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0일 화요일

도덕성의 한계인가, 도덕성의 진화인가

최근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오르면서,
국회에서는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서의 조국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논란이 나오고 있다.
사모펀드에 거액을 투자한 것이나 친인척과의 의심스러운 채권 채무 관계도 그렇지만, 딸에 대한 여러 특혜 정황은 더욱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에 여당도 꽤 당혹해 하는 눈치이고, 언론들도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보수 언론들이야 이때다 싶어 공격 수위를 한층 끌어 올리고 있는 중이고,
확인할 수 없는 "민심"이나 "여론"이라는 좋은 칼을 꺼내어 휘두르고 있다.

애초에 신문을 잘 보지는 않지만, 우연히 읽게된 모 신문의 사설은...
https://news.joins.com/article/23557497?cloc=joongang|home|opinion

글쎄,
이 사설로도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 대략 알 수 있는데,
꽤 자극적이고 공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누구 하나의 잘못을 그 세대 혹은 그 지역 혹은 그 성별 등으로 무차별 확대해서 싸잡아 비난하려는 의도가 보여 더 씁쓸하다.
저 사설에서 언급한 "영미권의 베이비 부머인척 하는 그룹"의 사례가 얼마나 일반화된 것인지, 그리고 또 우리와의 공통점을 이을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논설위원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많은 사례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건, 그만큼 자기 확신이 부족하거나 자기의 주장에 자신감이 떨어진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사건들과 그 기사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우울감은 조금은 달랐다.

소위 도덕적으로 청렴하다고 자칭하던 세력들이 정권을 잡았으나, 까고 보니 그들이 비난하던 대상들과 전혀 다를바가 없는 동류였다...는 이 상황.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이 벌인 일련의 정책이라는 것이 적폐 청산이 주된 것이었고, 경제는 조금 뒷걸음질 쳐도 올바른 나라를 세울 것이라 믿고 있었던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누가 누구를 청산할 수 있는지마저 의심스러워 진 것이다.

내가 느낀 우울감은, 결국 인간이 주창하는 도덕과 실천할 수 있는 도덕의 수준은 다르며, 조국 전 민정수석이 보여준 것이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도덕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물론 조국씨의 도덕 수준이 인간의 한계 수준이라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한계가 아닌가 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희망적인 생각도 들었다.

앞서의 사설에서와 유사하게 소위 386세대의 문제로 한정을 짓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
과거에는 생각 자체도 부도덕하고 그걸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발전되어 가면서 많은 부분에서 옳음과 그름에 대한 논의와 비판이 퍼져갔다.
소위 386세대들은 이런 시대적인 변화의 과도기적 상태를 대표하고 있으며, 그래서 의식적인 부분에서는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도덕적이라 생각하지만 실제 행동과 실천은 그 의식을 따르지 못하는 세대일지 모른다.

따라서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더 성숙한 사회가 되고, 시민들의 의식 수준과 행동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시점이 온다면 우리의 도덕성은 진정한 발전을 이루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2019년 8월 18일 일요일

[영화] 스토커(Stalker) 1979,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Stalker, IMDB



어쩌다 이 영화를 만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왜 이 영화를 다운로드 받았던건지, 나중에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받아둔 채로 몇달이 지난 후에 보게 되었다.

이 영화에 대해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궁금해서 IMDB를 찾아 보고, 평점도 나중에야 보게되었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는 감독에 대해서도 찾아보고, 그 명성도 후에야 알게 되었다.
시간이 꽤나 지나서인지, 일부에선 비판적인 시각도 보일 정도...

느낌은 축축한 영화.
온통 그레이의 낮게 깔린 음습함.
뭔지 모를 상징의 범람.
모르는 것 투성이의 혼란함으로 시작해서 차츰 조금씩 뭔지 배경을 어렴풋이 알 즈음에 그냥 끝나버린 영화. 그래서 끝나고도 남는 혼란스러움과 무거움.
양 옆으로 뭔가가 나를 옥죄어 오는 듯한 화면들. 그래서 보는 내내 어떤 답답함.
(영화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이 영화에서 보이는 자주 보이는 장면은, 화면 안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장면들, 문 하나를 지나 그 뒤의 공간, 세 남자가 만나는 바의 장면이 그렇고,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곳에 도착하기 직전의 하얀 방 = 전화기가 울리는 방이 그렇고...)


연극을 보진 않았지만, 어딘지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싶고


원작을 읽어 봐야 영화의 의미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9년 8월 13일 화요일

Before Trump & After Trump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BC, Before Chist), 기원후 (AD, Anno Domini)를 나누어 사용해 왔다.
언제, 누구에 의해 이런 표기를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예수의 존재가 인류에게 (특히 서양에서) 그 의미가 크기 때문에 오랜 기간동안 사용되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세계의 정세를 보고 있노라면, 예전에 극심했다던 냉전시대가 이 정도였을까 싶게 너무도 야만적(?)인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현상을 어느 누구 한사람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너무 무책임하고 지나치게 단순화된 판단이라 생각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미국의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를 이 논의에서 뺄 수는 없을 것이다.

미중간의 무역전쟁, 미국의 이민 제한 정책, 동맹국에 대한 이익 우선 정책 등을 보노라면, 어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질 정도이다.
하지만 이런 막무가내식 이익 탐식의 경향이 단순히 트럼프의 개인적 성향때문이라 생각한다면 그 또한 대단한 착각이 아니겠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트럼의 그런 행보는 다분히 미국 국민의 바람을 반영했다고 봐야 할 것이며, 중국이나 일본의 지도자들이 별로 다르지 않은 자국의 이익 추구 또한 비슷한 경향으로 봐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경향은 아주 서서히 증가해 왔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그 세력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섰을 때에도 인간의로써의 미덕을 지킴으로써 유지되어 왔던 문명화된 세계로서의 질서는, 어느 한 순간에 탄성한계를 넘어선 듯이 폭발해 버린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 기폭제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미국의 대통령으로 상징되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라는 위엄이나 자제력은 찾아보기 어렵고, 자본주의에 완전히 절여져 물질만능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듯이 보이는 지도자.
트럼프의 행동은 그동안 문명화된 인간들이 자기 안에 숨겨왔던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 부끄러움 따위는 없고, 타인의 비난이나 충고따위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방식이 아주 자연스럽게 보인다.

과거의 친구나 의리나 신의도 없다.
물고 물리는 야생의 속성만이 남았다.
강한 놈이 모든 걸 가지며, 약한 자는 나름의 생존 방식을 모색해야만 한다.


이제 세월이 얼마나 지나면 인류가 깨달을 지 모르겠지만,
예수 탄생 2000년이 조금 지난 즈음에 세상은 크나 큰 변화를 맞아하게 되었으며,
이 시기를 기준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듯 하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그 시기를 기준으로 BT와 AT, 즉 Before Trump와 After Trump로 부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