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후에-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과학계에 가장 큰 발견(?)으로 남을 업적은 정신(精神)과 에너지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발견이 위대한 이유는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를 밝혔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발견이 없었다면 물질과 에너지는 그저 별개의 것으로 여겨지고, 물질의 세계와 에너지의 세계가 공존은 하고 있지만 근본이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일견, 아인슈타인의 발견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육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밝힌 셈이기도 하다.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기 이전에 에너지로 존재했으며, 육체를 벗어나면 모종의 에너지로 바뀐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물질 - 에너지> 만으로는 설명 되지 않는 것들이 아직도 많지 않은가?
인간을 예로 들어 보아도, 육화된 인간은 에너지가 물질화 된 것이라고 설명하기엔 부족한 것 들이 있다.
너무나도 다양하게 나타나는 인간들의 행동양식,
본능이라 생각되는 원초적인 행동에서도 이런 다양성은 너무나도 자주 목격되고 있다.
단순한 다양성 또한 하나의 생명 개체군(群)이 생존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라고는 할 수도 있지만, 정작 이런 다양성의 개별 주체들은, 단지 다양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이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보여준다.
이 개별 주체들은 나름의 확고한 의지나 신념을 가지고 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합리화 하기 위한 자기 최면 내지는 인식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 지언정, 이러한 의지나 신념에 매우 강한 힘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종종 신념과 의지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본능에도 역행하는 힘든 과정을 겪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의지, 신념, 정신과 같은 것은 또 다른 에너지의 형태가 아닌가 싶다.
물론 아직까지는 이런 정신의 힘을 에너지와 구별하고 있다.
간혹 초능력이나 기적이라는 형태로 정신이 에너지화 되는 사례들이 보고되어 누적되고는 있지만 아직 정신의 에너지와 일반적인 에너지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구별되고 있다.
하지만 물질과 에너지가 별개의 것에서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 듯,
언젠가는 에너지와 정신 또한 일정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밝혀 질 것이다.
아마도 올바른 관계가 밝혀지고 나면,
정신
/ \
물질 ― 에너지
와 같은 형태의 관계를 이룰 것이다.
이 관계를 잘 들여다 보면,
정신이 에너지로 바뀔 수 있으며, 정신이 물질로 바뀔 수도 있다.(초능력,마술과 같은...)
또한 에너지가 정신으로 바뀔 수 있고, 물질이 정신으로 바뀔 수도 있다.(???)
누군가 깊은 통찰력을 지닌 천재가 나타나
하루 빨리 이 관계를 밝혀 주길 기원한다.
2013년 7월 31일 수요일
2013년 7월 22일 월요일
우주는 마음이다
인간은 욕망이 모이고 모여서, 쌓이고 쌓여서 태어나게 된 욕망의 육화(肉化)이다.
빅뱅 이전에 모든 것이 하나인 순간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동요도 없고 치우침도 없었다.
마치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동심원을 그리며 물결이 퍼져 나가듯,
빅뱅과 함께 퍼져 나가기 시작한 우주는,
물결의 파고 처럼 치우침을 만들었고,
치우침의 정점은 에너지가 모이며 생명을 만들었다.
생명의 탄생은 에너지의 집중으로 만들어지며, 이 원초적 에너지의 근원은 치우침이며, 치우침은 욕망으로부터 만들어졌다.
인간 개개인은 각자 저마다의 욕망이 모여서 만들어낸 결집(結集)이다.
욕망의 소멸은 치우침의 소멸이며, 치우침의 소멸은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빅뱅 이전에 모든 것이 하나인 순간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동요도 없고 치우침도 없었다.
마치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동심원을 그리며 물결이 퍼져 나가듯,
빅뱅과 함께 퍼져 나가기 시작한 우주는,
물결의 파고 처럼 치우침을 만들었고,
치우침의 정점은 에너지가 모이며 생명을 만들었다.
생명의 탄생은 에너지의 집중으로 만들어지며, 이 원초적 에너지의 근원은 치우침이며, 치우침은 욕망으로부터 만들어졌다.
인간 개개인은 각자 저마다의 욕망이 모여서 만들어낸 결집(結集)이다.
욕망의 소멸은 치우침의 소멸이며, 치우침의 소멸은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대한민국은 어떤 업을 가지고 있는 걸까?
흔히들 깨달은 이들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한다.
이러한 인과론(因果論)도 다분히 철학적 혹은 종교적 영역이니 당연시 할 수는 없지만,
이 포스팅에서는 인과론을 인정하고 시작해 보겠다.
학창시절의 역사 특히 국사(國史) 수업을 통해서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외세로부터 침략을 당하기만 하고 타 민족을 침략한 적은 거의 없다고 배워왔다.
이에 대해서는 민족성이 온순하기 때문이라는 자화자찬식의 이유도 있으며, 제대로 태평성세를 구가한 기간이 많지도 않으니 그럴 여유가 있었겠냐는 자조섞인 이유도 있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많은 이민족의 침략으로 희생을 당한 백성은 얼마나 많으며, 갖은 수탈과 치욕을 견뎌야 했던 것은 얼마이겠는가?
그러면 과연 무슨 원인을 지었기에 한민족은 이리도 많은 침략과 핍박을 받았던 것이며,
그 많은 침략과 핍박을 받은 결과는 무엇이란 말인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구한말의 일제침략으로 우리 민족을 끊임 없이 갈구던 일본은,
한민족을 침략하고 짓밟은 원인으로 세계적인 경제대국이 되어 동아시아, 아니 아시아에서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받아 가혹한 세월을 보낸 한민족은,
결국은 열강에 의해 남북으로 찢어지고 이간질로 서로를 적대시하며,
비록 경제규모가 세계 10위에 근접하는 국가가 되었음에도 열강의 눈치를 봐야 하는 반꼭두각시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우스갯소리처럼,
한여름 노래부르며 놀던 베짱이는 가수로 발탁되어 호의호식하며, 등골빠지게 일한 개미는 관절염으로 고생고생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깨달은 이들은 말한다.
그럼에도 정작 그들은 빈번히 침략 당하는 결과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모르며,
침략 받고 고통 받은 것의 결과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면서 좋은 원인을 지으라 한다.
좋은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설령 아는 척 해도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
좋은 원인을 짓기 위해 선행을 하고 남을 돕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도, 어떤 결과가 올지 모르며 또한 언제 올지 모른다.
아마도 100번쯤 다시 태어났을 때에야, 그저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되면, 그것 보아라 그때의 원인이 이런 결과로 나타났다고 공치사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인과론을 부르짖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매우 부정적이다.
하지만 한번 쯤, 우리 한민족은 왜 이리 고달픈 역사를 타고 난 것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물어보고 싶다.
이러한 인과론(因果論)도 다분히 철학적 혹은 종교적 영역이니 당연시 할 수는 없지만,
이 포스팅에서는 인과론을 인정하고 시작해 보겠다.
학창시절의 역사 특히 국사(國史) 수업을 통해서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외세로부터 침략을 당하기만 하고 타 민족을 침략한 적은 거의 없다고 배워왔다.
이에 대해서는 민족성이 온순하기 때문이라는 자화자찬식의 이유도 있으며, 제대로 태평성세를 구가한 기간이 많지도 않으니 그럴 여유가 있었겠냐는 자조섞인 이유도 있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많은 이민족의 침략으로 희생을 당한 백성은 얼마나 많으며, 갖은 수탈과 치욕을 견뎌야 했던 것은 얼마이겠는가?
그러면 과연 무슨 원인을 지었기에 한민족은 이리도 많은 침략과 핍박을 받았던 것이며,
그 많은 침략과 핍박을 받은 결과는 무엇이란 말인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구한말의 일제침략으로 우리 민족을 끊임 없이 갈구던 일본은,
한민족을 침략하고 짓밟은 원인으로 세계적인 경제대국이 되어 동아시아, 아니 아시아에서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받아 가혹한 세월을 보낸 한민족은,
결국은 열강에 의해 남북으로 찢어지고 이간질로 서로를 적대시하며,
비록 경제규모가 세계 10위에 근접하는 국가가 되었음에도 열강의 눈치를 봐야 하는 반꼭두각시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우스갯소리처럼,
한여름 노래부르며 놀던 베짱이는 가수로 발탁되어 호의호식하며, 등골빠지게 일한 개미는 관절염으로 고생고생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깨달은 이들은 말한다.
그럼에도 정작 그들은 빈번히 침략 당하는 결과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모르며,
침략 받고 고통 받은 것의 결과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면서 좋은 원인을 지으라 한다.
좋은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설령 아는 척 해도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
좋은 원인을 짓기 위해 선행을 하고 남을 돕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도, 어떤 결과가 올지 모르며 또한 언제 올지 모른다.
아마도 100번쯤 다시 태어났을 때에야, 그저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되면, 그것 보아라 그때의 원인이 이런 결과로 나타났다고 공치사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인과론을 부르짖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매우 부정적이다.
하지만 한번 쯤, 우리 한민족은 왜 이리 고달픈 역사를 타고 난 것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물어보고 싶다.
옳고 그름은 없는가?
신과 나눈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많은 충격을 받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이라는 가치판단에 대한 것이다.
흔하게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보고 사람들은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판단하려고 한다.
하지만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는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주관적인 가치 판단일 뿐이며 사건이나 상황은 그저 일어난 것, 혹은 유지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고, 건물이 붕괴되고, 지진이 일어나고, 태풍이 몰아치고, 홍수가 나도 그저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유/불리에 처하게 되기도 하고, 그에 따라 옳으냐 그르냐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가급적이면 내가 접하게 되는 모든 사건과 상황을 이처럼 치우침 없이 바라 보고자 노력은 하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난 이상, 나와 남을 분리시키는 것은 본능과도 같으니, 치우침이 없다함은 다시 나와 남의 구분을 없애고 모두가 하나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결국은 궁극적인 치우침의 소멸은, 인간이라는 존재와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각설하고,
과연 모든 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까?
가령 두개의 서로 다른 단음(單音)을 듣고 어느쪽이 높고 어느 쪽이 낮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
높이가 다른 두개의 나무를 두고 어느 쪽이 크고 어느 쪽이 작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
두개의 색깔을 보고 어느 쪽이 밝고 어느 쪽이 어둡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
위의 사례만 보아도, 두개를 비교하여 상대적인 고저/대소/명암을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상대적인 비교는 옳고 그름을 논할 필요가 없다.
단지 비교 대상 없이 하나만을 두고 절대적인 고저/대소/명암을 가리는 것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간혹, 치우침 없이 본질을 보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옳고 그름이 분명한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치우침이 없는 가치판단도 가능할까 라는 의심이 들고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앞으로 만나게 될 사건과 상황들에서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면 다시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이라는 가치판단에 대한 것이다.
흔하게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보고 사람들은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판단하려고 한다.
하지만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는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주관적인 가치 판단일 뿐이며 사건이나 상황은 그저 일어난 것, 혹은 유지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고, 건물이 붕괴되고, 지진이 일어나고, 태풍이 몰아치고, 홍수가 나도 그저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유/불리에 처하게 되기도 하고, 그에 따라 옳으냐 그르냐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가급적이면 내가 접하게 되는 모든 사건과 상황을 이처럼 치우침 없이 바라 보고자 노력은 하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난 이상, 나와 남을 분리시키는 것은 본능과도 같으니, 치우침이 없다함은 다시 나와 남의 구분을 없애고 모두가 하나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결국은 궁극적인 치우침의 소멸은, 인간이라는 존재와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각설하고,
과연 모든 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까?
가령 두개의 서로 다른 단음(單音)을 듣고 어느쪽이 높고 어느 쪽이 낮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
높이가 다른 두개의 나무를 두고 어느 쪽이 크고 어느 쪽이 작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
두개의 색깔을 보고 어느 쪽이 밝고 어느 쪽이 어둡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
위의 사례만 보아도, 두개를 비교하여 상대적인 고저/대소/명암을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상대적인 비교는 옳고 그름을 논할 필요가 없다.
단지 비교 대상 없이 하나만을 두고 절대적인 고저/대소/명암을 가리는 것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간혹, 치우침 없이 본질을 보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옳고 그름이 분명한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치우침이 없는 가치판단도 가능할까 라는 의심이 들고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앞으로 만나게 될 사건과 상황들에서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면 다시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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