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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0일 일요일

나는 과연 바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 되었고, 선거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이게 지난 5월의 일이니 3개월쯤 전의 일이다.

과거의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쪼개지고 야당이 되었으며, 더불어 민주당이 여당이 되었다.

새 정부가 부르짖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최근까지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적페청산'이 아닌가 싶다.

청와대의 직접적인 개입이야 없겠지만, 각 정부 기관들과 기업, 단체들은 소위 '알아서 기는' 모양새를 보여준다.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 최순실, 이재용 등의 뇌물 수수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며, 새로이 비리가 드러나 고소가 되는 사례도 적잖다.
대기업들이 갑질이나, 짬짜미에 대한 공정위의 칼날도 매섭고, 이에 대한 법원이 판결도 예전과는 온도차가 많이 느껴지고 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청와대와 여당이 날마다 들고 나와서 청산을 주장하는 부분들이 많아지면서, 청산의 대상이 되는 사람도 많아지고, 일찌감치 국외로 도피한 사례들도 보도가 되곤 했다.

어쩌면 이런 청산이라는 것 자체가 구성원 대다수가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어차피 절대 선이나 절대 악은 없으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그리고 판단의 주체에 따라 선악의 기준은 달라진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게 대의 민주주의이기도 할 것이다.
(다수의 횡포, 소수의 억울함, 다수의 무심함과 소수의 절박함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이건 너무 긴 이야기가 되겠으니 여기에선 피하기로 하자.)


며칠전 광복절을 맞아 인터넷 상에서는 한일합방, 일제 침략, 항일 운동, 독립 투사,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강제 징용 노동자 등에 대한 기사와 얘기들이 많이 나왔다.
일부는 들었던 얘기들도 있고, 일부는 새로운 얘기들도 있고...
청와대의 적폐청산이라는 기치와 맞아 떨어지게 친일파 청산에 대한 주장도 다시 나왔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과연 저 친일파라는 사람들은 정말 나쁜 사람들 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친일파에 대한 반민족적인 행위들을 듣고, 그들에 대한 증오심을 부글부글 끓어 오르게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친일파라는 단어 자체는 더 이상의 논리적인 사고를 차단해버리고 그저 증오심만 드러내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예는 어떨까?
조선 말기, 구한말기에 총명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관직에 등용되어 맡은 바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셈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충실했고, 출세의 길을 탐하지 않는 그런 관료였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한반도는 세계의 열강들이 모여들어 부산하고 어수선하다.
왕실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청정과 섭정으로 어지럽다.
때로는 청나라가, 러시아가, 일본이 세력을 키우며 나라를 좌지 우지한다.
하지만 이 관료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는 한, 누가 권력을 잡든, 누가 지시를 하던 묵묵히 그에 따라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
이런 사람이 후세에 친일파라고 낙인이 찍힌다면, 그는 과연 어떤 변명을 하고 싶을까?

일본제국의 앞잡이로 충성하며 득세하고 치부한 몇몇의 친일파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보다는 약한 수준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판단이 어려워진다.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을 하거나 독립군을 지원하면서 한편으로는 친일을 했던 증거도 나온다.
심지어는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철저했다는 만해 한용운 선생은 조선의 불교를 유신하기 위한 방안 가운데 하나로 승려의 혼인을 허가해 달라는 탄원을 조선 총독부에 보내서 지탄을 받기도 했다.

아마도 친일을 했다고 의심 받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나라의 일을 맡을 만한 능력이 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단한 민족적 사명 이전에 자연인, 생활인이었고, 한 가장의 가장이었을 것이다. 대단히 반민족적인 일이라고 (그 당시에도) 느낄만한 일을 해야했던 사람은 그 중에서도 일부였을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는 자신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었다거나, 그 지시를 누가 내렸든 여전히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느낄만 하지 않았을까.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측근 참모들은 박 전 대통령의 명령에 대해 얼마나 의심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박 전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업무 지시를 할 때에는 나름의 명분과 타당성을 제시하고 난 후에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그런 프레임이 구축된다면, 더욱이 자신의 상사와 공동 운명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대체 얼마만큼 선악에 대해 숙고할 여유가 있는걸까?


가까운 친구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조직에서 일을 하다보면 각자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상사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이 맞다고.
왜냐하면 상사들이 그 직책에 있는 것은 그들이 결과에 대해 책임 질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상당히 옳은 얘기라 생각했다.


최근의 대기업 회장의 갑질, 군대 공관병에 대한 갑질,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나 성희롱, 반려동물에 대한 보호법 등을 보면 그 판단 기준이 불과 십수년전에 비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느끼게 된다.
방송에서 논란이 되는 사건들을 보면, 내가 과거에 아무렇지 않게 했던 일이 요즘이라면 신상이 밝혀져서 낙인이 찍혀야 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될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나는 언제나 바른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현재의 행동이 미래에도 지탄받지 않을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2015년 9월 13일 일요일

선(善)과 악(惡)은 존재하는가

최근의 유럽은 시리아 난민들의 대거 유입으로 꽤 시끄러운 상황이다.

시리아 국내의 정치 불안과 새로운 이슬람 국가를 표방하는 테러집단인 IS의 활동으로 시리아 국민들이 살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유럽으로 무작정 이주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 난민들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고 일부 유럽 국가들은 반 이슬람 정서의 팽배로 난민 수용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와중에 배가 침몰해 난민들이 물에 빠져 죽는 상황이 발생하고, 3살짜리 쿠르디라는 아주 어린 아이의 시체가 해변에 밀려온 사진이 사람들을 슬픔에 빠지게 했다.


참 어려운 문제다.
무조건 난민을 수용하는 것도 딱히 좋다고만 할 수도 없으며, 난민을 거부하는 국가나 국민들도 나름의 충분한 이유는 있으니 어느 한쪽을 비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면, 난민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인 IS와 시리아에 대한 국제 사회의 적절한 대응은 불가능한 것인가?
IS는 이미 여러차례 국제 테러를 자행했으니 토벌을 위한 명분에는 문제가 없지만, 현실적인 방법의 문제나 전쟁의 득실에 관한 문제들이 장벽이 되는 듯 하다.

하지만, 시리아의 내전과 정치적인 불안 등이 더 풀기 어려운 문제로 보인다.

아마도 시리아의 국민들 스스로는 문제의 해결에 대한 방법들을 생각하고 있을테지만,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통합된 방법은 없지 않겠나 싶다.
총론에서는 찬성하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다시 갈라지고 싸울 수 밖에 없는 그런...
(이건 전적으로 시리아 문외한이 상상해본 통상적인 예상일 뿐이다.)

그러니 제 3자일 수 밖에 없는 타국가에서 도움을 주려 해도,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아닐까?


이 사태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힘있는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등이 군사력 자랑만 하지 말고, IS도 몰아내고, 시리아의 내전도 종식시켜 주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과연 그게 시리아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결국 힘있는 강국이나 UN등이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건, 선(善)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음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객관적으로 기준이 되는 선이 존재한다면, 그래서 그게 보편 타당한 선이 된다면, 그건 절대 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흔히들, 각 종교의 신은 선의 상징이며 선의 화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이 된다.
그래서 그 반대편에는 악마들이 대립하여 존재하곤 한다.

자연은 신의 피조물이며, 인간도 신의 피조물이다.
그러면 자연은 선해야 하고, 인간도 선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태양과 물이 모든 생명을 길러내지만, 죽음의 사막도 만들고, 홍수로 모든 것을 쓸어가기도 한다.
태풍과 지진, 화산과 혹한은 자연의 재해다.
자연의 현상은 선과 악이 없다.
단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로운 것은 선이요, 해로운 것은 악이다.
선한 것은 신의 축복이요, 악한 것은 악마의 장난이라 구분한 것은 오직 인간의 이해에 따른 것일 뿐이다.

인간이 없으면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없으며,
내가 없으면 모두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선과 악은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절대선과 절대악 또한 없다.
성선설과 성악설도 없는 것이다.
선과 악으로 구분된 신과 악마도 없는 것이다.


인간들이 모여사는 사회에서는 사회의 존립을 위해 후대에게 가르치는 필수적인 덕목이 선(善)이었지만, 원래 존재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들의 기준이 다른 선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모순 덩어리인 셈이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에 대한 가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종의 준폭력 행위인 셈이다.
선을 행하는 것이 대단히 도덕적이고 양심적이고 올바른 인간이라는 생각, 덕을 쌓아 내세를 밝게 한다는 종교적인 믿음 등이 매우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자기 모순속에서, 마치 체한 듯이 한쪽은 계속 답답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사회의 존립을 위해 법, 도덕, 양심, 예(禮) 등을 가르치는데, 이 덕목들과 선(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니, 선과 관련은 있으되, 개개인의 선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사람사이에 다른 기준의 선이 서로 충돌할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은 모두가 다르다는 것,
그들이 가진 선악의 기준도 다른다는 것,
누군가 타인에게 선을 행하고 싶다면, 내 기준의 선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고,
타인의 선의 기준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2015년 5월 5일 화요일

선(善), 선행(善行), being a good boy(girl)

앞선 포스팅에서 행복과 선과의 관계(?)...라기보다는 행복과 선에 대한 개인적인 인식의 문제점에 대해 다루었다.

한편으로는 고민의 일부가 풀려서 시원하기도 했지만, 풀어야 할 고민이 더 많아졌다는 문제가 생겨버렸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 사실은 강박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이 아주 뿌리 깊게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고, '착하다, 선하다, 선행'의 의미에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적어도 나에겐)

하지만, 이러한 내포적 의미의 착함, 선행은 그 단어 자체가 모순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선(善)의 가치 판단은 사람/시간/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 행위의 수혜자만이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善)의 행위자의 판단과 수혜자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기에, 행위의 의도와 결과가 달라지곤 한다.

칸트가 말한 대로,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선의지 뿐"인 셈이다.
(칸트의 선의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 칸트의 선의지는 지고 지순한 절대적인 가치임)


간혹 선행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봉사 활동을 하는 경우들도, 정작 봉사를 받는 사람들에겐 필요하지 않은 일들이어서, 봉사 활동을 한 이들의 자기 만족을 위한 게 아니었나 싶은 경우들도 허다해 보인다. (선거철 정치인들의 봉사활동 쇼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차라리,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솔직한 심정으로 행한다면,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다.


이럴진데, 타인에 대한 선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외면하기 보다는, 모두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이기적인 선"을 자신에게 베푸는 것이야 말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 물론 이기적인 선이 타인에게 끼칠 영향을 고려해야 겠지만, 적어도 스스로의 생각에 '내가 피해를 감수한다'가 아니라 '쌍방에게 공평하다'는 판단의 수준이라면 적당하지 않겠는가?

행복과 선(善)은 일치하는가?

선(善)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세상을 보면 행복해 보이는 악인이 너무도 많으며, 불행해 보이는 선인이 도 너무나 많다.

어째서 세상은 내 믿음과 이리도 다른 것일까?

과연 행복과 선은 관련이 있기나 한 것일까?



따지고 보면, 선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믿음은 어린 시절의 동화책이나 어른, 스승들의 은근한 가르침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동화책에 자주 등장하는 얘기들은, 좀 모자르고 어수룩해도 마음이 착해서 선행을 하는 사람은 결국에 복을 받게 된다는 식의 권선징악적인 얘기들이 많았다.
아마도 어른들과 스승들의 이야기도 딱히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린 시절의 동화책과 어른들은 선과 행복을 함께 엮었을까?
그럴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숨겨진 의도가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당시에도 세상에선 선한 것과 행복이 여간해서 함께 어울리지 못했기에 그걸 바라는 열망에서 그랬던 것일까?



얼마전, 아버지께선 내게 한편의 동영상을 권하셨다.

모대학 교수의 인문학 강의 일부분 이었는데, 그 일부의 소제목은 '행복한 사람을 곁에 두라'는 정도였던 것 같다.
동영상을 보면서 언젠가 회사 화장실에서 보았던 격언이 기억났다.
불행한 사람을 멀리하고, 행복한 사람을 가까이 하라. 불행은 전염병과 같아서 주위에 불행한 사람이 있으면 너마저 불행의 구덩이로 끌어들일 것이다.....라는 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행복한 사람 근처에 있으면 자신도 행복해진다는 것이나, 불행한 사람 근처에 있으면 자신도 불행해 진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어떤 학자가 조사했다는 통계였다.

일정한 수 이상의 집단을 조사하고, 그 구성원의 행복 여부와 그들이 맺고 있는 인간 관계를 그려보니, 행복한 사람간의 관계와 불행한 사람간의 관계가 두드러지게 구별된다는 것이었다.

이쯤 듣고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과연 행복은 무엇이길래 설문조사 한 문항으로 행복/불행을 단정할 만큼 명백하게 나뉠 수 있었을까?
과연 그들이 답한 행복/불행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생각하는 행복/불행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들과 과연 일치할 것인가?


너무도 추상적인 혹은 자의적이며 주관적인 "행복"을 수량화된 통계로 이끌어냈다는 것에 대해, 그 동영상에 대한 신뢰도는 한낱 장터의 약장수소리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추락해버렸다.



이 포스팅의 제목이었던, "행복은 선과 일치하는가?"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행복'이 과연 무엇이길래, 또한 '선'이 무엇이길래 그것의 연관성을 찾고있었던 걸까?

'행복'이 물질적인 풍요를 의미한다고 정의한다면,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방법이 될 것이다.

'행복'이 마음의 평화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욕심을 버리고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행복'이 주위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라면,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고, 자주 왕래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행복'의 의미는 언제나 달라질 수 있으며, 그 부여된 의미에 따라 '행복'해 지는 방법도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행복'해 지기 위한 모든 방법들이 바로 '선(善)'한 행동이 아닐까?

즉,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이라면 그건 언제나 (나에게는) '선'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단지, 내게 '선'한 행위가 타인에게 '악'한 행위인 경우가 있을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조절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애초에 이 의문을 가지고 있던 내 머리속에는 모순이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며 자의적인 것이다.
따라서 타인의 기준이 어떤지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나만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기저에 나를 배제하고 타인을 위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선'한 행위라고 생각하고 행했던 행위들에 대해서는 최종적으로 타인의 승인을 얻어야만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고, 결국 '선'의 기준은 주관적일 수 없는 한계를 지녔던 것이다.

'행복'의 기준은 내가 정하지만, '선'의 기준은 타인이 정하는데, 어떻게 행복과 선이 일치할 수 있겠는가?

이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선'에 대한 의미를 바꾸어서 <나를 배제하고 타인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나를 먼저 위하는 것>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언제나 행복과 선은 당연히 일치하게 된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는 그것이 바로 선한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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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찾아보니 비슷한 주제로 고민한 사람들이 있던데, 시간이 날 때 제대로 읽어 봐야겠다.
http://peterlevine.ws/?p=9815
참고로 검색한 키워드는 happiness and goodness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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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1일 목요일

선(善)의지

칸트의 선의지에 대해 고등학교때 배웠던 기억이 남아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간혹 드는 생각이 "순전하게 선한 것은 선의지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칸트의 선의지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으니 비교하거나 하지는 않겠습니다.

얼마 후면 대통령 선거가 있을 예정이며, 몇몇의 후보들이 아주 열심히들 선거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현직에 계시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왈가왈부하기엔 제가 아는 것이 부족하나, 어쩐지 느낌으로 아쉬운 점은 "착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도 일국의 대통령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으로 "선(善)"을 내세우는 경우는 보지 못했으나, 저 개인적으로는 "착하지 못한" 대통령이 참 아쉬웠던 기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다음 대통령의 후보로 나온 인물들에 대해서 "선(善)"을 기준으로 판단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쉽지도 않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뭐라 판단할 수 없겠지만 선거를 하는 날까지 이 기준으로 판단해 보려 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왜 "착해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변명과 같은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세상 일은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좋은 의도로 좋은 정책을 시도해도 그 결과가 나쁜 경우가 있으며
    나쁜 의도로 나쁜 정책을 펴도 그 결과 오히려 좋게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의도로 생각하고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도, 세상에 나오는 순간 동전의 양면과 같이 두 얼굴이 되곤 합니다.
    결과로써의 선악은 아무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의도만이라도 선한 의지에서 나오길 바랍니다.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악한 결과가 아니라 악한 의도입니다.
    단지, 너무 포장에 능한 정치인들이라 악한 의도를 덮는데 능숙하니, 국민들은 그 의도를 알길이 없어 결과로부터 유추하기 때문에 의도가 무시되는 듯 보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 대통령이 실무에 능하고 유능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행정부엔 너무나 많은 공무원들이 있고, 그들 중 절대 대다수는 어려운 고시와 오랜 시간에 걸친 실무를 익히신 분들입니다.
    대통령이 실무를 잘 알아야 할 필요도 없도 알 수도 없습니다. 단지 적절한 판단을 도와 줄 수 있는 유능한 참모가 있다면 됩니다.
    대통령과 고위공직자는 큰 흐름을 결정하고 그 의지를 표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행정실무자들이 알아서 할겁니다.
    이런 큰 흐름의 결정이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의지가 잘 전달이 된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3. 세상 사람이 보다 착해지면 어떤 세상이 될지 정말 궁금합니다.

    상반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착한" 지도자를 두려워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착하면,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떨어지고 추진력이 없고... 복마전과 같은 정치판에서 살아남지도 못하리라는 생각 때문인 듯 합니다.
    우선 "착하다"와 상대적인 의미는 "악하다"이지 '우유부단', '추진력결여'은 아니니 따로 떼어서 판단할 영역이지 제레짐작할 부분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단지 악인으로 넘쳐나는 정치판에서 어떤 모습이 될지는 정말 궁금합니다.
    그리고 "착한" 대통령을 뽑아서 여론이 수렴된다면, 그래서 다수의 국민들이 "착한"것에 대한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그래서 세상이 전 보다 "착해"진다면 어떤 세상이 열릴지 정말 궁금합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고대의 덕치(德治)에 대해 쓴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 대표인 대통령이 아닌 정신적인 지주인 왕(王)에 대해 쓴 것 같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민주주의가 사회구성원 모두의 합의에 의해서 결정된 정치체계가 아니기에 나오는 미숙함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고,
한편으로는 정신적인 스승이 부재한 시대 상황에서 나오는 방황의 단면일지도 모르고,
개인적으로 부족한 정신적 소양에서 말미암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