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30일 목요일

[도서] 채식주의자

맨부커상을 수상해서 대중에게 잘 알려진 한강씨의 소설.

3개의 중편소설인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각각의 작품을 별개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이어져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을 때에 한강씨의 이름이 매우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서가에 꽂혀있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한강씨의 <몽고반점>이 대표작으로 수록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번째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의 채식주의 선언으로 시작되어, 점차 심해지는 채식과 무력감을 그녀의 꿈과 함께 그려가고 있다.
그녀의 다분히 잔인하고 가학적/피학적인 꿈은 육식이 가지는 필연적이지만 외면하고 싶은 면을 드러내 보이며, 먹는 인간과 먹히는 동물을 넘어서, 같은 인간 사이의 폭력에 대해서도 항변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이미지는 피다.
생고기의 피, 어린 시절 주인을 문 개가 토해낸 피, 꿈에서 누군가의 배를 갈라 낸 피, 육식을 거부하기 위해 그녀가 자신의 손목을 칼로 그어 솟구친 피, 병원에서 햇빛 아래 상의를 벗고 손에 쥐었던 새의 피...

이 작품의 주제는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육식의 폭력성에 대항하는 채식은 하나의 상징이거나 일부일 뿐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군림이 주는 폭력, 군중의 시선이 주는 무언의 압력이라는 폭력, 가슴을 가려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의 폭력.
그리고 그 폭력들에 하나 둘씩 저항하는 주인공 영혜....


두번째 <몽고반점>은 위의 사건이 일어난 후의 이야기다.
사건 이후 이혼을 하고 정신병원의 치료를 거쳐 언니의 집에서 얼마간 살다가 독립을 한 영혜와, 영상 예술을 하는 그녀의 형부 사이에 벌어지는 관능적인 사건에 대한...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이미지는 꽃이다.
사람의 나체에 그려 넣은 꽃, 그리고 꽃을 그려 넣은 두 육체의 교합, 남녀간의 섹스는 마치 아무런 도덕적 제약을 받지 않는 꽃과 꽃의 교접으로 그려지고, 이것이 원시로의 회귀를 의미했기에 유아기에만 남아 있다는 몽고반점이 그 소재로 차용되었는지 모르겠다.

무엇일까? 이 작품의 주제는?
애초에 순수한 욕망이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섹스가, 사회적인 통념 윤리라는 명분하에 더럽고 금기시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몽고반점은 애초에 순수했던 인간의 본 모습에 대한 그림움의 상징이었을까?
문화권에서는 불륜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형부와 처제의 행위에 원시적인 욕망의 순수함 아름다움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꽃을 그려넣고, 꽃의 교접으로 상징화 했던 것일까?

잘 모르겠다.


세번째 <나무 불꽃>은 위의 모든 사건 후의 이야기이다.
영혜의 언니 인혜가 주인공이고, 남편은 위 사건으로 이혼. 혼자서 5살짜리 아들을 키우는 워킹맘.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이고 인혜는 정기적으로 면회를 간다.
어느날 영혜가 정신병원을 탈출, 다행히 병원에서 영혜를 찾아서 데려오지만 영혜의 상태는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간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금식주의자가 되어가는 것.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 간다며, 물과 햇빛만 있으면 된다고...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자신의 팔이 뿌리가 되고 다리가 가지라고 말하는 영혜
급기야 단식으로 인해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

이 작품의 이미지는 나무....라고 해야겠지만 어쩐지 그 보다는 나무같이 말라버린 영혜의 육신이 아닐까.
사실 이미지가 앞서의 두 작품보다 약하다.

이 작품에서 영혜의 퇴화(?)가 주로 그려지고 있지만, 동시에 인혜 또한 영혜와 같은 절망감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다.
언니로써의 영혜에 대한 책임감, 스스로 경제적 기반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무감, 아들에 대한 엄마로써의 책임감 따위가 인혜가 흔들릴 여지를 주지 않았지만,
어느날 문득 찾아온 생각...살아본 적이 없고 단지 견뎌 왔을 뿐이라는...이 인혜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주변의 관계에서 지워진 의무감이 그녀를 살아가지 않고 견디게 만들었지만, 또한 영혜와 같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었던 건 아닐런지.
결국은 영혜의 선택이 매우 극단적이고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인혜가 영혜를 이해하게 되면서 영혜의 퇴화(?)가 보편성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잘 모르겠다.
왜 하필 나무였을까?
한자리에 붙박혀 모진 비바람과 눈보라와 따가운 햇빛을 견뎌내야 하는 그런 존재?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위의 세 작품에 공통적으로 묘사되는 이미지가 하나 있는데, 새다.

첫번째 <채식주의자>에서는 마지막에 영혜가 상의를 벗고 손에 새를 쥐고 있다.
두번째 <몽고반점>에서는 형부가 좋아하는 피사체가 날아가는, 날개가 달린 것들이라고 나오고, 마지막에 베란다에서 마치 새가 날아 오를 듯한 자세를 취한다.
마지막 <나무 불꽃>에서는 영혜를 태우고 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인혜가 바라본 하늘에 솔개가 날아가는 것을 본다.

날아가는 것이 자유에 대한 의미였을까?
꺾인 자유, 자유에 대한 희구, 자유의 댓가 등을 의미하는.....

2016년 6월 27일 월요일

용서와 속죄

중국에 살던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뉴스를 들었다.

작년까지도 꽤나 시끄러웠던 위안부 할머니들과 일본과의 공방들...

진정한 사과와 합당한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어물쩡 유감 표명으로 국면을 넘어가려는 일본 정부 사이에서, 정작 우리의 정부는 가면을 바꾸어 써가면서 편리하게 입장을 바꾸곤 하였다.

이 끝나지 않는 싸움에는, 정치적으로 이용 가치가 높은 이슈를 계속 가져가고 싶은 우리 정부의 더러운 욕심이 있지 않나 생각될 뿐이다.

아마도 작년까지 시끄러었던 위안부 이슈는, 무언가 국민의 시선을 돌리고 싶어하는 정부의 작전(?)이었던 듯.
올해는 갑자기 모든 일이 다 해결된 듯이 너무나도 조용할 따름인데, 정말 본질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설마...
언제든지 다시 써먹을 수 있도록 잠시 휴식기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리라.


진실 여부를 알 수는 없으니, 이런 정치 논리는 이 정도로 마무리를 하고,
제목인 용서와 속죄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자.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를 용서하고자 한다.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래서 피해 당사자들이 고령으로 한분 두분 세상을 떠나시고 있으니,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본이 제대로된 사과를 하면 그 사과를 제대로 받아 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제대로 된 속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별로 급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은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과연 저 분들이 살아 생전에 만족할만한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여기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은 "만족할만한"이 대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며, 그게 과연 객관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어째서 피해자가 용서를 구걸하는 모양새인가 말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용서와 속죄에 대한 질문과 답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딸을 잃은 엄마와 가해자인 살인범.
살인범은 검거되어 교도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지만, 죽은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
슬픔과 절망, 분노를 종교에 기대어 참아 보지만 쉽지 않다.
고민 끝에 살인범을 용서하기 마음 먹고 교도소에 찾아갔지만,
살인범은 그녀에게 사죄를 하지는 않고, 종교에 귀의해 신으로부터 속죄를 받았다고 말한다.
허망하게 돌아오던 그녀는 혼절해 쓰러지고,
깨어나서 울부짖는다.
그가 내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내가 용서해 주지도 않았는데, 신이 무슨 권리로 그에게 용서를 주었느냐고...

과연 엄마는 살인범을 용서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녀의 용서에는 조건이 붙었다. 그가 충분히 사죄를 한다면...이라는.
나의 용서가 내가 아닌 상대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엄마의 용서는 불안한 것이었고, 설령 이번에는 용서했다 하더라도, 다음에는 용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반면에 살인범의 속죄는 너무도 완벽했다.
피해자가 용서해 준다면...이라는 조건도 없다.
자신이 스스로 모든 죄를 깨닫고 어떤 벌이라도 마땅히 받겠다고, 한줌의 거짓도 없이 진심으로 뉘우쳤다면 그 순간 그는 완전히 속죄를 한 것이리라.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용서 또한 이러해야 할 것이다.
가해자가 어떤 행동을 보이던, 어떤 마음을 가지던, 그것에 상관 없이 내가 받은 피해와 고통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리하여 복수심, 분노, 증오 어떤 마음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비로소 용서가 완벽해 지는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시간이 촉박한 것은 사실이다.
그 분들이 진정한 용서를 하기 위한 시간이 촉박하다는 뜻이다.
진정한 용서는 일본 정부나 우리나라 정부의 조치, 행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끔찍했던 일들에 대해 어떤 증오나 분노도 갖지 않도록 저들의 모든 행위를 잊어버리는 것, 아니 잊지는 않더라도 담담하게 스쳐지나갈 수 있는 평정을 찾는 것이다.

모쪼록 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분노에 휩싸여서가 아니라 평안하게 가실 수 있기를 바라기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순간적이지만, 증오심이나 분노심은 아주 오랬동안 우리 자신을 더 많이 괴롭힌다.)

2016년 6월 25일 토요일

자신을 보완하는 방법들

보완....보다 완벽하게 하는 것?

한강의 채식주의자라는 책을 읽으며 문득 떠 오른 생각의 고리들.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육식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구제역 파동으로 소와 돼지들을 산채로 매장하는 장면을 방송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가축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행위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철저히 계획된 살생의 의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사자가 영양을 가두고 보살피며 물과 먹이를 제공해 주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인간의 식습관 중 기이하고 미개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직까지도 널리 퍼져 있는 것은,
특정 생물의 특정 부위를 먹음으로써 자신에게도 같은 능력이 부여된다는 믿음이다.

특히나 남성의 정력에 좋은 음식으로 꼽히는 해구신, 우신 등이 이에 해당하며,
움직이는 모습이나 형태가 유사하다 하여 뱀이나 미꾸라지가 남성의 정력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 또한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는가.
(실제 효과와는 별개로 생각의 발상 자체가 어이 없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들이 인간의 신체를 보완하는 방편이라면 인간의 마음을 보완하는 방편 또한 존재한다.

소위 존재냐 소유냐라는 질문처럼 자신의 존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을 보완하기 위해 소유물에 집착을 하는 것이며, 자신의 소유한 것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남성들이 고급 자동차에 집착하는 것, 여성들이 명품 의류나 액세서리에 집착하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먹음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보완할 수 있다는 믿음,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보완할 수 있다는 믿음,

무엇이 다를 것이며, 그게 과연 올바른 믿음인지는 자명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