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7일 토요일

두려움의 사회

인간은 욕망이라는 기관차가 이끄는, 두려움이라는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열차와도 같습니다.

나는 가난이 두렵습니다.
나는 고통이 두렵습니다.
나는 부자유와 구속이 두렵습니다.
억압과 부당함이 두렵고, 불평등과 부정의가 두렵습니다.
창피한 것이 두렵고 나를 믿는 사람을 실망 시킬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느낄 법한 저런 두려움 외에 나를 아주 당혹하게 만든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건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주로 여자들이나 사회 경험이 아주 적은 신출내기들에게서 종종 겪게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나에게 일임된 부하직원 혹은 견습사원, 아르바이트생이라면 나의 명령대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고, 나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회사의 신임을 얻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볼때면 오히려 내가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것이 특효약입니다.
...
정말인가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요?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해 본 사람들은 두려움에 대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특히 남자들이 그렇고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 그렇습니다.
남자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선배와 후배라는 서열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어겼을 때에 대한 두려움을 익힙니다.
교사와 학생의 사이에서도 여학생의 경우보다 남학생의 경우에 서열에 대한 문제는 더 엄격히 적용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이 훈련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 대다수가 이런 훈련을 받아서 익숙해진 환경이기에
시회는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서열은 엄격하게 지켜져야 하며 이를 유지시키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두려움이 심어집니다.
그런 곳에 서열은 아랑곳하지 않는 여자들은 아주 맹랑하기 이를데 없는 천방지축으로 보여질 것이며, 군대를 다녀오지 않고 선후배간의 엄격한 서열을 경험하지 못한 신출내기들은 어리버리로 찍히기 일쑤입니다.

아마도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장유유서를 중시하는 유교의 관습과 남북한 분단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을 교육하고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대한민국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연장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외국인,
바지에 손을 넣은 채로 대통령과 악수하는 빌게이츠...

그 분노의 뒤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그들이 우리처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언젠가는 이런 두려움을 모두 없애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먼저 두려움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다면 이걸 제거하는 것도 좀 더 쉽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장애인에 대한 복지 정책

흔히들 신은 공평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엄청난 자연 재해로 수많은 인명과 동물들이 죽는 것을 보게 되거나
끔찍한 기형이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진정으로 신은 공평한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혹자는 이런 것을 두고 신의 공평함을 확신하기도 합니다.
소위 윤회의 굴레인 삶을 반복하면서 지은 업에 대한 보가 나타난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장애는 신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일시적인 불평등이고,
오랜 기간을 두고 보면 공평함을 구현하는 신의 장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각국의 정부들이 시행하는 갖가지 장애인에 대한 복지정책은 뭘까요?

신이 만든 일시적인 불평등을 인간이 교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신의 공평함을 무력화하려는 인간의 반란 쯤 되는 걸까요?

혹은 인간이 신의 뜻과 가까와져,
스스로 공평을 정의를 구현하고 용서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일까요?

이론과 실제

며칠 전, 구독하는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읽으면서 뭔가 야릇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글의 내용인 즉, 글쓴이 자신이 종사하는 컴퓨터 보안의 업무에 적합한 사람은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인지에 대한 것이었으며, 글의 의도는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미리 필요한 조건들을 제시해 줌으로써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목적도 순수하고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 작성한 글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감이 든 건...


그건 마치 그 글이, <자신과 어울리는 배우자를 고르기 위한 조건들>처럼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그 외에도 이와 유사한 부류의 글들이 많습니다.
<성공하기 위한 n가지 조건>과 같은 것들로 제목은 다양하지만
[ X하기 위한 조건 Y ]를 나열하는 식의 글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류의 글들이 제시하는 조건 Y는 X를 성취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 아닙니다.
어쩌면 충분 조건인 글이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글은 외면받곤 합니다.
(충분 조건은 그 범위가 너무나도 넓어서 조건을 충족시키기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것들은 그나마 필요조건이라 하더라도 너무 지엽적이거나 극히 일부분인 경우가 허다하고, 심지어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조건까지도 마구잡이로 끼어 넣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자신의 개인적인 성공사례 하나를 중심으로 글을 쓰기 때문일 것이며, 좀 더 넓혀 봐야 이런 사례 몇가지 정도를 모은 것이기에, 특정한 경우일 뿐 일반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이 인지하는 조건만이 기술되기에, 인지하지 못하는 조건은 무시되며,  간혹 잘못된 조건을 필요조건으로 오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너무 추상적으로 기술했나요?
구체적인 블로그 글 하나를 가지고 세상의 모든 처세/성공/사례/비법에 관한 글을 싸그리 비난하자니 어이 없는 논리의 비약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다시 원래의 글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아마도 글쓴이는 저기에 네모친 4가지 특성에 부합하는 사람이라면 컴퓨터 보안의 업무에도 적합할 거라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모르긴 해도 오랜 시간 업무에 종사하면서 나름대로 저런 특성을 도출해 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저 특성들이 너무나도 어렵고, 자신이 저런 특성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 보입니다.
글쓴이는 현재의 업무를 처음 시작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성격이 저기에 부합한다는 걸 알고 시작했을까요?
아니...처음 사회에 발을 내 딛을 때, 면접관이 저 4가지 특성에 대해 본인의 성격과 부합하는지 질문했다면 한치의 흔들림 없이 또렸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을까요?

아닐겁니다.
어쩌면 글쓴이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기에, 그래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기에, 힘들었던 부분을 골라낸 것일 수도 있겠죠.
혹은, 오랜 세월 업무를 하다보니 자신의 성격이 거기에 맞추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무작정 생겨나는 마음이 아닐까요?
다른 일엔 시큰둥 하다가도 갑지기 호기심이 생기는 무언가가 있다면,
다른 일은 시켜야만 하고, 감시해야만 하지만, 틈날 때마다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일이라면요?
수많은 구인 업체 가운데에서 특별히 지정하는 업종이 있다면, 혹은 무심코 앉은 컴퓨터 앞에서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분야가 있다면?
그것이 나의 적성에 맞는 일이 아닐까요?

저런 조건은 그 다음에 익혀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규율과 같은 것으로써...

그리고 대부분의 일들은 입으로 떠들고 글로 설명을 해도,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입니다.

A4 용지에 빽빽하게 배우자의 조건을 나열해 두었다가도, 그와 정반대 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처럼요.

2013년 4월 11일 목요일

타인과 비교하기 / 비교당하기

대인관계의 피로함 때문에 사람들을 피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떼어버릴 수 없는 관계들도 있습니다. 바로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는 혈연관계입니다.
그리고 이 혈연관계의 연장선상에는 무수히 많은 친척들이 존재합니다.

이 친척들과의 관계는 좋다고 유지하고 싫다고 끊을 수 없으며
불가피하게 대면해야 하거나 끈질기게 소식을 접하고 전해야 하며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친척간이라고 모두 사이가 좋지만은 않으며, 사이가 좋은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이 섞여 있으면서 미묘한 역학 관계를 구성하기도 합니다.

종종 이런 친척들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는 경우들이 있는데, 심리적으로 좋지 않은 경우가 있어서 그 원인을 찾아보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 A가 많은 돈을 벌었다/A가 좋은 직장에 취직을 했다/A가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 ]
→ [ 이러한 A의 소식이 나에게 어떤 해를 끼치지 않음에도 질투/시기를 하게 된다 ]
→ [ A가 비열한 방법을 썼다/실제보다 부풀려졌다고 의심하거나 단점을 찾아 위안한다 ]
→ [ 잠시 나 자신을 기만할 뿐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
→ [ A에 대한 소식이 반복되면 기분이 좋지 않고 화를 내게 되며 심지어 A를 미워한다 ]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심리적 배경에는 "비교"당한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비교당할 거라는 두려움
어떤 가치를 획득한 타인을 질투하고 것은 타인과 자신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타인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상승함으로써 비교우위에 올라었다는 두려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여서 자신이 비교 열세에 처했다는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그 가치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경우, 또는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 무한정의 가치인 경우에는 확실히 비교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 듯 합니다.
라캉의 타자의 시선, 타자 의식, 타자의 욕망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요?


정작 이런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그저 한가지 화제거리일 수도 있으며, 지속적인 관심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식을 듣는 사람은 화자(話者)가 나와 그 사람을 비교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매우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혹시 이것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비교당하며 자라왔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아닐까요?
비교당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질책을 받고 반성과 각성을 강제당하곤 했습니다.
따라서 비교당하는 것 자체를 매우 불쾌하고 나쁜 것으로 느끼며, 회피하거나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아도 크고 작은 흥망성쇠는 반복하며 운이 좋거나 나쁜 일이 번갈아 찾아옵니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은 숨기기 마련이고 성과는 뽐내고 싶어합니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나의 소식은 좋은 것 뿐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속으로 나를 질투하고 시기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누군가는 대놓고 평가절하를 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의심할지도 모르며, 누군가는 무시할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면전에서라도 잘되었다 칭찬해주는 사람이나 함께 기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이런 사람들에 대한 느낌은 어떠할 것이며, 이들을 어떤 사람으로 평가하게 될까요?
과연 누가 소인배이고 대인배인가요?
누가 심성이 맑고 선한 사람이며, 누가 옹졸하고 겁에 질려있는 사람인가요?

2013년 4월 10일 수요일

타인에게 부탁하기 / 타인의 부탁을 들어주기

나이가 들면서 살아온 과정을 곱씹어 보는 일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삶이지만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보는 시야도 얻게 된 거 같습니다.

얼마전엔 집안에 선산과 관련되어, 지분을 누군가에게 일부 양도해 주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법률적인 의무/권리를 떠나서 한 집안 사람으로서 해 주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해타산이 횡행하고 물질이 우선시 되는 상황에서야 다른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모든 법률적인 절차와 비용에 관한 부분은 수혜자인 양수인 측에서 책임을 지는 것을 묵시적으로 동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양수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바로는 비용도 얼마 들지 않으며 간단하게 처리가 될 것이라고 하여 안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구체적인 행위에 들어가자 여러모로 번거로운 상황이 발생을 했습니다.

양수인은 지방에 거주하고 있으며, 양도인들은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는데, 양도인들이 지방에 직접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든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든 평일에 지방에 내려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양도인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어떠한 고려도 해 보지 않고는 법무사가 그랬다며 직접 내려와야 한다는 말만을 되풀이 하는 양수인이 참 야속하고 안타깝기까지 했습니다.

적어도
- 평일 공공기관 근무시간에만 가능하냐 주말에도 가능하냐
- 양도인들이 모두 시간을 맞춰서 동시에 가야하느냐, 따로 와도 되느냐
이 정도는 확인해 보고 연락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요?

① 타인에게 불편을 감수하기를 부탁해야 하는 상황인데, 저라면 무척 조심스러울 거 같습니다. 가능하면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아도 될 방법들을 최대한 찾아 볼 것이며, 그것이 불가할 경우에는 최대한 상대방의 편의를 제공하려고 노략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양수인은 너무나 쉽게 타인에게 불편을 요구하는군요. 이게 너무 화가 납니다.

양수인에게 왜 직접 내려가야 하는지, 내려가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시간 제약이 어떠한지 등등을 물으니 하나도 답을 하진 못하고 법무사가 그리 말해서 전하는 것 뿐이라고만 합니다. 그리고 양수인도 답답한지 법무사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저에게 직접 전화를 해 보라고 하더군요. (번거로움이나 전달과정의 오류를 생각하면 좋긴 하지만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결국 법무사와 통화해서 모두 이야기를 듣고 결국엔 지방에 내려가는 방법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양도인에게 연락해서 설명하고 시간 약속 정하고, 다시 법무사와 시간 약속 정하고, 다시 양수인과도 시간 약속 정하고...다행히 모두가 한번에 OK를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짜증 제대로 날 일이었습니다. (이걸 왜 제가 해야 하는건가요?)


지방에 내려가서 법무사와 모두가 함께 어떻게 진행을 할 것인지에 대해 조금은 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얼마 지난지 않아서 처리에 들어가는 비용이 예상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도 양수인 측이 부담할 비용이 적을 뿐이지 양도인 측이 부담할 비용은 매우 크다는 얘기를 듣고 적쟎이 실망했습니다.
어차피 모든 비용은 양수인이 부담하는 것을 묵시적으로 동의한 바이나, 양수인이 자신의 입장에서만 고려했기에 이렇게 예상과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지방으로 내려온 것이 허사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② 도의적인 의무로써 선산의 지분을 양도한다고는 하나,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양수할 수는 있으나, 최소한의 성의나 감사한 마음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난감한 상황의 내내 양수인은 자신의 불찰에 대한 태도는 전혀 보이질 않더군요. 물론 자신이 부담해야 할 비용이 크게 늘어나서 이걸 걱정하느라 겨를이 없을 수도 있고, 워낙에 법률과 관련된 문제들이 복잡하기에 미리 꼼꼼하게 챙긴다는게 불가능할 수 있으니 크게 마음에 담지는 않아야겠습니다.

긴 이야기를 나누고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진행하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가지 부수적으로 필요한 법률적 절차때문에 법정대리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촌수가 가까운 제가 법정대리인을 맡았으나 한명이 더 필요한 상황에서 제 누이를 법정대리인으로 하자고 부탁하더군요. 약간 깨름칙하지만 마침 누이의 주민번호등이 있었기에 알려 주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누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양수인은 이 사실을 모르겠죠.


시간이 며칠 지난 후에, 양수인으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제 누이의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 하더군요. 주민등록 초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번호는 알려주면서,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면 다른 양도인을 법정 대리인으로 세우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냥 누이에게 부탁하겠다고 합니다.

다른 양도인을 법정대리인으로 세우라 권했던 이유는 이렇습니다.
저와 다른 양도인은 주민등록초본과 인감증명을 법무사에게 제출하고 왔습니다.
양수인과 촌수가 좀 멀긴 하나 그래도 같은 집안의 사람입니다.
양수인이 저에게 주민등록초본을 요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난 번에 내려가서 주었던 것으로 대체가 가능하다 생각했고, 그러면 다른 양도인의 주민등록초본도 있으니 손쉽게 처리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양수인은 무슨 이유에선지 굳이 서울에 사는 누이에게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의 설명도 없이 주민등록 초본을 떼어서 부치라고 부탁했습니다.
(나중에 누이에게 전화로 확인하니 설명따윈 없었습니다.)

③ 누이에게 제가 미리 설명을 해 두긴 했지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양수인은, 먼저 자초지종을 설명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단지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부탁을 하는게 너무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인지, 애초에 이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던 누이에게 아무 거리낌도 없고 아무 전후 설명도 없이 부탁을 한 양수인을 생각하자 너무 화가 났습니다.


이래 저래 걱정도 많이 되고, 화도 나고, 마음이 참 불편했습니다.
그리곤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왜 나는 화가 나고 마음이 불편한 걸까?
양수인은 정말 몰염치에 철면피라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남에게 부탁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일부는 양수인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 자신 안에 있는 모순과 마주하게 됩니다.

[남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대명제에서 파생되어 온 의식은
[남이 싫어하거나 불편할 일을 부탁하는 것 또한 피해를 끼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나 봅니다. 통상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혹은 이렇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매우 선량해서 피해를 끼치지는 못하면서도 상대방의 부탁을 거절하지도 못해서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저 명제에 위배되는 것을 철저히 반대합니다.
따라서 내가 남에게 무리한 부탁을 못하면서 동시에 남이 내게 무리한 부탁을 하면 거절함은 물론이고 화를 내게 되나 봅니다.

어찌 보면 나와 타인을 동등하게 대하므로 좋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정작 실생활에서 부딪히게 되는 상황은, 저 대명제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것]과 [남이 싫어하는 것]이 다르다는 데서 발생하곤 합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겠지요.
모두가 일정한 교육을 받고 같은 시대 같은 문화권 내에 살고 있다면 이러한 대명제들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는 있는데,
그럼에도 문제들이 불거질 수 밖에 없는 것은 개인적인 호불호에 기인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호불호라 해서 취향이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될리 없겠지만, 가령 큰소리에 민감한지 여부, 덥거나 추운 기온의 차이, 등을 생각하면 어떨까요? 또 누군가는 명예를 중시하고 누군가는 실리를 중시한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