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욕망, 하고자 하는 마음, 발심
2. 능력,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힘, 문제나 장애를 해결하는 방법이나 기술에 대한 지식
3. 환경, 시기나 위치 혹은 자연적인 조건. 일이 진행되는 것에 도움이 되는 주변의 갖가지 상황들. 혹은 일의 진행에 방해가 되는 상황을 벗어난 상태 등.
1번은 사람마다 각자가 원하는 바가 다르고, 자신이 하고자 마음을 먹는 순간 부터 자연스럽게 욕망을 가지게 되므로 특별한 방법은 필요하지 않다.
단지 얼마나 절실하게 원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3번은 그 요소가 너무 다양하고 예측이 어려운 점도 많아서 종종 운(運)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그치지 않으니 운에 의존하는 요소들이 점점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다.
2번이 인간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다.
대부분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이런 능력을 끌어 올리기 위함이고, 누군가에게 배우고 듣고 경험하는 것도 이를 위한 것이다.
2017년 12월 6일 수요일
2017년 11월 18일 토요일
화(火)의 전염
어느 일요일.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식구들이 모여서 가족 식사를 하기로 했다.
본가에 미리 도착해서 주차장에 주차를 하려 했는데, 골목 안쪽의 집에 누군가 이사를 하는건지 이삿짐 트럭이 주차장을 막고 한참 작업 중이었다.
차를 잠시 빼달라고 부탁하려고 보았는데, 한참 작업 중인 것이 보여서 번거롭겠다 싶었다.
아버지께서 이 상황을 보시고 차를 조금만 빼달라고 말씀하시려는 것을 내가 그만 두시라고 말렸다.
식사하러 가는 곳이 멀지 않지만, 그곳에도 주차장이 있으니 식사하고 와보면 상황이 달라져 있으리란 임시 대책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동하고 식사를 하고 다시 돌아왔는데, 상황은 더 악화되어 있었다.
큰길에서 집 앞의 주차장까지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이삿짐 차량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고 1차선인 큰길을 막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인도를 가로막고라도 우선 큰길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바로 골목안으로 들어가서 이삿짐 차량과 이사하는 집 주인인듯한 사람에게 부탁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떤 노인이 한손에는 화장지 한더미를 들고 지나가면서 내 차가 인도를 가로질러 막고 있는 것에 매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차를 이렇게 대면 어쩌자는거여'. 혼자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쳐다보며 자신이 화난 것을 알아달라는 듯이...그걸 참지 못하고 나도 변명을 했다. '여기 차들이 가로 막고 있어서 그래요' 공손하지는 않았더랬다. 그러자 그 노인은 가던 방향에서 멈추어 나를 돌아보고 더 큰 소리로 윽박을 질렀다. '그럼 이리로 더 들어와서 세우던가!' 완전 짜증이 났다. '지금 막 왔어요'. 그리고 노인은 씩씩거리며 가던 길로 갔지만, 그 노인이나 나나 화를 가라 앉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곧 골목으로 들어가서 이사하는 집의 집주인인 듯한 사람이 보이길래 화가 난 상태로 말을 했다. '이 차들 좀 어떻게 해주세요!' 집주인은 그냥 멀뚱멀뚱 쳐다 볼 뿐이었다.
결국은 큰길과 인도 사이의 턱에 개구리 주차를 해서 임시변통을 했다.
본가에서 몇시간을 더 머물렀는데, 아버지께서 밖의 상황을 보시고는 차가 다 빠졌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나는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물론 나가서 다시 주차장에 주차해도 또 금방 차를 빼서 나가야 하니 그럴 필요가 없던 것이었지만 그걸 아버지께 설명하면서 그 상황이 떠 오르는 것도 짜증났고, 내 짜증을 알아차리셨는지 계속 이사 차량에 신경을 쓰시는 아버지의 행동도 짜증이 났던 것이다.
나중에 차를 빼서 운전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해보니, 참으로 부끄러운 짓을 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받은 화(노인으로 부터 받은)를 누군가에게(아버지와 이사하는 집 주인)에게 전가했던 것이 참으로 후회스러웠다.
먼저, 나에게 화를 낸 노인의 행동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노인이야 전후 사정을 몰랐던 것이고, 차가 인도를 완전히 막고 있어서 불편하게 돌아가야 한다면 화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내가 공손하지 못하니 더 화가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하는 집의 주인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하무인격이었다. 이사라는 큰 일을 치르고 있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 어떤 불편을 주어도 되는 면죄부는 아닌 것이다.
아마도 내가 화를 낸 원인은, 타인으로부터 질책을 받는 것에 대해 꽤 두려움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누구든 실수도 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미움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인데, 나는 그런 것에 매우 민간하게 반응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자기 반성은 별도의 문제이고, 이 문제보다 더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건 화의 전염이었다. 그리고 그 화의 전염의 진짜 모습은 책임의 전가이며, 자기 변명이었던 것이다.
나는 노인으로부터 질타를 받자마자 그것이 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사하는 집의 주인에게 화를 내었던 것이다.
이런 즉각적인 행동은 내가 가해자였던 사건을 순식간에 내가 피해자인 사건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런 즉각적인 반응은 물론 가해자와 피해자 같은 계산을 하기도 전에 거의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듯 하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심판관(?)을 헷갈리게 만든다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주 나쁜 습관(?)과도 같다.
가만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곳곳에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던 것 같다.
누군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가장 그럴듯한 희생자를 찾아내고, 자신의 책임거리와 희생자의 연관 관계를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은 단지 연결고리였다고 빠져 나가는 것.
어쩌면 이런 식의 무책임한 행동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은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사회를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인간이라는 개채들이 스스로의 판단력을 지니고 있는 이상, 어떤 일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한 마디씩은 각 개체에게 종속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단지 그 마디 마디들의 연관 관계도 고려해야 하기에 전체적인 원인과 결과 가운데 각 마디는 일정 부분만을 담당하고 있음도 고려해야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식구들이 모여서 가족 식사를 하기로 했다.
본가에 미리 도착해서 주차장에 주차를 하려 했는데, 골목 안쪽의 집에 누군가 이사를 하는건지 이삿짐 트럭이 주차장을 막고 한참 작업 중이었다.
차를 잠시 빼달라고 부탁하려고 보았는데, 한참 작업 중인 것이 보여서 번거롭겠다 싶었다.
아버지께서 이 상황을 보시고 차를 조금만 빼달라고 말씀하시려는 것을 내가 그만 두시라고 말렸다.
식사하러 가는 곳이 멀지 않지만, 그곳에도 주차장이 있으니 식사하고 와보면 상황이 달라져 있으리란 임시 대책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동하고 식사를 하고 다시 돌아왔는데, 상황은 더 악화되어 있었다.
큰길에서 집 앞의 주차장까지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이삿짐 차량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고 1차선인 큰길을 막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인도를 가로막고라도 우선 큰길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바로 골목안으로 들어가서 이삿짐 차량과 이사하는 집 주인인듯한 사람에게 부탁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떤 노인이 한손에는 화장지 한더미를 들고 지나가면서 내 차가 인도를 가로질러 막고 있는 것에 매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차를 이렇게 대면 어쩌자는거여'. 혼자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쳐다보며 자신이 화난 것을 알아달라는 듯이...그걸 참지 못하고 나도 변명을 했다. '여기 차들이 가로 막고 있어서 그래요' 공손하지는 않았더랬다. 그러자 그 노인은 가던 방향에서 멈추어 나를 돌아보고 더 큰 소리로 윽박을 질렀다. '그럼 이리로 더 들어와서 세우던가!' 완전 짜증이 났다. '지금 막 왔어요'. 그리고 노인은 씩씩거리며 가던 길로 갔지만, 그 노인이나 나나 화를 가라 앉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곧 골목으로 들어가서 이사하는 집의 집주인인 듯한 사람이 보이길래 화가 난 상태로 말을 했다. '이 차들 좀 어떻게 해주세요!' 집주인은 그냥 멀뚱멀뚱 쳐다 볼 뿐이었다.
결국은 큰길과 인도 사이의 턱에 개구리 주차를 해서 임시변통을 했다.
본가에서 몇시간을 더 머물렀는데, 아버지께서 밖의 상황을 보시고는 차가 다 빠졌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나는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물론 나가서 다시 주차장에 주차해도 또 금방 차를 빼서 나가야 하니 그럴 필요가 없던 것이었지만 그걸 아버지께 설명하면서 그 상황이 떠 오르는 것도 짜증났고, 내 짜증을 알아차리셨는지 계속 이사 차량에 신경을 쓰시는 아버지의 행동도 짜증이 났던 것이다.
나중에 차를 빼서 운전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해보니, 참으로 부끄러운 짓을 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받은 화(노인으로 부터 받은)를 누군가에게(아버지와 이사하는 집 주인)에게 전가했던 것이 참으로 후회스러웠다.
먼저, 나에게 화를 낸 노인의 행동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노인이야 전후 사정을 몰랐던 것이고, 차가 인도를 완전히 막고 있어서 불편하게 돌아가야 한다면 화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내가 공손하지 못하니 더 화가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하는 집의 주인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하무인격이었다. 이사라는 큰 일을 치르고 있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 어떤 불편을 주어도 되는 면죄부는 아닌 것이다.
아마도 내가 화를 낸 원인은, 타인으로부터 질책을 받는 것에 대해 꽤 두려움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누구든 실수도 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미움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인데, 나는 그런 것에 매우 민간하게 반응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자기 반성은 별도의 문제이고, 이 문제보다 더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건 화의 전염이었다. 그리고 그 화의 전염의 진짜 모습은 책임의 전가이며, 자기 변명이었던 것이다.
나는 노인으로부터 질타를 받자마자 그것이 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사하는 집의 주인에게 화를 내었던 것이다.
이런 즉각적인 행동은 내가 가해자였던 사건을 순식간에 내가 피해자인 사건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런 즉각적인 반응은 물론 가해자와 피해자 같은 계산을 하기도 전에 거의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듯 하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심판관(?)을 헷갈리게 만든다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주 나쁜 습관(?)과도 같다.
가만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곳곳에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던 것 같다.
누군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가장 그럴듯한 희생자를 찾아내고, 자신의 책임거리와 희생자의 연관 관계를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은 단지 연결고리였다고 빠져 나가는 것.
어쩌면 이런 식의 무책임한 행동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은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사회를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인간이라는 개채들이 스스로의 판단력을 지니고 있는 이상, 어떤 일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한 마디씩은 각 개체에게 종속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단지 그 마디 마디들의 연관 관계도 고려해야 하기에 전체적인 원인과 결과 가운데 각 마디는 일정 부분만을 담당하고 있음도 고려해야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2017년 11월 3일 금요일
각인(刻印)된 기억
얼마전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 변두리에서 시내로 향하는 차량 안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어찌하다보니 맨 끝의 차량이었고, 빈자리는 없었고, 대략 20~30명의 사람들은 서 있었다.
조금 먼 거리라 준비해 온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었으며, 출입문과 좌석의 끝이 만나는 모서리에 몸을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어느 역에선가 정차하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와중에 눈을 들어 보니 저만치 통로 중간에 젊은 여성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약간 쌀쌀해지긴 했지만 조금은 더워 보이는 흰색 터틀넥의 상의에 검정색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모르긴해도 데이트나 설레이는 약속이 있어보이는 차림새였다. 약간 덥다는 듯이 터틀넥의 목을 당겨서 공기가 드나들게 하던 그녀는 마침 내 맞은편의 모서리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나는 책을 읽었고 열차는 출발했다.
잠시 후에 나를 향하고 모서리에 기대어 있던 그녀가 방향을 슬쩍 바꾸어 출입문쪽으로 몸을 돌리는 듯 하더니 스르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듯 했다. 그리곤 바로 무언가가 내 정강에 쪽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책을 덮고 보니 그녀가 눕듯이 쓰러져서 내 정강이 부근에 어깨와 머리를 두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으니 정신을 잃은 듯 했다. 급히 자리를 비키면서 그녀의 머리를 손을 받쳤다. 그리곤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당황하는 사이에 주위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급한대로 똑바로 눕히기 위해 그녀의 상반신을 통로쪽으로 약간 끌어내서 바닥에 반듯이 눕혔다.
다행히 열차에는 다른 여성분들도 많아서 내가 무리하게 손을 대지는 않아도 되었다. 여성을 부축해서 바로 옆의 좌석에 앉힐 때 즈음에는 다행히도 정신은 돌아온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어디에 전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 연락을 받은 열차 기관사는 다음 정차역에서 한동안 정차한 상태였고, 기관사였을지 역무원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직원분이 와서 다음역에 119 앰뷸런스를 호출해서 대기시키겠다고 설명을 하셨다. 좌석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의 옆에서 돌보시던 아주머니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전해 듣고는 "이제 괜찮대요. 119를 부르지 않으셔도 된대요"라고 직원분에게 전달을 했다.
정말 괜찮은걸까?
좌석에 앉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힘없이 무릎위 가방에 올려 놓은 손이 유난히가 하얗게 보였다. 어느덧 몇개 역이 지나고 그녀 옆에 있던 아주머니도 그녀를 두고 내렸으며, 나도 내릴 때가 되었다.
차량 안에는 그녀의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계속 줄어들었고, 이 상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많이 붐비게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열차에서 내리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좀 어떤 걸까, 누군가에게 연락 좀 하라고 말해 줘야 하는게 아닐까, 지금 가는 방향은 집일까 약속장소일까, 내가 말을 거는 것도 이상한걸까...
그리고 약속으로 만난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해 주기도 했고, 다음 날에 또 만난 사람들에게도 얘기를 해 주었지만, 정작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던 건 아주 다른 무엇이었고, 나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 얘기해 주지도 못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이 상황은 계속 내 머리속에 남아 있었다.
왜 그게 머리속에 계속 남아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 상황은 사진처럼 머리에 박혀 있고, 그 당시의, 특히 그녀가 힘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에서 내가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의 마음은 뭐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슴속에 둥그런 쇠공 같은 것이 박힌 듯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대체 이게 무엇인걸까 고민을 하면서, 연상되어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등교하던 버스 안에서 우연히 목격했던 치한. 그 치한은 우산의 손잡이를 아래로 내리고 손잡이의 둥근 고리를 이용해서 여학생의 치마를 올리던 장면. 그 불의와 관음의 복합심리.
중학교시절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보게된 청불영화의 장면. 세명의 남자 친구 가운데 날라리같은 학생이 주인공의 짝사랑의 순결을 빼앗는 장면의 기억과 그 우울감.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같은 동네의 삼형제가 아버지거라며 보여준 음란서적의 믿을 수 없는 사진을 본 기억.
어린 시절에 비가 내리면, 비를 맞으며 물이 고인 웅덩이에 신발 신은 채로 첨벙거리던 느낌.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와 옷을 다 벗고 아랫목에 이불 속에 들어가 있던 느낌.
재수하던 시절, 우연히 보게 된 여학생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은 못 걸지만 항상 그녀를 보기 위해 기다리던 지하철 역사의 기억.
이상한 기억, 충격적인 기억, 처음 느껴본 느낌...
그러고 보니 대부분 성(性)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이었군.
나는 아무래도 성(性)적인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한 사람인거였군.
그래서 그것들이 나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을 기억들로 각인되는 것이었나보군.
그러면 그 지하철의 여성에 대해서도 성적인 무언가를 느꼈다는 말인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단순히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녀를 도와주어야 하는가 그러지 않아도 되는가라는 문제였다면, 상황을 조금 바꾸어서 그게 남자였다면, 뇌리에 깊이 남지 않았을 터.
토요일 오후, 변두리에서 시내로 향하는 차량 안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어찌하다보니 맨 끝의 차량이었고, 빈자리는 없었고, 대략 20~30명의 사람들은 서 있었다.
조금 먼 거리라 준비해 온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었으며, 출입문과 좌석의 끝이 만나는 모서리에 몸을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어느 역에선가 정차하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와중에 눈을 들어 보니 저만치 통로 중간에 젊은 여성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약간 쌀쌀해지긴 했지만 조금은 더워 보이는 흰색 터틀넥의 상의에 검정색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모르긴해도 데이트나 설레이는 약속이 있어보이는 차림새였다. 약간 덥다는 듯이 터틀넥의 목을 당겨서 공기가 드나들게 하던 그녀는 마침 내 맞은편의 모서리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나는 책을 읽었고 열차는 출발했다.
잠시 후에 나를 향하고 모서리에 기대어 있던 그녀가 방향을 슬쩍 바꾸어 출입문쪽으로 몸을 돌리는 듯 하더니 스르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듯 했다. 그리곤 바로 무언가가 내 정강에 쪽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책을 덮고 보니 그녀가 눕듯이 쓰러져서 내 정강이 부근에 어깨와 머리를 두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으니 정신을 잃은 듯 했다. 급히 자리를 비키면서 그녀의 머리를 손을 받쳤다. 그리곤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당황하는 사이에 주위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급한대로 똑바로 눕히기 위해 그녀의 상반신을 통로쪽으로 약간 끌어내서 바닥에 반듯이 눕혔다.
다행히 열차에는 다른 여성분들도 많아서 내가 무리하게 손을 대지는 않아도 되었다. 여성을 부축해서 바로 옆의 좌석에 앉힐 때 즈음에는 다행히도 정신은 돌아온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어디에 전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 연락을 받은 열차 기관사는 다음 정차역에서 한동안 정차한 상태였고, 기관사였을지 역무원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직원분이 와서 다음역에 119 앰뷸런스를 호출해서 대기시키겠다고 설명을 하셨다. 좌석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의 옆에서 돌보시던 아주머니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전해 듣고는 "이제 괜찮대요. 119를 부르지 않으셔도 된대요"라고 직원분에게 전달을 했다.
정말 괜찮은걸까?
좌석에 앉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힘없이 무릎위 가방에 올려 놓은 손이 유난히가 하얗게 보였다. 어느덧 몇개 역이 지나고 그녀 옆에 있던 아주머니도 그녀를 두고 내렸으며, 나도 내릴 때가 되었다.
차량 안에는 그녀의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계속 줄어들었고, 이 상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많이 붐비게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열차에서 내리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좀 어떤 걸까, 누군가에게 연락 좀 하라고 말해 줘야 하는게 아닐까, 지금 가는 방향은 집일까 약속장소일까, 내가 말을 거는 것도 이상한걸까...
그리고 약속으로 만난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해 주기도 했고, 다음 날에 또 만난 사람들에게도 얘기를 해 주었지만, 정작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던 건 아주 다른 무엇이었고, 나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 얘기해 주지도 못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이 상황은 계속 내 머리속에 남아 있었다.
왜 그게 머리속에 계속 남아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 상황은 사진처럼 머리에 박혀 있고, 그 당시의, 특히 그녀가 힘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에서 내가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의 마음은 뭐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슴속에 둥그런 쇠공 같은 것이 박힌 듯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대체 이게 무엇인걸까 고민을 하면서, 연상되어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등교하던 버스 안에서 우연히 목격했던 치한. 그 치한은 우산의 손잡이를 아래로 내리고 손잡이의 둥근 고리를 이용해서 여학생의 치마를 올리던 장면. 그 불의와 관음의 복합심리.
중학교시절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보게된 청불영화의 장면. 세명의 남자 친구 가운데 날라리같은 학생이 주인공의 짝사랑의 순결을 빼앗는 장면의 기억과 그 우울감.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같은 동네의 삼형제가 아버지거라며 보여준 음란서적의 믿을 수 없는 사진을 본 기억.
어린 시절에 비가 내리면, 비를 맞으며 물이 고인 웅덩이에 신발 신은 채로 첨벙거리던 느낌.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와 옷을 다 벗고 아랫목에 이불 속에 들어가 있던 느낌.
재수하던 시절, 우연히 보게 된 여학생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은 못 걸지만 항상 그녀를 보기 위해 기다리던 지하철 역사의 기억.
이상한 기억, 충격적인 기억, 처음 느껴본 느낌...
그러고 보니 대부분 성(性)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이었군.
나는 아무래도 성(性)적인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한 사람인거였군.
그래서 그것들이 나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을 기억들로 각인되는 것이었나보군.
그러면 그 지하철의 여성에 대해서도 성적인 무언가를 느꼈다는 말인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단순히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녀를 도와주어야 하는가 그러지 않아도 되는가라는 문제였다면, 상황을 조금 바꾸어서 그게 남자였다면, 뇌리에 깊이 남지 않았을 터.
2017년 9월 11일 월요일
승자독식, 승자는 옳다?
흔히들 역사는 승자들의 편이라고 한다.
그 시대를 이끈 승자들은 종종 논란거리마저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고, 이를 대중에게 충분하게 혹은 의도적으로 설명함으로써 타당성을 부여받기도 한다.
이에 반대했던 패자는 최소한의 변론마저 빼앗겨버리고 악(惡)으로 규정되어 역사의 교훈으로만 남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혁명이나 반란, 대규모의 전쟁을 통해 이런 과정이 반복되어 왔는데, 이에 대한 반대론자들이 꾸준히 나오기는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인식에 각인되어 있는 이상한 논리가 하나 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천명을 거스르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순리와 천리를 따랐기에 승자들이 승리한 것이며, 그들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조차 지극히 옳은 것이고, 마땅한 천명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런 논리가 맞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시장 경쟁 체제를 보면, 전체의 규모가 매우 크기 때문에 누군가의 욕망만으로 시장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오래된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현재 사회에서의 양상을 보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면서 부의 편중 현상이 점점 늘어가는 추세이다.
이런 현상은 전체 시장의 매우 작은 부분에서부터 전체적인 부분에까지 고르게 나타나고 있는데, 마치 프랙탈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라면이나 빵과 같은 일상적인 음식에서도 시장 지배력이 높아가는 브랜드가 있으며, 그들의 시장 지배력이 언젠가는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게 될 듯이 보이곤 한다.
자동차, 반도체, 전자제품,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인 용품에서 큰 금액의 자산에까지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금융기관의 브랜드나 실물 화폐나 가상화폐의 가치에서도 이런 양상이 나타나며, 이런 현상은 주식시장으로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작은 기업으로 시작한 업체들은 생존이나 작은 성공을 꿈꿈며 시작하면서, 시장에서 존재하는 게임의 법칙을 따라야만 한다.
그것이 관습적인 업계의 관행일 수도 있으며,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법칙을 준수하며 성장하던 기업은 어느 순간 게임의 법칙을 만들 수 있는 지배력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칙은, 자신이 처음 사업을 시작하면서 느꼈던 소규모 업체의 어려움을 제거하기 위한 법칙이 아니다.
이제 자신의 지위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자신에게 도전하는 경쟁기업을 견제하기 위한 법칙이기 마련이다.
이제 무엇인가 새로 시작하려 한다면,
그 세상이 이상적이고 아름다울거라는 환상은 거두어야 할 것이다.
불리하지만 그곳의 법칙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법칙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그것이 옳기 때문에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언젠가는 바뀔 수 있으며 그건 게임의 지배자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
비트코인을 위시한 가상화폐가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그들의 시세는 미친듯이 폭발하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극과 극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미 가상화폐를 보유한 사람은 이것이 새로운 대체 통화로서의 권리를 획득하여 기존의 부의 형태마저 바뀌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미처 가상화폐를 보유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이것을 사상누각이나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며 애써 무시하려 한다.
과연 어느쪽이 옳은 것일까?
지금이라도 투자를 해 보려는 사람은 깊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대체 가상화폐의 진면목은 무엇일까, 그것의 미래는 어찌될 것인가?
2)
북한의 젊은 독재자 김정은의 행보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ICBM, SLBM, 수소핵 융합 폭발 시험 등을 해 나가며 끊임없이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어째서 북한이 미국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북한을 옹호하는 나라는 점점 줄어들어 이젠 거의 없다시피 하다.
마지막 중국과 러시아의 비호를 받을 수 있을지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전세계 모든 국가를 적으로 돌리고 있는 셈이다.
자국민들에게만 지지를 받는 이런 행동은 과연 옳은 것인가?
3)
박근혜 전대통령의 탄핵 이후에 새로운 지도자가 된 문재인 대통령.
그가 시도하는 정책들은 후보 시절의 언행에 비투어 볼 때 비교적 강경해 보인다.
대기업에 대한 제재, 중소기업 보호,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부동산 투기 근절 대책, 사회 곳곳의 적폐 청산...
이런 정책들은 대부분 힘없는 다수를 위하고, 힘을 가진 소수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정책들이었다.
그리고 갖가지 정책들이 나오면서, 양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가장 큰 것은 여성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남성들이 양보해야 하는 것이 늘어나는 것이고, 북한의 도발로 인한 사드(THAAD)의 배치로 인해 양보를 해야 하는 특정 지역의 주민들과 기업들이 중국으로부터 받는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문제 등이 있다.
일부에선 원자력 발전소의 공사 중단에 따른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일까?
단지 많은 사람이 원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소소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시될 수 있는 것일까?
앞서 제시한 3가지 상황에 대해 사람들은 각자 어떤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쪽이 옳은지를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옳은 방법은 찾기 어렵다.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류는 과연 잘 해 온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애써 자위하는 것일까?
우리는 선택의 순간마다 아주 잘못된 선택을 했던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나마 이정도라도....라며 자기 만족에 빠져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먼 훗날, 어떤 선택에 대한 극적인 인과 관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우리들 중 누구도 지금의 선택이 옳은지 아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단지, 지금 어떤 선택을 했다면, 그 선택이 옳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면 그것은 옳은 것이 되는 것이다.
옳기 때문에 성공하고 성취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고 승리하고 이루어냈기 때문에 그것이 옳아지는 것이다.
그 시대를 이끈 승자들은 종종 논란거리마저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고, 이를 대중에게 충분하게 혹은 의도적으로 설명함으로써 타당성을 부여받기도 한다.
이에 반대했던 패자는 최소한의 변론마저 빼앗겨버리고 악(惡)으로 규정되어 역사의 교훈으로만 남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혁명이나 반란, 대규모의 전쟁을 통해 이런 과정이 반복되어 왔는데, 이에 대한 반대론자들이 꾸준히 나오기는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인식에 각인되어 있는 이상한 논리가 하나 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천명을 거스르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순리와 천리를 따랐기에 승자들이 승리한 것이며, 그들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조차 지극히 옳은 것이고, 마땅한 천명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런 논리가 맞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시장 경쟁 체제를 보면, 전체의 규모가 매우 크기 때문에 누군가의 욕망만으로 시장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오래된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현재 사회에서의 양상을 보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면서 부의 편중 현상이 점점 늘어가는 추세이다.
이런 현상은 전체 시장의 매우 작은 부분에서부터 전체적인 부분에까지 고르게 나타나고 있는데, 마치 프랙탈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라면이나 빵과 같은 일상적인 음식에서도 시장 지배력이 높아가는 브랜드가 있으며, 그들의 시장 지배력이 언젠가는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게 될 듯이 보이곤 한다.
자동차, 반도체, 전자제품,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인 용품에서 큰 금액의 자산에까지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금융기관의 브랜드나 실물 화폐나 가상화폐의 가치에서도 이런 양상이 나타나며, 이런 현상은 주식시장으로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작은 기업으로 시작한 업체들은 생존이나 작은 성공을 꿈꿈며 시작하면서, 시장에서 존재하는 게임의 법칙을 따라야만 한다.
그것이 관습적인 업계의 관행일 수도 있으며,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법칙을 준수하며 성장하던 기업은 어느 순간 게임의 법칙을 만들 수 있는 지배력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칙은, 자신이 처음 사업을 시작하면서 느꼈던 소규모 업체의 어려움을 제거하기 위한 법칙이 아니다.
이제 자신의 지위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자신에게 도전하는 경쟁기업을 견제하기 위한 법칙이기 마련이다.
이제 무엇인가 새로 시작하려 한다면,
그 세상이 이상적이고 아름다울거라는 환상은 거두어야 할 것이다.
불리하지만 그곳의 법칙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법칙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그것이 옳기 때문에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언젠가는 바뀔 수 있으며 그건 게임의 지배자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
비트코인을 위시한 가상화폐가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그들의 시세는 미친듯이 폭발하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극과 극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미 가상화폐를 보유한 사람은 이것이 새로운 대체 통화로서의 권리를 획득하여 기존의 부의 형태마저 바뀌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미처 가상화폐를 보유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이것을 사상누각이나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며 애써 무시하려 한다.
과연 어느쪽이 옳은 것일까?
지금이라도 투자를 해 보려는 사람은 깊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대체 가상화폐의 진면목은 무엇일까, 그것의 미래는 어찌될 것인가?
2)
북한의 젊은 독재자 김정은의 행보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ICBM, SLBM, 수소핵 융합 폭발 시험 등을 해 나가며 끊임없이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어째서 북한이 미국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북한을 옹호하는 나라는 점점 줄어들어 이젠 거의 없다시피 하다.
마지막 중국과 러시아의 비호를 받을 수 있을지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전세계 모든 국가를 적으로 돌리고 있는 셈이다.
자국민들에게만 지지를 받는 이런 행동은 과연 옳은 것인가?
3)
박근혜 전대통령의 탄핵 이후에 새로운 지도자가 된 문재인 대통령.
그가 시도하는 정책들은 후보 시절의 언행에 비투어 볼 때 비교적 강경해 보인다.
대기업에 대한 제재, 중소기업 보호,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부동산 투기 근절 대책, 사회 곳곳의 적폐 청산...
이런 정책들은 대부분 힘없는 다수를 위하고, 힘을 가진 소수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정책들이었다.
그리고 갖가지 정책들이 나오면서, 양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가장 큰 것은 여성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남성들이 양보해야 하는 것이 늘어나는 것이고, 북한의 도발로 인한 사드(THAAD)의 배치로 인해 양보를 해야 하는 특정 지역의 주민들과 기업들이 중국으로부터 받는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문제 등이 있다.
일부에선 원자력 발전소의 공사 중단에 따른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일까?
단지 많은 사람이 원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소소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시될 수 있는 것일까?
앞서 제시한 3가지 상황에 대해 사람들은 각자 어떤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쪽이 옳은지를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옳은 방법은 찾기 어렵다.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류는 과연 잘 해 온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애써 자위하는 것일까?
우리는 선택의 순간마다 아주 잘못된 선택을 했던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나마 이정도라도....라며 자기 만족에 빠져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먼 훗날, 어떤 선택에 대한 극적인 인과 관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우리들 중 누구도 지금의 선택이 옳은지 아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단지, 지금 어떤 선택을 했다면, 그 선택이 옳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면 그것은 옳은 것이 되는 것이다.
옳기 때문에 성공하고 성취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고 승리하고 이루어냈기 때문에 그것이 옳아지는 것이다.
2017년 8월 20일 일요일
우리는 과연 바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앞선 포스팅이 뭔가 더 거창하고, 스케일이 크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쓴 글이라 뜬금 없는 얘기이거나 별 고민이 되지 않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시대를 거슬러 갔다가 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살지 않았던 시대를 상상해야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단지 좀 오래(?) 살다보니, 한 삶의 생애 동안에도 대중의 가치관 혹은 규범이 꽤나 극적으로 변화하는 걸 겪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고민을 해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서도 일상의 습관적인 행동양식과 대중적인 규범이 충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젊은 여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과 이에 대한 사회적 규범의 충돌
- 개의 식용에 대한 관습관 대중적 여론의 충돌
- 경제적인 효율성 측면의 원자력과 환경에 대한 우려의 충돌
이와 같은 문제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하게 되는 대중적인 딜레마일 것이다.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바른 길"을 외면하는 당위성을 주장하곤 한다.
나는 이 포스팅에서 "바른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겠다.
그것이 정말 바른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결정할 몫이다.
그리고 그 "바른 길"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도 않겠다.
그건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주장은 또 하나의 소수 의견일 수 있다.
단지, "바른 길"에 동의하지만 그 길을 갈 수 없는 우리의 현실적인 딜레마를 보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확장해 보면, 과연 어디까지 선악의 구분이 가능한지도 가늠할 수 있으며, 과거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타인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이 법의 판단에 대한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법의 효용성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단지 법이 선악의 판단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제공하거나, 선악에 대한 선언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 것 뿐이다.)
잠깐만 낮 뜨거운 우리의 모순을 보자.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노출 된다.
이 과정에는 각자의 욕망이 톱니바퀴처럼 맞아 떨어지는 욕망의 굴레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인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꿈꾸는 젊은 여성은, 미디어 담당자의 과도한 요구에도 순순히 응한다.
미디어의 담당자들은 많은 대중의 관심과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젊은 여성의 성적인 매력을 한껏 부각시켜 노골적으로 시청자들에게 보여준다.
성에 목마른 남자들은 사회적 규범이나 윤리적인 문제들을 외면하고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노골적인 방송에 환호한다.
비슷한 사례는 남자와 여자를 바꾸어서도 존재하지 않나 싶다.
이 경우의 "바른 길"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나타나는 문제일까?
"바른 길"이 바른 길이 아니었던 것일까?
우리 사회가 여전히 성에 대해 폐쇄적이어서, 개인의 성적인 욕구에 대한 사회적인 규범을 만들지 못했던 탓일까?
만약 언젠가의 미래에, 현재의 이와 같은 사회적인 모습을 "미개"하거나 "야만"스럽게 생각하는 때가 온다면, 우리 대다수는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걸까?
아마도 그 때가 되면, 지금의 대다수였던 사람들은 여러가지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의 사람들은 다시 되물을 것이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도 그것이 옳지 않았던 것 아니냐'고
'옳지 않음을 알고도 묵인하거나 오히려 반대쪽으로 동조하지 않았냐'고
어쩌면 우리가 과거의 시대에 있었던 과오에 대한 질문이 있다면,
이와 같은 프레임으로도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시대를 거슬러 갔다가 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살지 않았던 시대를 상상해야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단지 좀 오래(?) 살다보니, 한 삶의 생애 동안에도 대중의 가치관 혹은 규범이 꽤나 극적으로 변화하는 걸 겪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고민을 해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서도 일상의 습관적인 행동양식과 대중적인 규범이 충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젊은 여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과 이에 대한 사회적 규범의 충돌
- 개의 식용에 대한 관습관 대중적 여론의 충돌
- 경제적인 효율성 측면의 원자력과 환경에 대한 우려의 충돌
이와 같은 문제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하게 되는 대중적인 딜레마일 것이다.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바른 길"을 외면하는 당위성을 주장하곤 한다.
나는 이 포스팅에서 "바른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겠다.
그것이 정말 바른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결정할 몫이다.
그리고 그 "바른 길"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도 않겠다.
그건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주장은 또 하나의 소수 의견일 수 있다.
단지, "바른 길"에 동의하지만 그 길을 갈 수 없는 우리의 현실적인 딜레마를 보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확장해 보면, 과연 어디까지 선악의 구분이 가능한지도 가늠할 수 있으며, 과거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타인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이 법의 판단에 대한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법의 효용성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단지 법이 선악의 판단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제공하거나, 선악에 대한 선언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 것 뿐이다.)
잠깐만 낮 뜨거운 우리의 모순을 보자.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노출 된다.
이 과정에는 각자의 욕망이 톱니바퀴처럼 맞아 떨어지는 욕망의 굴레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인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꿈꾸는 젊은 여성은, 미디어 담당자의 과도한 요구에도 순순히 응한다.
미디어의 담당자들은 많은 대중의 관심과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젊은 여성의 성적인 매력을 한껏 부각시켜 노골적으로 시청자들에게 보여준다.
성에 목마른 남자들은 사회적 규범이나 윤리적인 문제들을 외면하고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노골적인 방송에 환호한다.
비슷한 사례는 남자와 여자를 바꾸어서도 존재하지 않나 싶다.
이 경우의 "바른 길"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나타나는 문제일까?
"바른 길"이 바른 길이 아니었던 것일까?
우리 사회가 여전히 성에 대해 폐쇄적이어서, 개인의 성적인 욕구에 대한 사회적인 규범을 만들지 못했던 탓일까?
만약 언젠가의 미래에, 현재의 이와 같은 사회적인 모습을 "미개"하거나 "야만"스럽게 생각하는 때가 온다면, 우리 대다수는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걸까?
아마도 그 때가 되면, 지금의 대다수였던 사람들은 여러가지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의 사람들은 다시 되물을 것이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도 그것이 옳지 않았던 것 아니냐'고
'옳지 않음을 알고도 묵인하거나 오히려 반대쪽으로 동조하지 않았냐'고
어쩌면 우리가 과거의 시대에 있었던 과오에 대한 질문이 있다면,
이와 같은 프레임으로도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과연 바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 되었고, 선거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이게 지난 5월의 일이니 3개월쯤 전의 일이다.
과거의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쪼개지고 야당이 되었으며, 더불어 민주당이 여당이 되었다.
새 정부가 부르짖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최근까지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적페청산'이 아닌가 싶다.
청와대의 직접적인 개입이야 없겠지만, 각 정부 기관들과 기업, 단체들은 소위 '알아서 기는' 모양새를 보여준다.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 최순실, 이재용 등의 뇌물 수수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며, 새로이 비리가 드러나 고소가 되는 사례도 적잖다.
대기업들이 갑질이나, 짬짜미에 대한 공정위의 칼날도 매섭고, 이에 대한 법원이 판결도 예전과는 온도차가 많이 느껴지고 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청와대와 여당이 날마다 들고 나와서 청산을 주장하는 부분들이 많아지면서, 청산의 대상이 되는 사람도 많아지고, 일찌감치 국외로 도피한 사례들도 보도가 되곤 했다.
어쩌면 이런 청산이라는 것 자체가 구성원 대다수가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어차피 절대 선이나 절대 악은 없으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그리고 판단의 주체에 따라 선악의 기준은 달라진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게 대의 민주주의이기도 할 것이다.
(다수의 횡포, 소수의 억울함, 다수의 무심함과 소수의 절박함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이건 너무 긴 이야기가 되겠으니 여기에선 피하기로 하자.)
며칠전 광복절을 맞아 인터넷 상에서는 한일합방, 일제 침략, 항일 운동, 독립 투사,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강제 징용 노동자 등에 대한 기사와 얘기들이 많이 나왔다.
일부는 들었던 얘기들도 있고, 일부는 새로운 얘기들도 있고...
청와대의 적폐청산이라는 기치와 맞아 떨어지게 친일파 청산에 대한 주장도 다시 나왔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과연 저 친일파라는 사람들은 정말 나쁜 사람들 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친일파에 대한 반민족적인 행위들을 듣고, 그들에 대한 증오심을 부글부글 끓어 오르게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친일파라는 단어 자체는 더 이상의 논리적인 사고를 차단해버리고 그저 증오심만 드러내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예는 어떨까?
조선 말기, 구한말기에 총명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관직에 등용되어 맡은 바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셈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충실했고, 출세의 길을 탐하지 않는 그런 관료였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한반도는 세계의 열강들이 모여들어 부산하고 어수선하다.
왕실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청정과 섭정으로 어지럽다.
때로는 청나라가, 러시아가, 일본이 세력을 키우며 나라를 좌지 우지한다.
하지만 이 관료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는 한, 누가 권력을 잡든, 누가 지시를 하던 묵묵히 그에 따라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
이런 사람이 후세에 친일파라고 낙인이 찍힌다면, 그는 과연 어떤 변명을 하고 싶을까?
일본제국의 앞잡이로 충성하며 득세하고 치부한 몇몇의 친일파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보다는 약한 수준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판단이 어려워진다.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을 하거나 독립군을 지원하면서 한편으로는 친일을 했던 증거도 나온다.
심지어는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철저했다는 만해 한용운 선생은 조선의 불교를 유신하기 위한 방안 가운데 하나로 승려의 혼인을 허가해 달라는 탄원을 조선 총독부에 보내서 지탄을 받기도 했다.
아마도 친일을 했다고 의심 받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나라의 일을 맡을 만한 능력이 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단한 민족적 사명 이전에 자연인, 생활인이었고, 한 가장의 가장이었을 것이다. 대단히 반민족적인 일이라고 (그 당시에도) 느낄만한 일을 해야했던 사람은 그 중에서도 일부였을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는 자신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었다거나, 그 지시를 누가 내렸든 여전히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느낄만 하지 않았을까.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측근 참모들은 박 전 대통령의 명령에 대해 얼마나 의심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박 전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업무 지시를 할 때에는 나름의 명분과 타당성을 제시하고 난 후에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그런 프레임이 구축된다면, 더욱이 자신의 상사와 공동 운명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대체 얼마만큼 선악에 대해 숙고할 여유가 있는걸까?
가까운 친구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조직에서 일을 하다보면 각자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상사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이 맞다고.
왜냐하면 상사들이 그 직책에 있는 것은 그들이 결과에 대해 책임 질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상당히 옳은 얘기라 생각했다.
최근의 대기업 회장의 갑질, 군대 공관병에 대한 갑질,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나 성희롱, 반려동물에 대한 보호법 등을 보면 그 판단 기준이 불과 십수년전에 비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느끼게 된다.
방송에서 논란이 되는 사건들을 보면, 내가 과거에 아무렇지 않게 했던 일이 요즘이라면 신상이 밝혀져서 낙인이 찍혀야 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될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나는 언제나 바른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현재의 행동이 미래에도 지탄받지 않을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게 지난 5월의 일이니 3개월쯤 전의 일이다.
과거의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쪼개지고 야당이 되었으며, 더불어 민주당이 여당이 되었다.
새 정부가 부르짖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최근까지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적페청산'이 아닌가 싶다.
청와대의 직접적인 개입이야 없겠지만, 각 정부 기관들과 기업, 단체들은 소위 '알아서 기는' 모양새를 보여준다.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 최순실, 이재용 등의 뇌물 수수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며, 새로이 비리가 드러나 고소가 되는 사례도 적잖다.
대기업들이 갑질이나, 짬짜미에 대한 공정위의 칼날도 매섭고, 이에 대한 법원이 판결도 예전과는 온도차가 많이 느껴지고 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청와대와 여당이 날마다 들고 나와서 청산을 주장하는 부분들이 많아지면서, 청산의 대상이 되는 사람도 많아지고, 일찌감치 국외로 도피한 사례들도 보도가 되곤 했다.
어쩌면 이런 청산이라는 것 자체가 구성원 대다수가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어차피 절대 선이나 절대 악은 없으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그리고 판단의 주체에 따라 선악의 기준은 달라진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게 대의 민주주의이기도 할 것이다.
(다수의 횡포, 소수의 억울함, 다수의 무심함과 소수의 절박함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이건 너무 긴 이야기가 되겠으니 여기에선 피하기로 하자.)
며칠전 광복절을 맞아 인터넷 상에서는 한일합방, 일제 침략, 항일 운동, 독립 투사,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강제 징용 노동자 등에 대한 기사와 얘기들이 많이 나왔다.
일부는 들었던 얘기들도 있고, 일부는 새로운 얘기들도 있고...
청와대의 적폐청산이라는 기치와 맞아 떨어지게 친일파 청산에 대한 주장도 다시 나왔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과연 저 친일파라는 사람들은 정말 나쁜 사람들 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친일파에 대한 반민족적인 행위들을 듣고, 그들에 대한 증오심을 부글부글 끓어 오르게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친일파라는 단어 자체는 더 이상의 논리적인 사고를 차단해버리고 그저 증오심만 드러내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예는 어떨까?
조선 말기, 구한말기에 총명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관직에 등용되어 맡은 바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셈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충실했고, 출세의 길을 탐하지 않는 그런 관료였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한반도는 세계의 열강들이 모여들어 부산하고 어수선하다.
왕실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청정과 섭정으로 어지럽다.
때로는 청나라가, 러시아가, 일본이 세력을 키우며 나라를 좌지 우지한다.
하지만 이 관료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는 한, 누가 권력을 잡든, 누가 지시를 하던 묵묵히 그에 따라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
이런 사람이 후세에 친일파라고 낙인이 찍힌다면, 그는 과연 어떤 변명을 하고 싶을까?
일본제국의 앞잡이로 충성하며 득세하고 치부한 몇몇의 친일파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보다는 약한 수준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판단이 어려워진다.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을 하거나 독립군을 지원하면서 한편으로는 친일을 했던 증거도 나온다.
심지어는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철저했다는 만해 한용운 선생은 조선의 불교를 유신하기 위한 방안 가운데 하나로 승려의 혼인을 허가해 달라는 탄원을 조선 총독부에 보내서 지탄을 받기도 했다.
아마도 친일을 했다고 의심 받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나라의 일을 맡을 만한 능력이 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단한 민족적 사명 이전에 자연인, 생활인이었고, 한 가장의 가장이었을 것이다. 대단히 반민족적인 일이라고 (그 당시에도) 느낄만한 일을 해야했던 사람은 그 중에서도 일부였을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는 자신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었다거나, 그 지시를 누가 내렸든 여전히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느낄만 하지 않았을까.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측근 참모들은 박 전 대통령의 명령에 대해 얼마나 의심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박 전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업무 지시를 할 때에는 나름의 명분과 타당성을 제시하고 난 후에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그런 프레임이 구축된다면, 더욱이 자신의 상사와 공동 운명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대체 얼마만큼 선악에 대해 숙고할 여유가 있는걸까?
가까운 친구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조직에서 일을 하다보면 각자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상사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이 맞다고.
왜냐하면 상사들이 그 직책에 있는 것은 그들이 결과에 대해 책임 질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상당히 옳은 얘기라 생각했다.
최근의 대기업 회장의 갑질, 군대 공관병에 대한 갑질,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나 성희롱, 반려동물에 대한 보호법 등을 보면 그 판단 기준이 불과 십수년전에 비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느끼게 된다.
방송에서 논란이 되는 사건들을 보면, 내가 과거에 아무렇지 않게 했던 일이 요즘이라면 신상이 밝혀져서 낙인이 찍혀야 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될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나는 언제나 바른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현재의 행동이 미래에도 지탄받지 않을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2017년 8월 11일 금요일
언짢은 말을 들었을 경우의 대처
일반인은 화를 내고 상대방을 역으로 공격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인간 관계에 경험이 많은 사람은 상대방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를 찾으려 한다.
자신을 알고자 원하는 사람은 왜 자신이 언짢게 느끼는지를 생각해 본다.
인간 관계에 경험이 많은 사람은 상대방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를 찾으려 한다.
자신을 알고자 원하는 사람은 왜 자신이 언짢게 느끼는지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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