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 변두리에서 시내로 향하는 차량 안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어찌하다보니 맨 끝의 차량이었고, 빈자리는 없었고, 대략 20~30명의 사람들은 서 있었다.
조금 먼 거리라 준비해 온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었으며, 출입문과 좌석의 끝이 만나는 모서리에 몸을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어느 역에선가 정차하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와중에 눈을 들어 보니 저만치 통로 중간에 젊은 여성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약간 쌀쌀해지긴 했지만 조금은 더워 보이는 흰색 터틀넥의 상의에 검정색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모르긴해도 데이트나 설레이는 약속이 있어보이는 차림새였다. 약간 덥다는 듯이 터틀넥의 목을 당겨서 공기가 드나들게 하던 그녀는 마침 내 맞은편의 모서리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나는 책을 읽었고 열차는 출발했다.
잠시 후에 나를 향하고 모서리에 기대어 있던 그녀가 방향을 슬쩍 바꾸어 출입문쪽으로 몸을 돌리는 듯 하더니 스르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듯 했다. 그리곤 바로 무언가가 내 정강에 쪽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책을 덮고 보니 그녀가 눕듯이 쓰러져서 내 정강이 부근에 어깨와 머리를 두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으니 정신을 잃은 듯 했다. 급히 자리를 비키면서 그녀의 머리를 손을 받쳤다. 그리곤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당황하는 사이에 주위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급한대로 똑바로 눕히기 위해 그녀의 상반신을 통로쪽으로 약간 끌어내서 바닥에 반듯이 눕혔다.
다행히 열차에는 다른 여성분들도 많아서 내가 무리하게 손을 대지는 않아도 되었다. 여성을 부축해서 바로 옆의 좌석에 앉힐 때 즈음에는 다행히도 정신은 돌아온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어디에 전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 연락을 받은 열차 기관사는 다음 정차역에서 한동안 정차한 상태였고, 기관사였을지 역무원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직원분이 와서 다음역에 119 앰뷸런스를 호출해서 대기시키겠다고 설명을 하셨다. 좌석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의 옆에서 돌보시던 아주머니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전해 듣고는 "이제 괜찮대요. 119를 부르지 않으셔도 된대요"라고 직원분에게 전달을 했다.
정말 괜찮은걸까?
좌석에 앉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힘없이 무릎위 가방에 올려 놓은 손이 유난히가 하얗게 보였다. 어느덧 몇개 역이 지나고 그녀 옆에 있던 아주머니도 그녀를 두고 내렸으며, 나도 내릴 때가 되었다.
차량 안에는 그녀의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계속 줄어들었고, 이 상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많이 붐비게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열차에서 내리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좀 어떤 걸까, 누군가에게 연락 좀 하라고 말해 줘야 하는게 아닐까, 지금 가는 방향은 집일까 약속장소일까, 내가 말을 거는 것도 이상한걸까...
그리고 약속으로 만난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해 주기도 했고, 다음 날에 또 만난 사람들에게도 얘기를 해 주었지만, 정작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던 건 아주 다른 무엇이었고, 나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 얘기해 주지도 못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이 상황은 계속 내 머리속에 남아 있었다.
왜 그게 머리속에 계속 남아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 상황은 사진처럼 머리에 박혀 있고, 그 당시의, 특히 그녀가 힘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에서 내가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의 마음은 뭐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슴속에 둥그런 쇠공 같은 것이 박힌 듯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대체 이게 무엇인걸까 고민을 하면서, 연상되어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등교하던 버스 안에서 우연히 목격했던 치한. 그 치한은 우산의 손잡이를 아래로 내리고 손잡이의 둥근 고리를 이용해서 여학생의 치마를 올리던 장면. 그 불의와 관음의 복합심리.
중학교시절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보게된 청불영화의 장면. 세명의 남자 친구 가운데 날라리같은 학생이 주인공의 짝사랑의 순결을 빼앗는 장면의 기억과 그 우울감.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같은 동네의 삼형제가 아버지거라며 보여준 음란서적의 믿을 수 없는 사진을 본 기억.
어린 시절에 비가 내리면, 비를 맞으며 물이 고인 웅덩이에 신발 신은 채로 첨벙거리던 느낌.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와 옷을 다 벗고 아랫목에 이불 속에 들어가 있던 느낌.
재수하던 시절, 우연히 보게 된 여학생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은 못 걸지만 항상 그녀를 보기 위해 기다리던 지하철 역사의 기억.
이상한 기억, 충격적인 기억, 처음 느껴본 느낌...
그러고 보니 대부분 성(性)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이었군.
나는 아무래도 성(性)적인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한 사람인거였군.
그래서 그것들이 나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을 기억들로 각인되는 것이었나보군.
그러면 그 지하철의 여성에 대해서도 성적인 무언가를 느꼈다는 말인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단순히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녀를 도와주어야 하는가 그러지 않아도 되는가라는 문제였다면, 상황을 조금 바꾸어서 그게 남자였다면, 뇌리에 깊이 남지 않았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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