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묻는 흔한 질문이지만, 명확한 대답은 없다.
어린 시절의 많은 책과 미디어를 통해 얻은 어렴풋한 짐작으로는 가슴 한 가운데에 하트 모양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그래서 많은 이들의 대답은 "가슴" 혹은 "심장"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커서 알게된 사실은, 만화 영화등을 통해서 표현된 그 '마음'은, 사실은 심장의 형상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마음인것 처럼 상징화시킨 것이었다는 것.
또 다른 대답은 "머리" 혹은 "두뇌"였는데, 마음이 드러나게 되는 상황이나 그 현상이 주로 감정적인 것이었고, 의학적인 연구 결과에 의해 두뇌는 이성적인 판단과 논리적인 추론 외에도 감정적인 반응에도 관여한다고 알려지면서 이런 대답이 많아진 것 같았다.
사실, 아직까지도 두뇌에 대한 연구는 너무도 느리고 불명확해서 전적으로 믿기 힘든 구석이 있기는 하다. 인간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 순간에 두뇌에서도 특이한 반응이 검출된다는 정도로, 두뇌가 감정을 유발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도 성급한 판단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조금 더 명확한 증거로 제시되는 사례도 있는 걸로 알고 있지만 극히 소수의 사례라서...
이런 대답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 나 스스로가 느낀 바로는, 마음은 "호르몬"에 있는게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호르몬의 변화를 급격히 겪고 있다.
신체적인 변화 뿐 아니라 감정적인 변화도 크게 일어나고 있는데, 그 원인은 "호르몬"이라고들 한다. 특히나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의 비중에 따른 감정의 변화는 가히 드라마틱하다.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연민이나 동정심이 특히 그렇고 두려움과 섬세함도 변화가 있다고 느껴진다.
이런 마음의 변화는 틀림없이 호르몬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변화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며, 대부분이 비슷한 경험을 하기에 더 신뢰성이 있지 않나 싶다.
물론 사람의 마음은 여러가지이고, 시기심이나 질투 혐오와 같은 부정적인 마음, 욕망이라는 강력한 마음도 있다.
아마도 대단히 사회화되고 문명화된 마음들이 어떻게 원시적인 호르몬에 의해서 유발되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권력이나 명예에 대한 욕구들이 대표적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이면에는 원시적인 기본 욕구가 사회적인 가치 체계와 결합해서 파생된 것일 뿐이지 근원적인 욕구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마음이 존재하는 곳은 "호르몬"이라는 답변 또한 여러 답변들 중 하나일 뿐이며, 나 개인의 답변일 뿐이다.
지금은 이게 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쩐지 이게 맞는 답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사람을 가장 강력하게 움직이는 이 마음이 "호르몬"에 좌우 된다는 점은 뭔가 매우 허탈해지는 기분이다.
2019년 1월 21일 월요일
2018년 11월 28일 수요일
감정에 대처하는 남녀의 차이
딱히 논리적으로 풀 수는 없지만,
남자와 여자가 감정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 듯 하다.
대체적으로 남자들은, 일어나는 감정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그 다음의 행동으로 바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으며, 여자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마치 음미하듯(?) 찬찬히 살펴보느라 마땅히 해야한다고 여겨지는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거나 늦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여자들이 감수성이 풍부하고 자신의 감정을 잘 묘사하거나 설명하고, 그 감정이 좋으면 만끽하거나 취하지만, 좋지 않을 때에는 감정을 치유하는 방법에 더 익숙한 것이 모두 앞서와 같은 이유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경향의 단점은 객관적인 주변의 사물이나 타인에 대한 마땅한 행동이 미흡하거나 늦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남성은, 자신의 감정에 서툴다. 자신의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혹은 감정에 휩싸여 일어나는 거의 본능적인 반응(화냄, 소리침, 폭력 등)을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이런 성향의 장점은, 어떤 상황에서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능력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점은 거의 선천적인 것이 아닐까 싶게, 남녀간의 차이가 뚜렷해 보인다.
(물론 여자같은 남자, 남자같은 여자도 있으니 개인별 차이는 크지만, 남자 전체의 평균과 여자 전체의 평균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비교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이런 차이점도 호르몬에 의한 영향은 아닐까 싶다.
남자와 여자가 감정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 듯 하다.
대체적으로 남자들은, 일어나는 감정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그 다음의 행동으로 바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으며, 여자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마치 음미하듯(?) 찬찬히 살펴보느라 마땅히 해야한다고 여겨지는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거나 늦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여자들이 감수성이 풍부하고 자신의 감정을 잘 묘사하거나 설명하고, 그 감정이 좋으면 만끽하거나 취하지만, 좋지 않을 때에는 감정을 치유하는 방법에 더 익숙한 것이 모두 앞서와 같은 이유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경향의 단점은 객관적인 주변의 사물이나 타인에 대한 마땅한 행동이 미흡하거나 늦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남성은, 자신의 감정에 서툴다. 자신의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혹은 감정에 휩싸여 일어나는 거의 본능적인 반응(화냄, 소리침, 폭력 등)을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이런 성향의 장점은, 어떤 상황에서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능력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점은 거의 선천적인 것이 아닐까 싶게, 남녀간의 차이가 뚜렷해 보인다.
(물론 여자같은 남자, 남자같은 여자도 있으니 개인별 차이는 크지만, 남자 전체의 평균과 여자 전체의 평균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비교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이런 차이점도 호르몬에 의한 영향은 아닐까 싶다.
2017년 8월 11일 금요일
언짢은 말을 들었을 경우의 대처
일반인은 화를 내고 상대방을 역으로 공격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인간 관계에 경험이 많은 사람은 상대방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를 찾으려 한다.
자신을 알고자 원하는 사람은 왜 자신이 언짢게 느끼는지를 생각해 본다.
인간 관계에 경험이 많은 사람은 상대방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를 찾으려 한다.
자신을 알고자 원하는 사람은 왜 자신이 언짢게 느끼는지를 생각해 본다.
2016년 10월 21일 금요일
감정이 이성을 마비시키는 과정
거의 즉각적인 감정의 반응의 나타나는 경우들이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한데, 그 감정의 반응이 즉각적이고 강할수록 이성적인 판단은 거의 없는 듯이 마비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과연 왜 그런걸까?
법륜스님이 강연한 내용 중에 불교의 12연기와 관련된 강의가 유튜브에 올라와 았는 것으로 아는데, 스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해가 되기는 한다.
물론 그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개인적으로 이 보다 더 구체적인 설명을 접해 본 경험이 없다.
그것의 유래가 어떠하든간에 정말 의식이 관여할 틈이 없이 거의 즉각적으로 반응하게되는 감정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불같은 분노, 자지러들 듯한 웃음, 멈출 수 없는 눈물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의식의 판단 이전에 감정이 먼저 솟구치고, 즉시 그에 수반되는 일련의 반응이 나타나게 되기에, 타인이 보기엔 정상이 아닌 듯 보이고,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하는 표현이 딱 들어 맞는 경우도 있게 되는 것이다.
매우 철저한 자기 반성과 끊임 없는 자기 성찰을 하지 않으면, 이런 감정에 대한 반응을 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며, 일반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인 듯 하다.
그리고 일단 그 감정에 대한 연쇄 반응이 끝 나야만, 이성이 작동하게 되기에, 뒤늦게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하기는 할 지언정, 자신이 왜 그랬는지 파악하고 그것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에 대한 제대로된 방책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어린 아이가 무언가에 놀라서, 두려워서, 화나서, 슬퍼서 갑자기 크게 울거나 할 때, 옆에서 우는 아이에게 "너 대체 왜 우니?"라는 질문을 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질문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어린 아이 자신도 자신이 왜 우는지 판단할 이성이 작동하지 않고 있는데...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한데, 그 감정의 반응이 즉각적이고 강할수록 이성적인 판단은 거의 없는 듯이 마비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과연 왜 그런걸까?
법륜스님이 강연한 내용 중에 불교의 12연기와 관련된 강의가 유튜브에 올라와 았는 것으로 아는데, 스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해가 되기는 한다.
물론 그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개인적으로 이 보다 더 구체적인 설명을 접해 본 경험이 없다.
그것의 유래가 어떠하든간에 정말 의식이 관여할 틈이 없이 거의 즉각적으로 반응하게되는 감정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불같은 분노, 자지러들 듯한 웃음, 멈출 수 없는 눈물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의식의 판단 이전에 감정이 먼저 솟구치고, 즉시 그에 수반되는 일련의 반응이 나타나게 되기에, 타인이 보기엔 정상이 아닌 듯 보이고,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하는 표현이 딱 들어 맞는 경우도 있게 되는 것이다.
매우 철저한 자기 반성과 끊임 없는 자기 성찰을 하지 않으면, 이런 감정에 대한 반응을 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며, 일반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인 듯 하다.
그리고 일단 그 감정에 대한 연쇄 반응이 끝 나야만, 이성이 작동하게 되기에, 뒤늦게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하기는 할 지언정, 자신이 왜 그랬는지 파악하고 그것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에 대한 제대로된 방책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어린 아이가 무언가에 놀라서, 두려워서, 화나서, 슬퍼서 갑자기 크게 울거나 할 때, 옆에서 우는 아이에게 "너 대체 왜 우니?"라는 질문을 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질문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어린 아이 자신도 자신이 왜 우는지 판단할 이성이 작동하지 않고 있는데...
2014년 11월 25일 화요일
감정 노출증
가족들만 모여 있는 집안에서, 이웃들과 마주칠 수 있는 집 앞의 동네,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큰 길거리와 공공 장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적절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야 한다.
적절하다는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바꾸어 말하자면 최소한 가려서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사람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서로간에 노출이 가능한 정도가 묵시적으로 합의되어 있는 듯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친밀도에 의해 가능한 노출의 정도가 결정되곤 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이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의 노출 정도 또한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사실(?)이라 생각한다.
사실(?)에 물음표가 붙은 이유는, 누구도 명시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가르쳐 주거나 선언하는 것을 듣거나 본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겪어 본 바로는 그렇기 때문이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비교적 넓게 노출이 허용되는 감정이긴 하지만, 이 역시 제한되는 관계가 있다.
슬픔과 분노는 훨씬 더 노출이 제한되는 감정임에 틀림없다.
서로간에 묵시적으로 합의된 감정의 노출제한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의 당혹감은 마치...
꽤나 격식을 차리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웃통을 벗어 제치고 바지를 내린다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중요하고 숨기고 싶어할만한 부분을 보여준다면?
마찬가지로 사무적인 관계, 공적인 관계의 사람이 지극히 내밀한 감정을 보여준다면?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우호적이어야 하는 관계를 가져야 하는 관계에서 분노가 표출된다면?
허용된 노출은 쉽게 무마되고 복구된다.
하지만 제한을 넘긴 감정의 노출은 관계의 재설정을 요구한다.
상호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감정 노출의 범위가 넓어지는 효과를 가져오지만,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아얘 관계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
감정 노출의 제한이 비대칭 적일 수 있다.
즉, 특정 쌍방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도 감정 표현의 제한이 방향에 따라 다르게 설정된다는 것.
종종 부모와 자식간에 이런 경우가 많으며, 상하 종속적인 관계에서도 흔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간에 이루어지는 감정의 노출 제한은 다른 경우가 많다.
매우 엄한 선생님과 순종적인 학생과 같은 전통적인 스승-제자의 관계에서,
스승은 제자에게 애착과 분노를 보일 수 있지만 슬픔과 기쁨을 보여주는 것은 제한될 수 있고, 제자는 스승에게 기쁨과 슬픔은 허용되지만 분노는 제한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를 두고 상하관계, 지배-종속의 관계라고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한 것 같다.
하지만 지배-종속관계에서는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이 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듯 하다.
적절하다는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바꾸어 말하자면 최소한 가려서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사람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서로간에 노출이 가능한 정도가 묵시적으로 합의되어 있는 듯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친밀도에 의해 가능한 노출의 정도가 결정되곤 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이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의 노출 정도 또한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사실(?)이라 생각한다.
사실(?)에 물음표가 붙은 이유는, 누구도 명시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가르쳐 주거나 선언하는 것을 듣거나 본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겪어 본 바로는 그렇기 때문이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비교적 넓게 노출이 허용되는 감정이긴 하지만, 이 역시 제한되는 관계가 있다.
슬픔과 분노는 훨씬 더 노출이 제한되는 감정임에 틀림없다.
서로간에 묵시적으로 합의된 감정의 노출제한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의 당혹감은 마치...
꽤나 격식을 차리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웃통을 벗어 제치고 바지를 내린다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중요하고 숨기고 싶어할만한 부분을 보여준다면?
마찬가지로 사무적인 관계, 공적인 관계의 사람이 지극히 내밀한 감정을 보여준다면?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우호적이어야 하는 관계를 가져야 하는 관계에서 분노가 표출된다면?
허용된 노출은 쉽게 무마되고 복구된다.
하지만 제한을 넘긴 감정의 노출은 관계의 재설정을 요구한다.
상호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감정 노출의 범위가 넓어지는 효과를 가져오지만,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아얘 관계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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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노출의 제한이 비대칭 적일 수 있다.
즉, 특정 쌍방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도 감정 표현의 제한이 방향에 따라 다르게 설정된다는 것.
종종 부모와 자식간에 이런 경우가 많으며, 상하 종속적인 관계에서도 흔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간에 이루어지는 감정의 노출 제한은 다른 경우가 많다.
매우 엄한 선생님과 순종적인 학생과 같은 전통적인 스승-제자의 관계에서,
스승은 제자에게 애착과 분노를 보일 수 있지만 슬픔과 기쁨을 보여주는 것은 제한될 수 있고, 제자는 스승에게 기쁨과 슬픔은 허용되지만 분노는 제한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를 두고 상하관계, 지배-종속의 관계라고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한 것 같다.
하지만 지배-종속관계에서는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이 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듯 하다.
2012년 7월 11일 수요일
스트레스
스트레스는 무엇일까?
힘들거나 싫어하는 것을 견뎌내고 있는 상태인가?
아니, 이것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니
스트레스라 함은 힘들거나 싫어하는 것이 짓누르는 힘이 될 듯 하다.
힘들다는 것은 물리적인 의미가 강하니,
물리적인 힘에 의해 받게되는 신체적인 고통들이 여기에 속하게 될 듯 하다.
육체 노동에 따른 통증, 섭식 장애에 따른 고통, 수면 장애로 인한 무기력 등등.
싫어하는 것이라 함은 정신적인 의미가 강하니,
호불호에 따라, 취향에 따라, 가치관에 따라 심리적 거부감이 드는 행위나 상태를 의미하는 듯 하다.
전자에 의해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몸의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며,
현대의 많은 경우 병원에서 의료행위를 통해 치유된다.
후자에 의해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정신적인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며,
뚜렷한 치료 방법은 없다.
극심한 경우 정신병으로 발전하게 되며, 의료행위에 의한 치료효과도 상대적으로 낮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미연에 예방할 좋은 방법은 없는가?
앞서 정의 했듯이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싫어하는 것"에 의해 받게 되는 것이라면,
"싫어하는 것"을 없애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되지 않겠는가?
.....
이게 가능할까? "싫어하는 것"을 없애는 것이 가능할까?
"싫어하는 것"은 어떤 것들일까?
두려운 것? 괴로운 것? 미워하는 것? 슬픈 것? 창피한 것?
.....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감정들을,
그냥 감정이라고 여기고 무시하려면,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이 되리라.
그렇다면 스트레스라는 것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
인간인 이상,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싫은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싫은 것"을 이겨낼 수 없다면 피하는 수 밖에 없다.
실제 인생에 있어서, 스트레스라 말하는 것은 "싫지만 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피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욕심 때문은 아니었을까?
힘들거나 싫어하는 것을 견뎌내고 있는 상태인가?
아니, 이것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니
스트레스라 함은 힘들거나 싫어하는 것이 짓누르는 힘이 될 듯 하다.
힘들다는 것은 물리적인 의미가 강하니,
물리적인 힘에 의해 받게되는 신체적인 고통들이 여기에 속하게 될 듯 하다.
육체 노동에 따른 통증, 섭식 장애에 따른 고통, 수면 장애로 인한 무기력 등등.
싫어하는 것이라 함은 정신적인 의미가 강하니,
호불호에 따라, 취향에 따라, 가치관에 따라 심리적 거부감이 드는 행위나 상태를 의미하는 듯 하다.
전자에 의해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몸의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며,
현대의 많은 경우 병원에서 의료행위를 통해 치유된다.
후자에 의해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정신적인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며,
뚜렷한 치료 방법은 없다.
극심한 경우 정신병으로 발전하게 되며, 의료행위에 의한 치료효과도 상대적으로 낮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미연에 예방할 좋은 방법은 없는가?
앞서 정의 했듯이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싫어하는 것"에 의해 받게 되는 것이라면,
"싫어하는 것"을 없애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되지 않겠는가?
.....
이게 가능할까? "싫어하는 것"을 없애는 것이 가능할까?
"싫어하는 것"은 어떤 것들일까?
두려운 것? 괴로운 것? 미워하는 것? 슬픈 것? 창피한 것?
.....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감정들을,
그냥 감정이라고 여기고 무시하려면,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이 되리라.
그렇다면 스트레스라는 것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
인간인 이상,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싫은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싫은 것"을 이겨낼 수 없다면 피하는 수 밖에 없다.
실제 인생에 있어서, 스트레스라 말하는 것은 "싫지만 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피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욕심 때문은 아니었을까?
2012년 7월 9일 월요일
사랑은 궁극의 가치인가?
전우주적인 최고의 가치, 신(神)의 본질은 '사랑'이라고들 한다.
만약 이말이 사실이라면,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한 구별이 필요해 보인다.
인간세상에서 흔히 보이는 '사랑'은 그 반대편에 '증오' 혹은 '미움'이 존재한다.
즉, 상대적인 감정이며, 비대칭적인 감정이고, 편향적인 감정이라는 의미이다.
'나'라는 인간을 하나의 폐쇄된 대상으로 놓았을 때,
무념무상, 무아일체, 중용, 평상심의 상태라면 치우침이 없는 완전한 원(圓) 혹은 구(球)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은 여기에 하나의 특이점을 만들고, 비대칭을 만들며, 균형을 깨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비대칭과 편향은 당연스럽게 대칭적인 증오라는 감정을 만들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국과 일본의 감정 싸움이 다시 불거지는 현실이다.
일본군의 위안부에 대한 규탄과 왜곡,
독도 영유권에 대한 분쟁,
급기야 일본인은 한국의 위안부 소녀상 옆에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말뚝을 박았고,
이에 한국인은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글씨를 부착한 트럭을 몰고 주한일본대사관 정문으로 돌진을 했다.
이들 두명의 행위는 자국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상대국에 대한 증오라는 감정을 만들어 내었다.
이들의 사랑을 파괴적인 사랑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궁극의 가치로 삼는 사랑과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동물애호가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널리 알려진 연예인도 동물애호가로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어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동물 애호가들은 동물들을 사랑한다.
특히나 버림받고 학대받는 동물들에게 한없는 연민과 동정을 가지며 애정으로 보호하려 한다.
그렇다면 동물 애호가들은 애완동물을 유기하는 사람,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 심지어는 돈벌이로 이용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대할것인가?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클수록, 학대하는 이들에 대한 증오는 커지지 않을까?
이것은 사랑이 만들어낸 증오가 아닌가?
과연, 사랑은 추구해야 하는 가치인가, 버려야 하는 편향적 감정인가?
아니, 궁극적 가치라는 사랑과 이런 사랑은 다른 것인가?
다르다면 두가지 사랑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만약 이말이 사실이라면,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한 구별이 필요해 보인다.
인간세상에서 흔히 보이는 '사랑'은 그 반대편에 '증오' 혹은 '미움'이 존재한다.
즉, 상대적인 감정이며, 비대칭적인 감정이고, 편향적인 감정이라는 의미이다.
'나'라는 인간을 하나의 폐쇄된 대상으로 놓았을 때,
무념무상, 무아일체, 중용, 평상심의 상태라면 치우침이 없는 완전한 원(圓) 혹은 구(球)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은 여기에 하나의 특이점을 만들고, 비대칭을 만들며, 균형을 깨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비대칭과 편향은 당연스럽게 대칭적인 증오라는 감정을 만들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국과 일본의 감정 싸움이 다시 불거지는 현실이다.
일본군의 위안부에 대한 규탄과 왜곡,
독도 영유권에 대한 분쟁,
급기야 일본인은 한국의 위안부 소녀상 옆에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말뚝을 박았고,
이에 한국인은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글씨를 부착한 트럭을 몰고 주한일본대사관 정문으로 돌진을 했다.
![]() |
| 위안부 소녀상 옆에 세운 말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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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대사관을 향해 돌진한 트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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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럭의 충돌로 밀려난 일본 대사관의 정문 |
이들 두명의 행위는 자국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상대국에 대한 증오라는 감정을 만들어 내었다.
이들의 사랑을 파괴적인 사랑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궁극의 가치로 삼는 사랑과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동물애호가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널리 알려진 연예인도 동물애호가로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어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동물 애호가들은 동물들을 사랑한다.
특히나 버림받고 학대받는 동물들에게 한없는 연민과 동정을 가지며 애정으로 보호하려 한다.
그렇다면 동물 애호가들은 애완동물을 유기하는 사람,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 심지어는 돈벌이로 이용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대할것인가?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클수록, 학대하는 이들에 대한 증오는 커지지 않을까?
이것은 사랑이 만들어낸 증오가 아닌가?
과연, 사랑은 추구해야 하는 가치인가, 버려야 하는 편향적 감정인가?
아니, 궁극적 가치라는 사랑과 이런 사랑은 다른 것인가?
다르다면 두가지 사랑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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