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지내는 것이 쉽지 않다.
함께 지내면 언제나 신경쓰이고 조심스럽다.
나만 그렇지 않고 상대방도 그러려니 싶지만, 그러면 왜 함께 지내야 하지?
쌍방이 불편하니 따로 사는게 좋지 않은가?
왜 그럴까?
문제가 없다면, 질문도 없었겠지만, 혼자 살기에 걸리는 문제는 아주 많다.
꼭 한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사이뿐이 아니라, 같은 직장, 같은 동네라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명절이라 만나고, 제사라 만나고, 생일이라 만나는 사람들.
누구의 아들 딸이, 누구의 아버지 어머니가, 누구의 남편 아내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백일이나 돐이고 환갑이고 아프고 돌아가시고...
다 싫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상호부조의 미덕(?)을 위해 거래하듯 만나는 것도 싫고,
알아도 서먹서먹해서 싫고,
너무 잘 아는데, 아는 사람이 그런다고 오해하고 미워해서 싫다.
세상에 좋은 사람도 많다.
하지만, 부처님 예수님도 싫어하는 게 있으며, 노여워할 일이 있는 법이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란 법도 없으니, 하물며 일반 사람들에게랴.
나도 싫다.
그들이 거리낌 없이 하는 행동이나 생각들이 싫다.
그걸 몰라서 저리들 하는지, 아는데도 하는지, 아니까 일부러 하는지,
아무튼 싫다.
아주 힘들게 용기를 내서
무언가 해 보려 하면, 사람들이 항상 걸린다.
그래서 궁금했다.
난 왜 그리도 사람들을 싫어할까?
아마도... 난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런 듯 싶다.
2018년 11월 28일 수요일
감정에 대처하는 남녀의 차이
딱히 논리적으로 풀 수는 없지만,
남자와 여자가 감정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 듯 하다.
대체적으로 남자들은, 일어나는 감정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그 다음의 행동으로 바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으며, 여자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마치 음미하듯(?) 찬찬히 살펴보느라 마땅히 해야한다고 여겨지는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거나 늦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여자들이 감수성이 풍부하고 자신의 감정을 잘 묘사하거나 설명하고, 그 감정이 좋으면 만끽하거나 취하지만, 좋지 않을 때에는 감정을 치유하는 방법에 더 익숙한 것이 모두 앞서와 같은 이유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경향의 단점은 객관적인 주변의 사물이나 타인에 대한 마땅한 행동이 미흡하거나 늦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남성은, 자신의 감정에 서툴다. 자신의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혹은 감정에 휩싸여 일어나는 거의 본능적인 반응(화냄, 소리침, 폭력 등)을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이런 성향의 장점은, 어떤 상황에서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능력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점은 거의 선천적인 것이 아닐까 싶게, 남녀간의 차이가 뚜렷해 보인다.
(물론 여자같은 남자, 남자같은 여자도 있으니 개인별 차이는 크지만, 남자 전체의 평균과 여자 전체의 평균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비교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이런 차이점도 호르몬에 의한 영향은 아닐까 싶다.
남자와 여자가 감정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 듯 하다.
대체적으로 남자들은, 일어나는 감정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그 다음의 행동으로 바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으며, 여자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마치 음미하듯(?) 찬찬히 살펴보느라 마땅히 해야한다고 여겨지는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거나 늦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여자들이 감수성이 풍부하고 자신의 감정을 잘 묘사하거나 설명하고, 그 감정이 좋으면 만끽하거나 취하지만, 좋지 않을 때에는 감정을 치유하는 방법에 더 익숙한 것이 모두 앞서와 같은 이유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경향의 단점은 객관적인 주변의 사물이나 타인에 대한 마땅한 행동이 미흡하거나 늦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남성은, 자신의 감정에 서툴다. 자신의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혹은 감정에 휩싸여 일어나는 거의 본능적인 반응(화냄, 소리침, 폭력 등)을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이런 성향의 장점은, 어떤 상황에서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능력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점은 거의 선천적인 것이 아닐까 싶게, 남녀간의 차이가 뚜렷해 보인다.
(물론 여자같은 남자, 남자같은 여자도 있으니 개인별 차이는 크지만, 남자 전체의 평균과 여자 전체의 평균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비교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이런 차이점도 호르몬에 의한 영향은 아닐까 싶다.
2018년 10월 18일 목요일
도박?
몇년 전에 있었던 일인데, 친구들과 간만에 모임을 가졌다.
얘기가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주식의 파생상품, 선물과 옵션에 대한 얘기로까지 이어졌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나름대로 공부도 해 봤고 경험도 있어 썰을 풀어 놓았는데,
그 도중에 친구 하나가 이런 질문을 했다.
"그거 도박이냐?"
?
?
당시엔 위험하지만 도박은 아니라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당시에도 이후에도 좀 혼란스러웠다.
과연 도박이란 뭘까?
도박의 정의는 뭘까?
잠깐 도박에 대한 국어사전적 정의를 찾아 보니,
도박(賭博) 요행수를 바라고 불가능한 일이나 위험한 일에 손을 댐. (=노름)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표준국어대사전)
賭는 내기 도, 조개 패 변에 사람 자, 재물과 사람, 혹은 사람이 가진 재물에 대한 무엇.
博은 넓을 박, 넓다 깊다 크다 많다 등의 의미.
따지고 들자면 모호하기 짝이 없기는 하다.
불가능이나 위험하다는 기준이 모호하니까.
옵션, 선물, 주식, 외환, 상품, 부동산 등등 모든 것이 거래되고 있으며, 나름대로의 위험 정도는 비교가 가능하지만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과연 어느 정도가 위험한 것일까?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처럼 과연 주식은 위험할까?
물론 너무도 다양한 조합으로 투자할 수 있으니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인 인식에 부합하도록 이렇게 생각해 보자.
A라는 회사의 주식을 사고 파는 일이 위험할까, A라는 회사와 거의 비슷한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이 위험할까?
애초에 투자할 수 있는 금액의 규모도 다르겠지만, 이미 상장된 회사는 불안한 요소들을 모두 이겨냈고 어려움을 극복해낸, 그래서 꽤 안정권에 들어선 기업체이다.
만약 이 기업체와 같은 초기 자본금이 있다 하더라도 사업체를 신규로 설립해서 안정된 기업으로 가꿔나가기란 매우 위험한 일이며 확률도 희박하다.
따지고 보면 인생도 또한 도박이라고 할 만큼 위험하지 않을까?
어린 아이가 공부를 잘 할지 예체능에 재능이 있을지를 발굴해서 집중적으로 투자해서 육성하는 것도 자칫 위험한 일이다.
그게 과연 재능에 부합하는지, 재능은 있어도 꾸준히 이끌어 나갈 정도로 좋아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직업의 선택은 또 어떠하며,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은 또 어떠한가.
살 집을 어디에 마련할지 자식을 얼마나 낳을지 다시 그 자식들을 어떻게 기를지...
곰곰이 생객해 봐도, 이런 인생의 곳곳에 드리워진 불확실성과 위험의 정도가 주식이나 파생상품의 위험성보다 월등히 적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도박의 정의, 위험한 정도의 판단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도박은 단지 "단어"에 불과했던 것이다.
중요한 점은, 무언가를 도박이라고 혹은 도박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인 것이다.
그걸 도박이라도 혹은 도박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정의한 후에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하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애초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자신이 목표하는 바 혹은 바라는 바를 명확히 하고, 이에 부합하는지 아닌지 여부를 판단할 기준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리라.
그러면 그것이 자신의 기준에서는 도박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들은 복잡해지고 말들이 무성하다보니,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말"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는 복잡한 세상의 일들을 조금은 단순화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본능적인 움직임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본질을 더 흐려버리곤 해서 올바른 판단을 그르치는 일이 많아졌다.
세상을 사는 일은 단지 입을 놀려 말을 하는 것도, 손가락을 놀려 글을 쓰는 것 이상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말할 필요도 없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얘기가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주식의 파생상품, 선물과 옵션에 대한 얘기로까지 이어졌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나름대로 공부도 해 봤고 경험도 있어 썰을 풀어 놓았는데,
그 도중에 친구 하나가 이런 질문을 했다.
"그거 도박이냐?"
?
?
당시엔 위험하지만 도박은 아니라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당시에도 이후에도 좀 혼란스러웠다.
과연 도박이란 뭘까?
도박의 정의는 뭘까?
잠깐 도박에 대한 국어사전적 정의를 찾아 보니,
도박(賭博) 요행수를 바라고 불가능한 일이나 위험한 일에 손을 댐. (=노름)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표준국어대사전)
賭는 내기 도, 조개 패 변에 사람 자, 재물과 사람, 혹은 사람이 가진 재물에 대한 무엇.
博은 넓을 박, 넓다 깊다 크다 많다 등의 의미.
따지고 들자면 모호하기 짝이 없기는 하다.
불가능이나 위험하다는 기준이 모호하니까.
옵션, 선물, 주식, 외환, 상품, 부동산 등등 모든 것이 거래되고 있으며, 나름대로의 위험 정도는 비교가 가능하지만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과연 어느 정도가 위험한 것일까?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처럼 과연 주식은 위험할까?
물론 너무도 다양한 조합으로 투자할 수 있으니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인 인식에 부합하도록 이렇게 생각해 보자.
A라는 회사의 주식을 사고 파는 일이 위험할까, A라는 회사와 거의 비슷한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이 위험할까?
애초에 투자할 수 있는 금액의 규모도 다르겠지만, 이미 상장된 회사는 불안한 요소들을 모두 이겨냈고 어려움을 극복해낸, 그래서 꽤 안정권에 들어선 기업체이다.
만약 이 기업체와 같은 초기 자본금이 있다 하더라도 사업체를 신규로 설립해서 안정된 기업으로 가꿔나가기란 매우 위험한 일이며 확률도 희박하다.
따지고 보면 인생도 또한 도박이라고 할 만큼 위험하지 않을까?
어린 아이가 공부를 잘 할지 예체능에 재능이 있을지를 발굴해서 집중적으로 투자해서 육성하는 것도 자칫 위험한 일이다.
그게 과연 재능에 부합하는지, 재능은 있어도 꾸준히 이끌어 나갈 정도로 좋아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직업의 선택은 또 어떠하며,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은 또 어떠한가.
살 집을 어디에 마련할지 자식을 얼마나 낳을지 다시 그 자식들을 어떻게 기를지...
곰곰이 생객해 봐도, 이런 인생의 곳곳에 드리워진 불확실성과 위험의 정도가 주식이나 파생상품의 위험성보다 월등히 적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도박의 정의, 위험한 정도의 판단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도박은 단지 "단어"에 불과했던 것이다.
중요한 점은, 무언가를 도박이라고 혹은 도박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인 것이다.
그걸 도박이라도 혹은 도박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정의한 후에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하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애초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자신이 목표하는 바 혹은 바라는 바를 명확히 하고, 이에 부합하는지 아닌지 여부를 판단할 기준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리라.
그러면 그것이 자신의 기준에서는 도박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들은 복잡해지고 말들이 무성하다보니,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말"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는 복잡한 세상의 일들을 조금은 단순화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본능적인 움직임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본질을 더 흐려버리곤 해서 올바른 판단을 그르치는 일이 많아졌다.
세상을 사는 일은 단지 입을 놀려 말을 하는 것도, 손가락을 놀려 글을 쓰는 것 이상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말할 필요도 없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2018년 10월 2일 화요일
늙을 수록 두렵다.
혼란한 하루다.
1.
오전에 형수님이 제사를 예약했노라 알려 주셨다.
집안의 제사와 관련된 계좌를 통해 제사 비용의 절반을 이체해 드렸다.
그런데 계좌 이체를 하기 직전에 "등록되지 않은 단말기를 이용하여 이체를 시도했던... 보안카드..." 이런 섬찟한 안내 문구가 떴다.
일단은 이체를 한 후에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확인 후에 알려 주겠다며 일단 통화 종료.
1시간이 지나서 전화가 왔다.
여러 대화가 오갔지만, 정확한 원인 파악은 불가능.
약간 짜증이 났다. 공연히 사람을 혼란하게 만들 안내를 하고도, 그런 안내를 하게 된 경위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조심해야겠다며 통화 종료.
2.
추석 전에 주식 시장에 변화가 감지되었다.
한번 크게 떨어뜨리고 일정한 구간을 오르락 내리락 하기를 약 3개월.
드디어 그 구간을 벗어나는 모습이었다.
추석을 지난 후에는 그걸 확인해 주는 모습도 보여주었으니 과감히 진입.
그 주의 후반부터 조정이 보였지만, 아직까지는 긍정적이라 생각했던 시장이 크게 무너졌다.
그것도 그저 일시적인 장중의 모습이 아니라, 장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눌러버리는 압도적인 힘.
대체 지난 주 초반까지의 강한 힘은 대체 어디로 간걸까?
아니 그 상승의 힘이 단지 눈속임이었단 말인가?
아쉽지만 손절...
병가지상사인 일이지만, 이럴 때의 절망감은 대체 뭘까?
3.
누이로부터 톡이 왔다.
조카의 생일이라 축하금 먼저 보냈단다.
문자로라도 축하해 주란다.
한동안 톡에 답장도 하지 않았다.
조카라는 녀석들... 대체 뭘까?
내 생일도 기억 못하는 녀석들.... 내 생일에 축하한다고 문자라도 보냈던 게 대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심지어는 내가 보낸 생일 축하 메시지에 답장도 안하던 녀석들... 언젠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으로 봐선 삼촌의 전화번호도 몰라서, 누가 보낸건지 몰라서 반말로 답장하던 조카들...
내가 왜 이런 조카들에게 생일 축하금을 보내야 하는 걸까?
이젠 조카들도 다 컸으니 그만 보내겠다고 왜 말하지 못하는 걸까?
혹시라도 조카들에게 뭔가를 바라는 걸까?
그들이 나와 혈육이라는 증거의 끈을 돈으로 유지하고 있는 걸까?
하긴, 설, 추석 명절과 집안 큰 어른인 부모님 (녀석들에겐 조부모님)의 생신, 이런 것들에 같이 모이거나 하는 일을 제외하면 대체 뭘 공유하고 있는 걸까?
나만 불편한게 그 녀석들도 불편한거 아닐까?
내가 금전적인 여유만 있다면 이런 일로 이따위 고민은 하지 않았을거라는, 지금 이런 고민이 결국은 금전적인 쪼들림에 기인한거 아니겠냐는 스스로의 자책으로 고민을 마무리하고 송금했다.
하지만 이 고민이 계속 이어질 거라는 암울한 사실은 변함이 없다.
4.
아버지로부터 톡이 왔다.
이번엔 동영상이다. 신의 한수라는 꽤나 치우친 보수주의자의 인터넷 방송 영상이었다.
아버지는 보수주의자다.
정치적인 편향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는 것 또한 지나치게 단순화한 구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단은 크게 보아 그렇다는 뜻이다.
예전에도 아버지와 한번 크게 틀어진 일이 있었다.
당시에도 아버진 진보 성향의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메일을 우리 형제들에게 계속 보내셨다.
함부로 지우기도 그렇고, 보내 주신 글들이 내가 보기에는 많이 불편해서 많이 고민을 했다.
결국은 어느 날인가 이런 류의 메일은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메일을 드렸다.
하지만 아버진 기계 같았다.
기계적으로 받아 보신 메일 가운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메일을 기계적으로 우리 형제들에게 보내고 계셨다.
그러면서도 정작 내 메일은 읽지도 않으신 모양이었다.(이건 나중에야 알았지만...)
결국은 침묵으로 분노를 대신 표출했고, 중재자인 누이를 사이에 두고 메일 전송은 중지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카톡에 가입하자, 아버진 다시 같은 부류의 정치적인 글들을 보내기 시작하셨다. 달라진 점이라면, 가족 단톡방이 아니라, 나에게만 보내셨다는 것.
지난 번의 메일 사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정치적인 성향이 다르다는 것을 잊어버리신걸까?
꽤나 속으로 부글거렸다.
이런 아버지의 행동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내가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해야 하는 걸까?
굉장히 비겁하거나 공격적인 대응도 상상했더랬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마지막 선은 희미하지만 남아 있었나보다.
결국 오늘 받은 톡의 동영상의 인트로에 신의 한수가 나오는 것을 보고 답장을 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것 같아 매우 불편하니 그만 보내 달라고...
아버지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에게도 알려주고 싶어서 그랬다는 변명과 함께 나의 부탁을 수락했다.
그런데...내가 정말 끔찍하게 생각하는 일은...
아버지에게 이 부탁을 하는 톡을 보내는 내내 손가락이 덜덜덜 떨렸다는 것이다.
그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난 여전히 아버지의 제어를 받고 있었고, 내가 보내려는 톡은 이 제어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하는 정도의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구시대적인 유교의 사상으로는 불효에 해당하는 일이고 반란이며 패륜이라는 무의식이 작용한걸까?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유교의 노예인걸까? 아마 맞겠지...)
5.
지난 추석에 겪은 생생한 한 장면...(이미 수 많은 명절에 되풀이 되었지만)
잘 차려진 추석 상에는 전과 잡채 갈비가 올라와 있다.
어버진 양념된 갈비를 손으로 잡으시는걸 아주 꺼려하신다.
게다가 갈비에 붙어 있는 기름이나 질긴 힘줄을 싫어 하신다.
결국은 누군가가 갈빗대에서 살을 발라낸 후에, 곳곳에 붙어 있는 기름과 힘줄을 제거 하야만 한다. 그게 사실은 거의 불가능하니 각자 알아서 해야겠지만...
아버진 손을 대기 싫으시니 식당에서 보는 집게와 가위를 달라고 하시고, 그나마도 잘 못하셔서 갈비와의 씨름이 벌어지고... 옆에서 보던 어머니는 답답해 답답해를 연발하시다가 얼추 발라서 아버지께 드리고는 적당히 좀 드시라 타박한다.
그 광경은 나 또한 매우 답답하고 불편하고 불쾌하기까지 한 장면인데... 그게 몇년을 반복하고 있다.
대체 왜 반복하면서 그런 음식을 그런 식으로 내는지, 음식을 효율적으로 자신의 기호에 맞게 요령껏 섭취하지 못하는지, 옆에서 답답하다면서도 계속 붙어서 잔소리를 하는지, 왜 그런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없는지...
어쩌면 이 와중에 일어난 어머니의 답답함과 짜증에 동조해서 나도 아버지를 비난하거나 어머니의 한마디를 거들거나 했을지도 모르고, 혹은 그 가운데서 마찰을 완화하기 위해서 중재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런게 각자의 성격인거고, 그 나름의 한계선(경계선)을 지키면서 일어나고 있어서 큰 충돌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난 이게 그렇게 불편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게 아주 많이 불편하다는 걸...
아마도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다면, 나는 그런 식사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는게 맞다.
그리고... 아마도 아주 어려서부터 그렇게 복작대고 지지고 볶고 하는 식탁에 익숙하게 자랐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정도의 스트레스는 참아내도록 길러졌나보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건 내게 스트레스였고, 참을만 한 수준은 아니었지 싶다.
이제 식사 자리에서 이런 상황이 나는 매우 불편하고 싫다, 그러니 그러지 말고 평화롭게 식사를 하자고 한들 이제와 고쳐질리 만무하다.
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상황이 매우 불편하니 나는 나중에 따로 식사를 하겠다고 피하는 방법 뿐인 것 같다.
6.
늙었나보다.
이렇게 두려운게 많다.
알면 알수록 두렵다.
차라리 모르면 용감할 수 있을텐데...이제는 세상 만사의 돌아가는 행태를 대충 이해하고 있으니, 무언가를 보면 그 뒤에 있을 일들까지 떠 오르면서 두려움들이 쌓인다.
그러니 젊은 시절이 용감한거다.
무식하니 용감한거 맞다.
가끔 공원을 산책하다 애완견을 끌고 나온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내가 개를 좋아해서 많이 봐주고 소리 내거나 친한척을 해주면 금새 반가워하는 개들이 있다.
10중 8,9는 어린 개다. 나이가 많아봐야 5살 이하인...하룻 강아지인 셈이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사람이라면 다 반갑고 그런건 다 어린 강아지들 뿐이다.
그런 개들도 나이가 더 들면 사람들을 경계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거다.
반가워해도 특별히 자기에게 득 될거 없는걸 아는 거다.
늙은 나는 두려움이 많다.
1.
오전에 형수님이 제사를 예약했노라 알려 주셨다.
집안의 제사와 관련된 계좌를 통해 제사 비용의 절반을 이체해 드렸다.
그런데 계좌 이체를 하기 직전에 "등록되지 않은 단말기를 이용하여 이체를 시도했던... 보안카드..." 이런 섬찟한 안내 문구가 떴다.
일단은 이체를 한 후에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확인 후에 알려 주겠다며 일단 통화 종료.
1시간이 지나서 전화가 왔다.
여러 대화가 오갔지만, 정확한 원인 파악은 불가능.
약간 짜증이 났다. 공연히 사람을 혼란하게 만들 안내를 하고도, 그런 안내를 하게 된 경위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조심해야겠다며 통화 종료.
2.
추석 전에 주식 시장에 변화가 감지되었다.
한번 크게 떨어뜨리고 일정한 구간을 오르락 내리락 하기를 약 3개월.
드디어 그 구간을 벗어나는 모습이었다.
추석을 지난 후에는 그걸 확인해 주는 모습도 보여주었으니 과감히 진입.
그 주의 후반부터 조정이 보였지만, 아직까지는 긍정적이라 생각했던 시장이 크게 무너졌다.
그것도 그저 일시적인 장중의 모습이 아니라, 장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눌러버리는 압도적인 힘.
대체 지난 주 초반까지의 강한 힘은 대체 어디로 간걸까?
아니 그 상승의 힘이 단지 눈속임이었단 말인가?
아쉽지만 손절...
병가지상사인 일이지만, 이럴 때의 절망감은 대체 뭘까?
3.
누이로부터 톡이 왔다.
조카의 생일이라 축하금 먼저 보냈단다.
문자로라도 축하해 주란다.
한동안 톡에 답장도 하지 않았다.
조카라는 녀석들... 대체 뭘까?
내 생일도 기억 못하는 녀석들.... 내 생일에 축하한다고 문자라도 보냈던 게 대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심지어는 내가 보낸 생일 축하 메시지에 답장도 안하던 녀석들... 언젠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으로 봐선 삼촌의 전화번호도 몰라서, 누가 보낸건지 몰라서 반말로 답장하던 조카들...
내가 왜 이런 조카들에게 생일 축하금을 보내야 하는 걸까?
이젠 조카들도 다 컸으니 그만 보내겠다고 왜 말하지 못하는 걸까?
혹시라도 조카들에게 뭔가를 바라는 걸까?
그들이 나와 혈육이라는 증거의 끈을 돈으로 유지하고 있는 걸까?
하긴, 설, 추석 명절과 집안 큰 어른인 부모님 (녀석들에겐 조부모님)의 생신, 이런 것들에 같이 모이거나 하는 일을 제외하면 대체 뭘 공유하고 있는 걸까?
나만 불편한게 그 녀석들도 불편한거 아닐까?
내가 금전적인 여유만 있다면 이런 일로 이따위 고민은 하지 않았을거라는, 지금 이런 고민이 결국은 금전적인 쪼들림에 기인한거 아니겠냐는 스스로의 자책으로 고민을 마무리하고 송금했다.
하지만 이 고민이 계속 이어질 거라는 암울한 사실은 변함이 없다.
4.
아버지로부터 톡이 왔다.
이번엔 동영상이다. 신의 한수라는 꽤나 치우친 보수주의자의 인터넷 방송 영상이었다.
아버지는 보수주의자다.
정치적인 편향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는 것 또한 지나치게 단순화한 구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단은 크게 보아 그렇다는 뜻이다.
예전에도 아버지와 한번 크게 틀어진 일이 있었다.
당시에도 아버진 진보 성향의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메일을 우리 형제들에게 계속 보내셨다.
함부로 지우기도 그렇고, 보내 주신 글들이 내가 보기에는 많이 불편해서 많이 고민을 했다.
결국은 어느 날인가 이런 류의 메일은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메일을 드렸다.
하지만 아버진 기계 같았다.
기계적으로 받아 보신 메일 가운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메일을 기계적으로 우리 형제들에게 보내고 계셨다.
그러면서도 정작 내 메일은 읽지도 않으신 모양이었다.(이건 나중에야 알았지만...)
결국은 침묵으로 분노를 대신 표출했고, 중재자인 누이를 사이에 두고 메일 전송은 중지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카톡에 가입하자, 아버진 다시 같은 부류의 정치적인 글들을 보내기 시작하셨다. 달라진 점이라면, 가족 단톡방이 아니라, 나에게만 보내셨다는 것.
지난 번의 메일 사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정치적인 성향이 다르다는 것을 잊어버리신걸까?
꽤나 속으로 부글거렸다.
이런 아버지의 행동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내가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해야 하는 걸까?
굉장히 비겁하거나 공격적인 대응도 상상했더랬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마지막 선은 희미하지만 남아 있었나보다.
결국 오늘 받은 톡의 동영상의 인트로에 신의 한수가 나오는 것을 보고 답장을 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것 같아 매우 불편하니 그만 보내 달라고...
아버지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에게도 알려주고 싶어서 그랬다는 변명과 함께 나의 부탁을 수락했다.
그런데...내가 정말 끔찍하게 생각하는 일은...
아버지에게 이 부탁을 하는 톡을 보내는 내내 손가락이 덜덜덜 떨렸다는 것이다.
그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난 여전히 아버지의 제어를 받고 있었고, 내가 보내려는 톡은 이 제어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하는 정도의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구시대적인 유교의 사상으로는 불효에 해당하는 일이고 반란이며 패륜이라는 무의식이 작용한걸까?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유교의 노예인걸까? 아마 맞겠지...)
5.
지난 추석에 겪은 생생한 한 장면...(이미 수 많은 명절에 되풀이 되었지만)
잘 차려진 추석 상에는 전과 잡채 갈비가 올라와 있다.
어버진 양념된 갈비를 손으로 잡으시는걸 아주 꺼려하신다.
게다가 갈비에 붙어 있는 기름이나 질긴 힘줄을 싫어 하신다.
결국은 누군가가 갈빗대에서 살을 발라낸 후에, 곳곳에 붙어 있는 기름과 힘줄을 제거 하야만 한다. 그게 사실은 거의 불가능하니 각자 알아서 해야겠지만...
아버진 손을 대기 싫으시니 식당에서 보는 집게와 가위를 달라고 하시고, 그나마도 잘 못하셔서 갈비와의 씨름이 벌어지고... 옆에서 보던 어머니는 답답해 답답해를 연발하시다가 얼추 발라서 아버지께 드리고는 적당히 좀 드시라 타박한다.
그 광경은 나 또한 매우 답답하고 불편하고 불쾌하기까지 한 장면인데... 그게 몇년을 반복하고 있다.
대체 왜 반복하면서 그런 음식을 그런 식으로 내는지, 음식을 효율적으로 자신의 기호에 맞게 요령껏 섭취하지 못하는지, 옆에서 답답하다면서도 계속 붙어서 잔소리를 하는지, 왜 그런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없는지...
어쩌면 이 와중에 일어난 어머니의 답답함과 짜증에 동조해서 나도 아버지를 비난하거나 어머니의 한마디를 거들거나 했을지도 모르고, 혹은 그 가운데서 마찰을 완화하기 위해서 중재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런게 각자의 성격인거고, 그 나름의 한계선(경계선)을 지키면서 일어나고 있어서 큰 충돌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난 이게 그렇게 불편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게 아주 많이 불편하다는 걸...
아마도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다면, 나는 그런 식사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는게 맞다.
그리고... 아마도 아주 어려서부터 그렇게 복작대고 지지고 볶고 하는 식탁에 익숙하게 자랐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정도의 스트레스는 참아내도록 길러졌나보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건 내게 스트레스였고, 참을만 한 수준은 아니었지 싶다.
이제 식사 자리에서 이런 상황이 나는 매우 불편하고 싫다, 그러니 그러지 말고 평화롭게 식사를 하자고 한들 이제와 고쳐질리 만무하다.
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상황이 매우 불편하니 나는 나중에 따로 식사를 하겠다고 피하는 방법 뿐인 것 같다.
6.
늙었나보다.
이렇게 두려운게 많다.
알면 알수록 두렵다.
차라리 모르면 용감할 수 있을텐데...이제는 세상 만사의 돌아가는 행태를 대충 이해하고 있으니, 무언가를 보면 그 뒤에 있을 일들까지 떠 오르면서 두려움들이 쌓인다.
그러니 젊은 시절이 용감한거다.
무식하니 용감한거 맞다.
가끔 공원을 산책하다 애완견을 끌고 나온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내가 개를 좋아해서 많이 봐주고 소리 내거나 친한척을 해주면 금새 반가워하는 개들이 있다.
10중 8,9는 어린 개다. 나이가 많아봐야 5살 이하인...하룻 강아지인 셈이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사람이라면 다 반갑고 그런건 다 어린 강아지들 뿐이다.
그런 개들도 나이가 더 들면 사람들을 경계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거다.
반가워해도 특별히 자기에게 득 될거 없는걸 아는 거다.
늙은 나는 두려움이 많다.
2018년 9월 21일 금요일
[도서]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 - 올더스 헉슬리
자세한 도서 정보는 나중에 추가하겠음.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이 책이 궁금해졌다.
책의 제목과 저자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이 들어보았지만, 정작 책을 읽을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주위에서 이 책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으니 읽어봐야겠다는 동기도 없었던 셈.
그런데 왜 갑자기 이 책이 생각난 걸까?
왜 갑자기 읽어 보고 싶어진 걸까?
아직은 초반부까지 읽은 상태인데 꽤 흥미롭다.
미래의 어느 사회.
극히 조절되고 통제되며 계획된 사회.
인간의 태생부터 계급화되고 계급에 맞게 배양되고 길러지는 사회이다.
이러한 면모들은 영화 이퀼리브리엄이나 데몰리션맨에서 봤던 것과 너무 흡사하다.
아마도 이 영화들이 멋진 신세계에서 차용한 아이디어겠지만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SF는 엉뚱한듯 해도 현 세상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가득해서 좋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생각지도 못했던 모순이나 불문에 대해 질문을 하게 만든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이 책이 궁금해졌다.
책의 제목과 저자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이 들어보았지만, 정작 책을 읽을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주위에서 이 책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으니 읽어봐야겠다는 동기도 없었던 셈.
그런데 왜 갑자기 이 책이 생각난 걸까?
왜 갑자기 읽어 보고 싶어진 걸까?
아직은 초반부까지 읽은 상태인데 꽤 흥미롭다.
미래의 어느 사회.
극히 조절되고 통제되며 계획된 사회.
인간의 태생부터 계급화되고 계급에 맞게 배양되고 길러지는 사회이다.
이러한 면모들은 영화 이퀼리브리엄이나 데몰리션맨에서 봤던 것과 너무 흡사하다.
아마도 이 영화들이 멋진 신세계에서 차용한 아이디어겠지만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SF는 엉뚱한듯 해도 현 세상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가득해서 좋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생각지도 못했던 모순이나 불문에 대해 질문을 하게 만든다.
2018년 8월 23일 목요일
행복...한가요?
나는 언제 행복한가?
행복했던 적은 있었나?
무얼 하면, 혹은 어떤 상황이면 행복할 것인가?
만약, 무인도에 혼자 남겨져 외롭고 절망뿐인 상황에 처한다면,
뜻하지 않게 죄를 지어 교도소 독방에 갇히게 되었다면,
사형을 선고 받은 사형수로, 언제 사형 당할지 모르고 하루 하루를 노심초사로 지내는 날이 계속된다면,
그래도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즐거움이라는 것을 찾아야 할 것이고,
주변의 사물이나 사람을 통해서 즐거움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즐거웠던 기억, 행복했던 순간, 혹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고 즐거워지는 그런 생각을 해야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과연 나는 무엇에 행복했던가?
무엇이 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고, 무엇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던걸까?
누구를 떠올리면 즐겁고, 누구를 떠올리면 행복한걸까?
무언가를 생각하기만 해도 기분이 우울해지고,
모든 힘이 빠져 나간 듯 하고,
모든 것이 잿빛에 암울하다면...
피할 수 없어서 죽음까지 떠 올린다면...
그래도 그게 여러가지 명패를 달고 다가와서 의무처럼 내 어깨 위에 올라탄다면...
과연 내가 내 생애에서 행복하기 위해 애쓴 적이 있던가?
나의 행복이 뭔지도 모르면서?
아마 싫은 건 있었겠지.
그리고 그 싫은 걸 피하는게 우선이었겠지.
그래서 내 삶은 행복을 얻기 위한게 아니라 고통을 피하기 위했던 과정 뿐일지도...
행복은 파랑새라고?
바로 옆에 존재했지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라고?
고난 없이는 달콤한 인생도 없다고 했던가?
어쩌면 내가 바라던 그 행복은, 내가 피하기만 했던 그 고통의 너머에만 존재했던 건 아닐까?
행복했던 적은 있었나?
무얼 하면, 혹은 어떤 상황이면 행복할 것인가?
만약, 무인도에 혼자 남겨져 외롭고 절망뿐인 상황에 처한다면,
뜻하지 않게 죄를 지어 교도소 독방에 갇히게 되었다면,
사형을 선고 받은 사형수로, 언제 사형 당할지 모르고 하루 하루를 노심초사로 지내는 날이 계속된다면,
그래도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즐거움이라는 것을 찾아야 할 것이고,
주변의 사물이나 사람을 통해서 즐거움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즐거웠던 기억, 행복했던 순간, 혹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고 즐거워지는 그런 생각을 해야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과연 나는 무엇에 행복했던가?
무엇이 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고, 무엇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던걸까?
누구를 떠올리면 즐겁고, 누구를 떠올리면 행복한걸까?
무언가를 생각하기만 해도 기분이 우울해지고,
모든 힘이 빠져 나간 듯 하고,
모든 것이 잿빛에 암울하다면...
피할 수 없어서 죽음까지 떠 올린다면...
그래도 그게 여러가지 명패를 달고 다가와서 의무처럼 내 어깨 위에 올라탄다면...
과연 내가 내 생애에서 행복하기 위해 애쓴 적이 있던가?
나의 행복이 뭔지도 모르면서?
아마 싫은 건 있었겠지.
그리고 그 싫은 걸 피하는게 우선이었겠지.
그래서 내 삶은 행복을 얻기 위한게 아니라 고통을 피하기 위했던 과정 뿐일지도...
행복은 파랑새라고?
바로 옆에 존재했지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라고?
고난 없이는 달콤한 인생도 없다고 했던가?
어쩌면 내가 바라던 그 행복은, 내가 피하기만 했던 그 고통의 너머에만 존재했던 건 아닐까?
2018년 6월 10일 일요일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경험을 한다면
요즘 유튜브에선 별걸 다 볼 수 있다.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전세계적으로 실시간 방송 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NASA에서방송을 하는 것인데, 우주선에서 혹은 우주 정거장에서, 도킹 과정, 분리 과정 등을 방송하곤 한다.
대부분은 암흑같은 우주를 배경으로 촬영한 영상이 아닌, 지구를 배경으로 촬영한 영상이다.
그걸 잠시 보고 있노라니 여러가지 생각들이 뇌리에 스치고 지나간다.
지구를 떠나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경험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관점을 열어준다는 말.
내가 살고 있던 지구, 내가 살고 있던 나라, 내가 살고 있던 도시, 내가 살고 있던 마을, 내가 살고 있던 집, 내 방,
마치 나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면서 내가 속한 곳들을, 나로부터 떨어진 거리의 비교로 인식하던 방법.
하지만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서 내가 살던 곳을 줌인 하듯 찾아가는 과정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나의 세계를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엔 나 자신에 대한 인식마저 바꾸어 놓을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마주" 보는 것이었다.
카메라를 통해서 나 자신을 찍는 것도 나와 "마주" 보는 방법이다.
이제 카메라를 내 등 뒤에 고정시키고 나를 촬영하면서 그 영상을 컴퓨터나 TV에서 실시간으로 재생한다면...
드론을 공중으로 날려서 드론의 카메라로 나 자신을 촬영하면서 보게 된다면...
인공 위성의 카메라를 통해 지구상에 나의 모습을 촬영하면서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게 된다면...
그게 나처럼 보일까?
그건 거울을 보는 것과 비슷할까?
그게 정말 나인지 증명할 수 있을까?
추가 :
간혹 운동 경기 중에 관중석에 응원하는 사람들을 클로즈업해서 촬영하고 그걸 경기장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 보여 주는 경우들이 있다.
그 찍힌 사람들이 처음으로 스크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전세계적으로 실시간 방송 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NASA에서방송을 하는 것인데, 우주선에서 혹은 우주 정거장에서, 도킹 과정, 분리 과정 등을 방송하곤 한다.
대부분은 암흑같은 우주를 배경으로 촬영한 영상이 아닌, 지구를 배경으로 촬영한 영상이다.
그걸 잠시 보고 있노라니 여러가지 생각들이 뇌리에 스치고 지나간다.
지구를 떠나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경험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관점을 열어준다는 말.
내가 살고 있던 지구, 내가 살고 있던 나라, 내가 살고 있던 도시, 내가 살고 있던 마을, 내가 살고 있던 집, 내 방,
마치 나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면서 내가 속한 곳들을, 나로부터 떨어진 거리의 비교로 인식하던 방법.
하지만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서 내가 살던 곳을 줌인 하듯 찾아가는 과정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나의 세계를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엔 나 자신에 대한 인식마저 바꾸어 놓을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마주" 보는 것이었다.
카메라를 통해서 나 자신을 찍는 것도 나와 "마주" 보는 방법이다.
이제 카메라를 내 등 뒤에 고정시키고 나를 촬영하면서 그 영상을 컴퓨터나 TV에서 실시간으로 재생한다면...
드론을 공중으로 날려서 드론의 카메라로 나 자신을 촬영하면서 보게 된다면...
인공 위성의 카메라를 통해 지구상에 나의 모습을 촬영하면서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게 된다면...
그게 나처럼 보일까?
그건 거울을 보는 것과 비슷할까?
그게 정말 나인지 증명할 수 있을까?
추가 :
간혹 운동 경기 중에 관중석에 응원하는 사람들을 클로즈업해서 촬영하고 그걸 경기장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 보여 주는 경우들이 있다.
그 찍힌 사람들이 처음으로 스크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