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3일 화요일

머리 깎기와 소원 빌기

내 머리카락이 유별나다는 건 꽤나 어렸을 때 부터 알게 된 듯 하다.

변두리 동네의 허름한 이발소가 전부였던 시절, 자격증이 있었는지 모를 이발사 아저씨는 내 가 아는 유일한 이발사였다.
아버지와 일요일에 함께 가곤 했으니, 나에게 무슨 선택의 자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깎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니니...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외모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내 머리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건 머리를 깎고 난 직후에 더 심했다.

머리카락은 직모에 굵기까지 해서, 짧게 자르면 사방으로 뻗치기 일쑤였고, 그걸 잠재우려고 손에 물을 묻혀서 얼마나 눌러 댔던지...

머리카락이 이렇게 억새풀처럼 뻣뻣하다보니, 머리를 깎는 것이 고통이었고, 점점 머리 깎기를 멀리하고, 그러다보니 길어진 머리를 보고는 주위 어른들은 한마디씩 하면서 꼰대질을 하기도 했다. (남의 사정은 모르고 하는 말들... 어쩌다 기회가 되어 설명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곤 다시 꼰대질ㅠㅠ)
악순환이었다.

스프레이, 무스, 젤 따위도 많이 써 봤고, 나이가 더 들면서 머리카락도 성질 좀 죽었는지 예전만큼은 아닌데다, 나도 이젠 다른 사람 신경을 덜 쓰니 좀 많이 나아졌다.


그런데, 사실 내 머리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건 불과 몇년 전의 일이었다.

머리를 깎는 것에 트라우마가 남아 있지만, 이젠 조금 여유를 가지고 나와 내 머리, 그리고 머리를 깎는 분들을 관찰해 보니 거기에 혼재 되어 있던 것들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머리 깎는 분들은 아주 빠른 시간(10분 ~ 15분)에 한 사람의 머리를 깎고 다음 손님을 받기도 한다. 아주 눈썰미가 있거나 자주 본 사람이 아니라면 손님을 기억하고, 그 손님의 성향을 기억하고, 머리 깎는 습관을 기억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새로운 곳에서 머리를 깎게 된다면 완전한 첫 대면이니...

세상에 자신의 머리에 대해 자기 자신만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자신의 눈에서 가장 먼 곳은 다름 아닌 뒤통수다.
내가 내 정수리 부근의 머리를 보기가 얼마나 힘든지, 내 뒤통수를 제대로 보는게 과연 가능이나 할런지...
결국은 수많은 머리 깎기를 통해서, 바쁜 와중에에도 아주 간혹 내 머리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분이 있다면, 그 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기억하는 것이 제일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결국 나는 내 머리가, 직모이고 뻣뻣하고, 가르마가 왼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같은 길이로 잘랐을 경우에 왼쪽 머리가 잘 뜨며, 머리 숯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젠, 아주 당당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분에게 머리를 깎게 되면, 최대한 설명을 한다.
귀가 드러나도록 짧게 깍지만, 왼쪽이 잘 뜨니 조심해야 하고, 머리 숯이 많으니 속머리도 좀 솎아 주어야 한다고.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연말 연시를 맞이하면서 소원을 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때의 소원을 어떻게 빌었던가?
키 크게 해주세요,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 부자 되게 해 주세요,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등등.

만약에, 정말로 신이 존재해서 이런 소원을 듣고 들어 준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소원은 정말 들어 주기가 난감한 소원이 아닐까?
키를 얼마나 크게 해 줘야 하는지, 얼마나 빨리 커야 하는지, 얼굴만 길게 해도 되는지...
공부는 잘 해도 시험은 못봐도 되는 건지, 시험은 몇등을 해야 잘 하는 건지, 어떤 과목을 잘 해야 하는 건지...
마음 부자는 어떤지, 땅부자인지, 빚부자는 아닌지, 부자의 기준은 또 뭔지...

내가 정말 신이라면 이런 소원들이 얼마나 난감할지 알게 될 것이며,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이런 식의 소원을 비는 사람들은 정말로 절실하지도 않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어쩌면 소원도 점점 구체화 되어야만,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야 전지 전능한 신이라도 내가 딱 원하는 바를 이루어 줄 수 있을 것이며,
설령 신이 없다 하더라도, 나의 소원을 구체화 하는 과정이 그 소원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좋은 방법일 테니 말이다.

2018년 3월 11일 일요일

사랑과 광기(狂氣), 섹스와 폭력(暴力)

매트릭스 3편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알지 못할 이유로 지하철에 갇히게 된 네오.
네오를 구하기 위해 메로빈지언을 찾아가는 모피어스와 트리니티.
모피어스 등은 네오를 구해 줄 것을 부탁하지만, 메로빈지언은 그 댓가로 오라클의 눈을 요구한다.
결국 이 거래는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트리니티의 끝장 전술에 이르게 된다.
이 장면에서 메로빈지언은 혼자서 중얼 거린다.
"사랑과 광기는 놀랍도록 닮았다."고


사랑에 관한 세상의 찬사는 너무나 흔하다.
물론 숭고하고 보편적이며 조건이 없는 사랑이 최고의 미덕으로 꼽히지만,
그만큼 어려운 것이며 드물다.

단지, 아주 좁은 범위의 사랑,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남녀의 사랑, 인기 연예인에 대한 팬의 사랑, 반려 동물에 대한 주인의 사랑... 등에서 우리는 그 "숭고한 사랑"의 일면이나마 살짝 느끼는지 모르겠다.


이성의 사랑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매우 본능적인 것이고 이기적이다.
호르몬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놀음이다.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장치이기에, 모든 인간들에게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고, 매우 강력하기까지 하다.



섹스는, 이성간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행위이고, 사랑의 많은 속성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순간적으로는 더 강력한 면이 있어 보인다.
본능적이고, 보편적이고, 강력하고, 이기적이기도 하다.

이런 행위는, 그러나 개별 존재들로 보면, 어느 정도의 차이점을 보이기도 하는데, 다분히 사회 문화적 영향과 결합된 면, 개인적인 컴플렉스와 연관된 면들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행위가 매우 충동적이며 순간적이기에 폭력적인 성향을 다분히 띠고 있게 된다.



요즘에 들불처럼 번지는 미투 운동은, 오랜 역사적 사회적 불평등 하에서 벌어진 일방적인 성폭력에 대한 반발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운동이 남성과 여성, 강자와 약자, 갑과 을 사이의 기울어진 시소를 맞추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불평등에서 기인한 폭력적인 성행위와, 성행위 자체가 가진 폭력성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는 매우 어렵고도 민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섹스가 폭력적이지 않은 경우는, 쌍방이 원하는 바와 그 정도가 일치하고, 실제 행위에서도 쌍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를 지켜야만 하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가지고 있다 생각한다.
만약에 어느 한쪽이 조금만 선을 넘게 되면, 그 순간부터 한쪽은 가해자가 되고 반대쪽은 피해자가 되고, 그 현장은 폭력의 현장이 될 수 있다.
이런 섹스의 폭력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언제든지 "미투"당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문제는, 이런 폭력성을 알고 있다면, 누구도 선뜻 섹스를 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이다.

종족의 보존을 위해서 폭력에 눈 감을 것인가, 폭력이 없는 유토피아를 선택하고 종족이 사라지게 할 것인가.


※ 쓰고 보니 한강씨의 <채식주의자>가 다시 생각난다.
인간의 육식과 그 육식의 이면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폭력성.
생존을 위해 폭력에 눈감고 육식을 할 것인가, 폭력이 없는 유토피아를 위해 육식을 끊고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2018년 2월 25일 일요일

성인(聖人)은 있는가

혼란스러운 세상이다. 혼란스러운 시절이다.
세상의 발전 속도가 빠르다고는 하지만, 그냥 빠른게 아니라 가속도가 붙어서 점점 빨라지는 듯 하다.

지식의 발전은 인공지능이라는 꿈 같았던 기술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미래를 예측하기가 어려워질 정도이다.
열역학 제 2법칙처럼 인간들의 개개인의 자유도에 대한 욕망도 증가하면서 국가를 비롯한 다양한 집단들의 분열은 단지 시간의 문제가 되어 버린 듯 하다.
이런 급격한 변화들은 전반적인 사회의 변화 속도에도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만연해 있던 관습들은 구태(舊態)와 악습(惡習)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아마도 과거에는 최소한 한세대인 30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진행되지 않았을까 싶은 정도의 가치관 변화, 그래서 구태와 악습의 주체를 처벌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서 죄를 묻기 어려운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한 평생을 살면서 몇번씩은 잠재적 범죄자가 된 마음으로 살아야 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이제는 누구든 자신이 일상적인 생활의 한 부분으로 행했던 것들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런 걱정들을 안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Me too) 운동의 원인은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가장 큰 변화는 성적 피해를 입은 여성(혹은 남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이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 그에 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권리가 이전보다 평등해 졌으며, 소위 갑질에 대한 비판으로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도 지켜야할 최소한의 인권에 대한 인식 변화도 영향을 끼졌다 생각한다.

모든 미투 운동의 사례를 자세히 보지는 않았기에, 개별 사건들에 대한 피해자들의 폭로와 가해자들의 사죄를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은근히 나 또한 죄인은 아니더라도 비난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이런 속도의 변화라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나도 죄인이 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건 아닐지...


이 와중에도 사람들의 행태는 다분히 내로남불인 경우가 많고, 자기 모순적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간혹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청렴과 도덕을 요구하는 듯이 잠재적 가해자(아직 사실 관계가 드러나지 않은 경우도 많기에 이렇게 썼음)에게 비난을 쏟아 붓고 있지만, 그 정도의 철저한 도덕성을 지닌 사람이 익명성의 뒤에 숨어서 타인에게 인격적 살인에 가까운 모욕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내가 자주 접하는 인터넷의 공간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런 불편한 마음의 끝에 들었던 생각은 이러했다.
"아마도 부처님과 예수님이 현 시대에 나셨다 하더라도, 이 악플에 쫓겨서 세상을 등 지셨겠구나."
하기야 부처님도 예수님도 당 시대에는 일부 지역 내에서만 유명하셨을테고, 추종자들 만큼이나 많은 비판론자들이 있었으리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니, 지금과 별반 다르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지금도 과거의 성인만큼이나 뛰어나고 훌륭한 인물이 어딘가에는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과연 우리는 성인이 나타나면 그가 성인인지 알아 볼 수는 있겠는가?
아니, 어쩌면 부처님 예수님 같은 성인은 단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기로 결정(?)했기에 성인의 지위에 오른 것은 아닐까?

2018년 2월 11일 일요일

시기와 질투

시기와 질투는 비슷해 보이는 데, 과연 무엇이 다를까?

우연히 읽은 인터넷의 정보에 이런 것이 있었다.

시기는 envy, 질투는 jealousy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기와 질투에 대해서 구분을 하고 있었는데,
시기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느끼는 슬픔'
질투는 '누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느끼는 슬픔'
이라고 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시기는 '상대방'에 대해 느끼는 슬픈 감정이고, 질투는 '나'에 대해 느끼는 슬픈 감정이라는 것이다.


번역에 관해서는 조금 다른 의견들도 있다.
envy가 <시기>, jealousy는 <샘>으로 번역하고, 우리말의 질투는 시기와 샘을 다 아우르는 단어라는 것이다.


혹자는, 자주 사용되는 상황으로 구분한 경우도 있다.
질투는 주로 애정 - 특히 남녀간의 애정에 쓰이는 단어이고 시기는 그 이외의 상황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나 자신을 객관화 하게 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 가는데,
그것이 조금식 연습이 되자 내가 느끼는 감정이 과연 무엇이고, 왜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 굼금해 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러 경로를 통해 보거나 듣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대체적으로 어떤 사람에 대한 잠깐의 소개(?)만을 접한 상황에서도 극적인 호불호(好不好)를 결정 짓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면 별 문제는 없겠지만, 이상스러울만큼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고,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한 어떤 형식의 조우(遭遇)에도 기분이 좋지 않게 되는 것을 느꼈다.
과연 이런 감정은 왜 생기는 것일까를 고민하다보니, 그것이 잠재적인 시기와 질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는 사뭇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이지만, 그가 자신의 영역에서 이룬 성과를 바탕으로 누구나 원하는 보편적인 가치(돈,명예,권력,권위)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보편적인' 시기나 질투를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 것이다.

너무 억지스러운 가정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저 나를 질투심/시기심이/시샘이 많은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면 더 쉬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는 내가 종종 느끼게 되는 그 불쾌한 기분, 불안한 기분으로 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아직은 명확하게 내 감정의 근원을 파악하지 못하였지만, 이 포스팅은 그 여정의 한 부분이며 언젠가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기와 질투에 관한 또 한가지 의문은, 아주 원초적인 감정일 듯한 이 시기와 질투가, 불교의 7정(七情) - 喜 怒 哀 樂 愛 惡 辱 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2018년 2월 6일 화요일

마피아 게임

직접 해 보진 않았지만, 마피아 게임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하는 게임인데, 모종의 방법으로 마피아를 선정하고, 누가 마피아 인지는 마피아 자신만이 아는 상태.
게임이 진행되면서 마피아는 일반 시민을 제거하고, 모든 시민들이 제거 당하기 전에 마피아를 찾아 내야만 하는 게임이라고 한다.
링크 - 마피아 게임 (위키피디아)
링크 - 마피아 게임 (나무위키)


아마도 이를 컴퓨터 게임으로 만든 것도 여러가지가 있을 듯 한데, 최근에 온라인으로 여러 사람이 참여해 즐기는 게임으로 Deceit라는 게임도 있다.
게임 참가자 중 누군가는 흡혈귀이고 어둠을 틈타 사람들을 해치운다.
일반인은 흡혈귀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의심스러운 사람을 총으로 죽이거나 폐쇄된 공간에서 탈출해야 하는 게임.


뜬금없이 이런 게임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최근의 정치적인 문제들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들으며 느낀 것이, 마치 이 게임의 상황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ICBM 개발과 실험.
미국의 THAAD 한반도 배치
THAAD 배치에 따른 중국의 반발과 그에 따른 각종 보복성 조치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대북 제재에 대한 전세계적 공조 가운데 미국과 중국의 미묘한 이견
평창 동계 올림픽 개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한 조급한 조치들
이 조치들과 대북 제재의 충돌, 급격한 화해 모드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


내부의 정치적 상황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측근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 되자, 이제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각종 비리 캐기가 시작되었다.
MB의 재임 당시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많은 것들이 묻혀버렸고, 그게 살아있는 권력의 힘 때문이라 생각했을 수 있었던 것들. 너무 사소한 부분까지 들추는게 아니냐는 지적과 사소한 것으로부터 큰 비리의 실마리를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옹호론이 상존하고 있다.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가상화폐 혹은 암호화폐의 과열된 거래와 부작용에 대해 정부에서는 오락가락 정책을 발표해서 스스로의 신뢰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최순실 등에 의한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한 재판은 아직까지 진행 중인 가운데,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2심 재판에서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져서 이재용 부회장은 오랜 옥중 생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여검사가 상급자로 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문제는 흐지부지되고 오히려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았다는 폭로가 나오자, 한편으로는 법조계에서마저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논란과 전세계에 불고 있는 "미투"의 바람이 대한민국에도 불게 되었다.


이런 저런 논란거리가 많은 요즈음이다.
진보와 보수로 나뉘던 국론은, 다시 대북 강경론자와 유화론자로, 구세대와 신세대로 사분오열되고 있다보니, 이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저 의견은 달리하는 경우가 너무나 당연시될 정도이다. 어쩌면 이런 다양한 문제에 놓인 지금이, 우리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풍토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와중에 벌어지는 현상이 글의 처음에 소개한 마피아 게임과도 같은 비슷한 면이 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여론몰이를 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비방을 일삼는 것이다. 단지 이런 정도면 다양한 소리 가운데 하나라 생각하겠지만, 온라인이라는 특성을 이용해서 마치 자신의 세(勢)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거짓을 하고 있어 보인다.
여러가지 방법을 이용해서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인원이 온라인에서 가명의 여러 사람 행세를 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반복해서 노출시키고, 자신의 의견에 대해서는 호응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조작하며,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이 많은 것처럼 조작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은 이런 조작된 의견과 조작된 호응도를 보면서 어떤 것이 진실된 것이고 어떤 것이 거짓된 것인지 구별해 내야만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2018년 1월 23일 화요일

가위 눌릴 때의 느낌

종종 가위에 눌리던 때가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온 직후였는데, 잠자리가 바뀌고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라 예민한 상태여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당시에 주변 사람들에게 가위 눌리는 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해도, 그걸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는데 아주 좋은 표현을 얻게 된 것 같다.


통상, 나의 경우, 잠을 잘 때 똑바로 누워서 잠을 자곤 하는데, 가위가 눌리는 시점은 막 잠이 들려는 순간이다.
몸이 약간 붕 뜨는 느낌이 들고, 바닥에 밀착되지 않은 느낌이라 어느쪽으로 미끄러져 움직일지 몰라 불안감이 든다.
이런 느낌이 싫어서 깨어나려고 애를 쓰면 깰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
이렇게 움직이려 하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게 자신을 더 두렵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상태에서 심한 경우에는 몸이 순간적으로 미끄러지듯이 움직인다고 생각하게 된다.
대체로 매우 빠른 속도이고, 한쪽으로만 움직인다기 보다는 방향도 급격히 바뀌면서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려면, 대야에 물을 받아 두고 그 위에 스티로폼, 나무, 종이 따위의 조각을 띄워 놓았다고 생각해 보면 된다.
이제 대야를 들고 왼쪽 오른쪽 혹은 앞 뒤로 기울이면, 그리고 방향을 바꿔가며 기울이면 물위 떠 있는 조각은 아무 저항도 없이 이리 저리 움직이게 될 것이다.

가위에 눌렸을 때의 느낌은, 마치 대야의 물 위에 떠 있는 조각이 된 것과 같은 느낌이다.
누가 대야를 흔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물 위에서 이리 저리 움직이게 된다. 멀미가 날 것 같은 그런 상황이다.


가위 눌림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가위에 눌렸다가 경험한 황당한 사건 몇가지를 적어 보겠다.

잠이 얼핏 들었다 생각했는데, 머리맡의 창문에서 엄청난 천둥과 번개, 폭우가 쏟아지는 징후를 느꼈다. 천둥 소리, 번개의 번쩍임, 빗소리 등등. 필시 요란한 폭우가 있구나. 다시 잠이 들었다가 얼마가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새벽에 눈이 떠졌고, 빗소리 기억이 나서 밖을 봤지만 밖은 아주 조용하고 맑았다. 비라고는 온 흔적도 없었다.

어느 날 가위에 눌렸는지 괴롭 던 중이었나 보다. 깨어나려 애쓰다 포기하다 보니 그냥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잠이 깬거였는지 눈이 떠지고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천장의 한 모서리에 웬 여자가 매달려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최근에 겪은 가위 눌림인데, 좀 색달랐다.
작년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허리가 많이 아파서, 예전처럼 똑바로 누우면 오래 자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옆으로 누워 자는 경우가 많았다. 옆으로 누워자면 가위에 눌리는 경우가 없었던 것 같아서 이상하다는 것인데...
왼쪽으로 누워서 몸을 약간 웅크리고 잤다.
겨울이라 이불을 잔뜩 끌어 당겼기에 얼굴의 반은 이불에 덮인 상황.
잠이 들었는데, 너무도 선명하게 무언가가 내 광대뼈 부근을 꾹꾹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이어서 오른쪽 갈비뼈 부근을 무언가가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가위 눌림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새로운 느낌이라 많이 황당했다.

아, 이와 비슷한 시기에 겪은 또 하나는..이 경우와 비슷한 자세로 자고 있었는데, 꽤 거슬리게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윗집이나 아랫집에서 누군가 예의도 없이 새벽에 발망치질을 하나보다 했는데 기다려봐도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 나서 일어나려고 웅크린 몸을 펴는 순간 쿵쿵거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가만 보니 최근에 심장이 유난스럽게 두근거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잠자는 중임에도 심장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웅크리고 있었으니 이 소리가 더 잘들려 그랬나보다 싶기는 하지만 그 때 들었던 소리는 심장소리라 하기엔 너무나 크게 들렸었는데, 이것도 가위 눌림으로 인한 환청이었는지 싶다.

2017년 12월 6일 수요일

성취(成就)의 조건

1. 욕망, 하고자 하는 마음, 발심

2. 능력,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힘, 문제나 장애를 해결하는 방법이나 기술에 대한 지식

3. 환경, 시기나 위치 혹은 자연적인 조건. 일이 진행되는 것에 도움이 되는 주변의 갖가지 상황들. 혹은 일의 진행에 방해가 되는 상황을 벗어난 상태 등.


1번은 사람마다 각자가 원하는 바가 다르고, 자신이 하고자 마음을 먹는 순간 부터 자연스럽게 욕망을 가지게 되므로 특별한 방법은 필요하지 않다.
단지 얼마나 절실하게 원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3번은 그 요소가 너무 다양하고 예측이 어려운 점도 많아서 종종 운(運)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그치지 않으니 운에 의존하는 요소들이 점점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다.

2번이 인간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다.
대부분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이런 능력을 끌어 올리기 위함이고, 누군가에게 배우고 듣고 경험하는 것도 이를 위한 것이다.