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24일 수요일

뒷산을 오르며

날씨가 더워지니 집안에 지내기가 답답하다.
주말 오후에 뒷산에 올랐다.

제법 힘이 드는 산행이고, 주말이라 그런지 등산객도 많았고, 가족들이 함께 오르는 경우도 많았다.



  1. 깔딱 고개를 힘겹게 헉헉거리며 오르는데, 뒤에서 따라오는 젊은이가 있다.
    얼굴에 여드름 자국이 많은 중고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다.
    산에는 저런 젊은이는 잘 오지 않는다. 약간 숨은 차지만 거뜬하다는 표정.
    오르다 말고 뒤를 내려다 보더니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경사로 계단에 앉았다.
    (지자체에서 방부목과 삼베로 엮은 가마니 같은 것으로 경사로의 계단을 만들었다)
    학생에게 거기 앉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만약 경사로 위에서 사람이든 물건이든 굴러 떨어지면 다칠 위험이 있다고...
  2. 산 정상에 올라서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아까의 그 남학생과 아버지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올라 왔다.
    정상의 표시석을 보고 아버지는 학생에게 여기 서보라며 사진 찍을 자세를 취하지만,
    남학생은 쭈뼛거리고 손사래를 친다.
    아버지가 함께 찍자고 표시석 옆에 서서 셀카 자세를 취하자 그제서야 마지 못해서 옆에 선다.
    제가 찍어 드릴까요? 말을 건네자 흔쾌히 스맛폰을 건네 주신다.
    사진을 찍어 드리고 학생에게 한마디 또 건넨다.
    아버지가 찍자고 하면 찍는 거야. 이것도 얼마 안남았어.
    나중에 생각하니 공연히 꼰대짓 한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사실 그 학생에게서 나의 모습을 본 거였고, 그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이었던 거였다.
  3. 이제 슬슬 하산을 하고 있는데, 저기 아래쪽에 두명의 아이들과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아이들은 5살 8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들, 아버지는 3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지나가며 보니 뭔가 문제가 있었나 보다.
    큰 아들은 뭔가 삐쳐 있어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있었고, 작은 아들은 아버지 옆에서 약간 눈치를 보는 듯한 상황. 아버지도 뭔가에 화가 난건지 근엄한 표정.
  4. 큰 아들은 아버지와 거리를 두며 먼저 내려 갔다가, 아버지가 시야에서 사리지면 좀 기다리고, 다시 거리가 좁혀지면 먼저 내려가고를 반복했다.
    이 큰 아들과 몇번 눈이 마주 쳤는데, 얼굴을 보니 만만해 보이는 성격이 아닐 듯 했다. 앙 다문 입의 고집도 고집이지만, 눈매의 날카로움은 불같은 성격을 암시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버지를 봤는데, 이 아버지도 역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아 보였다. 어쩐지 아들과 닮은 듯 하면서도 조금은 달라 보였다.
    아마도 아들들이 어머니를 더 닮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러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성격이 꽤나 자주 충돌하겠다 싶었다.
  5. 그 아버지와 아들의 불편한 사이는 보는 나로 하여금 꽤 불편함을 일으켰다.
    그냥 싸워서 분위기 안좋네, 얼른 화해하지 이런 정도의 불편함이 아니라,
    굉장히 우울한 집안 분위기, 그리고 그것이 이번 한번의 문제가 아니라 반복되었을 거라는 예감, 온 집안에 감도는 긴장감, 그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야하는 가족들...
  6. 산을 다 내려와서 보니, 공원의 공터에서 한무리의 소년들이 공차기를 하며 뛰어 놀고 있다. 한쪽에서는 물총 놀이를 하는 계집아이들도 있었고, 그래서인지 급수대 아래쪽에 물이 홍건히 고여 있었다.
    한 남자 아이가 급수대에서 물병에 물을 담고 있었는데, 그게 물을 담는건지, 물 장난을 치는 건지는 모르겠다. 나도 옆에서 물을 받아 마셨다.
    마침 공차기를 하던 무리의 공이 급수대 쪽으로 굴러왔고, 고여있는 물에 빠지고 말았다.
    일부가 당황하는 듯 하더니, 그 중의 하나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거기서 물장난 하지 말라고!
    뭐 물장난이 물을 좀 보탰을 지언정, 물장난 때문에 물이 고인건 아닌거 같고, 물이 고여 있으니 언젠가 공이 물에 빠지는게 당연해 보이는데도 물을 받던 소년에게 화를 낸 것이다... 사실 소년이 물장난을 안해도 물은 빠지지 않고 고여 있었다.
    옆에서 이걸 보다가, 왜 화를 내냐고 웃으며 말했지만,
    그렇게 화를 내는 소년이 참 어이가 없었다.
    아까 산에서 보았던 부자의 모습이 또 다시 떠올라 조금은 더 우울해졌다.

2020년 6월 5일 금요일

[영화] 기생충

너무나 유명해진 영화
드디어 봤다.

헐리우드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오스카 상 수상에 불만을 표한 이유도 알만 했다.

아시아 특별 전형이라거나 지역 균형 수상이라는 표현도 가능은 할 수 있겠구나 싶다.


영화는, 일단 재미는 있다.

마치 영화 스팅이나 오션스 일레븐처럼 잘 짜여진 사기극을 벌여가는 일가족의 능수능란함.

그리고 이들의 사기극이 탄로나지 않을까 계속 마음 졸이며 영화를 보게 된다.


영화의 시작부터 이런 긴장감을 유지시키며, 사기꾼 가족을 불안하게 만든 건 "냄새".


중반 이후에 영화의 반전이 시작되고 이후에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막장으로 치닫는 몰락.

그 몰락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는 안타까운 몸부림들.


신분 상승과 몰락

희망의 차오름과 절망의 차오름

짜릿한 오름과 아찔한 추락

감정의 오름과 내림이 현란한 영화다.


냄새, 햇빛, 물
중요한 요소들


많은 평론가들의 해설과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그렇게 들으니 참 오묘하기도 하며, 잘 짜여졌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주 세심하게 관찰해서 나온 분석적 결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렇게 관심을 받으면 더 놀랄만한 작품들도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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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었던 어느 평론가의 분석은,
가난하지만 웃고 있는 기택의 가족 vs 부유하지만 웃는 표정이 적은 박사장의 가족
개개인이 특출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가난한 가족 vs 별 능력 없는 박사장의 가족
법을 어기고 사기를 밥 먹듯 치는 가난한 가족 vs 법을 지키는 부유한 가족
이렇게 기존의 선악, 빈부, 서민과 특권층의 프레임의 특징을 꼬아버려서 참신함과 불편함을 유발하게 만들었다는 분석이 꽤 재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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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니 종종 평론가들의 분석과 평가에 동의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있는데, 그건 그들이 너무 영화에 눈이 멀어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일반 관중은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본것만을 생각하고 느낀 것만을 얘기하는데, 평론가나 영화 관계자들은 그것 이전의 과정, 즉 제작의 단계부터 공감을 하는 듯 하다.
대체 이런 얘기를 어떻게 생각했으며, 이런 얘기를 이렇게 풀어나가는 것이나, 이 상황을 이렇게 보여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 냈을까를 감탄하는 듯 하다.
음악으로 치자면, 일반인은 음악을 듣고 오 마음에 든다, 좋다, 혹은 별론데, 그냥 그렇군 이런 생각에서 머물지만, 같은 음악인 입장에서는 이런 멜로디 진행은 무엇과 비슷하니 평범하고 박자만 약간 변형을 준 것이네, 혹은 이런 멜로디 조합을 대체 어떻게 생각해 낸 것이냐, 이런 음의 조합이 이런 느낌을 주는 걸 어떻게 알고 만들었을까 이런 식으로 평하는 차이가 아닐까 싶다.

뭐가 좋은지는 모르겠다.
이런 걸 보고 아는 만큼 보이네, 일반인 눈에는 안보이는 거야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대중문화란 대중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닐런지.
만약 그들이 말하는 그 경지에 이르렀을 때, 단순히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희열의 요소가 있다면 그 경지가 대중에게도 필요한 수준이라는 것을 인정하겠지만...

[영화] 컨택트 (원제 Arrival) 2016

원제가 Arrival인데, 컨택트라는 제목으로 개봉.

1997년에 개봉했던 조디 포스터 주연의 명작의 제목은 콘택트.

한글자만 바꾸어서... (콘 → 컨)


유명한 감독의 명작이라며 칭찬이 자자하지만, 당시에도 보지 않았다.

대충 귀동냥으로 들어 보니, 언어가 달라서 사물에 대한 인식과 표현도 다른 외계인과의 소통, 특히나 외계인의 언어가 시간에 대한 인식 체계가 달라서, 그들이 과거와 미래를 함께 본다는...식의 설명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최근에 또, 이런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은 인간의 환상일 뿐이다,...

대체 시간의 흐름이 없다는 이런 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몰랐고,
지금까지는 그냥 그들끼리만의 ~인 척 하는 방식이라고도 치부해 버렸다.

그런데 자꾸만 들어서인지, 아니면 내가 시간에 대해서 너무 무지해서 그런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화가 그 실마리를 제공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리고 봤다.


누군가를 비난한다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아마 그러고 나면, 누군가를 비난했던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고, 없어보이고, 못나고, 덜 떨어진 인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얘기했던 이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않겠다.

어쩌면 내가 잘 못 이해한 것일 수 있을테고,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사실은 그 이유 때문에 이 포스팅을 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어떻게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기억하기 위해서...


내가 본 바로는, 이 영황의 이야기는 우주인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소통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언어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며, 시간에 대한 이야기도... 아마 아닐 것이다.

이 영화는 인생에 관한 이야기 이고, 인생에서의 선택에 관한 영화이며, 인생에서의 선택이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인지, 그래서 우리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진정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결말을 보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그 끝이 어떨지 알고 있다해도, 우리는 중요한 선택을 바꿀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어찌보면, 이미 결정된 것과 다르지 않은 행로를 밟아 나가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루이스는 자신이 딸을 낳을 것이고, 어떻게 기를 것이며, 딸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미리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그 선택을 바꾸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보았던 그 미래를 향해 따라 간다. (아니 가게 될 것이다?)

외계인이라는 존재와 그 존재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미래를 볼 수 있는 루이스가 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설정을  함으로써,
루이스가 미래를 본다는 것에 대한 타당성을 부여한 것일 뿐이다.

만약에 그냥 루이스는 미래를 볼 수 있거든. 그래서 말야... 이렇게 시작하면 스토리는 그냥 막 지어낸 뇌내 망상 수준에 머무를 뿐이다.
그래서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어렵고 드문 일이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위해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서 인식이 가능한 언어와 그걸 사용하는 외계인이라는 도구(!)를 가져 온 것 뿐이었다.

사실 영화 상에서는 그들의 언어 체계를 매우 분석적으로 다루는 듯이 보이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의 언어를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혹은 핵심적인 이론이나 실마리는 없다.
그냥 열심히 하나씩 분석하다 보니 알아 듣게 되었음. 이게 전부다.
칠판에 영어 쓰고 실물을 보여주거나 행위로 보여주는 식으로, 외계인에게 영어를 가르쳤는데, 결과는 영어를 쓰는 외계인을 보는 게 아니라, 외계인을 쓰는 인간이 되었더라는...
그러니 그들의 언어가 대체 어떻길래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서 인식이 가능한지 설명을 바라는 건.... 상상만으로라도 좀 힌트를 줬으면 싶었지만 역시나 없었다.

시간에 대한 목마름으로 이 영화를 본 내게는 이만 저만 실망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누군가 스크립트를 써 준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평론을 베껴서 나눠 가지기라도 했는지, 어째서 영화 평론가들의 평은 하나같이 외계인, 소통, 언어, 시간만을 다루고 있는 것인지...


예전에 이 영화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내 선택의 결과가 어찌 될지 안다면, 과연 내 선택을 바꿀 수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아무 거리낌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생각을 했던 이유는, 무언가 굉장히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였는데, 머리로는 확신이 들지도 않고 이쪽도 저쪽도 일장 일단이 있어 망설이고는 있지만,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느낌, 혹은 당겨지는 듯한 느낌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선택한 결과가 결코 좋다고 할 수도 없었는데, 어쩐지 거부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었다.
아직 미혼인데도 독립해서 나가 살겠다고 했던 선택이나, 대기업 직장을 그만 둔 일이나, 공동으로 창업했던 회사를 떠나게 되었던 일이나,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것들...
아무리 평행 우주와 다중 우주를 들먹이고, 다른 선택을 한 나와 세계의 또 다른 미래가 어딘가에 존재할 거라는 주장을 믿는다 해도, 몇몇 중요한 선택에서 다른 선택을 한 나를 상상하는 건 아주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결과가 이리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같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경우들이 있고, 그건 내가 벗어날 수 없는 나의 한계일 수도 있으며 또한 나의 변하지 않는 아이덴티티일지도 모른다고....

이 영화가 이런 생각을 그럴 듯한 상황으로 꾸며서 그럴듯 하게 설명한거라고 보인다.

아마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테드 창의 원작을 읽어 봐야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