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8일 토요일

화(火)의 전염

어느 일요일.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식구들이 모여서 가족 식사를 하기로 했다.
본가에 미리 도착해서 주차장에 주차를 하려 했는데, 골목 안쪽의 집에 누군가 이사를 하는건지 이삿짐 트럭이 주차장을 막고 한참 작업 중이었다.
차를 잠시 빼달라고 부탁하려고 보았는데, 한참 작업 중인 것이 보여서 번거롭겠다 싶었다.
아버지께서 이 상황을 보시고 차를 조금만 빼달라고 말씀하시려는 것을 내가 그만 두시라고 말렸다.
식사하러 가는 곳이 멀지 않지만, 그곳에도 주차장이 있으니 식사하고 와보면 상황이 달라져 있으리란 임시 대책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동하고 식사를 하고 다시 돌아왔는데, 상황은 더 악화되어 있었다.
큰길에서 집 앞의 주차장까지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이삿짐 차량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고 1차선인 큰길을 막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인도를 가로막고라도 우선 큰길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바로 골목안으로 들어가서 이삿짐 차량과 이사하는 집 주인인듯한 사람에게 부탁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떤 노인이 한손에는 화장지 한더미를 들고 지나가면서 내 차가 인도를 가로질러 막고 있는 것에 매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차를 이렇게 대면 어쩌자는거여'. 혼자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쳐다보며 자신이 화난 것을 알아달라는 듯이...그걸 참지 못하고 나도 변명을 했다. '여기 차들이 가로 막고 있어서 그래요' 공손하지는 않았더랬다. 그러자 그 노인은 가던 방향에서 멈추어 나를 돌아보고 더 큰 소리로 윽박을 질렀다. '그럼 이리로 더 들어와서 세우던가!' 완전 짜증이 났다. '지금 막 왔어요'. 그리고 노인은 씩씩거리며 가던 길로 갔지만, 그 노인이나 나나 화를 가라 앉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곧 골목으로 들어가서 이사하는 집의 집주인인 듯한 사람이 보이길래 화가 난 상태로 말을 했다. '이 차들 좀 어떻게 해주세요!' 집주인은 그냥 멀뚱멀뚱 쳐다 볼 뿐이었다.

결국은 큰길과 인도 사이의 턱에 개구리 주차를 해서 임시변통을 했다.
본가에서 몇시간을 더 머물렀는데, 아버지께서 밖의 상황을 보시고는 차가 다 빠졌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나는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물론 나가서 다시 주차장에 주차해도 또 금방 차를 빼서 나가야 하니 그럴 필요가 없던 것이었지만 그걸 아버지께 설명하면서 그 상황이 떠 오르는 것도 짜증났고, 내 짜증을 알아차리셨는지 계속 이사 차량에 신경을 쓰시는 아버지의 행동도 짜증이 났던 것이다.

나중에 차를 빼서 운전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해보니, 참으로 부끄러운 짓을 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받은 화(노인으로 부터 받은)를 누군가에게(아버지와 이사하는 집 주인)에게 전가했던 것이 참으로 후회스러웠다.

먼저, 나에게 화를 낸 노인의 행동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노인이야 전후 사정을 몰랐던 것이고, 차가 인도를 완전히 막고 있어서 불편하게 돌아가야 한다면 화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내가 공손하지 못하니 더 화가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하는 집의 주인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하무인격이었다. 이사라는 큰 일을 치르고 있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 어떤 불편을 주어도 되는 면죄부는 아닌 것이다.

아마도 내가 화를 낸 원인은, 타인으로부터 질책을 받는 것에 대해 꽤 두려움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누구든 실수도 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미움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인데, 나는 그런 것에 매우 민간하게 반응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자기 반성은 별도의 문제이고, 이 문제보다 더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건 화의 전염이었다. 그리고 그 화의 전염의 진짜 모습은 책임의 전가이며, 자기 변명이었던 것이다.

나는 노인으로부터 질타를 받자마자 그것이 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사하는 집의 주인에게 화를 내었던 것이다.
이런 즉각적인 행동은 내가 가해자였던 사건을 순식간에 내가 피해자인 사건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런 즉각적인 반응은 물론 가해자와 피해자 같은 계산을 하기도 전에 거의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듯 하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심판관(?)을 헷갈리게 만든다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주 나쁜 습관(?)과도 같다.


가만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곳곳에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던 것 같다.
누군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가장 그럴듯한 희생자를 찾아내고, 자신의 책임거리와 희생자의 연관 관계를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은 단지 연결고리였다고 빠져 나가는 것.

어쩌면 이런 식의 무책임한 행동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은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사회를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인간이라는 개채들이 스스로의 판단력을 지니고 있는 이상, 어떤 일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한 마디씩은 각 개체에게 종속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단지 그 마디 마디들의 연관 관계도 고려해야 하기에 전체적인 원인과 결과 가운데 각 마디는 일정 부분만을 담당하고 있음도 고려해야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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