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고 고교동창들과 모임을 가졌다.
386의 끝트머리를 잡고 있는 세대인 우리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을 정도의 주입식 교육과 무조건적인 반공 교육, 충효를 절대 선(善)으로 떠받들어야 한다는 세뇌(?)교육을 받았었다.
그런 일괄적인 교육의 틀에 박혀서 나왔음에도 어찌 그리 각양각색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희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작은 모임의 정치적인 성향이 현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평균에 부합하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 그 안에서 상대적인 보수와 진보가 존재하며 중도와 극도가 존재한다.
내가 나 자신을 극도의 진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이 모임에서 극도의 보수로 불릴만한 K와 종종 대립각을 세우는 쪽은 나였다.
얼마전 헌법재판소가 내린 통합진보당의 정당 해체 결판은 적지 않게 충격적이었다.
사실 내 자신이 통진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몇백만의 국민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대한민국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결은, 그들의 사상이 적합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그들의 사상을 바꾸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에 존재해서는 안될 존재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쪼록 통진당의 반민주적인 당령과 당론이 대부분의 지지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간과되었기만을 바래야 할 상황이었다.
이 재판의 결과를 보면서, 박근혜가 결국은 해 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구나 기억할,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방송된 TV 토론회에서, 당시 통진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정희 대표와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박근혜 대표간의 날 선 공방.
특히나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이정희 후보의 발언이 모든 것의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발언의 진위,진정성,타당성 따위는 모두 제쳐두고라도 결과만을 보면 박근혜 후보에게 득이되었으며 이정희 후보에게는 독이 되었다. 그 결과는 얼마 되지 않아 선거의 결과로 나타났다.
이정희는 진보에서 그 발언으로 극단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극으로 달려가는 이정희 후보를 본 유권자들 중의 상당수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반대쪽인 보수 쪽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뒤늦게 이정희 후보는 사퇴하면서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로 결집을 시도했지만, 이정희 후보의 극단에 반발하여 뭉친 보수쪽은 더 단단하고 더 무거웠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던가
이정희 후보에게 놀라서 보수쪽으로 달려간 유권자들은 과연 이정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박근혜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었을 것인가?
내 수준이 이것밖에는 안되는지 몰라도 그저 느낌상,심정상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정희 후보가 너무 가는구나...
단순한 느낌만으로 이정희는 아니구나 박근혜가 불쌍하구나로 유권자들이 이동하지 않았을까?
이 개개인들이 내린 판단의 근거는 아주 희박하고 비논리적이니 이걸 대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다.
하지만....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유권자들은 전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움직였던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개개인들을 자세히 보면 별 깊은 생각도 없고 반(半)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듯 할 정도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 방정식의 변수들처럼 균형을 맞추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말이다.
어쩌면 K의 극단적인 보수 성향은 내가 극단적인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할 지라도,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면 그가 혼자 보수쪽으로 치달을 수는 없지 않을까?
내가 극단으로 가면 상대방 또한 극단으로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화합을 위해서는 내가 먼저 양보해야 한다는 말은 내가 중도를 향하면 상대도 중도를 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일까?
결국은 이것이 화합을 이루는 길이지만....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되어 있고, 자유도는 확장되게 되어 있고, 사상은 다양해지게 되어 있지 않은가?
어차피 나는 하나의 점으로서 어디엔가 위치하고 있다.
하나의 점은 필연적으로 어떤 점과는 반대편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점과는 가깝지만 동시에 다른 점과는 멀게 된다.
치우침은 필수 불가결하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모든 점의 중심이 되겠다고 한다면 이 또한 지극한 이기심이며, 오히려 모든 점으로부터 균등하게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혹은 하나의 점이 아닌 모든 점이 되고자 한다면 그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동일해 지는 것이다.
나는 하나의 점이다.
하나의 점은 치우침이다.
나의 치우침만큼 누군가는 반대로 치우친다.
그 치우친 누군가는 나와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치우친 누군가와 일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치우친 누군가가 존재해야만 나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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