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1일 목요일

타인과 비교하기 / 비교당하기

대인관계의 피로함 때문에 사람들을 피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떼어버릴 수 없는 관계들도 있습니다. 바로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는 혈연관계입니다.
그리고 이 혈연관계의 연장선상에는 무수히 많은 친척들이 존재합니다.

이 친척들과의 관계는 좋다고 유지하고 싫다고 끊을 수 없으며
불가피하게 대면해야 하거나 끈질기게 소식을 접하고 전해야 하며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친척간이라고 모두 사이가 좋지만은 않으며, 사이가 좋은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이 섞여 있으면서 미묘한 역학 관계를 구성하기도 합니다.

종종 이런 친척들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는 경우들이 있는데, 심리적으로 좋지 않은 경우가 있어서 그 원인을 찾아보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 A가 많은 돈을 벌었다/A가 좋은 직장에 취직을 했다/A가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 ]
→ [ 이러한 A의 소식이 나에게 어떤 해를 끼치지 않음에도 질투/시기를 하게 된다 ]
→ [ A가 비열한 방법을 썼다/실제보다 부풀려졌다고 의심하거나 단점을 찾아 위안한다 ]
→ [ 잠시 나 자신을 기만할 뿐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
→ [ A에 대한 소식이 반복되면 기분이 좋지 않고 화를 내게 되며 심지어 A를 미워한다 ]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심리적 배경에는 "비교"당한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비교당할 거라는 두려움
어떤 가치를 획득한 타인을 질투하고 것은 타인과 자신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타인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상승함으로써 비교우위에 올라었다는 두려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여서 자신이 비교 열세에 처했다는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그 가치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경우, 또는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 무한정의 가치인 경우에는 확실히 비교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 듯 합니다.
라캉의 타자의 시선, 타자 의식, 타자의 욕망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요?


정작 이런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그저 한가지 화제거리일 수도 있으며, 지속적인 관심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식을 듣는 사람은 화자(話者)가 나와 그 사람을 비교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매우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혹시 이것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비교당하며 자라왔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아닐까요?
비교당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질책을 받고 반성과 각성을 강제당하곤 했습니다.
따라서 비교당하는 것 자체를 매우 불쾌하고 나쁜 것으로 느끼며, 회피하거나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아도 크고 작은 흥망성쇠는 반복하며 운이 좋거나 나쁜 일이 번갈아 찾아옵니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은 숨기기 마련이고 성과는 뽐내고 싶어합니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나의 소식은 좋은 것 뿐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속으로 나를 질투하고 시기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누군가는 대놓고 평가절하를 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의심할지도 모르며, 누군가는 무시할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면전에서라도 잘되었다 칭찬해주는 사람이나 함께 기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이런 사람들에 대한 느낌은 어떠할 것이며, 이들을 어떤 사람으로 평가하게 될까요?
과연 누가 소인배이고 대인배인가요?
누가 심성이 맑고 선한 사람이며, 누가 옹졸하고 겁에 질려있는 사람인가요?

2013년 4월 10일 수요일

타인에게 부탁하기 / 타인의 부탁을 들어주기

나이가 들면서 살아온 과정을 곱씹어 보는 일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삶이지만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보는 시야도 얻게 된 거 같습니다.

얼마전엔 집안에 선산과 관련되어, 지분을 누군가에게 일부 양도해 주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법률적인 의무/권리를 떠나서 한 집안 사람으로서 해 주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해타산이 횡행하고 물질이 우선시 되는 상황에서야 다른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모든 법률적인 절차와 비용에 관한 부분은 수혜자인 양수인 측에서 책임을 지는 것을 묵시적으로 동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양수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바로는 비용도 얼마 들지 않으며 간단하게 처리가 될 것이라고 하여 안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구체적인 행위에 들어가자 여러모로 번거로운 상황이 발생을 했습니다.

양수인은 지방에 거주하고 있으며, 양도인들은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는데, 양도인들이 지방에 직접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든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든 평일에 지방에 내려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양도인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어떠한 고려도 해 보지 않고는 법무사가 그랬다며 직접 내려와야 한다는 말만을 되풀이 하는 양수인이 참 야속하고 안타깝기까지 했습니다.

적어도
- 평일 공공기관 근무시간에만 가능하냐 주말에도 가능하냐
- 양도인들이 모두 시간을 맞춰서 동시에 가야하느냐, 따로 와도 되느냐
이 정도는 확인해 보고 연락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요?

① 타인에게 불편을 감수하기를 부탁해야 하는 상황인데, 저라면 무척 조심스러울 거 같습니다. 가능하면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아도 될 방법들을 최대한 찾아 볼 것이며, 그것이 불가할 경우에는 최대한 상대방의 편의를 제공하려고 노략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양수인은 너무나 쉽게 타인에게 불편을 요구하는군요. 이게 너무 화가 납니다.

양수인에게 왜 직접 내려가야 하는지, 내려가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시간 제약이 어떠한지 등등을 물으니 하나도 답을 하진 못하고 법무사가 그리 말해서 전하는 것 뿐이라고만 합니다. 그리고 양수인도 답답한지 법무사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저에게 직접 전화를 해 보라고 하더군요. (번거로움이나 전달과정의 오류를 생각하면 좋긴 하지만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결국 법무사와 통화해서 모두 이야기를 듣고 결국엔 지방에 내려가는 방법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양도인에게 연락해서 설명하고 시간 약속 정하고, 다시 법무사와 시간 약속 정하고, 다시 양수인과도 시간 약속 정하고...다행히 모두가 한번에 OK를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짜증 제대로 날 일이었습니다. (이걸 왜 제가 해야 하는건가요?)


지방에 내려가서 법무사와 모두가 함께 어떻게 진행을 할 것인지에 대해 조금은 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얼마 지난지 않아서 처리에 들어가는 비용이 예상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도 양수인 측이 부담할 비용이 적을 뿐이지 양도인 측이 부담할 비용은 매우 크다는 얘기를 듣고 적쟎이 실망했습니다.
어차피 모든 비용은 양수인이 부담하는 것을 묵시적으로 동의한 바이나, 양수인이 자신의 입장에서만 고려했기에 이렇게 예상과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지방으로 내려온 것이 허사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② 도의적인 의무로써 선산의 지분을 양도한다고는 하나,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양수할 수는 있으나, 최소한의 성의나 감사한 마음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난감한 상황의 내내 양수인은 자신의 불찰에 대한 태도는 전혀 보이질 않더군요. 물론 자신이 부담해야 할 비용이 크게 늘어나서 이걸 걱정하느라 겨를이 없을 수도 있고, 워낙에 법률과 관련된 문제들이 복잡하기에 미리 꼼꼼하게 챙긴다는게 불가능할 수 있으니 크게 마음에 담지는 않아야겠습니다.

긴 이야기를 나누고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진행하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가지 부수적으로 필요한 법률적 절차때문에 법정대리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촌수가 가까운 제가 법정대리인을 맡았으나 한명이 더 필요한 상황에서 제 누이를 법정대리인으로 하자고 부탁하더군요. 약간 깨름칙하지만 마침 누이의 주민번호등이 있었기에 알려 주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누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양수인은 이 사실을 모르겠죠.


시간이 며칠 지난 후에, 양수인으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제 누이의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 하더군요. 주민등록 초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번호는 알려주면서,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면 다른 양도인을 법정 대리인으로 세우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냥 누이에게 부탁하겠다고 합니다.

다른 양도인을 법정대리인으로 세우라 권했던 이유는 이렇습니다.
저와 다른 양도인은 주민등록초본과 인감증명을 법무사에게 제출하고 왔습니다.
양수인과 촌수가 좀 멀긴 하나 그래도 같은 집안의 사람입니다.
양수인이 저에게 주민등록초본을 요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난 번에 내려가서 주었던 것으로 대체가 가능하다 생각했고, 그러면 다른 양도인의 주민등록초본도 있으니 손쉽게 처리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양수인은 무슨 이유에선지 굳이 서울에 사는 누이에게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의 설명도 없이 주민등록 초본을 떼어서 부치라고 부탁했습니다.
(나중에 누이에게 전화로 확인하니 설명따윈 없었습니다.)

③ 누이에게 제가 미리 설명을 해 두긴 했지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양수인은, 먼저 자초지종을 설명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단지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부탁을 하는게 너무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인지, 애초에 이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던 누이에게 아무 거리낌도 없고 아무 전후 설명도 없이 부탁을 한 양수인을 생각하자 너무 화가 났습니다.


이래 저래 걱정도 많이 되고, 화도 나고, 마음이 참 불편했습니다.
그리곤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왜 나는 화가 나고 마음이 불편한 걸까?
양수인은 정말 몰염치에 철면피라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남에게 부탁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일부는 양수인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 자신 안에 있는 모순과 마주하게 됩니다.

[남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대명제에서 파생되어 온 의식은
[남이 싫어하거나 불편할 일을 부탁하는 것 또한 피해를 끼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나 봅니다. 통상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혹은 이렇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매우 선량해서 피해를 끼치지는 못하면서도 상대방의 부탁을 거절하지도 못해서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저 명제에 위배되는 것을 철저히 반대합니다.
따라서 내가 남에게 무리한 부탁을 못하면서 동시에 남이 내게 무리한 부탁을 하면 거절함은 물론이고 화를 내게 되나 봅니다.

어찌 보면 나와 타인을 동등하게 대하므로 좋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정작 실생활에서 부딪히게 되는 상황은, 저 대명제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것]과 [남이 싫어하는 것]이 다르다는 데서 발생하곤 합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겠지요.
모두가 일정한 교육을 받고 같은 시대 같은 문화권 내에 살고 있다면 이러한 대명제들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는 있는데,
그럼에도 문제들이 불거질 수 밖에 없는 것은 개인적인 호불호에 기인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호불호라 해서 취향이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될리 없겠지만, 가령 큰소리에 민감한지 여부, 덥거나 추운 기온의 차이, 등을 생각하면 어떨까요? 또 누군가는 명예를 중시하고 누군가는 실리를 중시한다면요?)

2013년 3월 9일 토요일

부정적인 생각의 결과

얼마전, 서울시에서는 소규모 영세상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형마트의 판매품목을 제한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는 뉴스가 들려 왔다.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303/h2013030820511021950.htm


아무리 중소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이라고는 하나, 좀 너무하다싶었는데, 마침 이 폼목을 선정한 인물이 모대학 교수라고 언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이 교수에 대해 검색을 해 보니, 첫번째 검색 결과에 누군가 블로그에 올린 글이 검색되었다.

좀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검색했던 것이기에,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인 정보를 찾고 있었을지 모르고, 마침 이 블로그의 서두엔 이 교수에 대한 비난의 문장이 있었기에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이건....
블로그의 글을 쓴 이는, 이 교수와 친척지간인 사람으로써 어려서부터 거칠고 불안정한 환경에서 살아온 것으로 보였다.

경제적인 어려움보다는 아버지의 잦은 이혼과 재혼, 계모와 이복 동생과의 갈등으로 참 어려운 청소년기를 겪어왔다고 하였다.
참 쉽지 않고 굴곡 많은 삶이었음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면서 뭔가 상당히 거북함을 느끼게 되었고, 나를 일깨워 주는 반면교사와 같은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글쓴이는 위기/갈등의 곳곳마다 누군가 책임이 있는 사람을 지목하고 그를 비난하고 있었다.
모든 사건은 객관적인 기술보다는 주관적으로 자신이 억울하다 생각되는 부분만을 언급한 것처럼 보였고, 그렇게 보인 이유는 글의 흐름이 논리적이지 못하고 비약적이며,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자신의 억울함은 있어도, 자신의 잘못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어떤 상황 자체가 보편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다는 것은, 자기 합리화를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아버지에게 사업자금을 요구하는 상황)

글쓴이는 모든 잘못 된 일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있었으며,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자기 합리화에만 몰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그의 생각에 의하면 그는 언제나 불행했다.

이것을 부정적인 생각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지, 자기 합리화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흔하지 않은 청소년기의 가정환경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면서 나의 한면을 보게 된 것 같고,
나 또한 스스로를 경계하지 않는다면 같은 결과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끼고 이 글을 반면 교사로 삼게 되었다.


자칫, 위의 글에 대한 링크를 남기거나 내용을 옮겨오는 것이 누군가에게 해로운 정보를 퍼뜨리는 일이 될 수 있기에, 검색이 되지 않도록 내용을 캡쳐하여 그림으로 여기에 등록을 해 두었다.
혹여라도 이글을 읽게 되는 분들은, 옮겨 온 글과 관련하여 해당 당사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 줄 것을 당부드리며, 그 내용을 옮겨 온 것은 나 스스로를 반성하기 위한 것일 뿐임을 다시 밝히는 바이다.


















2013년 2월 13일 수요일

"나"는 의식인가 인식인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식은 유아기를 거치는 과정에 만들어진다고 한다.
아마도 이 때 만들어지는 <의식(意識)>이란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분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에서 시작된 <의식>은 수 많은 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혹은 <나 이외의 모든 것>과의 차이를 <인식(認識)>함으로써 점차 더 확고해져 간다.

충분한(?) 과정을 거친 이러한 <의식>의 결과를 이르러 <의식>이라 해야 하는 것인지 <인식>이라 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두개의 단어 <의식>과 <인식>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 나는,
<의식>은 실체의 유무와 상관 없이 두뇌 혹은 이성의 작용에 의해서 규정된 추상적인 개념을 뜻하며, <인식>은 애초에 실체로써 존재했던 것을 감각과 경험에 의해 파악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구별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원래의 <의식>과 <인식>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내가 알고 있는 바와 다르다 하더라도 나는 위의 의미로써 사용하고 있는 것이니 이해해 주기 바란다.


"나"는 <의식>인가 <인식>인가 하는 의문의 근원을 따라가면,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면,
거울에 보이는 "누가" 있으며,
"누군가"의 신체 일부를 볼 수 있으며,
"누군가"의 신체를 통해 느낌을 얻을 수도 있으며,
이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아는 "누구"를 통해
실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의문의 과정에 나온 답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귀결이 된다.

생각하는 주체로써의 "나"마저 부정한다면,
생각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명제로 인용되곤 한다.

과연 맞는 말인가?
(말이 맞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맞는 것이겠지. 말은 그저 말일 뿐이다. 말과 말의 의미는 또 다른 문제니까.)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보고 느끼고 아는 "누구"를 통해 "나"의 실체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인가? 시작은 어디고 끝은 어디인가?
보는 것의 주체가 "나"인가?
느끼는 것의 주체가 "나"인가?
생각하는 것의 주체가 "나"인가?
"나"와 <보는 것>은 얼마나 일치하는 것이며, 그 사이에 있을지 모를 지연/왜곡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와 <느끼는 것>은 과연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으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나"와 <생각>은?
이 모든게 각각 일치하지 않는다면 "나"는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과는 일치하는가?
혹시 빠뜨린 몇가지를 더 넣으면 일체하게 되기는 할까?

데카르트의 명제는 "생각하는 주체로써의 나"를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로 간주하고 있으나, 여기에 큰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생각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 "나라는 의식의 주체가 생각"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애초에 "나"라는 실체는 없고, "나라는 생각"만이 존재한다면?
"나"라는 생각 = "나"라는 의식이 되고,
결국 "나"라는 의식만이 존재했으며, 이 의식이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이라면?


처음의 의문은 또 다시 이렇게 써야 맞을 것 같다.

"나"는 <의식>인가 <인식>인가 하는 의문의 근원을 따라가면,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다음의 의문으로 귀결된다.
"나"라는 의식이 "나"라는 실체를 만들어낸 것인가,
"나"라는 실체가 "나"라는 인식을 이끌어낸 것인가.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죽음충동


살짝 읽다 만 라캉의 책에 의하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구조적인 비대칭으로 결핍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러한 결핍을 메꾸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반복 강박이며, 욕망의 생성원리라고 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는 상징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고, 상징계에서는 절대로 이 결핍이 채워지지 못하기 때문에, 결핍이 채워지는 실재계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 죽음 충동이라 한다.
죽음에 의해서 실재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현실의 부족함을 메꿀 수 있다는, 엉켜버린 실타래 같은 현실(상징계)은 불만족스럽지만, 실재계에서는 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며, 나의 이상과 일치하게 되리라는 믿음.

한편으로 생각하면 실재계는 이상향이고 곰스크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고, 죽음으로만 충족이 가능한 종착점이다.
실재계가 있어야 꿈이 있으며, 상징계의 욕망이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재계를 상징계에서 이루고자 하는 욕망, 꿈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죽음에 의해서 충족이 가능한 꿈 때문에 현실에서의 욕구가 생성된다?

한가지, 짚어 봐야만 할 문제는, 실재계에 대한 욕망은 개개인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으로 보이는데(내 개인적인 경험 및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불분명하나 잠재적인 일반론으로 받아들 일 수 있음), 죽음에 의해 실재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가?

나 개인의 경우에는, 윤회를 통해서 인간의 영혼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간다는, 다분히 불교적인 환경에서 얻은 믿음(?) 혹은 개인적인 관심이 이끈 여러 서적을 통해 쌓인 믿음(?)에 의해, 약간 다르긴 하나 죽음에 의해 실재계에 도달하려는 욕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나 본능적인 무언가에 의해 일반적으로 이런 믿음(죽음으로 실재계에 도달한다는)을 갖게 된다고는 볼 수 없다 생각한다.

2013년 1월 10일 목요일

황금시대에 대한 과학

지금 글을 쓰는 시점에는 오히려 진부할 수도 있으나,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보면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포스팅 해 둡니다.

http://www.youtube.com/watch?list=FLxzSDe0lqRJwB_zYjsDsWCA&feature=player_detailpage&v=nZU9reH2HqE

http://youtu.be/B1NzP3OvPBo


이 동영상의 번역을 하신 분의 블로그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blog.naver.com/sesami9/20158958857

2013년 1월 9일 수요일

의식과 무의식, 언어

언어를 통해 의식을 하고, 언어를 통해 기억을 하고, 언어로 사고를 한다.
언어는 생각의 도구이자 생각의 기반이며 언어를 넘어서는 생각은 상상할 수도 없다.
아마도 이런 언어의 광대함 혹은 유일함(언어 말고 무엇으로 가능하단 말인가)으로 인해 언어 철학이 당당한 철학의 한 부류가 된 것은 아닐런지.

하지만 이 언어로 인해 거꾸로 인식의 한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런지.
느끼고 기억하고 통찰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오직 언어로 표현 가능한 것만이 인식이 되며,
나머지는 무의식으로 남겨지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모든 느낌들과 현상들 가운데 언어라는 필터를 거쳐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가 만들어지고,
언어를 배우는 순간부터 인간은, 의식화 되지 못한 무의식들을 어디엔가 켜켜이 쌓아 두고만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심지어는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느낌들은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리고,
오직 언어로 표현이 되는 느낌만이 유의미한 듯 받아들여지고 기억된다.

인간의 통찰력의 한계는 인식의 한계이며,
인식의 한계는 언어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깨달음이란 이러한 언어의 장벽 너머를 볼 수 있어야만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