로 뭉쳐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단 말인가?
아니다.
예전의 사회라 할지라도 보편성과 특수성은 공존하고 있었으며
단지 예전에 비해 보편성은 줄어들었고 특수성은 늘어났다고 봐야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아프리카의 어떤 초원에 살고 있는 동물이 거의 포유류였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이 초원을 포유류 초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조류와 파충류로까지 늘어났다고 하면, 과거에 부르던 포유류의 초원은 적절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동물의 초원이라고 묶어서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다양성은 늘었으며, 우리 사회를 묶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이념은 과거보다 한차원 더 높아야만 가능해졌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2014년 7월 10일 목요일
증오와 괴로움
아파트 단지 중앙에 몇개의 상가가 있다.
썩 활발하진 않지만 산책로를 이용하는 주민들의 왕래는 꾸준한 그런 곳 이었다.
여기에 작은 동네 슈퍼마켓이 있었고 나도 몇번 이용을 했던 터라 주인 아저씨와 안면도 있었다.
한동안 이용이 뜸했다가 한참만에 가보니 대각선으로 마주보는 곳에 또 하나의 슈퍼마켓이 이었다.
그런데 새로 개점을 한 슈퍼에 예전의 주인 아저씨가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장사가 잘되서 슈퍼를 두 개 모두 운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다.
안면이 있는 주인 아저씨를 보고 새로 개점한 슈퍼에 들어가서 몇가지 물건을 사면서,
'저 쪽에 있는 예전의 슈퍼는...' 슬쩍 물어보니,
주인 아저씨의 표정이 급속히 어두워지시며 '쳇, 나도 몰라요'라는 분노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자세한 내막이야 모르겠지만 좋은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다시 한참만에야 늦은 시각에 그 곳을 지나게 되었다.
슈퍼에 볼 일은 없었지만 지나치며 보니 그 주인 아저씨가 혼자서 슈퍼에 서 계신 모습이 보였다.
어두워져 인적이 뜸해진 거리, 손님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무엇인가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처럼, 다소 경직되어 보이던 그 아저씨를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측은하게까지 보였다.
최근의 내 상황과 묘하게 교차되기도 했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위층의 시도 때도 없는 쿵쿵거리는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깜짝 놀랄 정도의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 등이 순간순간마다 증오를 불러오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소리 자체가 나의 귀를 괴롭히는 것 보다, 그로인해 생겨난 증오가 나를 더 괴롭히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모쪼록 그 주인 아저씨가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슈퍼에 대한 증오만 없애도 훨씬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썩 활발하진 않지만 산책로를 이용하는 주민들의 왕래는 꾸준한 그런 곳 이었다.
여기에 작은 동네 슈퍼마켓이 있었고 나도 몇번 이용을 했던 터라 주인 아저씨와 안면도 있었다.
한동안 이용이 뜸했다가 한참만에 가보니 대각선으로 마주보는 곳에 또 하나의 슈퍼마켓이 이었다.
그런데 새로 개점을 한 슈퍼에 예전의 주인 아저씨가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장사가 잘되서 슈퍼를 두 개 모두 운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다.
안면이 있는 주인 아저씨를 보고 새로 개점한 슈퍼에 들어가서 몇가지 물건을 사면서,
'저 쪽에 있는 예전의 슈퍼는...' 슬쩍 물어보니,
주인 아저씨의 표정이 급속히 어두워지시며 '쳇, 나도 몰라요'라는 분노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자세한 내막이야 모르겠지만 좋은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다시 한참만에야 늦은 시각에 그 곳을 지나게 되었다.
슈퍼에 볼 일은 없었지만 지나치며 보니 그 주인 아저씨가 혼자서 슈퍼에 서 계신 모습이 보였다.
어두워져 인적이 뜸해진 거리, 손님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무엇인가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처럼, 다소 경직되어 보이던 그 아저씨를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측은하게까지 보였다.
최근의 내 상황과 묘하게 교차되기도 했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위층의 시도 때도 없는 쿵쿵거리는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깜짝 놀랄 정도의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 등이 순간순간마다 증오를 불러오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소리 자체가 나의 귀를 괴롭히는 것 보다, 그로인해 생겨난 증오가 나를 더 괴롭히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모쪼록 그 주인 아저씨가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슈퍼에 대한 증오만 없애도 훨씬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지나친 절약의 문제
가계의 소득이 물가상승률을 미치지 못할 때,
그리고 가계 소비의 주체가 그것을 체감하게 되면
당연한 수순으로 소비를 줄이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불요불급한 소비를 하지않으려 하고, 반드시 필요한 소비에 대해서도 보다 저렴한 소비방법을 찾게된다.
너무도 당연하며, 어찌보면 거의 기계적인 반응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기본 소비 단위인 하나의 가계만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바람직한 행동양식이겠지만, 모든 소비 주체를 엮어 생각하고, 생산자와의 연관 관계까지 함께 고려한다면, 이 순환 시스템에서 자신의 소비 감소는 결국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개인들의 소비에 의존하는 생산자들을 생각해 보자.
생상자들은 소비자들의 이러한 소비 절감 행위에 맞추어 반응할 것이다.
생산자들이 소비자에게 저렴한 가격에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줄일거라 생각하는가?
생산자가 자신의 이익을 줄이는 행위는 자멸을 향해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최후에, 다른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생산자들은 먼저 자신들의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 저렴한 원료/부품을 사용하거나 인건비를 줄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재화나 서비스의 질 하락을 가져오며, 동시에 근로자의 소득 하락을 가져온다.
재화나 서비스의 질 하락은 결국은 비용의 증가를 가져오고, 근로자의 소득하락은 다시 가계 소득의 하락으로 이어져서,
생산과 소비의 순환 시스템이 더욱 빠르게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상의 악순환에서 개인/가계의 소비자는 피해자이며 착취당하는 노동자로 보일 수 있다.
반면에 생산자는 가해자이며 착취하는 자본가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생산자 또한 피해자가 된다.
결국의 소비자의 소비 여력이 줄어들게 되면 생산자의 이익은 줄어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이익률이 중요할까 절대 이익의 양(금액)이 중요할까?
이익의 양(금액)이다.
규모가 100일 때의 이익률이 20%라서 20의 이익을 올렸던 생산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100을 추가로 투자해서 규모를 200으로 늘렸을 때 이익률이 15%로 줄어든다면 이 생산자는 투자를 할까 말까?
10중 8,9는 투자를 할 것이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이익률이 높으면 좋겠지만 이익률이 첫번째는 아닌 이유이다.
기업의 재무제표에서 매출액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전체적인 소비의 감소는 매출의 규모 감소로 이어지고,
이익률은 올라갈지 몰라도 이익의 양(금액)은 줄어들어서 결국은 쇠퇴하는 양상을 보이게 될 것이다.
1997년 IMF에서 구제금융을 받았던 시기,
한국의 원화 가치는 폭락하고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은 급락하면서,
기업들은 아주 당연한 행동양식을 보였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도입이 그것이었다.
조기에 IMF 구제금융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외부로부터, 그리고 스스로 칭찬해 마지 않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살아남은 기업들은 자유로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으로 비용을 줄여서 얻은 경쟁력을 해외로 까지 널혀가면서 자신에게 돌아올 부메랑의 회전반경을 넓혔던 것이다.
이젠 돌아올 부메랑을 받아야 할 시기가 점점 가까와지고 있다.
기업들도 이걸 알고 있으며, 정부와 국민들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지나친 절약의 부메랑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이제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그 달콤했던 이익의 감소를 포기할 용기가 있을지가 문제일 따름이다.
그리고 가계 소비의 주체가 그것을 체감하게 되면
당연한 수순으로 소비를 줄이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불요불급한 소비를 하지않으려 하고, 반드시 필요한 소비에 대해서도 보다 저렴한 소비방법을 찾게된다.
너무도 당연하며, 어찌보면 거의 기계적인 반응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기본 소비 단위인 하나의 가계만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바람직한 행동양식이겠지만, 모든 소비 주체를 엮어 생각하고, 생산자와의 연관 관계까지 함께 고려한다면, 이 순환 시스템에서 자신의 소비 감소는 결국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개인들의 소비에 의존하는 생산자들을 생각해 보자.
생상자들은 소비자들의 이러한 소비 절감 행위에 맞추어 반응할 것이다.
생산자들이 소비자에게 저렴한 가격에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줄일거라 생각하는가?
생산자가 자신의 이익을 줄이는 행위는 자멸을 향해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최후에, 다른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생산자들은 먼저 자신들의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 저렴한 원료/부품을 사용하거나 인건비를 줄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재화나 서비스의 질 하락을 가져오며, 동시에 근로자의 소득 하락을 가져온다.
재화나 서비스의 질 하락은 결국은 비용의 증가를 가져오고, 근로자의 소득하락은 다시 가계 소득의 하락으로 이어져서,
생산과 소비의 순환 시스템이 더욱 빠르게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상의 악순환에서 개인/가계의 소비자는 피해자이며 착취당하는 노동자로 보일 수 있다.
반면에 생산자는 가해자이며 착취하는 자본가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생산자 또한 피해자가 된다.
결국의 소비자의 소비 여력이 줄어들게 되면 생산자의 이익은 줄어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이익률이 중요할까 절대 이익의 양(금액)이 중요할까?
이익의 양(금액)이다.
규모가 100일 때의 이익률이 20%라서 20의 이익을 올렸던 생산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100을 추가로 투자해서 규모를 200으로 늘렸을 때 이익률이 15%로 줄어든다면 이 생산자는 투자를 할까 말까?
10중 8,9는 투자를 할 것이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이익률이 높으면 좋겠지만 이익률이 첫번째는 아닌 이유이다.
기업의 재무제표에서 매출액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전체적인 소비의 감소는 매출의 규모 감소로 이어지고,
이익률은 올라갈지 몰라도 이익의 양(금액)은 줄어들어서 결국은 쇠퇴하는 양상을 보이게 될 것이다.
1997년 IMF에서 구제금융을 받았던 시기,
한국의 원화 가치는 폭락하고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은 급락하면서,
기업들은 아주 당연한 행동양식을 보였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도입이 그것이었다.
조기에 IMF 구제금융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외부로부터, 그리고 스스로 칭찬해 마지 않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살아남은 기업들은 자유로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으로 비용을 줄여서 얻은 경쟁력을 해외로 까지 널혀가면서 자신에게 돌아올 부메랑의 회전반경을 넓혔던 것이다.
이젠 돌아올 부메랑을 받아야 할 시기가 점점 가까와지고 있다.
기업들도 이걸 알고 있으며, 정부와 국민들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지나친 절약의 부메랑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이제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그 달콤했던 이익의 감소를 포기할 용기가 있을지가 문제일 따름이다.
2014년 6월 30일 월요일
산을 오르면 내려와야 한다
인생은 등산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높이 오를 수록 성취감은 커지겠지만 결국 우리의 등산은 하산해야 비로소 끝이 나는거지
높이 오를 수록 하산해야 할 여정도 길어지기 마련이고
등산보다는 하산이 안전사고의 위험이 큰 만큼,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하고 충분한 시간도 필요하다.
만약 너무 늦게 하산을 시작한다면
구르거나 뛰어내려야 하산할 수 있을테고 그러면 만신창이가 될 것은 자명한 법
간혹 애초의 목표가 등산이 아닌데도 산을 오르는 경우도 있겠지
행글라딩이나 낙하산 활강을 하기 위한 경우라면
온전히 산을 오르는 과정은 인내의 연속일 테이지만
매우 짧은 활강의 순간은 짜릿한 환희일 것이고
인생의 마무리가 행복감으로 채워질 것이다.
인생의 장점을 지나면서 쇠락해가는 자신을 비참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저 지금 산을 내려오고 있다고....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가 거쳐야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2014년 5월 13일 화요일
논리-철학논고 by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by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논리-철학논고 목차 |
-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 세계는 사실들로 이루어진다.
- 일어나는 것,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 사태는 대상들(실물들, 사물들)의 결합이다.
- 대상은 단순하다.
- 사태 속에서 대상들은 사슬의 고리들처럼 서로 걸려 있다.
- 존립하는 사태들의 총체가 세계이다.
- 존립하는 사태들의 총체는 어떤 사태들이 존립하지 않는가를 또한 확정한다.
- 사태들의 존립과 비존립이 현실이다. (우리는 사태들의 존립을 긍정적 사실, 비존립을 부정적 사실이라 부르기도 한다.)
- 우리는 사실들의 그림을 그린다.
- 그림은 모사된 것과 모사의 논리적 형식을 공유한다.
-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이다.
- "어떤 한 사태가 생각될 수 있다"가 뜻하는 것은, 우리가 그 사태에 관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 참된 사고들의 총체는 세계의 그림이다.
- 사고는 그것이 생각하는 상황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생각될 수 있는 것은 또한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 우리는 비논리적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비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 선천적으로 올바른 사고는 그것의 가능성이 그것의 참을 조건부로 하는 사고일 것이다.
- 하나의 사고가 참이라는 것을 우리가 선천적으로 알 수 있을 경우는 그 사고 자체로부터 (비교 대상 없이) 그 사고의 참됨이 인식될 수 있을 때 뿐이다.
- 명제에서 사고는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게 표현된다.
- 명제 속에서 사고는 명제 기호의 요소들이 사고의 대상들과 대응하도록 표현될 수 있다.
- 오직 명제만이 뜻을 가진다; 오직 명제 연관 속에서만 이름은 의미를 가진다.
- 명제는 논리적 공간 속의 어떤 한 장소를 확정한다. 이 논리적 장소의 존재는 구성 요소들만의 존재에 의해서, 즉 뜻이 있는 명제의 존재에 의해서 보증된다.
- 적용된, 생각된 명제 기호가 사고이다.
- 사고는 뜻이 있는 명제이다.
- 명제들의 총체가 언어이다.
- 인간은 각의 낱말이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이 각각의 뜻이 모두 표현될 수 있게 하는 언어들을 구성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우리들이 개별적인 소리들이 어떻게 산출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말을 하듯이 말이다.
일상 언어는 인간 유기체의 일부이며, 그에 못지 않게 복잡하다. 일상 언어로부터 그 언어의 논리를 직접 끄집어 낸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언어는 사고를 위장한다. 더욱이 그 복장의 외부적 형태로부터 그 옷 입혀진 사고의 형태를 추론할 수 없도록 그렇게 위장한다; 왜냐하면 복장의 외부적 형태는 신체의 형태를 인식시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목적에 따라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 철학적인 것들에 관해 씌어진 대부분의 명제들과 물음들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런 종류의 물음들에 대해 결코 대답할 수 없고, 다만 그것들의 무의미성을 확립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자들의 물음들이나 명제들은 대부분 우리가 우리의 언어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그것들은 선(善)이 미(美)보다 다소 동일한가 하는 물과 같은 종류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문제들이 실제로는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명제는 현실의 그림이다.
- 이것을 우리는 명제 기호의 뜻이 우리에게 설명되지 않아도 우리는 그 뜻을 이해한다는 점으로부터 안다.
- 명제는 낡은 표현들을 가지고 새로운 뜻을 전달해야 한다.
명제는 우리에게 상황을 전달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본질적으로 상황과 연관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 연관은 바로, 명제가 상황의 논리적 그림이라는 것이다.
명제는 그림인 한에서만 무엇인가를 진술한다. - 명제는 그것이 묘사하는 상황에서 구별될 수 있는 바로 그 만큼 구별될 수 있어야 한다.
그 양자(兩者)는 동일한 논리적(수학적) 다수성을 소유해야 한다.(동력학적 모형들에 관한 헤르츠의 역학 이론을 참조하라.) - 현실은 명제와 비교된다.
- 명제는 오직 현실의 그림임으로 인해 참 또는 거짓일 수 있다.
- 명제는 사태의 존립과 비존립을 묘사한다.
- 명제의 뜻은 사태들의 존립 및 비존립 가능성들과 명제와의 일치와 불일치이다.
- 요소 명제들의 진리 가능성들은 사태들의 존립과 비존립의 가능성들을 의미한다.
-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 가능성과의 일치 및 불일치의 표현이다.
- 이제는 가장 일반적인 명제 형식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인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떠한 기호 언어의 명제들에 대해서건 하나의 기술(記述)을 주어서, 모든 가능한 뜻이 그 기술에 걸맞은 상징에 의해 표현될 수 있고, 또 이름들의 의미들이 알맞게 선정된다면, 그 기술에 걸맞은 모든 상징이 각각 뜻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인다.
가장 일반적인 명제 형식을 기술할 적에는 오직 그 본질적인 것만이 기술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일반적 명제 형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형식이 예견(즉 구성)될 수 없었을 명제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의해서 증명된다. 명제의 일반적 형식은 다음과 같다: 사정이 이러이러하다. -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이다. (요소 명제는 자기 자신의 진리 함수이다.)
- 요소 명제들은 명제의 진리 독리 변수들이다.
- 함수의 독립 변수들은 이름의 지표들과 혼동되기 쉽다. 왜냐하면 지표에서와 마찬가지로 독립변수에서도 그것을 포함하는 기호의 의미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러셀의 "+c"에서 "c"는 그 기호 전체가 기수(基數)에 대한 더하기 기호임을 지시하는 지표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칭은 단순히 자의적인 약정에 의거하고 있고, 우리들은 "+c" 대신에 하나의 단순한 기호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p"에서 "p"는 지표가 아니라 독립변수이다: "~p"의 뜻은 "p"의 뜻이 미리 이해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에서 "율리우스"는 하나의 지표이다. 우리가 대상의 이름에 붙이는 지표는 언제나 그 대상 기술의 일부이다. 예컨대, 율리우스 가(家)의 그 카이사르.)
내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명제와 함수의 의미에 관한 프레게의 이론 밑바닥에는 독립 변수와 지표에 대한 혼동이 놓여 있다.프레게에게는 논리학의 명제들은 이름들이었고, 그것들의 독립변수들은 이러한 이름들의 지표들이었다. - 진리 함수들은 계열을 이루도록 배열 될 수 있다.
그것이 확률론의 기초이다. - 명제들의 구조는 서로 내적인 관계가 있다.
- 모든 명제들은 요소 명제들에 대한 진리 연산의 결과들이다.
진리 연산은 요소 명제들로부터 진리 함수가 생겨나는 방식이다.
진리 연산의 본질에 따르면, 요소 명제들로부터 그 진리 함수가 생겨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진리 함수들로부터는 새로운 진리 함수가 생겨난다. 모든 진리 연산은 각각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들로부터 다시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를, 즉 명제를, 산출한다. 요소 명제들에 대한 진리 연산의 결과들을 가지고 행한 모든 진리 연산의 결과는 또 다시, 요소 명제들에 대한 하나의 진리 연산의 결과이다.
모든 명제는 요소 명제들에 대한 진리 연산들의 결과이다. - 여기서 (프레게와 러셀의 뜻에서의)"논리적 대상들"이나 "논리적 상항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 모든 진리 함수는 (-----T)(ξ,....)라는 연산을 요소 명제들에다 계속적으로 적용한 결과이다.
이 연산은 오른편 괄호 속에 있는 명제들 전체를 부정하며, 나는 이 연산을 이 명제들의 부정이라고 부른다. -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
- 진리 함수의 일반적 형식은 [ρ, ξ, Ν(ξ)]이다.
- 논리학의 명제들은 동어 반복들이다.
- 수학은 하나의 논리적 방법이다.
수학의 명제들은 등식들이며, 따라서 사이비 명제들이다. - 논리의 탐구는 모든 법칙성의 탐구이다. 그리고 논리 밖에서는 모든 것이 우연이다.
- 모든 명제들은 가치가 같다.
- 언표될 수 없는 대답에 대해서는 물음표도 언표될 수 없다.
수수께씨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면, 그 물음은 또한 대답될 수도 있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2014년 1월 9일 목요일
직업과 돈벌이에 대한 모순된 고정 관념
근자에 스포츠 스타들에 대한 뉴스가 유난히 많았다.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인 류현진과 추신수는 지난 성적과 트레이드로, 여기에 이대호와 오승환도 가세하고,
다가온 월드컵에 대한 관심으로 축구 대표팀과 대표 선수, 감독에 대한 소식들,
또한 동계 올림픽의 유망주인 김연아와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들, 소외 종목 선수들...
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스타들에 대한 얘기이긴 하지만,
그들의 사회적인 명성과 위상, 그리고 수입은 가히 어떤 부류의 직업에도 뒤지지 않는다.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 아닐까 싶다.
공을 잘 던지고 잘 쳐내는 것이, 공을 잘 차는 것이, 얼음 위에서 빨리 달리는 것이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냐고 반문했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었다.
때문에 모두가 공부가 성공의 가장 확실한 투자였다고 생각했으며,
당시에는 정말 맞는 얘기었다.
하긴 지금도, 그들이 야구를 잘하고 축구를 잘해서 쌀을 만들지는 못하고 고기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프츠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졌기에, 그 많은 관중들이 투자한 금전과 시간에 비례해서, 그리고 그 종목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례해서 보상을 받고 있을 다름이다.
지금은 그 성장세가 주춤하지만, 십여년 전 부터 프로 게이머라는 직업이 생겨났다.
그 당시엔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보였다.
누구나 다 즐겨하는 게임을, 그걸 조금 더 잘한다고, 직업을 삼는다는 건 쉽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관연 그게 돈벌이가 될까하는 의심도 들었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순수한 놀이의 결정체인 게임을 하는데, 그게 어떻게 직업이 되겠는가?
저들이 게임하면서 즐기는데 왜 관중들이 돈을 지불하겠는가 하는 생각...
이제는 프로 게이머가 다분히 적업적인 면모도 많이 갖추고 있는 듯 하다.
꾸준한 훈련, 이기기 위한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 갖가지 전략과 기술의 습득 및 연마...
물론 이 프로게이머 또한 여기에 관심을 가지는 관중들이 투자하는 금전과 시간에 비례하여 수익이 늘어나며, 실력에 비례하여 수익이 늘어나므로, 스포츠와 전혀 다르지 않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어디 이 뿐이랴,
가수와 배우 등의 연예인들 또한 같은 속성을 지닌 직업군이지 않겠는가.
단지 아직은 프로 게이머가 사회적인 위상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이는 생겨난지 얼마 되지 않은 직업군이기도 하고, 그 중심에 있는 스타들의 연령이 낮으며, 이들을 환호하는 연령층 또한 일부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이상의 얘기는 누구나 다 알고 인정하는 바가 아닐까 싶고,
정작 하고 싶었던 얘기는 여기 부터다.
어째서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처음 생겼을 때, 그걸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걸까?
어째서 아직도 프로게이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이렇게 떨어지는 것일까?
어째서 김연아는 그 성적 뿐이 아니라, 인성적인 측면까지 기사로 다루면서 호들갑을 떨고 대단한 천재이고 대단히 신뢰를 받을 만한 존재로 칭송을 하는가?
반면에 임요환 같은 선수는 아무리 잘해도 껨 잘해서 돈 많이 번 사람...정도로 끝날 뿐이다.
김연아는 나중에 나이가 좀 들어서 IOC 위원이 될지도 모르겠고, 국회의원 비례대표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임요환은 아파트 주민대표 정도나 할 수 있을까?
스포츠도 게임도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놀이에서 시작되었다.
하면 즐거운 것이고 뛰어난 사람이 하는 것은 보는 것도 즐거운 것이다.
물론 세계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어떤 분야든 뼈를 깎는 고통과 인내가 필요한 것이지만 말이다.
어린 아이가 축구가 좋아서 축구 선수가 되겠다고 하면 장차 국가대표를 꿈꾸고 각종 프로리그 선수가 될 것을 희망하며 반길 것이다.
어린 아이가 게임이 좋아서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하면 잘 해봐야 돈 좀 벌지만 대게는 게임폐인되고 집밖에는 나가지도 않는 은둔형 외톨이가 되겠다고 걱정부터 할 것이다.
과연 스포츠와 게임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는 그걸 즐기는 관중이 넓게 마련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아직은 좁다는 것이다.
하나는 주로 몸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머리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 장 큰 차이는 그걸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는 '좋은 것' 다른 하나는 '나쁜 것'
조금만 더 의식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보자.
소위 '돈벌이'로써의 직업에 대한 관념에는 <힘든 것> <괴로운 것> <하기 싫은 것>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 힘을 들이지 않고, 너무 즐거워 하면서, 아무런 강제가 없이도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돈벌이가 된다면,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은 백이면 구십구는 허탈하고 황당하며 심지어는 화가 날 것이다.
왜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그건 자신이 '돈벌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저변의 의식(힘든 것, 괴로운 것, 하기 싫은 것)과 전혀 들어맞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들며, 괴로우며, 하기 싫은 것을 해야 겨우 돈벌이가 되는 자신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어릴 적에, 내가 꿈꾸었던 직업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경계를 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좋아하는 것도 직업이 되면 싫어질 것이다, 좋아하는 일은 돈벌이가 되기 힘들다,는 등의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근본적인 생계에 직접 연관된 일은 극히 적다.(직접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지 않는 한..)
대개의 직업을 차지하는 일은 대규모 공장의 근로자나 건설 현장의 근로자, 물건을 판매하거나 사무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등의 개성이 없고 보편적으로 즐겁지 않은 일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즐거움에 종사하는 직업군이 상당히 늘어나고 있으며, 더 이상 나의 괴로움과 돈을 맞바꾸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괴롭기 때문에 돈벌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과 괴로움, 돈벌이는 이제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세상엔 즐거운 돈벌이도 있으며, 괴로운 돈벌이도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단지 선택일 뿐이다.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인 류현진과 추신수는 지난 성적과 트레이드로, 여기에 이대호와 오승환도 가세하고,
다가온 월드컵에 대한 관심으로 축구 대표팀과 대표 선수, 감독에 대한 소식들,
또한 동계 올림픽의 유망주인 김연아와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들, 소외 종목 선수들...
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스타들에 대한 얘기이긴 하지만,
그들의 사회적인 명성과 위상, 그리고 수입은 가히 어떤 부류의 직업에도 뒤지지 않는다.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 아닐까 싶다.
공을 잘 던지고 잘 쳐내는 것이, 공을 잘 차는 것이, 얼음 위에서 빨리 달리는 것이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냐고 반문했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었다.
때문에 모두가 공부가 성공의 가장 확실한 투자였다고 생각했으며,
당시에는 정말 맞는 얘기었다.
하긴 지금도, 그들이 야구를 잘하고 축구를 잘해서 쌀을 만들지는 못하고 고기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프츠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졌기에, 그 많은 관중들이 투자한 금전과 시간에 비례해서, 그리고 그 종목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례해서 보상을 받고 있을 다름이다.
지금은 그 성장세가 주춤하지만, 십여년 전 부터 프로 게이머라는 직업이 생겨났다.
그 당시엔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보였다.
누구나 다 즐겨하는 게임을, 그걸 조금 더 잘한다고, 직업을 삼는다는 건 쉽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관연 그게 돈벌이가 될까하는 의심도 들었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순수한 놀이의 결정체인 게임을 하는데, 그게 어떻게 직업이 되겠는가?
저들이 게임하면서 즐기는데 왜 관중들이 돈을 지불하겠는가 하는 생각...
이제는 프로 게이머가 다분히 적업적인 면모도 많이 갖추고 있는 듯 하다.
꾸준한 훈련, 이기기 위한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 갖가지 전략과 기술의 습득 및 연마...
물론 이 프로게이머 또한 여기에 관심을 가지는 관중들이 투자하는 금전과 시간에 비례하여 수익이 늘어나며, 실력에 비례하여 수익이 늘어나므로, 스포츠와 전혀 다르지 않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어디 이 뿐이랴,
가수와 배우 등의 연예인들 또한 같은 속성을 지닌 직업군이지 않겠는가.
단지 아직은 프로 게이머가 사회적인 위상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이는 생겨난지 얼마 되지 않은 직업군이기도 하고, 그 중심에 있는 스타들의 연령이 낮으며, 이들을 환호하는 연령층 또한 일부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이상의 얘기는 누구나 다 알고 인정하는 바가 아닐까 싶고,
정작 하고 싶었던 얘기는 여기 부터다.
어째서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처음 생겼을 때, 그걸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걸까?
어째서 아직도 프로게이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이렇게 떨어지는 것일까?
어째서 김연아는 그 성적 뿐이 아니라, 인성적인 측면까지 기사로 다루면서 호들갑을 떨고 대단한 천재이고 대단히 신뢰를 받을 만한 존재로 칭송을 하는가?
반면에 임요환 같은 선수는 아무리 잘해도 껨 잘해서 돈 많이 번 사람...정도로 끝날 뿐이다.
김연아는 나중에 나이가 좀 들어서 IOC 위원이 될지도 모르겠고, 국회의원 비례대표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임요환은 아파트 주민대표 정도나 할 수 있을까?
스포츠도 게임도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놀이에서 시작되었다.
하면 즐거운 것이고 뛰어난 사람이 하는 것은 보는 것도 즐거운 것이다.
물론 세계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어떤 분야든 뼈를 깎는 고통과 인내가 필요한 것이지만 말이다.
어린 아이가 축구가 좋아서 축구 선수가 되겠다고 하면 장차 국가대표를 꿈꾸고 각종 프로리그 선수가 될 것을 희망하며 반길 것이다.
어린 아이가 게임이 좋아서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하면 잘 해봐야 돈 좀 벌지만 대게는 게임폐인되고 집밖에는 나가지도 않는 은둔형 외톨이가 되겠다고 걱정부터 할 것이다.
과연 스포츠와 게임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는 그걸 즐기는 관중이 넓게 마련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아직은 좁다는 것이다.
하나는 주로 몸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머리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 장 큰 차이는 그걸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는 '좋은 것' 다른 하나는 '나쁜 것'
조금만 더 의식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보자.
소위 '돈벌이'로써의 직업에 대한 관념에는 <힘든 것> <괴로운 것> <하기 싫은 것>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 힘을 들이지 않고, 너무 즐거워 하면서, 아무런 강제가 없이도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돈벌이가 된다면,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은 백이면 구십구는 허탈하고 황당하며 심지어는 화가 날 것이다.
왜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그건 자신이 '돈벌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저변의 의식(힘든 것, 괴로운 것, 하기 싫은 것)과 전혀 들어맞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들며, 괴로우며, 하기 싫은 것을 해야 겨우 돈벌이가 되는 자신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어릴 적에, 내가 꿈꾸었던 직업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경계를 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좋아하는 것도 직업이 되면 싫어질 것이다, 좋아하는 일은 돈벌이가 되기 힘들다,는 등의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근본적인 생계에 직접 연관된 일은 극히 적다.(직접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지 않는 한..)
대개의 직업을 차지하는 일은 대규모 공장의 근로자나 건설 현장의 근로자, 물건을 판매하거나 사무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등의 개성이 없고 보편적으로 즐겁지 않은 일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즐거움에 종사하는 직업군이 상당히 늘어나고 있으며, 더 이상 나의 괴로움과 돈을 맞바꾸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괴롭기 때문에 돈벌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과 괴로움, 돈벌이는 이제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세상엔 즐거운 돈벌이도 있으며, 괴로운 돈벌이도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단지 선택일 뿐이다.
2014년 1월 2일 목요일
남자에게 여자란
여성들이 들으면 분노하겠지만, 혹은 다르다고 부인하겠지만,
남성인 내가 보기엔,
남성에게 아름다운 여인은, 여성에게 새로 나온 명품 백이나 구두외 비슷한 듯 해.
여성들은 종종 자신의 배우자나 남자 친구가,
지나가는 여성들을 흘끔거린다고들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건 여성들이 백화점 쇼윈도우에 비치된,
새로 나온 명품 백과 구두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야.
어째서 남성에게 여성이란 존재는 백이나 구두 밖에 안되냐고 묻지는 말았으면 해.
그건 여성들 스스로 백이나 구두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거나,
그런 하찮은 것에 집착하는 자신들을 비하하는 것이거나,
왜 자신들은 그런 것에 집착하는지 모르면서 남성들 탓만 하는 것으로 보이니까.
남성들도 잘 모르겠어.
만약에 누군가가 미치도록 좋아진다면,
그 사랑이 오래가지는 못하리라는 건 예상해야 해.
마치 아주 잘 맞고, 잘 어울리고, 나를 한껏 빛나게 해 줄 날개와 같은 옷과 비슷하거든.
아주 좋아서 아끼고 아끼다가 몇 번 입지도 못한채로 입을 수 없는 시간이 오기도 하고,
너무 좋아서 자주 입다가 닳고 헤져서 못 입게 되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리고, 실제로 그런 옷들이 어울리는 장소는 제한적이고,
집에서 편하게 쉬거나 잠을 잘 때에 입을 수 없다는 것도 명심을 해 두어야 겠지.
남성인 내가 보기엔,
남성에게 아름다운 여인은, 여성에게 새로 나온 명품 백이나 구두외 비슷한 듯 해.
여성들은 종종 자신의 배우자나 남자 친구가,
지나가는 여성들을 흘끔거린다고들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건 여성들이 백화점 쇼윈도우에 비치된,
새로 나온 명품 백과 구두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야.
어째서 남성에게 여성이란 존재는 백이나 구두 밖에 안되냐고 묻지는 말았으면 해.
그건 여성들 스스로 백이나 구두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거나,
그런 하찮은 것에 집착하는 자신들을 비하하는 것이거나,
왜 자신들은 그런 것에 집착하는지 모르면서 남성들 탓만 하는 것으로 보이니까.
남성들도 잘 모르겠어.
만약에 누군가가 미치도록 좋아진다면,
그 사랑이 오래가지는 못하리라는 건 예상해야 해.
마치 아주 잘 맞고, 잘 어울리고, 나를 한껏 빛나게 해 줄 날개와 같은 옷과 비슷하거든.
아주 좋아서 아끼고 아끼다가 몇 번 입지도 못한채로 입을 수 없는 시간이 오기도 하고,
너무 좋아서 자주 입다가 닳고 헤져서 못 입게 되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리고, 실제로 그런 옷들이 어울리는 장소는 제한적이고,
집에서 편하게 쉬거나 잠을 잘 때에 입을 수 없다는 것도 명심을 해 두어야 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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