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8일 토요일

분석하고 따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습성

나에게 이런 습성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는데,
어쩌다 보니, 우연히 내가 이런 습성을 가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직적의 포스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최근의 사회적인 현상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져서,
그런 스트레스의 해소를 위해 원인을 따져가 보니,
문득 내가 이런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구나 싶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주 우스운 일은, 저런 습성이 매우 이성적인 단계를 거쳐야만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더라는 것이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서, 그것의 옳고 그름 혹은 죄측 우측, 혹은 1번 2번 하는 선택은 거의 직관적으로 일어나서 아무론 이성적 판단이나 추론이 개입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의 이성적 판단이나 추론들은, 직관적 선택이 일어난 후에, 그 선택을 정당화 하거나 강화시키기 위한 부가적인 작업으로 일어날 뿐이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건 내가 내린 선택에 대해서 다른 반대 의견을 너무 두려워하기 때문에 나의 선택에 대한 최소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반복된 작업으로 생긴 습성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런 습성은 결국 다른 의견이나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강하게,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배척을 하는 반응을 강화시켰고, 내가 무언가 실패나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현격하게 제한시켜 버렸다.


또 한가지의 좋지 않은 점은,
각종 전시회나 공연 등에서 그걸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에 아주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느끼기 이전에 나는 먼저 분석하고 판단하고 좋은 것 나쁜 것 가르며 채점을 먼저 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내린 가치나 점수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느껴야 할 것들은 느끼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덕분에 나는 그런 전시회나 공연 등의 감상문이나 후기를 적는 것이 매우 어렵고 불편했으며, 급기야는 전시회나 공연 자체를 회피하게 되었다.


아직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참 모호한데,
내 무의식에 존재하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직관적 판단이 앞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인지,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가 내린 선택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분석하고 판단하려는 습성이 있는 것인지,
감정적인 것은 나쁘다는 무조건적인 배척이 있는 것인지,
혹은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엮어져서 나타나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2020년 4월 14일 화요일

심어진 인식

최근의 코로나-19 바이러스에 21대 총선거가 겹치면서 네티즌들의 정치적인 언급이 부쩍 늘어난 상태다.
직접적인 정치적 의견은 이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일까,
코로나-19를 이용해서 은근슬쩍 정치적인 분열을 강요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각종 포털과 뉴스 기사 유튜브에서는 코로나-19를 주제로 다루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그것이 대중에게 도움이 되는 자식이나 사실 경험이기 보다는,
누군가를 비웃고 조롱하거나, 누군가를 칭송하고 찬양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였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 세상에는,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과 그걸 방해하려는 사람들만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단톡방에서는 지인들마저도 이런 흐름에 합류해서 정부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낸다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워야 할 일이지만, 워낙에 오래된 친구들이다 보니 그런 정도는 괜찮다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친 대화에 감히 반론을 제기하기도 어렵고, 그래봐야 뭐하겠나 싶어서 가만히 보기만 할 뿐이었다.

처음엔 꽤나 짜증이 났는데, 이걸 보고 참아내는데 도움이 될 만한 몇가지 생각이 있었다.

  1. 내가 반론을 제기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얘기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그걸 수용하고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이건 오랜 시간 함께 지내 본 경험이기도 하고, 나도 그랬었구나 하는 반성을 했기에 가능했다.
  2. 상대방이 그리 분노하고 화내는 것을 나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 만약 지금 다른 대통령이 행정부 수반이라고 생각하면 나도 같은식으로 분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내는 그 감정은 이해하지만,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3. 그들을 향해 다시 분노를 쏟아내면, 나 또한 마찬가지가 같은 수준이 되기 때문이다.
  4. 내가 상대에게 분노하는 이유가, 사실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라는 생각 때문이다.
    : 이건 다분히 개인적인 경우인데, 똑같은 반대 의견을 내놓는 사람이라 해도, 누군가가 더 미워보이거나 하는 것이다. 즉,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인데, 그건.. 어쩌면... 그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5. 우리들이 무언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들이 대단한 이성적 판단이나 충분한 경험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저항할 수 없는 시기에 심어졌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중에 마지막에 대해서 우연히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씨름 경기가 전국적으로 흥행을 했었다.
체급을 금강, 한라, 백두 등으로 나누었고, 추석같은 명절에 맞추어서 온가족이 함께 봤던 기억이 난다.
백두급이 가장 큰 체급이었고, 천하장사 타이틀은 그야말로 강자 중의 강자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당시에 이준희라는 장사가 있었는데, 나의 모친은 이준희 선수에 대해서 칭찬을 많이 하셨다.
이런 전국 씨름대회 이전부터 명성이 자자했던 모양인데, 모친이 그리 말씀하시니 나는 당연히 이준희가 최고야 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쩐지 전국 씨름대회를 하면 천하장사는 항상 이만기였다.
대체 어찌된걸까? 이준희는 항상 결승에서 이만기에게 무릎을 꿇었고, 나중에는 결승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나는 항상 이준희가 올라오는 경기만을 기대했고, 한동안은 역시 이준희야 하는 만족을 했지만, 언제나 마지막엔 실망했고, 나중엔 만족보다 실망이 많아져갔다.
그러면 지고 난 후에는 항상 분노에 차서 무언가 이유를 갖다 대곤 했다.
상대방이 샅바 싸움으로 비열하게 이겼네, 저렇게 이긴 건 천하장사도 아니야 하면서...

어린 내가 무엇을 알겠는가.
누구의 실력이나 체력이나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얼마나 잘 알겠는가.
그저 모친의 말만 들었고, 그건 진리라 생각했으며, 그것과 빗나간 현실에서는 무언가 음모론과 같은 이유를 생각하거나 했다.
어쩌면 모친도 그런 음모론적 이야기를 해서 내가 배운 걸 수도 있으며, 뉴스 따위에서 승패의 분석을 하면 그 가운데에서 내 입맛에 맞는 원인만 쏙쏙 빼서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모친에게 왜 이준희가 천하장사가 안되는지 묻지 않았던 것은 아직도 의문이다.


정치적인 견해와 편향성 또한 이와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위 TK라 불리는 지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사랑이 유다르니 그런 어른들의 얘기를 항상 듣고 자라난 어린이들은 이것이 진리이고 거스를 수 없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말을 듣게 되면 자동 반사처럼 분노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리라.
광주와 호남도 다르지는 않겠다.
특히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반정부 의식은 그 지역민들에게 트라우마 처럼 남아서 대대로 이어지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면, 대부분은 집안의 정치적 편향성이 대체로 일치하는 것이 일반적일 수도 있지만, 나는 왜.... 나는 왜 부모님과 정치적 의견을 달리 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국민은 지역에 구애없이 반일과 혐일이 기본 장착되어 있는데, 이것을 위의 사례와 비슷하게 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한가지 경직된 사고(반일)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박정희와 5.18로부터 야기된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한다.

2020년 4월 9일 목요일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인류의 나이테

전례 없는 흉폭한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와 갖가지 사회적 기 현상들이 매일 속출하고 있다.
누군가는 위험의 한가운데서 용기를 외치고 있으며, 누군가는 멀찌감치 떨어져 그들을 비웃는다.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내는 사람들,
인내와 내핍을 경험하는 사람들,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들,
누군가의 탓을 하고 원인자를 향해 분노를 내뱉는 사람들,
천태만상의 인간 군상들이 벌이는 이 사회상은 참말로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조금은 태풍이 잦아들었다 싶고 보니, 이것이 몇해전부터 회자되었던 블랙스완이었던 것이었다.
물론 블랙스완이라는 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알 수 없기에, 그걸 대비하고 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랬다면 그것은 이미 블랙스완이 아닐 것이었다.

이번의 사태는 또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거라 믿어 의심하지는 않지만,
최근의 신종플루, 조류독감, MERS, SARS와는 다르게 인류의 역사에 큰 나이테를 하나 남길만한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멀리, 이제는 많이 희미해졌고, 사회초년생들은 말로만 들어봤을 IMF사태...외환위기는 대한민국의 유래없는 위기와 충격이었다.
이미 20여년이 지나서 완치되었다 생각할 지는 몰라도, 그건 살아남은 사람들의, 피해가 적었던 사람들의 생각일지 모른다.
아직도 아픈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들 가운데, 외환 위기로 인해 몰락한 가정의 상처를 끄집어 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전세계를 강타한 신용위기, 미국의 리만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난 이 사건도 전 인류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아마도 아직도 이 여파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과 기업들이 존재할 것이며, 그 상처를 진하게 품고 있고 있는 이들은 더 많으리라 생각한다.


나무의 나이테는 성장통의 증거이지만, 인류의 나이테도 그런 것일까?
이 나이테의 이전과 이후에는 무엇이 달라질까?
인류는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이며, 새로이 인류를 지배하는 새로운 불문률은 무엇이 될까?

공포에 맞서는 사람들,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들,
공포를 외면하고 애써 태연한 척 하는 사람들,
이들 모두가 공포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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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쓴 사람은
레바논 태생의 미국 경제학자.
2007년에 자신의 저서 "블랙스완"에서 처음 이 용어를 썼다고 한다.
이번의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해서 그 자신은 "이것은 블랙스완이 아니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블랙스완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아주 낮은 가능성의 일이 발생해서 막대한 영향을 일으키는 것.
반면에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이미 예견되었던 사태인 만큼 블랙스완이 아닌 화이트스완이라고...
https://mothership.sg/2020/04/covid-19-black-swan/
https://youtu.be/Tb2pXXUSz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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