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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9일 화요일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 vs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어른의 두려움 vs 아이의 두려움

전자는 대상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대상 혹은 사건에서 파생될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기도 한다.

뜨겁게 팔팔 끓고 있는 주전자를 보면서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다.
그건 주전자나 물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뜨겁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다.
만약 뜨거운 물이나 주전자에 데었을 때의 사태, 쉽게 가시지 않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크게 데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일 수록, 화상으로 인한 통증에 유난히 민감한 사람일 수록 더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니, 내재화된 혹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신의 약점인 셈이다.
누군가는 추운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니 말이다.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런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이 있을까?
두려움을 이겨낸다는 것은,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만 한다.
'설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야'라는 생각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하나 극복해 내는 힘든 과정일 것이며, 불을 이겨내고 담금질과 연마를 견뎌내어 강철이 되어가는 그런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
각오와 다짐을 하고, 용기를 내어 나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뀌는 힘든 여정을 견뎌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후자의 경우는 두려움의 한계가 없다.
무한대의 두려움이 가능하다.
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용기"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 용기는 그저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을 먹는 순간의 일이며, 그것으로 완성된다. 그 후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제 슬쩍 들춰 본 그 대상의 실체를 접했을 때 겪게되는 인상과 느낌, 경험은 그 자신에게 내재화 될 것이다.
시간차이가 있겠지만, 어쩌면 순간적으로 그 두려움은 바로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 = 어른의 두려움으로 치환되어 가는지도 모르겠다.

2018년 12월 3일 월요일

어느덧 12월...

아, 벌써 올해의 마지막 12월이란 말인가?

라는 식으로 얘기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올해도 별 탈 없이 한해를 마무리 할 수 있겠네.


사실 지난 몇년간은 비슷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그럴거라 생각하는데,

내가 하는 일은 그저 걱정하고, 혹시나 해서 조금이라도 준비하려고 하고, 아니면 계획이라도 세워보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귀찮아서, 단지 걱정하고, 걱정하고, 걱정하다가 끝난다.



언젠가의 경험으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의 곤란함과 스트레스는 정말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다.

그런데, 그 방법을 알고 있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일은 쉽게 해결이 되며, 나에게는 아무런 스트레스도, 정신적인 데미지도 없게 된다.

대체, 그건 뭘 의미하는걸까?
우리가 종종 겪는 황당함, 허둥지둥, 극도의 스트레스, 주저 앉아 울고 싶은 그런 상황들이, 어찌 보면 그럴만한 일도 못 되는 것 아닐까.

대부분 현실에서 부딪히게 되는 일들은 대부분 누군가는 이미 겪은 일이며,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아주 쉽사리 건널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걱정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고 한다.
그 말이 조금은 예언처럼 들리기도 하고, 누군가 나의 걱정을 들여다 보고 있는 듯이 느끼게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무수히 많다.
그 모든 일들에 내가 관심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일은 내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며, 그 일이 벌어지기만 하면 내가 놓칠 리 없는 조건에 놓인 것이다.
문제는 단지 시간일 뿐이었던 것이고, 결국에 그 일이 일어나면 우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결국은 일어나고야 말았어."

하지만, 내가 관심을 두지 않는 순간부터, 그 일은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내 인생에서 떨어져 나간다.

만약 무언가가 나를 걱정하게 만들고, 그게 나의 발목에 매달린 족쇄와 같다면,...

그래서 그 족쇄를 풀어버리고 싶다면, 관심을 두지 않으면 된다.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면, 앞서 얘기한 것처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미리 방법을 전수받고, 가능한 예방책을 세워둔다면,
설령 족쇄를 풀지는 못할지라고, 훨씬 더 가벼워지지는 않겠는가?

2018년 11월 28일 수요일

나는 사람이 싫다.

사람들과 지내는 것이 쉽지 않다.

함께 지내면 언제나 신경쓰이고 조심스럽다.

나만 그렇지 않고 상대방도 그러려니 싶지만, 그러면 왜 함께 지내야 하지?
쌍방이 불편하니 따로 사는게 좋지 않은가?


왜 그럴까?

문제가 없다면, 질문도 없었겠지만, 혼자 살기에 걸리는 문제는 아주 많다.

꼭 한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사이뿐이 아니라, 같은 직장, 같은 동네라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명절이라 만나고, 제사라 만나고, 생일이라 만나는 사람들.
누구의 아들 딸이, 누구의 아버지 어머니가, 누구의 남편 아내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백일이나 돐이고 환갑이고 아프고 돌아가시고...

다 싫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상호부조의 미덕(?)을 위해 거래하듯 만나는 것도 싫고,
알아도 서먹서먹해서 싫고,
너무 잘 아는데, 아는 사람이 그런다고 오해하고 미워해서 싫다.



세상에 좋은 사람도 많다.
하지만, 부처님 예수님도 싫어하는 게 있으며, 노여워할 일이 있는 법이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란 법도 없으니, 하물며 일반 사람들에게랴.

나도 싫다.
그들이 거리낌 없이 하는 행동이나 생각들이 싫다.
그걸 몰라서 저리들 하는지, 아는데도 하는지, 아니까 일부러 하는지,
아무튼 싫다.


아주 힘들게 용기를 내서

무언가 해 보려 하면, 사람들이 항상 걸린다.

그래서 궁금했다.

난 왜 그리도 사람들을 싫어할까?


아마도... 난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런 듯 싶다.

2018년 10월 2일 화요일

늙을 수록 두렵다.

혼란한 하루다.

1.
오전에 형수님이 제사를 예약했노라 알려 주셨다.
집안의 제사와 관련된 계좌를 통해 제사 비용의 절반을 이체해 드렸다.

그런데 계좌 이체를 하기 직전에 "등록되지 않은 단말기를 이용하여 이체를 시도했던... 보안카드..." 이런 섬찟한 안내 문구가 떴다.
일단은 이체를 한 후에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확인 후에 알려 주겠다며 일단 통화 종료.
1시간이 지나서 전화가 왔다.
여러 대화가 오갔지만, 정확한 원인 파악은 불가능.
약간 짜증이 났다. 공연히 사람을 혼란하게 만들 안내를 하고도, 그런 안내를 하게 된 경위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조심해야겠다며 통화 종료.


2.
추석 전에 주식 시장에 변화가 감지되었다.
한번 크게 떨어뜨리고 일정한 구간을 오르락 내리락 하기를 약 3개월.
드디어 그 구간을 벗어나는 모습이었다.
추석을 지난 후에는 그걸 확인해 주는 모습도 보여주었으니 과감히 진입.
그 주의 후반부터 조정이 보였지만, 아직까지는 긍정적이라 생각했던 시장이 크게 무너졌다.
그것도 그저 일시적인 장중의 모습이 아니라, 장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눌러버리는 압도적인 힘.
대체 지난 주 초반까지의 강한 힘은 대체 어디로 간걸까?
아니 그 상승의 힘이 단지 눈속임이었단 말인가?
아쉽지만 손절...
병가지상사인 일이지만, 이럴 때의 절망감은 대체 뭘까?


3.
누이로부터 톡이 왔다.
조카의 생일이라 축하금 먼저 보냈단다.
문자로라도 축하해 주란다.
한동안 톡에 답장도 하지 않았다.
조카라는 녀석들... 대체 뭘까?
내 생일도 기억 못하는 녀석들.... 내 생일에 축하한다고 문자라도 보냈던 게 대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심지어는 내가 보낸 생일 축하 메시지에 답장도 안하던 녀석들... 언젠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으로 봐선 삼촌의 전화번호도 몰라서, 누가 보낸건지 몰라서 반말로 답장하던 조카들...
내가 왜 이런 조카들에게 생일 축하금을 보내야 하는 걸까?
이젠 조카들도 다 컸으니 그만 보내겠다고 왜 말하지 못하는 걸까?
혹시라도 조카들에게 뭔가를 바라는 걸까?
그들이 나와 혈육이라는 증거의 끈을 돈으로 유지하고 있는 걸까?
하긴, 설, 추석 명절과 집안 큰 어른인 부모님 (녀석들에겐 조부모님)의 생신, 이런 것들에 같이 모이거나 하는 일을 제외하면 대체 뭘 공유하고 있는 걸까?
나만 불편한게 그 녀석들도 불편한거 아닐까?
내가 금전적인 여유만 있다면 이런 일로 이따위 고민은 하지 않았을거라는, 지금 이런 고민이 결국은 금전적인 쪼들림에 기인한거 아니겠냐는 스스로의 자책으로 고민을 마무리하고 송금했다.
하지만 이 고민이 계속 이어질 거라는 암울한 사실은 변함이 없다.


4.
아버지로부터 톡이 왔다.
이번엔 동영상이다. 신의 한수라는 꽤나 치우친 보수주의자의 인터넷 방송 영상이었다.
아버지는 보수주의자다.
정치적인 편향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는 것 또한 지나치게 단순화한 구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단은 크게 보아 그렇다는 뜻이다.
예전에도 아버지와 한번 크게 틀어진 일이 있었다.
당시에도 아버진 진보 성향의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메일을 우리 형제들에게 계속 보내셨다.
함부로 지우기도 그렇고, 보내 주신 글들이 내가 보기에는 많이 불편해서 많이 고민을 했다.
결국은 어느 날인가 이런 류의 메일은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메일을 드렸다.
하지만 아버진 기계 같았다.
기계적으로 받아 보신 메일 가운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메일을 기계적으로 우리 형제들에게 보내고 계셨다.
그러면서도 정작 내 메일은 읽지도 않으신 모양이었다.(이건 나중에야 알았지만...)
결국은 침묵으로 분노를 대신 표출했고, 중재자인 누이를 사이에 두고 메일 전송은 중지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카톡에 가입하자, 아버진 다시 같은 부류의 정치적인 글들을 보내기 시작하셨다. 달라진 점이라면, 가족 단톡방이 아니라, 나에게만 보내셨다는 것.
지난 번의 메일 사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정치적인 성향이 다르다는 것을 잊어버리신걸까?
꽤나 속으로 부글거렸다.
이런 아버지의 행동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내가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해야 하는 걸까?
굉장히 비겁하거나 공격적인 대응도 상상했더랬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마지막 선은 희미하지만 남아 있었나보다.
결국 오늘 받은 톡의 동영상의 인트로에 신의 한수가 나오는 것을 보고 답장을 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것 같아 매우 불편하니 그만 보내 달라고...
아버지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에게도 알려주고 싶어서 그랬다는 변명과 함께 나의 부탁을 수락했다.


그런데...내가 정말 끔찍하게 생각하는 일은...
아버지에게 이 부탁을 하는 톡을 보내는 내내 손가락이 덜덜덜 떨렸다는 것이다.
그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난 여전히 아버지의 제어를 받고 있었고, 내가 보내려는 톡은 이 제어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하는 정도의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구시대적인 유교의 사상으로는 불효에 해당하는 일이고 반란이며 패륜이라는 무의식이 작용한걸까?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유교의 노예인걸까? 아마 맞겠지...)


5.
지난 추석에 겪은 생생한 한 장면...(이미 수 많은 명절에 되풀이 되었지만)
잘 차려진 추석 상에는 전과 잡채 갈비가 올라와 있다.
어버진 양념된 갈비를 손으로 잡으시는걸 아주 꺼려하신다.
게다가 갈비에 붙어 있는 기름이나 질긴 힘줄을 싫어 하신다.
결국은 누군가가 갈빗대에서 살을 발라낸 후에, 곳곳에 붙어 있는 기름과 힘줄을 제거 하야만 한다. 그게 사실은 거의 불가능하니 각자 알아서 해야겠지만...
아버진 손을 대기 싫으시니 식당에서 보는 집게와 가위를 달라고 하시고, 그나마도 잘 못하셔서 갈비와의 씨름이 벌어지고... 옆에서 보던 어머니는 답답해 답답해를 연발하시다가 얼추 발라서 아버지께 드리고는 적당히 좀 드시라 타박한다.

그 광경은 나 또한 매우 답답하고 불편하고 불쾌하기까지 한 장면인데... 그게 몇년을 반복하고 있다.
대체 왜 반복하면서 그런 음식을 그런 식으로 내는지, 음식을 효율적으로 자신의 기호에 맞게 요령껏 섭취하지 못하는지, 옆에서 답답하다면서도 계속 붙어서 잔소리를 하는지, 왜 그런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없는지...
어쩌면 이 와중에 일어난 어머니의 답답함과 짜증에 동조해서 나도 아버지를 비난하거나 어머니의 한마디를 거들거나 했을지도 모르고, 혹은 그 가운데서 마찰을 완화하기 위해서 중재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런게 각자의 성격인거고, 그 나름의 한계선(경계선)을 지키면서 일어나고 있어서 큰 충돌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난 이게 그렇게 불편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게 아주 많이 불편하다는 걸...
아마도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다면, 나는 그런 식사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는게 맞다.
그리고... 아마도 아주 어려서부터 그렇게 복작대고 지지고 볶고 하는 식탁에 익숙하게 자랐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정도의 스트레스는 참아내도록 길러졌나보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건 내게 스트레스였고, 참을만 한 수준은 아니었지 싶다.
이제 식사 자리에서 이런 상황이 나는 매우 불편하고 싫다, 그러니 그러지 말고 평화롭게 식사를 하자고 한들 이제와 고쳐질리 만무하다.
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상황이 매우 불편하니 나는 나중에 따로 식사를 하겠다고 피하는 방법 뿐인 것 같다.


6.
늙었나보다.
이렇게 두려운게 많다.
알면 알수록 두렵다.
차라리 모르면 용감할 수 있을텐데...이제는 세상 만사의 돌아가는 행태를 대충 이해하고 있으니, 무언가를 보면 그 뒤에 있을 일들까지 떠 오르면서 두려움들이 쌓인다.

그러니 젊은 시절이 용감한거다.
무식하니 용감한거 맞다.

가끔 공원을 산책하다 애완견을 끌고 나온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내가 개를 좋아해서 많이 봐주고 소리 내거나 친한척을 해주면 금새 반가워하는 개들이 있다.
10중 8,9는 어린 개다. 나이가 많아봐야 5살 이하인...하룻 강아지인 셈이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사람이라면 다 반갑고 그런건 다 어린 강아지들 뿐이다.
그런 개들도 나이가 더 들면 사람들을 경계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거다.
반가워해도 특별히 자기에게 득 될거 없는걸 아는 거다.

늙은 나는 두려움이 많다.

2017년 8월 11일 금요일

언짢은 말을 들었을 경우의 대처

일반인은 화를 내고 상대방을 역으로 공격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인간 관계에 경험이 많은 사람은 상대방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를 찾으려 한다.

자신을 알고자 원하는 사람은 왜 자신이 언짢게 느끼는지를 생각해 본다.

2015년 5월 4일 월요일

인간은 모순의 존재?

가까이 지내는 친구 C와 L이 만난 자리에서의 이야기다.

특히 C와는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아서인지 많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곤 한다.
종교나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 관심이 일치하는 바도 그렇고 방향이 비슷하기도 해서 자연스레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살짝 취기가 올라서, C가 약간 수다스러워지며 꺼낸 주제가, 40대 중반을 지나며 맛있는 음식에 대한 탐닉이 우려스럽다는 것이었다.

이제 중고등학생인 자녀들은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것에 반해서 자신이 너무 말초적인 감각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었나 하고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주제로 대화가 오간 뒤에 C가 다시 꺼내든 주제는, 자신에게 미적인 감각이 부족하여 자신의 스타일을 가꾸는 것에 참 어색하고 서투르다는 것이었다.
단적으로, 자신이 입는 옷들은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지금은 와이프가 골라주는 것을 그대로 입는다는 것이었으며, 유심히 살펴보면 멋을 부리지 않은 듯 하지만, 참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듣던 나는, C에게 질문을 했다.
앞서 음식에 대한 탐닉의 절제를 얘기했던 것과, 이제 외모에 대한 추구를 얘기하는 것이 서로 양립하는 것 아니냐고.

사실은 그 두개의 주제를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C의 의견이 일견 모순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달리보면 전혀 다른 주제가 될 수도 있으므로 양립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쉽게는 음식에 대한 얘기와 의복에 대한 얘기로 전혀 다를 수 있다.
혹은 음식에 탐닉하는 것은 기본적인 욕구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외모에 대한 것은 타인에게 비춰지는 것을 의식한, 좀 더 고차원적인(?) 욕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전혀 다른 주제에 대한 얘기로 받아 들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넓게 보면, 의.식.주라는 기본적인 생존과 관련된 주제로도 묶을 수 있으며, 물질과 정신으로 나눌 때 물질에 속하는 영역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기도 한다.
(내가 C와 나누던 관심의 분야가 주로 세속적인 것을 가벼이 보고, 탈속을 추구했기에 그러했다.)

사실 C가 음식에 대한 탐닉을 경계해야 겠다고 할 때에만 해도, 그가 감각적인 것을 경계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해야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뒤이어 외모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날개를 달고 인간계를 떠나서 올라가던 그가, 바로 추락해서 저잣거리를 배회하는 듯한 모습에 실망감을 느꼈던 것 같다.

결국은 그가 영적인 것, 성(聖)적인 것을 추구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는 기본적인 욕구가 만족되자 명예욕, 권력욕과 같은 사회적 욕구를 추구했던 것인가 하는 생각에 씁쓸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울해 진 건, 나의 질문에 대한 C의 반응이었다.
그는 나의 질문이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관념적인 것이라는 진단을 했던 것이다.
이전에도 몇번 이런 답을 들은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한번은 대체 그 관념적이란 게 무엇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그의 대답도 명확하진 않았다. 모호하게도 그는 직접 겪어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얘기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음식의 탐닉에 대한 경계"에 대해 내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의 추구"에 대해 내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 두가지 주제가 가지고 있는 상반된 면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두가지 주제는 모두 그의 경험과 생각에서 나온 것이리라.


이번에도 나는 그에게 대체 생각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더불어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L을 객관적인 관찰자이며 증인으로 삼아서...

잠시 고민하던 C는 영화 <밀양>에서 주제로 다루고 있는 "용서"를 예로 들어 설명하려고 했다. 용서라는 단어를 아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

하지만, 이 영화의 예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나의 질문에 대한 관념적인 것이라는 진단을 내리기 보다는, 자신의 주장들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한다.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인 욕구라는 식욕, 성욕, 수면욕 조차도, 그 욕구를 해소하는 방법은 사회적으로 용인된 방법을 통해서 채워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또한 사회적인 욕망은 타인에 의해서 심어진 경우가 많다고 본다.
부모나 친척, 이웃과 또래의 친구들로부터....

인간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높은 곳과 큰 소리는 동물이 가지는 기본적인 두려움이라고 한다.

그 외에 사회적인 규범이라는 명목하에, 개개인을 사회의 틀에 맞추기 위해 가해지는 두려움도 있다.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은 온전히 자신의 경험에만 의존하여 차곡 차곡 쌓인게 아니다.

주위의 관계로부터 주입된 것들이 아무런 체계나 근거도 없이 무작위로 혼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욕망과 욕망 사이에 모순이 존재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두려움과 두려움 사이의 모순도 그러하다.

욕망과 두려움 또한 마찬가지로 모순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모순을 발견하기란 너무나 어렵다.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겨우 볼 수 있으며, 그나마도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의 모순이 비춰지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바로 외면하곤 한다.


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타자의 욕망 타자의 두려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게 되면서 나에게 일어난 큰 변화는, 자신에 대한 시각이 보다 객관화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이 늘어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객관화의 정도야 사람마다 천양지차이겠지만...

그리고 이런 변화는 축복이며 저주와도 같았다.
자신이 객관화 될수록 자신을 평가하는 일도 잦아지며 이 평가는 냉정해진다. 또한 냉정한 시각으로 과거의 자신을 되짚는 일은 분명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인식이 보다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는 느낌, 인식의 범위가 넓어지고 진실에 가까와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기쁨이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거듭하다보면, 내가 가지고 있던 욕망과 두려움이 점차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물론 완전한 근원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껍데기를 하나씩 벗겨내고 안으로 들어가 그 기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욕망과 두려움이 정녕 내가 스스로 원한것이었는지, 내가 겪었던 고통에 기인한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후에 좀 더 근원적인 실체에 접근하면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만, 현재로써는 욕망과 두려움의 상당 부분이 다른 사람에 의해 심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아마도 내게 이런 욕망과 두려움을 심어준 사람은 부모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무저항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욕망과 두려움 혹은 욕망을 유발할 무엇과 두려움을 가지게 될 무엇을 심어준 사람으로는 가장 큰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만한 영향력을 지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능할 것이다.


하나의 인간이 걸어가는 인생 길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이끄는 길, 그리고 두려움으로 막혀진 길의 사이라고 생각한다.
우연처럼 인생을 좌우할 큰 사건들이 인간에게 벌어지지만 그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반응은 각자가 가진 욕망과 두려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인간이 가진 욕망과 두려움은 인생을 좌우할 열쇠인 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욕망과 두려움을 후세에 전달하는 일은, 그 후세들이 갈 인생의 폭을 크게 제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크게 열려 있음에도 욕망과 두려움으로 아주 제한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틀림없이 슬픈 일이다.

인간이 태어나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그것을 열망할 때에 순순하게 그 자신이 될 것이다.
타자의 욕망은 그 원동력이 약하기에 쉽게 좌절될 수 있으며 이루고 난 후에도 자신이 아닌 타자가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스스로가 겪은 아픔과 고통만으로도 두려워서 피하게 되는 선택은 있게 마련인데, 거기에 타자의 두려움까지 더해져서 더욱더 선택이 폭이 좁아진다면, 가보지 못한 길은 너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보니 내가 살아온 길이 나의 길이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서글프다.
모쪼록 후세에게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투영시켜 그들이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2013년 4월 27일 토요일

두려움의 사회

인간은 욕망이라는 기관차가 이끄는, 두려움이라는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열차와도 같습니다.

나는 가난이 두렵습니다.
나는 고통이 두렵습니다.
나는 부자유와 구속이 두렵습니다.
억압과 부당함이 두렵고, 불평등과 부정의가 두렵습니다.
창피한 것이 두렵고 나를 믿는 사람을 실망 시킬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느낄 법한 저런 두려움 외에 나를 아주 당혹하게 만든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건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주로 여자들이나 사회 경험이 아주 적은 신출내기들에게서 종종 겪게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나에게 일임된 부하직원 혹은 견습사원, 아르바이트생이라면 나의 명령대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고, 나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회사의 신임을 얻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볼때면 오히려 내가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것이 특효약입니다.
...
정말인가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요?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해 본 사람들은 두려움에 대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특히 남자들이 그렇고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 그렇습니다.
남자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선배와 후배라는 서열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어겼을 때에 대한 두려움을 익힙니다.
교사와 학생의 사이에서도 여학생의 경우보다 남학생의 경우에 서열에 대한 문제는 더 엄격히 적용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이 훈련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 대다수가 이런 훈련을 받아서 익숙해진 환경이기에
시회는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서열은 엄격하게 지켜져야 하며 이를 유지시키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두려움이 심어집니다.
그런 곳에 서열은 아랑곳하지 않는 여자들은 아주 맹랑하기 이를데 없는 천방지축으로 보여질 것이며, 군대를 다녀오지 않고 선후배간의 엄격한 서열을 경험하지 못한 신출내기들은 어리버리로 찍히기 일쑤입니다.

아마도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장유유서를 중시하는 유교의 관습과 남북한 분단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을 교육하고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대한민국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연장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외국인,
바지에 손을 넣은 채로 대통령과 악수하는 빌게이츠...

그 분노의 뒤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그들이 우리처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언젠가는 이런 두려움을 모두 없애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먼저 두려움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다면 이걸 제거하는 것도 좀 더 쉽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2013년 4월 11일 목요일

타인과 비교하기 / 비교당하기

대인관계의 피로함 때문에 사람들을 피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떼어버릴 수 없는 관계들도 있습니다. 바로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는 혈연관계입니다.
그리고 이 혈연관계의 연장선상에는 무수히 많은 친척들이 존재합니다.

이 친척들과의 관계는 좋다고 유지하고 싫다고 끊을 수 없으며
불가피하게 대면해야 하거나 끈질기게 소식을 접하고 전해야 하며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친척간이라고 모두 사이가 좋지만은 않으며, 사이가 좋은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이 섞여 있으면서 미묘한 역학 관계를 구성하기도 합니다.

종종 이런 친척들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는 경우들이 있는데, 심리적으로 좋지 않은 경우가 있어서 그 원인을 찾아보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 A가 많은 돈을 벌었다/A가 좋은 직장에 취직을 했다/A가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 ]
→ [ 이러한 A의 소식이 나에게 어떤 해를 끼치지 않음에도 질투/시기를 하게 된다 ]
→ [ A가 비열한 방법을 썼다/실제보다 부풀려졌다고 의심하거나 단점을 찾아 위안한다 ]
→ [ 잠시 나 자신을 기만할 뿐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
→ [ A에 대한 소식이 반복되면 기분이 좋지 않고 화를 내게 되며 심지어 A를 미워한다 ]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심리적 배경에는 "비교"당한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비교당할 거라는 두려움
어떤 가치를 획득한 타인을 질투하고 것은 타인과 자신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타인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상승함으로써 비교우위에 올라었다는 두려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여서 자신이 비교 열세에 처했다는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그 가치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경우, 또는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 무한정의 가치인 경우에는 확실히 비교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 듯 합니다.
라캉의 타자의 시선, 타자 의식, 타자의 욕망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요?


정작 이런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그저 한가지 화제거리일 수도 있으며, 지속적인 관심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식을 듣는 사람은 화자(話者)가 나와 그 사람을 비교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매우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혹시 이것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비교당하며 자라왔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아닐까요?
비교당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질책을 받고 반성과 각성을 강제당하곤 했습니다.
따라서 비교당하는 것 자체를 매우 불쾌하고 나쁜 것으로 느끼며, 회피하거나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아도 크고 작은 흥망성쇠는 반복하며 운이 좋거나 나쁜 일이 번갈아 찾아옵니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은 숨기기 마련이고 성과는 뽐내고 싶어합니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나의 소식은 좋은 것 뿐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속으로 나를 질투하고 시기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누군가는 대놓고 평가절하를 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의심할지도 모르며, 누군가는 무시할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면전에서라도 잘되었다 칭찬해주는 사람이나 함께 기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이런 사람들에 대한 느낌은 어떠할 것이며, 이들을 어떤 사람으로 평가하게 될까요?
과연 누가 소인배이고 대인배인가요?
누가 심성이 맑고 선한 사람이며, 누가 옹졸하고 겁에 질려있는 사람인가요?

2012년 7월 11일 수요일

스트레스

스트레스는 무엇일까?

힘들거나 싫어하는 것을 견뎌내고 있는 상태인가?
아니, 이것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니
스트레스라 함은 힘들거나 싫어하는 것이 짓누르는 힘이 될 듯 하다.

힘들다는 것은 물리적인 의미가 강하니,
물리적인 힘에 의해 받게되는 신체적인 고통들이 여기에 속하게 될 듯 하다.
육체 노동에 따른 통증, 섭식 장애에 따른 고통, 수면 장애로 인한 무기력 등등.

싫어하는 것이라 함은 정신적인 의미가 강하니,
호불호에 따라, 취향에 따라, 가치관에 따라 심리적 거부감이 드는 행위나 상태를 의미하는 듯 하다.

전자에 의해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몸의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며,
현대의 많은 경우 병원에서 의료행위를 통해 치유된다.

후자에 의해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정신적인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며,
뚜렷한 치료 방법은 없다.
극심한 경우 정신병으로 발전하게 되며, 의료행위에 의한 치료효과도 상대적으로 낮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미연에 예방할 좋은 방법은 없는가?
앞서 정의 했듯이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싫어하는 것"에 의해 받게 되는 것이라면,
"싫어하는 것"을 없애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되지 않겠는가?

.....
이게 가능할까? "싫어하는 것"을 없애는 것이 가능할까?
"싫어하는 것"은 어떤 것들일까?
두려운 것? 괴로운 것? 미워하는 것? 슬픈 것? 창피한 것?
.....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감정들을,
그냥 감정이라고 여기고 무시하려면,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이 되리라.
그렇다면 스트레스라는 것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


인간인 이상,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싫은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싫은 것"을 이겨낼 수 없다면 피하는 수 밖에 없다.


실제 인생에 있어서, 스트레스라 말하는 것은 "싫지만 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피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욕심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