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모임. 수많은 얘기들. 음식과 술, 산책...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날씨와 깨끗한 공기, 온화하다.
가장 친한 친구가 선을 넘었다는 생각을 했다.
다분히 공격적이라 느꼈다. 아니, 당시에는 그도 나도 공격하거나 공격받지 않았을지도...
지나고 보니, 내 기준에서는 공격이었다.
난 수비적이었고, 막아내기 바빴으며, 완전히 막아내지도 못했다.
아마도 변명 투성이었을 것이며, 그건 간단히 해결할 수도 있었다.
'오케이, 그럴께' 혹은 '그렇게 해보지'라는 말로...하지만 거짓말을 하긴 싫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러모로 생각해봐도 어처구니 없는 황당한 요구였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의 대사처럼 '인간에게 인간 이상의 것을 바라지 말아라'고 말해 줬어야 하는걸까?
과연 어찌해야 할까?
결국은 이렇게 멀어지고 다시 각자의 삶을 보면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들으며 살것인가?
아니면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그냥 다시 만나면 미소짓고 예전처럼...하지만 속마음은 예전같을 수 없는...?
그의 지적처럼 나는 결국 그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늙은이가 되어가는 것이며, 결코 달라지지도 발전하지도 않을 것인가?
어쩌면 그는 아무렇지도 않을 상황이지만, 내 마음 속에선 어지러이 회오리 돌풍이 풀고 있는 느낌이다.
얼핏...만 2번 본 영화가 생각이 났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그 두번 모두 후반부부터 보게되었던 것 같다.
비노쉬와 스튜어트가 어느 한가로운 시골 주택에서 함께 생활하며 대본 연습을 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논쟁하고...
지금 이 글을 쓰기 전에 이 영황에 대해 잠시 살펴보니 과거와 현재에 맡은 역할의 변화와 그에 따라 운명처럼 맞이하게 되는 미묘한 상황들이,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에 있었나보다. 그리고 제목의 실스마리아는 지명으로, 그것이 상징하는 것 또한 영황의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영황에 있어서는 중요하다 해도,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비노쉬 크리스틴 모레츠간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상황들, 그리고 그것들이 뿜어내는 힘이 사람들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언제 드러날지 지켜보는 초조함. 그리고 비열해 보이지만, 상대방은 모르게 자신만의 복수를 하는 듯한 모습들...
(비노쉬는 모레츠에 대해 굴욕감 같은 걸 가지고 있어 보였고, 그런 상황을 만든 연출가에게도 일정 정도의 반감이 있었던 듯 하다. 후에 연출가가 검토를 부탁한 원고는 일부러 보지도 않으며, 자신의 손상된 자존심을 세워줄지도 모를 무명의 감독이 제안하는 배역에는 대단한 호의를 보인다.)
왜 이 영화가 생각이 났을까?
내 마음속에 움직이고 있는 혼란스러움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데, 이 영화가 그걸 보여 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걸까?
아니면 그 영화에서도 지금 내가 느낀 것같은 그런 혼란스러움이 느껴졌던 걸까?
2019년 2월 23일 토요일
2019년 2월 19일 화요일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 vs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어른의 두려움 vs 아이의 두려움
전자는 대상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대상 혹은 사건에서 파생될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기도 한다.
뜨겁게 팔팔 끓고 있는 주전자를 보면서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다.
그건 주전자나 물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뜨겁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다.
만약 뜨거운 물이나 주전자에 데었을 때의 사태, 쉽게 가시지 않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크게 데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일 수록, 화상으로 인한 통증에 유난히 민감한 사람일 수록 더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니, 내재화된 혹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신의 약점인 셈이다.
누군가는 추운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니 말이다.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런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이 있을까?
두려움을 이겨낸다는 것은,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만 한다.
'설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야'라는 생각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하나 극복해 내는 힘든 과정일 것이며, 불을 이겨내고 담금질과 연마를 견뎌내어 강철이 되어가는 그런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
각오와 다짐을 하고, 용기를 내어 나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뀌는 힘든 여정을 견뎌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후자의 경우는 두려움의 한계가 없다.
무한대의 두려움이 가능하다.
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용기"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 용기는 그저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을 먹는 순간의 일이며, 그것으로 완성된다. 그 후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제 슬쩍 들춰 본 그 대상의 실체를 접했을 때 겪게되는 인상과 느낌, 경험은 그 자신에게 내재화 될 것이다.
시간차이가 있겠지만, 어쩌면 순간적으로 그 두려움은 바로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 = 어른의 두려움으로 치환되어 가는지도 모르겠다.
전자는 대상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대상 혹은 사건에서 파생될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기도 한다.
뜨겁게 팔팔 끓고 있는 주전자를 보면서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다.
그건 주전자나 물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뜨겁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다.
만약 뜨거운 물이나 주전자에 데었을 때의 사태, 쉽게 가시지 않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크게 데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일 수록, 화상으로 인한 통증에 유난히 민감한 사람일 수록 더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니, 내재화된 혹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신의 약점인 셈이다.
누군가는 추운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니 말이다.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런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이 있을까?
두려움을 이겨낸다는 것은,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만 한다.
'설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야'라는 생각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하나 극복해 내는 힘든 과정일 것이며, 불을 이겨내고 담금질과 연마를 견뎌내어 강철이 되어가는 그런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
각오와 다짐을 하고, 용기를 내어 나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뀌는 힘든 여정을 견뎌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후자의 경우는 두려움의 한계가 없다.
무한대의 두려움이 가능하다.
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용기"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 용기는 그저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을 먹는 순간의 일이며, 그것으로 완성된다. 그 후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제 슬쩍 들춰 본 그 대상의 실체를 접했을 때 겪게되는 인상과 느낌, 경험은 그 자신에게 내재화 될 것이다.
시간차이가 있겠지만, 어쩌면 순간적으로 그 두려움은 바로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 = 어른의 두려움으로 치환되어 가는지도 모르겠다.
2019년 2월 17일 일요일
생각하지 못했던 것, 의도하지 않았던 것, 궁금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창조와 진화
앞선 포스팅에선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에 대한 생각을 찌끄려 봤다.
그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서 의문들이 따라 올라왔다.
과연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
만약 누군가, 혹은 인류가, 아니 어떤 존재가 이런 방법을 고안해 낸다면, 그 존재는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나 연극 영화와 같은 가공의 스토리를 만드는 작가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떠면 작가의 의도는 그 자신의 정체성임과 동시에 그 자신의 한계일 수 있는데, 자신의 의도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일일지 모른다.
데미안의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가는 새와 같이...
우리는 궁금해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을까?
사실 인간은 많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며 발전해 왔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답은 언젠가는 나오는 것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
문제는 질문이었다.
어떤 사람의 미래는, 그가 던지는 질문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니, 과연 인간이 지금껏 가지지 않았던 질문을 할 수 있느냐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은 "창조"라는 단어로 묶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로 예술의 방면에서 종종 이런 창조성의 천재들을 접하게 되지만, 과연 "완벽한 창조"라는 것을 했던 예술가가 있는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 "창조의 방법" 혹은 "창조의 과정"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인식하고 전수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리고 결국은 이 "창조"가 "진화"의 열쇠가 아닐까 싶다.
그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서 의문들이 따라 올라왔다.
과연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
만약 누군가, 혹은 인류가, 아니 어떤 존재가 이런 방법을 고안해 낸다면, 그 존재는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나 연극 영화와 같은 가공의 스토리를 만드는 작가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떠면 작가의 의도는 그 자신의 정체성임과 동시에 그 자신의 한계일 수 있는데, 자신의 의도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일일지 모른다.
데미안의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가는 새와 같이...
우리는 궁금해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을까?
사실 인간은 많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며 발전해 왔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답은 언젠가는 나오는 것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
문제는 질문이었다.
어떤 사람의 미래는, 그가 던지는 질문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니, 과연 인간이 지금껏 가지지 않았던 질문을 할 수 있느냐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은 "창조"라는 단어로 묶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로 예술의 방면에서 종종 이런 창조성의 천재들을 접하게 되지만, 과연 "완벽한 창조"라는 것을 했던 예술가가 있는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 "창조의 방법" 혹은 "창조의 과정"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인식하고 전수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리고 결국은 이 "창조"가 "진화"의 열쇠가 아닐까 싶다.
2019년 2월 7일 목요일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
인공지능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니,
인공지능은 단순한 계산기에 불과하던 컴퓨터로 하여금 컴퓨터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들을 처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들이 인공지능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대상들은, 명확하게 드러난 절차적인 방법이 없는 것들이었다.
패턴인식, 사물인식, 음성인식, 언어처리, 번역/통역 등은 인간 스스로도 자신들이 어떤 방식으로 습득하고 활용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를 알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사실, 절차적인 방법이 명확한 분야는 이미 컴퓨터를 활용하여 처리하도록 되어있거나 가능하다. 단지, 효율의 문제이거나, 너무나 많은 계산과 너무 많은 기억장소를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좀더 효율적인 방법에 대한 고안을 하고 있거나, 시간이 지나 하드웨어가 발전하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들도 있다.
결국 문제는, 절차가 명확하지 않은 문제들을 어떻게 컴퓨터로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
인공지능은 인간조차 모르는 절차를 컴퓨터가 스스로 찾아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어쩌면 인공지능을 통해 컴퓨터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끝은 어디일까?
아마도 인간이 원하는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수준?
예전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A hitchhiker's guide to galaxy)라는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계속 발전을 하는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발전할까 라는 질문의 답은 어쩌면 인간의 한계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호기심의 한계.
이런 생각이 들자,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는 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
만약 인간이 계속 발전하고자 한다면, 인간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를 발견하는 방법을 알아내야만 하는건 아닐까?
자신이 인식하지도 못하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할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인공지능은 단순한 계산기에 불과하던 컴퓨터로 하여금 컴퓨터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들을 처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들이 인공지능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대상들은, 명확하게 드러난 절차적인 방법이 없는 것들이었다.
패턴인식, 사물인식, 음성인식, 언어처리, 번역/통역 등은 인간 스스로도 자신들이 어떤 방식으로 습득하고 활용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를 알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사실, 절차적인 방법이 명확한 분야는 이미 컴퓨터를 활용하여 처리하도록 되어있거나 가능하다. 단지, 효율의 문제이거나, 너무나 많은 계산과 너무 많은 기억장소를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좀더 효율적인 방법에 대한 고안을 하고 있거나, 시간이 지나 하드웨어가 발전하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들도 있다.
결국 문제는, 절차가 명확하지 않은 문제들을 어떻게 컴퓨터로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
인공지능은 인간조차 모르는 절차를 컴퓨터가 스스로 찾아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어쩌면 인공지능을 통해 컴퓨터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끝은 어디일까?
아마도 인간이 원하는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수준?
예전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A hitchhiker's guide to galaxy)라는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계속 발전을 하는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발전할까 라는 질문의 답은 어쩌면 인간의 한계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호기심의 한계.
이런 생각이 들자,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는 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
만약 인간이 계속 발전하고자 한다면, 인간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를 발견하는 방법을 알아내야만 하는건 아닐까?
자신이 인식하지도 못하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할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2019년 2월 2일 토요일
말의 겉과 속, 허와 실, 의미와 소리
나이가 들면서 확연히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말"이 가지는 가벼움, 비현실성, 덧없음, 비어있음, 공허험,... 따위이다.
물론,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마찬가지로 말로 이루어져 있으니, 위와 같은 속성을 가질 수도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말"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말" 자체가 진실, 노력, 힘, 에너지와 시간 등의 가치들을 표현 할 때에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런 가치들이 없는 말은 그저 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오늘 쓰고자 하는 글의 주제에 대한 여러 사례들은 바로 위의 첫번째 문단과 두번째 문단이 가지는 관계들과 유사하다.
즉, 어떤 한가지 단언, 단정, 선언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많은 모순에 시달리게 될 테지만, 그걸 이렇게 저렇게 뒤집어서도 보고 받침이 되는 배경의 사상이나 지식까지 꼼꼼하게 따져보면 진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몇년 전부터 인터넷에 가끔씩 돌아다니는 글이 있는데, 한마디로 하면 "공부는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재능에 더 많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흔하게 돌아다니는 사진을 보면 더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의 논리는, 재능, 선천적, 타고난 것, 유전자 따위로 결정되는거라면 노력은 왜 하겠는가, 그냥 재능만 발굴하면 되는거냐, 혹은 이것과 반대로 유전적인 소인이 없어 보이는 사람의 노력에 의한 성공 사례 등...
과연 이 논리 (공부는 재능이다)는 맞을까 틀릴까?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생각도 맞고, 틀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주장도 맞아 보인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이 믿고 싶은 편의 주장을 끌어다가 좋은 증거로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저런 연구 결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적용되는 상황은 제한적이다.
-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공부가 필요한 상황.
- 그 목표가 간절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상황.
- 부수적인 환경이 동일한 상황. (공부의 환경, 주변의 도움 혹은 방해 등)
아마도 위의 3가지가 동일한 사람들이라면, 결국 승부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위 논리의 다른 면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났어도 공부할 마음이 없거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공부에서 어떤 성과도 낼 수 없다는 것.
최근에 내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커피이다.
그리고 그 커피에는 불문율처럼 내려오는 말이 있다.
"바리스타는 로스터를, 로스터는 커퍼를 이길 수 없다."
이 말의 뜻은, 커피를 추출하는 바리스타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로스터가 볶은 커피에 좌우될 수 밖에 없으며, 로스터가 아무리 노력한다해도, 좋은 커피를 선택하는 커퍼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들으면 바리스타와 로스터는 힘이 빠질 수 밖에.
또한 커퍼도 사실상 커피를 재배하는 농장주에게 좌우될 수 밖에 없는 셈.
하지만, 이 말도 완전히 옳지는 않음을 경험하게 된다.
제 아무리 기가 막힌 커피라 하더라도, 엉터리 커퍼가 그릇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좋은 점수의 커피라고 해도, 서투른 로스터는 커피를 다 태우거나 덜 익혀 망칠 수 있다.
로스팅까지 완벽하게 된 커피라 해도, 초보 바리스타의 실수로 마실 수 없는 커피가 나올 수도 있다.
결국 완벽한 커피는 농장주, 커퍼, 로스터, 바리스타까지 모두 완벽해야만 하고, 누구 하나만 실수해도 폐급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올랐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들의 한계 안에서는, 좋은 커피가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치, 동일한 노력과 동일한 동기를 가진 학생이라면, 선천적 재능이 성적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물론,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마찬가지로 말로 이루어져 있으니, 위와 같은 속성을 가질 수도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말"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말" 자체가 진실, 노력, 힘, 에너지와 시간 등의 가치들을 표현 할 때에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런 가치들이 없는 말은 그저 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오늘 쓰고자 하는 글의 주제에 대한 여러 사례들은 바로 위의 첫번째 문단과 두번째 문단이 가지는 관계들과 유사하다.
즉, 어떤 한가지 단언, 단정, 선언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많은 모순에 시달리게 될 테지만, 그걸 이렇게 저렇게 뒤집어서도 보고 받침이 되는 배경의 사상이나 지식까지 꼼꼼하게 따져보면 진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몇년 전부터 인터넷에 가끔씩 돌아다니는 글이 있는데, 한마디로 하면 "공부는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재능에 더 많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흔하게 돌아다니는 사진을 보면 더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의 논리는, 재능, 선천적, 타고난 것, 유전자 따위로 결정되는거라면 노력은 왜 하겠는가, 그냥 재능만 발굴하면 되는거냐, 혹은 이것과 반대로 유전적인 소인이 없어 보이는 사람의 노력에 의한 성공 사례 등...
과연 이 논리 (공부는 재능이다)는 맞을까 틀릴까?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생각도 맞고, 틀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주장도 맞아 보인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이 믿고 싶은 편의 주장을 끌어다가 좋은 증거로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저런 연구 결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적용되는 상황은 제한적이다.
-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공부가 필요한 상황.
- 그 목표가 간절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상황.
- 부수적인 환경이 동일한 상황. (공부의 환경, 주변의 도움 혹은 방해 등)
아마도 위의 3가지가 동일한 사람들이라면, 결국 승부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위 논리의 다른 면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났어도 공부할 마음이 없거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공부에서 어떤 성과도 낼 수 없다는 것.
최근에 내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커피이다.
그리고 그 커피에는 불문율처럼 내려오는 말이 있다.
"바리스타는 로스터를, 로스터는 커퍼를 이길 수 없다."
이 말의 뜻은, 커피를 추출하는 바리스타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로스터가 볶은 커피에 좌우될 수 밖에 없으며, 로스터가 아무리 노력한다해도, 좋은 커피를 선택하는 커퍼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들으면 바리스타와 로스터는 힘이 빠질 수 밖에.
또한 커퍼도 사실상 커피를 재배하는 농장주에게 좌우될 수 밖에 없는 셈.
하지만, 이 말도 완전히 옳지는 않음을 경험하게 된다.
제 아무리 기가 막힌 커피라 하더라도, 엉터리 커퍼가 그릇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좋은 점수의 커피라고 해도, 서투른 로스터는 커피를 다 태우거나 덜 익혀 망칠 수 있다.
로스팅까지 완벽하게 된 커피라 해도, 초보 바리스타의 실수로 마실 수 없는 커피가 나올 수도 있다.
결국 완벽한 커피는 농장주, 커퍼, 로스터, 바리스타까지 모두 완벽해야만 하고, 누구 하나만 실수해도 폐급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올랐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들의 한계 안에서는, 좋은 커피가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치, 동일한 노력과 동일한 동기를 가진 학생이라면, 선천적 재능이 성적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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