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의 게시물에서 다룬 권력의 이동과 유사하게 한 개인의 의식에도 유사한 변화의 과정이 있는 듯 하다.
즉, 어렸을 때에는 주로 어른들의 말을 그대로 듣고 따르며 배우게 되는 관습과 규율들, 학교에서 배우는 일방적인 교육이 의식을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형성해 나간다.
그러나 스스로 경험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들, 스스로의 힘으로 사유해서 모든 것을 의심해 보고 다시 자신의 지식을 검증하면서 깨닫는 것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기존에 자신의 의식을 점유하고 있던 부분들과의 모순점들을 하나씩 발견하게 된다.
모순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면서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지를 깨우치는 순간이 오게 되고, 이 순간부터 의식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준비가 된다.
이는 흡사, [데미안]에 나오는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과도 같은 것이며, 새로운 탄생의 순간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이 자기파괴의 과정으로 보일 수 있으며, 파괴의 끝에는 새로운 자신의 탄생이 있을 것이나, 기꺼운 마음으로 이 과정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이런 과정의 끝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으며, 이 과정의 순간마다 자괴감에 몸부림을 칠 수 밖에는 없는 힘든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의 끝에 태어나는 나는, 내부적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탄생으로 인식될 수 있으나, 외형적으로는 전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이는 마치, 아들이 아버지의 권위를 온전히 무너뜨리고 난 후에, 다시 세운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여전히 <존경>이라는 단어이지만, 그 기반은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바뀐 것과 같은 것이다.
2012년 10월 31일 수요일
권위의 몰락과 재평가
부모와 자식간의, 특히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시간에 따라 변화되는 양상에 특징이 있다.
이는 수컷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다수의 동물에서도 보이는 특징으로, 힘 또는 권력의 이동과 관련이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힘이 약해지는 구세력과 처음에는 미미했으나 점차 성장하는 신세력간의 관계는 자연적인 섭리를 따른다.
통상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 과정에서 많은 부자간에 마찰이 일어나기도 하고, 간혹 평화적(?)인 정권이양이 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권력의 이동에 대한 상호이해가 없으면 서로에게 많은 상처가 남는만큼, 이러한 현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고 기꺼이 받아들이였으면 한다.
과거의 유교사회에서는 효(孝)를 강조하여 이를 많이 억제한 것으로 보이지만, 반면에 묵시적으로 새로운 세대를 인정해주는 어떤 절차나 의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또한, 최근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의 훕보로 출마한 박근혜 후보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벌써 많은 시간동안 논란이 되어온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의 과정 또한 위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즉, 절대적인 권력을 앞세워 국가를 지도했던 시기가 지나고, 새로운 세력들에 의해 이 권위에 대한 환상을 깨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환상이 깨지고 나면 틀림없이 새로운 평가가 내려지리라 본다.
모든 공(功)을 무시하려는 도전이 아니라, 맑은 눈으로 옳은 판단을 내리기 위한 자기 성찰의 과정으로 본다면 크게 걱정할 일도 아니지 않겠는가?
이는 수컷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다수의 동물에서도 보이는 특징으로, 힘 또는 권력의 이동과 관련이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힘이 약해지는 구세력과 처음에는 미미했으나 점차 성장하는 신세력간의 관계는 자연적인 섭리를 따른다.
통상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 절대적인 권력자로서 절대적인 복종과 존경을 받는 시기
- 권위에 상처를 입으면서 서서히 복종과 존경이 약해지는 시기
- 힘의 역전에 의해 과거의 권위가 무너지고 도전을 받는 시기
- 도전에 대한 패배로 권위를 상실하는 시기
- 과거의 환상적인 권위에서 벗어난 후에 다시 평가를 받는 시기
이 과정에서 많은 부자간에 마찰이 일어나기도 하고, 간혹 평화적(?)인 정권이양이 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권력의 이동에 대한 상호이해가 없으면 서로에게 많은 상처가 남는만큼, 이러한 현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고 기꺼이 받아들이였으면 한다.
과거의 유교사회에서는 효(孝)를 강조하여 이를 많이 억제한 것으로 보이지만, 반면에 묵시적으로 새로운 세대를 인정해주는 어떤 절차나 의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또한, 최근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의 훕보로 출마한 박근혜 후보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벌써 많은 시간동안 논란이 되어온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의 과정 또한 위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즉, 절대적인 권력을 앞세워 국가를 지도했던 시기가 지나고, 새로운 세력들에 의해 이 권위에 대한 환상을 깨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환상이 깨지고 나면 틀림없이 새로운 평가가 내려지리라 본다.
모든 공(功)을 무시하려는 도전이 아니라, 맑은 눈으로 옳은 판단을 내리기 위한 자기 성찰의 과정으로 본다면 크게 걱정할 일도 아니지 않겠는가?
2012년 10월 18일 목요일
정치인에 대한 생각의 자세
다시 대선이 다가오고, 후보들이 나오고, 유세 활동들이 잦아진다.
후보들에 대한 인물의 소개, 과거의 경력과 과오들이 기사화 되기도 하고, 자신의 비전과 상대에 대한 비난과 흠집 내기도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후보들의 행동은 너무나 똑같이 반복되고 있으며, 방송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편들기와 배척하기를 하고 있으며, 국민들은 여전히 기만당하고 속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들어 놓은 편가르기로 인해 근거 없는 신뢰감을 갖거나 증거 없는 의혹들을 부풀리고 있다.
이제 열기는 점차로 고조될 것이며, 국민들은 근거없는 신뢰를 갖는 후보에게 애정을 갖고 그 상대방의 몰락을 기대하게 된다. 급기야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갖는 사람과는 반목까지 하게되고 그 인간에 대한 평가마저 달리하기도 한다.
어떻게... 수년 혹은 수십년의 세월을 함께 겪으며 지내온 가족, 친지, 동료, 이웃들과의 일부이긴 하나 확실한 그들의 습성과 성향에 대한 나의 경험보다, 한번도 직접 본 적이 없는 정치인에 대한 방송과 언론의 선동적인, 그리고 의도적일 수도 있는 프라퍼갠다를 더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우리가 직접 접하는 동료와 이웃들의 관계가 극히 일부여서, 상대방의 정치적인 입장에 놀랄 수는 있으나, 그것으로 인해 그 동안 보아온 상대방의 언행, 생각, 기호, 습관 등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것들과 정치적 성향은 별개의 문제일 뿐이지.
그러나 우리는 종종 당혹하고, 혼동하며, 분별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가 상대방의 개성을 너무 무시했다는 반증은 아닐런지...
정치적 성향은 종교, 식성, 기호 처럼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며, 그 사람의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공감대가 널리 퍼져야만 후진적인 정치문화가 개선 될 것이다.
우선 개인적인 반성으로서, 정치인에 대한 습관적인 생각의 자세를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치인을 신뢰하지도, 애정을 갖지도 말아야 한다.
정치인을 신뢰하거나 애정을 가져서 얻게되는 것은 배신감, 비난, 언쟁과 같은 것들 뿐이다.
그들은 당선이 된 후에 나의 기대를 100% 채우지 못할 뿐더러, 스스로 했던 약속마저 지키지 못할 것이므로 배신감을 줄 것이다.
근거도 없는 신뢰로 애정을 가지고 정치인을 변호하다보면 어떤 식으로든 상대 후보의 옹호자로부터 비난을 들을 것이다.
결국 이런 비난을 듣고 자신을 애정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언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후보들에 대한 인물의 소개, 과거의 경력과 과오들이 기사화 되기도 하고, 자신의 비전과 상대에 대한 비난과 흠집 내기도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후보들의 행동은 너무나 똑같이 반복되고 있으며, 방송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편들기와 배척하기를 하고 있으며, 국민들은 여전히 기만당하고 속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들어 놓은 편가르기로 인해 근거 없는 신뢰감을 갖거나 증거 없는 의혹들을 부풀리고 있다.
이제 열기는 점차로 고조될 것이며, 국민들은 근거없는 신뢰를 갖는 후보에게 애정을 갖고 그 상대방의 몰락을 기대하게 된다. 급기야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갖는 사람과는 반목까지 하게되고 그 인간에 대한 평가마저 달리하기도 한다.
어떻게... 수년 혹은 수십년의 세월을 함께 겪으며 지내온 가족, 친지, 동료, 이웃들과의 일부이긴 하나 확실한 그들의 습성과 성향에 대한 나의 경험보다, 한번도 직접 본 적이 없는 정치인에 대한 방송과 언론의 선동적인, 그리고 의도적일 수도 있는 프라퍼갠다를 더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우리가 직접 접하는 동료와 이웃들의 관계가 극히 일부여서, 상대방의 정치적인 입장에 놀랄 수는 있으나, 그것으로 인해 그 동안 보아온 상대방의 언행, 생각, 기호, 습관 등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것들과 정치적 성향은 별개의 문제일 뿐이지.
그러나 우리는 종종 당혹하고, 혼동하며, 분별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가 상대방의 개성을 너무 무시했다는 반증은 아닐런지...
정치적 성향은 종교, 식성, 기호 처럼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며, 그 사람의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공감대가 널리 퍼져야만 후진적인 정치문화가 개선 될 것이다.
우선 개인적인 반성으로서, 정치인에 대한 습관적인 생각의 자세를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치인을 신뢰하지도, 애정을 갖지도 말아야 한다.
정치인을 신뢰하거나 애정을 가져서 얻게되는 것은 배신감, 비난, 언쟁과 같은 것들 뿐이다.
그들은 당선이 된 후에 나의 기대를 100% 채우지 못할 뿐더러, 스스로 했던 약속마저 지키지 못할 것이므로 배신감을 줄 것이다.
근거도 없는 신뢰로 애정을 가지고 정치인을 변호하다보면 어떤 식으로든 상대 후보의 옹호자로부터 비난을 들을 것이다.
결국 이런 비난을 듣고 자신을 애정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언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관계
항상 똑같은 사람들하고만 있으면, 그들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해 버린다. 그렇게 되고 나면, 그들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려 든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바뀌지 않으면 불만스러워한다. 사람들에겐 인생에 대한 나름의 분명한 기준들이 있기 때문이다.
-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2012년 10월 11일 목요일
선(善)의지
칸트의 선의지에 대해 고등학교때 배웠던 기억이 남아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간혹 드는 생각이 "순전하게 선한 것은 선의지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칸트의 선의지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으니 비교하거나 하지는 않겠습니다.
얼마 후면 대통령 선거가 있을 예정이며, 몇몇의 후보들이 아주 열심히들 선거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현직에 계시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왈가왈부하기엔 제가 아는 것이 부족하나, 어쩐지 느낌으로 아쉬운 점은 "착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도 일국의 대통령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으로 "선(善)"을 내세우는 경우는 보지 못했으나, 저 개인적으로는 "착하지 못한" 대통령이 참 아쉬웠던 기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다음 대통령의 후보로 나온 인물들에 대해서 "선(善)"을 기준으로 판단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쉽지도 않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뭐라 판단할 수 없겠지만 선거를 하는 날까지 이 기준으로 판단해 보려 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왜 "착해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변명과 같은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민주주의 대표인 대통령이 아닌 정신적인 지주인 왕(王)에 대해 쓴 것 같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민주주의가 사회구성원 모두의 합의에 의해서 결정된 정치체계가 아니기에 나오는 미숙함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고,
한편으로는 정신적인 스승이 부재한 시대 상황에서 나오는 방황의 단면일지도 모르고,
개인적으로 부족한 정신적 소양에서 말미암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간혹 드는 생각이 "순전하게 선한 것은 선의지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칸트의 선의지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으니 비교하거나 하지는 않겠습니다.
얼마 후면 대통령 선거가 있을 예정이며, 몇몇의 후보들이 아주 열심히들 선거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현직에 계시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왈가왈부하기엔 제가 아는 것이 부족하나, 어쩐지 느낌으로 아쉬운 점은 "착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도 일국의 대통령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으로 "선(善)"을 내세우는 경우는 보지 못했으나, 저 개인적으로는 "착하지 못한" 대통령이 참 아쉬웠던 기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다음 대통령의 후보로 나온 인물들에 대해서 "선(善)"을 기준으로 판단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쉽지도 않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뭐라 판단할 수 없겠지만 선거를 하는 날까지 이 기준으로 판단해 보려 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왜 "착해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변명과 같은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 세상 일은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좋은 의도로 좋은 정책을 시도해도 그 결과가 나쁜 경우가 있으며
나쁜 의도로 나쁜 정책을 펴도 그 결과 오히려 좋게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의도로 생각하고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도, 세상에 나오는 순간 동전의 양면과 같이 두 얼굴이 되곤 합니다.
결과로써의 선악은 아무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의도만이라도 선한 의지에서 나오길 바랍니다.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악한 결과가 아니라 악한 의도입니다.
단지, 너무 포장에 능한 정치인들이라 악한 의도를 덮는데 능숙하니, 국민들은 그 의도를 알길이 없어 결과로부터 유추하기 때문에 의도가 무시되는 듯 보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대통령이 실무에 능하고 유능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행정부엔 너무나 많은 공무원들이 있고, 그들 중 절대 대다수는 어려운 고시와 오랜 시간에 걸친 실무를 익히신 분들입니다.
대통령이 실무를 잘 알아야 할 필요도 없도 알 수도 없습니다. 단지 적절한 판단을 도와 줄 수 있는 유능한 참모가 있다면 됩니다.
대통령과 고위공직자는 큰 흐름을 결정하고 그 의지를 표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행정실무자들이 알아서 할겁니다.
이런 큰 흐름의 결정이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의지가 잘 전달이 된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 세상 사람이 보다 착해지면 어떤 세상이 될지 정말 궁금합니다.
상반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착한" 지도자를 두려워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착하면,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떨어지고 추진력이 없고... 복마전과 같은 정치판에서 살아남지도 못하리라는 생각 때문인 듯 합니다.
우선 "착하다"와 상대적인 의미는 "악하다"이지 '우유부단', '추진력결여'은 아니니 따로 떼어서 판단할 영역이지 제레짐작할 부분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단지 악인으로 넘쳐나는 정치판에서 어떤 모습이 될지는 정말 궁금합니다.
그리고 "착한" 대통령을 뽑아서 여론이 수렴된다면, 그래서 다수의 국민들이 "착한"것에 대한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그래서 세상이 전 보다 "착해"진다면 어떤 세상이 열릴지 정말 궁금합니다.
민주주의 대표인 대통령이 아닌 정신적인 지주인 왕(王)에 대해 쓴 것 같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민주주의가 사회구성원 모두의 합의에 의해서 결정된 정치체계가 아니기에 나오는 미숙함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고,
한편으로는 정신적인 스승이 부재한 시대 상황에서 나오는 방황의 단면일지도 모르고,
개인적으로 부족한 정신적 소양에서 말미암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12년 10월 7일 일요일
메타(Meta)
영어 단어 가운데 meta-로 시작하는 단어들 혹은 상황에 따라 만들어진 조어(造語)가운데 meta-를 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meta-에 대한 위키피디아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단어를 해석할 때 제일 쉬운 방법은,
어떤 분야의 공부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깨치게 되는 리(理)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정의하거나 단정짓기는 어려우나, 그 저변의 큰 흐름이나 일관성과 같은 것들을 느끼는 것입니다.
각개의 지식에 대한 습득보다 상위의 지식이기에 메타 지식 정도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어떤 분야에서건 표면이 아닌 이면에 존재하는 "비밀"을 알고 싶어지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 "비밀"이 큰 진전을 이뤄내는 동시에 지적 성취에 대한 기쁨이 크기 때문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생각의 생각이란 것도 존재할까? meta-생각? meta-thought?
나의 사고를 관조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사고 자체가 한낱 가볍고 의미없는 것이 되지는 않을까?
자유의 자유라는 것이 가능할까? meta-freedom?
자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이 궁극의 자유가 아닐까?
그렇다면 애당초 자유라는 것은 한낱 인식이 규정하는 주관적 상태일 뿐이고,
궁극의 자유는 이러한 자유라는 생각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닐런지?
meta-에 대한 위키피디아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메타(영어: meta-, 그리스어: μετά→ 뒤, 넘어서, 와 함께, 접하여, 스스로)는 영어의 접두사로, 다른 개념으로부터의 추상화를 가리키며 후자를 완성하거나 추가하는 데에 쓰인다.인식론에서 접두사 meta는 "~에 대해서"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를테면 메타데이터는 데이터에 대한 데이터이다. 메타메모리는 심리학에서 무언가를 회고할 때 이를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아니하는 데 대한 개인의 지식을 뜻한다.
이러한 단어를 해석할 때 제일 쉬운 방법은,
meta + X : X의 X입니다.
어떤 분야의 공부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깨치게 되는 리(理)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정의하거나 단정짓기는 어려우나, 그 저변의 큰 흐름이나 일관성과 같은 것들을 느끼는 것입니다.
각개의 지식에 대한 습득보다 상위의 지식이기에 메타 지식 정도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어떤 분야에서건 표면이 아닌 이면에 존재하는 "비밀"을 알고 싶어지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 "비밀"이 큰 진전을 이뤄내는 동시에 지적 성취에 대한 기쁨이 크기 때문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생각의 생각이란 것도 존재할까? meta-생각? meta-thought?
나의 사고를 관조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사고 자체가 한낱 가볍고 의미없는 것이 되지는 않을까?
자유의 자유라는 것이 가능할까? meta-freedom?
자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이 궁극의 자유가 아닐까?
그렇다면 애당초 자유라는 것은 한낱 인식이 규정하는 주관적 상태일 뿐이고,
궁극의 자유는 이러한 자유라는 생각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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