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울증, 무기력감, 후회, 덧없음, 욕구 감퇴...
백수가 된지도 7년을 넘어 8년째로 가고 있다.
무언가 해야한다는 압박감도 스멀스멀 올라오가는 하지만 하고 싶지가 않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해야할 이유는 있지만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과연 내가 무엇을 한다면, 그것을 아무 문제 없이 제대로 해 낼 수 있기는 한 걸까?라는 불안감....세상에 변수는 너무나 많고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제대로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해 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세상을, 인간을, 아니 그냥 누군가에게라도 도움이 될 것인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겠지....그런데 득을 보는 사람보다 해를 입는 사람이 더 많지는 않을까? 어쩌면 나만 득을 보고 모두는 해를 입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기업, 직장, 작업, 노동,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정당하다고 알려진 모든 이윤 추구 행위는 사실상 법제화되고 부드러워진 강도행위는 아닐것인지....
내 배 불리려고, 등 따숩게 지낼려고 돈벌이에 나선다면 누군가는 내게 강도질을 당할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존재해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대 보아라.
인무원려난성대업(人無遠慮難成大業)
큰 뜻이 아니면 좋은 뜻이 아닐것이고, 오래 가지도 못하며, 이루어도 얻을 것이 없으리라.
꿈을 가져야 한다.
큰 꿈을 가져야 한다.
잠에서 눈을 뜰 때마다 읇조리게 되었다.
I have a dream.....
2014년 12월 30일 화요일
선한 사람은 세상을 선하게 만드는가?
연말이 되니 TV 방송들은 필수 주제처럼 지난 한해를 정리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
지난 한해동안 일어난 큰 일들, 사건들, 인물들...
2014년에 대한민국에서 화제의 인물로 꼽히는 사람 중의 한명은 프란체스코 교황이었다.
교황의 방한에 기인한 것이었겠지만, 프란체스코 교황은 어린이와 고통받는 이들에게 유난히 연민을 가지고 있는 듯 하여 많은 이들에게 마음속의 위안을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황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이며, 전 인류적인 선(善)을 세계 곳곳에 퍼뜨리고 있는 듯 보인다.
과연 교황의 이러한 행동은 전 인류의 선함을 이끌어내어 세상을 조금은 더 선하게 만들것인가?
전 인류의 선함이라니, 너무 광범위해서 판단이 어려운가?
연말이 되면 여기 저기서 선행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익명으로 심지어는 얼굴도 보이지 않고 몰래 기부를 하는 얘기들이 들려오고, 심지어는 이런 숨은 선행이 몇년을 이어져 온다고 까지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그 만큼 선해졌는가?
이것도 너무 넓어서 알기가 쉽지 않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 친척, 동료 등등의 소그룹 가운데 자신을 희생하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소그룹이 어떻게 변했는지 관찰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되겠다.
물론 변화를 줄 만큼의 선한 사람이 있는지와 꾸준하게 그 소그룹의 행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겠지만...
어쩌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게도 우린 아주 긴 시간 동안 영향력을 끼쳐온 선인(善人)도 알고 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좋은 예가 되어 주실 듯 하다.
사랑과 자비를 베풀기를 역서하셨다는 사실은 아주 많은 사람이 알고 있으니...
과연 인간의 세상은 2000년이 넘게 영향을 끼친 선인으로 말미암아 선해졌는가?
과거는 불확실한 기억력때문에, 혹은 인간의 바램 때문에 미화되곤 한다고 하는데,
현재의 인간 세상이 과거보다 선해지지는 않은 것 같다.
척박한 환경과 본능에 호소할 수 밖에 없을 정도의 극한의 상황이 많이 줄어들은 것은 사실이나, 그래서 드러나지 않은 인간의 악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현재에도 언뜻 언뜻 보이는 인간들의 악함이 사실은 빙산의 일각처럼 훨씬 많은 악함들의 우연한 돌출이라고 생각하다면...
과연 인간의 본성마저 변했겠느냐에 대한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게 전적으로 나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니, 개개인의 성향이 따라 다른 판단이 내려지리라.)
어쩌면 그나마 인류 가운데 나타나는 선인들이, 인간의 세상이 악해지는 속도를 이 정도로 유지해 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제목과 같은 의문의 시작은 작용-반작용과도 같은 인간 무리들의 자율적인 균형 맞추기 속성에서 비롯되었다.
인간 무리들이 어떤 지점에 균형을 맞추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무언가를 중심으로 균형을 맞추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전의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진보와 보수의 분열, 누군가 더 극단으로 치우치면 자연스레 반대편도 극단으로 치우치곤 한다.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될 수록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있다. 자본주의가 강해질 수록 사회주의적인 대안들이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천재지변으로 처참한 상황이 벌어지면 그걸 치료하고자하는 동정과 도움의 손길은 더 많아진다. 전쟁이 치열해 질수록 반전의 요구와 평화에 대한 갈망이 강해진다.
악은 선을 낳고, 선은 악을 낳는 것은 아닐까?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으니 한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다.
종종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동정심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 극적으로 불행에서 벗어나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면 어떨까?
분명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바라보는 시각은 동정심에서 질투심으로 바뀌곤 한다.
질투심은 너무하고 그냥 불행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안심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 경우가 더 많겠지...
그럼 반대로 생각해 보자.
누군가 좋은 부모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머리도 좋고 환경도 좋아 탄탄대로의 성공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겸손은 몰라 오만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를 질투하고 폄하한다.
어느 순간 뜻하지 않는 불행이 그를 덮쳐 일순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리고 그 동안 그가 알지 못했던 빈곤과 멸시를 겪게 되었다.
한없이 처진 어깨에 남루한 차림을 하고 속죄의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 다시 동정하게 될 것이다.
지난 한해동안 일어난 큰 일들, 사건들, 인물들...
2014년에 대한민국에서 화제의 인물로 꼽히는 사람 중의 한명은 프란체스코 교황이었다.
교황의 방한에 기인한 것이었겠지만, 프란체스코 교황은 어린이와 고통받는 이들에게 유난히 연민을 가지고 있는 듯 하여 많은 이들에게 마음속의 위안을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황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이며, 전 인류적인 선(善)을 세계 곳곳에 퍼뜨리고 있는 듯 보인다.
과연 교황의 이러한 행동은 전 인류의 선함을 이끌어내어 세상을 조금은 더 선하게 만들것인가?
전 인류의 선함이라니, 너무 광범위해서 판단이 어려운가?
연말이 되면 여기 저기서 선행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익명으로 심지어는 얼굴도 보이지 않고 몰래 기부를 하는 얘기들이 들려오고, 심지어는 이런 숨은 선행이 몇년을 이어져 온다고 까지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그 만큼 선해졌는가?
이것도 너무 넓어서 알기가 쉽지 않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 친척, 동료 등등의 소그룹 가운데 자신을 희생하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소그룹이 어떻게 변했는지 관찰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되겠다.
물론 변화를 줄 만큼의 선한 사람이 있는지와 꾸준하게 그 소그룹의 행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겠지만...
어쩌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게도 우린 아주 긴 시간 동안 영향력을 끼쳐온 선인(善人)도 알고 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좋은 예가 되어 주실 듯 하다.
사랑과 자비를 베풀기를 역서하셨다는 사실은 아주 많은 사람이 알고 있으니...
과연 인간의 세상은 2000년이 넘게 영향을 끼친 선인으로 말미암아 선해졌는가?
과거는 불확실한 기억력때문에, 혹은 인간의 바램 때문에 미화되곤 한다고 하는데,
현재의 인간 세상이 과거보다 선해지지는 않은 것 같다.
척박한 환경과 본능에 호소할 수 밖에 없을 정도의 극한의 상황이 많이 줄어들은 것은 사실이나, 그래서 드러나지 않은 인간의 악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현재에도 언뜻 언뜻 보이는 인간들의 악함이 사실은 빙산의 일각처럼 훨씬 많은 악함들의 우연한 돌출이라고 생각하다면...
과연 인간의 본성마저 변했겠느냐에 대한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게 전적으로 나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니, 개개인의 성향이 따라 다른 판단이 내려지리라.)
어쩌면 그나마 인류 가운데 나타나는 선인들이, 인간의 세상이 악해지는 속도를 이 정도로 유지해 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제목과 같은 의문의 시작은 작용-반작용과도 같은 인간 무리들의 자율적인 균형 맞추기 속성에서 비롯되었다.
인간 무리들이 어떤 지점에 균형을 맞추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무언가를 중심으로 균형을 맞추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전의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진보와 보수의 분열, 누군가 더 극단으로 치우치면 자연스레 반대편도 극단으로 치우치곤 한다.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될 수록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있다. 자본주의가 강해질 수록 사회주의적인 대안들이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천재지변으로 처참한 상황이 벌어지면 그걸 치료하고자하는 동정과 도움의 손길은 더 많아진다. 전쟁이 치열해 질수록 반전의 요구와 평화에 대한 갈망이 강해진다.
악은 선을 낳고, 선은 악을 낳는 것은 아닐까?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으니 한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다.
종종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동정심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 극적으로 불행에서 벗어나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면 어떨까?
분명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바라보는 시각은 동정심에서 질투심으로 바뀌곤 한다.
질투심은 너무하고 그냥 불행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안심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 경우가 더 많겠지...
그럼 반대로 생각해 보자.
누군가 좋은 부모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머리도 좋고 환경도 좋아 탄탄대로의 성공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겸손은 몰라 오만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를 질투하고 폄하한다.
어느 순간 뜻하지 않는 불행이 그를 덮쳐 일순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리고 그 동안 그가 알지 못했던 빈곤과 멸시를 겪게 되었다.
한없이 처진 어깨에 남루한 차림을 하고 속죄의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 다시 동정하게 될 것이다.
2014년 12월 29일 월요일
영화 건축학개론과 드라마 미생
꽤 인기를 끌었다던 건축학 개론을 어찌된 이유인지 아주 느즈막하게 보게 되었다.
겨우 케이블 TV에서 방영해 주는 걸로 보게 되었으니, 끝물에야 보게 된 셈이다.
그런데, 너무 보기가 힘들었다.
보는 내내 어찌나 눈물 콧물을 짜고 보았는지, 심지어는 어느 장면에선가는 일부러 채널을 돌리거나 외면해야 할 정도로...
웹툰으로 인기를 끌었던 미생도, 정작 웹툰으로는 본 적이 없었는데, 우연히 케이블 TV에서 방영해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20회 분량으로 제작된 모양이었는데 한번도 본방이 아닌 재방으로 보았지만, 후반부의 회차들은 여러분 눈물을 짜며 보았다.
이게 오리지널 웹툰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윤태호 작가는 참 어두운 사람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도 했더랬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왜 그리도 이 작품들은 힘이 들 정도로 눈물을 짜며 보게 되었는지...
틀림없이 특정 장면이나 상황들이 내가 겪었던 경험과 일치했으며, 그 때의 좌절과 절망이 되살아났음은 틀림 없다.
하지만 그 때의 내 감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좌절 혹은 절망이 공통적으로 기억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이고 치욕이고 분노였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아직도 이 경험들에 대해서는 다시 떠 올리는 것조차 두려워서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간혹 충격적인 사건을 망각하는 기억의 메커니즘이 자신을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것이라는 것이 이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겨우 케이블 TV에서 방영해 주는 걸로 보게 되었으니, 끝물에야 보게 된 셈이다.
그런데, 너무 보기가 힘들었다.
보는 내내 어찌나 눈물 콧물을 짜고 보았는지, 심지어는 어느 장면에선가는 일부러 채널을 돌리거나 외면해야 할 정도로...
웹툰으로 인기를 끌었던 미생도, 정작 웹툰으로는 본 적이 없었는데, 우연히 케이블 TV에서 방영해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20회 분량으로 제작된 모양이었는데 한번도 본방이 아닌 재방으로 보았지만, 후반부의 회차들은 여러분 눈물을 짜며 보았다.
이게 오리지널 웹툰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윤태호 작가는 참 어두운 사람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도 했더랬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왜 그리도 이 작품들은 힘이 들 정도로 눈물을 짜며 보게 되었는지...
틀림없이 특정 장면이나 상황들이 내가 겪었던 경험과 일치했으며, 그 때의 좌절과 절망이 되살아났음은 틀림 없다.
하지만 그 때의 내 감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좌절 혹은 절망이 공통적으로 기억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이고 치욕이고 분노였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아직도 이 경험들에 대해서는 다시 떠 올리는 것조차 두려워서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간혹 충격적인 사건을 망각하는 기억의 메커니즘이 자신을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것이라는 것이 이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2014년 12월 28일 일요일
직업의 귀천과 직업 선택의 기준
얼마전 친구와 얘기를 하던 중에 나온 화제가 직업에 관한 것이었다.
인생의 1차전을 일찌감치 마감하고 2차전에 차마 돌입하지 못한 상태로 장기 백수상태에 빠져 있는 나의 입장에선 반드시 숙고해 봐야할 주제이기도 하다.
화제가 돌아가게된 계기가 개그맨 박명수의 "젊어서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더울 때 더운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데서 일한다"는 어록(?)에서 시작이 되었다.
친구는 그 말에 대해 꽤나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유인 즉, 직업의 귀천을 너무나도 쉽게 평가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면서 덧 붙이기를, 흔히 부모들이 아이에게 하는 말 가운데, 지하철이나 아파트의 공사장 인부를 보면서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고 하는 말들이 얼마나 잘못된 교육인지를 성토했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오래된 나의 고정관념으로는 선뜻 수용하기도 쉽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주입식으로 교육을 받고 난 후에, 스스로 고민해 보지 않는 이상은 이러한 고정관념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어째서 우리는 육체로 하는 노동, 지저분한 환경에서의 작업, 위험한 환경에서의 일을 천한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책상앞에서 컴퓨터나 서류로 하는 일,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하는 일을 귀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귀천(貴賤)이라는 기준이 거슬린다면, 좋은 직업과 나쁜 직업으로 나누는 것은 어떤가?
직업에 대한 세간의 평가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듯 하다.
내 부모 세대에는 안정적인 직업이 최고였다 들었다. 은행원 교사가 그랬다고들 한다.
우리 세대에서는 고소득자가 최고였던 듯 싶다. 의사 변호사가 그랬다. (수입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정도의 결정요소가 되곤 하지만, 앞선 세대가 겪었던 경제적 불안 요소가 줄어든 후에는 차별화가 소득으로 이어진 듯 하다.)
어쩌면 우리 세대에는 소득과 사회적 지위가 모두 좋은 직업이 선호 되었던 듯 하다.
그리고 21세기의 시작을 전후하는 세대들은 다시 안전성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사와 공무원에 대한 선호가 높아졌지만, 반드시 앞선 세대와 같지는 않아 보인다.
대중화 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직업의 선택에 대한 폭이 넓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직업에 대한 귀천의 차별은 조금은 흐려지지 않나 싶다.
대화의 중간에 내가 제시한 반대 의견은, 직업의 귀천이 문제가 아니라, 직업을 내가 선택하느냐 혹은 선택되어지느냐의 문제라고 했다.
직업을 선택할 때, 그 직업에서 요구되는 조건이 높은지 낮은지에 따라 내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의 선택권이 제한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내가 원하는 직업에 대한 선택권이 나에게 주어지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직업이 없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 가운데에서 골라야 하는가가 되는 것이다.
(골라야 한다니 배부른 소리이겠지만 싫어하는 것들 가운데 고르라니....)
당연히 직업에 대한 만족도는 달라질 것이다.
더욱이 한번 갖게 된 직업들은 몇년 혹은 그보다 오래도록 나의 생활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에 인생에 대한 만족도 또한 달라질 것이다.
물론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갖게 된다해도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100% 보장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처음 시작할 때의 출발 선은 다르지 않겠는가?
직업의 귀천에 대한 아무런 숙고 없는 고정관념은 반드시 벗어나야 할 주제이다.
고정관념을 벗어난 후에야 직업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1차전을 일찌감치 마감하고 2차전에 차마 돌입하지 못한 상태로 장기 백수상태에 빠져 있는 나의 입장에선 반드시 숙고해 봐야할 주제이기도 하다.
화제가 돌아가게된 계기가 개그맨 박명수의 "젊어서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더울 때 더운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데서 일한다"는 어록(?)에서 시작이 되었다.
친구는 그 말에 대해 꽤나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유인 즉, 직업의 귀천을 너무나도 쉽게 평가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면서 덧 붙이기를, 흔히 부모들이 아이에게 하는 말 가운데, 지하철이나 아파트의 공사장 인부를 보면서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고 하는 말들이 얼마나 잘못된 교육인지를 성토했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오래된 나의 고정관념으로는 선뜻 수용하기도 쉽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주입식으로 교육을 받고 난 후에, 스스로 고민해 보지 않는 이상은 이러한 고정관념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어째서 우리는 육체로 하는 노동, 지저분한 환경에서의 작업, 위험한 환경에서의 일을 천한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책상앞에서 컴퓨터나 서류로 하는 일,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하는 일을 귀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귀천(貴賤)이라는 기준이 거슬린다면, 좋은 직업과 나쁜 직업으로 나누는 것은 어떤가?
직업에 대한 세간의 평가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듯 하다.
내 부모 세대에는 안정적인 직업이 최고였다 들었다. 은행원 교사가 그랬다고들 한다.
우리 세대에서는 고소득자가 최고였던 듯 싶다. 의사 변호사가 그랬다. (수입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정도의 결정요소가 되곤 하지만, 앞선 세대가 겪었던 경제적 불안 요소가 줄어든 후에는 차별화가 소득으로 이어진 듯 하다.)
어쩌면 우리 세대에는 소득과 사회적 지위가 모두 좋은 직업이 선호 되었던 듯 하다.
그리고 21세기의 시작을 전후하는 세대들은 다시 안전성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사와 공무원에 대한 선호가 높아졌지만, 반드시 앞선 세대와 같지는 않아 보인다.
대중화 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직업의 선택에 대한 폭이 넓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직업에 대한 귀천의 차별은 조금은 흐려지지 않나 싶다.
대화의 중간에 내가 제시한 반대 의견은, 직업의 귀천이 문제가 아니라, 직업을 내가 선택하느냐 혹은 선택되어지느냐의 문제라고 했다.
직업을 선택할 때, 그 직업에서 요구되는 조건이 높은지 낮은지에 따라 내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의 선택권이 제한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내가 원하는 직업에 대한 선택권이 나에게 주어지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직업이 없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 가운데에서 골라야 하는가가 되는 것이다.
(골라야 한다니 배부른 소리이겠지만 싫어하는 것들 가운데 고르라니....)
당연히 직업에 대한 만족도는 달라질 것이다.
더욱이 한번 갖게 된 직업들은 몇년 혹은 그보다 오래도록 나의 생활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에 인생에 대한 만족도 또한 달라질 것이다.
물론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갖게 된다해도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100% 보장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처음 시작할 때의 출발 선은 다르지 않겠는가?
직업의 귀천에 대한 아무런 숙고 없는 고정관념은 반드시 벗어나야 할 주제이다.
고정관념을 벗어난 후에야 직업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12월 23일 화요일
균형을 맞추기 위한 반대
연말이라고 고교동창들과 모임을 가졌다.
386의 끝트머리를 잡고 있는 세대인 우리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을 정도의 주입식 교육과 무조건적인 반공 교육, 충효를 절대 선(善)으로 떠받들어야 한다는 세뇌(?)교육을 받았었다.
그런 일괄적인 교육의 틀에 박혀서 나왔음에도 어찌 그리 각양각색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희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작은 모임의 정치적인 성향이 현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평균에 부합하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 그 안에서 상대적인 보수와 진보가 존재하며 중도와 극도가 존재한다.
내가 나 자신을 극도의 진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이 모임에서 극도의 보수로 불릴만한 K와 종종 대립각을 세우는 쪽은 나였다.
얼마전 헌법재판소가 내린 통합진보당의 정당 해체 결판은 적지 않게 충격적이었다.
사실 내 자신이 통진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몇백만의 국민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대한민국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결은, 그들의 사상이 적합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그들의 사상을 바꾸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에 존재해서는 안될 존재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쪼록 통진당의 반민주적인 당령과 당론이 대부분의 지지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간과되었기만을 바래야 할 상황이었다.
이 재판의 결과를 보면서, 박근혜가 결국은 해 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구나 기억할,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방송된 TV 토론회에서, 당시 통진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정희 대표와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박근혜 대표간의 날 선 공방.
특히나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이정희 후보의 발언이 모든 것의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발언의 진위,진정성,타당성 따위는 모두 제쳐두고라도 결과만을 보면 박근혜 후보에게 득이되었으며 이정희 후보에게는 독이 되었다. 그 결과는 얼마 되지 않아 선거의 결과로 나타났다.
이정희는 진보에서 그 발언으로 극단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극으로 달려가는 이정희 후보를 본 유권자들 중의 상당수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반대쪽인 보수 쪽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뒤늦게 이정희 후보는 사퇴하면서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로 결집을 시도했지만, 이정희 후보의 극단에 반발하여 뭉친 보수쪽은 더 단단하고 더 무거웠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던가
이정희 후보에게 놀라서 보수쪽으로 달려간 유권자들은 과연 이정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박근혜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었을 것인가?
내 수준이 이것밖에는 안되는지 몰라도 그저 느낌상,심정상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정희 후보가 너무 가는구나...
단순한 느낌만으로 이정희는 아니구나 박근혜가 불쌍하구나로 유권자들이 이동하지 않았을까?
이 개개인들이 내린 판단의 근거는 아주 희박하고 비논리적이니 이걸 대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다.
하지만....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유권자들은 전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움직였던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개개인들을 자세히 보면 별 깊은 생각도 없고 반(半)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듯 할 정도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 방정식의 변수들처럼 균형을 맞추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말이다.
어쩌면 K의 극단적인 보수 성향은 내가 극단적인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할 지라도,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면 그가 혼자 보수쪽으로 치달을 수는 없지 않을까?
내가 극단으로 가면 상대방 또한 극단으로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화합을 위해서는 내가 먼저 양보해야 한다는 말은 내가 중도를 향하면 상대도 중도를 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일까?
결국은 이것이 화합을 이루는 길이지만....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되어 있고, 자유도는 확장되게 되어 있고, 사상은 다양해지게 되어 있지 않은가?
어차피 나는 하나의 점으로서 어디엔가 위치하고 있다.
하나의 점은 필연적으로 어떤 점과는 반대편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점과는 가깝지만 동시에 다른 점과는 멀게 된다.
치우침은 필수 불가결하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모든 점의 중심이 되겠다고 한다면 이 또한 지극한 이기심이며, 오히려 모든 점으로부터 균등하게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혹은 하나의 점이 아닌 모든 점이 되고자 한다면 그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동일해 지는 것이다.
나는 하나의 점이다.
하나의 점은 치우침이다.
나의 치우침만큼 누군가는 반대로 치우친다.
그 치우친 누군가는 나와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치우친 누군가와 일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치우친 누군가가 존재해야만 나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386의 끝트머리를 잡고 있는 세대인 우리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을 정도의 주입식 교육과 무조건적인 반공 교육, 충효를 절대 선(善)으로 떠받들어야 한다는 세뇌(?)교육을 받았었다.
그런 일괄적인 교육의 틀에 박혀서 나왔음에도 어찌 그리 각양각색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희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작은 모임의 정치적인 성향이 현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평균에 부합하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 그 안에서 상대적인 보수와 진보가 존재하며 중도와 극도가 존재한다.
내가 나 자신을 극도의 진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이 모임에서 극도의 보수로 불릴만한 K와 종종 대립각을 세우는 쪽은 나였다.
얼마전 헌법재판소가 내린 통합진보당의 정당 해체 결판은 적지 않게 충격적이었다.
사실 내 자신이 통진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몇백만의 국민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대한민국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결은, 그들의 사상이 적합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그들의 사상을 바꾸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에 존재해서는 안될 존재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쪼록 통진당의 반민주적인 당령과 당론이 대부분의 지지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간과되었기만을 바래야 할 상황이었다.
이 재판의 결과를 보면서, 박근혜가 결국은 해 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구나 기억할,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방송된 TV 토론회에서, 당시 통진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정희 대표와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박근혜 대표간의 날 선 공방.
특히나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이정희 후보의 발언이 모든 것의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발언의 진위,진정성,타당성 따위는 모두 제쳐두고라도 결과만을 보면 박근혜 후보에게 득이되었으며 이정희 후보에게는 독이 되었다. 그 결과는 얼마 되지 않아 선거의 결과로 나타났다.
이정희는 진보에서 그 발언으로 극단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극으로 달려가는 이정희 후보를 본 유권자들 중의 상당수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반대쪽인 보수 쪽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뒤늦게 이정희 후보는 사퇴하면서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로 결집을 시도했지만, 이정희 후보의 극단에 반발하여 뭉친 보수쪽은 더 단단하고 더 무거웠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던가
이정희 후보에게 놀라서 보수쪽으로 달려간 유권자들은 과연 이정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박근혜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었을 것인가?
내 수준이 이것밖에는 안되는지 몰라도 그저 느낌상,심정상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정희 후보가 너무 가는구나...
단순한 느낌만으로 이정희는 아니구나 박근혜가 불쌍하구나로 유권자들이 이동하지 않았을까?
이 개개인들이 내린 판단의 근거는 아주 희박하고 비논리적이니 이걸 대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다.
하지만....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유권자들은 전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움직였던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개개인들을 자세히 보면 별 깊은 생각도 없고 반(半)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듯 할 정도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 방정식의 변수들처럼 균형을 맞추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말이다.
어쩌면 K의 극단적인 보수 성향은 내가 극단적인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할 지라도,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면 그가 혼자 보수쪽으로 치달을 수는 없지 않을까?
내가 극단으로 가면 상대방 또한 극단으로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화합을 위해서는 내가 먼저 양보해야 한다는 말은 내가 중도를 향하면 상대도 중도를 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일까?
결국은 이것이 화합을 이루는 길이지만....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되어 있고, 자유도는 확장되게 되어 있고, 사상은 다양해지게 되어 있지 않은가?
어차피 나는 하나의 점으로서 어디엔가 위치하고 있다.
하나의 점은 필연적으로 어떤 점과는 반대편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점과는 가깝지만 동시에 다른 점과는 멀게 된다.
치우침은 필수 불가결하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모든 점의 중심이 되겠다고 한다면 이 또한 지극한 이기심이며, 오히려 모든 점으로부터 균등하게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혹은 하나의 점이 아닌 모든 점이 되고자 한다면 그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동일해 지는 것이다.
나는 하나의 점이다.
하나의 점은 치우침이다.
나의 치우침만큼 누군가는 반대로 치우친다.
그 치우친 누군가는 나와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치우친 누군가와 일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치우친 누군가가 존재해야만 나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2014년 12월 16일 화요일
영혼은 존재하는가?
영혼은 존재하는 것인가?
많은 종교들이 인간의 영혼에 대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만, 종교에서는 그럴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은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인생이라면 내세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인간이 종교에 기대야 할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즉, 종교는 더 많은 사람이 더 강력하게 종교에 의존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생을 넘어서까지 연장되는 영혼의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혼이 단지 종교의 필요에 의해서만 생겨난 개념이라면, 이 만큼 널리 오랫동안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들의 본능적인 두려움-죽음-에 대한 위안이 되기도 하고 욕구-영생-에 대한 희방이 되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바램을 던져버리고 냉철하게 판단해 볼 때, 정말 영혼은 존재하는 것인가?
많은 종교들이 인간의 영혼에 대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만, 종교에서는 그럴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은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인생이라면 내세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인간이 종교에 기대야 할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즉, 종교는 더 많은 사람이 더 강력하게 종교에 의존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생을 넘어서까지 연장되는 영혼의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혼이 단지 종교의 필요에 의해서만 생겨난 개념이라면, 이 만큼 널리 오랫동안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들의 본능적인 두려움-죽음-에 대한 위안이 되기도 하고 욕구-영생-에 대한 희방이 되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바램을 던져버리고 냉철하게 판단해 볼 때, 정말 영혼은 존재하는 것인가?
- 영혼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 그 영혼이 여러 생에에 걸쳐서도 고유하게 유지된다고 가정하자
- 영혼은 불멸이라 소멸하지도 않는다고 가정하자.
- 그렇다면 영혼은 생성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지구의 인류가 증가하는 것을 설명하기에 곤란해 진다.
- 영혼도 새로 태어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고 가정하자
- 이는 인간의 육체보다 상대적으로 긴 기간일 뿐 마찬가지로 유한하며 시작과 끝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 영혼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는다면 그 영혼을 구분할 필요가 없으며 육체적인 구분보다 더 실체라 할 수 없게 된다.
-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 인간은 육체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다. 비육체적인 정신 활동은 단지 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것이거나 환상일 따름이다.
- 귀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 전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타자의 욕망 타자의 두려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게 되면서 나에게 일어난 큰 변화는, 자신에 대한 시각이 보다 객관화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이 늘어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객관화의 정도야 사람마다 천양지차이겠지만...
그리고 이런 변화는 축복이며 저주와도 같았다.
자신이 객관화 될수록 자신을 평가하는 일도 잦아지며 이 평가는 냉정해진다. 또한 냉정한 시각으로 과거의 자신을 되짚는 일은 분명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인식이 보다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는 느낌, 인식의 범위가 넓어지고 진실에 가까와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기쁨이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거듭하다보면, 내가 가지고 있던 욕망과 두려움이 점차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물론 완전한 근원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껍데기를 하나씩 벗겨내고 안으로 들어가 그 기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욕망과 두려움이 정녕 내가 스스로 원한것이었는지, 내가 겪었던 고통에 기인한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후에 좀 더 근원적인 실체에 접근하면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만, 현재로써는 욕망과 두려움의 상당 부분이 다른 사람에 의해 심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아마도 내게 이런 욕망과 두려움을 심어준 사람은 부모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무저항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욕망과 두려움 혹은 욕망을 유발할 무엇과 두려움을 가지게 될 무엇을 심어준 사람으로는 가장 큰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만한 영향력을 지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능할 것이다.
하나의 인간이 걸어가는 인생 길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이끄는 길, 그리고 두려움으로 막혀진 길의 사이라고 생각한다.
우연처럼 인생을 좌우할 큰 사건들이 인간에게 벌어지지만 그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반응은 각자가 가진 욕망과 두려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인간이 가진 욕망과 두려움은 인생을 좌우할 열쇠인 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욕망과 두려움을 후세에 전달하는 일은, 그 후세들이 갈 인생의 폭을 크게 제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크게 열려 있음에도 욕망과 두려움으로 아주 제한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틀림없이 슬픈 일이다.
인간이 태어나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그것을 열망할 때에 순순하게 그 자신이 될 것이다.
타자의 욕망은 그 원동력이 약하기에 쉽게 좌절될 수 있으며 이루고 난 후에도 자신이 아닌 타자가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스스로가 겪은 아픔과 고통만으로도 두려워서 피하게 되는 선택은 있게 마련인데, 거기에 타자의 두려움까지 더해져서 더욱더 선택이 폭이 좁아진다면, 가보지 못한 길은 너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보니 내가 살아온 길이 나의 길이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서글프다.
모쪼록 후세에게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투영시켜 그들이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이 늘어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객관화의 정도야 사람마다 천양지차이겠지만...
그리고 이런 변화는 축복이며 저주와도 같았다.
자신이 객관화 될수록 자신을 평가하는 일도 잦아지며 이 평가는 냉정해진다. 또한 냉정한 시각으로 과거의 자신을 되짚는 일은 분명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인식이 보다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는 느낌, 인식의 범위가 넓어지고 진실에 가까와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기쁨이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거듭하다보면, 내가 가지고 있던 욕망과 두려움이 점차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물론 완전한 근원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껍데기를 하나씩 벗겨내고 안으로 들어가 그 기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욕망과 두려움이 정녕 내가 스스로 원한것이었는지, 내가 겪었던 고통에 기인한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후에 좀 더 근원적인 실체에 접근하면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만, 현재로써는 욕망과 두려움의 상당 부분이 다른 사람에 의해 심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아마도 내게 이런 욕망과 두려움을 심어준 사람은 부모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무저항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욕망과 두려움 혹은 욕망을 유발할 무엇과 두려움을 가지게 될 무엇을 심어준 사람으로는 가장 큰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만한 영향력을 지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능할 것이다.
하나의 인간이 걸어가는 인생 길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이끄는 길, 그리고 두려움으로 막혀진 길의 사이라고 생각한다.
우연처럼 인생을 좌우할 큰 사건들이 인간에게 벌어지지만 그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반응은 각자가 가진 욕망과 두려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인간이 가진 욕망과 두려움은 인생을 좌우할 열쇠인 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욕망과 두려움을 후세에 전달하는 일은, 그 후세들이 갈 인생의 폭을 크게 제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크게 열려 있음에도 욕망과 두려움으로 아주 제한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틀림없이 슬픈 일이다.
인간이 태어나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그것을 열망할 때에 순순하게 그 자신이 될 것이다.
타자의 욕망은 그 원동력이 약하기에 쉽게 좌절될 수 있으며 이루고 난 후에도 자신이 아닌 타자가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스스로가 겪은 아픔과 고통만으로도 두려워서 피하게 되는 선택은 있게 마련인데, 거기에 타자의 두려움까지 더해져서 더욱더 선택이 폭이 좁아진다면, 가보지 못한 길은 너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보니 내가 살아온 길이 나의 길이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서글프다.
모쪼록 후세에게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투영시켜 그들이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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