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욕망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욕망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7년 12월 6일 수요일

성취(成就)의 조건

1. 욕망, 하고자 하는 마음, 발심

2. 능력,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힘, 문제나 장애를 해결하는 방법이나 기술에 대한 지식

3. 환경, 시기나 위치 혹은 자연적인 조건. 일이 진행되는 것에 도움이 되는 주변의 갖가지 상황들. 혹은 일의 진행에 방해가 되는 상황을 벗어난 상태 등.


1번은 사람마다 각자가 원하는 바가 다르고, 자신이 하고자 마음을 먹는 순간 부터 자연스럽게 욕망을 가지게 되므로 특별한 방법은 필요하지 않다.
단지 얼마나 절실하게 원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3번은 그 요소가 너무 다양하고 예측이 어려운 점도 많아서 종종 운(運)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그치지 않으니 운에 의존하는 요소들이 점점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다.

2번이 인간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다.
대부분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이런 능력을 끌어 올리기 위함이고, 누군가에게 배우고 듣고 경험하는 것도 이를 위한 것이다.

2015년 5월 4일 월요일

인간은 모순의 존재?

가까이 지내는 친구 C와 L이 만난 자리에서의 이야기다.

특히 C와는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아서인지 많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곤 한다.
종교나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 관심이 일치하는 바도 그렇고 방향이 비슷하기도 해서 자연스레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살짝 취기가 올라서, C가 약간 수다스러워지며 꺼낸 주제가, 40대 중반을 지나며 맛있는 음식에 대한 탐닉이 우려스럽다는 것이었다.

이제 중고등학생인 자녀들은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것에 반해서 자신이 너무 말초적인 감각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었나 하고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주제로 대화가 오간 뒤에 C가 다시 꺼내든 주제는, 자신에게 미적인 감각이 부족하여 자신의 스타일을 가꾸는 것에 참 어색하고 서투르다는 것이었다.
단적으로, 자신이 입는 옷들은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지금은 와이프가 골라주는 것을 그대로 입는다는 것이었으며, 유심히 살펴보면 멋을 부리지 않은 듯 하지만, 참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듣던 나는, C에게 질문을 했다.
앞서 음식에 대한 탐닉의 절제를 얘기했던 것과, 이제 외모에 대한 추구를 얘기하는 것이 서로 양립하는 것 아니냐고.

사실은 그 두개의 주제를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C의 의견이 일견 모순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달리보면 전혀 다른 주제가 될 수도 있으므로 양립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쉽게는 음식에 대한 얘기와 의복에 대한 얘기로 전혀 다를 수 있다.
혹은 음식에 탐닉하는 것은 기본적인 욕구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외모에 대한 것은 타인에게 비춰지는 것을 의식한, 좀 더 고차원적인(?) 욕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전혀 다른 주제에 대한 얘기로 받아 들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넓게 보면, 의.식.주라는 기본적인 생존과 관련된 주제로도 묶을 수 있으며, 물질과 정신으로 나눌 때 물질에 속하는 영역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기도 한다.
(내가 C와 나누던 관심의 분야가 주로 세속적인 것을 가벼이 보고, 탈속을 추구했기에 그러했다.)

사실 C가 음식에 대한 탐닉을 경계해야 겠다고 할 때에만 해도, 그가 감각적인 것을 경계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해야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뒤이어 외모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날개를 달고 인간계를 떠나서 올라가던 그가, 바로 추락해서 저잣거리를 배회하는 듯한 모습에 실망감을 느꼈던 것 같다.

결국은 그가 영적인 것, 성(聖)적인 것을 추구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는 기본적인 욕구가 만족되자 명예욕, 권력욕과 같은 사회적 욕구를 추구했던 것인가 하는 생각에 씁쓸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울해 진 건, 나의 질문에 대한 C의 반응이었다.
그는 나의 질문이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관념적인 것이라는 진단을 했던 것이다.
이전에도 몇번 이런 답을 들은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한번은 대체 그 관념적이란 게 무엇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그의 대답도 명확하진 않았다. 모호하게도 그는 직접 겪어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얘기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음식의 탐닉에 대한 경계"에 대해 내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의 추구"에 대해 내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 두가지 주제가 가지고 있는 상반된 면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두가지 주제는 모두 그의 경험과 생각에서 나온 것이리라.


이번에도 나는 그에게 대체 생각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더불어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L을 객관적인 관찰자이며 증인으로 삼아서...

잠시 고민하던 C는 영화 <밀양>에서 주제로 다루고 있는 "용서"를 예로 들어 설명하려고 했다. 용서라는 단어를 아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

하지만, 이 영화의 예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나의 질문에 대한 관념적인 것이라는 진단을 내리기 보다는, 자신의 주장들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한다.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인 욕구라는 식욕, 성욕, 수면욕 조차도, 그 욕구를 해소하는 방법은 사회적으로 용인된 방법을 통해서 채워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또한 사회적인 욕망은 타인에 의해서 심어진 경우가 많다고 본다.
부모나 친척, 이웃과 또래의 친구들로부터....

인간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높은 곳과 큰 소리는 동물이 가지는 기본적인 두려움이라고 한다.

그 외에 사회적인 규범이라는 명목하에, 개개인을 사회의 틀에 맞추기 위해 가해지는 두려움도 있다.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은 온전히 자신의 경험에만 의존하여 차곡 차곡 쌓인게 아니다.

주위의 관계로부터 주입된 것들이 아무런 체계나 근거도 없이 무작위로 혼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욕망과 욕망 사이에 모순이 존재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두려움과 두려움 사이의 모순도 그러하다.

욕망과 두려움 또한 마찬가지로 모순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모순을 발견하기란 너무나 어렵다.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겨우 볼 수 있으며, 그나마도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의 모순이 비춰지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바로 외면하곤 한다.


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타자의 욕망 타자의 두려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게 되면서 나에게 일어난 큰 변화는, 자신에 대한 시각이 보다 객관화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이 늘어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객관화의 정도야 사람마다 천양지차이겠지만...

그리고 이런 변화는 축복이며 저주와도 같았다.
자신이 객관화 될수록 자신을 평가하는 일도 잦아지며 이 평가는 냉정해진다. 또한 냉정한 시각으로 과거의 자신을 되짚는 일은 분명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인식이 보다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는 느낌, 인식의 범위가 넓어지고 진실에 가까와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기쁨이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거듭하다보면, 내가 가지고 있던 욕망과 두려움이 점차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물론 완전한 근원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껍데기를 하나씩 벗겨내고 안으로 들어가 그 기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욕망과 두려움이 정녕 내가 스스로 원한것이었는지, 내가 겪었던 고통에 기인한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후에 좀 더 근원적인 실체에 접근하면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만, 현재로써는 욕망과 두려움의 상당 부분이 다른 사람에 의해 심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아마도 내게 이런 욕망과 두려움을 심어준 사람은 부모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무저항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욕망과 두려움 혹은 욕망을 유발할 무엇과 두려움을 가지게 될 무엇을 심어준 사람으로는 가장 큰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만한 영향력을 지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능할 것이다.


하나의 인간이 걸어가는 인생 길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이끄는 길, 그리고 두려움으로 막혀진 길의 사이라고 생각한다.
우연처럼 인생을 좌우할 큰 사건들이 인간에게 벌어지지만 그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반응은 각자가 가진 욕망과 두려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인간이 가진 욕망과 두려움은 인생을 좌우할 열쇠인 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욕망과 두려움을 후세에 전달하는 일은, 그 후세들이 갈 인생의 폭을 크게 제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크게 열려 있음에도 욕망과 두려움으로 아주 제한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틀림없이 슬픈 일이다.

인간이 태어나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그것을 열망할 때에 순순하게 그 자신이 될 것이다.
타자의 욕망은 그 원동력이 약하기에 쉽게 좌절될 수 있으며 이루고 난 후에도 자신이 아닌 타자가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스스로가 겪은 아픔과 고통만으로도 두려워서 피하게 되는 선택은 있게 마련인데, 거기에 타자의 두려움까지 더해져서 더욱더 선택이 폭이 좁아진다면, 가보지 못한 길은 너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보니 내가 살아온 길이 나의 길이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서글프다.
모쪼록 후세에게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투영시켜 그들이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2013년 7월 22일 월요일

우주는 마음이다

인간은 욕망이 모이고 모여서, 쌓이고 쌓여서 태어나게 된 욕망의 육화(肉化)이다.


빅뱅 이전에 모든 것이 하나인 순간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동요도 없고 치우침도 없었다.

마치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동심원을 그리며 물결이 퍼져 나가듯,

빅뱅과 함께 퍼져 나가기 시작한 우주는,

물결의 파고 처럼 치우침을 만들었고,

치우침의 정점은 에너지가 모이며 생명을 만들었다.

생명의 탄생은 에너지의 집중으로 만들어지며, 이 원초적 에너지의 근원은 치우침이며, 치우침은 욕망으로부터 만들어졌다.

인간 개개인은 각자 저마다의 욕망이 모여서 만들어낸 결집(結集)이다.


욕망의 소멸은 치우침의 소멸이며, 치우침의 소멸은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2012년 7월 11일 수요일

스트레스

스트레스는 무엇일까?

힘들거나 싫어하는 것을 견뎌내고 있는 상태인가?
아니, 이것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니
스트레스라 함은 힘들거나 싫어하는 것이 짓누르는 힘이 될 듯 하다.

힘들다는 것은 물리적인 의미가 강하니,
물리적인 힘에 의해 받게되는 신체적인 고통들이 여기에 속하게 될 듯 하다.
육체 노동에 따른 통증, 섭식 장애에 따른 고통, 수면 장애로 인한 무기력 등등.

싫어하는 것이라 함은 정신적인 의미가 강하니,
호불호에 따라, 취향에 따라, 가치관에 따라 심리적 거부감이 드는 행위나 상태를 의미하는 듯 하다.

전자에 의해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몸의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며,
현대의 많은 경우 병원에서 의료행위를 통해 치유된다.

후자에 의해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정신적인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며,
뚜렷한 치료 방법은 없다.
극심한 경우 정신병으로 발전하게 되며, 의료행위에 의한 치료효과도 상대적으로 낮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미연에 예방할 좋은 방법은 없는가?
앞서 정의 했듯이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싫어하는 것"에 의해 받게 되는 것이라면,
"싫어하는 것"을 없애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되지 않겠는가?

.....
이게 가능할까? "싫어하는 것"을 없애는 것이 가능할까?
"싫어하는 것"은 어떤 것들일까?
두려운 것? 괴로운 것? 미워하는 것? 슬픈 것? 창피한 것?
.....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감정들을,
그냥 감정이라고 여기고 무시하려면,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이 되리라.
그렇다면 스트레스라는 것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


인간인 이상,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싫은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싫은 것"을 이겨낼 수 없다면 피하는 수 밖에 없다.


실제 인생에 있어서, 스트레스라 말하는 것은 "싫지만 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피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욕심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