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욕망, 하고자 하는 마음, 발심
2. 능력,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힘, 문제나 장애를 해결하는 방법이나 기술에 대한 지식
3. 환경, 시기나 위치 혹은 자연적인 조건. 일이 진행되는 것에 도움이 되는 주변의 갖가지 상황들. 혹은 일의 진행에 방해가 되는 상황을 벗어난 상태 등.
1번은 사람마다 각자가 원하는 바가 다르고, 자신이 하고자 마음을 먹는 순간 부터 자연스럽게 욕망을 가지게 되므로 특별한 방법은 필요하지 않다.
단지 얼마나 절실하게 원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3번은 그 요소가 너무 다양하고 예측이 어려운 점도 많아서 종종 운(運)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그치지 않으니 운에 의존하는 요소들이 점점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다.
2번이 인간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다.
대부분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이런 능력을 끌어 올리기 위함이고, 누군가에게 배우고 듣고 경험하는 것도 이를 위한 것이다.
2017년 12월 6일 수요일
2017년 11월 18일 토요일
화(火)의 전염
어느 일요일.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식구들이 모여서 가족 식사를 하기로 했다.
본가에 미리 도착해서 주차장에 주차를 하려 했는데, 골목 안쪽의 집에 누군가 이사를 하는건지 이삿짐 트럭이 주차장을 막고 한참 작업 중이었다.
차를 잠시 빼달라고 부탁하려고 보았는데, 한참 작업 중인 것이 보여서 번거롭겠다 싶었다.
아버지께서 이 상황을 보시고 차를 조금만 빼달라고 말씀하시려는 것을 내가 그만 두시라고 말렸다.
식사하러 가는 곳이 멀지 않지만, 그곳에도 주차장이 있으니 식사하고 와보면 상황이 달라져 있으리란 임시 대책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동하고 식사를 하고 다시 돌아왔는데, 상황은 더 악화되어 있었다.
큰길에서 집 앞의 주차장까지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이삿짐 차량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고 1차선인 큰길을 막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인도를 가로막고라도 우선 큰길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바로 골목안으로 들어가서 이삿짐 차량과 이사하는 집 주인인듯한 사람에게 부탁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떤 노인이 한손에는 화장지 한더미를 들고 지나가면서 내 차가 인도를 가로질러 막고 있는 것에 매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차를 이렇게 대면 어쩌자는거여'. 혼자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쳐다보며 자신이 화난 것을 알아달라는 듯이...그걸 참지 못하고 나도 변명을 했다. '여기 차들이 가로 막고 있어서 그래요' 공손하지는 않았더랬다. 그러자 그 노인은 가던 방향에서 멈추어 나를 돌아보고 더 큰 소리로 윽박을 질렀다. '그럼 이리로 더 들어와서 세우던가!' 완전 짜증이 났다. '지금 막 왔어요'. 그리고 노인은 씩씩거리며 가던 길로 갔지만, 그 노인이나 나나 화를 가라 앉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곧 골목으로 들어가서 이사하는 집의 집주인인 듯한 사람이 보이길래 화가 난 상태로 말을 했다. '이 차들 좀 어떻게 해주세요!' 집주인은 그냥 멀뚱멀뚱 쳐다 볼 뿐이었다.
결국은 큰길과 인도 사이의 턱에 개구리 주차를 해서 임시변통을 했다.
본가에서 몇시간을 더 머물렀는데, 아버지께서 밖의 상황을 보시고는 차가 다 빠졌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나는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물론 나가서 다시 주차장에 주차해도 또 금방 차를 빼서 나가야 하니 그럴 필요가 없던 것이었지만 그걸 아버지께 설명하면서 그 상황이 떠 오르는 것도 짜증났고, 내 짜증을 알아차리셨는지 계속 이사 차량에 신경을 쓰시는 아버지의 행동도 짜증이 났던 것이다.
나중에 차를 빼서 운전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해보니, 참으로 부끄러운 짓을 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받은 화(노인으로 부터 받은)를 누군가에게(아버지와 이사하는 집 주인)에게 전가했던 것이 참으로 후회스러웠다.
먼저, 나에게 화를 낸 노인의 행동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노인이야 전후 사정을 몰랐던 것이고, 차가 인도를 완전히 막고 있어서 불편하게 돌아가야 한다면 화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내가 공손하지 못하니 더 화가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하는 집의 주인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하무인격이었다. 이사라는 큰 일을 치르고 있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 어떤 불편을 주어도 되는 면죄부는 아닌 것이다.
아마도 내가 화를 낸 원인은, 타인으로부터 질책을 받는 것에 대해 꽤 두려움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누구든 실수도 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미움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인데, 나는 그런 것에 매우 민간하게 반응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자기 반성은 별도의 문제이고, 이 문제보다 더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건 화의 전염이었다. 그리고 그 화의 전염의 진짜 모습은 책임의 전가이며, 자기 변명이었던 것이다.
나는 노인으로부터 질타를 받자마자 그것이 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사하는 집의 주인에게 화를 내었던 것이다.
이런 즉각적인 행동은 내가 가해자였던 사건을 순식간에 내가 피해자인 사건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런 즉각적인 반응은 물론 가해자와 피해자 같은 계산을 하기도 전에 거의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듯 하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심판관(?)을 헷갈리게 만든다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주 나쁜 습관(?)과도 같다.
가만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곳곳에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던 것 같다.
누군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가장 그럴듯한 희생자를 찾아내고, 자신의 책임거리와 희생자의 연관 관계를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은 단지 연결고리였다고 빠져 나가는 것.
어쩌면 이런 식의 무책임한 행동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은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사회를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인간이라는 개채들이 스스로의 판단력을 지니고 있는 이상, 어떤 일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한 마디씩은 각 개체에게 종속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단지 그 마디 마디들의 연관 관계도 고려해야 하기에 전체적인 원인과 결과 가운데 각 마디는 일정 부분만을 담당하고 있음도 고려해야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식구들이 모여서 가족 식사를 하기로 했다.
본가에 미리 도착해서 주차장에 주차를 하려 했는데, 골목 안쪽의 집에 누군가 이사를 하는건지 이삿짐 트럭이 주차장을 막고 한참 작업 중이었다.
차를 잠시 빼달라고 부탁하려고 보았는데, 한참 작업 중인 것이 보여서 번거롭겠다 싶었다.
아버지께서 이 상황을 보시고 차를 조금만 빼달라고 말씀하시려는 것을 내가 그만 두시라고 말렸다.
식사하러 가는 곳이 멀지 않지만, 그곳에도 주차장이 있으니 식사하고 와보면 상황이 달라져 있으리란 임시 대책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동하고 식사를 하고 다시 돌아왔는데, 상황은 더 악화되어 있었다.
큰길에서 집 앞의 주차장까지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이삿짐 차량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고 1차선인 큰길을 막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인도를 가로막고라도 우선 큰길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바로 골목안으로 들어가서 이삿짐 차량과 이사하는 집 주인인듯한 사람에게 부탁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떤 노인이 한손에는 화장지 한더미를 들고 지나가면서 내 차가 인도를 가로질러 막고 있는 것에 매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차를 이렇게 대면 어쩌자는거여'. 혼자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쳐다보며 자신이 화난 것을 알아달라는 듯이...그걸 참지 못하고 나도 변명을 했다. '여기 차들이 가로 막고 있어서 그래요' 공손하지는 않았더랬다. 그러자 그 노인은 가던 방향에서 멈추어 나를 돌아보고 더 큰 소리로 윽박을 질렀다. '그럼 이리로 더 들어와서 세우던가!' 완전 짜증이 났다. '지금 막 왔어요'. 그리고 노인은 씩씩거리며 가던 길로 갔지만, 그 노인이나 나나 화를 가라 앉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곧 골목으로 들어가서 이사하는 집의 집주인인 듯한 사람이 보이길래 화가 난 상태로 말을 했다. '이 차들 좀 어떻게 해주세요!' 집주인은 그냥 멀뚱멀뚱 쳐다 볼 뿐이었다.
결국은 큰길과 인도 사이의 턱에 개구리 주차를 해서 임시변통을 했다.
본가에서 몇시간을 더 머물렀는데, 아버지께서 밖의 상황을 보시고는 차가 다 빠졌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나는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물론 나가서 다시 주차장에 주차해도 또 금방 차를 빼서 나가야 하니 그럴 필요가 없던 것이었지만 그걸 아버지께 설명하면서 그 상황이 떠 오르는 것도 짜증났고, 내 짜증을 알아차리셨는지 계속 이사 차량에 신경을 쓰시는 아버지의 행동도 짜증이 났던 것이다.
나중에 차를 빼서 운전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해보니, 참으로 부끄러운 짓을 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받은 화(노인으로 부터 받은)를 누군가에게(아버지와 이사하는 집 주인)에게 전가했던 것이 참으로 후회스러웠다.
먼저, 나에게 화를 낸 노인의 행동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노인이야 전후 사정을 몰랐던 것이고, 차가 인도를 완전히 막고 있어서 불편하게 돌아가야 한다면 화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내가 공손하지 못하니 더 화가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하는 집의 주인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하무인격이었다. 이사라는 큰 일을 치르고 있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 어떤 불편을 주어도 되는 면죄부는 아닌 것이다.
아마도 내가 화를 낸 원인은, 타인으로부터 질책을 받는 것에 대해 꽤 두려움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누구든 실수도 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미움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인데, 나는 그런 것에 매우 민간하게 반응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자기 반성은 별도의 문제이고, 이 문제보다 더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건 화의 전염이었다. 그리고 그 화의 전염의 진짜 모습은 책임의 전가이며, 자기 변명이었던 것이다.
나는 노인으로부터 질타를 받자마자 그것이 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사하는 집의 주인에게 화를 내었던 것이다.
이런 즉각적인 행동은 내가 가해자였던 사건을 순식간에 내가 피해자인 사건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런 즉각적인 반응은 물론 가해자와 피해자 같은 계산을 하기도 전에 거의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듯 하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심판관(?)을 헷갈리게 만든다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주 나쁜 습관(?)과도 같다.
가만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곳곳에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던 것 같다.
누군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가장 그럴듯한 희생자를 찾아내고, 자신의 책임거리와 희생자의 연관 관계를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은 단지 연결고리였다고 빠져 나가는 것.
어쩌면 이런 식의 무책임한 행동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은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사회를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인간이라는 개채들이 스스로의 판단력을 지니고 있는 이상, 어떤 일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한 마디씩은 각 개체에게 종속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단지 그 마디 마디들의 연관 관계도 고려해야 하기에 전체적인 원인과 결과 가운데 각 마디는 일정 부분만을 담당하고 있음도 고려해야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2017년 11월 3일 금요일
각인(刻印)된 기억
얼마전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 변두리에서 시내로 향하는 차량 안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어찌하다보니 맨 끝의 차량이었고, 빈자리는 없었고, 대략 20~30명의 사람들은 서 있었다.
조금 먼 거리라 준비해 온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었으며, 출입문과 좌석의 끝이 만나는 모서리에 몸을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어느 역에선가 정차하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와중에 눈을 들어 보니 저만치 통로 중간에 젊은 여성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약간 쌀쌀해지긴 했지만 조금은 더워 보이는 흰색 터틀넥의 상의에 검정색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모르긴해도 데이트나 설레이는 약속이 있어보이는 차림새였다. 약간 덥다는 듯이 터틀넥의 목을 당겨서 공기가 드나들게 하던 그녀는 마침 내 맞은편의 모서리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나는 책을 읽었고 열차는 출발했다.
잠시 후에 나를 향하고 모서리에 기대어 있던 그녀가 방향을 슬쩍 바꾸어 출입문쪽으로 몸을 돌리는 듯 하더니 스르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듯 했다. 그리곤 바로 무언가가 내 정강에 쪽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책을 덮고 보니 그녀가 눕듯이 쓰러져서 내 정강이 부근에 어깨와 머리를 두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으니 정신을 잃은 듯 했다. 급히 자리를 비키면서 그녀의 머리를 손을 받쳤다. 그리곤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당황하는 사이에 주위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급한대로 똑바로 눕히기 위해 그녀의 상반신을 통로쪽으로 약간 끌어내서 바닥에 반듯이 눕혔다.
다행히 열차에는 다른 여성분들도 많아서 내가 무리하게 손을 대지는 않아도 되었다. 여성을 부축해서 바로 옆의 좌석에 앉힐 때 즈음에는 다행히도 정신은 돌아온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어디에 전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 연락을 받은 열차 기관사는 다음 정차역에서 한동안 정차한 상태였고, 기관사였을지 역무원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직원분이 와서 다음역에 119 앰뷸런스를 호출해서 대기시키겠다고 설명을 하셨다. 좌석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의 옆에서 돌보시던 아주머니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전해 듣고는 "이제 괜찮대요. 119를 부르지 않으셔도 된대요"라고 직원분에게 전달을 했다.
정말 괜찮은걸까?
좌석에 앉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힘없이 무릎위 가방에 올려 놓은 손이 유난히가 하얗게 보였다. 어느덧 몇개 역이 지나고 그녀 옆에 있던 아주머니도 그녀를 두고 내렸으며, 나도 내릴 때가 되었다.
차량 안에는 그녀의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계속 줄어들었고, 이 상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많이 붐비게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열차에서 내리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좀 어떤 걸까, 누군가에게 연락 좀 하라고 말해 줘야 하는게 아닐까, 지금 가는 방향은 집일까 약속장소일까, 내가 말을 거는 것도 이상한걸까...
그리고 약속으로 만난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해 주기도 했고, 다음 날에 또 만난 사람들에게도 얘기를 해 주었지만, 정작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던 건 아주 다른 무엇이었고, 나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 얘기해 주지도 못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이 상황은 계속 내 머리속에 남아 있었다.
왜 그게 머리속에 계속 남아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 상황은 사진처럼 머리에 박혀 있고, 그 당시의, 특히 그녀가 힘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에서 내가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의 마음은 뭐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슴속에 둥그런 쇠공 같은 것이 박힌 듯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대체 이게 무엇인걸까 고민을 하면서, 연상되어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등교하던 버스 안에서 우연히 목격했던 치한. 그 치한은 우산의 손잡이를 아래로 내리고 손잡이의 둥근 고리를 이용해서 여학생의 치마를 올리던 장면. 그 불의와 관음의 복합심리.
중학교시절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보게된 청불영화의 장면. 세명의 남자 친구 가운데 날라리같은 학생이 주인공의 짝사랑의 순결을 빼앗는 장면의 기억과 그 우울감.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같은 동네의 삼형제가 아버지거라며 보여준 음란서적의 믿을 수 없는 사진을 본 기억.
어린 시절에 비가 내리면, 비를 맞으며 물이 고인 웅덩이에 신발 신은 채로 첨벙거리던 느낌.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와 옷을 다 벗고 아랫목에 이불 속에 들어가 있던 느낌.
재수하던 시절, 우연히 보게 된 여학생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은 못 걸지만 항상 그녀를 보기 위해 기다리던 지하철 역사의 기억.
이상한 기억, 충격적인 기억, 처음 느껴본 느낌...
그러고 보니 대부분 성(性)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이었군.
나는 아무래도 성(性)적인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한 사람인거였군.
그래서 그것들이 나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을 기억들로 각인되는 것이었나보군.
그러면 그 지하철의 여성에 대해서도 성적인 무언가를 느꼈다는 말인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단순히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녀를 도와주어야 하는가 그러지 않아도 되는가라는 문제였다면, 상황을 조금 바꾸어서 그게 남자였다면, 뇌리에 깊이 남지 않았을 터.
토요일 오후, 변두리에서 시내로 향하는 차량 안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어찌하다보니 맨 끝의 차량이었고, 빈자리는 없었고, 대략 20~30명의 사람들은 서 있었다.
조금 먼 거리라 준비해 온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었으며, 출입문과 좌석의 끝이 만나는 모서리에 몸을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어느 역에선가 정차하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와중에 눈을 들어 보니 저만치 통로 중간에 젊은 여성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약간 쌀쌀해지긴 했지만 조금은 더워 보이는 흰색 터틀넥의 상의에 검정색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모르긴해도 데이트나 설레이는 약속이 있어보이는 차림새였다. 약간 덥다는 듯이 터틀넥의 목을 당겨서 공기가 드나들게 하던 그녀는 마침 내 맞은편의 모서리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나는 책을 읽었고 열차는 출발했다.
잠시 후에 나를 향하고 모서리에 기대어 있던 그녀가 방향을 슬쩍 바꾸어 출입문쪽으로 몸을 돌리는 듯 하더니 스르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듯 했다. 그리곤 바로 무언가가 내 정강에 쪽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책을 덮고 보니 그녀가 눕듯이 쓰러져서 내 정강이 부근에 어깨와 머리를 두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으니 정신을 잃은 듯 했다. 급히 자리를 비키면서 그녀의 머리를 손을 받쳤다. 그리곤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당황하는 사이에 주위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급한대로 똑바로 눕히기 위해 그녀의 상반신을 통로쪽으로 약간 끌어내서 바닥에 반듯이 눕혔다.
다행히 열차에는 다른 여성분들도 많아서 내가 무리하게 손을 대지는 않아도 되었다. 여성을 부축해서 바로 옆의 좌석에 앉힐 때 즈음에는 다행히도 정신은 돌아온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어디에 전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 연락을 받은 열차 기관사는 다음 정차역에서 한동안 정차한 상태였고, 기관사였을지 역무원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직원분이 와서 다음역에 119 앰뷸런스를 호출해서 대기시키겠다고 설명을 하셨다. 좌석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의 옆에서 돌보시던 아주머니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전해 듣고는 "이제 괜찮대요. 119를 부르지 않으셔도 된대요"라고 직원분에게 전달을 했다.
정말 괜찮은걸까?
좌석에 앉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힘없이 무릎위 가방에 올려 놓은 손이 유난히가 하얗게 보였다. 어느덧 몇개 역이 지나고 그녀 옆에 있던 아주머니도 그녀를 두고 내렸으며, 나도 내릴 때가 되었다.
차량 안에는 그녀의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계속 줄어들었고, 이 상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많이 붐비게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열차에서 내리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좀 어떤 걸까, 누군가에게 연락 좀 하라고 말해 줘야 하는게 아닐까, 지금 가는 방향은 집일까 약속장소일까, 내가 말을 거는 것도 이상한걸까...
그리고 약속으로 만난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해 주기도 했고, 다음 날에 또 만난 사람들에게도 얘기를 해 주었지만, 정작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던 건 아주 다른 무엇이었고, 나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 얘기해 주지도 못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이 상황은 계속 내 머리속에 남아 있었다.
왜 그게 머리속에 계속 남아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 상황은 사진처럼 머리에 박혀 있고, 그 당시의, 특히 그녀가 힘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에서 내가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의 마음은 뭐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슴속에 둥그런 쇠공 같은 것이 박힌 듯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대체 이게 무엇인걸까 고민을 하면서, 연상되어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등교하던 버스 안에서 우연히 목격했던 치한. 그 치한은 우산의 손잡이를 아래로 내리고 손잡이의 둥근 고리를 이용해서 여학생의 치마를 올리던 장면. 그 불의와 관음의 복합심리.
중학교시절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보게된 청불영화의 장면. 세명의 남자 친구 가운데 날라리같은 학생이 주인공의 짝사랑의 순결을 빼앗는 장면의 기억과 그 우울감.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같은 동네의 삼형제가 아버지거라며 보여준 음란서적의 믿을 수 없는 사진을 본 기억.
어린 시절에 비가 내리면, 비를 맞으며 물이 고인 웅덩이에 신발 신은 채로 첨벙거리던 느낌.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와 옷을 다 벗고 아랫목에 이불 속에 들어가 있던 느낌.
재수하던 시절, 우연히 보게 된 여학생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은 못 걸지만 항상 그녀를 보기 위해 기다리던 지하철 역사의 기억.
이상한 기억, 충격적인 기억, 처음 느껴본 느낌...
그러고 보니 대부분 성(性)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이었군.
나는 아무래도 성(性)적인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한 사람인거였군.
그래서 그것들이 나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을 기억들로 각인되는 것이었나보군.
그러면 그 지하철의 여성에 대해서도 성적인 무언가를 느꼈다는 말인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단순히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녀를 도와주어야 하는가 그러지 않아도 되는가라는 문제였다면, 상황을 조금 바꾸어서 그게 남자였다면, 뇌리에 깊이 남지 않았을 터.
2017년 9월 11일 월요일
승자독식, 승자는 옳다?
흔히들 역사는 승자들의 편이라고 한다.
그 시대를 이끈 승자들은 종종 논란거리마저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고, 이를 대중에게 충분하게 혹은 의도적으로 설명함으로써 타당성을 부여받기도 한다.
이에 반대했던 패자는 최소한의 변론마저 빼앗겨버리고 악(惡)으로 규정되어 역사의 교훈으로만 남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혁명이나 반란, 대규모의 전쟁을 통해 이런 과정이 반복되어 왔는데, 이에 대한 반대론자들이 꾸준히 나오기는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인식에 각인되어 있는 이상한 논리가 하나 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천명을 거스르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순리와 천리를 따랐기에 승자들이 승리한 것이며, 그들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조차 지극히 옳은 것이고, 마땅한 천명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런 논리가 맞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시장 경쟁 체제를 보면, 전체의 규모가 매우 크기 때문에 누군가의 욕망만으로 시장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오래된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현재 사회에서의 양상을 보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면서 부의 편중 현상이 점점 늘어가는 추세이다.
이런 현상은 전체 시장의 매우 작은 부분에서부터 전체적인 부분에까지 고르게 나타나고 있는데, 마치 프랙탈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라면이나 빵과 같은 일상적인 음식에서도 시장 지배력이 높아가는 브랜드가 있으며, 그들의 시장 지배력이 언젠가는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게 될 듯이 보이곤 한다.
자동차, 반도체, 전자제품,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인 용품에서 큰 금액의 자산에까지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금융기관의 브랜드나 실물 화폐나 가상화폐의 가치에서도 이런 양상이 나타나며, 이런 현상은 주식시장으로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작은 기업으로 시작한 업체들은 생존이나 작은 성공을 꿈꿈며 시작하면서, 시장에서 존재하는 게임의 법칙을 따라야만 한다.
그것이 관습적인 업계의 관행일 수도 있으며,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법칙을 준수하며 성장하던 기업은 어느 순간 게임의 법칙을 만들 수 있는 지배력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칙은, 자신이 처음 사업을 시작하면서 느꼈던 소규모 업체의 어려움을 제거하기 위한 법칙이 아니다.
이제 자신의 지위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자신에게 도전하는 경쟁기업을 견제하기 위한 법칙이기 마련이다.
이제 무엇인가 새로 시작하려 한다면,
그 세상이 이상적이고 아름다울거라는 환상은 거두어야 할 것이다.
불리하지만 그곳의 법칙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법칙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그것이 옳기 때문에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언젠가는 바뀔 수 있으며 그건 게임의 지배자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
비트코인을 위시한 가상화폐가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그들의 시세는 미친듯이 폭발하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극과 극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미 가상화폐를 보유한 사람은 이것이 새로운 대체 통화로서의 권리를 획득하여 기존의 부의 형태마저 바뀌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미처 가상화폐를 보유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이것을 사상누각이나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며 애써 무시하려 한다.
과연 어느쪽이 옳은 것일까?
지금이라도 투자를 해 보려는 사람은 깊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대체 가상화폐의 진면목은 무엇일까, 그것의 미래는 어찌될 것인가?
2)
북한의 젊은 독재자 김정은의 행보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ICBM, SLBM, 수소핵 융합 폭발 시험 등을 해 나가며 끊임없이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어째서 북한이 미국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북한을 옹호하는 나라는 점점 줄어들어 이젠 거의 없다시피 하다.
마지막 중국과 러시아의 비호를 받을 수 있을지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전세계 모든 국가를 적으로 돌리고 있는 셈이다.
자국민들에게만 지지를 받는 이런 행동은 과연 옳은 것인가?
3)
박근혜 전대통령의 탄핵 이후에 새로운 지도자가 된 문재인 대통령.
그가 시도하는 정책들은 후보 시절의 언행에 비투어 볼 때 비교적 강경해 보인다.
대기업에 대한 제재, 중소기업 보호,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부동산 투기 근절 대책, 사회 곳곳의 적폐 청산...
이런 정책들은 대부분 힘없는 다수를 위하고, 힘을 가진 소수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정책들이었다.
그리고 갖가지 정책들이 나오면서, 양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가장 큰 것은 여성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남성들이 양보해야 하는 것이 늘어나는 것이고, 북한의 도발로 인한 사드(THAAD)의 배치로 인해 양보를 해야 하는 특정 지역의 주민들과 기업들이 중국으로부터 받는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문제 등이 있다.
일부에선 원자력 발전소의 공사 중단에 따른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일까?
단지 많은 사람이 원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소소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시될 수 있는 것일까?
앞서 제시한 3가지 상황에 대해 사람들은 각자 어떤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쪽이 옳은지를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옳은 방법은 찾기 어렵다.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류는 과연 잘 해 온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애써 자위하는 것일까?
우리는 선택의 순간마다 아주 잘못된 선택을 했던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나마 이정도라도....라며 자기 만족에 빠져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먼 훗날, 어떤 선택에 대한 극적인 인과 관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우리들 중 누구도 지금의 선택이 옳은지 아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단지, 지금 어떤 선택을 했다면, 그 선택이 옳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면 그것은 옳은 것이 되는 것이다.
옳기 때문에 성공하고 성취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고 승리하고 이루어냈기 때문에 그것이 옳아지는 것이다.
그 시대를 이끈 승자들은 종종 논란거리마저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고, 이를 대중에게 충분하게 혹은 의도적으로 설명함으로써 타당성을 부여받기도 한다.
이에 반대했던 패자는 최소한의 변론마저 빼앗겨버리고 악(惡)으로 규정되어 역사의 교훈으로만 남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혁명이나 반란, 대규모의 전쟁을 통해 이런 과정이 반복되어 왔는데, 이에 대한 반대론자들이 꾸준히 나오기는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인식에 각인되어 있는 이상한 논리가 하나 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천명을 거스르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순리와 천리를 따랐기에 승자들이 승리한 것이며, 그들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조차 지극히 옳은 것이고, 마땅한 천명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런 논리가 맞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시장 경쟁 체제를 보면, 전체의 규모가 매우 크기 때문에 누군가의 욕망만으로 시장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오래된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현재 사회에서의 양상을 보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면서 부의 편중 현상이 점점 늘어가는 추세이다.
이런 현상은 전체 시장의 매우 작은 부분에서부터 전체적인 부분에까지 고르게 나타나고 있는데, 마치 프랙탈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라면이나 빵과 같은 일상적인 음식에서도 시장 지배력이 높아가는 브랜드가 있으며, 그들의 시장 지배력이 언젠가는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게 될 듯이 보이곤 한다.
자동차, 반도체, 전자제품,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인 용품에서 큰 금액의 자산에까지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금융기관의 브랜드나 실물 화폐나 가상화폐의 가치에서도 이런 양상이 나타나며, 이런 현상은 주식시장으로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작은 기업으로 시작한 업체들은 생존이나 작은 성공을 꿈꿈며 시작하면서, 시장에서 존재하는 게임의 법칙을 따라야만 한다.
그것이 관습적인 업계의 관행일 수도 있으며,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법칙을 준수하며 성장하던 기업은 어느 순간 게임의 법칙을 만들 수 있는 지배력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칙은, 자신이 처음 사업을 시작하면서 느꼈던 소규모 업체의 어려움을 제거하기 위한 법칙이 아니다.
이제 자신의 지위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자신에게 도전하는 경쟁기업을 견제하기 위한 법칙이기 마련이다.
이제 무엇인가 새로 시작하려 한다면,
그 세상이 이상적이고 아름다울거라는 환상은 거두어야 할 것이다.
불리하지만 그곳의 법칙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법칙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그것이 옳기 때문에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언젠가는 바뀔 수 있으며 그건 게임의 지배자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
비트코인을 위시한 가상화폐가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그들의 시세는 미친듯이 폭발하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극과 극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미 가상화폐를 보유한 사람은 이것이 새로운 대체 통화로서의 권리를 획득하여 기존의 부의 형태마저 바뀌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미처 가상화폐를 보유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이것을 사상누각이나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며 애써 무시하려 한다.
과연 어느쪽이 옳은 것일까?
지금이라도 투자를 해 보려는 사람은 깊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대체 가상화폐의 진면목은 무엇일까, 그것의 미래는 어찌될 것인가?
2)
북한의 젊은 독재자 김정은의 행보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ICBM, SLBM, 수소핵 융합 폭발 시험 등을 해 나가며 끊임없이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어째서 북한이 미국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북한을 옹호하는 나라는 점점 줄어들어 이젠 거의 없다시피 하다.
마지막 중국과 러시아의 비호를 받을 수 있을지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전세계 모든 국가를 적으로 돌리고 있는 셈이다.
자국민들에게만 지지를 받는 이런 행동은 과연 옳은 것인가?
3)
박근혜 전대통령의 탄핵 이후에 새로운 지도자가 된 문재인 대통령.
그가 시도하는 정책들은 후보 시절의 언행에 비투어 볼 때 비교적 강경해 보인다.
대기업에 대한 제재, 중소기업 보호,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부동산 투기 근절 대책, 사회 곳곳의 적폐 청산...
이런 정책들은 대부분 힘없는 다수를 위하고, 힘을 가진 소수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정책들이었다.
그리고 갖가지 정책들이 나오면서, 양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가장 큰 것은 여성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남성들이 양보해야 하는 것이 늘어나는 것이고, 북한의 도발로 인한 사드(THAAD)의 배치로 인해 양보를 해야 하는 특정 지역의 주민들과 기업들이 중국으로부터 받는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문제 등이 있다.
일부에선 원자력 발전소의 공사 중단에 따른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일까?
단지 많은 사람이 원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소소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시될 수 있는 것일까?
앞서 제시한 3가지 상황에 대해 사람들은 각자 어떤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쪽이 옳은지를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옳은 방법은 찾기 어렵다.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류는 과연 잘 해 온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애써 자위하는 것일까?
우리는 선택의 순간마다 아주 잘못된 선택을 했던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나마 이정도라도....라며 자기 만족에 빠져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먼 훗날, 어떤 선택에 대한 극적인 인과 관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우리들 중 누구도 지금의 선택이 옳은지 아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단지, 지금 어떤 선택을 했다면, 그 선택이 옳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면 그것은 옳은 것이 되는 것이다.
옳기 때문에 성공하고 성취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고 승리하고 이루어냈기 때문에 그것이 옳아지는 것이다.
2017년 8월 20일 일요일
우리는 과연 바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앞선 포스팅이 뭔가 더 거창하고, 스케일이 크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쓴 글이라 뜬금 없는 얘기이거나 별 고민이 되지 않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시대를 거슬러 갔다가 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살지 않았던 시대를 상상해야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단지 좀 오래(?) 살다보니, 한 삶의 생애 동안에도 대중의 가치관 혹은 규범이 꽤나 극적으로 변화하는 걸 겪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고민을 해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서도 일상의 습관적인 행동양식과 대중적인 규범이 충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젊은 여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과 이에 대한 사회적 규범의 충돌
- 개의 식용에 대한 관습관 대중적 여론의 충돌
- 경제적인 효율성 측면의 원자력과 환경에 대한 우려의 충돌
이와 같은 문제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하게 되는 대중적인 딜레마일 것이다.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바른 길"을 외면하는 당위성을 주장하곤 한다.
나는 이 포스팅에서 "바른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겠다.
그것이 정말 바른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결정할 몫이다.
그리고 그 "바른 길"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도 않겠다.
그건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주장은 또 하나의 소수 의견일 수 있다.
단지, "바른 길"에 동의하지만 그 길을 갈 수 없는 우리의 현실적인 딜레마를 보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확장해 보면, 과연 어디까지 선악의 구분이 가능한지도 가늠할 수 있으며, 과거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타인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이 법의 판단에 대한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법의 효용성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단지 법이 선악의 판단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제공하거나, 선악에 대한 선언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 것 뿐이다.)
잠깐만 낮 뜨거운 우리의 모순을 보자.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노출 된다.
이 과정에는 각자의 욕망이 톱니바퀴처럼 맞아 떨어지는 욕망의 굴레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인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꿈꾸는 젊은 여성은, 미디어 담당자의 과도한 요구에도 순순히 응한다.
미디어의 담당자들은 많은 대중의 관심과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젊은 여성의 성적인 매력을 한껏 부각시켜 노골적으로 시청자들에게 보여준다.
성에 목마른 남자들은 사회적 규범이나 윤리적인 문제들을 외면하고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노골적인 방송에 환호한다.
비슷한 사례는 남자와 여자를 바꾸어서도 존재하지 않나 싶다.
이 경우의 "바른 길"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나타나는 문제일까?
"바른 길"이 바른 길이 아니었던 것일까?
우리 사회가 여전히 성에 대해 폐쇄적이어서, 개인의 성적인 욕구에 대한 사회적인 규범을 만들지 못했던 탓일까?
만약 언젠가의 미래에, 현재의 이와 같은 사회적인 모습을 "미개"하거나 "야만"스럽게 생각하는 때가 온다면, 우리 대다수는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걸까?
아마도 그 때가 되면, 지금의 대다수였던 사람들은 여러가지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의 사람들은 다시 되물을 것이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도 그것이 옳지 않았던 것 아니냐'고
'옳지 않음을 알고도 묵인하거나 오히려 반대쪽으로 동조하지 않았냐'고
어쩌면 우리가 과거의 시대에 있었던 과오에 대한 질문이 있다면,
이와 같은 프레임으로도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시대를 거슬러 갔다가 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살지 않았던 시대를 상상해야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단지 좀 오래(?) 살다보니, 한 삶의 생애 동안에도 대중의 가치관 혹은 규범이 꽤나 극적으로 변화하는 걸 겪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고민을 해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서도 일상의 습관적인 행동양식과 대중적인 규범이 충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젊은 여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과 이에 대한 사회적 규범의 충돌
- 개의 식용에 대한 관습관 대중적 여론의 충돌
- 경제적인 효율성 측면의 원자력과 환경에 대한 우려의 충돌
이와 같은 문제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하게 되는 대중적인 딜레마일 것이다.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바른 길"을 외면하는 당위성을 주장하곤 한다.
나는 이 포스팅에서 "바른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겠다.
그것이 정말 바른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결정할 몫이다.
그리고 그 "바른 길"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도 않겠다.
그건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주장은 또 하나의 소수 의견일 수 있다.
단지, "바른 길"에 동의하지만 그 길을 갈 수 없는 우리의 현실적인 딜레마를 보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확장해 보면, 과연 어디까지 선악의 구분이 가능한지도 가늠할 수 있으며, 과거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타인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이 법의 판단에 대한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법의 효용성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단지 법이 선악의 판단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제공하거나, 선악에 대한 선언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 것 뿐이다.)
잠깐만 낮 뜨거운 우리의 모순을 보자.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노출 된다.
이 과정에는 각자의 욕망이 톱니바퀴처럼 맞아 떨어지는 욕망의 굴레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인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꿈꾸는 젊은 여성은, 미디어 담당자의 과도한 요구에도 순순히 응한다.
미디어의 담당자들은 많은 대중의 관심과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젊은 여성의 성적인 매력을 한껏 부각시켜 노골적으로 시청자들에게 보여준다.
성에 목마른 남자들은 사회적 규범이나 윤리적인 문제들을 외면하고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노골적인 방송에 환호한다.
비슷한 사례는 남자와 여자를 바꾸어서도 존재하지 않나 싶다.
이 경우의 "바른 길"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나타나는 문제일까?
"바른 길"이 바른 길이 아니었던 것일까?
우리 사회가 여전히 성에 대해 폐쇄적이어서, 개인의 성적인 욕구에 대한 사회적인 규범을 만들지 못했던 탓일까?
만약 언젠가의 미래에, 현재의 이와 같은 사회적인 모습을 "미개"하거나 "야만"스럽게 생각하는 때가 온다면, 우리 대다수는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걸까?
아마도 그 때가 되면, 지금의 대다수였던 사람들은 여러가지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의 사람들은 다시 되물을 것이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도 그것이 옳지 않았던 것 아니냐'고
'옳지 않음을 알고도 묵인하거나 오히려 반대쪽으로 동조하지 않았냐'고
어쩌면 우리가 과거의 시대에 있었던 과오에 대한 질문이 있다면,
이와 같은 프레임으로도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과연 바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 되었고, 선거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이게 지난 5월의 일이니 3개월쯤 전의 일이다.
과거의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쪼개지고 야당이 되었으며, 더불어 민주당이 여당이 되었다.
새 정부가 부르짖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최근까지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적페청산'이 아닌가 싶다.
청와대의 직접적인 개입이야 없겠지만, 각 정부 기관들과 기업, 단체들은 소위 '알아서 기는' 모양새를 보여준다.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 최순실, 이재용 등의 뇌물 수수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며, 새로이 비리가 드러나 고소가 되는 사례도 적잖다.
대기업들이 갑질이나, 짬짜미에 대한 공정위의 칼날도 매섭고, 이에 대한 법원이 판결도 예전과는 온도차가 많이 느껴지고 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청와대와 여당이 날마다 들고 나와서 청산을 주장하는 부분들이 많아지면서, 청산의 대상이 되는 사람도 많아지고, 일찌감치 국외로 도피한 사례들도 보도가 되곤 했다.
어쩌면 이런 청산이라는 것 자체가 구성원 대다수가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어차피 절대 선이나 절대 악은 없으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그리고 판단의 주체에 따라 선악의 기준은 달라진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게 대의 민주주의이기도 할 것이다.
(다수의 횡포, 소수의 억울함, 다수의 무심함과 소수의 절박함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이건 너무 긴 이야기가 되겠으니 여기에선 피하기로 하자.)
며칠전 광복절을 맞아 인터넷 상에서는 한일합방, 일제 침략, 항일 운동, 독립 투사,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강제 징용 노동자 등에 대한 기사와 얘기들이 많이 나왔다.
일부는 들었던 얘기들도 있고, 일부는 새로운 얘기들도 있고...
청와대의 적폐청산이라는 기치와 맞아 떨어지게 친일파 청산에 대한 주장도 다시 나왔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과연 저 친일파라는 사람들은 정말 나쁜 사람들 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친일파에 대한 반민족적인 행위들을 듣고, 그들에 대한 증오심을 부글부글 끓어 오르게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친일파라는 단어 자체는 더 이상의 논리적인 사고를 차단해버리고 그저 증오심만 드러내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예는 어떨까?
조선 말기, 구한말기에 총명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관직에 등용되어 맡은 바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셈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충실했고, 출세의 길을 탐하지 않는 그런 관료였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한반도는 세계의 열강들이 모여들어 부산하고 어수선하다.
왕실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청정과 섭정으로 어지럽다.
때로는 청나라가, 러시아가, 일본이 세력을 키우며 나라를 좌지 우지한다.
하지만 이 관료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는 한, 누가 권력을 잡든, 누가 지시를 하던 묵묵히 그에 따라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
이런 사람이 후세에 친일파라고 낙인이 찍힌다면, 그는 과연 어떤 변명을 하고 싶을까?
일본제국의 앞잡이로 충성하며 득세하고 치부한 몇몇의 친일파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보다는 약한 수준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판단이 어려워진다.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을 하거나 독립군을 지원하면서 한편으로는 친일을 했던 증거도 나온다.
심지어는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철저했다는 만해 한용운 선생은 조선의 불교를 유신하기 위한 방안 가운데 하나로 승려의 혼인을 허가해 달라는 탄원을 조선 총독부에 보내서 지탄을 받기도 했다.
아마도 친일을 했다고 의심 받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나라의 일을 맡을 만한 능력이 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단한 민족적 사명 이전에 자연인, 생활인이었고, 한 가장의 가장이었을 것이다. 대단히 반민족적인 일이라고 (그 당시에도) 느낄만한 일을 해야했던 사람은 그 중에서도 일부였을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는 자신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었다거나, 그 지시를 누가 내렸든 여전히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느낄만 하지 않았을까.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측근 참모들은 박 전 대통령의 명령에 대해 얼마나 의심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박 전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업무 지시를 할 때에는 나름의 명분과 타당성을 제시하고 난 후에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그런 프레임이 구축된다면, 더욱이 자신의 상사와 공동 운명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대체 얼마만큼 선악에 대해 숙고할 여유가 있는걸까?
가까운 친구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조직에서 일을 하다보면 각자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상사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이 맞다고.
왜냐하면 상사들이 그 직책에 있는 것은 그들이 결과에 대해 책임 질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상당히 옳은 얘기라 생각했다.
최근의 대기업 회장의 갑질, 군대 공관병에 대한 갑질,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나 성희롱, 반려동물에 대한 보호법 등을 보면 그 판단 기준이 불과 십수년전에 비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느끼게 된다.
방송에서 논란이 되는 사건들을 보면, 내가 과거에 아무렇지 않게 했던 일이 요즘이라면 신상이 밝혀져서 낙인이 찍혀야 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될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나는 언제나 바른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현재의 행동이 미래에도 지탄받지 않을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게 지난 5월의 일이니 3개월쯤 전의 일이다.
과거의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쪼개지고 야당이 되었으며, 더불어 민주당이 여당이 되었다.
새 정부가 부르짖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최근까지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적페청산'이 아닌가 싶다.
청와대의 직접적인 개입이야 없겠지만, 각 정부 기관들과 기업, 단체들은 소위 '알아서 기는' 모양새를 보여준다.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 최순실, 이재용 등의 뇌물 수수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며, 새로이 비리가 드러나 고소가 되는 사례도 적잖다.
대기업들이 갑질이나, 짬짜미에 대한 공정위의 칼날도 매섭고, 이에 대한 법원이 판결도 예전과는 온도차가 많이 느껴지고 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청와대와 여당이 날마다 들고 나와서 청산을 주장하는 부분들이 많아지면서, 청산의 대상이 되는 사람도 많아지고, 일찌감치 국외로 도피한 사례들도 보도가 되곤 했다.
어쩌면 이런 청산이라는 것 자체가 구성원 대다수가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어차피 절대 선이나 절대 악은 없으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그리고 판단의 주체에 따라 선악의 기준은 달라진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게 대의 민주주의이기도 할 것이다.
(다수의 횡포, 소수의 억울함, 다수의 무심함과 소수의 절박함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이건 너무 긴 이야기가 되겠으니 여기에선 피하기로 하자.)
며칠전 광복절을 맞아 인터넷 상에서는 한일합방, 일제 침략, 항일 운동, 독립 투사,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강제 징용 노동자 등에 대한 기사와 얘기들이 많이 나왔다.
일부는 들었던 얘기들도 있고, 일부는 새로운 얘기들도 있고...
청와대의 적폐청산이라는 기치와 맞아 떨어지게 친일파 청산에 대한 주장도 다시 나왔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과연 저 친일파라는 사람들은 정말 나쁜 사람들 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친일파에 대한 반민족적인 행위들을 듣고, 그들에 대한 증오심을 부글부글 끓어 오르게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친일파라는 단어 자체는 더 이상의 논리적인 사고를 차단해버리고 그저 증오심만 드러내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예는 어떨까?
조선 말기, 구한말기에 총명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관직에 등용되어 맡은 바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셈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충실했고, 출세의 길을 탐하지 않는 그런 관료였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한반도는 세계의 열강들이 모여들어 부산하고 어수선하다.
왕실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청정과 섭정으로 어지럽다.
때로는 청나라가, 러시아가, 일본이 세력을 키우며 나라를 좌지 우지한다.
하지만 이 관료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는 한, 누가 권력을 잡든, 누가 지시를 하던 묵묵히 그에 따라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
이런 사람이 후세에 친일파라고 낙인이 찍힌다면, 그는 과연 어떤 변명을 하고 싶을까?
일본제국의 앞잡이로 충성하며 득세하고 치부한 몇몇의 친일파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보다는 약한 수준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판단이 어려워진다.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을 하거나 독립군을 지원하면서 한편으로는 친일을 했던 증거도 나온다.
심지어는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철저했다는 만해 한용운 선생은 조선의 불교를 유신하기 위한 방안 가운데 하나로 승려의 혼인을 허가해 달라는 탄원을 조선 총독부에 보내서 지탄을 받기도 했다.
아마도 친일을 했다고 의심 받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나라의 일을 맡을 만한 능력이 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단한 민족적 사명 이전에 자연인, 생활인이었고, 한 가장의 가장이었을 것이다. 대단히 반민족적인 일이라고 (그 당시에도) 느낄만한 일을 해야했던 사람은 그 중에서도 일부였을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는 자신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었다거나, 그 지시를 누가 내렸든 여전히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느낄만 하지 않았을까.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측근 참모들은 박 전 대통령의 명령에 대해 얼마나 의심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박 전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업무 지시를 할 때에는 나름의 명분과 타당성을 제시하고 난 후에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그런 프레임이 구축된다면, 더욱이 자신의 상사와 공동 운명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대체 얼마만큼 선악에 대해 숙고할 여유가 있는걸까?
가까운 친구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조직에서 일을 하다보면 각자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상사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이 맞다고.
왜냐하면 상사들이 그 직책에 있는 것은 그들이 결과에 대해 책임 질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상당히 옳은 얘기라 생각했다.
최근의 대기업 회장의 갑질, 군대 공관병에 대한 갑질,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나 성희롱, 반려동물에 대한 보호법 등을 보면 그 판단 기준이 불과 십수년전에 비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느끼게 된다.
방송에서 논란이 되는 사건들을 보면, 내가 과거에 아무렇지 않게 했던 일이 요즘이라면 신상이 밝혀져서 낙인이 찍혀야 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될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나는 언제나 바른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현재의 행동이 미래에도 지탄받지 않을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2017년 8월 11일 금요일
언짢은 말을 들었을 경우의 대처
일반인은 화를 내고 상대방을 역으로 공격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인간 관계에 경험이 많은 사람은 상대방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를 찾으려 한다.
자신을 알고자 원하는 사람은 왜 자신이 언짢게 느끼는지를 생각해 본다.
인간 관계에 경험이 많은 사람은 상대방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를 찾으려 한다.
자신을 알고자 원하는 사람은 왜 자신이 언짢게 느끼는지를 생각해 본다.
2017년 6월 5일 월요일
아이덴티티
자아(自我) 주체(主體)
이전 포스팅에서의 고민은 좀처럼 진전이 없다.
그러나 문득 내 인생에서 꽤 오랜 시간동안 나를 규정했던 생각 혹은 행동 양식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외부적인 힘이나 규율들이 나로 하여금 강제로 변화하도록 했던 적이 있는데, 나는 이에 대해서 꽤나 거부감을 가졌고 의식적으로 반항하려 했던 듯 하다.
아직까지도 이런 성향은 비교적 강하게 남아 있는데, 내가 정말 하기 싫어하는 것들을 해야만 하는 상황은 정말 끔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런걸까?
먼저 드는 기억은 아마도 학교를 졸업하고 맨 처음 취업을 했던 당시였다.
대기업이었던 그곳에서의 첫 시작은 기업 연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일종의 집합 교육이었다.
세부 부서의 업무와 무관하게 모든 직원들이 알아야 하는 그 기업의 행동양식과 규율, 문화, 조직의 속성에 대한 공통적인 <기업 상식>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대단히 많은 신입 사원들에게 정해진 시간 안에 거대한 조직의 문화와 조직의 상식, 규율, 금기 등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선 주입식 교육이 필연적이었다.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 절에 가서 살려면 절의 법도를 배워야지, 절의 법도를 나에게 맞게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 과정은 신입사원 개개인의 생각과 몸에 밴 습관 등도 바꾸려했던 것이기에, 비록 명분이 그럴듯 했음에도, 꽤 거부감이 들었으며, 일부분에 대해서는 나 자신의 양식이나 사상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의식의 표면에만 머물도록 했던 경우도 있었다.
과연 당시에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의 사상이나 양식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비슷한 예는 이후의 직장 생활에서 다시 드러나곤 했다.
조직 생활을 해야하기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접촉은 불가피하고, 이 과정에서 내가 하기 싫은 일들을 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럴때마다 느꼈던 그 불편한 느낌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게 내 자신의 고유한 무엇인가가 파괴된다고 느꼈던 것일까?
그럼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나의 아이덴티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틀림없이 외부의 여러가지 힘들이 나를 끊임없이 이렇게 이지러뜨리고 흔들고 누르고 당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가 거부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은 그대로 수용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단지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것을 대단한 보물인것처럼 지키려고 애썼던 것은 아닐까?
아무런 방어막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 무엇이던 맨처음 영향을 준 것을 그대로 수용하지만, 일단 영향을 받고 나면 아주 단단한 방어막이 형성되는 그런 것?
혹은, 타고난 성격이나 타고난 체질 등으로 인해 어떤 행동 혹은 습관이 일정한 규제를 받는 경우?
가령, 왼손잡이로 태어난 사람(이게 정말 선천적인건지는 모르겠다)에게 반드시 오른손으로 밥을 먹어야 한다는 규칙은 매우 심각한 불편을 초래할 것이고, 당연히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일 것이다.
후자와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진아(眞我)라는 것이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지켜야만 할 나 자신의 아이덴티티 따위는 없는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며, 현재의 내 모습은 현재에만 유효한 것이며, 과거와 미래의 내 모습은 아주 유연하다.
한편으로는 나의 참모습이라는 따위의 생각은 나를 가장 심각하게 구속하고 제약하는 요인일 것이다.
이전 포스팅에서의 고민은 좀처럼 진전이 없다.
그러나 문득 내 인생에서 꽤 오랜 시간동안 나를 규정했던 생각 혹은 행동 양식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외부적인 힘이나 규율들이 나로 하여금 강제로 변화하도록 했던 적이 있는데, 나는 이에 대해서 꽤나 거부감을 가졌고 의식적으로 반항하려 했던 듯 하다.
아직까지도 이런 성향은 비교적 강하게 남아 있는데, 내가 정말 하기 싫어하는 것들을 해야만 하는 상황은 정말 끔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런걸까?
먼저 드는 기억은 아마도 학교를 졸업하고 맨 처음 취업을 했던 당시였다.
대기업이었던 그곳에서의 첫 시작은 기업 연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일종의 집합 교육이었다.
세부 부서의 업무와 무관하게 모든 직원들이 알아야 하는 그 기업의 행동양식과 규율, 문화, 조직의 속성에 대한 공통적인 <기업 상식>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대단히 많은 신입 사원들에게 정해진 시간 안에 거대한 조직의 문화와 조직의 상식, 규율, 금기 등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선 주입식 교육이 필연적이었다.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 절에 가서 살려면 절의 법도를 배워야지, 절의 법도를 나에게 맞게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 과정은 신입사원 개개인의 생각과 몸에 밴 습관 등도 바꾸려했던 것이기에, 비록 명분이 그럴듯 했음에도, 꽤 거부감이 들었으며, 일부분에 대해서는 나 자신의 양식이나 사상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의식의 표면에만 머물도록 했던 경우도 있었다.
과연 당시에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의 사상이나 양식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비슷한 예는 이후의 직장 생활에서 다시 드러나곤 했다.
조직 생활을 해야하기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접촉은 불가피하고, 이 과정에서 내가 하기 싫은 일들을 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럴때마다 느꼈던 그 불편한 느낌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게 내 자신의 고유한 무엇인가가 파괴된다고 느꼈던 것일까?
그럼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나의 아이덴티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틀림없이 외부의 여러가지 힘들이 나를 끊임없이 이렇게 이지러뜨리고 흔들고 누르고 당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가 거부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은 그대로 수용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단지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것을 대단한 보물인것처럼 지키려고 애썼던 것은 아닐까?
아무런 방어막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 무엇이던 맨처음 영향을 준 것을 그대로 수용하지만, 일단 영향을 받고 나면 아주 단단한 방어막이 형성되는 그런 것?
혹은, 타고난 성격이나 타고난 체질 등으로 인해 어떤 행동 혹은 습관이 일정한 규제를 받는 경우?
가령, 왼손잡이로 태어난 사람(이게 정말 선천적인건지는 모르겠다)에게 반드시 오른손으로 밥을 먹어야 한다는 규칙은 매우 심각한 불편을 초래할 것이고, 당연히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일 것이다.
후자와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진아(眞我)라는 것이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지켜야만 할 나 자신의 아이덴티티 따위는 없는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며, 현재의 내 모습은 현재에만 유효한 것이며, 과거와 미래의 내 모습은 아주 유연하다.
한편으로는 나의 참모습이라는 따위의 생각은 나를 가장 심각하게 구속하고 제약하는 요인일 것이다.
2017년 5월 22일 월요일
"나"를 없애는 방법?
오래 전에 포스팅했던 글에서 "나"라는 것이 인식인지 의식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았던 적이 있다. (http://re-unify.blogspot.kr/2013/02/blog-post.html)
그 동안에도 여러가지 비슷한 생각의 거치다보니, 다분히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비교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본질적인 "나"가 존재하는 것이고, 육체를 넘어서는 "나"는 생을 넘어서까지도 변하지 않기에,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진아(眞我, 아트만)와 윤회 사상을 가르치는 힌두교적인 관점에 가깝다.
반면에 무상무아(無常無我)를 설파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나"라는 것은 한낱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에도 윤회 사상이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테지만, 이건 이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불교의 사상과는 전혀 별개라 생각한다. 자세히 공부하고자 하면 이에 대한 진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의문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여러가지 경우에 대입을 해 보았더니,지금까지는 진아(眞我) 보다는 무아(無我)가 더 타당하지 않은가 싶다.
이렇게 생각이 든다면,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나"를 버릴 것인가?
**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고민하는 과정에 있으며, 그 과정의 사유나 논리들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따라서 어떤 명쾌한 결론을 구하지 말라.
"나"를 버리기 위해서는 "나"라는 의식을 가지게 된 과정을 유추하고, 그 과정을 역으로 밟아가던가, 그 과정에서 세워 둔 하나 하나의 벽돌(?)들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허물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르는 내 삶의 과거로의 회귀, 그것도 모든 나의 의식의 벽돌에 해당하는 과정으로의 회귀가 필요하다.
심지어는 표면의 의식 뿐이 아닌 무의식의 벽돌까지 찾아낼 회귀가 필요하기에 더더욱 불가능에 가까울 수 밖에 없다.
목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첫발은 언제나 단순하다.
가장 최근의 의식의 벽돌 '하나'만이라도 찾아내면 된다.
아마도 오래된 의식의 벽돌은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중간에 빠지는 벽돌이 무수히 많을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이 방법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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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상적이긴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간들이 "나"라는 의식을 만들었던 이유가 타인과 구별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
내가 타인과 구별되지 않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혹은 근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결코 안심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들 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 해서 거리를 두기 위해서 구별을 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라는 유일함이 사라지는 두려움, 혹은 타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면 우리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나"라는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나"를 만들었으며, "나"로부터 벗어난 자야말로 진정 용기있는 존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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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에도 여러가지 비슷한 생각의 거치다보니, 다분히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비교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본질적인 "나"가 존재하는 것이고, 육체를 넘어서는 "나"는 생을 넘어서까지도 변하지 않기에,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진아(眞我, 아트만)와 윤회 사상을 가르치는 힌두교적인 관점에 가깝다.
반면에 무상무아(無常無我)를 설파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나"라는 것은 한낱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에도 윤회 사상이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테지만, 이건 이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불교의 사상과는 전혀 별개라 생각한다. 자세히 공부하고자 하면 이에 대한 진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의문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여러가지 경우에 대입을 해 보았더니,지금까지는 진아(眞我) 보다는 무아(無我)가 더 타당하지 않은가 싶다.
이렇게 생각이 든다면,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나"를 버릴 것인가?
**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고민하는 과정에 있으며, 그 과정의 사유나 논리들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따라서 어떤 명쾌한 결론을 구하지 말라.
"나"를 버리기 위해서는 "나"라는 의식을 가지게 된 과정을 유추하고, 그 과정을 역으로 밟아가던가, 그 과정에서 세워 둔 하나 하나의 벽돌(?)들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허물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르는 내 삶의 과거로의 회귀, 그것도 모든 나의 의식의 벽돌에 해당하는 과정으로의 회귀가 필요하다.
심지어는 표면의 의식 뿐이 아닌 무의식의 벽돌까지 찾아낼 회귀가 필요하기에 더더욱 불가능에 가까울 수 밖에 없다.
목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첫발은 언제나 단순하다.
가장 최근의 의식의 벽돌 '하나'만이라도 찾아내면 된다.
아마도 오래된 의식의 벽돌은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중간에 빠지는 벽돌이 무수히 많을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이 방법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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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상적이긴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간들이 "나"라는 의식을 만들었던 이유가 타인과 구별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
내가 타인과 구별되지 않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혹은 근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결코 안심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들 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 해서 거리를 두기 위해서 구별을 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라는 유일함이 사라지는 두려움, 혹은 타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면 우리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나"라는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나"를 만들었으며, "나"로부터 벗어난 자야말로 진정 용기있는 존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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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7일 수요일
잘 되게 하는 것은 어렵지만, 잘 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쉽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공석이 된 대통령직의 보궐선거가 치루어졌고,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셨다.
사회가 다변화 되고, 국민들의 욕구와 바램도 또한 다양해졌다.
예전에 비해 훨씬 많은 후보들이 선거에 출마를 했지만, 누구 하나 나의 마음과 같은 후보는 없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국민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의 생각과 가장 많이 비슷한 후부에게 투표하거나, 생각이 아주 다른 후보만은 피해서 투표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지난 9년(?)의 두 정권에 대한 느낌과 10년을 뛰어넘어 다시 이어지는 진보(?) 정권에 대한 느낌이 교차했다.
MB와 503(탄핵 후에 구속 수감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수인번호가 503번 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하해서 표현할 때 503호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누군가에게는 아픈 일일 수도 있지만...너무 긴 호칭보다 503호가 간결하고 쓰기에 편한 건 사실이다.)의 정권이 보여준 실적이나 결과물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경제 성장률은 바닥이 어디인지 모르게 내려가고, 출산률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청년층의 실업률은 회복되지 못하고, 빈부의 격차는 최악의 수준이다.
엎친데 덮친걸까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내외의 악재들로 여기 저기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들의 고통이 전체 국민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구제역, 태풍, 메르스, AI, 세월호)
이 모든 것을 지난 MB와 503호 정권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대부분의 재난이나 흐름이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거니와 모범 답안이 없는 문제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정부의 대응이 잘 되었더라면 피해의 규모나 정도는 줄일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아마도 새로운 정부라고 이런 문제들을 능수능란하게 해결할 수는 없으리라고 본다.
단지, 좀 완화만 시킬 수 있어도 잘 하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흔히 조직에서 하는 말로,
"너를 잘되게 하지는 못해도, 잘 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있다."는 말이 있다.
보통은 중간 관리자 정도 되는 사람들이, 악에 받치게 되면 쓰게 되는 말이다.
사실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매우 섬찟한 상황이다.
일이 잘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공을 많이 들여야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며, 또 주변에서의 도움도 있어야 한다.
그나마 주변에서 도움은 주지 못하더라도, 딴지 걸지만 않아도 감사한게 현실이다.
열심히 하려는 사람, 일을 성사시키려는 사람의 옆에서 딴지만 걸어도 그들의 성공을 한참 뒤로 미룰 수 있는 것이다.
어쩐지 MB와 503호는 대한민국이 하는 일에 딴지를 걸었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들 자신은 딴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랬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새로 선출된 문재인 대통령은 모쪼록 대한민국이 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주길 바란다.
하지만 제 아무리 대통령의 권력이 막강하다 해도 일을 성사시키는 것에는 많은 힘이 필요하다.
더욱이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 잘사는 나라, 공정한 나라가 되는 그런 일은 정말 많이 힘든 일이다. 이런 일은 모두가 힘을 모아 일심동체가 되어도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삐끗해서 딴 마음을 가지거나 딴지를 건다면 대한민국은 곤두박질을 치게 될 것이다.
잘되게 하기는 매우 어려우니 모두가 힘을 모아야 겨우 겨우 되겠지만,
극히 소수의 몇몇만 딴 마음을 가지고 작정한다면 잘 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일 테니까.
성공의 길은 좁고, 멸망의 길은 넓은 것이 바로 이같은 이유가 아니겠는가.
사회가 다변화 되고, 국민들의 욕구와 바램도 또한 다양해졌다.
예전에 비해 훨씬 많은 후보들이 선거에 출마를 했지만, 누구 하나 나의 마음과 같은 후보는 없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국민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의 생각과 가장 많이 비슷한 후부에게 투표하거나, 생각이 아주 다른 후보만은 피해서 투표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지난 9년(?)의 두 정권에 대한 느낌과 10년을 뛰어넘어 다시 이어지는 진보(?) 정권에 대한 느낌이 교차했다.
MB와 503(탄핵 후에 구속 수감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수인번호가 503번 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하해서 표현할 때 503호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누군가에게는 아픈 일일 수도 있지만...너무 긴 호칭보다 503호가 간결하고 쓰기에 편한 건 사실이다.)의 정권이 보여준 실적이나 결과물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경제 성장률은 바닥이 어디인지 모르게 내려가고, 출산률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청년층의 실업률은 회복되지 못하고, 빈부의 격차는 최악의 수준이다.
엎친데 덮친걸까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내외의 악재들로 여기 저기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들의 고통이 전체 국민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구제역, 태풍, 메르스, AI, 세월호)
이 모든 것을 지난 MB와 503호 정권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대부분의 재난이나 흐름이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거니와 모범 답안이 없는 문제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정부의 대응이 잘 되었더라면 피해의 규모나 정도는 줄일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아마도 새로운 정부라고 이런 문제들을 능수능란하게 해결할 수는 없으리라고 본다.
단지, 좀 완화만 시킬 수 있어도 잘 하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흔히 조직에서 하는 말로,
"너를 잘되게 하지는 못해도, 잘 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있다."는 말이 있다.
보통은 중간 관리자 정도 되는 사람들이, 악에 받치게 되면 쓰게 되는 말이다.
사실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매우 섬찟한 상황이다.
일이 잘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공을 많이 들여야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며, 또 주변에서의 도움도 있어야 한다.
그나마 주변에서 도움은 주지 못하더라도, 딴지 걸지만 않아도 감사한게 현실이다.
열심히 하려는 사람, 일을 성사시키려는 사람의 옆에서 딴지만 걸어도 그들의 성공을 한참 뒤로 미룰 수 있는 것이다.
어쩐지 MB와 503호는 대한민국이 하는 일에 딴지를 걸었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들 자신은 딴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랬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새로 선출된 문재인 대통령은 모쪼록 대한민국이 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주길 바란다.
하지만 제 아무리 대통령의 권력이 막강하다 해도 일을 성사시키는 것에는 많은 힘이 필요하다.
더욱이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 잘사는 나라, 공정한 나라가 되는 그런 일은 정말 많이 힘든 일이다. 이런 일은 모두가 힘을 모아 일심동체가 되어도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삐끗해서 딴 마음을 가지거나 딴지를 건다면 대한민국은 곤두박질을 치게 될 것이다.
잘되게 하기는 매우 어려우니 모두가 힘을 모아야 겨우 겨우 되겠지만,
극히 소수의 몇몇만 딴 마음을 가지고 작정한다면 잘 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일 테니까.
성공의 길은 좁고, 멸망의 길은 넓은 것이 바로 이같은 이유가 아니겠는가.
2017년 4월 18일 화요일
설명하지 말아라
Do not explain.
이게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몰랐다.
설명하지 말라니...
타인에게 나 혼자 아는 척하며 설명해 주지 말라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 자신에게 설명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대체 왜?
설명하지 말라는 이 말이, 말 조심해야 하는 4가지 금언(禁言) 중 하나였을까?
(나머지는, 불평하지 말아라. 남을 해하는 말을 하지 말아라. 받아들여지지 않는 충고 하지 말아라.)
사람들에겐 크고 작은 고난이 일어나곤 한다.
그게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 된 일인 경우도 있고, 여러 사람과 함께 겪는 어려움인 경우도 있으며, 나에겐 고난이지만 상대방에게 행운인 경우도 있다.
그 고난이 스스로 해결이 가능하다면 별 문제가 될 것이 없겠지만,
해결하기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 한 경우에는, 고난 자체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알면 쉬운데 모르면 어려운 문제들...)
이럴 경우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스트레스를 낮추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주로 그 고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파악하려는 것인데,
원인을 알고 나면, 해결책을 알 수도 있고, 해결 방법은 없다 해도, 다음에 같은 어려움에 빠지지 않을 예방책을 세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은 아니고, 인간의 지혜가 충분하지 못한 까닭에 제대로 된 원인을 알기란 매우 어렵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낮추려는 마음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작동하고...
결국은 자기 자신만이 인정할 만한 원인을 내세우고는 그걸 자기 자신에게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낮추어서 긴장 상태를 완화하거나 종결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게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왜? 원인이 틀렸기 때문에.
스스로 긴장의 끈을 풀러 놓았기에, 다시 원인을 찾을 동력은 절대적으로 감소.
그리고 이 고난을 끝난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하지만 우리는 제대로 된 원인도 찾지 못하며, 일어난 일의 현상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다.
스스로가 해결했다고는 생각하지만 사실은 문제를 회피한 셈이 되는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세월호 사고는 온 국민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고, 유가족들에게는 평생의 한으로 남을 만한 사고였다.
그리고 정부는 어찌된 일인지 세월호 사고에 대한 조사를 꺼리는 듯한 행태를 넘어서, 조사를 방해했다는 정황의 증언들도 이어졌다.
어쩌면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에서 보여준 이해할 수 없는 대응 방식때문에 탄핵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에 유가족은 물론이고 온 국민들이 동시에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낮추기 위해 설명이 필요했다.
왜 사고가 발생한 것인지, 왜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않은 것인지, 왜 대통령은 재빨리 대응하지 못한 것인지, 왜 사고 조사를 방해한 것인지, 왜 유가족들은 시체팔이로 모함한 것인지...
하지만 대통령이 탄핵되고 여러 관료들이 구속 기소되었음에도 여전히 설명은 부족했다.
어쩌면 청와대 굿판, 밀회설, 마약 복용설, 미용 시술설 등등은 세월호 사고에 대한 대통령의 늑장 대응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되었던 각각의 예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와 따지고 보면 참 허무맹랑한 것일 수도 있으나, 청와대가 꽁꽁 숨기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개 국민이 자신의 스트레스를 낮출 수 있는 방법은 이런 음모론을 제기하고 그것에 모든 것을 맞추어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 뿐이었으리라.
만약 진실이라면 빈틈이 없이 완벽하게 모든 것이 설명될 것이다.
하지만 설명하기 위해 내 놓은 대국민 담화문은 거짓이었기에, 충분히 설명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조각들과는 전혀 맞지 않는 모순을 낳았을 뿐이다.
언젠가부터, 고급 시계가 남성의 부와 지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부각하게 되었고, 명품 백이 여성의 가치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걸 차고 들고 있는 사람들은, 저 시계와 저 백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생각하나 보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 그 심리는 모르겠으나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나 자신의 가치를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
아마도 저들 중 대대수는 명품 시계나 명품 백이 없으면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리라, 저들은 자기 자신이 너무 보잘 것 없음을 잘 알기에 물질적인 것들로 자기를 채우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네가 가지고 있는 볼품 없는 옷차림이 아무렇지도 않냐.
여기 저기 긁히고 낡아서 오래된 저 차가 당당하냐.
...사실 그렇지 않았다.
부끄럽다. 너무 오래되어서 여기 저기 녹이 슬고, 찌그러져도 고칠 수 없는 내 차가 부끄럽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어둡고 답답한 옷이 부끄럽고, 아직도 목까지 올라오는 신발이 부끄럽다.
그럼 네가 명품 시계와 명품 백을 가진 이들을 흠잡았던 건, 그들의 공허함을 알았던 것이 아니라, 네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부러움의 다른 표현이 아니었던거냐.
어쩌면... 그래 어쩌면 나는 나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었던건지도 모르겠다.
아주 어릴 적, 우리 집은 가난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매우 우울하고, 어쩌면 매우 찌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살림이 좀 펴게 되었고, 난 예전보다는 많은 걸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난 내가 가진 것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표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난 그 때의 내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때의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바라보는 허영심의 그들, 사치의 그녀들은 어쩌면 내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었을지 모르겠다.
내가 증오하는 나의 모습이 떠오르는 게 싫어서, 내 자신에게 그럴듯한 설명으로 위안을 했을지도...
이게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몰랐다.
설명하지 말라니...
타인에게 나 혼자 아는 척하며 설명해 주지 말라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 자신에게 설명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대체 왜?
설명하지 말라는 이 말이, 말 조심해야 하는 4가지 금언(禁言) 중 하나였을까?
(나머지는, 불평하지 말아라. 남을 해하는 말을 하지 말아라. 받아들여지지 않는 충고 하지 말아라.)
사람들에겐 크고 작은 고난이 일어나곤 한다.
그게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 된 일인 경우도 있고, 여러 사람과 함께 겪는 어려움인 경우도 있으며, 나에겐 고난이지만 상대방에게 행운인 경우도 있다.
그 고난이 스스로 해결이 가능하다면 별 문제가 될 것이 없겠지만,
해결하기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 한 경우에는, 고난 자체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알면 쉬운데 모르면 어려운 문제들...)
이럴 경우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스트레스를 낮추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주로 그 고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파악하려는 것인데,
원인을 알고 나면, 해결책을 알 수도 있고, 해결 방법은 없다 해도, 다음에 같은 어려움에 빠지지 않을 예방책을 세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은 아니고, 인간의 지혜가 충분하지 못한 까닭에 제대로 된 원인을 알기란 매우 어렵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낮추려는 마음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작동하고...
결국은 자기 자신만이 인정할 만한 원인을 내세우고는 그걸 자기 자신에게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낮추어서 긴장 상태를 완화하거나 종결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게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왜? 원인이 틀렸기 때문에.
스스로 긴장의 끈을 풀러 놓았기에, 다시 원인을 찾을 동력은 절대적으로 감소.
그리고 이 고난을 끝난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하지만 우리는 제대로 된 원인도 찾지 못하며, 일어난 일의 현상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다.
스스로가 해결했다고는 생각하지만 사실은 문제를 회피한 셈이 되는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세월호 사고는 온 국민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고, 유가족들에게는 평생의 한으로 남을 만한 사고였다.
그리고 정부는 어찌된 일인지 세월호 사고에 대한 조사를 꺼리는 듯한 행태를 넘어서, 조사를 방해했다는 정황의 증언들도 이어졌다.
어쩌면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에서 보여준 이해할 수 없는 대응 방식때문에 탄핵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에 유가족은 물론이고 온 국민들이 동시에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낮추기 위해 설명이 필요했다.
왜 사고가 발생한 것인지, 왜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않은 것인지, 왜 대통령은 재빨리 대응하지 못한 것인지, 왜 사고 조사를 방해한 것인지, 왜 유가족들은 시체팔이로 모함한 것인지...
하지만 대통령이 탄핵되고 여러 관료들이 구속 기소되었음에도 여전히 설명은 부족했다.
어쩌면 청와대 굿판, 밀회설, 마약 복용설, 미용 시술설 등등은 세월호 사고에 대한 대통령의 늑장 대응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되었던 각각의 예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와 따지고 보면 참 허무맹랑한 것일 수도 있으나, 청와대가 꽁꽁 숨기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개 국민이 자신의 스트레스를 낮출 수 있는 방법은 이런 음모론을 제기하고 그것에 모든 것을 맞추어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 뿐이었으리라.
만약 진실이라면 빈틈이 없이 완벽하게 모든 것이 설명될 것이다.
하지만 설명하기 위해 내 놓은 대국민 담화문은 거짓이었기에, 충분히 설명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조각들과는 전혀 맞지 않는 모순을 낳았을 뿐이다.
언젠가부터, 고급 시계가 남성의 부와 지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부각하게 되었고, 명품 백이 여성의 가치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걸 차고 들고 있는 사람들은, 저 시계와 저 백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생각하나 보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 그 심리는 모르겠으나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나 자신의 가치를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
아마도 저들 중 대대수는 명품 시계나 명품 백이 없으면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리라, 저들은 자기 자신이 너무 보잘 것 없음을 잘 알기에 물질적인 것들로 자기를 채우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네가 가지고 있는 볼품 없는 옷차림이 아무렇지도 않냐.
여기 저기 긁히고 낡아서 오래된 저 차가 당당하냐.
...사실 그렇지 않았다.
부끄럽다. 너무 오래되어서 여기 저기 녹이 슬고, 찌그러져도 고칠 수 없는 내 차가 부끄럽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어둡고 답답한 옷이 부끄럽고, 아직도 목까지 올라오는 신발이 부끄럽다.
그럼 네가 명품 시계와 명품 백을 가진 이들을 흠잡았던 건, 그들의 공허함을 알았던 것이 아니라, 네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부러움의 다른 표현이 아니었던거냐.
어쩌면... 그래 어쩌면 나는 나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었던건지도 모르겠다.
아주 어릴 적, 우리 집은 가난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매우 우울하고, 어쩌면 매우 찌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살림이 좀 펴게 되었고, 난 예전보다는 많은 걸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난 내가 가진 것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표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난 그 때의 내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때의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바라보는 허영심의 그들, 사치의 그녀들은 어쩌면 내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었을지 모르겠다.
내가 증오하는 나의 모습이 떠오르는 게 싫어서, 내 자신에게 그럴듯한 설명으로 위안을 했을지도...
2017년 4월 15일 토요일
성(性) 소수자들에 대한 인식에 대해
최근에는 우리 사회에서도 성소수자들에 대한 논의가 조금씩이지만 널리 퍼지고 있다.
나 또한 기존의 고지식함을 버리지도 못했고,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내 생활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대다수의 의견을 따라가고 있었다.
언젠가 친구들과 동성애에 관한 의견을 나눈 적이 있는데, 친구들의 의견은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니 인정해야 하지 않겠냐 정도였다.
친구들에 비해 더 고지식했던 나는, 그들의 자녀가 동성애자라면 어찌 하겠느냐는, 짖궂은 질문을 했지만, "치료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치료"한다는 의미 자체가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결례이고 부적절한 단어임을 알게 되었다. 이는 마치 "엑스맨"이라는 영화에서 돌연변이 치료에 관한 논쟁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이런 토론(?) 후에, 집중적이지는 않지만 간간이 접하게 되는 관련된 뉴스나 이슈들에 대해 조금은 더 관심을 가져 보았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본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정확한 성(性)의 구별이 어려운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건 정신적,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의학적인 기준으로도 그렇다는 것인데, 성염색체의 이상, 성기의 존재나 발달 상태, 성호르몬의 이상 등으로 남녀의 구분이 모호한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사람들은 매우 드문 경우라는 생각, 성(性)에 대한 사회적 금기 때문에 적극적인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기에(치료가 가능은 한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는지 알기도 어렵다고 한다.
더불어 각 사회는 성(性)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있는데, 이들은 남자 혹은 여자의 둘 중 하나가 되어야만 하기에 반강제로 자신의 성향과는 다른 성역할을 맡아야만 하기도 한다.
일단, 이런 현실에 대해 인식을 하고 받아들이게 되니, 앞서의 동성애에 대한 문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
그 무엇보다 인간을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더 유연하게 성적인 구분도 연속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남성적인, 중석적인, 여성적인 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미래에는 누군가에게 "성(性)적 편향성"을 묻는 것 자체가 "정치적 편향성"을 묻는 것보다 더 결례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에서는 많은 장벽들이 존재하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서양에서는 엄격한 종교의 잣대들이 이중적이거나 모호한 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꺼리게 만드는 요소이며, 동양에서는 전통적인 유교적 남녀의 구별이 이를 가로 막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남성"이 지게되는 "국방의 의무"로 인해서, 이와 같은 까다로운 문제의 논의가 더욱 어려워진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고, 조금 더 용기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조금 더 많은 사건들을 겪고 나면,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겠는가.
P.S.
어째서 조물주는 이런 조화를 부렸을까?
자연의 모든 생명을 암과 수로 나누었으면서, 어째서 인간도 모두 암과 수로 나누지 않았던 것일까?
나 또한 기존의 고지식함을 버리지도 못했고,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내 생활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대다수의 의견을 따라가고 있었다.
언젠가 친구들과 동성애에 관한 의견을 나눈 적이 있는데, 친구들의 의견은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니 인정해야 하지 않겠냐 정도였다.
친구들에 비해 더 고지식했던 나는, 그들의 자녀가 동성애자라면 어찌 하겠느냐는, 짖궂은 질문을 했지만, "치료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치료"한다는 의미 자체가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결례이고 부적절한 단어임을 알게 되었다. 이는 마치 "엑스맨"이라는 영화에서 돌연변이 치료에 관한 논쟁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이런 토론(?) 후에, 집중적이지는 않지만 간간이 접하게 되는 관련된 뉴스나 이슈들에 대해 조금은 더 관심을 가져 보았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본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정확한 성(性)의 구별이 어려운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건 정신적,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의학적인 기준으로도 그렇다는 것인데, 성염색체의 이상, 성기의 존재나 발달 상태, 성호르몬의 이상 등으로 남녀의 구분이 모호한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사람들은 매우 드문 경우라는 생각, 성(性)에 대한 사회적 금기 때문에 적극적인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기에(치료가 가능은 한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는지 알기도 어렵다고 한다.
더불어 각 사회는 성(性)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있는데, 이들은 남자 혹은 여자의 둘 중 하나가 되어야만 하기에 반강제로 자신의 성향과는 다른 성역할을 맡아야만 하기도 한다.
일단, 이런 현실에 대해 인식을 하고 받아들이게 되니, 앞서의 동성애에 대한 문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
그 무엇보다 인간을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더 유연하게 성적인 구분도 연속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남성적인, 중석적인, 여성적인 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미래에는 누군가에게 "성(性)적 편향성"을 묻는 것 자체가 "정치적 편향성"을 묻는 것보다 더 결례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에서는 많은 장벽들이 존재하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서양에서는 엄격한 종교의 잣대들이 이중적이거나 모호한 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꺼리게 만드는 요소이며, 동양에서는 전통적인 유교적 남녀의 구별이 이를 가로 막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남성"이 지게되는 "국방의 의무"로 인해서, 이와 같은 까다로운 문제의 논의가 더욱 어려워진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고, 조금 더 용기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조금 더 많은 사건들을 겪고 나면,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겠는가.
P.S.
어째서 조물주는 이런 조화를 부렸을까?
자연의 모든 생명을 암과 수로 나누었으면서, 어째서 인간도 모두 암과 수로 나누지 않았던 것일까?
2017년 2월 6일 월요일
이상(理想) 예상(豫想) 기대(企待)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는 말
그 '보고 싶은 것'이 이상(理想)과 같은 뜻이 아닐까?
젊은 남녀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 술술 나열 하는 것.
상대방에게 한눈에 반한다는 것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이상형에 부합하는 어떤 면을 상대방에게서 보는 순간에 일어난 일.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이상형을 조각해서, 그 조각이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신께 부탁을 한 인물.
그렇다면 과연 이런 이상형은 대체 언제 어떻게 형성이 되는 것일까?
유아기부터 무의식에 축적된 경험들?
전생의 인연?
좀 더 확대해 보면, 이성에 대한 이상형뿐이 아니라 매우 많은 곳에서 이런 이상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학교, 친구, 직장, 직장의 상사와 동료 부하직원, 배우자의 부모와 가족들...
내가 살 집, 자동차, 가족의 모습, 노후의 모습...
정치적인 이상,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 바람직한 공동체와 경제 구조...
인간의 존재와 신의 존재, 우주와 지구...
과연 이런 이상형은 어떻게 구축이 되는 것일까.
좀 더 확대해 보면, 이성에 대한 이상형뿐이 아니라 매우 많은 곳에서 이런 이상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학교, 친구, 직장, 직장의 상사와 동료 부하직원, 배우자의 부모와 가족들...
내가 살 집, 자동차, 가족의 모습, 노후의 모습...
정치적인 이상,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 바람직한 공동체와 경제 구조...
인간의 존재와 신의 존재, 우주와 지구...
과연 이런 이상형은 어떻게 구축이 되는 것일까.
절망해야 희망이 생긴다.
이문열 <사람의 아들>
"이제 너는 신앙할 수 있다, 절망했으므로. 살 수 있다. 죽었으므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을까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마저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내 기준에는 참 나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좋은 사람들도 많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도 많지만, 많이 다르고, 이해할 수 없고, 껄끄럽고 피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더 많다.
과연 이런 사람들 모두와 함께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한 적이 많았다.
아직도 많이 두렵다.
하지만 내가 많이 절망할 수록 희망이 보일거라는 '희망'이 생기기도 한다.
내가 겪을 수 있는 만큼의 한계까지 절망하고 나면, 비로소 그 자리에서 딛고 일어설 수 있으리라는 희망
간혹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부러워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그 사람은 애초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있는 행운아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고, 나는 두려움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불운아라는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그건 내가 사람을 그만큼 잘 몰랐다는 증거일 것이다.
모르면 두렵운 법.
부딛혀 알아갈 수록 상상이 만들어낸 두려움도 없어질 것이며, 실망할 만큼 알고, 절망할 만큼 알았다면 충분히 알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무지로 인한 상상의 두려움도 없을 것이기에 비로소 당당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너는 신앙할 수 있다, 절망했으므로. 살 수 있다. 죽었으므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을까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마저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내 기준에는 참 나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좋은 사람들도 많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도 많지만, 많이 다르고, 이해할 수 없고, 껄끄럽고 피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더 많다.
과연 이런 사람들 모두와 함께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한 적이 많았다.
아직도 많이 두렵다.
하지만 내가 많이 절망할 수록 희망이 보일거라는 '희망'이 생기기도 한다.
내가 겪을 수 있는 만큼의 한계까지 절망하고 나면, 비로소 그 자리에서 딛고 일어설 수 있으리라는 희망
간혹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부러워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그 사람은 애초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있는 행운아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고, 나는 두려움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불운아라는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그건 내가 사람을 그만큼 잘 몰랐다는 증거일 것이다.
모르면 두렵운 법.
부딛혀 알아갈 수록 상상이 만들어낸 두려움도 없어질 것이며, 실망할 만큼 알고, 절망할 만큼 알았다면 충분히 알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무지로 인한 상상의 두려움도 없을 것이기에 비로소 당당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2017년 1월 24일 화요일
타고난 것에 대한 집착
아직까지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이고, 최순실 등의 국정 농단에 대한 특검의 조사와 재판이 진행 중이다.
처음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던 촛불 집회의 열기가 뜨겁더니, 탄핵안이 통과하면서 촛불 집회는 서서히 열기가 가라앚은 반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태극기 집회가 다시 열기를 뿜어 내고 있는 듯 하다.
반대편은 일명 박사모라고 불리우는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의 모임이 주축이 되어서 대통령 탄핵안 등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 탄핵을 찬성하는 쪽이 더 우세하다 보이기도 하고, 언론에서의 보도도 다분히 대통령의 반대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에게 알려지는 사실들이라는 것이 주로 언론에 크게 의지하는 바,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실들로만 판단해 보면 대통령의 잘못이 많아 보이며, 일반 정치인이라면 유죄 선고가 가능할 것이라 보이지만, 대통령이라는 지위의 특수성으로 이를 모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실이 정말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자신이 믿는 것에 따라 받아 들이는 것과 버리는 것이 달라지니, 어진간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진실을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그 모든 가능성에 대해 인정을 하고 수용한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하는 원칙은 존재하지 않나 싶다.
바로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그들의 의견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들의 말이, 행동이, 생각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런 불확실한 자신의 생각, 말, 행동에 대해 의심할 수도 있으며, 누군가는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우리 보통 인간들의 행태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다른 생각, 말,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존재를 증오하고 파괴하려 하면 안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종북좌파'니 '수구꼴통'이니 하는 인신공격성의 발언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은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때, 도저히 상대방이 제기한 나의 오류를 변론할 수 없을 때 내뱉게 되는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것이다.
이건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너의 존재는 글러 먹었으니, 네가 하는 모든 말과 생각이 다 글러 먹었다"는 독선적인 선언인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논리적인 설명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찌된 일인지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생각의 회로는 작동을 중지해 버리고, <선과 악>이라는 경직된 이분법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모습이다.
이게 진짜 인간들인가 싶을 정도로, 파블로프의 개처럼, 단어 하나에 즉각적인 반응을 하고 있다.
참 많이 고민해 보았다.
왜 그런 것일까?
안그래야겠다고 다짐하고 냉정해지려고 하지만, 나와 반대되는 정치적인 의견을 듣고 있노라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스트레스가 상승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라도 정치와 관련된 방송이나 인터넷 사이트는 조금씩 줄여가고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들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인간이 저지를 수 밖에 없는 모순된 것들에 대해서 나의 사고 회로는 작동을 멈춘다.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소와 돼지는 도살해서 먹어야 하는 모순에 대해서 눈을 가리고 침묵한다.
남자로 태어났기에 남자로써 누리는 권리는 당연하다 여기면서, 그 권리를 위해 여성이 희생해야 하는 것에는 외면한다.
동양인으로 태어났기에, 서구 문화 중심의 사회 문화적 현상에 대해 본능적인 반감 혹은 무비판적인 호감도 존재한다.
한국인으로 태어났기에, 일본은 미워해야 할 국가이고, 공산주의는 무조건 나쁜 것이다.
모씨(某氏) 집안에 태어났기에, 나의 조상님은 훌륭한 분이시고 조상님을 위해 제사를 지내야 하고, 명절마다 성묘와 차례를 지내야 한다.
누구의 아들 혹은 딸로 태어났기에,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며, 효도해야 하며, 평생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야 한다.
나의 선택과는 무관한 것들,
태어나면서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들,
그것이 부드럽고 따뜻한 담요인지 혹은 습하고 차가우며 거친 거적떼기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것에 의지해 살아났으며, 그것이 전부인 세상을 살았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확실한, 그리고 어쩌면 유일한 버팀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들에서 벗어나야 내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판단을 멈추어버린 세계는, 우리를 보호해주는 단단한 껍질의 알이지만,
우리의 세계를 제한하는 장벽이기도 한 것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자신의 알을 깨뜨려야 한다.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들은 참 많은 알껍질 속에 살고 있는 듯 하다.
유교라는 관습의 알
반공이라는 이념의 알
적어도 이 두개의 알을 깨기 전에는 대한민국의 발전은 요원해 보인다.
처음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던 촛불 집회의 열기가 뜨겁더니, 탄핵안이 통과하면서 촛불 집회는 서서히 열기가 가라앚은 반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태극기 집회가 다시 열기를 뿜어 내고 있는 듯 하다.
반대편은 일명 박사모라고 불리우는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의 모임이 주축이 되어서 대통령 탄핵안 등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 탄핵을 찬성하는 쪽이 더 우세하다 보이기도 하고, 언론에서의 보도도 다분히 대통령의 반대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에게 알려지는 사실들이라는 것이 주로 언론에 크게 의지하는 바,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실들로만 판단해 보면 대통령의 잘못이 많아 보이며, 일반 정치인이라면 유죄 선고가 가능할 것이라 보이지만, 대통령이라는 지위의 특수성으로 이를 모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실이 정말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자신이 믿는 것에 따라 받아 들이는 것과 버리는 것이 달라지니, 어진간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진실을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그 모든 가능성에 대해 인정을 하고 수용한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하는 원칙은 존재하지 않나 싶다.
바로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그들의 의견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들의 말이, 행동이, 생각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런 불확실한 자신의 생각, 말, 행동에 대해 의심할 수도 있으며, 누군가는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우리 보통 인간들의 행태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다른 생각, 말,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존재를 증오하고 파괴하려 하면 안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종북좌파'니 '수구꼴통'이니 하는 인신공격성의 발언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은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때, 도저히 상대방이 제기한 나의 오류를 변론할 수 없을 때 내뱉게 되는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것이다.
이건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너의 존재는 글러 먹었으니, 네가 하는 모든 말과 생각이 다 글러 먹었다"는 독선적인 선언인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논리적인 설명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찌된 일인지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생각의 회로는 작동을 중지해 버리고, <선과 악>이라는 경직된 이분법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모습이다.
이게 진짜 인간들인가 싶을 정도로, 파블로프의 개처럼, 단어 하나에 즉각적인 반응을 하고 있다.
참 많이 고민해 보았다.
왜 그런 것일까?
안그래야겠다고 다짐하고 냉정해지려고 하지만, 나와 반대되는 정치적인 의견을 듣고 있노라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스트레스가 상승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라도 정치와 관련된 방송이나 인터넷 사이트는 조금씩 줄여가고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들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인간이 저지를 수 밖에 없는 모순된 것들에 대해서 나의 사고 회로는 작동을 멈춘다.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소와 돼지는 도살해서 먹어야 하는 모순에 대해서 눈을 가리고 침묵한다.
남자로 태어났기에 남자로써 누리는 권리는 당연하다 여기면서, 그 권리를 위해 여성이 희생해야 하는 것에는 외면한다.
동양인으로 태어났기에, 서구 문화 중심의 사회 문화적 현상에 대해 본능적인 반감 혹은 무비판적인 호감도 존재한다.
한국인으로 태어났기에, 일본은 미워해야 할 국가이고, 공산주의는 무조건 나쁜 것이다.
모씨(某氏) 집안에 태어났기에, 나의 조상님은 훌륭한 분이시고 조상님을 위해 제사를 지내야 하고, 명절마다 성묘와 차례를 지내야 한다.
누구의 아들 혹은 딸로 태어났기에,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며, 효도해야 하며, 평생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야 한다.
나의 선택과는 무관한 것들,
태어나면서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들,
그것이 부드럽고 따뜻한 담요인지 혹은 습하고 차가우며 거친 거적떼기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것에 의지해 살아났으며, 그것이 전부인 세상을 살았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확실한, 그리고 어쩌면 유일한 버팀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들에서 벗어나야 내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판단을 멈추어버린 세계는, 우리를 보호해주는 단단한 껍질의 알이지만,
우리의 세계를 제한하는 장벽이기도 한 것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자신의 알을 깨뜨려야 한다.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들은 참 많은 알껍질 속에 살고 있는 듯 하다.
유교라는 관습의 알
반공이라는 이념의 알
적어도 이 두개의 알을 깨기 전에는 대한민국의 발전은 요원해 보인다.
2017년 1월 18일 수요일
야만과 문명의 사이 - 인간에 대한 이해의 기준
아직까지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은 진행 중이다.
그리고 최순실, 정유라,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특별검사의 수사도 진행 중이다.
특별검사 이전에 진행되었던 검찰의 수사 결과로 기소된 사건들은 현재 재판 중이다.
지난 두달여 시간 동안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많은 국민, 시민, 이웃들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나 개인에게 있어서도 그러했다.
나 자신의 내적인 변화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변화와도 잇닿아 있을지 모르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개개인의 내적 변화들이 어떤 공통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졌을 때, 그 사회가 변화해가지 않나 싶다.
그러면 나의 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처음엔 많은 놀라움, 분노, 증오와 같은 것 들이었다.
새로이 알려진 것들에 대한 놀라움이고, 그들의 편향적이고 치졸하며 사리사욕에 눈 먼것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생겼다.
다음엔 자기 반성이었다.
결국은 우리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반성, 그것을 미리 알아채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었다는 반성.
그리고는 두려움.
이렇게까지 왔는데, 그 무거운 죄를 지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이 이번에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가끔의 의심.
법정에선 피의자들, 헌번재판소에 출석한 증인들의 반박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자, 어쩌면 저들은 정말 죄가 없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번에도 언론에 속아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또 다시 허무함.
과연 나라는 하나의 개인이 알 수 있는 진실의 깊이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우리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며, 아는 만큼에 따라 진실과 거젓이 바뀌며, 선악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과연 우리가 진실을 논하는 것, 선악을 판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허무함.
그리고 다시 의문점들
어째서 자연계와는 대치되는 <정의> <평등>과 같은 가치를 인간이 추구하는 것인지, 그게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그것이 자연계의 흐름이라면,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들이 애초에 "가치"로써 추구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힘들여 추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자연스럽지 못한 가치를 힘 들여가며 추구하는 인간.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기에 그 가치는 자꾸 스러져가고,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각성하고 힘쓰고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리라.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주 원초적인 시원으로부터 출발하면 명확하게 보이는 듯 하다.
태초에 별 경쟁력이 없던 하나의 종족으로써의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수를 늘려야 했던 것이고, 보다 많은 수의 개체들이 어울려서 살아나가며 그 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규율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평등>과 <정의>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되었을 것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생존에 필연적인 가치마저도, 자연스러운 본능적 욕구에 의해서 자꾸만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스스로를 가장 영리한 종족이라 칭하는 인간들이, 스스로를 지켜줄 가치를 허물어 버리는 우매한 짓을 반복하는 것이다.
과연 이게 가장 영리한 종족이 하는 짓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다양한 종교와 믿음을 통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영혼, 자아를 얘기하고 윤회와 해탈을 말하며, 진화와 각성을 믿는다.
스스로가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소명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자기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맞닥들인 이 사건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난 바, 인간은 아직도 야만의 때를 벗어나지 못한 원숭이에 가까운 존재일 때름이다.
지금까지 이룬 문명의 업적을 증거로 내민다 한들, 딱 그만큼만 야만에서 벗어난 정도일 뿐이다.
인간이 과연 야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에 대한 근거 없는 자존감은 자기 자신의 발판을 딛지 못함과 같기에, 자신에 대한 인식의 불가함과 발전의 불가함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최순실, 정유라,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특별검사의 수사도 진행 중이다.
특별검사 이전에 진행되었던 검찰의 수사 결과로 기소된 사건들은 현재 재판 중이다.
지난 두달여 시간 동안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많은 국민, 시민, 이웃들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나 개인에게 있어서도 그러했다.
나 자신의 내적인 변화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변화와도 잇닿아 있을지 모르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개개인의 내적 변화들이 어떤 공통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졌을 때, 그 사회가 변화해가지 않나 싶다.
그러면 나의 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처음엔 많은 놀라움, 분노, 증오와 같은 것 들이었다.
새로이 알려진 것들에 대한 놀라움이고, 그들의 편향적이고 치졸하며 사리사욕에 눈 먼것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생겼다.
다음엔 자기 반성이었다.
결국은 우리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반성, 그것을 미리 알아채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었다는 반성.
그리고는 두려움.
이렇게까지 왔는데, 그 무거운 죄를 지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이 이번에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가끔의 의심.
법정에선 피의자들, 헌번재판소에 출석한 증인들의 반박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자, 어쩌면 저들은 정말 죄가 없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번에도 언론에 속아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또 다시 허무함.
과연 나라는 하나의 개인이 알 수 있는 진실의 깊이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우리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며, 아는 만큼에 따라 진실과 거젓이 바뀌며, 선악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과연 우리가 진실을 논하는 것, 선악을 판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허무함.
그리고 다시 의문점들
어째서 자연계와는 대치되는 <정의> <평등>과 같은 가치를 인간이 추구하는 것인지, 그게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그것이 자연계의 흐름이라면,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들이 애초에 "가치"로써 추구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힘들여 추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자연스럽지 못한 가치를 힘 들여가며 추구하는 인간.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기에 그 가치는 자꾸 스러져가고,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각성하고 힘쓰고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리라.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주 원초적인 시원으로부터 출발하면 명확하게 보이는 듯 하다.
태초에 별 경쟁력이 없던 하나의 종족으로써의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수를 늘려야 했던 것이고, 보다 많은 수의 개체들이 어울려서 살아나가며 그 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규율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평등>과 <정의>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되었을 것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생존에 필연적인 가치마저도, 자연스러운 본능적 욕구에 의해서 자꾸만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스스로를 가장 영리한 종족이라 칭하는 인간들이, 스스로를 지켜줄 가치를 허물어 버리는 우매한 짓을 반복하는 것이다.
과연 이게 가장 영리한 종족이 하는 짓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다양한 종교와 믿음을 통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영혼, 자아를 얘기하고 윤회와 해탈을 말하며, 진화와 각성을 믿는다.
스스로가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소명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자기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맞닥들인 이 사건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난 바, 인간은 아직도 야만의 때를 벗어나지 못한 원숭이에 가까운 존재일 때름이다.
지금까지 이룬 문명의 업적을 증거로 내민다 한들, 딱 그만큼만 야만에서 벗어난 정도일 뿐이다.
인간이 과연 야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에 대한 근거 없는 자존감은 자기 자신의 발판을 딛지 못함과 같기에, 자신에 대한 인식의 불가함과 발전의 불가함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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