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0일 일요일

우리는 과연 바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앞선 포스팅이 뭔가 더 거창하고, 스케일이 크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쓴 글이라 뜬금 없는 얘기이거나 별 고민이 되지 않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시대를 거슬러 갔다가 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살지 않았던 시대를 상상해야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단지 좀 오래(?) 살다보니, 한 삶의 생애 동안에도 대중의 가치관 혹은 규범이 꽤나 극적으로 변화하는 걸 겪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고민을 해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서도 일상의 습관적인 행동양식과 대중적인 규범이 충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젊은 여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과 이에 대한 사회적 규범의 충돌
- 개의 식용에 대한 관습관 대중적 여론의 충돌
- 경제적인 효율성 측면의 원자력과 환경에 대한 우려의 충돌

이와 같은 문제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하게 되는 대중적인 딜레마일 것이다.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바른 길"을 외면하는 당위성을 주장하곤 한다.

나는 이 포스팅에서 "바른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겠다.
그것이 정말 바른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결정할 몫이다.
그리고 그 "바른 길"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도 않겠다.
그건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주장은 또 하나의 소수 의견일 수 있다.

단지, "바른 길"에 동의하지만 그 길을 갈 수 없는 우리의 현실적인 딜레마를 보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확장해 보면, 과연 어디까지 선악의 구분이 가능한지도 가늠할 수 있으며, 과거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타인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이 법의 판단에 대한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법의 효용성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단지 법이 선악의 판단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제공하거나, 선악에 대한 선언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 것 뿐이다.)


잠깐만 낮 뜨거운 우리의 모순을 보자.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노출 된다.
이 과정에는 각자의 욕망이 톱니바퀴처럼 맞아 떨어지는 욕망의 굴레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인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꿈꾸는 젊은 여성은, 미디어 담당자의 과도한 요구에도 순순히 응한다.
미디어의 담당자들은 많은 대중의 관심과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젊은 여성의 성적인 매력을 한껏 부각시켜 노골적으로 시청자들에게 보여준다.
성에 목마른 남자들은 사회적 규범이나 윤리적인 문제들을 외면하고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노골적인 방송에 환호한다.

비슷한 사례는 남자와 여자를 바꾸어서도 존재하지 않나 싶다.

이 경우의 "바른 길"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나타나는 문제일까?
"바른 길"이 바른 길이 아니었던 것일까?
우리 사회가 여전히 성에 대해 폐쇄적이어서, 개인의 성적인 욕구에 대한 사회적인 규범을 만들지 못했던 탓일까?

만약 언젠가의 미래에, 현재의 이와 같은 사회적인 모습을 "미개"하거나 "야만"스럽게 생각하는 때가 온다면, 우리 대다수는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걸까?

아마도 그 때가 되면, 지금의 대다수였던 사람들은 여러가지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의 사람들은 다시 되물을 것이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도 그것이 옳지 않았던 것 아니냐'고
'옳지 않음을 알고도 묵인하거나 오히려 반대쪽으로 동조하지 않았냐'고


어쩌면 우리가 과거의 시대에 있었던 과오에 대한 질문이 있다면,
이와 같은 프레임으로도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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