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7일 화요일

혼자 있기를 즐기는 사람

병적인 히키코모리나 은둔형 외톨이를 비롯해 단순히 성격상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하는 이들의 공통적인 진짜 이유는,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흔히들 말하길, 사람을 피하는 이유로,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나 타인의 시선에 대한 스트레스를 들고는 한다. 더구나 이런 이유가 전문가라는 사람이나 대인 기피증상을 가진 사람들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다보니 반론의 여지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상기의 이유는 다소 피상적이거나 표면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한다.
타인에 대한 두려움의 경우에는 심리적 트라우마가 존재할 수 있으니 예외라고 하더라도, 나머지 경우에는 그 기저에 자신의 존재감을 지키고자 하는 생존본능과 유사한 방어기제가 있지 않나 싶다.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 있으면, 타인들 만큼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떨어지는 것을 실감하게되고, 이는 육체적인 생존본능과 유사한 위기감을 유발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사람들이 많아 모인 곳에서는 자신의 존재가 위험해진다는 학습을 하게 되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리게 되는 것 같다.

2015년 1월 25일 일요일

꿈속의 생각, 평상시의 생각

잠은 참말로 신비한 현상이 아닌가 싶다.

과연 무엇때문에 잠이란게 생명에게 필요한지, 그리고 잠을 자는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아직도 많은 것이 수수께끼이고 많은 가설들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잠을 자는 동안의, 혹은 잠에서 깨는 순간에 대한 기억에 남는 묘사는 <긍정의 뇌>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뇌는 쉬지 않고 끊임 없이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그 가운데 깨고 난 후에도 기억에 남는 것을 꿈이라 부를 뿐이지만, 꿈이라고도 불리지 못하는 수많은 생각들이 계속 되고 있지 않나 싶다.


평상시에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생각을 한다고 알고 있다.

과연 그럴까?

공부를 하고 문제를 풀고 판단을 하기 위해 집중을 하고 있을 때에는 확실히 의도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가만히 있을 때에도 끊임없이 생각이 떠오른다.

이럴 경우에는 보거나 듣거나 냄새를 맡고 혹은 여러가지 느낌으로 자극을 받아서 생각의 방향이 좌우되기는 한다고 본다.

하지만 생각의 방향만 바꿀 뿐, 생각을 하겠다는 의지로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이걸 시험해 보려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 곳에서 춥거나 덥거나 불편함 등을 최소화한 곳에서 깨어 있어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명상에서 추구하는 바이다.

즉, 생각의 끊김인데.....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이고, 즉, 생각이 의지대로 조절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럼 이제 다시 잠의 세상으로 들어가 보자.

마치 아무런 의도가 없는 평상시와 똑같이 뇌는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있다.

평상시와 다른 점이라면 외부의 자극이 최소화 된다는 것... 즉 생각의 방향을 조절하는 요인은 최소화 된다는 것이다.

외부의 자극이  최소화 되었기에 생각의 주제나 소재가 대폭 줄었기에 아주 얌전하고 고요한 생각만 일어날 듯 보이지만, 간혹 꿈으로 표출되는 일면들만 보아도 정 반대가 아닌가 싶은 파격적인 면들이 보인다.

생각만의 세상은 외부세계의 자극이 최소화한 만큼, 외부세계의 제한도 최소화되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날뛰고 있는 건 아닐런지...


그렇다면, 우리의 뇌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나의 부분이 아니라, 잠에서 깨어난 후에는 그나마 어르고 달래서 얌전해지지만, 잠에 들면 괴퍅하고 이해가 불가한 양면의 괴물이 아닌가 싶다.

2015년 1월 7일 수요일

화성남 금성녀

오래전에 읽었던 책인데,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 책 이후로 종종 개그 소재로 사용되는 같은 말의 다른 뜻에 대한 유머들이 넘쳐나기도 한다.

암튼 참 많이 다른 것 같은 남자와 여자니까...


젊은 시절에 우연히 접한 <곰스크로 가는 기차>(Die reise nach Gomsk)라는 짤막한 독일 소설의 번역본을 인터넷에서 접한 적이 있다.

어떤 개인이 번역해서 인터넷에 올렸던 것인데, 나중에는 TV에서 극화하기도 했다.


젊은 신혼 부부가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싫고 여행을 한다.

남자의 어려서부터 꿈이었던 곳 곰스크.

얼마 안되는 재산을 모두 털어서 그곳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

남자가 좋아서 결혼을 한 여자.

남자의 소원이라기에 주저 없이 함께 떠나기는 했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곳이라니 불안하고 거리낌이 생긴다.


긴 여행 중에 잠시 기차는 멈추어 서고, 휴식을 취한다.

아내는 답답한 기차에서 나와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어한다.

부부는 기차를 내려 작은 까페에서 차를 마신다.

이 작은 마을이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아내, 언제나 기차가 출발할까 조바심이 난 남편....

결국 운명의 장난처럼 기차를 놓치고 마을에 머물게 된 부부는 그곳에서 잠시만 잠시만 하다 결국 눌러 살게 된다.


세월이 훌쩍 지나 노인이 된 부부, 이 생활에 만족하는 아내와 달리 남편은 아직도 자신의 서재에서 가끔식 기차표 하나를 꺼내보며 한숨을 짓는다.

가지 못한 곳, 곰스크로 가는 기차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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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나가 공감할 만한 마음속의 깊은 열망에 대해 비유적으로 묘사한 책이라, 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며 <곰스크 = 이상향> 정도의 대입을 하곤 한다.

꿈과 좌절,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꿈...


얼핏 이 소설을 보면서 여자는 인생의 동반자 이지만 동시에 현실적 한계를 드러내는 존재로 묘사된다.

주인공이 남자이기에 그렇기도 했지만, 여자는 걸림돌이나 장애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여자 또한 비유이기에 이것이 여자의 속성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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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금 이 소설을 또 올려 보면, 남자와 여자의 속성이 그럴듯하게 녹아들어 있으며, 그것이 상대적으로 다른 속성을 보여 줄 뿐이지 어느 쪽이 좋고 어느 쪽이 나쁘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남자는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꿈을 쫓아 곰스크로 가려하지만, 그곳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곰스크가 작은 마을보다 더 좋으리라는 보장은 있겠는가? 결국 남자는 곰스크라는 각인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목적지를 향해 무조건 달려가는 것 아닌가?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확실한 현재를 선택한 여자의 선택이 오히려 더 안전하고 좋은 선택이었으며, 현실적인 불편함이 없이 살 수 있게 된 이상, 그 마을을 곰스크로 생각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던 것 아닐까?

쓸데 없는 고집과 아집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버리고 감각적인 판단을 따르는 남성적인 속성들, 큰 미래의 행복 보다는 작은 현재의 행복에 만족하는 여자의 속성.
이러한 모습은 어느 정도 남녀의 속성과 부합하는 면이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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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자의 속성은 목표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추진하는 것이 아닐까?
때문에 회사라는 조직, 군대라는 조직, 스프츠 경기 등은 모두 크고 작은 목표가 있고,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쏟는 것이 원칙처럼 내재되어 있다.
종종 이러한 목표 지향적인 분위기는, 수단이 부적절하다 해도 인정될 수 있으며, 목표가 최고의 선(善)이기 때문에, 이보다 낮다고 평가되는 개인의 사생활, 개인의 행복, 개인의 개성과 같은 것들이 무시되어도 된다고 판단하게 된다.

반대로 여자는 목표에 대한 달성의 욕구가 상대적으로 약해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개인의 행복이나 사생활이 침해되면 이것을 현실적(이성적)으로 고려해보게 된다. 조직에서 퇴출이 되더라도 자신의 행복을 지키는 게 좋을지, 이 정도의 행복은 양보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게 나은지....

남자들이 대의, 명분, 의리에 대해 떠들지만, 여자들에겐 자신의 행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러한 단어들은 그냥 스레기에 불과하다.
한편, 남자들이 비록 의리, 대의 같은 것에 목숨을 걸고 모든 걸 바쳐서 희생을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가 모두에 공평하게 돌아가지도 않는다. 결국 대다수는 빠르거나 늦거나 팽(烹)을 당하게 되며 이는 자신이 부르짖던 의리와는 전혀 다른 배신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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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남 금성녀에서 이러한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 대해서 나온 것으로 기억되지는 않지만, 남자의 목표 지향적인 속성과 여자의 상태 지향적인 속성은 많은 것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의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나온 남편과 아내의 모습도 이런 속성을 보여준다.

현재의 사회적인 현상들에서도 이런 속성때문에 남녀의 차이가 자주 도마에 오르곤 한다.
(여자들이 조직에서 자기 희생하는 모습이 적다고 주장하는 남성들의 불만....)

또한 노년의 남녀 가운데 남자들이 더욱 방황을 하거나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 것도, 어떤 목표를 세울 수 없기에 그런 것이 아닌 듯 하다.
특정한 목표가 없이 일상적인 날들을 지내다 보면, 자신의 목표가 죽음 뿐이라는 사실때문에 견디기 힘들게 되는 것은 아닐지....
여자들은 일상적인 생활들에 익숙하며, 그것이 행복하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죽는 날까지 행복하기만을....

층간 소음

층간 소음으로 인한 고통이 점점 내 생활을 비집고 들어온다.

과연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옳은 방법일까?


층간 소음을 겪고 얼마간은 그냥 참았다.

주위의 경우를 듣고 보니, 대다수가 끝이 좋지 않아서 내가 떠나든가 저쪽이 떠나든가 하는 극단적인 경우가 많아보였기 때문이다.


우연하게도 적절한 기회가 찾아왔다.

위층에서 물이 새서 내 집의 욕실 천장이 젖어버린 것.

수리를 하느라 몇번 얘기를 하게 되었고, 수리가 끝날 무렵에 조심스럽게 얘기를 했다.

간혹 이러 저러한 거슬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상대방은 그럴리가 없을텐데 하면서 그래도 조심하겠다고 했다.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소리가 더 커진 듯한 느낌? 복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참고 참던 어느 토요일 오후, 소리가 계속 나길래, 결국은 윗층에 올라가서 자꾸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하소연을 했다.

들어오란다. 거절했지만 들어 오란다.

그리고 혼자 살고 있고, 거실에 의자에도 소리 안나게 천으로 덧대어 놨다며, 무슨 소리가 나느냐고 하는 것이다.

둔탁하지만 묵직하게 부딪히는 듯한 소리고 그래서 울리는 소리라 설명하고 보니, 베란다에 벽돌로 괴어 놓은 화분들이 보인다. 마침 거길 청소하고 계셨었는지 청소도구와 물기가 보였다. 그래서 저런 것들이 바닥에 부딪히는 듯한 소리라고 설명을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해명은 못하더니 결국은 이 정도로 걸을 수는 있지 않냐면서 보통의 발걸음으로 걷는 시늉을 해 보인다.

그 때 느꼈다. 아니 그 때에는 더 이상 얘기를 해 봐야 안되겠다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내가 너무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반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내려오면서 스스로 다짐했다.

다시는 소음 때문에 윗층의 초인종을 누르지 않겠다고.

애초에 올라갈 때에는 내가 피해자였지만, 얘기를 하는 중에 오히려 윗층이 피해자가 되는 묘한 상황에 되었다.


소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고, 그 부분을 주의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첫번째 소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 조차 너무나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래층에서 들은 소리는 이러 저러하게 들렸지만, 윗층에서 낸 어떤 소리가 그렇게 들렸는지는 밝혀 내기가 너무나 어렵다.

쿵쿵하는 발걸음 소리나 의자나 탁자등을 끄는 소리는 비교적 구체적이다. 그럼에도 이런 소리조차 제대로 밝히기 어려운 이유는 듣는 사람이 느끼는 크기와 낸 사람이 생각하는 크기의 괴리가 너무나도 커서 설마 이런 정도의 소리로....하는 괴리감에 있다.

하물며 어떻게 나는 소리인지 모르는 경우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거기에 더해서, 고의적으로 괴롭히기 위해 낸 소음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는 그냥 습관적인 행동, 무의식적인 행동의 결과로써 나는 소음이기에, 바로 옆에서 즉시 지적을 하지 않는 한은 특별히 기억날 행동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소음이 들리고 난 후에 윗층을 올라가서 소음이 났음을 알려도 윗층에서는 황당한 일이 되버리곤 하는 것이다.


설령 소리를 낸 사람이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인지했을 때에도, 쉽사리 인정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내가 윗층에 올라갔을 때에도, 처음에는 집안을 공개하며 당당하게 말하던 사람이, 베란다의 벽돌과 화문을 가르키며 지목을 하자, 이런 정도는 하고 살아야지..하는 식으로 매우 방어적으로 변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의 소음의 원인을 밝히는 것은 물 건너간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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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층간 소음을 겪으면서 상당히 의문으로 남는 것이 있다.
나는 얼마나 조용한 윗층 사람이었을까?
사실 층간 소음으로 피해를 겪고나서야 모든 것에 조심하게 되었다.
발끝으로 걷거나 미끄러지듯 걷기, 문 살짝 닫기, 의자는 들어서 옮기기, 침대에 누울 때 살살 눕기, 청소기 돌릴 때 벽에 쿵쿵 부딪히지 않기, 싱크대 수돗물도 콸콸 틀지 않기, 밤이나 새벽엔 더욱 조심 조심....

층간 소음으로 괴로워 하고 나서 바뀐 첫번째 변화는 위와 같은 행동의 변화였고,
두번째는 아랫층에 방문해서 혹시 시끄럽지 않은지 물어보고 싶어졌다는 것,
(실제로 물어보진 못했다...)
마지막 세번째 변화는 다음 단락의 얘기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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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소리를 잘 들어 보니 꽤 다양한 소리들이 들렸다.

쿵쿵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 깜짝 놀랄 정도로 꽝하는 소리, 골프공이 굴러가는 듯한 소리....

그리고 들리는 소리의 위치도 조금씩은 다른 듯 했다.

윗층 사람은 아침 일찍 출근하고 오후 2~3시에 퇴근하는 독신 할머니, 옆집은 오전에 느즈막히 출근하고 밤이나 새벽에 귀가하는 남성인데 낮에는 어머니쯤 되어 보이는 분이 와서 집안일을 해 주는 듯하고, 대각선 윗층은 부부와 중학생 정도의 두 자녀가 있는 가정.

발소리나 의자 끄는 소리는 대각선 윗집인 듯 하고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는 옆집이나 윗집인 듯 하고...이제는 소리의 원인이 어느 집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소리가 나도 어디에 가서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한 때는 그렇게 원인 모를 소리가 나면 나도 소리를 냈다.
TV의 볼륨을 한껏 키우거나, 베란다와 거실 사이의 미닫지 문을 쾅 닫거나 해서..

소리의 원인이 어딘지 모르니 나의 소리를 듣고서 조금 반성했으면 했다.
나처럼 소음으로 고통을 겪어보면 그들도 스스로 조심하게 될거라 생각했다.

사실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소음을 내는 사람에게 그 소음을 직접 듣게 해 주는 것.
그래서 스스로 깨닫고 조심하게 하는 것.

그런데 혹시,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최근에 소음이 증가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누이로부터 하나의 사례를 듣고나서는...

누이가 아는 어떤 분은 나이가 드신 할머니인데, 귀가 어두우신데다가 하루 종일 TV를 켜놓고 사신다고 한다. 그런데 귀가 어두우셔서 TV의 볼륨을 최고로 키워놓아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난다는 것. 게다가 어디 한동안 집을 비울 경우가 아니면 TV를 끄지도 않아서 큰 소리가 계속 난다는 것이다.

그분의 윗층에 사는 가족이 또한 엄청난 소음 유발자인데, 이 할머니는 귀가 어두워서 그 소음을 듣지를 못하시고, 윗집도 자신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알고 있어서 별 말이 없이 지낸다고 한다. 단지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견디는지 신기하다고....


몇달 전부터 윗층에서 켜 놓은 TV 소리가 벽을타고 울리기 시작했다.
이건 좌우벽이 아니라 안방과 거실 사이의 벽을 타고 진동이 전해지는 것이라 틀림없이 윗층의 소리였다.

그리고 누이가 들려 준 사례가 떠 올랐다.

어쩌면 윗층의 할머니도 나이가 들어서 귀가 어두워지신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면 내가 소음을 내서 스스로 깨닫게 하려던 노력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의미가 된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방법을 생각했다.

이것이 세번째 변화였다.


이 생각들은 다음 편에....

2015년 1월 4일 일요일

정치 성향에 대한 여론 조사의 결과

새해가 되면서 TV 방송에서는 갖가지 여론 조사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언제나 나오는 항목이라면, 행복의 여부, 행복의 조건, 새해 소망 따위가 있다.

그 가운데 어떤 여론 조사의 결과에서 자신의 정치 성향이 어떤지 묻는 항목이 있었으며,

여기에 대한 응답은 자신이 보수라고 응답한 사람은 43%, 진보라고 답한 사람은 29%였다고 한다.


언제나 이런 여론 조사는 표본 집단, 질문의 정확한 내용과 순서 등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니 굳이 믿을 게 못된다고 생각한다.

저 수치 또한 어느 방송사였는지, 그리고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조차 장담을 할 수 없는데, 중요한 것은 저 수치가 아니다.


어떤 개인이 자신의 정치 성향을 판단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서 기준 이상과 이하로 나누 듯이 명쾌한 것일까?

아닌 것 같다.


한 개인이 자신의 주변 사람들과 정치적인 주제로 대화를 하거나, 혹은 정치와 관련된 주변 사람들의 말, 행동 양식을 관찰해 보고 그것을 자기의 경우와 비교해 본 후에, 내가 저 사람보다 보수적이다 혹은 진보적이다라는 판단을 하게 되는 듯 하다.

결국 자신이 접하게 되는 주변의 사람들과 이런 방식의 비교를 해 보고, 자신의 주변에는 자신 보다 보수적인 사람이 많다면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판단할 것이며, 반대의 경우에는 보수적이러고 판단 할 것이다.

즉, 스스로를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주변에 자신보다 진보적인 사람이 많다는 뜻이며, 자신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변에 자신보다 보수적인 사람이 많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조금 더 쉽고 흔한 예를 들자면, 대략 젊은 사람들은 자신을 진보적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많으며, 나이 든 사람들은 자신을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한 개인을 두고 보아도 마찬가자인 경우가 허다하다.
(동일인이 젊었을 때와 나이가 들었을 때에도 같은 식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 이유는 젊었을 때에는 주위에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많으며, 나이가 들면 주위에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

나이든 사람은 대부분 기득권이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었기에 보수적이라는 말로 이것을 설명하면, 최근에 와서는 더욱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지고 있기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대신, 젊은이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데에 비교적 어려움이 적지만, 나이가 들수록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적응하기도 어렵게 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적용한다면, 어째서 젊은이는 진보적인 경향이, 나이 든 사람은 보수의 경향이 강한지를 설명하는 데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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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나서도 찜찜한 글...

처음엔 보수나 진보가 상대적인 개념이고, 각 개인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서 스스로를 다르게 평가한다는 취지의 글을 쓰려고 했는데, 마지막의 예는 오히려 이런 논지를 흐려 버리고 말았다.

실상은, 나이 든 사람이 보수적이 되는 것은 자신보다 젊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며, 젊은 사람이 진보적이 되는 것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결국은 젊을수록 진보적이고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이 된다는 흔하디 흔한 논조의 글이 되어버렸다.

허허...결국 주의 사람들이 어떤지를 따져보지 않더라도, 한 개인의 성향은 그냥 젊었을 때는 진보적이었다가 나이가 들면 보수적이 된다는 얘기다.
단지, 그걸 설명하기 위해 사회적 지위니 경제적 안정이니 하는 소수에 국한된 설명을 할 필요는 없고, 그냥 나이가 들면 의욕도 사라지고 도전정신도 줄어들고....머 그러니까 구태여 설명도 필요 없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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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일 금요일

우매한 선택과 나쁘지 않은 결과

살아가다 보면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는 끊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 혼자만의 문제의 경우엔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홀로 지게 된다.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의 공동 문제엔 공동의 선택을 끌어내야 하고 공동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직장에선 팀의 문제, 부서의 문제, 회사의 문제에 대해 그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선택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회의를 하기도 한다.


당면한 문제에 대한 각자의 입장은 모두가 다를 것이며, 그 결정이 매우 중요한 사람도 있고 덜 중요한 사람도 있다. 매우 중요한 사람은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중장을 관철하려 하며, 덜 중요한 사람이 종종 양보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가 선택을 하게 되는 대통령 선거도 있고, 지역구의 국회의원을 뽑는 국회의원 선거도 있다. 이 경우엔 강한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이 되어 있다.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전직 대통령이나 국회의장, 국회의원, 국민적 지지를 얻게 되는 어쩌다 스타들, 그래선 안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중립 원칙을 어기는 매스미디어의 보이지 않는 세력 등등....


선거에 대해서야 누구나 이러니 저러니 할 얘기야 많겠지만, 그 결과가 과연 좋았는지 나빴는지에 대해서는 섣불리 판단하기가 어렵다. 아무래도 개인의 지식과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보니 매스미디어의 농간 혹은 그들의 배후에 있는 모종의 의도를 가진 세력들에 의해 평가가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금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경우에 공동의 선택을 할 때에, 주관적으로는 최선이 아닌 듯 보이는 선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심지어는 참 어이없어 보이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어쩐지 결과가 썩 나쁘지 않은 경우도 종종 보게 되는 것은 희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굳이 설명하라면, 처음의 선택으로 예상되는 결과가 나쁠 확률이 높다 하더라도, 선택에 참여한 사람들이 나쁜 결과를 예상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다.
모두 좋은 결과를 예상하고 선택을 했으며, 비록 그 선택이 바라는 결과에 최적화된 것은 아닐지언정 다수가 선택한 것이기에 나쁘지는 않은 결과를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닐런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대립으로 치열했던 냉전의 시대, 보수와 진보가 서로 잡아먹을 듯이 반목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 하지만 이념이 어찌되었던 정치성향이 어찌 되었던 모두가 바라는 목적점은 인류가 안전하고 평화롭게 생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목적지에 도달한 날, 과거의 이념전쟁과 정치성향의 반목으로 다투던 일들을 우리는 무어라 평가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