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엔지니어다.
아니 엔지니어였다.
아니 엔지니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엔지니어답지 못했던 점이 불쑥 불쑥 기억나서,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욕을 하고, 혼자서 얼굴을 붉히곤 한다.
엔지니어답다는 건 무엇일까?
아마도 여러가지 특성을 모아야 엔지니어답다는 묘사가 어울리겠지만, 당장의 생각으로 떠오르는 덕목은 완벽함에의 추구이고, 철저함에의 전력이다.
나는 완벽하지 못했고- 사실 누근들 완벽하겠는가만- 완벽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당당할 수 없었다.
그래 이젠 지난 일이다.
엔지니어가 대단한 사회적 지위나 명망이 아니니 스스로의 자부심만 뺀다면 있으나 마나 했던 신기루와 다름 없다.
하지만, 이런 습성이 남아서인지, 종종, 여러가지 문제를 대할 때마다 완벽한 해법을 찾아 보곤 한다.
그건 공학적인 문제가 아닌, 기계나 전기의 문제가 아닌, 인간 사회 정치 경제 등의 현실생활의 문제에까지도 그렇다.
특히 정치나 사회의 문제들을 보면, 비슷한 문제, 비슷한 사건, 비슷한 논란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언제나 같은 식으로 반복 (문제 발생/제기 - 해법의 출현 - 반론의 출현 - 해법과 반론에 대한 다양한 여론/언론의 찬성과 반대 - 해법/반론/첨언의 무한 반복 - 어물쩡 마무리)되는 것에 염증을 넘어 분노까지 느끼게 된다.
대체 왜 이런 어리석은 현상은 나아지지 않고 반복되는걸까?
소위 사회의 지도층이나 정치인 언론인들이라는, 오피니언 리더들, 사회적 영향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어찌 이다지도 어리석은걸까?
능력이 있는 정치권의 인사라고 해도, 그들이 제대로 해결하는 문제는 100중에 10이 안되는 것 같다.
역대 대통령들을 봐도 비슷해 보인다.
10%면 아주 우수해 보이고, 2~3%면 보통이라 할 것이며, 그 이하는 대부분 해결해 놓은 문제보다 저질러 놓은 문제들이 더 많아 보인다.
1년에 10%씩 나아진다면 정말 좋은 시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국민학교 시절엔 똑똑한 아이들이 어떤지 몰랐다. 크게 튀지도 않았으니까..
중학교 시절엔 아주 간혹 별나게 똑똑한 아이들이 있었던 거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 보니, 노력으로 쫓아갈 수 없는 차이라는게 존재한다는 걸 느꼈던 거 같다.
그만치 뛰어난 학생들이 최고의 대학에 가서, 또 그만큼의 뛰어난 능력으로 노력하고, 다시 사회에 나와서 저만치 보이지도 않게 앞서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뛰어난 능력과 뛰어난 열정으로 노력한 사람들과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지금 이 사회의 영향력을 쥐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뛰어난 인재들이, 내가 봐도 허탈할 정도의 어리석은 해법만 제시하는 것일까?
너무 뛰어나서 내가 그 뜻을 제대로 짐작하지도 못하는 것일까?
연작(燕雀)이 안지(安知) 홍곡지지재(鴻鵠之志哉)리요
언젠가 문득 떠 오른 뿌연 생각 하나,
매일 아침에 일나서 밥먹고 일하고 쉬고 밥먹고 싸고 놀고 자고....인 듯이 보이지만,
이런 일들도 순간 순간에 문제가 일어나고 있고, 곳곳에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 보면,
직장인 점심 시간만 되면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라는 문제로 고민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게 일주일에 5번, 일년 365일 가운데 260일을 이 고민을 한다면?
나라면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것이다.
이 문제 하나만이라도 나의 일생에서 완벽히 해결이 된다면 세상이 훨씬 살기에 편해질거 같으니까.....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는 순간 내 인생의 여백은 더 넓어질까?
그렇게 하나씩 문제들이 해결되고 나면.....
문제가 아닌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결국 모든 문제의 해결은 모든 것의 존재가 사라짐과 같은 건 아닐까?
어쩌면, 모든 것이 문제이고, 순간 순간이 문제인 것은, 내가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며, 내가 존재하기에 문제로 인식된 것이 아닐까?
문제라는 건 대상이 원인인 듯 보이지만, 실은 문제 인식의 주체가 원인이다.
따라서 문제의 완벽한 해결은 인식의 주체를 제거해야 한다.
인간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문제를 인식한다는 것, 문제와 함께 어우러진다는 것이며,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스스로 문제라고 인식했던 생각(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해결한 인간은 죽음에 이른 인간 뿐이다.
나는 지식이 우리를 '꽤' 자유롭게 해 줄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문제에 대한 옳은 해법을 찾는 것은 바로 지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해결되는 문제보다 더 많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식은 단지 챗바퀴에 불과했는지 모르겠다.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제자리였던 챗바퀴,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속도를 높일수록 다시 그만큼의 속도로 내게 쏟아지는 문제들의 챗바퀴.
결국에 문제의 원인이 나 자신이었음을 알아내야만 비로소 내려올 수 있는 챗바퀴...
2015년 8월 16일 일요일
2015년 8월 13일 목요일
요지경인 마음의 흔들림
모처럼만에 남매간의 식사 모임을 인사동에서 가졌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만남을 가진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직은 퇴근 시간이 되기 전, 서둘러 을지로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엔 자리가 많았는데, 군데 군데 보이는 승객 가운데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백발인 머리에 크지 않은 눈의, 대략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버스의 뒷쪽에 앉아있는 그 사람은 내가 알던 사람과 매우 흡사해 보여서 잠시나마 그를 쳐다보았고, 그 사람도 나를 쳐다보았고,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나는 짧은 시간 고민하다가 앞쪽 좌석에 앉았다.
예전 직장에서, 나의 직속 상관은 아니지만, 직책으로는 나보다 위였던 손모씨와 매우 닮았던 그 사람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정말 그 손모씨인걸까? 그냥 닮은 사람인걸까?
가서 아는체를 해야하는 걸까? 그냥 모른체 할까?
그 손모씨가 맞다면, 그 사람의 성격으로는 모른체 지나갈리가 없지만, 예전과 달리 염색도 하지 않은 듯이 백발인 점, 평일 업무시간에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점을 미루어 보면, 나처럼 쇠락하여 많이 위축되어 그럴지도 모른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버스의 행선지는 내가 알던 그의 집과는 다른 방향이다.
역시 그냥 닮은 사람일까?
아니라면, 혹시 최근에 벤쳐 타운으로 조성된 곳에 새로운 직장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이 손모씨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결코 좋은 기억을 떠 올리기 함든 사이였다.
아마도 전 직장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테지만,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회사의 발전에 기여한 점이 거의 없었으며, 겉보기엔 사람들 만나며 웃고 즐기는 게 주된 일인 것으로 보였으니, 한마디로 거머리와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새로운 직장을 가지고 있다면, 나에게도 좋은 자리를 제공해 줄지 모른다는 희망이 스멀스멀 생기고 있었다.
치욕적이지만, 지금의 내 신세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도 아니거니와, 사실 손모씨도 자신이 우리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는 것을 은근히 인정한 적이 있었기에 나름의 명문은 있다고까지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정말 그 손모씨라면,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자신이 일하는 직장에 정말 내가 필요하다면 그가 먼저 적극적으로 내게 다가올테지만, 지금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그렇다면 나는 공연히 아쉬운 얘기만 하는 꼴이 될것이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리속에 들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위와 아래로 요동을 치며 기대와 좌절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었다.
드디어, 벤처타운에 진입한 버스가 몇개의 정류소에 정차했지만, 그는 하차하지 않았다.
왜? 어째서? 혹시 그 사이에 이사라도 한 것일까?
버스는 벤처타운을 벗어나 아파트 촌을 돌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는 내리지 않았다.
아니....어쩌면 그가 나를 따라 내리려고 작정한 것이 아닐까?
오히려 그가 나에게 무언가 곤란한 부탁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집으로 가자고 하면 어쩌지?
근처에 얘기할만한 장소가 어디 있을까?
내가 하차할 정류소가 3개 정도 남았을 즈음에 그는 내렸다.
하차하면서 나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는 것은 아닐까 했던 우려와 달리 그냥 내렸다.
그리고, 출발하는 버스의 창문을 통해서 얼핏 그의 모습을 보았다.
좀 많이 달랐다. 그냥 얼핏 보기에 손모씨는 닮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1시간 가량의 주행시간동안 내 머리속에서 요동쳤던 갖가지 생각들은 대체 뭐였던 것인지 허탈하기 그지 없었다.
아니,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하며 단독 쇼를 펼쳤던 내 자신이 한심했다.
이게 내 인생이었다.
용감하게, 순수하게, 담백하게, 그냥 행동했다면 나의 1시간은 쾌적한 여행일 수 있었겠지만, 마음의 흔들림이 나를 그냥 두지 않았고, 나는 거기에 놀아났던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제자가 스승님에게 물었다.
스승님, 지금 흔들리는 것은 나뭇가지입니까, 바람입니까?
스승님이 답하길, 흔들리는 것은 나뭇가지도 바람도 아니며, 오직 너의 마음뿐이다.
(달콤한 인생, Dialogue #3)
마음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은 원래 흔들리는 것이라는 걸 인정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차분히 관조하며, 고요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법륜스님, 즉문즉설)
점심식사를 하면서 만남을 가진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직은 퇴근 시간이 되기 전, 서둘러 을지로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엔 자리가 많았는데, 군데 군데 보이는 승객 가운데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백발인 머리에 크지 않은 눈의, 대략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버스의 뒷쪽에 앉아있는 그 사람은 내가 알던 사람과 매우 흡사해 보여서 잠시나마 그를 쳐다보았고, 그 사람도 나를 쳐다보았고,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나는 짧은 시간 고민하다가 앞쪽 좌석에 앉았다.
예전 직장에서, 나의 직속 상관은 아니지만, 직책으로는 나보다 위였던 손모씨와 매우 닮았던 그 사람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정말 그 손모씨인걸까? 그냥 닮은 사람인걸까?
가서 아는체를 해야하는 걸까? 그냥 모른체 할까?
그 손모씨가 맞다면, 그 사람의 성격으로는 모른체 지나갈리가 없지만, 예전과 달리 염색도 하지 않은 듯이 백발인 점, 평일 업무시간에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점을 미루어 보면, 나처럼 쇠락하여 많이 위축되어 그럴지도 모른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버스의 행선지는 내가 알던 그의 집과는 다른 방향이다.
역시 그냥 닮은 사람일까?
아니라면, 혹시 최근에 벤쳐 타운으로 조성된 곳에 새로운 직장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이 손모씨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결코 좋은 기억을 떠 올리기 함든 사이였다.
아마도 전 직장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테지만,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회사의 발전에 기여한 점이 거의 없었으며, 겉보기엔 사람들 만나며 웃고 즐기는 게 주된 일인 것으로 보였으니, 한마디로 거머리와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새로운 직장을 가지고 있다면, 나에게도 좋은 자리를 제공해 줄지 모른다는 희망이 스멀스멀 생기고 있었다.
치욕적이지만, 지금의 내 신세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도 아니거니와, 사실 손모씨도 자신이 우리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는 것을 은근히 인정한 적이 있었기에 나름의 명문은 있다고까지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정말 그 손모씨라면,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자신이 일하는 직장에 정말 내가 필요하다면 그가 먼저 적극적으로 내게 다가올테지만, 지금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그렇다면 나는 공연히 아쉬운 얘기만 하는 꼴이 될것이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리속에 들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위와 아래로 요동을 치며 기대와 좌절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었다.
드디어, 벤처타운에 진입한 버스가 몇개의 정류소에 정차했지만, 그는 하차하지 않았다.
왜? 어째서? 혹시 그 사이에 이사라도 한 것일까?
버스는 벤처타운을 벗어나 아파트 촌을 돌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는 내리지 않았다.
아니....어쩌면 그가 나를 따라 내리려고 작정한 것이 아닐까?
오히려 그가 나에게 무언가 곤란한 부탁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집으로 가자고 하면 어쩌지?
근처에 얘기할만한 장소가 어디 있을까?
내가 하차할 정류소가 3개 정도 남았을 즈음에 그는 내렸다.
하차하면서 나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는 것은 아닐까 했던 우려와 달리 그냥 내렸다.
그리고, 출발하는 버스의 창문을 통해서 얼핏 그의 모습을 보았다.
좀 많이 달랐다. 그냥 얼핏 보기에 손모씨는 닮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1시간 가량의 주행시간동안 내 머리속에서 요동쳤던 갖가지 생각들은 대체 뭐였던 것인지 허탈하기 그지 없었다.
아니,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하며 단독 쇼를 펼쳤던 내 자신이 한심했다.
이게 내 인생이었다.
용감하게, 순수하게, 담백하게, 그냥 행동했다면 나의 1시간은 쾌적한 여행일 수 있었겠지만, 마음의 흔들림이 나를 그냥 두지 않았고, 나는 거기에 놀아났던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제자가 스승님에게 물었다.
스승님, 지금 흔들리는 것은 나뭇가지입니까, 바람입니까?
스승님이 답하길, 흔들리는 것은 나뭇가지도 바람도 아니며, 오직 너의 마음뿐이다.
(달콤한 인생, Dialogue #3)
마음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은 원래 흔들리는 것이라는 걸 인정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차분히 관조하며, 고요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법륜스님, 즉문즉설)
마음을 고요히 해야 하는 이유
잡히지 않을 듯 아주 미약한 마음의 움직임이 있다.
너무 미약해서 곧잘 무시된곤 하고, 너무 미약해서 기억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엔, 다른 것들로 인하여 마음이 시끄럽고 혼잡하여 이 움직임을 알아채지도 못한다.
하지만 틀림없이 존재하는 움직임이다.
이 미약한 움직임은 곧 무성하게 자라날 큰 나무의 씨앗일런지도 모른다.
아직은 작고 약하기에 소중하게 보살펴야만 자라날 것이요, 마음속에 몰아치는 폭풍우에 그대로 방치하면 그대로 사라져버릴 그런 씨앗.
초발심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라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겠다고, 혹은 무엇을 하고 싶다는 최초의 마음을 말한다.
이런 마음이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 방법은 없으나, 초발심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첫발걸음이며, 필수조건이다.
초발심 없이 무언가 이루어진다면, 그건 이루어짐을 인식할수도 없으며, 내것도 아니다.
초발심 없이 이룰 수 있는 내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초발심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우리는 종종 마음을 고요히 하고, 마음속의 작은 움직임을 돌보아야하는 것이다.
너무 미약해서 곧잘 무시된곤 하고, 너무 미약해서 기억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엔, 다른 것들로 인하여 마음이 시끄럽고 혼잡하여 이 움직임을 알아채지도 못한다.
하지만 틀림없이 존재하는 움직임이다.
이 미약한 움직임은 곧 무성하게 자라날 큰 나무의 씨앗일런지도 모른다.
아직은 작고 약하기에 소중하게 보살펴야만 자라날 것이요, 마음속에 몰아치는 폭풍우에 그대로 방치하면 그대로 사라져버릴 그런 씨앗.
초발심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라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겠다고, 혹은 무엇을 하고 싶다는 최초의 마음을 말한다.
이런 마음이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 방법은 없으나, 초발심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첫발걸음이며, 필수조건이다.
초발심 없이 무언가 이루어진다면, 그건 이루어짐을 인식할수도 없으며, 내것도 아니다.
초발심 없이 이룰 수 있는 내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초발심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우리는 종종 마음을 고요히 하고, 마음속의 작은 움직임을 돌보아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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