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11일 월요일

승자독식, 승자는 옳다?

흔히들 역사는 승자들의 편이라고 한다.
그 시대를 이끈 승자들은 종종 논란거리마저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고, 이를 대중에게 충분하게 혹은 의도적으로 설명함으로써 타당성을 부여받기도 한다.
이에 반대했던 패자는 최소한의 변론마저 빼앗겨버리고 악(惡)으로 규정되어 역사의 교훈으로만 남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혁명이나 반란, 대규모의 전쟁을 통해 이런 과정이 반복되어 왔는데, 이에 대한 반대론자들이 꾸준히 나오기는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인식에 각인되어 있는 이상한 논리가 하나 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천명을 거스르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순리와 천리를 따랐기에 승자들이 승리한 것이며, 그들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조차 지극히 옳은 것이고, 마땅한 천명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런 논리가 맞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시장 경쟁 체제를 보면, 전체의 규모가 매우 크기 때문에 누군가의 욕망만으로 시장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오래된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현재 사회에서의 양상을 보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면서 부의 편중 현상이 점점 늘어가는 추세이다.
이런 현상은 전체 시장의 매우 작은 부분에서부터 전체적인 부분에까지 고르게 나타나고 있는데, 마치 프랙탈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라면이나 빵과 같은 일상적인 음식에서도 시장 지배력이 높아가는 브랜드가 있으며, 그들의 시장 지배력이 언젠가는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게 될 듯이 보이곤 한다.
자동차, 반도체, 전자제품,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인 용품에서 큰 금액의 자산에까지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금융기관의 브랜드나 실물 화폐나 가상화폐의 가치에서도 이런 양상이 나타나며, 이런 현상은 주식시장으로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작은 기업으로 시작한 업체들은 생존이나 작은 성공을 꿈꿈며 시작하면서, 시장에서 존재하는 게임의 법칙을 따라야만 한다.
그것이 관습적인 업계의 관행일 수도 있으며,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법칙을 준수하며 성장하던 기업은 어느 순간 게임의 법칙을 만들 수 있는 지배력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칙은, 자신이 처음 사업을 시작하면서 느꼈던 소규모 업체의 어려움을 제거하기 위한 법칙이 아니다.
이제 자신의 지위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자신에게 도전하는 경쟁기업을 견제하기 위한 법칙이기 마련이다.


이제 무엇인가 새로 시작하려 한다면,

그 세상이 이상적이고 아름다울거라는 환상은 거두어야 할 것이다.
불리하지만 그곳의 법칙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법칙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그것이 옳기 때문에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언젠가는 바뀔 수 있으며 그건 게임의 지배자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
비트코인을 위시한 가상화폐가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그들의 시세는 미친듯이 폭발하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극과 극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미 가상화폐를 보유한 사람은 이것이 새로운 대체 통화로서의 권리를 획득하여 기존의 부의 형태마저 바뀌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미처 가상화폐를 보유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이것을 사상누각이나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며 애써 무시하려 한다.
과연 어느쪽이 옳은 것일까?
지금이라도 투자를 해 보려는 사람은 깊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대체 가상화폐의 진면목은 무엇일까, 그것의 미래는 어찌될 것인가?

2)
북한의 젊은 독재자 김정은의 행보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ICBM, SLBM, 수소핵 융합 폭발 시험 등을 해 나가며 끊임없이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어째서 북한이 미국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북한을 옹호하는 나라는 점점 줄어들어 이젠 거의 없다시피 하다.
마지막 중국과 러시아의 비호를 받을 수 있을지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전세계 모든 국가를 적으로 돌리고 있는 셈이다.
자국민들에게만 지지를 받는 이런 행동은 과연 옳은 것인가?

3)
박근혜 전대통령의 탄핵 이후에 새로운 지도자가 된 문재인 대통령.
그가 시도하는 정책들은 후보 시절의 언행에 비투어 볼 때 비교적 강경해 보인다.
대기업에 대한 제재, 중소기업 보호,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부동산 투기 근절 대책, 사회 곳곳의 적폐 청산...
이런 정책들은 대부분 힘없는 다수를 위하고, 힘을 가진 소수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정책들이었다.
그리고 갖가지 정책들이 나오면서, 양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가장 큰 것은 여성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남성들이 양보해야 하는 것이 늘어나는 것이고, 북한의 도발로 인한 사드(THAAD)의 배치로 인해 양보를 해야 하는 특정 지역의 주민들과 기업들이 중국으로부터 받는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문제 등이 있다.
일부에선 원자력 발전소의 공사 중단에 따른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일까?
단지 많은 사람이 원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소소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시될 수 있는 것일까?


앞서 제시한 3가지 상황에 대해 사람들은 각자 어떤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쪽이 옳은지를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옳은 방법은 찾기 어렵다.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류는 과연 잘 해 온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애써 자위하는 것일까?
우리는 선택의 순간마다 아주 잘못된 선택을 했던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나마 이정도라도....라며 자기 만족에 빠져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먼 훗날, 어떤 선택에 대한 극적인 인과 관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우리들 중 누구도 지금의 선택이 옳은지 아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단지, 지금 어떤 선택을 했다면, 그 선택이 옳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면 그것은 옳은 것이 되는 것이다.

옳기 때문에 성공하고 성취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고 승리하고 이루어냈기 때문에 그것이 옳아지는 것이다.

2017년 8월 20일 일요일

우리는 과연 바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앞선 포스팅이 뭔가 더 거창하고, 스케일이 크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쓴 글이라 뜬금 없는 얘기이거나 별 고민이 되지 않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시대를 거슬러 갔다가 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살지 않았던 시대를 상상해야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단지 좀 오래(?) 살다보니, 한 삶의 생애 동안에도 대중의 가치관 혹은 규범이 꽤나 극적으로 변화하는 걸 겪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고민을 해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서도 일상의 습관적인 행동양식과 대중적인 규범이 충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젊은 여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과 이에 대한 사회적 규범의 충돌
- 개의 식용에 대한 관습관 대중적 여론의 충돌
- 경제적인 효율성 측면의 원자력과 환경에 대한 우려의 충돌

이와 같은 문제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하게 되는 대중적인 딜레마일 것이다.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바른 길"을 외면하는 당위성을 주장하곤 한다.

나는 이 포스팅에서 "바른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겠다.
그것이 정말 바른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결정할 몫이다.
그리고 그 "바른 길"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도 않겠다.
그건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주장은 또 하나의 소수 의견일 수 있다.

단지, "바른 길"에 동의하지만 그 길을 갈 수 없는 우리의 현실적인 딜레마를 보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확장해 보면, 과연 어디까지 선악의 구분이 가능한지도 가늠할 수 있으며, 과거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타인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이 법의 판단에 대한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법의 효용성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단지 법이 선악의 판단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제공하거나, 선악에 대한 선언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 것 뿐이다.)


잠깐만 낮 뜨거운 우리의 모순을 보자.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노출 된다.
이 과정에는 각자의 욕망이 톱니바퀴처럼 맞아 떨어지는 욕망의 굴레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인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꿈꾸는 젊은 여성은, 미디어 담당자의 과도한 요구에도 순순히 응한다.
미디어의 담당자들은 많은 대중의 관심과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젊은 여성의 성적인 매력을 한껏 부각시켜 노골적으로 시청자들에게 보여준다.
성에 목마른 남자들은 사회적 규범이나 윤리적인 문제들을 외면하고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노골적인 방송에 환호한다.

비슷한 사례는 남자와 여자를 바꾸어서도 존재하지 않나 싶다.

이 경우의 "바른 길"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나타나는 문제일까?
"바른 길"이 바른 길이 아니었던 것일까?
우리 사회가 여전히 성에 대해 폐쇄적이어서, 개인의 성적인 욕구에 대한 사회적인 규범을 만들지 못했던 탓일까?

만약 언젠가의 미래에, 현재의 이와 같은 사회적인 모습을 "미개"하거나 "야만"스럽게 생각하는 때가 온다면, 우리 대다수는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걸까?

아마도 그 때가 되면, 지금의 대다수였던 사람들은 여러가지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의 사람들은 다시 되물을 것이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도 그것이 옳지 않았던 것 아니냐'고
'옳지 않음을 알고도 묵인하거나 오히려 반대쪽으로 동조하지 않았냐'고


어쩌면 우리가 과거의 시대에 있었던 과오에 대한 질문이 있다면,
이와 같은 프레임으로도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과연 바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 되었고, 선거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이게 지난 5월의 일이니 3개월쯤 전의 일이다.

과거의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쪼개지고 야당이 되었으며, 더불어 민주당이 여당이 되었다.

새 정부가 부르짖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최근까지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적페청산'이 아닌가 싶다.

청와대의 직접적인 개입이야 없겠지만, 각 정부 기관들과 기업, 단체들은 소위 '알아서 기는' 모양새를 보여준다.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 최순실, 이재용 등의 뇌물 수수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며, 새로이 비리가 드러나 고소가 되는 사례도 적잖다.
대기업들이 갑질이나, 짬짜미에 대한 공정위의 칼날도 매섭고, 이에 대한 법원이 판결도 예전과는 온도차가 많이 느껴지고 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청와대와 여당이 날마다 들고 나와서 청산을 주장하는 부분들이 많아지면서, 청산의 대상이 되는 사람도 많아지고, 일찌감치 국외로 도피한 사례들도 보도가 되곤 했다.

어쩌면 이런 청산이라는 것 자체가 구성원 대다수가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어차피 절대 선이나 절대 악은 없으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그리고 판단의 주체에 따라 선악의 기준은 달라진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게 대의 민주주의이기도 할 것이다.
(다수의 횡포, 소수의 억울함, 다수의 무심함과 소수의 절박함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이건 너무 긴 이야기가 되겠으니 여기에선 피하기로 하자.)


며칠전 광복절을 맞아 인터넷 상에서는 한일합방, 일제 침략, 항일 운동, 독립 투사,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강제 징용 노동자 등에 대한 기사와 얘기들이 많이 나왔다.
일부는 들었던 얘기들도 있고, 일부는 새로운 얘기들도 있고...
청와대의 적폐청산이라는 기치와 맞아 떨어지게 친일파 청산에 대한 주장도 다시 나왔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과연 저 친일파라는 사람들은 정말 나쁜 사람들 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친일파에 대한 반민족적인 행위들을 듣고, 그들에 대한 증오심을 부글부글 끓어 오르게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친일파라는 단어 자체는 더 이상의 논리적인 사고를 차단해버리고 그저 증오심만 드러내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예는 어떨까?
조선 말기, 구한말기에 총명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관직에 등용되어 맡은 바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셈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충실했고, 출세의 길을 탐하지 않는 그런 관료였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한반도는 세계의 열강들이 모여들어 부산하고 어수선하다.
왕실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청정과 섭정으로 어지럽다.
때로는 청나라가, 러시아가, 일본이 세력을 키우며 나라를 좌지 우지한다.
하지만 이 관료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는 한, 누가 권력을 잡든, 누가 지시를 하던 묵묵히 그에 따라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
이런 사람이 후세에 친일파라고 낙인이 찍힌다면, 그는 과연 어떤 변명을 하고 싶을까?

일본제국의 앞잡이로 충성하며 득세하고 치부한 몇몇의 친일파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보다는 약한 수준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판단이 어려워진다.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을 하거나 독립군을 지원하면서 한편으로는 친일을 했던 증거도 나온다.
심지어는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철저했다는 만해 한용운 선생은 조선의 불교를 유신하기 위한 방안 가운데 하나로 승려의 혼인을 허가해 달라는 탄원을 조선 총독부에 보내서 지탄을 받기도 했다.

아마도 친일을 했다고 의심 받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나라의 일을 맡을 만한 능력이 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단한 민족적 사명 이전에 자연인, 생활인이었고, 한 가장의 가장이었을 것이다. 대단히 반민족적인 일이라고 (그 당시에도) 느낄만한 일을 해야했던 사람은 그 중에서도 일부였을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는 자신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었다거나, 그 지시를 누가 내렸든 여전히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느낄만 하지 않았을까.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측근 참모들은 박 전 대통령의 명령에 대해 얼마나 의심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박 전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업무 지시를 할 때에는 나름의 명분과 타당성을 제시하고 난 후에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그런 프레임이 구축된다면, 더욱이 자신의 상사와 공동 운명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대체 얼마만큼 선악에 대해 숙고할 여유가 있는걸까?


가까운 친구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조직에서 일을 하다보면 각자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상사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이 맞다고.
왜냐하면 상사들이 그 직책에 있는 것은 그들이 결과에 대해 책임 질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상당히 옳은 얘기라 생각했다.


최근의 대기업 회장의 갑질, 군대 공관병에 대한 갑질,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나 성희롱, 반려동물에 대한 보호법 등을 보면 그 판단 기준이 불과 십수년전에 비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느끼게 된다.
방송에서 논란이 되는 사건들을 보면, 내가 과거에 아무렇지 않게 했던 일이 요즘이라면 신상이 밝혀져서 낙인이 찍혀야 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될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나는 언제나 바른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현재의 행동이 미래에도 지탄받지 않을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2017년 8월 11일 금요일

언짢은 말을 들었을 경우의 대처

일반인은 화를 내고 상대방을 역으로 공격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인간 관계에 경험이 많은 사람은 상대방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를 찾으려 한다.

자신을 알고자 원하는 사람은 왜 자신이 언짢게 느끼는지를 생각해 본다.

2017년 6월 5일 월요일

아이덴티티

자아(自我) 주체(主體)

이전 포스팅에서의 고민은 좀처럼 진전이 없다.

그러나 문득 내 인생에서 꽤 오랜 시간동안 나를 규정했던 생각 혹은 행동 양식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외부적인 힘이나 규율들이 나로 하여금 강제로 변화하도록 했던 적이 있는데, 나는 이에 대해서 꽤나 거부감을 가졌고 의식적으로 반항하려 했던 듯 하다.

아직까지도 이런 성향은 비교적 강하게 남아 있는데, 내가 정말 하기 싫어하는 것들을 해야만 하는 상황은 정말 끔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런걸까?


먼저 드는 기억은 아마도 학교를 졸업하고 맨 처음 취업을 했던 당시였다.

대기업이었던 그곳에서의 첫 시작은 기업 연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일종의 집합 교육이었다.
세부 부서의 업무와 무관하게 모든 직원들이 알아야 하는 그 기업의 행동양식과 규율, 문화, 조직의 속성에 대한 공통적인 <기업 상식>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대단히 많은 신입 사원들에게 정해진 시간 안에 거대한 조직의 문화와 조직의 상식, 규율, 금기 등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선 주입식 교육이 필연적이었다.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 절에 가서 살려면 절의 법도를 배워야지, 절의 법도를 나에게 맞게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 과정은 신입사원 개개인의 생각과 몸에 밴 습관 등도 바꾸려했던 것이기에, 비록 명분이 그럴듯 했음에도, 꽤 거부감이 들었으며, 일부분에 대해서는 나 자신의 양식이나 사상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의식의 표면에만 머물도록 했던 경우도 있었다.

과연 당시에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의 사상이나 양식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비슷한 예는 이후의 직장 생활에서 다시 드러나곤 했다.
조직 생활을 해야하기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접촉은 불가피하고, 이 과정에서 내가 하기 싫은 일들을 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럴때마다 느꼈던 그 불편한 느낌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게 내 자신의 고유한 무엇인가가 파괴된다고 느꼈던 것일까?


그럼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나의 아이덴티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틀림없이 외부의 여러가지 힘들이 나를 끊임없이 이렇게 이지러뜨리고 흔들고 누르고 당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가 거부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은 그대로 수용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단지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것을 대단한 보물인것처럼 지키려고 애썼던 것은 아닐까?
아무런 방어막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 무엇이던 맨처음 영향을 준 것을 그대로 수용하지만, 일단 영향을 받고 나면 아주 단단한 방어막이 형성되는 그런 것?

혹은, 타고난 성격이나 타고난 체질 등으로 인해 어떤 행동 혹은 습관이 일정한 규제를 받는 경우?
가령, 왼손잡이로 태어난 사람(이게 정말 선천적인건지는 모르겠다)에게 반드시 오른손으로 밥을 먹어야 한다는 규칙은 매우 심각한 불편을 초래할 것이고, 당연히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일 것이다.


후자와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진아(眞我)라는 것이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지켜야만 할 나 자신의 아이덴티티 따위는 없는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며, 현재의 내 모습은 현재에만 유효한 것이며, 과거와 미래의 내 모습은 아주 유연하다.

한편으로는 나의 참모습이라는 따위의 생각은 나를 가장 심각하게 구속하고 제약하는 요인일 것이다.

2017년 5월 22일 월요일

"나"를 없애는 방법?

오래 전에 포스팅했던 글에서 "나"라는 것이 인식인지 의식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았던 적이 있다. (http://re-unify.blogspot.kr/2013/02/blog-post.html)

그 동안에도 여러가지 비슷한 생각의 거치다보니, 다분히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비교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본질적인 "나"가 존재하는 것이고, 육체를 넘어서는 "나"는 생을 넘어서까지도 변하지 않기에,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진아(眞我, 아트만)와 윤회 사상을 가르치는 힌두교적인 관점에 가깝다.

반면에 무상무아(無常無我)를 설파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나"라는 것은 한낱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에도 윤회 사상이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테지만, 이건 이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불교의 사상과는 전혀 별개라 생각한다. 자세히 공부하고자 하면 이에 대한 진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의문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여러가지 경우에 대입을 해 보았더니,지금까지는 진아(眞我) 보다는 무아(無我)가 더 타당하지 않은가 싶다.


이렇게 생각이 든다면,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나"를 버릴 것인가?

**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고민하는 과정에 있으며, 그 과정의 사유나 논리들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따라서 어떤 명쾌한 결론을 구하지 말라.


"나"를 버리기 위해서는 "나"라는 의식을 가지게 된 과정을 유추하고, 그 과정을 역으로 밟아가던가, 그 과정에서 세워 둔 하나 하나의 벽돌(?)들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허물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르는 내 삶의 과거로의 회귀, 그것도 모든 나의 의식의 벽돌에 해당하는 과정으로의 회귀가 필요하다.
심지어는 표면의 의식 뿐이 아닌 무의식의 벽돌까지 찾아낼 회귀가 필요하기에 더더욱 불가능에 가까울 수 밖에 없다.

목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첫발은 언제나 단순하다.

가장 최근의 의식의 벽돌 '하나'만이라도 찾아내면 된다.

아마도 오래된 의식의 벽돌은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중간에 빠지는 벽돌이 무수히 많을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이 방법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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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상적이긴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간들이 "나"라는 의식을 만들었던 이유가 타인과 구별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
내가 타인과 구별되지 않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혹은 근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결코 안심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들 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 해서 거리를 두기 위해서 구별을 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라는 유일함이 사라지는 두려움, 혹은 타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면 우리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나"라는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나"를 만들었으며, "나"로부터 벗어난 자야말로 진정 용기있는 존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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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7일 수요일

잘 되게 하는 것은 어렵지만, 잘 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쉽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공석이 된 대통령직의 보궐선거가 치루어졌고,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셨다.

사회가 다변화 되고, 국민들의 욕구와 바램도 또한 다양해졌다.

예전에 비해 훨씬 많은 후보들이 선거에 출마를 했지만, 누구 하나 나의 마음과 같은 후보는 없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국민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의 생각과 가장 많이 비슷한 후부에게 투표하거나, 생각이 아주 다른 후보만은 피해서 투표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지난 9년(?)의 두 정권에 대한 느낌과 10년을 뛰어넘어 다시 이어지는 진보(?) 정권에 대한 느낌이 교차했다.
MB와 503(탄핵 후에 구속 수감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수인번호가 503번 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하해서 표현할 때 503호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누군가에게는 아픈 일일 수도 있지만...너무 긴 호칭보다 503호가 간결하고 쓰기에 편한 건 사실이다.)의 정권이 보여준 실적이나 결과물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경제 성장률은 바닥이 어디인지 모르게 내려가고, 출산률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청년층의 실업률은 회복되지 못하고, 빈부의 격차는 최악의 수준이다.
엎친데 덮친걸까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내외의 악재들로 여기 저기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들의 고통이 전체 국민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구제역, 태풍, 메르스, AI, 세월호)

이 모든 것을 지난 MB와 503호 정권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대부분의 재난이나 흐름이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거니와 모범 답안이 없는 문제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정부의 대응이 잘 되었더라면 피해의 규모나 정도는 줄일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아마도 새로운 정부라고 이런 문제들을 능수능란하게 해결할 수는 없으리라고 본다.
단지, 좀 완화만 시킬 수 있어도 잘 하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흔히 조직에서 하는 말로,
"너를 잘되게 하지는 못해도, 잘 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있다."는 말이 있다.
보통은 중간 관리자 정도 되는 사람들이, 악에 받치게 되면 쓰게 되는 말이다.
사실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매우 섬찟한 상황이다.

일이 잘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공을 많이 들여야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며, 또 주변에서의 도움도 있어야 한다.
그나마 주변에서 도움은 주지 못하더라도, 딴지 걸지만 않아도 감사한게 현실이다.

열심히 하려는 사람, 일을 성사시키려는 사람의 옆에서 딴지만 걸어도 그들의 성공을 한참 뒤로 미룰 수 있는 것이다.


어쩐지 MB와 503호는 대한민국이 하는 일에 딴지를 걸었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들 자신은 딴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랬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새로 선출된 문재인 대통령은 모쪼록 대한민국이 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주길 바란다.
하지만 제 아무리 대통령의 권력이 막강하다 해도 일을 성사시키는 것에는 많은 힘이 필요하다.
더욱이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 잘사는 나라, 공정한 나라가 되는 그런 일은 정말 많이 힘든 일이다. 이런 일은 모두가 힘을 모아 일심동체가 되어도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삐끗해서 딴 마음을 가지거나 딴지를 건다면 대한민국은 곤두박질을 치게 될 것이다.

잘되게 하기는 매우 어려우니 모두가 힘을 모아야 겨우 겨우 되겠지만,
극히 소수의 몇몇만 딴 마음을 가지고 작정한다면 잘 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일 테니까.

성공의 길은 좁고, 멸망의 길은 넓은 것이 바로 이같은 이유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