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개인적인 사례일 뿐이니 일반화하지 말 것!>
개인적으론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지병이 있는데, 두통과 복통이 그것이었다.
그 가운데 두통은 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나를 괴롭히던 통증이었는데, 머리가 아프면 어떤 방법으로도 완화가 되질 않고 그저 끙끙 잃아야만 했다.
그나마 운에 좋게 걸린 우연이겠지만, 타이레놀이라는 진통제가 효과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이후 한동안은 '나에게 잘 맞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두통이 있을 때 마다 복용했었다.
하지만 효과가 없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면서 이것도 아니구나 싶어 포기를 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난 이것이 외가쪽의 가족력인 고혈압에 의한 증상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지속적인 고혈압약의 복용이 싫어서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고 싶었다.
아마도 스트레스의 완화, 커피의 음용으로 카페인에 의한 혈관의 확장이 조금은 도움이 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뜬금 없이 가끔은 두통이 찾아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는데, 명백한 인과관계가 보이는 것이 바로 "낮잠"이었다.
특히나 휴일에 주일동안의 누적된 피로를 풀기 위해 낮잠을 열심히 자고나면 어김없이 깨질 듯한 두통이 나를 괴롭히는데, 종종 나는 스스로를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까지 한탄했다.
그런데 최근에 이게 꼭 낮잠이 아니어도 비슷한 두통이 반복되는 걸 경험했는데, 그건 항히스타민제의 복용이었다.
알러지로 인해 여기저기 가려움증이 나타나곤해서 병원에서 처방받은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하곤 하는데, 이 항히스타민제의 주된 부작용이 "졸림"이다.
그러니까 이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졸려서 때 아닌 잠을 자고 일어나면 꽤 자주 두통이 이어졌다.
난 최근까지 이 두통 또한 약의 부작용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약의 부작용으로 평소와는 조금 다른 시간대에 잠을 자고 일어나니 또 두통이 밀려왔다.
관자놀이부터 귀뒤쪽 목으로까지 이어지는 통증.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내렸다.
전날 카페인의 섭취가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어서. 커피를 한모금 마시자마자 두통이 약간은 완화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조금은 안심을 했다.
잠시 후, 주문을 했던 김치가 배달되었다.
얼른 김치통에 옮겨 담고 냉장고에 들여놔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바닥에 신문지 깔고, 김치통 몇개 꺼내서 열어두고, 배달된 김치를 꺼내어 옮겨 담는데.... 갑자기 두통이 심해졌다.
다행히 그 느낌이 생생했는데, 김치를 옮기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고개는 아래쪽의 김치통을 향하자, 머리쪽으로 피가 쏠리면서 지끈지끈...
그제서야 뭔가 이해되는 내 고혈압의 원인과 두통의 원인, 그리고 그것이 낮잠(때아닌 잠)과 가지는 인과관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추측컨데 내 피는 꽤 찐득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내 고혈압의 원인으로 보인다.
아마도 심장에서 멀리 떨어진, 그래서 유속이 많이 느려지는 머리쪽에서는 그런 피의 성분과 느린 속도가 혈관에 침천물을 만들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혈관이 좁아져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찐득한 피를 펌프질해서 순환 시키려면 압력이 꽤 높아야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 머리쪽의 혈관에 불리한 요인 중 하나는 중력이다.
가뜩이나 찐득한 피인데다, 중력을 거슬러 심장에서 머리쪽으로 피를 올려야 하니, 심장이 꽤 무리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학창시절에 어른들이 곧잘 인용하던 4당5락이니하는 말을 매우 싫어했다.
난 잠을 자는 것을 매우 좋아했고, 충분히 잠을 자지 않으면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 공부도 잘 안되고 시험도 성적이 안나온다고 생각했다.
물론 학창시절에 이런 얘기를 하면 그냥 공부하기 싫은 아이의 핑계로만 들었던 어른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잠을 잔다는 건, 심장의 부담을 덜면서 두뇌에 피를 공급할 수 있는 아주 효율적인 메커니즘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나의 문제는 너무 오랜 시간 잠을 자면 머리쪽에 몰린 피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두통을 유발한다는 것(아마도....)
따라서 잠을 자서 머리쪽으로 일정한 정도의 피를 보내고, 다시 깨어나서 활동하면서 서서히 피를 아래쪽으로 보내고, 머리의 피가 부족해지면 다시 잠을 자고...
마치 모래시계를 세워 두었다가, 모래가 다 내려가면 다시 거꾸로 뒤집어 세우듯이, 잠자기와 깨어나기를 일정한 시간으로 반복해야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문제가 되었던 낮잠 혹은 때아닌 잠은 바로 이런 주기를 어기기 때문에 머리쪽에 지나치게 많은 피가 몰려서 두통을 유발했던 듯 하다.
그러면, 과연 방법은 없는 것일까?
사실 잠은, 두뇌로 피를 보내는 것 외에도 너무도 많은 효과가 있다.
신체의 내외부적인 손상이나 염증등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이 잠자는 동안에 일어나는 것은 많은 예의 하나다.
그러니 단지 두뇌에 이미 피가 많이 가 있어도 잠을 자려면...두통 없이 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베개를 높게 베거나 상체를 완전히 눞히지 않은 상태로의 잠자기가 그 방법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높은 베개나 상체를 조금이라도 세우는 자세는 어깨나 목의 통증, 뒤척임의 방해로 이어지긴 할테지만 말이다.
뭐 궁극적으로는 피의 끈적함을 조금이나마 묽게 해 주는 것이 좋겠지만...
P.S. 이 일- 약의 부작용으로 졸림, 때 아닌 잠, 두통, 커피, 김치통 옮겨 담기 -이 바로 오늘 일어난 일이며, 이 글을 쓰는 현재 시각은 기상한지 10시간이 지난 시간이며, 단지 일어나 있었다는 것 만으로 두통이 거의 사라졌다. (물론 커피도 마셨지만...)
P.S. 이 논리대로라면, 졸리진 않지만 머리가 멍해지거나 두뇌회전이 잘 안된다 싶을 때는 거꾸로 매달리거나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2018년 12월 29일 토요일
2018년 12월 28일 금요일
오해 - 잘못된 생각의 틀
아주 오래전 부터 가지고 있는, 아주 대략적이지만 큰 생각의 틀이 있는데...
그게 꽤 잘못된 틀이었다는 깨달음(?)을 마주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아주 큰 생각의 틀이라서, 틀이 잘못됨으로써 내 지식이나 경험들이 거기에 맞춰 왜곡되었을지 모르니 아주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지만, 정작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거의 없으니 현실적으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1. 과거는 위대하고 찬란하지만, 현재는 볼품없고 하찮다는 오해
이런 생각의 틀이 만들어진 이유는,
예수님이나 부처님, 공자, 소크라테스와 같이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모두가 아주 오래 전의 인물들인데, 그 이후에는 거기에 버금가는 인물들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어쩐지 인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퇴화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비슷한 예로, 고대의 마야 문명, 잉카 문명, 이집트 문명의 유적들은 종종 몇대 불가사의라 불려질 정도로 거대하고, 위대하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재현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식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정작 그 문명의 발원지에 사는 그 후예들은 너무나 초라하고 심지어는 비참하기까지 하다.
과연 이들이 그 위대한 문명을 만든 이들의 후예가 맞단 말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
이제 우리의 역사로 돌아와보면, 장수왕 광개토대왕의 국가 영토는 얼마나 광대했던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얼마나 위대했던가, 하지만 그런 위인들 이후에 한국사에는 그만큼 빛날 인물이 나왔던가?
위의 몇가지 예시들만으로도 인류는 퇴화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물론, 확실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고민해본 결과 위의 예들에 대한 반론은 가능했다.
문제는 지금까지 이런 것에 반론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면서, 위대한 과거 위대한 선조 위대한 전설 vs. 초라한 현실 미개한 현세대 보잘것 없는 우리들...이런 생각의 틀로 인해 생긴 부작용들이다.
어쩌면 요즘에 문제가 되고 있는, 매우 자조적인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이런 생각들의 단적인 부작용 사례가 아닐까 싶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자신감의 결여, 위대한 과거에 비해 내가 하는 것들이 아주 초라해 보이는 왜곡된 대비, 그래서 어지간한 결과들은 모두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더 나아가서는 뭘 해도 별것 아닌데 왜 하느냐는 허무주의 팽배....
지배계급은 인간들의 맹목적인 복종을 위해서 허튼 말을 퍼트리고 작은 일을 부풀렸지만, 결국에 피지배층은 열렬한 복종보다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것이 아닌지...
정치 지도자와 민족주의자들은 우리의 조상과 민족의 위대함을 자랑스럽게 여기길 바라며 조상들의 업적을 과대포장했지만 그로인해 그 후손들을 오히려 더 초라하고 작게 만들어버린 건 아닌지...
2. 인간성, 예의, 상식이 당연하다는 오해
아직도 사람 사이의 폭력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막말이나 갑질을 했다는 뉴스에 많은 이들이 분개하고 있다.
동물에 대한 학대나 유기 동물도 늘어나고 있으며, 따돌림과 집단 폭력 학대도 있다.
이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나, 대부분의 정상인(?)들은 이를 매우 개탄해마지 않고 하루 빨리 모든 사람들이 정상인(?)의 규범에 맞추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정상인들은, 적절한 예의범절을 갖추어야 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하지 말아야 할 말 혹은 행동에 대한 상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예의, 규범과 상식이 인간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단지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서 필요한 적정한 수준의 행동양식을 정해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예의범절이나 행동규범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그러지 못하다는 반증일 뿐, 누구나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간혹,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서로에게 인사치레를 하고 칭찬을 늘어놓는 것이 위선적으로 보이거나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차피 그렇게 만난 사람들은 그 자리가 마지막일 가능성이 매우 크기에 궂이 상대방에게 팩트 폭력을 가해서는 누구에게도 득될 것도 없는 것이다.
호호호, 너무 잘 하시네요, 와우 대단하시네요, 어머머 너무 잘 생겼다 세상에 너무 부럽네요.... 입에 발린 말들이 무성해서 그게 위선적이라고 구역질이 난다고 할 지언정, 서로 비난하고 쌍욕하고 얼굴 붉히면서 주먹다짐 하는 것보다는 훨씬 훨씬 아름답고 즐거운 상황 아니겠는가.
선천적으로 아부 못하고 입에 발린 말을 하면 입에 가시가 돋을 거 같다면 그냥 침묵하고 미소지으면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인(?)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게 꽤 잘못된 틀이었다는 깨달음(?)을 마주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아주 큰 생각의 틀이라서, 틀이 잘못됨으로써 내 지식이나 경험들이 거기에 맞춰 왜곡되었을지 모르니 아주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지만, 정작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거의 없으니 현실적으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1. 과거는 위대하고 찬란하지만, 현재는 볼품없고 하찮다는 오해
이런 생각의 틀이 만들어진 이유는,
예수님이나 부처님, 공자, 소크라테스와 같이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모두가 아주 오래 전의 인물들인데, 그 이후에는 거기에 버금가는 인물들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어쩐지 인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퇴화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비슷한 예로, 고대의 마야 문명, 잉카 문명, 이집트 문명의 유적들은 종종 몇대 불가사의라 불려질 정도로 거대하고, 위대하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재현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식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정작 그 문명의 발원지에 사는 그 후예들은 너무나 초라하고 심지어는 비참하기까지 하다.
과연 이들이 그 위대한 문명을 만든 이들의 후예가 맞단 말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
이제 우리의 역사로 돌아와보면, 장수왕 광개토대왕의 국가 영토는 얼마나 광대했던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얼마나 위대했던가, 하지만 그런 위인들 이후에 한국사에는 그만큼 빛날 인물이 나왔던가?
위의 몇가지 예시들만으로도 인류는 퇴화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물론, 확실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고민해본 결과 위의 예들에 대한 반론은 가능했다.
문제는 지금까지 이런 것에 반론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면서, 위대한 과거 위대한 선조 위대한 전설 vs. 초라한 현실 미개한 현세대 보잘것 없는 우리들...이런 생각의 틀로 인해 생긴 부작용들이다.
어쩌면 요즘에 문제가 되고 있는, 매우 자조적인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이런 생각들의 단적인 부작용 사례가 아닐까 싶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자신감의 결여, 위대한 과거에 비해 내가 하는 것들이 아주 초라해 보이는 왜곡된 대비, 그래서 어지간한 결과들은 모두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더 나아가서는 뭘 해도 별것 아닌데 왜 하느냐는 허무주의 팽배....
지배계급은 인간들의 맹목적인 복종을 위해서 허튼 말을 퍼트리고 작은 일을 부풀렸지만, 결국에 피지배층은 열렬한 복종보다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것이 아닌지...
정치 지도자와 민족주의자들은 우리의 조상과 민족의 위대함을 자랑스럽게 여기길 바라며 조상들의 업적을 과대포장했지만 그로인해 그 후손들을 오히려 더 초라하고 작게 만들어버린 건 아닌지...
2. 인간성, 예의, 상식이 당연하다는 오해
아직도 사람 사이의 폭력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막말이나 갑질을 했다는 뉴스에 많은 이들이 분개하고 있다.
동물에 대한 학대나 유기 동물도 늘어나고 있으며, 따돌림과 집단 폭력 학대도 있다.
이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나, 대부분의 정상인(?)들은 이를 매우 개탄해마지 않고 하루 빨리 모든 사람들이 정상인(?)의 규범에 맞추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정상인들은, 적절한 예의범절을 갖추어야 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하지 말아야 할 말 혹은 행동에 대한 상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예의, 규범과 상식이 인간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단지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서 필요한 적정한 수준의 행동양식을 정해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예의범절이나 행동규범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그러지 못하다는 반증일 뿐, 누구나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간혹,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서로에게 인사치레를 하고 칭찬을 늘어놓는 것이 위선적으로 보이거나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차피 그렇게 만난 사람들은 그 자리가 마지막일 가능성이 매우 크기에 궂이 상대방에게 팩트 폭력을 가해서는 누구에게도 득될 것도 없는 것이다.
호호호, 너무 잘 하시네요, 와우 대단하시네요, 어머머 너무 잘 생겼다 세상에 너무 부럽네요.... 입에 발린 말들이 무성해서 그게 위선적이라고 구역질이 난다고 할 지언정, 서로 비난하고 쌍욕하고 얼굴 붉히면서 주먹다짐 하는 것보다는 훨씬 훨씬 아름답고 즐거운 상황 아니겠는가.
선천적으로 아부 못하고 입에 발린 말을 하면 입에 가시가 돋을 거 같다면 그냥 침묵하고 미소지으면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인(?)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2018년 12월 3일 월요일
어느덧 12월...
아, 벌써 올해의 마지막 12월이란 말인가?
라는 식으로 얘기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올해도 별 탈 없이 한해를 마무리 할 수 있겠네.
사실 지난 몇년간은 비슷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그럴거라 생각하는데,
내가 하는 일은 그저 걱정하고, 혹시나 해서 조금이라도 준비하려고 하고, 아니면 계획이라도 세워보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귀찮아서, 단지 걱정하고, 걱정하고, 걱정하다가 끝난다.
언젠가의 경험으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의 곤란함과 스트레스는 정말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다.
그런데, 그 방법을 알고 있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일은 쉽게 해결이 되며, 나에게는 아무런 스트레스도, 정신적인 데미지도 없게 된다.
대체, 그건 뭘 의미하는걸까?
우리가 종종 겪는 황당함, 허둥지둥, 극도의 스트레스, 주저 앉아 울고 싶은 그런 상황들이, 어찌 보면 그럴만한 일도 못 되는 것 아닐까.
대부분 현실에서 부딪히게 되는 일들은 대부분 누군가는 이미 겪은 일이며,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아주 쉽사리 건널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걱정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고 한다.
그 말이 조금은 예언처럼 들리기도 하고, 누군가 나의 걱정을 들여다 보고 있는 듯이 느끼게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무수히 많다.
그 모든 일들에 내가 관심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일은 내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며, 그 일이 벌어지기만 하면 내가 놓칠 리 없는 조건에 놓인 것이다.
문제는 단지 시간일 뿐이었던 것이고, 결국에 그 일이 일어나면 우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결국은 일어나고야 말았어."
하지만, 내가 관심을 두지 않는 순간부터, 그 일은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내 인생에서 떨어져 나간다.
만약 무언가가 나를 걱정하게 만들고, 그게 나의 발목에 매달린 족쇄와 같다면,...
그래서 그 족쇄를 풀어버리고 싶다면, 관심을 두지 않으면 된다.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면, 앞서 얘기한 것처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미리 방법을 전수받고, 가능한 예방책을 세워둔다면,
설령 족쇄를 풀지는 못할지라고, 훨씬 더 가벼워지지는 않겠는가?
라는 식으로 얘기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올해도 별 탈 없이 한해를 마무리 할 수 있겠네.
사실 지난 몇년간은 비슷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그럴거라 생각하는데,
내가 하는 일은 그저 걱정하고, 혹시나 해서 조금이라도 준비하려고 하고, 아니면 계획이라도 세워보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귀찮아서, 단지 걱정하고, 걱정하고, 걱정하다가 끝난다.
언젠가의 경험으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의 곤란함과 스트레스는 정말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다.
그런데, 그 방법을 알고 있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일은 쉽게 해결이 되며, 나에게는 아무런 스트레스도, 정신적인 데미지도 없게 된다.
대체, 그건 뭘 의미하는걸까?
우리가 종종 겪는 황당함, 허둥지둥, 극도의 스트레스, 주저 앉아 울고 싶은 그런 상황들이, 어찌 보면 그럴만한 일도 못 되는 것 아닐까.
대부분 현실에서 부딪히게 되는 일들은 대부분 누군가는 이미 겪은 일이며,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아주 쉽사리 건널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걱정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고 한다.
그 말이 조금은 예언처럼 들리기도 하고, 누군가 나의 걱정을 들여다 보고 있는 듯이 느끼게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무수히 많다.
그 모든 일들에 내가 관심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일은 내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며, 그 일이 벌어지기만 하면 내가 놓칠 리 없는 조건에 놓인 것이다.
문제는 단지 시간일 뿐이었던 것이고, 결국에 그 일이 일어나면 우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결국은 일어나고야 말았어."
하지만, 내가 관심을 두지 않는 순간부터, 그 일은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내 인생에서 떨어져 나간다.
만약 무언가가 나를 걱정하게 만들고, 그게 나의 발목에 매달린 족쇄와 같다면,...
그래서 그 족쇄를 풀어버리고 싶다면, 관심을 두지 않으면 된다.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면, 앞서 얘기한 것처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미리 방법을 전수받고, 가능한 예방책을 세워둔다면,
설령 족쇄를 풀지는 못할지라고, 훨씬 더 가벼워지지는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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