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친구와 얘기를 하던 중에 나온 화제가 직업에 관한 것이었다.
인생의 1차전을 일찌감치 마감하고 2차전에 차마 돌입하지 못한 상태로 장기 백수상태에 빠져 있는 나의 입장에선 반드시 숙고해 봐야할 주제이기도 하다.
화제가 돌아가게된 계기가 개그맨 박명수의 "젊어서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더울 때 더운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데서 일한다"는 어록(?)에서 시작이 되었다.
친구는 그 말에 대해 꽤나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유인 즉, 직업의 귀천을 너무나도 쉽게 평가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면서 덧 붙이기를, 흔히 부모들이 아이에게 하는 말 가운데, 지하철이나 아파트의 공사장 인부를 보면서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고 하는 말들이 얼마나 잘못된 교육인지를 성토했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오래된 나의 고정관념으로는 선뜻 수용하기도 쉽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주입식으로 교육을 받고 난 후에, 스스로 고민해 보지 않는 이상은 이러한 고정관념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어째서 우리는 육체로 하는 노동, 지저분한 환경에서의 작업, 위험한 환경에서의 일을 천한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책상앞에서 컴퓨터나 서류로 하는 일,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하는 일을 귀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귀천(貴賤)이라는 기준이 거슬린다면, 좋은 직업과 나쁜 직업으로 나누는 것은 어떤가?
직업에 대한 세간의 평가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듯 하다.
내 부모 세대에는 안정적인 직업이 최고였다 들었다. 은행원 교사가 그랬다고들 한다.
우리 세대에서는 고소득자가 최고였던 듯 싶다. 의사 변호사가 그랬다. (수입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정도의 결정요소가 되곤 하지만, 앞선 세대가 겪었던 경제적 불안 요소가 줄어든 후에는 차별화가 소득으로 이어진 듯 하다.)
어쩌면 우리 세대에는 소득과 사회적 지위가 모두 좋은 직업이 선호 되었던 듯 하다.
그리고 21세기의 시작을 전후하는 세대들은 다시 안전성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사와 공무원에 대한 선호가 높아졌지만, 반드시 앞선 세대와 같지는 않아 보인다.
대중화 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직업의 선택에 대한 폭이 넓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직업에 대한 귀천의 차별은 조금은 흐려지지 않나 싶다.
대화의 중간에 내가 제시한 반대 의견은, 직업의 귀천이 문제가 아니라, 직업을 내가 선택하느냐 혹은 선택되어지느냐의 문제라고 했다.
직업을 선택할 때, 그 직업에서 요구되는 조건이 높은지 낮은지에 따라 내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의 선택권이 제한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내가 원하는 직업에 대한 선택권이 나에게 주어지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직업이 없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 가운데에서 골라야 하는가가 되는 것이다.
(골라야 한다니 배부른 소리이겠지만 싫어하는 것들 가운데 고르라니....)
당연히 직업에 대한 만족도는 달라질 것이다.
더욱이 한번 갖게 된 직업들은 몇년 혹은 그보다 오래도록 나의 생활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에 인생에 대한 만족도 또한 달라질 것이다.
물론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갖게 된다해도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100% 보장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처음 시작할 때의 출발 선은 다르지 않겠는가?
직업의 귀천에 대한 아무런 숙고 없는 고정관념은 반드시 벗어나야 할 주제이다.
고정관념을 벗어난 후에야 직업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12월 28일 일요일
2014년 12월 23일 화요일
균형을 맞추기 위한 반대
연말이라고 고교동창들과 모임을 가졌다.
386의 끝트머리를 잡고 있는 세대인 우리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을 정도의 주입식 교육과 무조건적인 반공 교육, 충효를 절대 선(善)으로 떠받들어야 한다는 세뇌(?)교육을 받았었다.
그런 일괄적인 교육의 틀에 박혀서 나왔음에도 어찌 그리 각양각색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희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작은 모임의 정치적인 성향이 현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평균에 부합하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 그 안에서 상대적인 보수와 진보가 존재하며 중도와 극도가 존재한다.
내가 나 자신을 극도의 진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이 모임에서 극도의 보수로 불릴만한 K와 종종 대립각을 세우는 쪽은 나였다.
얼마전 헌법재판소가 내린 통합진보당의 정당 해체 결판은 적지 않게 충격적이었다.
사실 내 자신이 통진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몇백만의 국민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대한민국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결은, 그들의 사상이 적합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그들의 사상을 바꾸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에 존재해서는 안될 존재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쪼록 통진당의 반민주적인 당령과 당론이 대부분의 지지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간과되었기만을 바래야 할 상황이었다.
이 재판의 결과를 보면서, 박근혜가 결국은 해 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구나 기억할,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방송된 TV 토론회에서, 당시 통진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정희 대표와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박근혜 대표간의 날 선 공방.
특히나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이정희 후보의 발언이 모든 것의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발언의 진위,진정성,타당성 따위는 모두 제쳐두고라도 결과만을 보면 박근혜 후보에게 득이되었으며 이정희 후보에게는 독이 되었다. 그 결과는 얼마 되지 않아 선거의 결과로 나타났다.
이정희는 진보에서 그 발언으로 극단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극으로 달려가는 이정희 후보를 본 유권자들 중의 상당수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반대쪽인 보수 쪽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뒤늦게 이정희 후보는 사퇴하면서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로 결집을 시도했지만, 이정희 후보의 극단에 반발하여 뭉친 보수쪽은 더 단단하고 더 무거웠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던가
이정희 후보에게 놀라서 보수쪽으로 달려간 유권자들은 과연 이정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박근혜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었을 것인가?
내 수준이 이것밖에는 안되는지 몰라도 그저 느낌상,심정상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정희 후보가 너무 가는구나...
단순한 느낌만으로 이정희는 아니구나 박근혜가 불쌍하구나로 유권자들이 이동하지 않았을까?
이 개개인들이 내린 판단의 근거는 아주 희박하고 비논리적이니 이걸 대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다.
하지만....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유권자들은 전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움직였던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개개인들을 자세히 보면 별 깊은 생각도 없고 반(半)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듯 할 정도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 방정식의 변수들처럼 균형을 맞추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말이다.
어쩌면 K의 극단적인 보수 성향은 내가 극단적인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할 지라도,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면 그가 혼자 보수쪽으로 치달을 수는 없지 않을까?
내가 극단으로 가면 상대방 또한 극단으로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화합을 위해서는 내가 먼저 양보해야 한다는 말은 내가 중도를 향하면 상대도 중도를 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일까?
결국은 이것이 화합을 이루는 길이지만....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되어 있고, 자유도는 확장되게 되어 있고, 사상은 다양해지게 되어 있지 않은가?
어차피 나는 하나의 점으로서 어디엔가 위치하고 있다.
하나의 점은 필연적으로 어떤 점과는 반대편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점과는 가깝지만 동시에 다른 점과는 멀게 된다.
치우침은 필수 불가결하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모든 점의 중심이 되겠다고 한다면 이 또한 지극한 이기심이며, 오히려 모든 점으로부터 균등하게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혹은 하나의 점이 아닌 모든 점이 되고자 한다면 그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동일해 지는 것이다.
나는 하나의 점이다.
하나의 점은 치우침이다.
나의 치우침만큼 누군가는 반대로 치우친다.
그 치우친 누군가는 나와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치우친 누군가와 일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치우친 누군가가 존재해야만 나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386의 끝트머리를 잡고 있는 세대인 우리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을 정도의 주입식 교육과 무조건적인 반공 교육, 충효를 절대 선(善)으로 떠받들어야 한다는 세뇌(?)교육을 받았었다.
그런 일괄적인 교육의 틀에 박혀서 나왔음에도 어찌 그리 각양각색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희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작은 모임의 정치적인 성향이 현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평균에 부합하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 그 안에서 상대적인 보수와 진보가 존재하며 중도와 극도가 존재한다.
내가 나 자신을 극도의 진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이 모임에서 극도의 보수로 불릴만한 K와 종종 대립각을 세우는 쪽은 나였다.
얼마전 헌법재판소가 내린 통합진보당의 정당 해체 결판은 적지 않게 충격적이었다.
사실 내 자신이 통진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몇백만의 국민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대한민국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결은, 그들의 사상이 적합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그들의 사상을 바꾸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에 존재해서는 안될 존재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쪼록 통진당의 반민주적인 당령과 당론이 대부분의 지지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간과되었기만을 바래야 할 상황이었다.
이 재판의 결과를 보면서, 박근혜가 결국은 해 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구나 기억할,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방송된 TV 토론회에서, 당시 통진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정희 대표와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박근혜 대표간의 날 선 공방.
특히나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이정희 후보의 발언이 모든 것의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발언의 진위,진정성,타당성 따위는 모두 제쳐두고라도 결과만을 보면 박근혜 후보에게 득이되었으며 이정희 후보에게는 독이 되었다. 그 결과는 얼마 되지 않아 선거의 결과로 나타났다.
이정희는 진보에서 그 발언으로 극단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극으로 달려가는 이정희 후보를 본 유권자들 중의 상당수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반대쪽인 보수 쪽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뒤늦게 이정희 후보는 사퇴하면서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로 결집을 시도했지만, 이정희 후보의 극단에 반발하여 뭉친 보수쪽은 더 단단하고 더 무거웠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던가
이정희 후보에게 놀라서 보수쪽으로 달려간 유권자들은 과연 이정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박근혜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었을 것인가?
내 수준이 이것밖에는 안되는지 몰라도 그저 느낌상,심정상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정희 후보가 너무 가는구나...
단순한 느낌만으로 이정희는 아니구나 박근혜가 불쌍하구나로 유권자들이 이동하지 않았을까?
이 개개인들이 내린 판단의 근거는 아주 희박하고 비논리적이니 이걸 대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다.
하지만....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유권자들은 전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움직였던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개개인들을 자세히 보면 별 깊은 생각도 없고 반(半)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듯 할 정도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 방정식의 변수들처럼 균형을 맞추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말이다.
어쩌면 K의 극단적인 보수 성향은 내가 극단적인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할 지라도,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면 그가 혼자 보수쪽으로 치달을 수는 없지 않을까?
내가 극단으로 가면 상대방 또한 극단으로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화합을 위해서는 내가 먼저 양보해야 한다는 말은 내가 중도를 향하면 상대도 중도를 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일까?
결국은 이것이 화합을 이루는 길이지만....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되어 있고, 자유도는 확장되게 되어 있고, 사상은 다양해지게 되어 있지 않은가?
어차피 나는 하나의 점으로서 어디엔가 위치하고 있다.
하나의 점은 필연적으로 어떤 점과는 반대편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점과는 가깝지만 동시에 다른 점과는 멀게 된다.
치우침은 필수 불가결하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모든 점의 중심이 되겠다고 한다면 이 또한 지극한 이기심이며, 오히려 모든 점으로부터 균등하게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혹은 하나의 점이 아닌 모든 점이 되고자 한다면 그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동일해 지는 것이다.
나는 하나의 점이다.
하나의 점은 치우침이다.
나의 치우침만큼 누군가는 반대로 치우친다.
그 치우친 누군가는 나와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치우친 누군가와 일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치우친 누군가가 존재해야만 나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2014년 12월 16일 화요일
영혼은 존재하는가?
영혼은 존재하는 것인가?
많은 종교들이 인간의 영혼에 대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만, 종교에서는 그럴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은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인생이라면 내세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인간이 종교에 기대야 할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즉, 종교는 더 많은 사람이 더 강력하게 종교에 의존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생을 넘어서까지 연장되는 영혼의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혼이 단지 종교의 필요에 의해서만 생겨난 개념이라면, 이 만큼 널리 오랫동안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들의 본능적인 두려움-죽음-에 대한 위안이 되기도 하고 욕구-영생-에 대한 희방이 되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바램을 던져버리고 냉철하게 판단해 볼 때, 정말 영혼은 존재하는 것인가?
많은 종교들이 인간의 영혼에 대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만, 종교에서는 그럴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은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인생이라면 내세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인간이 종교에 기대야 할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즉, 종교는 더 많은 사람이 더 강력하게 종교에 의존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생을 넘어서까지 연장되는 영혼의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혼이 단지 종교의 필요에 의해서만 생겨난 개념이라면, 이 만큼 널리 오랫동안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들의 본능적인 두려움-죽음-에 대한 위안이 되기도 하고 욕구-영생-에 대한 희방이 되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바램을 던져버리고 냉철하게 판단해 볼 때, 정말 영혼은 존재하는 것인가?
- 영혼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 그 영혼이 여러 생에에 걸쳐서도 고유하게 유지된다고 가정하자
- 영혼은 불멸이라 소멸하지도 않는다고 가정하자.
- 그렇다면 영혼은 생성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지구의 인류가 증가하는 것을 설명하기에 곤란해 진다.
- 영혼도 새로 태어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고 가정하자
- 이는 인간의 육체보다 상대적으로 긴 기간일 뿐 마찬가지로 유한하며 시작과 끝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 영혼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는다면 그 영혼을 구분할 필요가 없으며 육체적인 구분보다 더 실체라 할 수 없게 된다.
-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 인간은 육체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다. 비육체적인 정신 활동은 단지 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것이거나 환상일 따름이다.
- 귀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 전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타자의 욕망 타자의 두려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게 되면서 나에게 일어난 큰 변화는, 자신에 대한 시각이 보다 객관화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이 늘어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객관화의 정도야 사람마다 천양지차이겠지만...
그리고 이런 변화는 축복이며 저주와도 같았다.
자신이 객관화 될수록 자신을 평가하는 일도 잦아지며 이 평가는 냉정해진다. 또한 냉정한 시각으로 과거의 자신을 되짚는 일은 분명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인식이 보다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는 느낌, 인식의 범위가 넓어지고 진실에 가까와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기쁨이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거듭하다보면, 내가 가지고 있던 욕망과 두려움이 점차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물론 완전한 근원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껍데기를 하나씩 벗겨내고 안으로 들어가 그 기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욕망과 두려움이 정녕 내가 스스로 원한것이었는지, 내가 겪었던 고통에 기인한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후에 좀 더 근원적인 실체에 접근하면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만, 현재로써는 욕망과 두려움의 상당 부분이 다른 사람에 의해 심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아마도 내게 이런 욕망과 두려움을 심어준 사람은 부모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무저항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욕망과 두려움 혹은 욕망을 유발할 무엇과 두려움을 가지게 될 무엇을 심어준 사람으로는 가장 큰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만한 영향력을 지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능할 것이다.
하나의 인간이 걸어가는 인생 길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이끄는 길, 그리고 두려움으로 막혀진 길의 사이라고 생각한다.
우연처럼 인생을 좌우할 큰 사건들이 인간에게 벌어지지만 그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반응은 각자가 가진 욕망과 두려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인간이 가진 욕망과 두려움은 인생을 좌우할 열쇠인 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욕망과 두려움을 후세에 전달하는 일은, 그 후세들이 갈 인생의 폭을 크게 제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크게 열려 있음에도 욕망과 두려움으로 아주 제한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틀림없이 슬픈 일이다.
인간이 태어나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그것을 열망할 때에 순순하게 그 자신이 될 것이다.
타자의 욕망은 그 원동력이 약하기에 쉽게 좌절될 수 있으며 이루고 난 후에도 자신이 아닌 타자가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스스로가 겪은 아픔과 고통만으로도 두려워서 피하게 되는 선택은 있게 마련인데, 거기에 타자의 두려움까지 더해져서 더욱더 선택이 폭이 좁아진다면, 가보지 못한 길은 너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보니 내가 살아온 길이 나의 길이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서글프다.
모쪼록 후세에게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투영시켜 그들이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이 늘어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객관화의 정도야 사람마다 천양지차이겠지만...
그리고 이런 변화는 축복이며 저주와도 같았다.
자신이 객관화 될수록 자신을 평가하는 일도 잦아지며 이 평가는 냉정해진다. 또한 냉정한 시각으로 과거의 자신을 되짚는 일은 분명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인식이 보다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는 느낌, 인식의 범위가 넓어지고 진실에 가까와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기쁨이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거듭하다보면, 내가 가지고 있던 욕망과 두려움이 점차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물론 완전한 근원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껍데기를 하나씩 벗겨내고 안으로 들어가 그 기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욕망과 두려움이 정녕 내가 스스로 원한것이었는지, 내가 겪었던 고통에 기인한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후에 좀 더 근원적인 실체에 접근하면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만, 현재로써는 욕망과 두려움의 상당 부분이 다른 사람에 의해 심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아마도 내게 이런 욕망과 두려움을 심어준 사람은 부모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무저항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욕망과 두려움 혹은 욕망을 유발할 무엇과 두려움을 가지게 될 무엇을 심어준 사람으로는 가장 큰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만한 영향력을 지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능할 것이다.
하나의 인간이 걸어가는 인생 길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이끄는 길, 그리고 두려움으로 막혀진 길의 사이라고 생각한다.
우연처럼 인생을 좌우할 큰 사건들이 인간에게 벌어지지만 그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반응은 각자가 가진 욕망과 두려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인간이 가진 욕망과 두려움은 인생을 좌우할 열쇠인 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욕망과 두려움을 후세에 전달하는 일은, 그 후세들이 갈 인생의 폭을 크게 제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크게 열려 있음에도 욕망과 두려움으로 아주 제한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틀림없이 슬픈 일이다.
인간이 태어나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그것을 열망할 때에 순순하게 그 자신이 될 것이다.
타자의 욕망은 그 원동력이 약하기에 쉽게 좌절될 수 있으며 이루고 난 후에도 자신이 아닌 타자가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스스로가 겪은 아픔과 고통만으로도 두려워서 피하게 되는 선택은 있게 마련인데, 거기에 타자의 두려움까지 더해져서 더욱더 선택이 폭이 좁아진다면, 가보지 못한 길은 너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보니 내가 살아온 길이 나의 길이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서글프다.
모쪼록 후세에게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투영시켜 그들이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 25일 화요일
죄의 탄생
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죄를 저지를 사람은 애초에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가?
혹은 환경으로 인해 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도록 강제되는 것인가?
환경적으로는 전혀 범죄를 저지를만한 동기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경우도 있으며,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죄를 짖는 것이 불가피해 보이는 상황에도 한심하다 싶을 정도로 순박하거나 청렴함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경우로는, 고교생의 신분으로 <초x이의 모험>이라는 게임을 개발해 재능을 인정받아 국내 대기업 S전자에 입사했으나 자신의 꿈과 동떨어진 업무로 회사에 흥미를 잃고 위조지폐를 만드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있었다.
후자의 경우로는, 반지하 월세에 세들어 살던 세모녀가 수입이 없어 살길이 막막해지자 번개탄을 피워 자살을 한 사건이 었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월세와 공과금을 유서와 함께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극과 극을 보여주는 경우이긴 하지만, 이들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범죄/사건/사고 등을 보면 죄를 저지르기 쉬운 유형의 사람이 있으며, 이들도 정도의 차이가 다양하여, 범죄를 유발하는 환경의 임계점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보는 것이 그나마 타당한 분석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보다 타당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려면,
사람마다 죄를 저지를 분야가 다른 것 같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금전적인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높지만 권력이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어 사람의 상해에 관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거의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설명한 "분야"는 앞선 <소인(素因)-환경> 가운데 <소인(素因)>과 같은 것이다.
종합하자면, 사람에 따라 죄를 저지르기 쉬운 정도의 차이가 있고, 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분야가 다르며, '정도'와 '분야'가 환경적 조건과 맞아 떨어지면 죄로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죄를 저지를 수 있는 분야가 있고, 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자신의 실체 가운데 일정 정도를 아는 방법이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피해야 할 환경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죄를 저지를 사람은 애초에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가?
혹은 환경으로 인해 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도록 강제되는 것인가?
환경적으로는 전혀 범죄를 저지를만한 동기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경우도 있으며,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죄를 짖는 것이 불가피해 보이는 상황에도 한심하다 싶을 정도로 순박하거나 청렴함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경우로는, 고교생의 신분으로 <초x이의 모험>이라는 게임을 개발해 재능을 인정받아 국내 대기업 S전자에 입사했으나 자신의 꿈과 동떨어진 업무로 회사에 흥미를 잃고 위조지폐를 만드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있었다.
후자의 경우로는, 반지하 월세에 세들어 살던 세모녀가 수입이 없어 살길이 막막해지자 번개탄을 피워 자살을 한 사건이 었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월세와 공과금을 유서와 함께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극과 극을 보여주는 경우이긴 하지만, 이들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범죄/사건/사고 등을 보면 죄를 저지르기 쉬운 유형의 사람이 있으며, 이들도 정도의 차이가 다양하여, 범죄를 유발하는 환경의 임계점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보는 것이 그나마 타당한 분석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보다 타당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려면,
사람마다 죄를 저지를 분야가 다른 것 같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금전적인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높지만 권력이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어 사람의 상해에 관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거의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설명한 "분야"는 앞선 <소인(素因)-환경> 가운데 <소인(素因)>과 같은 것이다.
종합하자면, 사람에 따라 죄를 저지르기 쉬운 정도의 차이가 있고, 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분야가 다르며, '정도'와 '분야'가 환경적 조건과 맞아 떨어지면 죄로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죄를 저지를 수 있는 분야가 있고, 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자신의 실체 가운데 일정 정도를 아는 방법이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피해야 할 환경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 노출증
가족들만 모여 있는 집안에서, 이웃들과 마주칠 수 있는 집 앞의 동네,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큰 길거리와 공공 장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적절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야 한다.
적절하다는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바꾸어 말하자면 최소한 가려서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사람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서로간에 노출이 가능한 정도가 묵시적으로 합의되어 있는 듯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친밀도에 의해 가능한 노출의 정도가 결정되곤 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이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의 노출 정도 또한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사실(?)이라 생각한다.
사실(?)에 물음표가 붙은 이유는, 누구도 명시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가르쳐 주거나 선언하는 것을 듣거나 본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겪어 본 바로는 그렇기 때문이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비교적 넓게 노출이 허용되는 감정이긴 하지만, 이 역시 제한되는 관계가 있다.
슬픔과 분노는 훨씬 더 노출이 제한되는 감정임에 틀림없다.
서로간에 묵시적으로 합의된 감정의 노출제한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의 당혹감은 마치...
꽤나 격식을 차리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웃통을 벗어 제치고 바지를 내린다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중요하고 숨기고 싶어할만한 부분을 보여준다면?
마찬가지로 사무적인 관계, 공적인 관계의 사람이 지극히 내밀한 감정을 보여준다면?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우호적이어야 하는 관계를 가져야 하는 관계에서 분노가 표출된다면?
허용된 노출은 쉽게 무마되고 복구된다.
하지만 제한을 넘긴 감정의 노출은 관계의 재설정을 요구한다.
상호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감정 노출의 범위가 넓어지는 효과를 가져오지만,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아얘 관계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
감정 노출의 제한이 비대칭 적일 수 있다.
즉, 특정 쌍방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도 감정 표현의 제한이 방향에 따라 다르게 설정된다는 것.
종종 부모와 자식간에 이런 경우가 많으며, 상하 종속적인 관계에서도 흔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간에 이루어지는 감정의 노출 제한은 다른 경우가 많다.
매우 엄한 선생님과 순종적인 학생과 같은 전통적인 스승-제자의 관계에서,
스승은 제자에게 애착과 분노를 보일 수 있지만 슬픔과 기쁨을 보여주는 것은 제한될 수 있고, 제자는 스승에게 기쁨과 슬픔은 허용되지만 분노는 제한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를 두고 상하관계, 지배-종속의 관계라고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한 것 같다.
하지만 지배-종속관계에서는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이 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듯 하다.
적절하다는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바꾸어 말하자면 최소한 가려서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사람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서로간에 노출이 가능한 정도가 묵시적으로 합의되어 있는 듯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친밀도에 의해 가능한 노출의 정도가 결정되곤 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이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의 노출 정도 또한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사실(?)이라 생각한다.
사실(?)에 물음표가 붙은 이유는, 누구도 명시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가르쳐 주거나 선언하는 것을 듣거나 본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겪어 본 바로는 그렇기 때문이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비교적 넓게 노출이 허용되는 감정이긴 하지만, 이 역시 제한되는 관계가 있다.
슬픔과 분노는 훨씬 더 노출이 제한되는 감정임에 틀림없다.
서로간에 묵시적으로 합의된 감정의 노출제한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의 당혹감은 마치...
꽤나 격식을 차리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웃통을 벗어 제치고 바지를 내린다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중요하고 숨기고 싶어할만한 부분을 보여준다면?
마찬가지로 사무적인 관계, 공적인 관계의 사람이 지극히 내밀한 감정을 보여준다면?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우호적이어야 하는 관계를 가져야 하는 관계에서 분노가 표출된다면?
허용된 노출은 쉽게 무마되고 복구된다.
하지만 제한을 넘긴 감정의 노출은 관계의 재설정을 요구한다.
상호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감정 노출의 범위가 넓어지는 효과를 가져오지만,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아얘 관계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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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노출의 제한이 비대칭 적일 수 있다.
즉, 특정 쌍방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도 감정 표현의 제한이 방향에 따라 다르게 설정된다는 것.
종종 부모와 자식간에 이런 경우가 많으며, 상하 종속적인 관계에서도 흔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간에 이루어지는 감정의 노출 제한은 다른 경우가 많다.
매우 엄한 선생님과 순종적인 학생과 같은 전통적인 스승-제자의 관계에서,
스승은 제자에게 애착과 분노를 보일 수 있지만 슬픔과 기쁨을 보여주는 것은 제한될 수 있고, 제자는 스승에게 기쁨과 슬픔은 허용되지만 분노는 제한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를 두고 상하관계, 지배-종속의 관계라고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한 것 같다.
하지만 지배-종속관계에서는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이 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듯 하다.
2014년 11월 3일 월요일
금언(禁言)
R. F. Scott
1. 남을 해롭게 하는 말을 하지 말라.
2. 불평하지 말라.
3. 설명하지 말라.
4. 받아 들여지지 않는 충고를 하지 말라.
이 금언(禁言)은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던 글인데,
기억을 되짚어 보고, 인터넷에서 다시 검색을 해 보니 정말 여러 사람들에 의해 퍼져 있었다.
영국의 탐험가인 Robert Falcon Scott이라는 분이 한 말이라고 들 하는 것도 다 똑같다.
처음에 들었을 때엔 4번의 "받아 들여지지 않는 충고"의 쓸모 없음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다시 생각을 해 보니 3번의 "설명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가 사뭇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것을 혼자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실생활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지 공연히 부연 설명을 해서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 더 교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 말을 한 Scott 선생의 의도는 뭐였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검색을 해 보았다.
한글로 된 검색 결과에서는 모두가 달랑 4가지 말만 써 놓았을 뿐이었다.(내가 못 찾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영어로 검색을 해 보았다.
R. F. Scott's sayings
R. F. Scott's Quotes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Scott 선생께서 이런 말을 했다는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
명언들만 모아 놓은 사이트도 있는데, 거기서 R. F. Scott의 말들을 찾아봐도 이런 금언은 없었다.
http://www.brainyquote.com/quotes/authors/r/robert_falcon_scott.html
이번에는 저 금언을 대략 영역을 해서 검색해 보았다.
1. Do not speak ill of others
2. Do not complain
3. Do not explain
4. Do not advise ...
영역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1번과 4번은 문장이 좀 길어져서 2번과 3번을 먼저 타이핑 하자 검색창에서 바로 자동 완성이 되는 게 아닌가?
실제 검색한 단어는 "do not complain do not explain"이었는데, 참 많은 결과들이 나왔다.
대부분은 누가 한 말인지 언급도 없이 인용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작가가 한 말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디에서는 헨리 포드가 한 말이라고도 했다.
참....실제로 누가 한 말인지는 아무도 모르는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2번과 3번의 금언에 대한 설명은 대략 일치하는 듯 하다.
"불평을 하거나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 것은 벌어진 일에 당당히 맞서지 않고 회피하기 위함이거나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함이니 그런 비겁한 짓 하지 말고 당당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라."는 뜻이라는 것.
인간이라면 자기 보호 본능이 있기에, 자신이 상처받을 상황이 되면 거짓말도 하고 핑계도 대고 이유도 갖다 붙이곤 한다. 이건 유치원정도 다니는 어린 아이들도 그러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인식하지 못하고 반복하는 사이에 나는 현실과 괴리되어 나만의 울타리에 갇혀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자꾸 더 많은 현실의 상황을 회피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누가 한 말인지 모르지만 이 4개의 금언은 인간의 본성을 인식하고, 다시 이것을 극복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 4개의 금언(禁言)은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명령하는 언명(言命)은 아니었을까?
1. 남을 해롭게 하는 말을 하지 말라.
2. 불평하지 말라.
3. 설명하지 말라.
4. 받아 들여지지 않는 충고를 하지 말라.
이 금언(禁言)은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던 글인데,
기억을 되짚어 보고, 인터넷에서 다시 검색을 해 보니 정말 여러 사람들에 의해 퍼져 있었다.
영국의 탐험가인 Robert Falcon Scott이라는 분이 한 말이라고 들 하는 것도 다 똑같다.
처음에 들었을 때엔 4번의 "받아 들여지지 않는 충고"의 쓸모 없음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다시 생각을 해 보니 3번의 "설명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가 사뭇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것을 혼자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실생활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지 공연히 부연 설명을 해서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 더 교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 말을 한 Scott 선생의 의도는 뭐였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검색을 해 보았다.
한글로 된 검색 결과에서는 모두가 달랑 4가지 말만 써 놓았을 뿐이었다.(내가 못 찾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영어로 검색을 해 보았다.
R. F. Scott's sayings
R. F. Scott's Quotes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Scott 선생께서 이런 말을 했다는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
명언들만 모아 놓은 사이트도 있는데, 거기서 R. F. Scott의 말들을 찾아봐도 이런 금언은 없었다.
http://www.brainyquote.com/quotes/authors/r/robert_falcon_scott.html
이번에는 저 금언을 대략 영역을 해서 검색해 보았다.
1. Do not speak ill of others
2. Do not complain
3. Do not explain
4. Do not advise ...
영역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1번과 4번은 문장이 좀 길어져서 2번과 3번을 먼저 타이핑 하자 검색창에서 바로 자동 완성이 되는 게 아닌가?
실제 검색한 단어는 "do not complain do not explain"이었는데, 참 많은 결과들이 나왔다.
대부분은 누가 한 말인지 언급도 없이 인용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작가가 한 말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디에서는 헨리 포드가 한 말이라고도 했다.
참....실제로 누가 한 말인지는 아무도 모르는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2번과 3번의 금언에 대한 설명은 대략 일치하는 듯 하다.
"불평을 하거나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 것은 벌어진 일에 당당히 맞서지 않고 회피하기 위함이거나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함이니 그런 비겁한 짓 하지 말고 당당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라."는 뜻이라는 것.
인간이라면 자기 보호 본능이 있기에, 자신이 상처받을 상황이 되면 거짓말도 하고 핑계도 대고 이유도 갖다 붙이곤 한다. 이건 유치원정도 다니는 어린 아이들도 그러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인식하지 못하고 반복하는 사이에 나는 현실과 괴리되어 나만의 울타리에 갇혀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자꾸 더 많은 현실의 상황을 회피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누가 한 말인지 모르지만 이 4개의 금언은 인간의 본성을 인식하고, 다시 이것을 극복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 4개의 금언(禁言)은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명령하는 언명(言命)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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