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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0일 금요일

곰스크로 가는 기차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대한 감상이,
문득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곰스크>는 꿈이고 이상이며 마음에 간직한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것이었다.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당시엔 남성과 여성의 인생관에 대한 작품이라 생각했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는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선뜻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인간의 딜레마에 대한 작품이라 생각을 했다.


혹자는 <곰스크>를 상징적인 대명사로 사용하며,
서로의 "곰스크"를 묻고, 점점 잊혀져가는 자신의 "곰스크"에 우울해하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그가 <곰스크>에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해 보았다.
과연 곰스크는 그가 기대한 대로, 혹은 그 이상 이었을까? 아니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까?
아니, 기대 이상이라 한들, 그는 곰스크에 만족하고 거기에 정착했을까?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스크>는 도달할 수 없는 [저기]에 존재하는 무엇이었다. [여기]가 아니란 말이다.
여자는 [여기]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곳이라고 남자를 설득하고 붙잡았지만,
남자는 [여기]는 불충분한 곳이며 [저기]만이 충분할거라 생각한다.

그 남자는 끊임없이 행복을 쫓지만 행복해 질 수 없는 불행한 존재였으며,
그 여자는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도 그 순간의 행복을 찾아 누리는 존재였던 것이다.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죽음충동


살짝 읽다 만 라캉의 책에 의하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구조적인 비대칭으로 결핍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러한 결핍을 메꾸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반복 강박이며, 욕망의 생성원리라고 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는 상징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고, 상징계에서는 절대로 이 결핍이 채워지지 못하기 때문에, 결핍이 채워지는 실재계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 죽음 충동이라 한다.
죽음에 의해서 실재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현실의 부족함을 메꿀 수 있다는, 엉켜버린 실타래 같은 현실(상징계)은 불만족스럽지만, 실재계에서는 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며, 나의 이상과 일치하게 되리라는 믿음.

한편으로 생각하면 실재계는 이상향이고 곰스크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고, 죽음으로만 충족이 가능한 종착점이다.
실재계가 있어야 꿈이 있으며, 상징계의 욕망이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재계를 상징계에서 이루고자 하는 욕망, 꿈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죽음에 의해서 충족이 가능한 꿈 때문에 현실에서의 욕구가 생성된다?

한가지, 짚어 봐야만 할 문제는, 실재계에 대한 욕망은 개개인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으로 보이는데(내 개인적인 경험 및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불분명하나 잠재적인 일반론으로 받아들 일 수 있음), 죽음에 의해 실재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가?

나 개인의 경우에는, 윤회를 통해서 인간의 영혼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간다는, 다분히 불교적인 환경에서 얻은 믿음(?) 혹은 개인적인 관심이 이끈 여러 서적을 통해 쌓인 믿음(?)에 의해, 약간 다르긴 하나 죽음에 의해 실재계에 도달하려는 욕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나 본능적인 무언가에 의해 일반적으로 이런 믿음(죽음으로 실재계에 도달한다는)을 갖게 된다고는 볼 수 없다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